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스티븐 호킹의 역사 - 자서전
스티븐 윌리엄 호킹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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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 세상 가신지 얼마 안 된 분이 쓴 책에, 그것도 자신의 일생을 다룬 책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고인에게 실례가 되겠지만, 내가 읽기에 그다지 좋은 책은 못되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할 때 그 이유는, 첫째는 이 책의 성격 때문이다. 이 책은 자서전 중에서도 탐구의 여정이 강조된, 이른바 지적인 자서전에 속한다. 그래서 200페이지도 안되는 얇은 분량 안에서 자신의 연구에 관한 이야기가 절반도 더 넘는 분량을 차지한다. 문제는, 호킹의 연구를 읽고서 이해하며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발견인지를 아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뉴턴도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몇 년을 배워야 할 만큼 어렵다는데, 아인슈타인은 아무리 교양으로 책을 보고 강좌를 들어도 공부하자마자 까먹는다는데, 호킹은 이 둘보다도 더 뒤다. 발상은 그만큼 더 상식과 멀어지며, 실험에 대한 이해 난이도는 훨씬 더 올라가있다. 내용이 이해가 되질 않으니, 그의 평생의 연구주제였던 “우주의 시작과 끝”이라는 흥미로운 주제와 그의 연구가 어떤 식으로 연관이 되는지는 그야말로 어렴풋하게 감만 잡힐 뿐이다. 평균의 한국어 독자가(내 생각엔 영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이 책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은 몇몇 과학용어 빼면 없을 것 같다.

두번째 이유는, 그의 삶이 외형적으로 별로 드라마틱하지 않아서 그렇다. 물론 신체적인 이상이 엄청난 핸디캡이라는 점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그의 인생이 드라마틱하지 않았다는 것을 구실로 자서전의 독자인 내가 호킹을 나무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의 지적 여정을 이해할 수 있는 독자라면, 그의 삶이 엄청나게 흥미진진할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지성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참고할만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 경우엔, 캠브리지 대학의 개혁적 분위기 속에서 학생과 교수 사이의 중재자로서 뜬금없이 중국과학사 연구자인 조셉 니덤의 이름이 나와서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한 이런 우호적인 고려가 없다면, 그의 인생은 아주 가차없이 요약할 수 있다. 뛰어난 연구 업적으로 빠르게 교수사회에 자리잡았다. 심지어 학생을 가르칠 필요가 없는 석좌교수직에 오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계속 연구했다. 가끔은 강연도 했고, 여행도 다녔고, 결혼은 두 번 했다. 끝.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뭐 어쨌다고!?”라는 탄식이 나올 대목이다.

호킹의 인생에 관한 그 짧은 글에서 내가 읽어내지 못한 행간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내 책임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독자에게 친절한 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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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
장동선 지음, 염정용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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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공부했던 나로선, 인간의 생물학적 구성이 행위에 미치는 영향은 항상 관심사의 영역 안쪽에 있었다. 특히나 그 영역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사고와 감정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뇌라는 기관은, 인체의 여러 부분 중에서도 특히 이목을 끈다. 그래서 이 분야를 차분하게 설명해주는 책이 나오면 반갑게 맞이하곤 하는데, 장동선의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 또한 마찬가지다.


뇌과학을 다루는 다른 책에서도 논의되는 부분이긴 하나, 이 책이 특히 강조하는 점은 뇌의 구성의 외부성이다. 우리의 뇌는 항상 뇌 바깥의 어떤 것들과 상호작용하며 구성, 조직된다. 한 편으로는 자연과학자로서 가지게 되는 당연한 입장이겠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뇌에 대한 연구로 현재 존재하는 인간 개개인을 낱낱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또는 뇌과학이 그런 역할을 담당해주었으면 하는 사람들의 바람) 같은 것을 약간은 완화시켜주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공기저항과 중력이 없다면 물체는 관성에 의지해 자신의 운동상태를 유지하겠지만 지구에선 일반적으로 그런 상태를 구경하기 힘든 것처럼, 우리의 뇌 또한 일반적인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나 그것을 구현하는 일은 실험실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책을 쓴 저자도, 이 독후감을 쓰는 나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모든 서로 다른 타자들과(인간에만 국한할 수 없기에 “타자”라는 용어가 더 적당할 것 같다) 영향을 주고 받으며 자신의 모습을 바꿔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 것처럼 보인다. 앞부분은 인간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에 인간이 대응하는 이야기가 주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즉, 나와 나 아닌 것들이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가는가, 더 정확히는 나는 ‘나’로 태어나며 다른 것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관한 설명이 주로 등장하는 것 같다. 반면 후반부는 서로 이미 확립된 인간들과 그들의 구성물 사이의 관계를 주로 보여주고 있다. 타인과의 관계, 협력과 사회적 압력, 도덕적 행위와 그 해석, 문화적 차이 같은 테마들이 그렇다. 전반부의 내용이 단수로서의 ‘나’에 관한 설명이라면, 후반부의 내용은 복수로서의 ‘나’들, 이미 충분한 구성의 결과를 가진 뇌들 사이의 관계로 이해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에 뇌과학과 관련된 또 다른 책(데이비드 이글먼의 더 브레인)을 읽어서 그런지, 소개된 실험들 가운데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철학의 영역에서 “퀄리아(qualia, 감각질)” 문제라고 불리던, 같은 주파수의 빛을 볼 때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가에 관한 문제가 “범주”의 문제로 정리되었다는 연구결과는 인상적이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된 가상현실 프로이트 실험의 경우, 나도 실험군으로 참가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흥미를 끌었다.


사실 책의 내용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실험의 함의 이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충격을 준 내용이 두 가지 있었다. 첫번째는 카우클리커 게임에 관한 것이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이 언급된 팜빌은 해보지 않았지만, 스머프 마을 만들기나 심시티같은 ‘(농장)키우기’ 장르의 게임을 엄청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쓸데없다고 매도하는 사람들은 내게 모욕감을 준 것이나 다름없다… 두번째는 다수 경향성을 뒤집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내가 진실을 알고 있다”고 선포하는 것이 있다는 점을 언급한 것이다. 이것은, 대체로, (다른 영역에서는 잘 모르겠으나, 대체로 음모론을 즐겨 사용하는 정치가들이 많이들 그러는 것 같긴 한데) 철학자들이 대체로 자신의 주장을 억지로 정당화하기 위해 쓰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과학으로 근거를 찾을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신기했다.


이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다지 새로운 정보는 많이 없는 책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험들이 배치된 방향, 즉 우리의 뇌(를 포함한 사실상 인격 전체)는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변화한다는 테마만큼은 내 뇌에 확실히 전달된 것 같다. 이것을 읽으면서, 지적인 노동을 한 만큼 내 뇌의 구성도 조금은 더 촘촘해졌으면 하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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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가족,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성에 관한 윤리적 담론은 인류가 “가치”에 관한 개념을 가장 오래도록 결부시켜온 역사적 형성물이다. 번식은 본능이고 성차는 자연의 산물이라는 생물학에 기반한 편견에서부터 전통으로 확립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문화적 합리화에 이르기까지, 사실 성 담론은 인류의 절반에 해당하는 여성을 억압하는 기능을 아주 충실하게 수행했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공격받고 해체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가 채 300년이 되지 않았으며, 이 진보는 페미니즘의 등장 및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스스로가 페미니스트임을 표방하고 있진 않지만, 러셀의 『결혼과 가족』은 그 움직임에 작은(어쩌면 큰) 보탬이 된 책이 아닐까 싶다.


밀의 『여성의 종속』이 그러하듯, 러셀 또한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도덕지상주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담론들을 공격하고 성의 해방을 주장한다. 우선 그가 누누이 강조하는 “인간의 성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쾌락에 관한 지식”의 교육의 중요성이 그러하다. 쾌락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고 (러셀이 주로 개신교 신자들이라고 범주화하는) 억압적인 사람들이 아이들의 도덕교육을 맡는 순간, 아이들은 성에 대해 “과학적으로” 배울 기회를 영영 박탈당한다.


러셀은 이런 기회박탈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좇아 행위하기 위해서는 정보의 투명한 공개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성인으로서의 최소한의 합리적 판단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그런 정보들을 바탕으로 연애시장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게끔 합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기에, 도덕주의자들이 우려하는 타락과 방탕의 문제는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러셀은 말한다.


이 억압은 단순히 당사자의 불행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어린이들이 성에 관해 갖게 되는 잘못된 죄책감을 시작으로, 성에 대해 미숙해서 벌어지는 젊은 세대의 연애의 불행,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의 불행, 결혼을 통해 구성된 가족 안에서 부모의 행복을 경험하지 못한 채 성장하는 아이의 불행, 나아가서 그런 불행한 자들이 구성하는 사회 전체의 불행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런 사회적 불행의 결과는, 정말 불행하게도 여성에 대한 억압이다. 우리의(더 정확히는 러셀이 아는 한에서의 서양의) 역사는 여성에 대해서 온갖 종류의 압박이 주어졌음을 보여준다. 특히나 현재(러셀이 살았던 시기에) 문제되는 것은, 강한 금욕주의가 사실상 여성에게만 강제되는 형태로 실천되어 왔다는 점이다. 남성들은 그들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이유로 각종 암묵적 장치들(성매매)을 통해 성적 방탕과 타락이 사실상 용인되었다. 반면 여성의 경우에는 그들이 지켜야 할 제1의 가치로 정숙(순결/정조, chastity)이 내세워지기에, 한 편으로는 남성과 동료가 되어 사회생활을 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정조 관념이 없는 사람이라며 지탄을 받는 사회생활을 영위한다. 여기에다 도덕적 덕목을 지키려는 것은 남자, 유혹해서 그를 파괴하는 팜므 파탈은 여자라는 도식까지 더해지면,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전 인구의 절반이 겪고 있는 끔찍한 불행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러셀의 진단이다.


러셀의 평가는 이렇다. 이 모든 종류의 구식 도덕지상주의와 금욕주의는 우리 사회의 현대적 변화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이런 여성 억압은 그 자체로 옳지 못하다”는 주장과는, 약간은 결이 다르다. 이런 종류의 도덕적 신념이, 단지 현대 사회의 물질적 조건에 잘 어울리지 않기에(적합하지 않기에) 행복을 증진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발상은, 그가 책에서 직접 인용하고 있는(행정서류상 그의 양아버지이기도 한)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의 논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그가 내놓는 정책적 제안은, 밀의 입장에 비해 한 발 더 나아간다. 혼인 이외의 성관계는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없다는 것, 당사자간 합의 하나면 이혼이 성립하게끔 법을 고쳐야 한다는 것, 초등학교 때부터 성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알려주는 교육을 장려할 것 등이 포함된다. 나아가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행되는 성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의무교육 이상의 보편육아, 아동수당 지급, 육아휴직과 복직의 보장 등을 시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핵심은 이런 제도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정책이기 때문에 시행해야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현대 산업사회의 삶의 형태에서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잘 어울리는(적합한) 제도이기 때문에 시행해야 된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즉, 그는 어떤 도덕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변화와 발전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한, 자신이 제시한 것과 같은 정책들은 필연적으로 시행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아동노동을 금지하고, 의무교육을 시행하며, 아이들의 독립된 재산권을 인정한 것을 발전의 역사로 이해한다면, 여기에서 더 나아간 발전이란 (러셀의 표현에 따르면) “아버지의 역할로 간주되던 것을 국가가 완전히 대체하는” 공동체로 변모하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1929년에 출판된 것이고, 그래서 어쩔 수 없는 한계 같은 것이 있다. 여성성과 남성성, 그리고 각각에 속하는 어떤 특성을 고정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 같은 것이 그렇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 동시대의 거의 모든 페미니스트들 또한 여성성과 남성성을 대체로 고정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그들의 해방의 논리는, 여성성으로 간주되었던 여러 특성들을 제대로 평가하고 그 가치를 높게 매겨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논리를 남성이 반복한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봐줘야할지는, 약간은 의문이다.


현재 시각에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우생학’과 관련된 몇몇 주장이다. 예를 들어, 그는 정신적인 이상이 있는 사람은 아이를 낳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당시의 맥락에서 보았을 때는 충분히 진보적인 것이다. 단순히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정부가 아이를 낳을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프로이트의 논리를 일부 받아들여 정신적인 이상이라는 것이 상당수는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기에, 그가 인정하는 제한의 폭은 더욱 줄어든다. 그럼에도 현재 시각에서 보았을 때, 우생학의 주장을 일부나마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거슬릴 수 있는 부분이 될 것이다.


그의 예측, 그리고 그의 정첵적 제언은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요약해놓은 러셀의 발상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은, 이 책이 출판되고 1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상당히 많다. 이유는 가지각색일 것이다. 여성의 권리 신장을 싫어하는 사람, 어떤 종류의 문화를 성적인 문란과 퇴폐라고 생각하는 사람, 현재 사회의 질서가 자연의 섭리이므로 그것을 비판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까지.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이라도, 러셀이 자신의 글 전체를 정리하며 사랑은 육체적 결합과 정신적 결합이 등비를 이루는 조합이라는 점을 역설하는  결론 부분만큼은 꼭 한 번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결국 그는, “사랑이란 대지에 뿌리를 내리며 동시에 하늘로 가지를 뻗어야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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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개정판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 현실문화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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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독서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을 주관하는 큐레이터 한 분과 함께 미술관 두 곳을 갔다왔다. 금호미술관과 선재아트센터. 각각 전시가 진행중이었다. 심드렁하게 본 것도 있었고, 생각해볼만한 것도 있었으며, 시각적으로 신기해서 충격을 준 것도 있었다. 그 중에 정말 모르겠던 것은, 포켓볼에 쓰는 솔리드 8번 공을 몇 개 늘어놓고 설치미술이라고 하는 작품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어떤 남자들은, 바닥에 구 모양의 물체가 놓여있으면 걷어차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하지만 작품이니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미술인지 머릿 속에 드는 의문에, 그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적절한 해답을 주는 것 같다.


이 책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어떤 인공물을 미술로 분류하는 행위는, 맥락의존적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문화로서의 맥락의 공고함에도 불구하고, 만약 작가가 무언가 만들어놓은 뒤 예술로서의 맥락을 잘 설명하기만 한다면 어떤 인공물도 미술이 될 수 있다. 저자인 스타니스제프스키는 인공물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다양한 맥락들이 어떤 식으로 변해왔는지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고, 그것을 잘 드러내주는 인공물을 보여준다. 이 맥락에 포함되는 미술과 그 주변의 문화적 산물들은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다. 작품, 주체성, 기예, 미학, 작가, 학계(미술계/아카데미), 박물관/미술관, 미술사, 대중문화, 동시대 미술이 그 산물들이다.


스타니스제프스키는 이 모든 산물들에 대해 지금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이 대체로 18~19세기 사이에 생겨난 것이라는 점을 논증한다. 18세기 중반에 아름다움에 대한 합리적 분석이라는 근대적 모토 아래 미학이 생겨났고, 아름다움을 담는 순수예술이라는 개념이 생긴 다음에야 미술작품이 분류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분류된 작품들의 변천을 선형적으로 엮어 만들어진 미술사책이 처음 출판된 것이 18세기 중반이었다. 이런 작품은 아름다움을 직관하는 창조적 영감을 지닌 천재가 만들어낸다는 미학이론은 19세기 초반 낭만주의의 소산이며, 이런 작품이 세계 전체를 재창조해내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작품의 창조란 유아론적인 근대적 주체의 표현이다. 창고의 잡동사니를 근대적 지식체계에 따라 분류해 전시하면 박물관, 그 중에서도 순수예술로 분류되는 인공물을 꺼내 전시하면 미술관이 된다. 최초의 공공박물관은 1820년대에 생겼다. 이 모든 작업은 프랑스의 절대왕정시기부터 각 국가에 형성/설립되기 시작한 학계(아카데미)에서 전문적으로 훈련시킨 인사들이 수행한다. 그리고 20세기의 미술은 이 모든 것의 전복과 이종교배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내가 아는 한, 이런 설명은 미술/미술계/미학의 역사에 대한 표준적 방식이다. 아주 낯선 주장이나 논증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저자는 역사에 대한 정석적 설명보다는 미래의 예술의 기능과 역할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가 미술작품이라고 이해했던 것들을 그 인공물이 생산된 시기의 사회/문화/경제적 맥락 속으로 융해시키고, 그것이 실제로 어떤 기능을 했는지를 다시 묻는다. 그에게 미술의 본질은 아름다움, 특히 시각적 아름다움의 표현에 국한되지 않는 것 같다. 작품이란 생각의 표현이다. 그 생각이란 자신의 만들어낸 인공물이 무엇을 드러내고자 했는지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의 동의어다. 이 단계에서 미술은 다른 ‘사상적’ 인공물들, 예를 들어 철학이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같은 것들에 개입하는 장치로서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그래서, 이것은 미술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나는 저자의 생각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특히 미술이 아름다움의 표현이 아니라는 표준적 설명에 덧붙여진, “주체가 되는 강력한 방식으로서의”(이 책의 마지막 문장) 예술이라는 아이디어가 특히 그렇다. 미학의 역사만 보더라도, 아름다움이 인간이 소중하게 여기는 다른 가치들로부터 독립된 어떤 것이라는 믿음은 저자가 설명하듯 그리 오래된 발상이 아니다. 그래서 미술이 아름다움이라는 제한된 영역을 넘어서 세계 전체를 대면하고 창조하는 주체가 되는 방식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저자와 비슷한 듯 하면서 결이 약간은 다른 내 생각은 이렇다. 나는 미술이 이렇게 거창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어쩌면, 미술은 애초에 아름다움이라는 거창함에 관한 무엇도, 주체에 관한 무엇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미술이 아닌 다른 인공물을 대할 때 그러하듯, 대체로 모든 인공물들을 창조하는 동기는 재미, 즉 유희에 대한 욕망인 것 같다. 물론 유희에 대한 자신의 욕망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재미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 여기에 덧붙여져야 되는 것이 이른바 생각, 즉 이 인공물의 재미에 대한 설명이다. 그 설명이 반드시 아름다움만 고려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굳이 아름다움을 배제하려고 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다. 문제는 재미이고, 재미에 대한 이유니까. 나는 이런 완화된 태도가 오히려 아름다움과 올바름과 참됨을 하나로 통합해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취향판단(의 한계)에 조금 더 부합하는 것 같다.


재미를 설명해야 하다니, 이것만큼 재미없는 작업이 또 있을까!(물론 나는 설명충이므로 이런 것이 재미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저자 스타니스제프스키가 말한 “주체가 되는 작업”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과 크게 떨어져있는 발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공물에 대해서 생각을 늘어놓는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저 재미를 설명하는 것만으로 나 스스로를, 내 인공물을, 내 생각을 문화적 맥락 안에 자리매길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재미를 추구하며 주체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쉽고도 짜릿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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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오리진 - 전2권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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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읽은 댄 브라운의 책이 『다빈치 코드』였기에, 나는 그를 『다빈치 코드』의 작가로 기억한다. 다른 사람들도 대체로 그렇게 기억하는 모양이다.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재미있었다”는 인상만 남아있는 상태에서, 글쓰기 수업 수강생이 독후감을 써올 책으로 선정했기에 같이 읽어보았다. 단적으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분량에 비해 건져낼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생명의 탄생과 인류의 미래를 예측했다고 주장하는 유명 IT기업가가 자신의 예측결과를 공개하는 프리젠테이션 행사 도중에 살해당하고, 『다빈치 코드』의 주인공인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이 그 결과를 다시 세계에 공개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 이 책의 줄거리다.


하지만 이 책에서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엄청난 이야기가 숨겨져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지만 이야기의 구조는 매우 단순하고, 1권을 다 읽어나갈 무렵이면 뒤에 펼쳐질 내용이 대강 예상된다. 몇몇 부분은 작가가 큰 반전을 의도했던 것 같기도 한데, 아쉽게도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다. 설정 충돌이 의심될 정도로, 몇몇 캐릭터의 능력치가 들쭉날쭉하기도 한다. 구체적인 사례를 설명하면 스포일러가 되기에 자세하게 풀어놓을 수는 없으나, 하나는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랭던이 기호학의 전문가라는 설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결코 들지 않는다.


소설 속 세계에서 아주 대단한 것이라고 간주되는 그 예측결과도 별 것 아니다. 기술발전에 대한 별 근거없이 편향된 입장의 아주 얄팍한 반복일 뿐이다. 포스트 휴먼이니 트랜스 휴먼이니 하면서 이미 몇 년 전부터 현실세계에서 거론되던 담론이, 이 소설에서 다루는 범위보다 훨씬 더 풍부하게 형성되어있다. 그래서, 적어도 내겐, 신기할 것이 없었다.


그 예측결과가 별 것 아니라는 점이 내 입장에선 이 소설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과 두려움과 놀라움의 크기가 소설 속 세계의 분위기 그리고 사건의 발단/전개/절정/결말 모두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소설적인” 상상력을 동원한 신선한 시각을 기대하던 나로서는, 결말 부분이 너무나도 허탈했다. 겨우 이 정도 견해 때문에 사람들이 그토록 난리를 겪는단 말인가? 배경이 1990년대나 2000년대라면 그래도 이해를 하겠으나, 소설 속 세계는 사람들이 모두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우버 택시를 이용하는 그런 곳이다. 이런 세상에서 기술에 대한 낙관주의와 과학에 대한 신뢰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호응을 받는다는 것도, 위협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나 덧붙일 내용도 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생명의 기원에 관해서 이 책에서 다루는 학설은 현재 소수의 지지만을 받는 비주류 입장이 되었다. 이 소설 안에서는 이상한 아이디어 취급을 받는 판스페르미아 가설, 즉 대충돌 시기에 우주에서 생명의 원초적 형태(유기화합물)가 날아왔다는 설명을 오히려 신뢰하는 과학자도 있다(이 부분에 관해서 나는 이정모의 『공생 멸종 진화』, 그리고 과학 팟캐스트인 「파토의 과학하고 앉아있네」를 참고했다). 물론 이런 연구결과가 소설이 집필되는 도중 나왔다면, 그것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이런 디테일이 눈에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소설을 집필하는 데 도움을 준 “과학 자문”의 이름도 감사의 말에서 밝히고 있으니 말이다.


요약하자면, 이야기 전체의 중추를 이루는 소재, 즉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잘 구성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반적인 긴장감이 너무 떨어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답을 찾으려 하기보단, 혼자서 생각해보거나 다른 책을 읽는 것이 더 나을거라 생각한다. 우리에겐 이런 문제에 훌륭한 대답을 해주는 소설과 영화가 이미 많이 주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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