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글쓰기 클래스 수강생의 교정/교열을 거친 글입니다]


고장난 열차가 달려오고, 나는 내 옆에 있는 뚱뚱한 사람을 밀어야만 열차를 멈출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선로에 있는 다섯 사람이 죽는다. 널리 알려진 트롤리 사고실험이다.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뚱뚱한 사람에 대한 정보가 구체적일수록 실험 참가자들은 뚱뚱한 사람을 밀어내는 것을 주저하거나 더 큰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이것이 정보의 구체성 탓인지, 아니면 그 뚱뚱한 사람은 어쨌든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시민이기에 죽음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상식 탓인지, 한 번쯤은 의문을 가져볼 수 있겠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주인공과 사형수 그리고 그 둘을 둘러싼 사형제도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과 사고실험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사형제도에 관한 일종의 사고실험이라고 볼 수 있다. 사형수가 내 친구라면, 적어도 내가 친구라고 느낄만큼 그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사형이 적절한 처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언젠가 집행될 것이라는 사실이 예정되어 있다면. 아마 반응은 두 가지로 갈라질 것이다. 아무리 내가 많이 “알고” 있어도 그 새끼는 죽어도 싼 놈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의 “진짜 이야기”를 들은 뒤에는 그 어떤 누구도 한 삶의 끝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고 느끼거나.
 
공지영은 이 소설 속에서 너무나도 명백하게, 조금 나쁘게 말하자면 노골적으로 후자의 편을 들고 있다. 모니카 수녀는 세상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를 위해 기도했던 역사 속의 모니카와 비슷하게) 아이들에게 헌신하듯 여러 가지 수완으로 사형수를 대한다. 수녀의 조카인 유정은 윤수의 죽음을 직접 대면하면서 조금이나마 염세적인 태도를 벗어나고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윤수의 웃음은 “조소”에서 함박웃음으로 그리고 다시 속죄의 눈물로 변화한다. 사형수가 맞이할 죽음과 우리의 생명의 끝인 죽음을 동치시키며, 이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 속에서 치유의 공간을 만들어간다. 그 대척점에 있는 사형제는, 복수라는 끔찍한 제도로 표현된다.
 
나는 이것을 ‘구체성의 승리’ 라는 단어로 줄여서 말하고 싶다. 그것이 설령 범죄에 관한 이야기이고 아무리 흉악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적어도 이 소설 속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사형수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신문이 보여주는 “가짜 이야기”들은 추상적 영역에 머물러있다. 추상적 사고방식은 참과 거짓을 나누고, 착한 사람과 나쁜 놈을 가른다. 하지만 구체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죽음 앞에 서서 선과 악이 한끗 차이로 바뀐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삶은 존중받아야 한다. 게다가 사형제를 폐지하자는 것이 그 사람들을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자고 말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죽음에 대해 한사코 반대하지만,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죽음을 매개로 맺어진 관계라는 점은 또 하나의 역설이다. 자살하려던 유정과 그를 돌보는 모니카, 사형수가 된 윤수와 그를 보러 온 모니카와 유정, 살인사건 가해자 윤수와 피해자의 어머니인 삼양동 할머니, 죽음을 염려하는 유정의 엄마와 유정… 이들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고 달가워하지 않음에도, 죽음이라는 테마는 소설의 문제의식에도, 등장인물들의 성격에도, 그리고 이 소설 속의 세계 전체에도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죽음으로 내달리는 세계를 드러내며 죽음에 반대하다니. 운명 같은 것인가? 나는 아직 대면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가끔은 내 삶의 경계를 짓는 짙은 커튼을 걷어버리는 상상을 하곤 한다. 생물학적 죽음이 되었든, 사형제가 되었든, 자살이 되었든. 내 커튼을 걷는 일에도, 남의 커튼을 치워버리는 일에도, 우리는 어쨌든 신중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런 정보도 갖지 못한 장소로 다른 사람을 떠밀어버리는 것 만큼 끔찍한 일은 또 없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게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소설 속의 윤수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복수는 감정의 일시적인 해소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나, 세계를 파괴하는 일에도 봉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구체성의 세계로 들어가 더욱 면밀하게 이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 공지영의 이 소설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론주의 개요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지음, 오유석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에 관한 내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책의 제일 끝부분에서부터 시작한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자신이 이 책에서 전개한 여러 방식의 회의주의적 논증과 다른 학파의 주장에 대한 논박이,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눈에 일어날 가능성 자체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미약한 논증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희박한 논증조차도 그에 알맞는 대상이 있다. 바로 강한 도그마다. 사람들이 강하게 믿는 교의일수록 그 교의를 벗어난 생각에 대한 고려 또한 희박할 수 밖에 없다. 섹스투스의 눈에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강한 정도의 강박증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흔하게 반박될만한 주장에는 흔한 반박으로, 간단하게 반박되지 않을 만한 주장에는 희박한 주장으로 응수한다는 대책이 등장한다. 즉, 그의 철학적 활동은 강박에 대한 치료로서의 회의주의적 태도다.


그래서 섹스투스는 태도로서의 회의주의(아카데미아 학파)와 교의로서의 회의주의를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의심하고, 편한 것은 믿어버리는 일상의 타성 속에서 생활한다. 하지만 의심이란 무엇인가? 이 책에 나온 것처럼, 회의주의의 영단어인 스켑티시즘의 어원은 그리스어 "탐구" 즉 스켑테스타이다. 즉, 회의란 부정이 아닌 탐구다. 나의 내면과 세계의 다양한 사물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관찰하고 잠정적 결론을 끊임없이 수정해가며 자신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것에 냉소적이라는 의미의 퀴니코스("시니컬하다cynical"의 어원), 역설적으로 무지를 도그마로 삼아버리며 불가능이라는 단정을 설파한 신아카데미아학파와 피론 회의주의는 다르다. 이 셋의 구별의 지점은 그 온건함과 비교조적 차분함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을 모두 포괄하는 회의주의적 태도가 파괴적인 것은 분명 사실이다. 인간은 역사 전체를 통틀어 인간(또는 개인, 또는 공동체) 너머의 권위를 요청하는데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다. 그것이 도그마라는 사실 자체를 망각할 정도로. 마치 그것이 없으면 이 세계가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열정적으로 달려들고, 자신이 무언가 발견했다고 선언하곤 한다. 이런 사변적 탐구엔 끝이 없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것을 철학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쓸데없을 정도로 자세하고 많이) 배우곤 한다. 그리고 이런 신념의 반대급부에는, 이런 형이상학적 권위가 없다는 게 증명되면 당장에라도 세상을 무너뜨려버리겠다는 욕망이 마음 속 깊이 숨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권위에라도 기대지 않으면 이런 종말론적 열망을 꺼뜨릴 수 없다는 뜻에서, 철학적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의 노력과 무너지는 세계의 미학은 거울쌍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묻는다. 판단을 유보하면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주장하듯 마음의 평화가 올까? 오히려 탐구라는 이름으로 삶 전체에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지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가 영위하는 인간적 삶은 가능할까? 인간적 삶을 떠받치는 많은 근거없는 믿음들이 "그래보인다"는 표현 속으로 녹아들어가 버릴테니 말이다. 계약서인 것처럼 보일 뿐 계약서가 아니라면 누가 계약을 지킬까. 그리고 그 뒤엔,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우리가 지금까지 영위해온 삶은 규정과 변화와 그에 따른 타자화라는 구덩이가 놓여있는 양식이었다. 그리고 피론주의적 세계라는 다른 한 편엔 무정부주의가 놓여있는 것만 같다. 내 입장에서야, 뭐 그게 꼭 나쁜 것만 같지도 않고.


결론을 지어보자. 이론적인 배경이나 영향을 떠나서 읽으면, 우리의 삶 전체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 전체에 대한 기나긴(어쩌면 끝이 없을) 탐구의 과정이라는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견지하기 힘든) 교훈같은 것이 든 책이었다. 그리고 내게 개인적으로는, (내가 집중해서 공부하고 있는) 근대 철학의 각종 문제들을 둘러싼 다양한 (이른바) 회의주의적 논변의 원형을 확인한, 좋은 공부 기회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브레인 - 삶에서 뇌는 얼마나 중요한가?
데이비드 이글먼 지음, 전대호 옮김 / 해나무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신문제, 즉 물질로서의 우리의 몸과 마음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누구나 한번씩 생각해보게 되는 영원한 떡밥이다. 상식적으로야 우리의 몸은 물질로 이뤄져있고 물질은 물질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 사실은 우리의 "마음"의 움직임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우리가 뇌에 대해서 한 번쯤은 관심을 갖고, 또 알아두면 유용한 이유도 바로 이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글먼의 "더 브레인"은 우리의 관심사가 뻗칠만한 거의 부분을 전반적으로 가볍게 건드리고 들어가는, 좋은 관문이 될 것 같다. 우리의 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부터 의식의 문제, 이상행동에 관한 문제, 사회 문제에 대한 과학적 접근법과 뇌과학과 관련된 우리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많은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간단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알고 있었던 내용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새로 알게 된 실험(예를 들어 몰리뉴 문제의 현실 버전인 2장에 나오는 메이 사례)이나 접근법(역할전환 교육이 아이들의 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나오는 5장) 같은 것들은 꽤 흥미로웠다.


이 책의 챕터 중에서, 위에서 예로 들었던 2장과 5장이 내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다. 2장에선 익숙한 논의에 새로운 실험을 더했고, 5장은 사회개혁 프로그램의 윤리학적-사회적 영향에 관한 내 관심사와 맞물렸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유아기의 생후배선 과정에서 적절한 자극에 노출되지 않으면 그 부분은 평생 회복되지 못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부분에선, 정말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상하게 바라보고 싫어하며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동의 상당수는, 우리 공동체 모두가 그런 행동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 책에서 아쉬웠던 부분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즉, 너무 압축적이고 단편적인 실험결과를 나열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다큐멘터리에 기반한 책이기에, 동전의 양면처럼 “컴팩트”하다는 특성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여기에 언급되는 실험들은 저자 본인이 엄선해서 고른 대표적 실험들일테고, 실제로는 그 실험들의 의미를 뒷받침하는 어마어마한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실험들이 있을거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다큐멘터리와 이런 책이 아예 나올 수가 없었을테니까.


이런 아쉬움은, 내가 시간이 되는대로 책의 뒷편에 있는 참고문헌들을 차차 읽어나가면서 해결해나가면 될 것 같다. 내게 이 책은, 오랜만에 오래된 관심사를 벗어나 다른 사람의 연구를 가만히 앉아서 떠먹는 마음 편한 기회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치학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36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재홍 옮김 / 길(도서출판)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게임 문명4를 참 좋아한다. 어느 방학엔가는 식음을 전폐하고 하루에 18시간 씩 한 달을 했던 적도 있었다.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말할 수 없다. 어쨌든 마우스와 키보드가 눌리는 대로 플레이했고,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했기에 아무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임 이야기를 하고자 문명4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다. 내 문명의 발달 과정에서 “대체부품”을 개발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나온다는 짧은 문구가 멋드러진 영어 번역으로 등장한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형이상학에 나온다는 이 말은 정치학 연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1권에서부터, 그리고 각 권의 나머지 부분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제나 전체로서의 정치체제와 그것의 구성원인 개별 시민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기” 때문에 개별 시민의 목적을 단순히 합친다고 해서 전체의 목적이 바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전체의 연구를 위해서 부분의 성격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 성격이 전체의 목적에 어떻게 이바지하는지(또는 방해가 될 수도 있는지)를 계속해서 캐묻는다.


(21세기에 사는 우리와는 매우 동떨어져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논변을 계속 펼치는데, 그 중에서 좋은 사람과 좋은 시민의 관계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가장 흥미를 끌었다. 그는 주로 3권 4장에서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몇몇 부분에서 자신의 견해를 직접 제시한다. 그의 주장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사람과 좋은 시민은 분명 다르긴 하지만 공통된 점이 있으며, 아마 좋은 사람은 어느 공동체를 가든 좋은 시민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종으로서 하나이지만 정치체제는 여럿인데, 그럼에도 좋은 사람은 탁월성을 지니고 그것을 행위로 보여주고 여기에는 각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법규에 따르는 것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똑같은 이유를 들어서, 즉 좋은 시민은 법을 잘 따르는 사람이고 좋은 사람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도덕적인 사람이기에, 이 둘의 접점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떤 정치체제라도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의 눈에는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을 것이고, 여기에 저항하는 것은 일종의 인간의 의무인 것이다. 물론 2500년 전 사람의 생각과 내 신념을, 복잡한 논증을 제시한 주장과 아직 여물지 않은 내 아이디어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겠으나, 여하튼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의 다른 저서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읽은 이 책에서 만큼은, 그는 계속해서 비유를 시도한다. 그리고 나는 이 비유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태도, 즉 개인의 도덕과 정치공동체가 밀접하게 이어져 있으며 같은 원리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정치체제의 상태는 올바른 인간의 상태와 연결되며, 바람직한 정치적 행위는 바람직한 의술이나 제작술과 연관된다. 그는 이런 비유가 설명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고, 그 설명의 기능이 가능한 이유는 두 대상 사이에 구조적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진짜” 설명인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비유의 부분들은 아주 직관적이어서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각종 고대적 편견들(특히 생산직 종사자나 여성에 대한 줄기찬 비하)을 약간만 걷어내고 바라본다면, 그의 생각은 정치인들을 비도덕적이라고 디스하는 우리의 태도를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의 정치학 연구는 이십여 세기를 흐르고 흘러서 우리에게까지 전해졌고, 나는 나름의 공을 들여서 이 책을 읽었다.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나 사이의 거리가 멀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알았던 것들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관심사가 정치를 떠나지 않는 한, 그리고 인상적인 구절들을 열심히 표시한 포스트잇 플래그들을 다 떼어버리지 않는 한, 나 자신의 정치적 관점을 돌아보고 싶을 때 다시 한 번 쯤 들여다보게 될 책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이 책은 내 독서능력에 대해서도, 내 관점에 대해서도, 도전적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폴리아모리 한다 - 왜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하는가?
심기용.정윤아 지음 / 알렙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폴리아모리 개념 자체에 대해선 큰 불만이나 이견이 없으므로 (제 관심사인) 이론적 세부사항에 관한 몇 가지 생각.


첫째, 조나단 하이트의 도덕감정이론에 관한 오독: 아쉽게도 하이트의 도덕감정이론은 폴리아모리를 설명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에 서있는 사람들을 훨씬 더 강하게 뒷받침한다.


그에게서 감정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본능적인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에 (그게 바람이든 폴리아모리를 향해 가는 진행과정이든) 기분이 나빴다면, 그런 감정이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하이트에겐 훨씬 중요한 일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도덕감정이론의 중요한 근거 중 하나로 진화심리학을 인용함으로써 이런 종류의 “감정적 직관”이 생물학적 본능의 수준에서 작동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또 그의 “직관의 6가지 기본 유형”중에 하나는 한 사람 또는 어떤 한 가지에 대한 충성, 즉 loyalty다. 누가 보더라도 폴리아모리는 loyalty에 대한 중대한 위반인데, 한 사람의 사랑에 대해서도 그렇고 모노가미를 중심으로 짜여진 사회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래서 하이트의 결론은, “보수주의자들이 진보적 급진적 운동에 반대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며,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의 감정적 거부감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다른 운동방식을 택할 필요가 있다.”는 쪽에 기울어있다. 이런 입장과 폴리아모리가 일관성 있게 어울릴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책 초반부에서 삐끗.


둘째, 스피노자의 변용 개념과 폴리아모리의 관계설정: 책에서도 설명되어 있듯이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은 실체인 신을 중심으로 해서 인과적으로 강하게 맞물려있는 세계를 상정한다. 여기에서 두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는데, 하나는 그에게 우주의 모든 것은 자연이라는 점 즉 문명사회에 대한 분류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모든 현상이 가치의 측면에서 동등한 값을 갖는다는 점이다.


책의 내용을 인용해서 말하자면, 스피노자의 세계관 속에선 “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어” 라는 질문에 “꺼져 이 개새끼야”라고 대답하는 것과 “난 네 전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네 모습도 사랑해”라고 대답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위계가 설정되지 않는다. 내게는 이 둘 중에 어떤 대답을 할 선택권이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고, 또 이 두 대답 중에 "그래도 널 사랑해”를 선택해야할만한 도덕적 우월성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세계관을 받아들인다면, “꺼져 이 개새끼야”라고 말할 이유가 없는 것 만큼이나 “그래도 널 사랑해”라고 대답할만한 이유도 없어진다.


물론 이 책의 필진들은 이 정도만 되어도 사회의 지배이념에 대한 공격으로서 의미있는 이론적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보이나, 문제는 본인들 스스로 지배이념의 반대항에 있는 폴리아모리에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하고 싶은 욕망이 슬쩍슬쩍 비친다는 데 있다. “진정성”이 아무짝에 쓸모없는 수사라고 공격해놓고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서 “진정 그 사람 전체를 사랑한다면”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 같다. 그리고 이 욕망은 스피노자의 형이상학과 논리적으로 그다지… 잘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셋째, 들뢰즈의 강도 개념과 문명의 문제: 스피노자를 이어받은 들뢰즈의 강렬도intensity 개념은 사람들의 감정을 질적인 언어로 파악하는 우리들의 “문명적” 습관을 양적인 개념으로 돌파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그 철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스피노자를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자연과 문명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의 성격 또한 그대로 물려받는다.


문명이 억압인 것, 맞다. 우리 행위의 양식을 조직하고 그 바깥으로 튀어나가려는 시도를 판옵티콘마냥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 문명의 본질이라는 것, 동의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억압으로부터 우리는 단순한 종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역진불가능한 질적 도약을 통해 문명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문명화된” 시선에서 특정한 정도의 강렬도를 가진 감정을 사랑이라고 규정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그에 알맞는 행위의 양식을 조직해 나가거나 기존의 양식을 반복한다.


이 둘은 사실 다른 말이 아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렇게 사회를 억압과 동일시하고 비판하면서도, 우리는 “문명화된” 사회 안에 살지 않고서는 그 어떤 사랑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사랑의 범위를 점점 더 넓혀가고 그 안에 성소수자 운동으로서 폴리아모리도 포함된다는 저자들의 논지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저자들이 그렇듯 나 또한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넷째, 선택의 문제: 그래서 폴리아모리는, (제가 몇 번 말씀드렸지만 다시 반복하자면) 선택의 문제에 부딪힌다. 빨간 옷을 입고 나갔다가 마음에 드는 검은 옷을 보고 구입해서 입는 이유는 빨간 옷보다 검은 옷이 마음에 “더” 들었기 때문이다. 즉, 비교평가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저는 엄마를 더 좋아합니다만) 내 마음을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엄마와 아빠 둘 중에 한 명에게 반드시 상처를 주는 현명하지 못한 대답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연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무도 나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최”선이란 상대적인 개념이라서, 내가 누군가에게 one & only가 아닌 다음에야 결코 충족되지 않는 그런 것이다. 진정한 폴리아모리는 이런 위계 자체를 거부한다지만, 마음씀이란 언제나 상대평가의 개념인 것 같아서… 잘 모르겠다.


이건 사족: 이 책을 읽기 직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읽었다. 7권 마지막 부분에 이런 멘트가 있다. “우리는 맨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모든 것들을 더 좋아하니까.” 그것이 설령 윤리적 사회적 위반을 포함한다고 할지라도, 우정도 사랑도 장난감도 우리는 새것을 더 좋아한다. 이건 폴리아모리로 해결될 문제라기보단, 그냥 인류의 비극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