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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 Feynman
짐 오타비아니 지음, 이상국 옮김, 릴런드 마이릭 그림 / 서해문집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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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알라딘 신간평가단 9월 주목신간> 

  어려운 학문을 하면서 복잡하게 살았던 사람의 삶을 쉽게 표현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있을까. 파인만의 삶을 만화로 그려낸다는 것은 바로 그런 작업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쉽게 쓰여진 책이라고 해도, 속된 말로 ‘문돌이’, 그것도 문돌이 중에서도 문돌이라는 철학도인 내게는 그의 물리학 강의가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벽이었다. 그런 책을 쓴 사람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만화]라. 어떤 느낌일지, 게다가 이번 신간평가단을 진행하면서 가장 처음 선정된 과학 분야의 도서인지라 더욱 흥미로운 눈길로 살펴보았다.

  파인만의 삶을 만화로 그려내는 데는, 내 생각에 풀어야 할 숙제는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첫째는 그의 (유쾌했다고 널리 알려진) 복잡다단한 삶을 간명하게 잘 풀어낼 것, 그리고 둘째는 그가 과학분야에서 정확하게 어떤 업적을 남긴 것인지 정확하게 표현할 것. 이 책은 과학 분야로 분류되는 책이긴 하지만 결국 과학이론에 대한 책이 아니라 과학자의 삶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둘째 문제는 일단 뒷전으로 미뤄둔 듯 한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물론 그가 강의하는 것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나오는 여러 대사들은 다소 전문적이며, 이 부분을 내가 알아듣기에는 조금 버거운 면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그가 직접 내뱉은 말에서 그리고 그의 주변 사람들이 들려주는 말을 바탕으로 각색된 삶의 주요한 사건들이 그려져있다. 미국식 카툰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책을 읽다시피 그림을 뜯어보아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평이하게 그의 삶을 그려낸 듯 하다.

  이런 만화가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역할이 있다면, 아마도 만화가 아니라 글로 그의 삶을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아무래도 그림의 함축성보다는 글의 세밀함이 삶에 대한 분석과 감상으로는 더욱 알맞을 매체일테니 말이다. 이 만화의 뒤에 제시된 여러 참고문헌들은, 자신들이 이 만화를 그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그리고 이 만화를 읽은 뒤에 또 어떤 책들을 읽으면 좋은지에 대해 괜찮은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다.

  확실히 그의 삶에는 특이한 부분들이 많았다. 주로 내 눈에 띄는 부분들은 그가 사회적 상황과 어떻게 상호작용하였는지, 그리고 과학 이외의 학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특히 그 어떤 계기보다도, 주목받은 천재과학자이지만 동시에 그 유능함 때문에 맨해튼 프로젝트에 개입하기도 했던 사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과연 그 만화에 기술된 것처럼, 단순히 독일보다 먼저 원폭을 개발해야 하고 원폭의 강대함을 독일이 선취해서는 안된다는 계산에서 그 연구가 시행되었던 것일까? 또 적어도 파인만이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까? 이것은 그가 직접 쓴 글과 여러 전기적 자료,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취합하면 대체로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화에서의 이 부분은 간단히 생략해버린다는 느낌이 강했다.

  또 다르게 주목한 부분은, 과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한 그의 시선이었다. 그는 나이가 한참 들기 전까지는 분명하게 과학 이외의 학문에 대해 흥미도 없었으며 그것들에 대해 좋은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 이 만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내게는 철학을 오컬트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장면이 정말 화가 났다. 하지만 그 같은 자연과학자가 이런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과학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비교적 명확하게 정리된 뒤에야 예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나아가서는 그 예술로 자연과학에 필요한 여러 창의적 아이디어들을 고안하거나 기술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그의 기본적인 태도는, 자연과학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다. 그의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아마도 독자들의 몫이 아닐까.

  이 책에서 단점을 꼽는다면, 각 연도 별로 많은 사건들을 기술하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옮겨놓는데는 성공했지만 그의 삶에서 결정적인 것이라고 여겨질 것에 대한 주목은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런 꼼꼼함이 약간은 만화 자체를 지루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삶에서 해마다 일어났던 일은, 이렇게 만화에서 다루지 않더라도 책에서도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의 연구방향 또는 성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국면들을 그려내는 것으로도 그의 삶에 대해 흥미를 일으키는 데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만화보다는 책을 읽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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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까뮈]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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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페이지에 이르는 긴 여정을 우리 앞에 보여주며 지은이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바는 무엇이었을까? 당대에 충분히 가십거리였으며,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와 연구의 대상이었던 사르트르와 카뮈의 관계를 단순히 보여주기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지은이도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이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되는 문제는 현재 우리에게도 분명히 숙고할만한 사항이다. 나도 지은이의 이러한 생각에 동의한다. 당대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그 문제’에 대해 두 지식인의 분명한 입장은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건널 수 없는 간극

  그래서 이 책은, 일관되게 두 사람의 차이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서술해나간다. ‘첫 만남’에서 드러나는 두 사람의 성격차이, 레지스탕스 활동에 얼마나 참여했는지의 정도 차이, 2차대전이 끝난 이후 그 전쟁에 대한 해석, 냉전 기간 동안에 속해있던 진영, 폭력에 대한 문제, 공산주의(마르크스-레닌-스탈린주의)에 대한 입장, 그리고 그들의 조국인 프랑스가 저지른 불의인 알제리 전쟁에 대한 정치적 견해 등이 각 부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이들을 그저 ‘실존주의적 경향의 대표적 소설가’라는 묶음 아래 한 데 놓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하는 의문마저 문득 든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다시 생각해볼 때, ‘실존주의’라는 철학사조에 더욱 순수한 의미에서 가까운 사람은 사르트르가 아니라 카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이지만, ‘실존주의’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사람이 사르트르이며 카뮈는 그 이름을 거부했던 것을 살펴볼 때는 조금 의아한 결론이긴 했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본질은, 자신을 속박하려는 세계와 투쟁을 거듭하면서 자아를 확장하며 그 방식을 전적으로 혼자서 창조해나가는 자유를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능력이라고 상정하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보았을 때에는, 특정한 정치적 이론(또는 세력)과 자신의 자유를 양립시키려는 사르트르의 이론적 시도가 오히려 반-실존주의적인 것이다. 카뮈의 견해가 올바르지 못한 정치적 결론을 내리기는 했을지라도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그의 자유이다. 정치적 효과를 떠나서, 카뮈의 지적처럼, 사르트르의 이론적 작업은 역사에 실존을 굴복시키는 반-실존주의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적어도 이 책을 봐선. 

  폭력의 문제

  두 사람 사이에 놓여있던 모든 차이와 문제 가운데서도, 폭력이란 무엇인가 - 지은이는 이 문제가 사르트르와 카뮈 사이에 가장 큰 화두였으며, 결국 이것에 대해 공통된 의견을 내지 못한 것이 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역사의 문제, 참여의 문제, 문학의 문제, 그리고 정치적인 올바름의 문제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것이 폭력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개인에게 폭력적으로 개입하는 역사, 역사에 참여하는 방법으로서의 폭력, 폭력을 형상화하는 도구로서의 문학, 그리고 폭력 자체의 도덕적 지위라는 방식으로 폭력은 그들의 모든 문제와 얽혀있으며, 또 풀지 않으면 안될 문제로서 남아있다.

  흥미로운 것은 알제리에서 레지스탕스 - 무장투쟁 활동으로 정치에 입문한 카뮈는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극단적으로 폭력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고, 반대로 폭력과 별 직접적인 연관 없이 삶을 시작한 사르트르는 폭력을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서 옹호했다는 사실이다. 서로가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 셈이다. 이 책은 그 과정을 면밀히 잘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에서, 각자가 기고한 글에서,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기고를 통해 카뮈와 사르트르는 각자 마음 속에서 서로를 형상화하며, 그들이 던질법한 질문에 답변을 내리고 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입장의 차이를 다 알고 있고, 그것을 의식하면서도, 자신의 갈 길을 정립해나간 것이다.

  폭력의 문제는 단지 두 사람 사이의 관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진보-개혁적 세력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지은이의 의도 또한, 카뮈와 사르트르의 관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폭력에 대해 읽는이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뜻을 전혀 숨기지 않고, 책의 곳곳에서 밝히고 있다. 단, 지은이는 다소 중립적인 입장에서 두 사람이 각각 붙잡고 있는 것과 놓치고 있는 것, 올바르게 통찰한 것과 보지 못한 것을 골고루 지적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서, 그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아직 나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해서, 이 두 사람의 고민의 깊이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사르트르의 말처럼, 폭력은 약자의 편에서 강자에게 행해질 때 그것은 혁명이자 역사의 창조이며, 최소한 그 역할로 인해 어느 정도 폭력의 비도덕성을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역사와 역사적 개인

  이 문제 뿐만 아니라, 지은이는 그 두 사람이 지적인 거인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역사의 희생자일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킨다. 두 사람 이외에도 당대를 대표하는 여러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명확한 정치적 입장에 상관없이 당시에 주요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여러 정파들의 프로파간다로 이용당했다. 이 책에도 빈번히 등장하는 보부아르나 메를로퐁티 같은 사람들, 유력한 언론인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발언의 대중성과 그 무게에 있어서 이 두 사람에 비할 수 있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그 역사가 떠안겨주는 부담과 개인의 결단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는 데도 이 두 사람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희생의 측면은, 거의 타의에 의해 자신의 진영을 결정한 카뮈의 경우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 그는 냉전시기의 자유진영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를 꺼려했음에도, 자유진영의 사람들은 카뮈의 글을 선전용으로서 십분 활용했다. 이분법과 진영논리, 즉 적의 적은 친구라는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전법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카뮈가 지향하던 사회는 (본문의 표현에 따르면) 혁명적 조합주의이다. 마르크스주의와는 구분되는 프랑스 고유의 사회주의 사상, 아마도 프루동 같은 사람들이 추구했을 그런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념의 기준에서 볼 때 이는 틀림없는 좌파임에도, 카뮈는 당시의 좌파들과 전혀 같이하지 못했다. 지은이는 카뮈가 몇몇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언급을 피했기 때문에 자초한 면도 있다고 설명은 하지만, 결국 그의 시선은 카뮈를 역사적 비극의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사르트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참여문학론을 들고 나오며 자신의 진영을 스스로 선택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사르트르 또한 스탈린주의에 대한 (일시적이나마) 동조라는,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카뮈를 비롯해 메를로퐁티와도 등을 돌린 그는, 소련은 그저 단계나 과정일 뿐 결국 결론은 자신의 결단에 있다는 원래의 자세로 돌아오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해 몇 년이나 독자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멀고도 먼 길을 돌아서 온 것이다. 하지만 이 단계의 사르트르를 보면서도 카뮈(나 메를로퐁티)가 적극적으로 동조를 해주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은 그 때 이미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사르트르 또한 그들의 입장과 가까워진 것은 아니라는 걸 자신의 마지막 주요 저서인 『변증법적 이성비판』 에서 펼쳐나간다. 

  너는 누구인가, 물어본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은 나는 과연 사르트르인지, 카뮈인지 선택할 것을 강요당한다. 지은이가 시대가 그 선택을 강요하는 분위기를 거부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바라보기에는, 사르트르와 카뮈가 살던 그 시대와 지금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옮긴이가 이 점을 피력하면서 자신의 소감을 갈무리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단순히 아직 정치적인 지형이 정리되지 않은 한국에 살고 있기 때문인걸까, 또는 모든 시대와 모든 공간에서 모든 사람들은 사르트르와 카뮈와 같이 선택을 강요당하기 때문인걸까. 지은이의 메시지와 옮긴이의 소감을 모두 고려하면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마도 그 모두를 뛰어넘는 실존주의적 결론, 즉 ‘모든 선택은 내 안의 자유, 나의 실존으로부터 나와야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덧댐1 : 책에 오타가 제법 있습니다. 한 두개 정도면 그냥 넘어가도 좋았겠지만, 글을 읽다가 걸리는 부분이라서요. 이거 보려고 더 꼼꼼하게 책을 들여다보게 되어서, 오타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찾는 것만 늘어놓아보면…

① 75쪽 밑에서 8번째 줄에 [사람들은 그 당시에 사르트르가 이 작품을 전 사라 베른하트르에서 시테 극장으로 개명한 – 왜냐하면 그 여배우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 에서 상연했다고 비난했다.] 는 문장이 있습니다. 어떤 여배우가 연기를 했다는 건지, 상연은 시테극장에서 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② 147쪽 위에서 13번째 줄에 [마르크주의] 라고 되어있네요. 문맥상 ‘마르크스주의’.

③ 182쪽 가장 아래줄에 [마르크스주자] 라고 쓰여있는데, 문맥상 ‘마르크스주의자’인 듯.

④ 211쪽 첫문단 끝에 [담담하게]. ‘담당하게’가 맞겠네요.

⑤ 226쪽 밑에서 셋째 줄 [상항]. ‘상황’을 잘못 쓴 것 같아요.

⑥ 273쪽 밑에서 둘째 줄 [자립잡고]. ‘자리잡고’의 오타라고 봐야겠죠?

⑦ 290쪽 밑에서 8째 줄 [할 수는]. 문맥상 ‘할 수 있는’ 같아요.

⑧ 354쪽 위에서 8째 줄 [불신가 두려움을]. ‘불신과 두려움을’이라고 봐야겠습니다.

⑨ 386쪽 밑에서 11째 줄 [저널니즘]. ‘저널리즘’…

⑩ 419쪽 밑에서 8째 줄 [알제리 방문 했던 몰레는]. 어느 틈이든 ‘을’자를 집어넣어서, ‘알제리를 방문했던’이나 ‘알제리 방문을 했던’으로 바꿔야할 것 같네요.

⑪ 465쪽 첫 문장 [그리고 피식민자는 … 그 자신의 식민주의적 신경증에서 치유할 수 있다.]는 ‘치유될 수 있다’로 바꾸는 게 훨씬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또는 ‘신경증을’이라고 해도 될 것이고요.

덧댐2 : 원어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견유주의’라는 번역어는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비슷한 뜻의 ‘냉소주의’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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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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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랑은 아니지만, 『강남좌파』와 같이 진짜 현재에 집중해서 이런저런 재단질을 하는 책을 본 지가 오래 되었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을 때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또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읽어내는 감각이 내겐 많이 없는 상태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강남좌파라는 말은 유행한지 꽤 오래되었으며, 어떤 식으로든 쓰이고 있다는 것 또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 책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가장 주요한 쟁점으로 삼은 것은, ‘정말 강남좌파라는 말 - 담론이 현실을 제대로 분석해내는 도구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 책을 읽어본 결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강남좌파라는 말을 제일 처음 만들어낸 사람이 썼으며, 또한 그 의미를 규정하고 그것이 한국에만 고유하게 존재하는 현상이라는 것을 애써 강조하는 사람이 쓴 이 책인데도, 내겐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가 말하는 강남좌파는 오히려 그 규정이 너무 넓고 세부적이어서 정치엘리트 가운데 해당하지 않는 자가 거의 없고, 그가 강남좌파라고 지목하는 사람은 사실상 좌파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내세우는 정책을 설명하기에 강남좌파라는 말은 맞지 않다. 결론적으로, 지은이가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바는, 강남좌파가 독립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지역주의, 학벌사회, 정치혐오와 같은 기존하는 정치적 현상들의 효과일 뿐인 부수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던 것 같다.


강남좌파는 무엇인가

  우선 강남좌파에 대한 규정을 살펴보자. 이 책의 제목인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에도 알 수 있듯이, 지은이는 실제 주권자인 인민과는 동떨어진 정치엘리트 가운데 특정한 집단의 성격을 지칭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의미로 강남좌파를 이해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것을 긍정적인 의미로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만 국한되어있는 것 같다. 지은이도 잘 지적하고 있듯이, 강남좌파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치엘리트들의 행태를 비꼬고 공격하기 위한 용도로 탄생하였으며, 현재도 그 의미 그대로 잘 사용되고 있다.

  사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강남좌파는 이렇게 담론으로서 형성될 수 없을 정도로 의미없는 단어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며 변화를 선호하는 정치엘리트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엘리트들 또는 그들이 표방하는 정치적인 노선을 중심으로 오피니언 리더 집단이 형성된다. 그런데 그들이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상류 계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절차를 어쩔 수 없이 밟아야 하는데 이는 기득권층이 된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현상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일일 뿐, 지금 현재에도, 한국 사회에도 특이한 점은 아니다. 민주화 이전에도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강남좌파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이 주도하고 인민과 결합하여 쟁취한 것이 바로 이 땅의 민주화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현재 사용하는 강남좌파라는 어휘는, 그 의미를 확실히 뒤집어놓을 큰 계기가 없는 한 진보적 성향의 정치엘리트에 대한 비난과 질시라는 뜻을 벗어던져버리기가 힘들다. 언론의 시장점유율(즉 주도권)이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언론사들에게 넘어가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힘들다. 아마도 지은이는 이런 부정적인 속뜻을 걷어내려 이 책을 쓰지 않았나 싶지만, 내 생각엔 여의치 않아 보인다. 그리고 (지은이의 말에 따르면) 강남좌파에 유난히 주목하는 오마이뉴스가 아무리 여기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려고 애를 쓰며 몇몇 호감형 인물들을 강남좌파라고 지칭한다고 해도 한계는 여전히 놓여있다. 대표적인 강남좌파인 ‘인터넷 대통령’ 문국현이 현실에서는 5% 안팎에 불과한 표를 얻는 것만 보아도 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강남좌파는 어떤가

  그럼에도 강남좌파가 유의미한 정치현상이라면,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오히려 지은이가 강남좌파라고 열거한 사람들의 언행과 성향이다. 여기에서 이른바 좌파라고 지칭되는 그들의 정치적인 성향 또는 세계관이 드러난다. 그들의 입장을 알아보는 데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은, 지은이가 지적한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강남좌파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지은이가 강남좌파의 아이콘으로 지목한 문국현, 유시민, 문재인, 손학규, 조국 등은 어떤 식으로든 노무현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을 계승해야 한다고 말하거나 비판적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행보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자신의 자산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들을 지지하는 강남좌파 집단은 그 행보에 표를 던지는 것이다.

  명확히 실증적인 조사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세계관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추측이다. 그러나 강남좌파의 아이콘들이 내세우는 정치적 성향은 그 책에서 보여지는 샌델의 공동체중심주의적 사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를 수용하고, 경제운용의 중심적인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경제는 공동체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전복의 위기를 막기 위한 ‘건전한 자본주의’를 표방한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조장하는 정치적 불평등을 ‘건전한’ 정치운용을 통해서 교정하는 것이다. 이런 공동체가 원활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개인보다는 공동체’라는 사고관을 심어주는 것이 필수이다. 전복의 위기에서 헌신하는 자세는 자본주의적 경제 주체의 이기심을 극복하는 끊임없는 훈련과 행동교정을 통해 길러지는 일종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것이 부유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이다. 지은이가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최근의 안철수나 박원순도 이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저 아이콘들에 대한 지지와 강남좌파 현상은 최근의 ‘안철수 효과’에서 다시 확인된 듯하다.

  이런 세계관이 어떻게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연결되는가? 그것은 그의 정책적 방향과 이미지가 결합해 만들어진 ‘노무현’이라는 이미지와 겹친다. 적어도 지지자들의 입장에서 보기에, 그의 삶은 한국의 정치상황을 바꾸어나가기 위한 여정이었다. 실제로 그런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승부를 거는 모습을 여러번 연출하였으며, 그것이 그의 이미지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실제 정책의 방향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성향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였다. 그것은 기나긴 고민 끝에 선택한 집권세력과의 타협일 수도 있으며,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면 정치의 영역이 반드시 부패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결정일 수도 있다. 이것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내려지기 전에 구시대적 집권층을 대표하는 보수세력은 그를 깎아내리기에 급급했고, 이것은 그의 자살이라는 사건과 함께 ‘노무현’이라는 아이콘을 실제의 정책적 방향과 기존의 이미지가 가장 긍정적인 모습으로 결합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강남좌파가 기대고 있는 것

  이런 것들이, 지은이가 열거한 강남좌파의 여러 아이콘들과 그들에 대한 언론의 시각, 그리고 그의 평가를 읽으면서 내린 결론이다.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정치적인 인물을 선정하고, 그에 대한 각종 평론과 신문기사를 끊임없이 스크랩하며 차곡차곡 자료를 모아 비교적 객관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제시한 것은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할 만 하겠다. 그러나 그 이외에 달리 특별하게 꼽을만한 점은 별로 없었다.

  혹 지은이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책의 말미에 가면서 내 생각은 이런 쪽으로 더 옮겨갔다. 강남좌파라는 현상을 분석하는 데 박근혜와 오세훈의 이야기가 들어가야 할 이유, 또한 강남좌파 현상의 중요한 축이라면서 학벌문제에 대해 굳이 언급한 이유. 이것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은, ‘강남좌파’라는 현상이 갑자기 튀어나온 무언가가 아니라 기존에 한국을 지배하고 있던 몇몇 정치적 성향들의 교집합에서 나타난 부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 기존의 정치적 성향이란, 이 책에 근거해서 볼 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지역패권이다. 호남 진보(좌파) - 영남 보수라는 구도는 이념적인 구분이기도 하지만 투표에서도 나타나는, 실제로 존재하는 성향이기도 하다. 강남좌파는 얼핏 보기에 이 틀에서는 잡히지 않는 새로운 욕망의 분출인 것 같지만, 적어도 지은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 까닭은 역시나 노무현 전 대통령인데, 그가 강남좌파의 이미지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강남좌파가 아니라 이른바 ‘영남 진보’이다. 즉, 지역패권의 틀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엿보이는 결과물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양한 정치적 성향 가운데 하나가 부각된 것이 아니라, 호남-영남과 진보-보수라는 기존의 틀의 이종교배에 불과하다. 그래서 결국에는 지역패권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는다. 뿐만 아니라, 결국 지역패권을 이미 쥐고 있는 정치세력을 극복할 수 없게 된다.

  둘째는 학벌이다. 지은이는 강남으로 대표되는 생활수준을 누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고학력자들도 강남좌파에 포함시키는데, 그들은 문화자본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즉, 생활수준은 아니더라도 오피니언 리더의 역할은 충분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기회는 철저하게 학벌구조에서 얼마나 상층에 있느냐에 따라 달리 주어진다. 즉 강남좌파로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학벌구조를 더욱 공고히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들이 어느정도 ‘좌파’적 성향을 가지게 된 것도, 학벌에서 상층에 진입했기에 가질 수 있었던 문제의식이라고 보는 것도 타당하다. 이것은 이 사회의 구조를 있는 그대로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강북 우파’의 반대다.

  셋째는 대중추수주의, 즉 포퓰리즘이다. 강남좌파라는 말이 의지하고 있는 가장 강한 동력이 바로 이것이다. 진보적인 견해를 표방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는 자신의 견해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상층부의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워 ‘강북 우파’의 표를 얻고자 하는 보수 세력의 정치적인 전략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포퓰리즘을 적극적으로 동원한 사람이 바로 오세훈이고, 현재까지 이 포퓰리즘에 의지해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로 언급되던 사람이 박근혜이다. 또한 강남좌파들이 구체적인 정책 없이 ‘바람직한 것’에 대한 견해와 세계관만으로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보하는 것 또한 포퓰리즘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어느 쪽이든, 정책대결공간인 대의제를 우회하여 인민의 직접적인 지지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따라서 강남좌파를 고유한 색깔이 있는 사건으로 보는 것은, 아직까지는 유보하고 싶다. 나아가서, 이것이 과연 의미있는 담론인가, 기존의 담론으로도 재단할 수 있는 방법이 충분히 있으며 지은이 또한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 또한 충분히 제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진보적인 사람들이 집권을 꿈꾼다면, 끝내 강남좌파는 그들의 이미지를 깎아내릴 정치적 수사이며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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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정치사상가 아렌트

  아렌트는 그의 연구주제인 ‘전체주의’ 때문에 현대에 가장 주목받는 정치사상가 가운데 한 명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전체주의의 기원』, 또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으로 알려져 있다. 『아렌트 읽기』의 지은이인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은 그에게 수학한 제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인정받는다는 아렌트 전기의 지은이이기도 하다. 이런 점들은 이 책을 고르는데 아주 중요한 정보이며, 동시에 이 책을 설명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책에는 아렌트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이 등장하고, 지은이가 아렌트와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도 간혹 등장한다. 또한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않고 그와(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현재 체계적으로 정리중인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강의록과 편지에 대한 언급도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가 쓴 900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의 아렌트 전기의 축약본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단순히 그의 저서들을 요약, 정리한 것 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애쓴 느낌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목차는 크게 네 부분으로 짜여있다. ① 서론을 대신한 그의 삶에 대한 지은이의 간략한 서술, ②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③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서술, ④ (현재도 진행중인 것으로 보이는) 『정신의 삶』에 대한 자신의 연구 성과. 하지만 이 네 부분이 무 자르듯이 똑 나누어지지 않는다. 아렌트의 문제의식은 분명히 전체주의로부터 출발하였으나, 그것을 실증적으로 다루지 않고 전체주의가 가능하게 된 인간의 삶의 특정한 상황과 연관지어 다룬다. 그 상황에 대한 연구가 바로 『인간의 조건』 의 내용이 된다. 『정신의 삶』 은 말년의 아렌트가 그 조건들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탐구와 자신의 사색의 결과를 정리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정신의 삶』의 결론은, (이 책에 따르면) 다시 ‘전체주의’로 돌아간다. 즉, 특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돌파해 나갈 수 있는 인간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서술인 것이다.

  따라서, 글의 처음에서 결론부터 일단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아렌트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치 현실에 대한 교범’ 역할을 하는 『전체주의의 기원』 에 대한 설명이 담긴 초반부에 비해서, 그런 교범의 역할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사유의 바다로 들어가는 후반부로 갈수록 논의가 깊어지고 넓어지며 어려워지는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아렌트의 사유의 역사의 일부이므로, 그리고 단순히 전체주의의 제도, 혹은 집권세력을 변화시키는 것 보다는 인간의 본질적 측면에서 어떤 능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앞으로 그와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을 줄이는 더욱 근본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리고, 아주 쉬운 말이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그래서 우리에게 더 귀감이 될법한 말들이기에 더욱 그 내용이 인상깊게 남는다. 나 스스로가 아렌트의 저서를 직접 읽어본 적이 한 번도 없기에, 이런 느낌이 더욱 강한 것 같다.


제 4의 책, 『혁명론』

  전체적인 인상과 더불어서, 이 책을 읽으면서 아렌트에 대해 생기는 호기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혁명론』 이라는 책이 어떤 내용일까 하는 궁금증이다. 이 책의 목차는 주요 저서 세 권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지만, 사실 이 책 또한 그 세 권에 못지않은 빈도로 등장한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다루는 부분은 정치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런 맥락에서 『혁명론』은 스탈린 체제(그리고 아마도 마르크스-레닌 주의의 핵심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체주의라고 규정했을 때 우리가 혁명의 모델로 삼아야 하는 실제 정치혁명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또한 『인간의 조건』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혁명이 전체주의가 되지 않기 위한 조건으로서 인간의 상황들, 그리고 그런 상황들이 구현되었을 때의 인간들은 어떤 태도를 갖추었는가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혁명론』에 대한 내용이 부각된다.

  이 두 맥락으로 미루어볼 때, 아렌트의 『혁명론』은 어떻게 혁명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정치적 변혁을 단순히 역사적으로 기술한 책은 분명히 아닌 것 같다. 반대로 혁명의 기초를 이루는 철학적 태도 내지는 정치구조를 바꾸기 위한 행동지침을 다루는 혁명의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다. 이 둘 가운데 어느 한쪽에 치우친 책이었다면, 이 책은 위의 두 맥락에 모두 등장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미루어 짐작하기로는, 그 실체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지만 혁명의 순간에는 매우 중요한 혁명의 요소, 즉 ‘혁명의 정신’에 대한 기술일 것이다. 그 책을 보지 않았으니 이 또한 짐작일 뿐이지만.

  『아렌트 읽기』에 등장한 『혁명론』 언급을 바탕으로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아렌트는 정치적 혁명의 형태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고 한다. 하나는 프랑스 유형인데, 아렌트는 이 유형의 대표인 프랑스 혁명을 포함한 거의 모든 혁명이 이 유형을 따라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혁명에서는 혁명지도자들이 대중을 의도적으로 조직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미래를 선포하며, 그들의 행동이 어떤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청사진을 달성하기 위해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윤리적 덕목을 내세워 혁명에 수반되는(혹은 지도자들이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지배권력의 교체로 혁명이 완수된다.

  그런데 아렌트는, 이러한 유형의 혁명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그것은 아예 혁명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데,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지배-피지배의 구분이라는 정치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명분이 무엇이 되었든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정치와 거의 다를 것이 없다. 그가 보기에, 폭력을 동반하는 정치는 전체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다. 그것은 사실상 인간에게서 정치적인 행위를 할 수 없도록 (아렌트가 쓰는 의미에 따른) 정치적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가 말하는 정치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능력이기에 정치적 감각의 마비는 곧 인간으로서의 자격의 상실을 뜻한다. 그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인민의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마비시키는 정치, 그것이 바로 전체주의이다. 그러므로 프랑스 유형의 혁명이란, 혁명이 아니라 전체주의에 매우 근접해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또 다른 유형은 미국 유형이다. 아렌트는 이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우선 가장 단순한 이유는, 인민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폭력이 동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그것은 의도적 조직이 아닌, 자발적인 결합과 끝없는 토론에 따르는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미국 유형의 혁명의 특징은, 혁명의 지도자들(지도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의문스러운 어떤 ‘주도자’들)이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 즉 자신들이 꾸릴 정치공동체의 미래를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 공동체를 구성한 이후의 사람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영향 아래 놓일 (공동체 구성원 자신을 포함한) 미래의 세대들에게 내맡겨진다. 이것은 아렌트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감각을 보장해준다. 이 정치적 감각의 상호교차점이 정치적인 것의 장소, 즉 공공의 영역이 된다.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적 감각은, 그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보았던 ‘행위’개념, 즉 창조성 - 자유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다. 그 어떤 인간도, 어떤 행위를 할 때에는 그 행위에 전제되는 여러 상황들, 행동의 뿌리들이 있다. 그 뿌리란, 특정한 정치공동체가 지금까지 형성해온 행동 양식인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정치공동체 구성원 전체와 연관되어있다. 그러나 아렌트는 결코 그것들이 그 행위가 어떤 모습일지 결정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혹은, 그렇게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와 연관되어있지만 결코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어떤 모습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게 되고, 이것은 창조 – 자유 – 행위가 된다. 이 결정성을 승인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가, 정치공동체가 전체주의적 가능성을 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칸트주의자 아렌트

  이렇게 아렌트의 관심은 전체주의라는 일종의 정치적인 현상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 즉 창조 – 자유 – 행위라는 문제로 넘어오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긴 나머지 한 가지 호기심은, 여기에는 아렌트의 이름 만큼이나 고전적인 철학자들의 이름, 특히 칸트의 이름이 아주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특히 자유와 정치의 문제에 있어서, 아렌트는 칸트에게 배우고 또 그를 넘어서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고 할만큼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칸트 자체도 인간의 자유라는 문제에 상당히 깊게 천착한 철학자이고, 역사철학이라는 이름을 빌어 세계적인 관점에서 정치적인 전망을 제시한 철학자인 만큼 칸트와 아렌트 사이에는 분명한 접점이 있다.

  가장 핵심적인 접점은 바로 ‘세계시민적 관점’일 것이다. 정치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칸트는 이전의 정치사상가, 또는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보편사’의 관점, 즉 이 세계의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어떤 관점에서 사고해보라고 제안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공통된 관점에서 역사를 통찰했을 때 특별한 공동체의 역사가 아닌 ‘보편사’가 드러날 것이라고 제언한다. 하지만 그 보편사의 순간(또는 역사의 종말)이 언제, 어떻게 도래할 것인지에 대한 말은 아껴둔 채, 그 때에 등장할 정부는 이미 존재하는 여러 공동체들이 각자의 권리, 즉 자유를 보장받지만 동시에 그 권리를 도덕의 이름으로 제한할 수 있는 느슨한 연대체가 될 것이라고만(되어야 한다고만?) 슬쩍 이야기한다.

  아렌트의 『혁명론』으로 이야기를 다시 돌리면, 미국의 건국은 칸트가 이야기했던 과정이 실제로 역사에 드러난 사건이 된다. 아렌트는 칸트의 관점을 미국의 건국의 사례를 들며 조금 더 급진적으로 끌고 간다. 즉, 칸트가 제안했던 보편사란, 사실 칸트 스스로도 그것이 정말 존재할까 확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제안한 세계적 정치공동체의 바람직한 모습, 즉 가장 구체적인 개인에서부터 최고 수준의 연대체에 이르기까지 미래를 창조해갈 능력 – 즉 자유를 지속적으로 보장하는 ‘그’ 정치체제를 만들기 위해 우리의 정치적 감각 – 역시 자유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렌트가 ‘자유’라는 개념은, 칸트가 ‘자율’이라는 말로 설명하려고 했던 것을 포함하며 동시에 자율을 추진하는 동기가 이성이 아닌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실천이성)은 자신의 행동의 원칙을 확립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도약 자체까지 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확립한 원칙이 실천이성이 아닌 또 다른 이성, 즉 순수이성과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연과 필연, 자유와 자연의 모순이라는 고전적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칸트가 이 둘(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매개하는 인간의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판단력에서, 미학이 아닌 정치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자율을 통해 도덕적 원칙을 확립하면서도, 판단에 의해 그 원칙을 보편적 법칙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사고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곧 다른 이의 관점에 대한 고려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지은이는 이것이 『정신의 삶』에서 쓰지 못한 부분, 즉 ‘판단함’에 대한 아렌트의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전체주의 현상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한 그의 사유는 이렇게 자유에 대한 사색, 그리고 현대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뛰어넘을 정치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실상 현재 출판된 『정신의 삶』은 ‘사유’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를, 그리고 ‘의지’ 부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두 학자는 그게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델 – 자유에 기반한 소통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세계시민적 인간상(소크라테스)의 사례, 그리고 이러한 정치가 가능하게 하기 위한 비이성적 능력에 대한 고찰의 좋은 사례를 남긴 선배 철학자(아우구스티누스)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가 진정 맺고 싶었던 결론, 그리고 제시하고 싶었던 것은 쓰여지지 않은 ‘판단함’이었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그리고 현실과의 접점

  이런 생각의 궤적을 따라서, 아렌트는 더 이상 정치사상가나 정치이론가가 아닌 정치철학자 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자가 된다. 나는 그를 전체주의 현상에 대해 다룬 정치사상가나 이론가로만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이런 구도는 상당히 흥미로웠고, 철학자로서의 아렌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을 던져주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해 짧게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보겠다. 첫째, 철학하는 사람들이 항상 강조하듯이, 그리고 아렌트가 그랬듯이, 이 책은 단순히 아렌트에 대한 입문서로 끝나지 않는다. 지은이는 분량이 많지 않은 이 책에 아렌트 철학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아내면서도, 동시에 ‘아렌트가 만약 지금까지 살아있었더라면’ 이라는 말로 운을 떼며 이것이 현재의 정치 현상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과감하게 적어내고 있다. 아렌트의 학문적 태도가 그랬듯이 매우 조심스럽게 제안하면서도, 그 틀이 매우 합리적으로 현상을 분석해낼 수 있는 도구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의 철학이 현실, 특히 현대의 정치와 결코 떨어질 수 없다는 지은이의 입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폭력에 매우 민감한 아렌트의 이론의 체계에 비추어 볼 때,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정치현상인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슬로건에 대한 비판은 매우 매섭다. 제국주의적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며 자기 안에 스스로 전체주의의 요소를 생성시켜나가는 미국에 대한 비판은 물론, 그것에 반대하기 위해 테러라는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며 그것을 자신의 세력을 결집하는 데 이용하는 무국적 테러 세력에 대한 비판 또한 놓치지 않는다. 양자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는 사람들은 모두 양측의 테러로 인해 겁에 질려 정치적 감각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적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그대로 하게 된다.’ (특히 미국의 경우) 아렌트의 관점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 자체가 그 사회가 완전히 전체주의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언제든지 전체주의 현상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에 대한 아렌트의 입장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다. 분명히 현재 무차별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긴 하지만, 또 그것은 철저하게 ‘아렌트 연구자’인 지은이의 관점에 한정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렌트는 (이 책의 내용으로만 비추어보자면)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며, 그가 이상적인 정치로 제시한 민주주의의 내용은 상당부분 미국의 민주주의를 모델로 하고 있다. 반면, 건국 당시가 아닌 그 이후의 미국, 특히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아렌트 말년의 미국의 상황에 대해서는 분명 아렌트 스스로도 비판적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체주의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거나, 혹은 ‘전체주의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일 뿐 그 자체가 전체주의는 아니라고 했던 점 같은 것을 미루어보면, 혹시 그가 미국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나 스스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정리를 해야할지 몰라 그냥 의문부호로만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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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택광이라 하면 요즈음 주목받기 시작한 좌파적 성향의 평론가인데, 사실은 난 그에 대해서 이 이상 무엇이라 말을 할 수가 없다. 그가 쓴 글을 읽어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내가 책읽기, 여러 가지 담론에 대한 주목에 소홀했다는 것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내 주위 여기저기에서 이름만 무성할 뿐, 내가 관심을 두는 여러 분야와는 접점이 잘 생기지 않았다. 크게 보자면 정치적인 성향이 일치하는데다가 문화이론 내지는 철학으로 그와 내가 묶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결론부터 말해서) 마르크스에서 라캉으로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랑시에르에 주목하는 그의 길은 내가 가고자 하는 길과는 들어맞지 않았다.

  이 책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있다. 하나는 자신의 이론적 입장에 대한 설명 비슷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간의 사회현상들을 분석한 결과를 그려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갈래가 어떤 지점에서 연결되는지, 그것이 명확하지가 않다. 이론 부분에서는 문화비평이라는 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문화비평이라는 영역을 개척한 것으로 간주되는 신칸트학파에 대한 개괄이 있다. 그리고 그들과는 관점을 공유하면서 또 다른, 가장 현대적인 감각을 갖추었다고 할만한 문화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벤야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다른 이야기들도 있지만 내 기억에 가장 깊게 남을만큼 반복해서 등장하고 길게 설명된 것은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다른 한 부분, 즉 그가 사회현상을 직접 분석한 부분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는 ‘욕망’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상징이다. 그리고 그는 상징을 문화와 거의 동일한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널리 알려져있듯, 이 두 단어를 가장 많이, 빈번하게 사용하는 이론가는 바로 라캉이다. 자주 사용하는 단어의 빈도수에 걸맞게, 그의 사회현상 분석 또한 상상계/상징계/실재계라는 라캉의 구도를 거의 그대로 끌어와서 이야기한다. 궁극적인 무엇, 사건의 원인, 사람들이 열망하는 무엇은 실재계로서 실재하지만 절대 인지할 수는 없는 ‘그 무언가’가 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를 찾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특정한 문화현상으로서 드러난다. 이것이 곧 상징이며, 어떤 때에는 상상계의 산물이기도 하다. 최근에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한 이론가인 랑시에르에 이르면, 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나로서는 종잡을 길이 없어 그저 그가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했다.

  이상한 것은, 그가 문화비평과 사회현상 분석의 방법론이라고 그토록 강조하면서 적었던 ‘철학’의 내용들이 이상하리만치 실제 비평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질문을 붙잡고 늘어져야만 했다. 단적으로 말해, 비평의 방법이라는 이론에 대한 설명에선 신칸트학파와 벤야민을 이야기하고, 실제 비평할 때는 라캉과 랑시에르를 인용하고 있다. 일관성을 찾기 힘들다. 대체 왜, 이럴거면 이론 파트에서도 자신이 지금까지 연구한 학자들 – 라캉과 랑시에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나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조금은, 뜬금없는 무리수 같은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신칸트학파를 칸트와 나눌 수 있는 이유는 인식론적인 입장의 차이 때문이다. 신칸트학파 사람들은, 칸트의 범주 개념을 무한히 펼쳐놓는다. 이는 칸트가 범주를 양, 질, 관계, 양상이라는 유한한 네 가지 분류체계(와 12개념으)로 제한한 것과는 대비된다. 범주란 인식의 토대를 만들어주는 틀이다. 칸트는 유한한 범주로 보편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려 했지만, 신칸트학파들은 이런 범주를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문화는 바로 한 사회가 이런 인식의 틀, 즉 범주들을 역사적으로 축적시킨 결과이며 따라서 그것은 그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자라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인식의 매개로 작용한다. 이것이 신칸트학파가 문화연구, 즉 사회현상에 대한 연구를 중요하게 여기고 이에 대한 학적인 연구를 최초로 시작한 까닭이다.

  이런 (내가 알고 있는 한의) 신칸트학파의 개괄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이 강조하는 무한한 범주와 인식의 구분이 라캉의 상징(상상)/실재계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이다. 범주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산물이고, 그것은 인식을 결정짓는다. 또한 칸트가 정의한 범주의 정의에 따라서, 사실 인간은 범주 없이는 어떤 인식도 불가능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범주 자체가 인식을 결정짓는다. 라캉의 상징 또한 실재에 접근하는 매개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가 대타자라는 말에서 강조하듯이 어떤 의미에서도 실재(계) 그 자체에 인간은 접근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오로지 상징(계)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신칸트학파의 범주와 라캉의 상징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신칸트학파에 대한 신나는 설명은 어쩌면 라캉의 이론적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간접적 방법일 수도 있다.

  내가 나름대로 조악하게 맞춰본 이 입장이 맞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내겐 어떻게 해서든 이 공백을 메워야만 했고, 그 까닭은 이론 부분을 벗어나자마자 뜬금없이 (내 추측에 의하면) 라캉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좀 더 친절하게 부가되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회현상 분석에 들어가고 나서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들이 ‘중산층의 욕망’이 반영된 ‘쾌락의 평등주의’에 입각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가 아마도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가장 기본적인 틀인 것 같다. 쾌락의 평등주의는 주로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의미가 담긴 현상을 분석할 때 유용하게 쓰이는 것 같고, 중산층의 욕망은 모든 사회현상이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문화적 저변으로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런 그의 조감도에 대해서는, 그것이 적절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 내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입장은 못되는 것 같다. 실제로 그가 쓴 꼭지들 가운데서는 흥미로운 독법들도 몇몇 있었기에, 그저 단순한 이론적 이념의 소산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종합해보면, 그의 문화비평은 라캉(그리고 랑시에르)가 세운 이론을 방법으로 사용해, 중산층의 욕망이 중심이 되는 쾌락의 평등주의를 보여주려고 하는 지속적인 노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래서 글을 주욱 읽어내리다 보면, 그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다름 아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숨은 구조에 대해 관찰해보기로 하자.’ 이다. 그 구조란 다름아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이 두 가지, 바로 그것이다. 대개 모든 글의 구조가 이런 식으로 짜여있다.

  좋은 말로는 확고한 그의 시선 아래 이 사회의 현상들을 여기저기에 배치하여 자기 입장의 설득력을 높이려고 하는 포부로 읽힌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그가 개념화한 ‘문화비평’이라는 장르 자체가 지닌 태생적 한계일 수도 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문화비평의 목적은 ‘사회적인 현상을 통해 사람들을 그렇게 움직이게끔 만드는 구조를 포착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문화비평 영역을 처음으로 개척한 신칸트학파, 베버, 짐멜, 벤야민 등의 인물들은 다양한 사회현상에서 ‘모더니티’라는 단 하나의 주제를 읽어내고 여기에 천착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가 무의식 중에(혹은 드러내놓고) 이런 학자들의 태도를 따라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나, 다양한 사회현상에 대한 분석, ‘지금 여기에 대한 비평’이라는 광고문구를 달아놓았지만 사실 그가 내리는 결론은 거의 모든 글에서 똑같다. 그래서, 그가 지어놓은 틀의 적절함보다는 오히려 반복의 지겨움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가 제기한 분석의 과정이나 결과가 아니가 그가 선정한 여러 가지 사건 자체들일 것이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 그리고 실제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잊혀진 사건들, 이 책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복각이다. 시류에 대한 비평을 실은 책들이 대개 이런 의미를 지니게 마련이지만, 이 책은 조금 남다른 데가 있다. 그의 관심분야가 넓어서인지, 아니면 그만큼 한국에서 많은 사건들이 있어서인지, 그는 거의 모든 사건과 사고들에 대해서 분석의 틀을 들이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는 지금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시대순, 의미순으로 차분하게 되짚어보는 데 더 큰 도움을 준 책이었다.

덧댐1. 딱 하나, 정말 인상깊게 남은 꼭지가 하나 있다. 예전에 개그콘서트에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던 코너인 ‘마빡이’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가. 그는 이것을 무의미한 노동이라는 개념과 연결지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만큼은 책을 덮고 난 다음에도 머릿속에 웃음과 감동으로 내내 남았다. 실제 개그콘서트의 마빡이보다는, 오히려 그가 쓴 마빡이에 대한 분석에 난 더 크고 즐겁게 웃었다.

덧댐2. 334페이지 각주 번호가 어긋났고, 357페이지 개그콘'스'트라고 인쇄된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마빡이 부분을 참 재미있게 보고있는데 콘'스'트라고 적혀있어서 김이 좀 샜네요. 다음 쇄에서는 아마 고쳐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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