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은 아버지를 찾아가는 아들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카다피와 같은 군부 출신이긴 하지만 카다피의 정치적 행보에 찬성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체포되었다. 그 와중에 카다피 치하의 몇몇 수용소에선 “정치범”에 대한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어떤 기록을 뒤져봐도 아버지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는다. 아들이 이 생사를 확실하게 만들려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카다피가 어떻게 집권하고 정권을 유지했는지, 리비아 사람들의 삶은 어떤 식으로 바뀌었는지, 그를 대하는 이른바 선진국들의 태도가 얼마나 기만적이었는지 드러난다.






반면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은 좌파운동가 부모를 둔 딸의 이야기다. 부모는 마르크스주의자이기에 팔레비 왕정에도 아마 우호적이지 않았을 것 같지만, 호메이니의 종교혁명 이후 모든 종류의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정권에 더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다 견딜 수 없어 프랑스로 이주해 삶을 꾸려가는데,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이 딸의 시선으로 다뤄진다. 복장 제한과 일부다처제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여성차별, 표현의 자유에 대한 탄압은 리비아에서보다 더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딸은 부모의 행보에 대해 덮어놓고 우호적이지만은 않은데, 두 사람이 자신들의 신념을 딸인 자신보다 더 우선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두 책을 읽는 가장 첫 감상은, 나름 소설 또는 이야기라는 이 두 책의 원래 형식과 걸맞지 않게 “공부했다”는 느낌이다. 리비아 카다피 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운동은 뉴스를 통해서만 접하던 내용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그 독재정치의 한가운데에서 일어났던 일과 그에 저항한 사람들의 행적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마지디의 글도 마찬가지였다. 호메이니가 일으킨 이슬람 혁명이 이란 사회 전체에 어떤 여파를 미쳤는지, 그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지 상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두 책 모두의 배경이 우리가 아랍이라고 묶어서 부르기 좋아하는 어떤 사회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세속주의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확실히 한 쪽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했다는 점만은 분명한 공통점이었다. 정치적인 의사표현, 자유로운 학술활동, 모든 것이 정부의 검열대상이었다. 남자였던 마타르에게선 드러나지 않았던 성차별적 억압이 마지디의 글에서 전면에 드러나는 것 또한, 책을 단순히 읽는 사람의 입장에선 일종의 “깨알” 포인트이기도 했다.


문화로 보나 거리로 보나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과 서쪽의 거의 끝에 자리잡았다는 엄청난 간극이 있지만, 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런 경험에 공감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각각 그 이유는 석유와 지정학적 지위로 서로 달랐지만, 2차 대전 이후 펼쳐진 냉전과 연장된 식민주의의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민주적으로 집권한 정부도 독재를 일삼았는데,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정권도 독재를 했다는 것은 굳이 말해봐야 입이 아픈 사실이다. 그에 대항하던 수많은 정치적 반대자들이 불구가 되어 살아가거나 남산의 핏빛 이슬이 되어 사라졌다. 반대자들의 아내와 아들딸들은 한편으로는 정부의 행각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편하게 마음을 둘 공동체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 어찌할바를 모르기도 했을 것이다. 그 억압의 무게는 모두에게 똑같이 무거웠지만 여성에겐 훨씬 더 무거웠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두 책이 모두 재미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마지디보다 마티르의 책이 더 흥미로웠다. 모르던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미리 알았던 내용이 있다면 영국의 (노동당 간부들을 비롯한) 고위층이 카다피의 독재를 못본 척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당 정치인들의 산실인 명문대학 런던정경대에서 카다피 정부의 비자금으로 학술활동을 했다는 것 정도였다. 그 때도 미친 놈들이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아부살람 학살 사건을 비롯해 독재정부가 해야할 것은 빼놓지 않고 다 했었던 카다피 정권의 맥락을 고려하니 정말 상종못할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정치적으로 좌파라고 자부하고 다니는 사람의 입장에선, 좌파가 저러고 다녔다는 게 너무 슬프고 짜증난다…)

















반면 이란에 관해선 예전에 비슷한 만화를 본 적이 있었다.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라는 만화다. 사트라피가 이란의 전통과 문화에 좀 더 우호적인 것 같긴 하지만(더 정확하게는 1세계 백인 페미니즘의 잣대로 이란을 보지 말라...는 정도였다), 어느 작가의 관점으로 보든 이란의 체제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마지디의 글은 내게 이란에 관한 어떤 대체불가능한 경전이 될 것 같다. 아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선을 동원해 이란 사람들의 삶을 사트라피에 비해 좀 더 내밀하게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상투적인 말로 글을 마무리해볼까 한다. 소설이나 소설적 요소가 섞인 논픽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찾아읽을 생각도 잘 하지 않는 입장에서, 이 두 권을 그야말로 따로 나가는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출간이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을 종류의 책이었다. 게다가 읽었더니 (여러가지 의미에서) 재미있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독서모임하는 재미 중 중요한 어떤 요소를 다시 깨닫게 된 계기랄까? 그래서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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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 고기를 굽기 전, 우리가 꼭 생각해봐야 할 철학적 질문들
최훈 지음 / 사월의책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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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을 하는 철학자는 이중의 부담을 떠안았다. 첫째는 채식이 취향이 아닌 윤리라는 점을 논증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꼭 그래야하는 것인가 싶긴 하지만) 채식에 대한 자신의 주장과 자기 생활의 모습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고기를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회 속에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수행한다는 것은 꽤나 부담일테다. 첫째를 시도하면 인신공격이 들어오고(자기 취향을 강요하는 나쁜 사람), 둘째를 시도하려다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또 다시 인신공격이 들어온다(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 그래서 철학적으로 채식을 논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내가 못하는 것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아는 한 이 저자는 학문의 영역에서 채식을 다루는 몇 안되는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또 채식의 근거로 공리주의라는, 윤리적 판단에 있어서의 대원칙을 내세우고 있기도 하다. 그 입장은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거의 모든 주장과 논증에 있어서 ‘고통’을 줄이는 문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줄이는 행위는 대체로 옳은 행위이고, 고통을 늘리는 행위는 그르다. 그른 행위는 하면 안되는데, 육식은 고통을 늘리기 때문에 하면 안된다.


육식은 다양한 방향에서 고통을 늘린다. 우선 죽음을 가져오며 고통을 늘리고, 사육환경을 동물에게 맞지 않는 방식으로 개조함으로써 고통을 늘린다. 사람에게 돌아갈 곡물을 동물에게 비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동료 인류의 고통을 늘리고, 상대적으로 유해한 것처럼 보이는 고기를 생산함으로써 그것을 먹는 개인의 고통을 늘린다. 저자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내가 윤리적 판단에서 어떤 대원칙을 갖느냐 하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나는 공개적인 공리주의자이다. 이 글을 쓰기 방금 전 저녁으로 설 명절에 사용하고 남은 갖가지 전들 - 햄이 들어간 꼬치, 동그랑땡, 새우튀김, 육전 - 과 삶은 돼지고기를 먹었다. 살면서 한 번도 채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일도 없다. 하지만 저자의 모든 논의에 동의한다. 그러니까 나는, 지속적으로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그 안타까운 지점인데,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고 쿨하게 인정하고 싶지만 사람은 원래(본성적으로!!!) 그렇지 못한 존재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이 책의 논의에서 구멍을 찾으려고 애썼다. 동물의 고통을 확인하는 문제에서 우리는 추정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추정의 근거는 행동이다. 행동을 통한 추정에는 상상이 너무 많이 개입할 뿐만 아니라, 저자가 물고기에 대해서 논할 때처럼 추정된 대상이 실재하는가에 대한 그럴듯한 대답이 될 수 없다. 축산업에 대한 논의는 ‘그래서 “과학적” 생산을 포기하고 원시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든다. 이것 또한 인류의 진보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오히려 가리지도 않고 남김없이 다 먹어치우는 것보다야 종이 한정적인 게 낫지 않을까? 인격동일성 논의를 우격성(동격성이라고 해야할까)에 적용해서 고통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대체 어떤 함의가 있을까? 등등의 생각들.


하지만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다, 어느 순간 인정해야만 했다. 그냥 나는 나쁜 사람이다. 공리주의자인 한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결국 궁극적 문제는 저자가 언급하는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 ‘아크라시아’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 같다. 육식하는 사람은 진짜 공리주의자인가, 육식을 하면서 동물의 행복을 인정한다고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서 어떤 입장을 편들든 간에, 결국 나는 동물의 행복을 받아들이지 않거나(못하거나) 동물의 행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즉,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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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 고전의세계 리커버
르네 데카르트 지음, 양진호 옮김 / 책세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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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증명 방식은 21세기의 감각에서 봤을 땐 어느 모로나 뜯어봐도 참 상식에서 벗어나있다. 외부사물의 의심까지는 그렇다쳐도, 육체에 대한 정신의 우선성, 신이 존재한다는 확신, 신의 착함에 대한 증명, 그 뒤에야 우리가 흔히 ‘물질’이라고 부르는 어떤 세계(대상)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는 것까지. 반대로 나는(혹은 이 시대의 일반적 감각은) 외부의 사물을 의심하지 않고, 정신은 결코 육체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신은 착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존재한다고도 말하기가 어렵고, 세계의 모든 것은 물질이라는 형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사상의 역사 속에서 근대 - 그러니까 우리의 세계 - 를 만들어온 사람으로 데카르트를 지목한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그 말이 딱히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내 정신에 대한 탐구 과정 속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존재는 인간이었다. 그 과정을 글로 남겨 출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대로 따라하게 만들어서,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또한 인간에 대한 탐구 속에서 인간이 가장 먼저 등장하길 고대했다. 그가 생각한 인간은 다름 아닌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그 생각을 잘 벼려야 우리는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구실을 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것들은 시체(즉, 몸으로서의 인간)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우리의 정신을 이용해 몸(즉 물질)으로서의 세계를 잘 연구하면, 그것이 과학이 된다.


그가 생각하기에 과학적 활동은 인간의 정신이 짊어진 일종의 의무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과학이야말로 의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았을 때는 손톱보다도 더 작게 보이는 해는 실제로 지구의 몇 십배도 더 된다. 한 개의 작은 점으로 보이는 별들은 사실 그보다도 더 크고, 더 밝다. 우리의 몸보다 몇십만분의 일 정도로 작은 것도 우리의 발 밑에선 생물이랍시고 꿈틀거리고 있다. 이처럼 탐구, 발견, 창조성 같은 것들은 우리의 다섯 가지 감각을 포함한 육체성(?)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해, 발상의 전환으로 마무리된다. 결론으로서는 현대인의 감각에 맞지 않지만 신념으로서는 현대인의 감각에 맞는다는 것, 나아가서는 인간으로서 꼭 가져야 할 태도라는 것이, 이 케케묵은 책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 가치라면 가치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PS. 번역본에 대한 이야기는, 읽어본 '인상'으로만 따질 때에는 이것보단 이현복 번역본이 나은 것 같긴 하다. 먼저 읽은 것에 대한 익숙함의 문제일까? 나중에 본격적으로 비교해볼 시간이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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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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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도의 링컨』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하나씩 있다. 익숙한 것은 공동묘지 주변을 떠도는 여러 존재들에 대한 묘사다. 뭔가 굉장히 독특한 것처럼 묘사를 해놓았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한을 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다 가끔 긴머리에 소복차림으로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원혼들이 이 이야기의 주연이자 조연들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듣는둥 마는둥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데 바쁘다. 자신의 억울함에 몰입하기 바빠 다른 영혼들의 이야기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쪽에 훨씬 더 가깝다. 원혼들이 이렇게 난리를 치고 이 소설은 그것을 아무런 정제 없이 날것으로 보여주는 바람에, 글을 처음 읽어내려가는 수십 페이지 동안은 대체 어떤 일이 생기는 것인지 조그마한 감조차 잡을 수가 없다.


반대로 낯선 것은, 이 공동묘지가 위치한 장소가 조선이나 고려의 어느 고을이 아니라 19세기 미국, 남북전쟁의 한복판이라는 사실이다. 스스로 말을 내뱉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일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아들을 묻으러 온 링컨을 보며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한다. 죽은지 오래된 사람들은 저 사람이 무슨 대통령이냐며, 자기가 죽을 때는 정치인이었는지 아닌지 알지도 못했던 사람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원혼들 사이에서도 흑백이 나뉘어, 마치 묘지 밖에 세상에서 그런 것 같이 이들 또한 나름의 남북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도 있다.


왜 이들은 여기에 남아있는가? 그냥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냥 죽을 수 없는가? 무덤 바깥 세상에 미련이 남을 수 밖에 없는 황망한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영혼들이 떠드는 말은 대체로 자신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죽음의 과정, 이유, 상황 같은 것들에 대한 나름의 일장연설과 해석들. 누군가가 그것을 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울려퍼지지만, 그 소원은 성취되지 못하고 모든 영혼을 돌아 그 자신에게 메아리로 돌아온다. 보태고 얹어진 다른 영혼의 사연은 자신과 무관하다보니 그저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이 영혼들을 무대에 올려놓고, 이 소설은 기억에 관해 이야기한다. 살아있을 적의 기억, 사실과도 다른 기억, 불확실함을 메우기 위해 횡설수설 해야만 하는 기억, 가끔은 잊어버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간신히 다시 떠올릴 수 있는 바로 그 기억. 그럼에도 영혼이 기억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척이나 간단하다. 무덤 바깥의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기 때문이다. 의외로 허약한 병자-상자(관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아직도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속 차갑게 식어 하얗게 굳은 몸은 나였지만 더 이상은 내가 아니다. ‘나’임을 호소할 때, 나’임’을 주장할 때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이제 기억 뿐인 것이다.


이 글 안에서 기억이란 주제를 잡아내는 것은 의외로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영혼들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기록도 함께 실려있다. 대통령 링컨에 관한 이야기, 그의 죽은 아들 윌리에 대한 묘사, 윌리가 죽은 날 밤 열렸던 파티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사람들의 전언, 이 사건에 대한 세간의 평가. 모두가 모순으로 가득하다. 천방지축이면서 품위가 있었다는 윌리, 못생겼지만 잘생긴 링컨, 화려하지만 아이를 죽이고야 만 그날밤의 파티라든가 하는 것 말이다. 살아있는 사람과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이야기에서 기억에 의존하는 일은, 영혼들이 기억에 집착하는 마음 만큼이나 애처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기억이란 현상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은(못한) 자들, 즉 살아있는 자들의 특권이기도 하다. 죽은 자들에겐 기억이 없다, 기억을 말할 기회조차 빼앗기고 어딘가로 잡혀가거나 끌려간다. 반대로 죽음을 거부하고 무덤가에 남은 원혼들은 원혼이 되어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산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까 기대하며, 아버지 에이브러햄 링컨과 뭔가 나눈 것 같은 자그마한 느낌을 주는 윌리에게 몰려가 각자의 사연을 토해내려 애쓴다. 이건 비단 무덤가의 원혼들에게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었으나 한 번도 사람으로서 대우받은 적이 없었던 흑인 노예의 말이 살아있음과 기억의 연관을 가장 잘 보여준다. 남을 위해서 일하는 동안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없어요, 좋은 주인을 만나 꽤 많은 자유시간이 주어졌을 때, 내가 뭘 했는지 기억이 나요, 어떤 느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궁금해졌어요, 24시간을 이런 느낌을 갖고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수많은 사람의 기억이 일관성 없이 동시에 튀어나오는 것이 이 소설의 형식적 특징이다. 누구를 향해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 우리의 기억을 아무런 정제 없이 그대로 옮긴다면 이런 식으로 표현이 되지 않을까? 기억이란 의식의 흐름의 저장, 관념의 이동의 박제이니 말이다. 내 경험을 말하자면, 이런 방식이 너무 이질적이어서 집중 없이 일독을 하다가 무척이나 헤맸다. 다 읽지 못하고 덮어버리다, 잠시 책과 거리를 두었다가 다시 펼쳐보았다. 그래, 결국 기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란 이런 식이지. 복잡하고 뒤죽박죽하고 앞뒤도 맞지 않고 서로 다른 요소가 각자의 이야기만 악다구니처럼 하는 것의 총체. 그럼에도 살아있다는 증거. 찬찬히 뜯어보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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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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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에 대하여』는 그야말로 개소리에 대한 책이다. 다른 어떤 소재도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책도 무척이나 얇고 짧다. 이 책의 최고의 장점이다.


이 책의 목적은 <개소리>라는 단어의 개념을 개략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프랭크퍼트는 개소리가 아닌 것들과 개소리를 대조하며 개소리에 다가간다. 개소리는 협잡과는 다르다. 협잡은 거짓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와 거짓말 사이의 관계를 전달하려는 것 즉 거짓말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척을 하는 것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반면 개소리는 그걸 사실이라고 믿는 척 하는데 초점을 두지 않는다. 개소리는 마구 말한다는 인상을 주는 단어이지만 꼭 그렇지도 않는데, 세심한 개소리들도 세상엔 많기 때문이다. 개소리는 실수와도 다르다. 실수는 잘 말하려고 했는데 잘못 말한 것이지만, 개소리는 잘 말하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개소리는 거짓말과도 다르다. 거짓말은 사실들의 집합과 정합적이지만 사실이 아닌 문장을 끼워넣는 것이지만, 개소리는 정합성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비교를 통해서 프랭크퍼트는 개소리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생각없음”(p.34)에서 기원하는 말, 또는 “진리에 대한 관심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언어사용(p.37). 개소리는 사실상 입김(더운 공기hot air, p.45)에 불과하며, 어떤 목적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 같고, 꼭 거짓말일 필요도 없다. 이 차이는 거짓말과의 대조를 통해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프랭크퍼트는 주장한다. 거짓말은 적극적으로 거짓을 생산하는 과정을 통해 진리를 존중하지만(p.53), 개소리는 아예 진리와 무관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를 빌리면, 개소리는 “거짓말을 사랑하는 사람들”(p.63)이 내뱉는 공기의 파동(!)이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진리’라는 개념, 문장은 참과 거짓 둘 중에 하나이고 인간은 어느 정도는(대개는 거의 정확하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신념을 내버렸다는 것이다.


이 논문, 그리고 프랭크퍼트의 문제의식은, 이 글의 가장 첫 문장에서 명백하게 드러나있다. “우리 문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소리가 너무나도 만연하다는 사실이다.” 개소리는 집단의 목소리 즉 그 만연성을 통해 담론이 된다. 담론화된 개소리의 특징은, 프랭크퍼트가 이야기하듯이, 사실 여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따지려 들면 ‘에이, 재미로 하는 건데 왤케 진지해여?’라는 반응이 돌아오지만, 그 담론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에겐 ‘진지충’이라는 낙인과 함께 인간관계의 단절이라는 무시무시한 형벌이 주어지는 것이다. 담론화된 개소리는 경제의 영역으로 작동해 이익집단을 형성하고, 그 이익집단은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개소리의 반복재생산에 온힘을 쏟는다.


우리 사회의 곳곳에 이런 담론화된 개소리들이 포진한 것을 나는 본다. 역자의 말과 해제에서는 정치 영역에서의 개소리를 주로 문제시하고 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정치의 영역은 오히려 생각보다 개소리가 빠르게 철회되는 편인 것 같다는 게 내 인상이다. 보는 눈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치 바깥의 생활 영역이다. 과학의 시선이 들어가야 할 곳에 개소리들이 판을 친다. 온갖 비과학적 이야기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때로 그런 개소리들이 이른바 통찰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나타나는 순간, 나는 소름이 끼친다.


개소리에 대한 해법은, 그래서 그 문제의 심각성과는 아주 반대로 매우 단순하다. 말할 때 사실에 대해서 신경쓰고 말하려고 할 것, 그래서 그 진리성을 확인할 수 있는 말을 더 많이 하려고 노력할 것. 즉,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말 것. 하지만 개소리의 절대적인 양이 역사적으로 늘어났는지 줄어들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는 프랭크퍼트의 말을 들으며, ‘인류의 언어생활에서 정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것은 아닌걸까’하는 절망도 머리 한 켠에 들어서게 되었다.


어떤 진술이 참이고 어떤 진술이 거짓인지를 규명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오직 두 가지 대안만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진실을 말하려는 노력과 기만하려는 노력 모두를 그만두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내세우기를 삼간다는 것이다. 두번째 대안은 상황이 어떠한지를 기술하려는 주장, 그러나 개소리밖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주장을 계속하는 것이다.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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