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9
플라톤 지음, 이기백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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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크리톤』에서 크리톤과 소크라테스가 맞붙는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한 문장으로 쓸 수 있다. “탈옥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크리톤은 친구인 소크라테스가 죽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실력자들을 매수해 그를 아테네 밖으로 빼내려한다. 반대로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의 주장에 맞서 자기가 여기에서 빠져나가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법’의 목소리를 빌어서(때로는 스스로) 답변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근거가 끼어든다. 정의에 대한 판단은 사람들의 평판에 좌우되지 않는다는(즉 다수의 의견과 무관하게 객관적이라는) 것(47d), 그냥 사는 것 보다는 훌륭하게(즉 정의롭게, 정의의 원칙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47e), 해를 끼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49a), 정의롭지 못한 일은 어떤 경우에도 해선 안된다는 것(49a), 개인의 판단에 의해서 법의 절차에 따른 처분을 지키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행위하는 것은 공동체를 해치는 일이라는 것(50b), 절차에 따른 처분은 합당한 처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 합당한 처분을 지지하는 공동체의 규칙을 꽤 긴 시간 동안 스스로 준수하고 존중해온 일관성을 해치면 안된다는 것(53b).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탈옥을 거부하고 죽기로 결심한다.


소크라테스가 정말로 감옥에서 크리톤과 저런 대화를 나누었는가 여부와는 별개로,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하는 근거들은 크리톤이 그에게 하는 말에 대한 반박이다. 아닌게 아니라, 크리톤은 이 대화의 첫 구절에서부터 탈옥이 사람들의 평판을 깎지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탈옥시키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쟤는 친구보다 돈이 좋은갑다”라고 수군대며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의 평판이 깎일 것을 염려한다(44d). 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아버지 없느 자식이라는 편견(이것 역시 평판의 일종이겠지) 속에서 살아갈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곁들인다. 여기에 살아남는 것 또한 ‘용기(즉 훌륭함)’를 보여주는 행위로서 충분하다는, 소크라테스로서는 솔깃할 말도 빼놓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논변과 별개로, 우리는 크리톤에게서 일상인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평판은 중요하다. 소문도 중요하다.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우리는 말의 무서움을 안다. 그래서 크리톤의 말처럼 “말은 사람에게 이익을 주기도 하고, 해를 입히기도 한다.” 크리톤의 설득도 뿌리치고, 이런 말의 무서움을 죽음으로서 돌파할 생각을 해낸 소크라테스의 고결함은 언제고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어쩌면 그 말들이 지닌 칼을 개인의 힘으로 돌파하는 방법은 죽음 말고는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 낸 뒤에 필연적으로 일어날 그 결과 말이다.


어쨌든, 그보다 거의 2500년을 더 뒤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각각의 근거에 반박할 만반의 논리가 갖춰져있다. 법감정이라는 것도 있고, 어떤 명분보다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중요하기도 하고, 정의의 원칙은 광범위하긴 하지만 때로는 예외가 주어지기도 하고, 따라서 개인의 판단에 따라 법을 위반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렇게 한다고 사회가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지는 일 따위는 대체로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내세운 주장들보다는, 이 문단에 늘어놓은 현대적 민주주의의 원칙에 훨씬 더 친숙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에게 막 반박하고픈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온다.


하지만 다시 마음 한켠에 걸리는 구석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사람들의 몰이해와 왜곡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그 위기의 순간에 그는 (사실상) 자발적으로 자신의 신념과 죽음을 맞바꿨다는(53e) 사실이다. 소크라테스만큼 칭송받으며 인류의 정신 속에 기억될만한 것이 아닐지는 몰라도, 우리 모두 목숨과도 맞바꿀만한 사랑의 대상 하나쯤은 갖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 그런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 우리는 함부로 돌을 던질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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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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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 책은 지금의 내 인생을 만든 책 중에 한 권이다. 그만큼 오래 전이 읽었고, 또 그만큼 아끼고, 지금 내가 가진 여러 생각들의 뼈대를 제공해준 책이다. 그렇다고 막 힘들 때 슬플 때 외로울 때마다 번번이 꺼내보고 나를 반성하고, 뭐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어지간하면 한 번 읽은 책은 다시 들여다보지 않는 내 습관 속에서 이 책은 벌써 이번이 네 번째 완독이다. 한때는, 그러니까 두번째에서 세번째쯤 읽을 무렵 상대적으로 그의 생각과 가장 멀리 있었던 것 같다. 뭔가 꺼림칙한 귀족풍의 냄새라고 해야하나…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지금은 오히려 그 때보다 러셀의 생각에 훨씬 더 가까워진 것 같다.


러셀은 이 책에서 기독교라고 이름붙여진 무엇을 공격한다. 이 글에서 그가 반대하는 대상을 종교현상 내지는 종교활동으로서의 기독교로 내가 확정짓지 않는 이유는, 그가 기독교에 반대하는 이유 때문이다. 그의 반대의 핵심엔 경험적 증거가 없는 환상에 대한 맹신,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표식이라고 간주하는 비합리적 태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가 살아온 문화궈에서는 이런 것을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상징이 “기독교”라는 명사이기에, 그가 기독교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또는 어쩌면 이 단어 말고 다른 대체할 단어를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이런 믿음이 과연 기독교 공동체 또는 기독교 문화권에만 존재하는가? 러셀 스스로가 지적하듯, 이런 태도는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각기 다른 양상으로 인간의 지성의 진보를 가로막고, 단지 문화의 발전만 지체시키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 문화적 구조 안에서 소수로 배제되는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와 고통까지 안겨준다. 그 고통에 어떤 의미와 목적이 담겨있기에 (또는 담겨있다면) 어쩌면 공동체의 관점에서 또는 인류의 관점에서 감내할만한(감내해야할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신자와 목회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그게 정녕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피해당사자들 앞에서 내뱉는 것은 역시나 인간적인 도의가 아닐 것이다.


이런 비경험적 믿음이 정말 인류의 차원에서 사실이라면 즉 그들이 내세우는 이론이 세계의 구조에 대한 비밀과 사실을 정말 아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귀담아들을만한 일말의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세계엔 호교론자들과 변증론자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러셀의 관점에서 이들의 논증은 형식적으로 올바르게 구성된 것이 거의 없다. 여기에 나도 대부분 동의한다. 따라서 신은 합리적 이유로 이해되는 대상일 수 없고, 어떤 감정적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러셀의 이런 주장을 떠올리며 나는 내 주변을 둘러본다. 내가 철학을 전공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내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너 점 볼 줄 아냐?”였다. (아주 기분나쁘고 자존심 상하지만, 나는 주역점을 볼 줄 안다.) 대체 이런 걸 왜 돈을 주고 하는 것인가 싶지만, 번화가에는 어김없이 미래를 맞춘다는 포춘텔러 부스가 줄을 서서 개설된다. 동네의 점집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부적을 팔고 굿판을 벌인다. 정부에서 절반 이상을 대신 내주는 약값은 500원만 나와도 아깝다는 사람들이 한 번도 효능이 증명된 적 없는 홍삼베이스의 건강보조식품은 백화점에서 10만원 100만원씩 턱턱 주고 구입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심리적 위안”이라고 퉁치는데, 그러면서 진짜 훈련받은 전문가인 신경정신과나 심리상담사에게 비용을 치르는 것은 주저한다. 러셀의 눈에는 이 모든게 “기독교”일 것이고, 내 눈에도 그러하다. 이 모든 노력과 정성과 돈이(이게 제일 중요하다. 돈이!!!) 과학과 지성의 진보에 사용되었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져있지 않았을까?


물론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희망사항일 뿐이다. 여기에서 러셀 자신의 분석과 희망사항과 제안이 서로 (약간의) 충돌을 일으키는 것 같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야 하고, 그 인식을 효과적으로(과학적으로) 바꾸기 위해선 사람들의 본성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상에 대한 객관적 관찰’인 과학의 모든 관점을 동원해서 인간을 본다고 하더라도, 거의 근본적 수준의 감정 중 하나인 두려움은 그칠 줄 모르고 틈만 나면 우리의 지성을 뚫고 나올 것이라는 결론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러셀의 낙관적인 예측처럼, 지식의 축적과 과학의 눈부신 성과만으로 이걸 뛰어넘을 수 있을까? 우리 인류의 상태가 그것이 부족하기에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인가… 모르겠다.


이런 거창한 인류사적 고민 말고도, 예전엔 없었던 개인적인 고민도 이번에 책을 읽으며 하나 더 늘어났다. 이전엔 무슨 의미로 이런 글을 쓴건지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그냥 넘겼던 챕터인 “마담…” 부분과 관련된 고민이다. 나 스스로는 러셀의 의견에 십분 공감하지만, 사람들이 내게 요구하는 철학의 모습이나 형태 즉 판매용 철학과 내 마음 사이의 고민에 관한 문제였다. 러셀이 비판하는 맥타가트와 브래들리(철학의 역사에서 B급 정도의 중요성을 갖는 사람들)의 형이상학적 태도, 즉 미학적 도취 혹은 종교적 열망의 대리만족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사람들의 요구(또는 철학자들 스스로의 어떤 잘못된 방향설정)에 나는 부응해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고 살자니 굶어죽기에 딱 좋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적이 많이 생길 것만 같고, 그러고 살자니 평생 거짓말이나 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고… 뭐 그런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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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펭귄클래식 80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권화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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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 『공산당선언』을 읽고 있자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질문은 “왜 지금 공산당 선언을 읽는가?(읽어야 하는가?)”가 될 것이다. 가장 간단한 대답은 “고전이니까”일텐데, 고전의 정의가 “(아무 이유 없지만 일단은) 읽어야 하는 책”이라면 사실 이 대답은 의미없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게다가 “공산당(과 공산주의)”은 실패한 정치실험이라는, 80%는 맞지만 20%는 틀렸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어떤 선입견도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이 책이 타겟으로 잡고 있는 자본주의의 동시대성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자본주의 세계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라는 단순화로 포착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이 말이 맞다면 마르크스의 현재 분석도 틀린 것이고, 그 분석에 기반한 미래 예측과 행동강령 또한 제대로 들어맞을 리가 없다. 핸드메이드 소공업인들은 유통 플랫폼의 갑질에 종속되었고, 동네 슈퍼 아저씨들은 대형마트에게 시장을 빼앗겨 가게 문을 닫고 그 마트의 비정규직으로 취직했다. 기술의 발전은 점점 인간이 신경써야 하는 영역을 점유해가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자본만 있으면 모든 인간들이 각자 가진 어마어마하게 서로 다른 수요를 작은 기관에서 모두 충족시키는 게 이론적으로 가능해지고 있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그 서로 다른 수요를 대면접촉으로 충족시켰던 모든 “소자본가”들이 프롤레타리아가 되어가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통찰이 정말 틀린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에 대한 마르크스의 생각도 조금은 다르게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진정한 공산주의 운동이란, 어떤 세계가 아주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로 나눠졌을 때만 이뤄질 수 있다. 이 과정은 순전히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이뤄진다. (이 말에는 수많은 쟁점이 담겨있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핵심 교의이기도 한데) 이 경제적 운동은 다른 영역의 어떠한 변화나 노력으로도 막을 수 없다. 또 마르크스가 이 글의 끝에 밝히는 것처럼, (진정한) 공산주의자라면 공산주의를 향한 최후의 일전에 돌입하기 전 벌어지는 모든 국지적 전투에도 우호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공산주의자들의 활동범위는 우리가 소극적이고 국지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넓어야 하고), 실제로 (내 관점에서) 꽤 괜찮은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개혁의 길에 들어섰거나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도 바보가 아닌 한 내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는 내 자만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이런 종류의 단어를 쓰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지만) 그래서 내가 이해한 『공산당선언』의 핵심은, 경제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를 지향하는 열망 같은 것이다. 마르크스의 실제 의도가 무엇인지와 무관하게, 『공산당 선언』 자체가 수사적으로 매우 풍부한 문체로 기록되어 있기에 나도 내 멋대로 해석한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더 이상 미래를 기획하며 돈을 모을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뜻의 “월급이 스쳐간다”는 표현이 150년 전 쓰인 이 팸플릿에 이미 등장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 생각에 그리 틀린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당신의 월급이 통장을 스쳐가는 한, 마르크스의 생각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노동자에 대한 공장주의 착취가 끝나고 그가 임금을 현금으로 받을 때가 되자마자, 이번에는 부르주아지의 다른 부분들, 즉 집주인, 상점 주인, 전당포 주인 등등이 그에게 달려든다.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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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해리 세트 - 전2권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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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국문학의 무진은 두 개다. 김승옥의 무진, 그리고 <도가니>와 <해리>의 배경인 공지영의 무진이다. 두 소설에서 모두, 안개는 사람들의 눈을 가려버린다. 시각은 사람이 가장 많이 의존하는 감각이며 그래서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을 상징한다. 때문에 무진의 끈적한 안개는 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든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혼돈 속에서 벌어지는 욕망의 노력은, 깊지만 더러운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몸부림이 될 수 밖에 없다. <해리>는 그 미끌거리는 안개 속에서 정신없이 몰락하는 사람들의 아귀다툼에 관한 이야기로 내게 다가왔다.


<해리>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욕망에 충실하다 못해 그걸 너무 빤한 방식으로 전시한다. 피해자로 등장하는 또는 자신을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등장하는 몇몇 또한 욕망의 문제에 너무 강하게 얽혀있어서, 그들의 피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나는 단지 관찰자 시점이기에 이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누군가 내 삶을 3인칭의 시점으로 관찰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 싫은 나의 행동들 또한 욕망의 결과물로 바라볼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들은 욕망 앞에선 선과 악이 없다는 하나마나한 말을 인생의 정답이랍시고 내밀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욕망을 편취하는 의도와 방식은 여전히 문제삼을 수 있고, 그에 따라 선과 악의 스펙트럼 위에 어떤 개인을 올려놓을 수 있다. 이것은 욕망 자체에 대한 판단과는 별개의 문제다.


이런 의미에서, 제목과 달리 이 소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진짜 대상은 주인공인 해리가 아니라 <해리>를 둘러싼 남자들이다.


그들은 해리가 “꼬셨고” 자기들은 그 “남자라면 누구라도 거절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에 “넘어갔”으며 그래서 해리를 “나쁜 년”이라고 평가한다. 그 모습이 해리의 일부분인 것도 분명한 탓에, 그리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수집하는 이 소설의 서사 구조 때문에, <해리>의 대부분은 해리에 대한 비난으로 채워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구성은 트릭이다. 가만히 뜯어보면, 이 소설 속 남자들은 해리와 육체적 관계를 맺을 거라는 근거없는 망상에 ‘자발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 관계에 동반되는 모종의 시술을 단 한 번만 받고 손을 뗀 사람도 이 소설엔 없다. 즉, 그들은 욕망을 달성하려는 의도와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언제나 적극적이었고, 그렇기에 책임도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해리더러 나쁜 년이라는 말만 반복한다. 내 관점에선, 이것이 “해리성 인격 장애”의 좋은 사례인 것만 같다.


더군다나 해리는 혼자인 반면 남자는 다수다. 다수는 구조를 형성한다. <해리>에서 해리성 인격 장애는 몇몇 개인의 특성에서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징후가 된다. 정치적 진보와 보수, 나이의 많고 적음, 지위의 높고 낮음이 모두 사회의 산물이라면, 사회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징후를 나눠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할당된 징후는 다수의 실천 속에서 권력이 되고, 사회의 바깥을 “모럴”의 이름으로 응징한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것은 누구인가, 과연 “모럴”이 아닌 하느님의 공의에 따른 합당한 처분을 받은 자가 이 이야기 안에 있었던가? 해리의 행적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한 쪽은 구조적 피해와 그에 대한 복수라는 수동적-반응적 동기로 인한 행위였다면, 다른 한 쪽은 그 구조를 체화하고 그 권력을 능동적으로 휘두른 행위였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눈은 안개에 가려져있고, 권력은 우리를 짓누른다. 어떻게 단순히 허우적거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서유경 센터장은 “지루함”이라는, 흥미로운 키워드를 제시한다. 선은 창조하고, 악은 반복한다. 그래서 선은 신선하고, 악은 지루하다. 머리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권력은 기존의 것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기에 필연적으로 반복을 명령한다. 우리는 여기에 저항할 수 있다. 이나처럼, 내면의 트라우마를 덜 복기하는 방식으로, 계산하는 머리가 아닌 하느님의 숨결이 스며든 몸의 반응으로, 성욕의 충족이 아닌 사랑의 충만이 존재하는 관계로.


이나는 그렇게 한 발짝 선의 세계로 다가가고, 해는 우리의 눈을 가려왔던 안개를 걷어 새 것과 헌 것을 나눌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아마, <해리>를 읽는 우리도 때로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책의 결말을 혁명적인 변화가 없는 질척한 현실이 반영된 결과물이라고만 해석할 수는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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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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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책이 정말 재미있었다. 거짓말을 조금 더 보태면, 재미없고 흥미없는 심드렁한 문장이 단 한 개도 없었다. 한 줄 한 줄마다, 그리고 그 문장들 사이의 행간마다 정보와 문제의식과 생각할 거리가 가득 담긴 책이었다.


많은 사람들 그리고 대다수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공동체가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하지만, 적어도 근대 사회에 들어와서 공동체는 특정한 이념에 대한 복속을 통해 구성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단일한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낀다고 발언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공동체는 그래서 “이념”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위대한 독일을 만들고자 했던 나치당에도 이념이 필요했다. 이 책의 초반부에 설명된 것처럼, 나치즘의 기반이 되는 이념은 “게르만” 제일주의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탄생하지 않았다. 히틀러 자신과 그 주변 사람들은 철학에 대한 악의적 편집을 감행했다. 그렇게 국가사회주의의 이념지도가 “칵테일”로서 제공되었다. 맥락도 상황도 고려하지 않은 짜깁기다. 하지만 그 짜깁기에 동원된 몇몇 멘트들을 남긴 철학자들 또한, 맥락도 상황도 고려하지 않은 채 아무런 의식 없이 그런 구절들을 활자로 새겨놓았다는 점에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진 않다.


그렇기에, 조금만 지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나치즘이 표방하는 것들은 아주 우호적으로 이해해봐야 아무말 대잔치 수준이다. 그래서 나치는 그것을 처음부터 정교하게 다듬을 생각을 하지 않고, 학문의 제도를 먼저 장악하려고 한다. 어차피 말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거나, 그것이 말이 안된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지적인 마비상태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조성되었지만 단지 보이지 않았을 뿐인 단초들 - 결국 반유대주의 - 위에서, 나치는 정부를 점령했고 나치의 이념은 학문제도를 장악했다.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이 아무말 대잔치의 확산에 참여하거나 동조하거나 침묵한다. 이렇게 아무말 왕국이 탄생하고, 사람들은 권력을 획득한 아무말 앞에서 두 가지 선택지를 강요당했다. 아무말이 아무말이 아닌 것처럼 포장하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하거나, 아니면 아무말 왕국으로부터 탈출하거나.


책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두 대가, 칼 슈미트와 마르틴 하이데거는 포장전문가의 길을 선택했다. 정치(적 행위)의 근본을 구성하는 요소는 적대라는 것이 슈미트의 입장을 가장 간략하게 요약한 문장이 될텐데, 적대라는 단어 앞에는 “유대인에 대한(그리고 즉 소수자에 대한)”이라는 말이 교묘하게 생략되었다. 하이데거는 나치의 유사-낭만적, 반계몽주의적, 반근대적 작태를 탈근대와 고양된 신비주의로 탈바꿈하는 철학적 시를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그것은 합리적 논증이 아니었고, 근거가 있는 주장도 아니었으며, 어딘가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이미지들만 난무하는 언어기호예술일 뿐이었다. 나머지 덜 유명한 학자들은,


“눈 뜨고 보기 힘들만큼 참혹한 인간의 고통이 늘어가는 동안(...) 명예를 놓고 다퉜고 반유대주의의 정확한 개념을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p.141)


반면 탈출을 시도한 유대계 철학자들은, 나치즘이 주구장창 선전하던 “유럽(이라 쓰고 게르만이라 읽는)”이 실제로 지니고 있던 내밀한 문화적 유산과 건전한 지적 전통을 지키려 애썼다. 그들이 그 통찰을 간직하기 위해 동원한 능력은 다양했다. 아도르노의 예민한 문화적 감수성, 벤야민의 (하이데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신비주의적 세계관, 아렌트가 시도한 유대계(라고 쓰고 소수자라고 읽는)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해명, 백장미단의 후버가 구상했던 진정한 독일의 추구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히틀러의 아무말로부터 도망가거나, 저항하거나, 아무말이 “적대”하는 것들을 보호하고자 애썼다. 즉, 


“망명한 유대인들은 순수한 유럽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p.257)


하지만 이들의 운명은 결코 순탄치 못했다. 반유대주의는 단지 히틀러와 나치즘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전 유럽의 문화적 코드에 깊게 스며든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나치 바깥의 반유대주의에 포획되어 나치에게 압송되기 직전 자살했다. 아렌트는 영국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2차대전이 끝나고도 몇 년이나 더 지나서야 미국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아도르노는 미국으로 망명해서도 자기 집 앞에서 반유대주의자들의 시위가 벌어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 동안 나치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런 일이 자행되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치밀하게 외면했다.


나치 시대의 지성사적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한다는 것은 이 책의 큰 장점이지만, 나는 이 점 못지 않게 히틀러의 반대자들이 처한 운명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가 나치라는 딱지를 붙이고 여기에 모든 나쁜 특성들을 몰아넣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일상에서 저지르는 악덕들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좋은 구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치즘은 영국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매우 편한 핑계가 되었다. 미국은 자국 내 나치당원들의 활동을 방관했다. 유대인들은 나치를 벗어났다고 해도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예민함이 극에 달한 철학자와 지식인들은, 유럽과 미국 사회에 공기처럼 깔려있는 반유대주의의 냄새를 그 누구보다도 먼저 맡아야만 했으며, 그래서 고통스러워했다. 우리는 어쩌면, 그 공기를 들이마시며 우리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공기처럼(또는 유령처럼) 떠도는 차별은, 당연히 전후 복구처리의 불공정한 결과로 나타났다. 몇몇 상징적인 나치 수뇌부 소속 인물들을 제외하면 나치에 협력했던 철학자들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가 원직에 복귀했다. 칼 슈미트는 정치학에서, 하이데거는 철학에서, 아직까지도 절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되었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철학자들이 그 중요도가 포장전문가 두 사람에 비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솔직하게 말해 그 위상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예술에서도 언제나 문제가 되는 질문,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일을 저지른 사람의 작품을 우리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이 책에서 더욱 더 첨예하게 제기된다. 윤리와 예술작품은 다루는 대상이 다를 수도 있지만, 철학은 윤리 그 자체를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즉, 조금의 논리적 비약을 섞자면, 하이데거와 슈미트의 철학을 한 마디로 줄였을 때 “나치가 되어라”가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포장해본들, 메시지의 본질을 지워버릴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나치가 되어라”라고 말하는 철학자들을 가르쳐야 하는가? (그렇다면, 대체 왜 그 명민하다는 아렌트는, 그리고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들은, 그 두 사람을 그렇게 상찬하지 못해서 안달이었는가?) 나의 위치는, 누군가가 하이데거를 읽는다고 하면 “그런 놈의 잡소리는 읽을 필요가 없어요”라고 적극적으로 말리지만, 나 스스로는 밥벌이를 위해 포장전문가들의 저술을 읽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자리다. (심지어 집에 몇 권 있다)


안타깝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내겐 우리나라의 몇몇 철학자들 또한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어용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했던 철학자들의 존재는 저기 멀고 먼 유럽나라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다. 이승만에게는 안호상이라는 철학자가, 박정희에게는 박종홍이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그리고 “국민윤리”라는 무시무시한 초중고 교과과목을 만들어낸, 부끄러운 윤리/정치/사회철학 연구자들이 있었다. 물론 이들은 이제 거의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국민윤리라는 과목 또한 도덕, 윤리를 거쳐 생활윤리나 윤리와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약간) 탈바꿈했다. 하지만 마치 공기처럼 떠돌아 다니는 어떤 것이 나치의 제도화를 통해 소수자들을 질식시키는 독가스로 바뀐 것처럼, 우리의 주변에도 그런 공기가 떠돌아다니지 않으리라고 자신있게 말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슬림은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구호를 그렇게 떳떳하게 말할 수는 없을테니까 말이다.

"눈 뜨고 보기 힘들만큼 참혹한 인간의 고통이 늘어가는 동안, 20세기의 철학자들은 명예를 놓고 다퉜고 반유대주의의 정확한 개념을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p.141)

"망명한 유대인들은 순수한 유럽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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