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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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유시민을 읽는다. 원치 않는 이유로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은게 벌써 몇 년 전인지. 유시민을 읽으면서 항상 생각한다. 항소이유서를 썼을 때나, 참여정부의 이데올로그로 활동했을 때나, 정치인에서 지식인이자 문필가로서 다시 돌아온 현재에도 그의 글은 언제나 편안하면서 날카롭다. 그리고 환갑을 바라보면서도 그는 계속 자신의 글을 갈고 닦으면서, 항상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것 같다. 무협만화의 성실한 절정고수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런 유시민이 자신의 뒤를 돌아보는 역사서를 썼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우선 아주 넓은 분야에 걸쳐서 잊어서는 안되는 사건을 빠짐없이 언급하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물론 큰 목차는 경제-정치사의 주요한 사건을 언급하는 기존의 역사서술의 틀을 따르고 있지만, 그 사건이 가져다준 사회-문화적 파급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⅓ 정도는 아는 내용이었고, ⅓ 정도는 타임라인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헷갈리는 내용이었고, 나머지 ⅓ 정도는 잊고 있었거나 모르는 내용이었다. 유시민이 정리한 현대사를 보며, 나도 나름대로 내가 알고 있던 것을 재정리-환기할 수 있었다.


역사서가 본질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건조함에도 불구하고, 유시민은 이 책에 나름의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내 눈에 그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의 현대사라는 혼란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던 자신의 기억을 중간중간에 삽입시킨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먼 사건이나 풍경일 때 그의 서술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만 같다. 그가 겪었던 것은 곧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겪은 사건이기도 하다. 물론 교사의 아들이며 인문계 학교에 진학해 중고생 시절 내내 전교 수위권을 놓치지 않았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생이자 독일 유학파인 유시민과, 소규모 자영농의 아들-딸이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바로 생계에 뛰어든 부모님의 사고의 구조가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어린 시절에 관한 기억에선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생동감을 부여하는 다른 한 가지 방식은, 잊을 만 하면 등장하는 실명 언급이다. 2장의 서두에 인용된 말마따나, “300년을 30년에 압축해서 경험한” 우리 현대사를 제대로 기술하는데는 아주 많은 지면이 필요하며, 따라서 현대사 책의 저자라면 효율적 기술을 위해 지면을 아껴야만 할 것이다. 그럼에도 유시민은 특정한 사건을 설명하며 지나치다 싶을 만큼 연루된 인물을 일일이 거론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이 그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즉, 언급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인물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몇몇 이름들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현대(2010년대!!!) 한국 정치계의 주요 인물들이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역대 대통령과 국무총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직업정치인의 주류로 간주되는 이른바 “386” 친구들(심재철, 우상호, 이인영, 송영길 등)과 욕을 입에 달고 살던 운동권 시절 친구 심상정 등. 심지어 아프리카TV 사장 문용식의 이름도 등장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이름을 하나하나 부름으로써, 이 책은 현대사가 단순히 역사가 아니라 현재라는 사실을 계속 환기시킨다.


이렇게 생동감을 부여하는 그의 전략에서, 나는 교훈으로서의 역사라는 유시민의 관점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라는 하나의 단어에는, 사건의 진상을 명확하게 밝혀내는 사실로서의 역사와, 인간 사회의 반복되는 실수를 경계하게 만들고 도덕적 모범을 보여주는 교훈으로서의 역사라는 두 가지 뜻이 담겨있다. 후자의 관점을 채택한다면, 역사적 사건은 과거에 박제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로”(에필로그)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실험실의 비교대조군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무턱대고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서 말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건에 대한 건조한 기술과 해석의 관점이 중요하게 대두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수적 연구자들의 저서도 (다소나마) 언급되어 있다는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예를 들어, 이승만을 언급하는 책의 초반부에 그가 유영익의 책을 인용한 것을 보고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유영익은 역사학계의 대표적인 이승만 무조건 찬양론자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슈인 북한 문제와 복지정책의 확대에 관한 서술에서도, 자신이 보수적인 학자들의 연구도 참고했다는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유시민의 한국현대사는, 최근의 정치-사회적 후퇴에 대해 민중이 반성하고 맞서게 만들어주는 도구로서의 이야기다. 우리는 1992년 서해 훼리 사건을 겪었으면서 2014년에 세월호를 또 겪는다. 박정희 전두환의 폭압통치는 이명박과 박근혜 시대에 부활했다. 그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이기에 우리는 과거의 저항과 무기력의 경험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물론 무엇을 배울지는 유시민이 정리한 한국현대사를 읽는 독자 각자의 몫일테다.


이처럼 이 책은 역사에 대한 확고한 관점이 있고, 자신이 의도한 (것처럼 보이는) 목적을 훌륭하게 성취하고 있는 좋은 책이다. 하지만 나는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이 기분의 원천은, 결국 민주정부 10년 특히 참여정부 시기에 대한 내 박한 평가다. 그래서 이 걸리적거림이 유시민의 역사서술이 실제로 가진 한계인지, 아니면 유시민에 대한 내 편견이 반영된 것인지 명확하게 말할 수가 없다. 이런 마음 한 켠의 찜찜함만 묻어둔다면, 참으로 간만에 좋은 책을 읽었다고 친구들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된다면, 59년생으로 유시민과 동갑인 내 어머니와 이 책을 같이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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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0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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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연』은 사랑에 관한 책이다. 이 짧은 말은 『향연』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해주면서도, 동시에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누군가에겐 매력적일 수도, 누군가에겐 지루할 수도, 누군가에겐 말도 안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향연』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사랑에 관해 논한다. 파이드로스는 모든 역경을 뛰어넘는 영웅적인 행위의 원천으로서 사랑을 말한다. 파우나시아스는 사랑의 대상에 따라 세속적 사랑과 고귀한 사랑은 나누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만이 우리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에뤽시마코스는 조화를 사랑으로 정의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달을 닮은 인간의 원형에 대한 설화를 죽 늘어놓으며, 하나됨(충만함)을 향한 욕구를 사랑과 동일시한다. 아가톤은 그 자체로 칭찬할만한 것으로서 사랑의 여러 측면들을 밝히고, 소크라테스는 자기 생각을 디오티마에게 들은 양 아가톤을 논박한다. 그 와중에 만취한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소크라테스를 얼마나 사랑하며, 또 소크라테스는 얼마나 사랑받을만한 사람인지를 떠드느라 정신이 없다.


  이렇듯, 그들이 사랑을 논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향연』이 사랑에 관한 책이라는 설명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우선 도입부터, 전해들은 것을 전해들었다고 전해줌으로써 이 이야기에는 논리적 연결고리 따위는 뭉텅이로 빠져있을 수 있다는 점을 예고한다. 등장인물들은 때로는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다가도, 한 페이지 뒤에선 사랑의 상징인 에로스 신에 관해 떠들고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껍데기만 같을 뿐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 생활에서는 전혀 들어있지 않은 의미를 구겨넣기도 한다. 등장인물들과 우리 사이의 시공간적 차이와 함께, 이런 중구난방식 논의는 우리가 이 책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거대한 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의 이해를 가리는 “거대한 문화적 맥락의 숲”(독일 철학자 빌렘 플루서의 표현)을 조심스럽게 헤쳐나가는 것이 고전읽기의 묘미인 것 같다.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나, 내가 지금까지 사랑한다고 말하고 다녔던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가,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여자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나는 지금껏 결핍을 채우는 것을 사랑이라고 간주해왔고, 내 주변 사람들을 사실상 착취해온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착취는 사랑에 대한 나의 잘못된 관념과, 사랑“한다”는 내 생각을 드러낼 때 내가 보여준 수많은 잘못들로 설명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의 사랑은 앞으로 어때야할까. 나는 어떤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으며, 그럴만한 자격은 어떻게 갖출 수 있을까. 낯선 표현방식이지만, 그래서 난 사랑에 관한 많은 고민과 그에 대한 단편적인 대답이 이 책에 담겨있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렵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디오티마 부분부터는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납득할 수 없어서, 한 문장을 두 세 번씩 되풀이하며 두 번이나 읽어내려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책을 다 이해했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특히, 모든 성질이나 대상에 그에 대응하는 형상이 존재할 것이라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의 발상은 여전히 내 취향이 아니다. 그저,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거대한 담벼락같은 어려움을 피하거나 넘기기를 바랄 뿐이다.


PS. 명색이 철학으로 석사"씩이나" 한 자로서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이 책을 한 번 완독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학교 다닐 때 읽었던 플라톤의 작품들(에우튀프론이 묶여있는 박종현 번역본)에 관해서 내가 갖고 있던 인상보다 훨씬 더 난이도가 높았고, 독해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철학사에서 유명한 그리고 매우 어려운 작품을 하나 클리어한 것이 뿌듯하다.


PS2. 번역이나 다른 판본들과의 비교 같은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어쨌든 번역된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다만 읽으면서 혼란스러웠던 것은 미주와 각주를 동시에 쓴 이 책의 방침인데, 한꺼번에 미주로 처리하거나 한꺼번에 각주로 처리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학술적인 내용+문화적 맥락에 대한 설명인 것은 별 차이 없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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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푸어 - 항상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을 위한 일 가사 휴식 균형 잡기
브리짓 슐트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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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두 번째 읽는다. 처음 읽었을 때 정말 좋았고, 그래서 트레바리 24에서도 같이 읽어보고자 추천했다. 다행히도 읽게 되었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다른 두 가지 책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하나는 미국의 정치학자 에스핑앤더슨의 “복지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 모임에서 두 달 전에 읽었던 “출퇴근의 역사”.


에스핑앤더슨은 국가 단위의 복지정책을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별한다. 미국식 자유주의형, 독일식 보수주의형, 그리고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형. 이 관점에서 보면, "타임푸어"는 자유주의형 복지국가의 워킹맘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 모델의 단점을 분석한 뒤에 그 대안으로서 사민주의 유형을 살펴보고, 다양한 요소들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책이다.


세 유형 중에 저자인 슐트가 살고 있는 자유주의 복지국가는, 다른 두 유형에 비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 반면 사영기업이 복지서비스를 전담하기 때문에 구매비용이 높고, 복지에 대한 투자와 개인적 실패의 부담을 전적으로 개인이 짊어져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다양한 정체성(언론인, 두 아이의 엄마, 동네 공동체의 일원 등등)이 요구하는 행위를 모두 수행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압박감, 즉 이상적인 엄마이면서 동시에 이상적인 노동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 결과가 '오염된 시간'이다.


반면 슐트가 대안으로서 탐구하는 덴마크는, 사민주의형 복지국가다. 개인의 복지에 요구되는 요소의 상당부분을 국가가 부담한다. 워킹맘에게 필요한 탄력근무에 대한 지원, 실업급여, 육아휴가와 수당 등등. 또한 국가가 다양한 가족공동체를 지원함으로써 이상적인 XX에 대한 모델도 흐릿하다. 이런 측면에서 덴마크 모델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핑앤더슨은 사민주의 유형에 장점만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유형의 가장 큰 단점은 역설적이게도 사회적 성별분화다. 다양한 정책적 지원이 강하게 보장되는 공공영역에 여성들이 많이 취직하는 반면, 사영기업은 대부분 남자로 채워진다. 이후 서로의 조건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사회적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사민주의형 국가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교직 등 여성이 많이 진출한 분야에서 발생하는 몇몇 (찌질한) 논쟁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타임푸어"는 이런 정책적 제언 외에도, 개인의 마음을 다소 풀어놓음으로써 행복을 향해 가는 길도 제시한다. 하지만 정책의 수정과 태도의 변화 어느 한 쪽만으로는 여성(과 사회구성원 전체)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선, 개인적 차원과 정치적, 문화적 차원 모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가 있다. 이런 내용을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생생하게 들려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매우 재미있으며 의미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모임에서 읽었던 “출퇴근의 역사”와도 연결지어 생각해볼 거리가 있었다. 이 책은 출퇴근이 우리가 더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비약적으로 늘려놓았으며, 앞으로 한동안 출퇴근이라는 문화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출근을 해서 일터에 고정되어 업무를 처리한 뒤에 퇴근을 해서 아늑한 집으로 돌아가는, 바로 그 모델이 계속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반대로, 슐트는 워킹맘에게 탄력근무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이야기하는 것 또한 결코 아니다) 여러 방식의 재택근무 또한, 어느 정도나마 워킹맘들의 요구사항을 채워주기도 한다. 경력을 단절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아이를 사람구실 할 정도로 키우려 한다면, 이런 근무형태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최근 화두로 떠오른 워크-라이프 밸런스, 이른바 워라밸(!!!)의 문제와 연결된다. 과연 이 균형을 맞추려면 어떤 유형의 근무가 더 알맞을까? 각각의 형태에서 균형이 무너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출퇴근에서는 출퇴근 이동 자체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다는 의견이 제시될 수 있지만, 재택근무의 경우에는 일터와 쉼터가 분리되지 않는 상황으로 인한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의견이 제시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각 유형의 장점과 단점에 관한 각자의 가치관에 달린 일인 것도 같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두 책이 제시하는 주장이 분명히 다르며, 이 두 가지는 모순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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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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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페스트』는 흑사병이 닥쳐온 어떤 폐쇄된 소도시의 1년을 응시한 결과물이다. 물론 카뮈의 글은 소설이다. 그럼에도 생동감이 넘치는 것은, 아마 불과 얼마 전에 우리 사회 또한 비슷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메르스, 혹은 그 이전에 사스, 그리고 (훨씬 증세가 가볍지만) 몇몇 여름에 찾아오는 유행성 눈병 등등. 카뮈가 묘사한 여러 사람들을 우리는 뉴스로 접했다. 게다가 어딘가 허술해보이지만 어쨌든 체계적으로 흑사병을 처리해내는 오랑 사람들의 모습에서, 카뮈를 읽는 한반도의 거주자라면 묘한 동시대성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주변을 서술하는 우리의 언론과 카뮈의 결정적 차이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사람들의 행위에 대한 서술자의 태도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욕설과 클릭수를 끌어올리려 애쓰는 인터넷 기사와는 다르게, 카뮈는 그려낼 뿐 판단하지 않는다. 보고하는 사람인 리유의 이런 태도 때문에, 나는 누구라도 욕할법한 코타르에 집중했다. 그는 보통의 삶을 견디기 힘들었던 자살미수범에서 폐쇄된 도시의 유일한 승리자인 밀수업자로 거듭났다가, 페스트가 종식되자 난동을 부려 경찰에게 끌려간다. 질병과 공포는 그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사람들의 행복은 그를 착란으로 몰아넣었다. 내 독해가 꼼꼼하지 못했던 탓인지 적어도 소설 내에서 그 원인을 직접 추적할 순 없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내 상상에 맡겼다. 해수쟁이 영감의 말처럼 “페스트가 인생”이라면, 까닭도 전례도 없이 창궐한 쥐처럼 사람들의 삶 사이로 스며드는 운명이라면, 코타르와 같은 대응방식도 결국 인간에게 열려있는 선택지 중 어떤 것이 아닐까? 비정상성 속에서 누군가는 무감각한 관료가 되어 적응하고, 누군가는 낯설음에 당황하여 허둥거리지만, 결국 운명을 깨닫고 저항하는 방식의 핵심은 지속가능성이 아닐까? 누군가는 도덕적 무책임을 선동한다고 비난할지 모른다. 어쨌든 코타르는 – 설령 그것이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명령에 의해 이뤄졌다 하더라도 – 처벌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점에서, 『페스트』는 그런 비난에서 비껴있다. 또 각 개인들이 운명에 저항하는 각각의 방식을 보여주기에, 우리는 『페스트』에서 여러 열린 선택의 과정과 결말을 약간이나마 맛볼 수 있다. 그 끝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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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의 역사 - 매일 5억 명의 직장인이 일하러 가면서 겪는 일들
이언 게이틀리 지음, 박중서 옮김 / 책세상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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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출근을 해본 적이 없다.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비슷한 경험이라면, 10년 가까이 다닌 학교 통학일거다. 경기도 버스, 환승, 도시철도, 환승, 다른 도시철도, 마지막으로 마을버스. 이 과정을 뒤집으면 집으로 향하는 길. 날마다 10분의 1, 10년의 10분의 1인 1년을 지하철에서 서있거나 앉아있었다. 한동안은 이 시간을 쓸 줄 몰라 선로 위에 버렸고, 나름대로 세워본 꼼꼼한 계획은 같은 시간에 어디론가 향하는 빽빽한 사람들 때문에 물거품이 됐다. 내게 통학은 더할바없는 지루함이었다. 저녁을 늦게까지 먹고는 친구집에서 잔 뒤 다음날 일어나고 5분만에 강의실에 도착할 때는, 내 삶의 질이 한 단계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내게 통근은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며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설명하는 이 책은, 이상했다. 마치 통근 없이 집에서 일하는 것은 사회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구시대적 태도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통근이 전국 표준시의 확립, 사회간접자본의 확산, 신기한 발명을 포함한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라니.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였다. 문학과 기술서적과 팜플렛을 오고가는 어마어마한 주석과 참고문헌이 통근의 힘을 증명해준다고 말하니,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이 책에 담겨있는 풍부한 정보를 읽다보면,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 - 대한민국의 대도시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경험이 자연스레 겹쳐보인다. 한국이 뒤늦게 압축성장을 했다고는 하지만, 여기 언급된 미국과 유럽의 상황을 볼 때 최초의 몇몇 사건들은 그렇게 많이 떨어져있지도 않았다. 서울의 통근이 사람들에게 안겨주는 압박은 다른 주요도시들도 경험했으며, 완화시키기 위한 제안도 우리의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있지 않다. 사람 사는 곳은 이리도 닮았나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글쓴이인 저자와 읽는이인 나는 미래의 통근에 도달했다. 통근이 사라진 사회는 새로운 중세가 될까, 아니면 통근이 우리에게서 뺏어가는 시간이 무한소로 수렴할까. 자동차 통근이 대세인 상황에서 대체수단은 아직 아이디어에 불과하다는 다소 비관적인 결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작 150년전에 등장한 미국 최초의 자동차가 사람이 걷는 것보다 조금 빠른 수준이었다는 것 또한 기억하고 있어야한다. 그만큼 전망은 쓸모없고, 통근은 끊임없이 진화하며, 미래는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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