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양장) - 사유의 보폭을 넓히는 새로운 장자 읽기 이학문선 8
앵거스 찰스 그레이엄 지음, 김경희 옮김 / 이학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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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과장을 섞어 말하면) 장자를 가장한 중국철학사 책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장자 책 자체가 단일한 저자에 의해 일관된 관점에 따라 쓰인 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저자들이 남긴 단편을 이어붙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속에는 장자 본인의 생각과 더불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등장했던 장자주의자들의 생각, 장자의 사상에 일부만 찬성하는 사람들의 생각 모두가 담겨있다. 둘째, 이 책의 저자 그레이엄이 장자를 완전히 해체한 뒤,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들을 분류한 뒤에 재조립했기 때문이다. 이 분류는 장자 본인과 그의 동시대, 그리고 후대의 반응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고 각 장의 처음, 그리고 중간중간마다 그는 그 구절들을 이 곳에 배치한 문헌학적-철학적 이유와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물론 처음 출간된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책이기에 현재의 연구성과와 다소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상당부분 수긍이 간다. 그렇게 그레이엄의 장자는, 장자를 중심으로 기술된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사다.


이 책은 그래서 기존의 중국 고전들에 대한 번역이나 연구서와, 특히 도가 계열의 책과 결이 약간은 다르다. 고전의 맛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풍스럽지도 않고, 메타포를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 독자를 도사가 되는 길로 인도하는 실수를 않는다. 즉, 현대어로 이해 가능한 최소한의 합리성은 갖추었다. 물론 가장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영역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는 도가 사상 자체의 특성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그레이엄의 설명과 함께 읽는 장자는 ‘천천히 따져보며 읽었을 때’ 이해할 수 있는 영역 안쪽으로는 들어오는 것 같다.


이렇게 편역자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더라도, 장자의 생각은 여전히 철학의 역사 전체에서 가장 정복하기 힘든 높은 산 중에 하나다. 두께의 압박은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그는 어떤 세계에서 살았으며, 어떤 세계를 넘어서려고 했을까? 장자 자신은 어떤 비전을 보았기에, 언어와 사고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무기에 대해 너무나도 쉽게 ‘잠정성’이라는 속성을 부여했던 것일까. 또 (그레이엄이 ‘원시주의자’로 묶어서 설명하는 사람들처럼) 세계 자체에 담겨있는 깊은 의미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게 했던 퇴행적 사고에 빠지지 않고 초월을 논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문명적 사고방식도 반문명적 본능도 아닌 비문명적인 무언가란 대체 무엇일까? 그레이엄의 장자 해석을 보고있자면, 이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떠오른다.


조금은 내 멋대로, 가장 속편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실천적 잠정성에 기반한 태도의 무한한 변화와 그에 따른 집착으로부터의 탈피. 나 스스로는 이런 사고방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관점이 제시하는 여러가지 사고실험은, 가끔은 심심할 때 공상하는 소재로 쓸 수도 있으며, 더 가끔은 내 머리를 맑게 만들 때 이용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부분을 메타포와 문학적 수사로만 냅다 달리는 장자의 서술방식은, 이렇게 근거없이 납득하는 수작을 약간은 용인해주기도 한다.


파편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것을 한데 모아 정리한 편역자 그레이엄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장자를 일관되게 정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왕 이렇게 된거, 나도 그냥 장자를 조각조각 이해하련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다시 꺼내보면서,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장자에 나오는 우화를 인용해보기도 하고(가장 유명한 나비 이야기라든가, 우물 안 개구리,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다 홍수 때문에 죽은 미생 등등) 내게 대입시켜 생각해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을 통독하면서 얻은 최고의 소득은, 내 앞에 놓여진 길을 조금은 풍성하게 만들어줄 몇몇 이야기를 얻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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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독 :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 자서전
필 나이트 지음, 안세민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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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독』을 읽으면서 먼저 하게 되는 것은, 다른게 아니라 이 책에서 등장하는 신발의 모델명을 계속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는 작업이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들, 이미지를 찾아보니 대부분 지금 신발가게에 가면 살 수 있는 모델들이었다(못 본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신발들은 대부분 이른바 “클래식”이라는 이름이 붙어서 팔리고 있었고, 대체 이걸 신고 어떻게 운동을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물론, 따지고 보면 대체 컨버스를 신고 어떻게 농구를 했다는 것인지 지금으로선 상상도 가지 않는 것도 있긴 하지만.) 특히나, 예전에 코르테즈 형태의 와플형 아웃솔이 적용된 운동화를 구입해서 착용하다가 발목이 너무 아프고 내구성도 정말 별로였던 경험이 있어서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더 드는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필립 나이트의 행보에는 신기한 점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업을 하면서도(심지어 투잡을 뛰면서도) 종종 꾸준히 달리기를 했다는 내용이다. 그는 달리기를 하면서 경영자로서의 스트레스를 지우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동안에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도 하며, 궁극적으로는 달리기와 사업을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고 달릴 때 본인의 태도를 사업에도 그대로 적용한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고, 결승선을 넘어설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야 하며, 결정적으로 내 앞에 아무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자세가 바로 그 태도의 내용이다. 매일 달리기를 하려고 노력하며 대학원을 졸업한 백수 상태인 내게 이런 적극적인 태도는 일종의 롤모델처럼 다가왔다.


달리기에서 사업의 태도를 배웠다고 주장하는 사람답게, 이 자서전 또한 한 번도 쉼없이 쭉 치고 나가는 형태로 쓰여있다. 매해마다 발생하는 유동성위기, 파트너쉽의 결렬, 계약과정의 어려움 등등 그 어느 해도 조용하게 넘어갈 일이 없다. 다소간 짧게 처리된 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 해에 나이트는 일상의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빴을 것이며 어떻게 하면 본인의 사업을 확장하고 유지할 수 있을지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자서전은 한 번 집어들면, 약간의 두께의 압박은 있지만, 쉬지 않고 죽 치고 나가면서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다.


반면 그의 성공에 운이 정말 많이 작용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니케(나이키)라는 이름을 결정한 과정, 스우시 마크를 고안해낸 사람과의 만남, 초창기에 함께한 사업파트너들의 능력 등등. 나이키의 초창기 소유주 중 한 사람인 바우어만은 지금도 구글에 검색하면 나올 정도의 전설적인 육상 코치다. 자서전에도 “문학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다고 묘사되는 프리폰테인은 또 어떤가. 결정적으로 필립 나이트 본인이, 아버지가 지역언론사 사주인 금수저이며 (일종의 지역 거점 명문대학인) 오리건 대학교와 (역시나 명문인) 스탠퍼드의 경영대학원을 나와서 대학 강사를 뛸 정도의 엘리트였다는 것도, 따지고 들자면 무시못할 요소이긴 할 것 같다. 물론 이런 것을 갖춘 모두가 다 그만큼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그가 선택한 대단히 불건전한 경영방식은, 과연 지금같은 성공이 아니었다면 감당할 수 있을만한 것이었는지도 약간은 의문이 든다. 우선 “블루 리본”이라는 회사가 있다고 말한 것 자체가 거짓말이었으며, 회사가 설립된지 10여 년이 지나도록 자기자본과 보유현금이 없어 언제나 유동성위기에 놓여 있었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한다. 오니즈카 타이거를, 그리고 이후의 자금줄이었던 니쇼 이와미 상사를 상대로도 거짓말을 반복한다(물론 오니즈카 건은 상호비방이었으며, 이후 법적 분쟁을 통해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면서도 본인에게는 거액의 연봉을 책정하고, 자신의 공격적 경영방식과 성장세에 놓인 회사의 가능성을 알아보지 못하는 금융기관을 탓하는 대목이 계속 등장한다. 한 편으로는 자신의 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정말 저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머리에 계속 물음표가 돌아다니게 만든다. (이 부분은 경영학이나 회계학 쪽에 밝은 분들의 조언을 듣고 싶다.)


이것도 일종의 자기계발서라고 할 수 있을까? 성공담을 그야말로 성공적인 과정으로 포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분류할 수 있다면,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이 그야말로 오랜만이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단순히 “앞으로는 뭐든 좋은 일만 생길 것이야”라고 주장하는 뻔한 책은 아니다. (물론 그는 일이 잘 풀렸다고는 하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도 있고, 10년의 세월을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잘 정리해놓기도 했다. 마치 영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를 보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나는, 그가 이 책에서 쓰지 않은 80년 이후의 나이키에 관해서 더 알고 싶어졌다. 갑자기 내 신발장에 있는 270 사이즈의 나이키 탄준, 트레드밀에서 착용하는 275 사이즈의 루나글라이드와 줌보메로가 달라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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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의 이야기는 운명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그는 운명에 관한 예언을 듣고 그 예언이 한 단계 성취된 것을 알고, 그 다음 단계를 성취하기 위해서 던컨을 죽인다. 그리고는 운명이 자신에게 부여한 도덕적 부담에 괴로워하며,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운명에 저항하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운명은 끝내 그를 죽였고, 예언은 성취되었다.


맥베스의 일탈은 권력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대사에서 드러나는 그의 마음은 권력을 얻고 싶으면서도 정당했으면 하고, 권력을 얻었으면서도 그것이 정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가 걸어온 경로는 최고권력자를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좌에 오른 전형적인 케이스이기도 해서, 그가 속마음을 말하는 장면들은 오히려 위선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에게 권력이란 무엇이었을까?


맥베스의 주변 상황을 생각해보면, 끊임없는 의문만 떠오른다. 우선은 (온전히 내 독해의 책임일) 누가 누구인 것인지 잘 모르겠는 것.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기 위해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은 맬컴은 과연 이후에도 그곳을 잘 통치할 수 있을지,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믿지 못했길래 그는 주변 사람에게 자신의 도덕적 열등함을 그리도 길게 말해야 했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은 어떤 생각에서 사람 됨됨이와 권력의 자격은 관련이 없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지. 맥베스가 악행을 저지르도록 부추기는 것은 왜 굳이(꼭!) 맥베스의 부인이어야 하는지, (사극이 맞긴 하지만) 서로가 주고받는 말은 또 왜 그렇게 사극 톤마냥 과장되어 있는지. 마지막으로, 이른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라는데 별 감흥이 없는 것은 내 모자란 감수성 때문인지. 영어를 알고, 영어를 잘 하고, 영어로 읽으면 무언가 달라질까?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쓴 뒤에 두 가지 결심을 했다. 첫째는, 해설을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희곡을 읽어보는 게 고3 뒤로 처음이라, 마음으로 되새긴 문장은 “아, 내가 정말로 희곡을 읽는 법을 잃어버렸구나”, 그리고 “내 책읽기가 너무 편향되어 있구나” 이 두 가지였기 때문이다. 둘째로, 영화 또는 (기회가 닿는 한) 연극 맥베스를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이 짧은 대사들 속에서, 아무 구체적인 설명도 포함되지 않은 편린의 왕복 속에서 연출자들은 무엇을 상상하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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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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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일까.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도 그토록 담담한 이유는. 어마어마한 사건들이 그토록 그의 곁에서 벌어지는 이유는. 이 책의 주인공 스티븐스의 직업은 귀족 달링턴 집안의 집사다. “집사”라는 단어와 그의 역할이 아마도 앞에 제기된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될 것 같다. 적어도 스티븐스는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그는 집사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내기 위해 집사의 역할을 벗어난 행위를 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래서 충격적인 사건을 담담하게 대했으며, 그가 봉사했던 귀족이 각종 사건에 연루되었기에 그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계에 봉사”한다고 믿게 되었다.


이 책에서 직접 쓴 단어를 빌려 말하자면, 두 가지 화두가 그의 삶을 지배한 것 처럼 보인다. 첫째는 품위다. 스티븐스는 품위있는 집사란 무엇인지 고민했고, 품위있는 집사인(혹은 그렇다고 그가 생각한) 아버지의 길을 밟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리고 아마 본인은 그 근처쯤 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한 여성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하고, 여행이 끝나면서 끝난다. 그 여성은 십수 년 전 달링턴의 저택에서 같이 일하다가 그만둔 사람이다. 이 여행은 여행인 동시에 회상이기도 한데, 여행과 회상은 모두 품위라는 개념에 대한 그의 고민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앞에서 품위있는 “집사”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이것이 스티븐스의 고민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품위있는 “집사”란, 자연스러운 듯 어색하다. 이 부분을 다른 명사로 바꿔보면 더욱 그렇다. 품위있는 “사람”, 품위있는 “삶” 같은 것들. 그리고 스티븐스는 이런 종류의 고민을 한사코 거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고 수긍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다른 종류의 품위에 관한 질문을 아예 던지지 않는 쪽에 가깝다. 이런 태도가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서도 일을 하던 품위, 반유대주의와 파시스트적 생각에 물들어 유대인 하녀들을 내쫓은 달링턴에게 저항하지 않은 품위, 달링턴의 결정적인 비행이 폭로되었음에도 그가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그의 품위를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자신이 생각하는 품위 개념에 대해 그다지 의심하지 않는 그는 이 책에 등장하는 여정을 통해 흔들리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 뒤에 어떤 일이 펼쳐질 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정말 흔들린 것인지, 어떤 다른 생각을 했던 것인지 짐작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럼에도, “집사”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가 놓쳐버린 것들은 분명하다. 아마도 “사람”으로서의 품위로 요약될 수 있을 것들이겠지. 자유라든가, 감정이라든가, 선택이나 저항같은 것들. 하지만 그의 여행에서 등장하는 그 어떤 사람도, 이런 “삶”의 품위를 세련되게 설명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는 이야기가 끝나도록 선선하고 건조한 입장을 유지한다(그리고 이 “선선하고 건조하다”는 형용사는 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 즉 문체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형용사일 것 같다).


그는 “사람”으로서의 품위를 좇는 것을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비난하는 입장에 서있다. 직업의식, 이른바 프로페셔널리즘과 아마추어리즘의 대립은 품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이 소설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다.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다는 말은 어떤 행위의 묶음을 가리키는가?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다”는 세 단어는 모두 너무나도 추상적이어서, 실제로는 이 각각의 낱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각자 이 말의 뜻을 해석하고 실천한다. 스티븐스에게 이것은 집사로서 집안을 잘 관리하고 행사를 무사히 마치기 위해 꼼꼼하게 하인들을 통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최선을 다했다. 달링턴의 유대인 하녀 해고 지시가 부당하며 거부해야 한다는 켄턴의 말을 단칼에 물리치면서까지 그렇게 했다.


이것이 프로페셔널리즘인가? 우리는 비슷한 프로페셔널리즘이지만 약간은 다른 역할을 배트맨의 알프레드에서 찾을 수 있다. (다크나이트 트릴로지, 특히 다크나이트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그는 주인의 (정치적) 행보가 위험하며 조커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경고한다. 체험이 되었든 깨달음이 되었든 브루스 웨인은 그의 말을 수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집사이면서 동시에 “현명한” 노인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훌륭한” “집사”의 롤모델이라고 부를만하다. 스티븐스의 눈에 알프레드는 어떻게 비쳤을까?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의 의도인지, 어쨌든 이 소설에서 아마추어리즘은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목소리로 튀어나온다. 켄턴의 행동에서, 여정에서 만난 정치활동가에게서. 그래서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들인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불완전하고 위태로워 보이며,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도망간 것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스티븐스가 섬기던 달링턴, 그가 세계에 봉사한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어준 매개체인 그 달링턴은 미국 외교관 루이스로부터 외교에서의 아마추어라고 비판받는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공개석상이나 경제적 계산이 아닌 흑막과 비밀회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아마추어 외교관이었다. 그리고 스티븐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휴가 다운 휴가를 얻어 여행을 가게 된 계기도, 그를 집사가 아닌 고용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인 패러데이에 의해서 가능했다. 이쯤되면 그가 강조한 프로페셔널리즘, 그가 반대한 아마추어리즘의 경계가 대체 어디였는지 흐릿해진다. “집사”라는 직분은, 프로페셔널리즘이라는 말을 붙일 만한 직업이긴 했던 것일까? 아마추어는 누구이며, 무엇일까.


책을 덮으며 생각해보니, 품위와 프로페셔널리즘이라는 의문을 제기하기에 집사라는 직업은 꽤 적절했던 것 같다. 정치적 주체성은 지워져있지만 기능적 주체성은 극한에 치달아있는, “훌륭한” “집사”라는 직분이 시사하는 바는 참으로 미묘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집사”라는 직업군에 대한 이미지나 정보가 없는 문화권에서 살아온 나 같은 독자가 포착하기 힘든 어떤 이미지도 있을 것 같다. 근대 한국의 역사적 풍경을 다루는 소설에서 많이 등장하는 "마름"이라는 지위를 대입시켜보면 약간은 그림이 그려지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 둘은 완전히 같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끝내 그 두 가지 의문이 명쾌하게 해소되지 않은 채 소설은 마무리된다. 작가는 등장하는 여러 입장 중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채, 선선하고 건조하게 이 모두를 그려내고 있다. 이 방법은, 우리 모두가 삶 속에서 계속해서 고민하고 해결해야만 하고 그것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말하려 의도적으로 채택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을 내 주변의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읽으며,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당신의 품위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의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해서.


PS. 이 독후감을 작성하기 전, 이 책을 주제로 독서모임을 한 번 가졌습니다. 이 글에 들어있는 아이디어의 상당수는 그 모임에서의 토론을 통해 구체화되었거나 모임에 참석한 다른 분들에게서 얻어온 것입니다. 정의당 강동구 당원협의회 내의 독서소모임 [산책]의 11월 정례모임에 참석해주신 모든 당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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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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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런저런 일로 페미니즘 관련 책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최근 페미니즘 진영의 이슈 가운데 하나는 남자설명충들, 이른바 맨스플레인이었다. 솔닛의 이 책에는 그 단어를 제일 처음 만들어낸 에세이가 포함된, 다시 말해 맨스플레인이라는 기폭제를 통해 남성의 권위를 터뜨리려 했던 최초의 시도가 담겨있다. 남성은 여성의 말을 듣지 않고, 중간에 끊으며, 힘을 무효화시킨다. 물론 그것이 남자들의 의도는 아니겠으나(어쩌면 그 모두가 의도된 것일 수도 있다), 여성으로서의 삶의 경험에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는 경험인 것만은 분명 사실이다.

이 책의 가장 첫 에세이가 설명하는 것처럼, 글쓴이가 이 단어를 만들어낸 계기는 아주 황당한 사건이었다. 즉, 어떤 남자가 글쓴이가 쓴 책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책의 저자를 눈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도! 정말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을 일인가 싶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기 그지없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벌어질 법도 하다. 개인적인 경험을 일반화할 순 없겠지만, 내가 지켜봤던 각종 토크콘서트(출판기념회, 영화GV 등)에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주로 남자였다. 그것이 정말 감동에 벅찬 말이었는지, 자랑을 하기 위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경험에 비춰보면, 자랑 쪽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아닌 게 아니라, 과거를 돌이켜볼 때 내가 바로 그 남자설명충이며, 그래서 이런 책도 보고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글도 쓰고 있으며, 대학에서도 그에 최적화된 전공을 이수했다).

하지만 이 책의 핵심은 그것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글쓴이는 이렇게 남성들이 여성의 발언권을 뭉개버리는 것이 개인적 차원, 말하기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말하기는 권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에 속한다는 점에서, 말의 무시는 가볍게 볼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여성이 모든 종류의 권리를 제한당한다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일종의 징후다. 그 징후는 여성의 모든 것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성의 잘못된 권리주장(이른바 성적인 권리주장sexual entitlement)의 단면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 비유가 흥미로웠던 3장에서는, IMF 총재였던 스트로스-칸의 섹스 스캔들과 여성의 권리를 연결시켜 전지구적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여성주의적 정치경제학”의 가능성마저 제안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것이, 남성들이 여성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그 단순한 사실 하나로부터 추정된다는 것이 솔닛의 생각인 것 같다. 설령 이 짧은 책에서 체계적인 이론의 꼴을 갖출 수는 없었다고 할지라도, 비논리적인 무의미한 주장은 아닌 것 같다.

가장 추상적이고 난해하지만 그래서 가장 재미있기도 했던, 버지니아 울프와 수전 손택을 거론하는 6장 또한 내 눈길을 끌었다. “어둠은 미래의 최선의 상태”라는 울프의 테제에 대한 문학적/철학적 분석에서 솔닛은 어둠이 가진 다양한 의미를 드러낸다. 불확실성, 비가시성, 불투명성, 그리고 이어서 가능성에 이르는 여정을 통해 자신이 이해하는 울프의 성격과 손택의 성격을 보여주고 이들이 자신의 글쓰기의 자양분이라고 격찬한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직접적인 연관성을 제쳐놓더라도, 위에서 나열한 개념과 그에 대한 분석은 페미니즘의 주요한 테마인 것 같기도 하다. 최근 봤던 책 몇 권에서 비슷한 논의를 다룬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6장 또한 페미니즘이라는 책의 전체 주제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론의 수준에서 우리 진영의 가능성을 논하고 있다.

대체로 흥미로웠지만, 이 책을 시의적절하게 접하지 못했다는 점이 참으로 안타깝다. 즉, 이 에세이에서 다뤄진 이슈는 이미 다른 페미니즘 책에서 한 번쯤은 볼법한 이야기들이고, 그래서 솔닛이 다루는 문제들이 딱히 신선하다고 느껴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이 책이 한글로 처음 출간되었을 때, 나아가서 칼럼의 형태로 출판되었을 때 맞춰서 보았다면 그 느낌은 어땠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처럼,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줄기차게 페미니즘을 말하고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더 이상, 남성이, 자신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발언권을 제한하려 드는 게 아주 무례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그 미래의 언젠가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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