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분 퀵서비스


여러분의 기억 속으로 책을 배달해드리는 2분 퀵서비스! <벤야멘타 하인 학교> 시작합니다.


중학생이 읽기엔 약간 어렵고, 고등학생들에겐 어떻게 다가갈지 가늠이 잘 안되는 책입니다. 뒤에 소개할 서술양식 때문에 호불호가 많이 갈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로 고전으로 불리는 책들이 다 그렇죠...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두 단어로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제가 꼽은 키워드는 “중2병”입니다. 이 소설의 문제에서, 이 책의 제목이면서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야콥 폰 군텐의 정신상태를 가리키기에 가장 적당한 말이 아닐까 생각하며 골랐습니다.


<벤야멘타 하인 학교>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인데, 소설의 중심을 차지하는 내용은 사건이 아니라 군텐의 의식의 흐름입니다. 아주 집요하게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생각에 가닿았는지만 이야기하고 있어서, 실제로 그의 주변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구조로 쓰여있다는 걸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생각이 되는대로 튀다보니 일관성이나 지속성이 없고, 반대되거나 모순되는 감정의 진술이 시도때도 없이 등장합니다. 때로는 주인공이 이야기하고 있는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지조차 의심스러워지는 지점도 있습니다. 군텐과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매우 이상한 방식으로 대화를 나눕니다. 대화라기보단 독백에 더 가까울 것 같은데, 군텐에게 실제로 건넨 말인지 아니면 군텐이 그렇게 해석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인지도 추정하기 대단히 어렵고요. 이런 상태를 “자기 자신에게 매몰돼있다”고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군텐의 이름으로 미뤄보건대 그는 아마도 예전엔 잘나갔지만 지금은 몰락한 귀족의 자식인 것 같습니다. 그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이유가 없어 납득할 수 없는 사회적 압력”의 끝판왕, 즉 “아무 것도 배우지 말고 하지 말아라”라는 벤야멘타 학교의 지침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아직도 한국어판 제목처럼 이 학교가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지만, 최소한 이 학교가 생각하기를 멈추라고 계속해서 지시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걸 가장 잘 드러내는, 주인공의 거울쌍으로 존재하는 캐릭터가 크라우스겠죠. 명령을 잘 따르고, 지시에 대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불만을 표출하지 않고, 그렇게 해서 결정적으로 생각하는 주체가 되기를 포기한 상태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상태는 역설적으로, 주인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모든 걸 처리해야 하는 하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덕목이 되겠죠.


이렇게 자기 내면으로 가라앉아버리는 상태는, 성장 과정에서 겪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의 과정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고,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이유가 없어 납득할 수 없는 사회적 압력을 실천해야만 하기도 하고,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지만 동시에 어느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나만의 세계를 쌓아 나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은, 이렇게 상충하는 욕구들로 가득한 상태가 바로 중2병에 걸린 상태 아닐까요?



2제 아이랑 투게더


더 재미있게 읽을 당신에게 보내는 애드온 서비스, 2제 아이랑 투게더입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이 학교가 정말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가 맞다면, 자신에게 매몰된 군텐의 정반대편격인 인물을 제시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몇 년 전 노벨문학상을 수상해서 유명해진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입니다. 1930년대 영국의 친독일파 귀족의 집에서 집사로 일하는 사람이 주인공인데, “주인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주인의 지시를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신조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사랑에도 실패하고, 주인집에 드나들던 나치당의 장교들을 대접해주면서 2차 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죠. 전쟁이 시작되면서 나치에 우호적이었다는 이유로 주인은 몰락하고, 그 귀족의 집은 미국의 기업가에게 팔리면서 주인공은 일자리를 잃고 맙니다. 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는 여전히 “나는 주인의 명령을 받아 일하는 사람이고,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계속해서 생각합니다. 같은 제목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주인공 역을 맡은 안소니 홉킨스의 영혼없는 연기가 끝내주는 꽤 볼만한 영화입니다. 마치 <벤야멘타 하인 학교>의 크라우스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을 바꾼 공 - 공놀이는 어떻게 인류를 진화시켰나 세계사 가로지르기 19
김은식 지음 / 다른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분 퀵서비스


여러분의 기억 속으로 책을 배달해드리는 2분 퀵서비스! <세상을 바꾼 공> 시작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스포츠”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종목을 말해보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공을 갖고 노는 게임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축구, 야구, 농구를 비롯해 테니스, 골프, 탁구, 미식축구 등등등. 우주인이 지구에 와서 우리들을 본다면, 그들은 “호모 사피엔스는 둥글고 탄력있는 물체를 보면 매우 흥분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왜 “그깟 공놀이”에 미쳐있는 것일까요? 이 종목들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우리 곁에 있는 공놀이들의 기원과 그 사회문화적 의미가 궁금하신가요? 공을 만드는 소재의 발전에서부터 민주주의 평등사회와 민족주의와 연관된 정치적 상징에 이르기까지. 더 이상 “그깟 공놀이”가 아닌 인류와 함께해온 공놀이의 여정이 궁금하신가요? 아이와 함께, 부모님과 함께, 공놀이 뒤에 잠깐 쉬며 <세상을 바꾼 공>을 읽어보세요. 이 책을 읽은 뒤엔, 공과 공놀이를 바라보는 여러분의 시선이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과 이 책을 읽으며 수업을 해보았는데, 정치와 스포츠가 연관되는 부분이 어렵다는 의견이 꽤 많았고, 저도 학생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추상적이지만 소속감이 느껴지는 “사회”라는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시점이 되어야 이 책의 내용이 수월하게 이해가 될 것 같은데, 아마도 고등학생 정도면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두 단어로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제가 꼽은 키워드는 “해태 타이거즈”입니다. 기아 타이거즈 아니고, 해태 타이거즈입니다. 저는 기아 타이거즈도, 해태 타이거즈의 팬도 아니지만, 이 팀에서 오래 뛰었던 투수 이강철 선수, 현 KT 위즈 감독님의 팬입니다. 또한 5월 광주 민주화운동 주간에, 광주를 연고로 삼고 있는 해태 타이거즈를 다루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선수가 소속돼있던 팀, 그리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한 헌정방송으로 2종 보통 키워드를 꾸려볼까 합니다.


외국에 민주주의와 저항의 상징인 팀으로 FC바르셀로나가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정치적 상징이 강한 구단을 꼽는다면 누가 뭐라해도 해태 타이거즈일 것입니다. 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촉구 시위를 무력으로 짓밟고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라고 쓰고 환심을 사기 위해 라고 읽는) 이전 박정희 정부에서 채택해왔던 강력한 문화적 억압정책을 서서히 완화하기 시작합니다. 책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이른바 영화, 스포츠, 성을 줄여서 말하는 3S 정책으로 유명한, 통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문화적 전략이었죠. 프로야구의 개막도 3S 정책의 일부였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광주를 연고지로 삼고 출발한 해태 타이거즈는, 지역차별과 정치적 억압을 스포츠로 넘어서고자 하는 호남인들의 열망 전체를 담은 상징이 되었습니다. 현재까지 전라남북도를 다 합쳐도 광역시도 하나, 프로야구팀도 하나인 것을 보면 다른 지역과의 경제적 격차가 얼마나 벌어져있는지 알 수 있죠. 프로야구 출범 이전 아마추어 야구에서 강팀으로 손꼽혔던 광주일고 야구부의 인력을 거의 그대로 흡수한 해태는 82년 창단 이후 97년까지 15년 동안 무려 9번이나 우승팀이 되어 호남 사람들의 마음을 약간은 어루만져주었습니다.


자료를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해태 타이거즈 시절 응원가 중에 하나가 이난영 선생의 <목포의 눈물>이었다고 합니다. 원곡은 잘 모르지만 리메이크 곡을 통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루시드 폴의 리메이크 버전을 제일 좋아하는데, 배경음악으로 깔아주시면 좋겠습니다.



2제 아이랑 투게더


더 재미있게 읽을 당신에게 보내는 애드온 서비스, 2제 아이랑 투게더입니다.


이 책과 같이 보시면 좋을 영화를 하나 들고 왔습니다. 2002년에 개봉한 한국영화 <YMCA 야구단>입니다. 네이버에서 1천원에 구매하실 수 있고요, 이 책의 4장에 등장하는 한국 최초의 야구팀인 YMCA팀의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감독은 김현석인데, 연출작품 중에 야구 영화가 세 편이나 있고, 최근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연출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영화의 주연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정말 화려한데요, 김혜수, 송강호, 황정민, 고 김주혁 배우입니다.


스포츠와 함께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점은 이 책에서 계속 언급되는 주요 주제 중에 하나인데요, 이 “근대”라고 하는 것이 어떤 특성을 지니는 시대인지를 이 영화 속에서 그럴듯하게 포착해내고 있습니다. 왕조국가 조선에서 정신적으로 벗어나는 양상, 신분 없는 평등 사회, 엄격한 규율과 규칙에 따라 훈련하고 움직이는 “스포츠”로서의 운동, 구성원 사이의 갈등과 반목을 넘어서 하나의 유기체로서 움직인다는 팀 스피릿, 일제강점기에 식민통치를 당하는 한국인들의 민족 감정을 대변하는 상징적 집단으로서의 야구팀 등 여러 복잡한 요소를 편향 없이 세련되게 그려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제 20년이 다 되어가는 영화인데다, 명작이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부족해서 약간은 오글거리고 낡은 티가 나긴 합니다. 이런 점들만 약간 참고 넘기신다면 여러가지 면에서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영화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2분 퀵서비스


여러분의 기억 속으로 책을 배달해드리는 2분 퀵서비스! <철학자와 늑대> 시작합니다.


이 책을 쓴 마크 롤랜즈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논문을 쓰는 철학자입니다. 처음 강사생활을 시작하던 시절 아름다운 외모에 이끌려 늑대 한 마리를 기르기로 결정하고, 브레닌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리고는 브레닌이 늙고 병에 걸려 안락사하기로 결정할 때까지 11년 동안 함께 지냅니다. 훈련시키면서 느낀 점, 자신이 채식을 시작했을 때 늑대도 채식을 시켜야하는가 생각했던 경험, 산책 중에 길을 잘못들어 전기철조망에 감전됐던 사고, 다른 개들이나 다른 사람들 나아가서 세상과 브레닌이 관계 맺는 방식, 오랜 기간 동안 병간호를 했던 상황 등 늑대 브레닌과 함께 지내면서 생긴 에피소드는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선사하고, 이런 에피소드를 통해 깨달은 것들을 솔직하게 서술함으로써 롤랜즈는 철학적 고민과 사유의 깊이를 더해갑니다. 늑대를 통해 사람을 이해하는 여정을 담은 철학자의 일기장, <철학자와 늑대>입니다.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두 단어로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제가 뽑은 키워드는 “실존주의”입니다. 인간의 조건, 자유, 시간, 죽음 등과 연관된 아이디어를 많이 제시한 철학사조이고, 이 책의 2장 “나의 늑대가 되어줄래?”, 8장 “시간은 롤렉스 시계가 아니잖아”, 9장 “꿈 속에서 다시 만나자” 에서 다루는 내용이기도 하죠. 이 책을 쓴 마크 롤랜즈는 늑대의 행동방식을 관찰하면서, 늑대가 세상을 대면하는 방식이 어쩌면 실존주의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실존주의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책의 목차에도 나와있는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일텐데요.


사르트르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에드문트 후설이라는 독일 철학자를 언급하고 가야합니다. 책에서도 등장하는 사람이죠. 후설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바깥을 향해 있다고 해요. “나는 생각한다”는 말은 언제나 생각의 내용을 포함하며, 아무런 대상 없이 성립되는 정신적 활동은 없다는 뜻이죠. 만약 인간이 정신적 존재라면, 인간의 존재 또한 정신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정신의 활동을 구성하는 대상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성될 것입니다. 인간 정신의 이런 특성을 후설은 “지향성”라고 합니다.


이런 후설의 주장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프랑스에 소개하면서 유명해진 사람이 사르트르입니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철학자들은 개별적인 존재들에 관해 생각할 때 “종의 특성”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인데, 인간의 다른 특성은 동물이나 식물과도 공유하는 반면 이성적 사고와 영혼의 소유는 다른 동물에게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고유한 특성은 이성적 사고 능력과 영혼의 소유라는 식입니다. 이렇게 특정한 종을 규정하는 특성을 본질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라 철학자들은, 가장 완전한 인간은 이 본질을 가장 잘 구현하는 인간이고, 인간의 삶은 비인간적 활동을 줄이고 인간적 활동을 늘리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즉, 동물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인간의 존재 양식이며 자유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이것이 인간의 존재 양식에 관한 잘못된 파악이라고 주장합니다. 후설의 논의를 이어받은 사르트르는 정신이 근본적으로 수동적이고 외부의 대상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이성적 사고 능력”이나 “영혼” 등의 본질을 지니고 태어나는 사건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는 주변과 맺는 관계에 의해 인간으로 “만들어집니다.” 나아가 서로 다른 환경과 관계를 맺고 있는 개별 존재들은 종적 특성으로 한데 묶을 수 없을만큼 수많은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니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종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닌 관계의 개별적 산물로서의 존재 양식을 가리키는 사르트르의 용어가 바로 “즉자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는 관계에 의해 무기력하게 규정되기만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르트르의 관점에선, 최소한 인간만은 이러한 관계를 자신에서부터 출발해 규정할 수 있는 능력, 존재 방식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능력은 지금 내 존재가 주변 환경과 관계맺은 방식을 통해서 생성되었다는 반성에서부터 출발해, 대상으로서의 세계 속에서 내가 어떤 부분에 관심을 쏟을지 선택하고 결단하는 의지로 나아갑니다. 사르트르에겐 이렇게 관계를 맺을 대상을 선택하면서 형성하는 이러한 활동이 인간의 자유의 핵심이며, 이런 능력을 가진 존재인 인간을 “대자 존재”라고 부릅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실존주의 시”로 흔히 언급되는 김춘수의 <꽃>이 이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내가 “꽃”이라고 부르기 전에 그 대상은 세계 전체와 구별되지 않는 ‘그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의를 기울여 “꽃”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 꽃은 세계 전체로부터 떨어져나와 내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로 자리잡습니다. 동시에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꽃을 내 세계로 받아들여 변화한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나와 같지 않은 새로운 존재가 되죠. 이렇게 인간은 대자 존재로서, 나의 세계와 세계 속의 나를 동시에 생성하는 끊임없는 과정에 놓여있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 마크 롤랜즈는 단지 인간 뿐만 아니라 늑대도 이런 생성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제 아이랑 투게더


더 재미있게 읽을 당신에게 보내는 애드온 서비스, 2제 아이랑 투게더입니다.


제가 추천해드리고 싶은 책은 피터 고프리 스미스의 <아더 마인즈: 문어, 바다, 의식의 기원>입니다. 우선 철학자가 쓴 동물 관련 에세이라는 점에서 <철학자와 늑대>와 공통점이 있고요. 문어를 다뤘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문어는 최근 동물의 지능이나 진화를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흥미를 끄는 동물인데요. 일단 지능이 매우 높고 의식적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신경세포의 분포가 육상생물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늑대와 함께한 삶이 인간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고 말하는 <철학자와 늑대>처럼, <아더 마인즈> 또한 문어를 관찰하면서 인간의 의식과 지적 활동이 어떻게 진화해왔고 작동하는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철학적 내용 이외에도, 진화를 다룬 다른 책에서는 상대적으로 적게 다뤄지는 해양생물의 진화에 관한 정보, 문어의 행동에 관한 다양한 실험에 관한 설명이 흥미를 끄는 책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빌리 엘리어트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분 퀵서비스


여러분의 기억 속으로 책을 배달해드리는 2분 퀵서비스! <빌리 엘리어트> 시작합니다.


소설 <빌리 엘리어트>는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만든 같은 제목의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기반해 영국의 소설가 멜빈 버지스가 재창작한 소설입니다. 주인공 빌리 엘리어트는 탄광촌에서 광부인 아버지 재키 그리고 역시 광부이면서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형 토니와 함께 사는 12세 청소년입니다. 권투 수업 중에도 우아한 동작을 생각하며 옆에서 진행되는 발레 수업에 눈길을 계속 주던 빌리. 혼자서 몰래 발레 동작을 따라하다가 발레 교사인 윌킨슨 선생님에게 그 모습을 들키고 마는데, 선생님은 빌리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고 발레를 가르치기 시작하죠. 하지만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는 여성들이나 하는 발레를 빌리가 배우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탄광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 때문에 벌어진 파업으로 인해 학원비를 지원하는 데 더욱 어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빌리의 강한 의지와 윌킨슨 선생님의 설득에 아버지 재키는 마음을 바꾸었고, 빌리는 왕립 발레 학교 입학을 위한 지역 오디션을 준비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한 오디션 직전, 형 토니는 파업 시위 도중 경찰을 다치게 한 죄로 재판에 넘겨지고, 가족의 재판에 참석해야 했던 빌리는 지역 오디션에 불참하고 맙니다. 윌킨슨 선생님은 크게 실망했지만 아직 런던에 직접 가서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겨울에 난방조차 할 수 없어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인 피아노마저 부숴 땔감으로 사용한 빌리의 가족을 포함해, 탄광촌의 모든 사람들이 오늘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 이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는 마을회의에서 빌리를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특히 방금 재판을 받아 마을 사람들의 영웅으로 떠오른 토니의 연설 덕분에 빌리는 가족들과 함께 런던으로 가 오디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빌리는 오디션에 합격했을까요? 탄광촌 사람들은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산업구조의 급변에 직면해 쇠퇴해가는 1970~80년대 영국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계급 격차, 젠더 갈등, 가족과 공동체의 역할, 성장기 청소년의 성정체성 고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를 가로지르는 명작 소설, <빌리 엘리어트>입니다.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두 단어로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제가 꼽은 단어는 <지역문화>입니다. 영국에서 석탄은 산업혁명 시기부터 가장 중요한 자원 중 하나였습니다. 전세계 다른 모든 지역에서 점진적인 경제적 발달이 이뤄져 산업혁명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영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이유가 가까운 곳에서 석탄을 캐올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역사학자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탄광지역은 가장 빨리 공업화된 지역입니다. 일자리가 생기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사람들이 모여들면 문화가 생겨나죠. 이렇게 이른바 “노동자 문화”가 최초로 생긴 지역에서 발생한 소설 속 사건들이 보여주는 문화적 단면을 통해, 우리나라의 공업화된 지역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해볼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주인공 빌리를 갈등으로 몰아넣는 것은 권투와 발레라는, 성별에 따라 이분화된 아이들의 선택지입니다. 나는 발레가 더 좋아보이는데 아버지와 형은 내게 권투를 배우라고 하고, 권투를 할 때에도 “요리조리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현대적으로 하고 싶은데 이 사회는 “정정당당하게” “남자다운” 옛날식 복싱을 선호합니다. 이런 이분법은 성장하고 난 뒤에 아이들이 어떤 직업을 가지면 좋은지 판단하는 사회의 선호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권투를 배우는 이유는 권투 선수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아버지 재키가 반복하는 말처럼 “빌리 또한, 내가 했고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했던” 광부 일에 적합한 강인한 체력과 태도를 갖기 위해 훈련하는 과정입니다. 광부에게 “요리조리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일은 거의 필요하지 않을테니까요.


반면에 여자 아이들이 발레를 배우는 이유는, 적어도 제가 읽은 경험으로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윌킨슨 선생님이 “중산층” 가정의 구성원으로 등장한다든가, 런던에서 잘 사는 사람들이 배우는 게 발레라는 식으로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가 생각하고 있었고 발레 학교 입학과 교육에 실제로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드는 등의 설정을 보면, 권투와 발레라는 소재는 계급과 경제적 격차에 관한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상상력을 약간만 더 발휘해보자면, 이 탄광촌 공동체의 남성들에겐 중산층이 가져야 할 여러 특성이 불필요하거나 낮게 평가받는 데 반해, 여성들에겐 탄광촌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 못지 않게 중산층이 가져야 할 우아함 같은 덕목 또한 가져야한다는 문화적 압력이 존재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발레를 하는 빌리 그리고 빌리의 친구이자 여장을 좋아하는 크로스 드레서인 마이클은 이런 지역/노동자 문화의 경계에 위치한 캐릭터입니다. 이 둘은 "호모"라는, 남성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할 정도로 탄광촌 사회의 성역할과 편견을 그대로 받아들인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좋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빌리는 발레 학교 오디션을 받겠다는 소원을 마을 사람들로부터 공인받은 반면, 마이클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처지라는 점은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요.


“탄광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일인 것 같기도 하지만, <빌리 엘리어트>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광부입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그 동네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광부라면, 광부들의 모임은 경제활동을 하는 마을사람 전체의 모임과 차이가 거의 없겠죠? 그래서 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가 거의 일치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한국의 주요 도시에선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기도 합니다. 한 동네 사는 사람이 모두 광부이거나, 한 회사의 회사원이거나, 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거나 하는 경우 말이죠. 이렇게 한국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한 커뮤니티 안에 살아가는 것을 소셜 믹스, 사회적 계층 혼합이라고 하는데요.


돈이 없는 빌리네 가족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주는 장면이 제 눈에 띈 이유는 이 사실과 이어집니다. 마을회관에서 공동체의 중요한 문제를 심사하고 의결하는 풍경 자체는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일은 아니지만, 이 회의에서 "누구누구네 집 아들 유학비용을 모으자"는 내용을 논의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낯선 풍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소설에서도 잘 드러나듯 사람들의 모임이 사실상 노동조합의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즉, 파업에 참여하는 광부 노동조합이 소설의 중요한 배경인 이유는,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가 조합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광부 노동조합 자체가 이 소설의 문화/정치/경제/사회적 요소가 유지되도록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노동조합는 대기업 공장 노동자들이 결성한 이익집단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유럽에서 상당수의 노동조합은 보험이나 연금 업무도 자체적으로 집행하는 등 동업자 공동체의 기능도 같이 수행합니다.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이유로, 중세 길드의 전통을 노동조합이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길드란 중세에 있었던 같은 종류의 제품을 생산하는 장인들의 공동체입니다. 흔히 역사나 경제학에서 길드는 공급을 독점해 가격을 통제하고 기술을 공개하지 않는 등 경제의 발전을 방해한 집단으로서, 자본주의, 공장에서의 대량생산, 시장경제의 발달과 함께 그 힘을 잃어 사라진 경제주체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길드가 관리하는 영역은 생산과 판매에 국한되지 않고 그보다 훨씬 더 넓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생활밀착형 보험과 연금입니다. 길드 구성원들은 길드에 소속된 댓가로 원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판매가격을 보장받으며 다른 곳에서 개발된 선진 기술에 대한 정보를 거의 댓가없이 받을 수 있었는데, 이에 대한 보상으로 길드에 회비를 냅니다. 길드는 이 회비를 이용해 부상을 당해 일을 할 수 없게 된 길드원에게 생계비를 지급하거나,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은퇴한 장인에게도 돈을 주었습니다. 일종의 상호부조라고 할 수 있는데요. 노조 장학금이라거나 노조 연금보험, 노조 상조회 같은 이름이 낯설지 않고, 탄광촌에서 빌리의 일을 처리하는 게 감동을 주는 일회성 이벤트처럼 보이기보다는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 가운데 빌리의 안건이 올라간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2제 아이랑 투게더


더 재미있게 읽을 당신에게 보내는 애드온 서비스, 2제 아이랑 투게더입니다.


<빌리 엘리어트>를 재미있게 보신 분들에게 무엇을 추천해드릴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영화 두 편이 생각났어요. 두 개 모두 영국을 배경으로 할 뿐만 아니라 영국의 사회상을 통해 계급갈등과 문화격차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인데요. 한 개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영화이기 때문에 아이랑 같이 보는 걸 권해드릴 수 없어요. 나머지 하나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좌파 성향 감독이라고 평가받는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15세 등급이고, 복잡한 상징 해석이 필요없는 아주 직관적인 영화라 아이와 함께 보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늙은 목수 다니엘와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케이티의 일상을 비춰줍니다. 여러 측면에서 <빌리 엘리어트>와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요. 다니엘을 통해서 산업구조, 경제정책, 사회문화의 변화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어려운 상황에 처하는지 보여주고, 케이티를 통해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의 시선이 얼마나 뿌리깊고 심각한지를 보여줍니다. 이 둘의 삶을 제대로 보듬어주지 못하는 영국 사회와 국가 행정 체계에 대한 비판도 함께 담고 있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위협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이 위험에 민감한 시절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전세계에서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매일 병에 걸리고, 죽어가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내게 병을 옮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요.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대체로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인간의 특성 때문에 이런 도덕적인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지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을 자신에 대한 잠재적인 위험 요소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이처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시기는, 제가 기억하는 가까운 과거에는 없었던 것도 같아요.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팡세>에서 운명을 건 도박을 제안합니다.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모르겠다면, 네 운명을 판돈삼아 계산해보라고요. 신이 있다에 걸거나, 없다에 걸거나. 있다에 걸었는데 신이 실제로 있다면, 내 영혼은 종말의 그 날에 구원을 받습니다. 반대로 없다에 걸었다면, 불경죄로 영원히 타오르는 지옥불에서 고통받겠죠. 신이 있다에 걸었는데 실제로는 신이 없다면, 잘못된 믿음을 지니긴 하겠지만 구원도 없고 지옥불도 없고 천벌도 받지 않을테니 사는데 그닥 불편한 것은 없을 겁니다.


반대로 없다에 걸었다면, 나는 참된 믿음을 갖겠지만 신이 없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곤 <팡세>를 읽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어느 쪽에 네 운명을 걸 것이냐?“신 존재 증명에 관한 도박사 논증”이라고 부르는, 파스칼 식의 신 존재 옹호론입니다.


사상의 역사의 맥락에서 이 주장은, 선택과 기댓값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제시해 현대적인 확률 이론의 선구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바이러스라는 잠재적 위협과 불신의 공개적 표현이라는 현실이 뜨겁게 타오르는 지옥불처럼 도래한 이런 때엔, 수학이라기보단 심리학처럼 읽힙니다. 사람들이 위협을 대면하고 대처하는 방안을 평가하는 방식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도면으로서도 아주 훌륭하다는 말입니다. 파스칼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축복을 내리는 대신 협박의 칼날을 휘둘렀습니다.


한때 중국인의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중국인의 입국을 금지하지 않아서 지금처럼 이렇게 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한 바이러스라고 부르며 중국인을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바이러스가 창궐했으니 중국인들이 바이러스를 확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죠.


중국인을 막았는데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았다면, 그건 중국인을 접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중국인을 막았어도 바이러스가 퍼졌다면, 그건 중국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바이러스를 퍼뜨렸기 때문일 것이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 밖에 있어 어쩔 수 없는 사건이었겠죠. 반대로 중국인을 막지 않았는데도 바이러스가 퍼졌다면, 그건 중국인을 막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중국인을 막지 않았어도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았다면, 그저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아 다행일 뿐인 것이죠.


이렇게 이야기하곤, 입국 금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느 쪽에 네 목숨을 걸 것이냐? 파스칼 이후에 훨씬 더 발전된 확률과 통계 이론에 기반을 둔 연구들에서 “입국금지보다는 검역강화가 바이러스 확산을 막을 확률이 xx% 더 높다”고 말해도, 그들은 항상 불투명한 백분율보단 확실한 도박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점을 칠 줄 알지만 점쟁이를 무척 싫어합니다. 불투명한 위험을 말하며 자신들의 안정을 보장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잘 된다고 말했는데 잘 되면 그건 점쟁이의 신통력이 아니라 내가 잘 해서 그런 것인데, 잘 안되면 신통함이 없는 가짜의 말로 남겨지겠죠. 반대로 위험을 경고한다면 상황이 반대로 펼쳐집니다.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점쟁이의 조언 덕분에 위험을 피한 것이고, 위험한 일이 일어난다면 영험한 점쟁이가 되고요.


점쟁이는 파스칼처럼 우리의 지적 능력만 마비시키지 않습니다. 액땜을, 부적을, 굿판을 제시하며 우리의 지갑을 노립니다. 나에게 돈을 내면 화를 피할 수 있다는 점쟁이의 말을 따른 덕분에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점쟁이의 능력이고, 위험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으로 둔갑합니다. 그 말을 거역해서 위험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내 책임이 되고, 일어나지 않았다면 언젠가 예언되었던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지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파스칼적 상황 때문에 언제나 점쟁이에게 패배하고 맙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패배한 대한민국의 모든 번화가 위엔,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 모르겠는데 돈을 받고 있는 역술인의 단칸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가장 오래된 점술책인 <주역>은, 고대 사회에서 제사장이자 왕인 사람들이 점을 치고 해석하는 방법, 점술의 결과와 그에 따른 사건의 발생 추이를 정리해놓은 책입니다. <주역> 또한 점술책이기에 조심해라, 삼가라,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라 등등 무언가를 금지하는 메시지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심스러움은 파스칼 식의 내기와는 맥락이 다릅니다. <주역>이 만들어진 시기, 왕은 형식적으로는 개인의 운명을 내다보려 점을 치지만, 제정일치 군주제 사회에서 왕의 운명이란 곧 그 공동체 전체의 운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위대한 선조들은 왕 개인의 사적인 목표보다 왕으로 대표되는 공동체 전체의 안정이 훨씬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주역>의 조심스러움은 그 결과물입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개인이 살아가는 방식에 관해 뭔가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대의 왕 만큼이나 운명을 건 도박을 생각보다 많이 하고, 그때마다 위험의 심리학의 손짓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율라 비스의 <면역에 관하여>는 아들에게 백신을 놓아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여정을 보여주는 에세이입니다. 걸릴지 안 걸릴지 모르는 불확실한 병을 예방하기 위해 확실히 아픈 주사를 내 아들에게 꽂아야 하는 것인가, 만약 꽂았다가 병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의학적 확률은 100만분의 1이라고 하지만 그 1에 내 아들이 속하면 그 확률에서 “100만분의”는 지워지는데, 인체가 갖고 있는 면역 시스템이 잘 작동한다면 백신 없이도 병을 퇴치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에세이스트는 주변에 자문을 구할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을 충실히 활용해 심리에서 과학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의 그리고 우리의 주변엔 여전히 까다로운 임상을 통과한 약은 비싸다고 말하면서 “면역력”을 늘려준다는 건강기능식품은 꼬박꼬박 사서 챙겨먹는 사람들이 아직 많습니다. 치료할 수 없다고 알려진 병에 대한 절망을 담보로 소용없는 약과 근거없는 자연의 힘을 강요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습니다. 결국 진단명 미상이 되어버린 이름모를 병에 걸려 아버지가 입원했을 때 병상 머리맡에 놓인 것은, 약 복용 지도서도 입원환자 주의사항도 아닌 온갖 스님들과 무당들의 전화번호였습니다.


공포는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문장은 오래된 격언입니다. 이번 사태 초기에 울려퍼졌던 “방역 영역에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위험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더 늘렸을 뿐만 아니라 허용되는 행동의 폭을 비과학적인 영역까지 포괄하게끔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입에다 소금물을 뿌리는 파국을 불러오는 것을 보았고, 바이러스의 숙주가 되어버린 비밀 사교단체에 대한 (그들의 행위에 대한 응보에 걸맞다는 생각은 들지만) 끊임없는 비난도 이어졌죠.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요.


물론 우리는 노력과 행운으로 상황을 잘 넘긴 편에 속하지만, 이제는 다른 나라들이 공포에 전염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바이러스의 특성 때문에, 여전히 우리나라에 병이 또 들어와 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짧은 몇 달 간의 경험으로 위험의 정도를 알게 되었으며, 과하다 싶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인 조치만 취할 수 있을 정도로 알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능력이 허용하는만큼 이 병과 바이러스를 과학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완연한 봄기운에도 마스크를 써야 해서 숨 쉴 때마다 땀이 차는 입술과 볼에 약간 짜증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젠 위험에 대한 공포가 아닌 과학과 지식이 알려주는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보여서 다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