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들의 청일전쟁 - 전쟁과 휴머니즘
조재곤 지음 / 푸른역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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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한국 근대사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다. 한달 전 신간 도서에서 이 책을 보고 관심이 갔다. 돌이켜보면 국내 저서 중 ’청일전쟁’ 주제만을 다룬 책은 드물고 한국 근대사로 동학농민혁명을 다루면서 함께 보조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이 책에서 청일전쟁만을 어떻게 다룰지 궁금했다.


청일전쟁은 1894년 발발하여 1895년까지 진행되었다. 청과 일본 간 벌어진 전쟁이지만 일본이 국내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 전쟁이 시작되면서 국내가 전쟁터의 한복판이 되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청일전쟁이 진실에 가까운지는 의문이 든다. 물론 과거의 사건이기에 사료적으로 많은 한계가 있겠지만 연구적인 부분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과 일본의 연구는 일국사적 시각 또는 일국을 중심으로 한 양국간의 비교적 시각에서만 청일전쟁을 이해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같은 시기 활동했던 동학농민군에 관한 연구는 많지만 청일전쟁에 대한 이해는 상대적으로 매우 부족하다. 때문에 전체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간 연구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청일전쟁의 전 과정을 조명하고, 보다 보편적 · 객관적 시각과 사료에 근거해 청일전쟁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 P19


청일전쟁의 시작은 1894년 7월 23일 일본궁이 경복궁을 점령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 직전 일본에는 세 부류의 세력이 있었다. 천황가와 내각, 내각 구성원 중에서도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하는 세력, 이들과 사안에 따라 협력 또는 갈등하는 외부와 군부가 있었다. 청일전쟁은 이 중 외부와 군부의 결정이 개전의 주요 동인으로 작용하였고 오토리 게이스케 조선 주재 공사의 상황 인식과 행동이 변수로 작용하면서 조선 출병과 왕궁 점령이 결정되었다.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내각의 의견에 따라 작전을 결행하지 말라고 전달했다.)

 

일본 참모본부는 경복궁에 접근한 일본군에게 조선군이 선제 발포하고 이에 일본군이 응사한 것으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당시 현장을 목격한 일본군 장교들의 언급을 확인하면 일본군의 왕궁 침입과 그로 인한 ‘상호 교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월 23일 왕궁 수비병은 다섯 차례에 걸쳐 적극적으로 항전했다. (통설에 의하면 조선군은 일본과의 소규모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패한 뒤 도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 날 독판교섭통상사무 조병직이 일본군 철수 명령을 전달했으나 오토리 게이스케는 이를 무시하고 각국 공사관에 공문을 보내 ‘일본군의 발포는 정당방위였다’고 변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왕궁 수비병이 해산한 것은 도망간 것이 아니라 날조된 국왕의 ‘전교’를 믿고 명령을 수행한 것이다. 


일본군은 경복궁 점령을 사전에 철저히 계획 하에 진행했다. 우선 전신선 가설을 위해 (조선 전국 지도까지 제작) 한성 전보 총국을 장악했고, 서울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전보를 차단하고 도성 내외를 수색하며 중국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경복궁 점령 당일부터는 서울-평양 전신선을 차단한다. 

소식을 들은 조선 백성들의 피난이 이어진다. 경성 일본영사관 서기생 오키 야스노스케는 영사관에서 각 주요지에 순사를 파견하여 정세를 탐문하고 인부와 말먹이, 양식을 징발하여 일본군에게 편의를 제공하게 했다고 밝혔다. 당시 길거리 인민은 모두 물건을 지고 밖으로 몸을 숨겼고, 부녀자들은 10리 내외의 산중 또는 벽촌에 무리를 이루어 피란했다. 특히 평양, 황주, 순안, 중화 부근의 피해가 심해서 사방 70~80리 사이 물건은 거의 약탈을 당해 닭과 개 한 마리 없이 텅 빌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빠졌다. (P87) 


청국의 조선 출병은 1894년 6월 4일 전라도 농민 봉기에 따른 성의 함락으로 급박했던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직예제독 예지차오와 태원진 통병 니에시청 하의 청군은 아산만의 백석포를 거쳐 아산에 들어왔다. 조선 정부는 영접사를 파견하여 무기 수송과 각종 비용을 제공하는 등 그들의 요구사항에 들어주었다. 이에 지방군은 그 요구를 맞춰주기 위해 백성의 고혈을 짜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일본군은 1892년 징발령을 통해 현지 조달 원칙을 적용하여 강제 징발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인부는 이탈하고 일부 지방관은 협조하지 않는 상황이 많았다.  


7월 25일 경기도 남양만의 풍도에서 청일 간의 해전이 일어났고 7월 29일 충청도 성환과 아산 전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지상전이 전개되어 이후 평안도 평양과 정주, 의주 등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다. 일본군이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진격한 이후에도 한반도는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해야만 했다. 


풍도 해전에 대해서 그간 일본과 중국에서는 많은 학술적 연구와 글들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과거에는 군국주의 일본의 국제법적 승리와대외적 과시의 대상으로 이 사건을 크게 강조해 왔다. 반면 중국에서는 일본 해군이 이곳을 먼저 공격한 뒤 뒤늦게 선전포고를 한 것을 근거로 일본제국주의의 불법 도발임을 부각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전투가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전쟁의 시발점이었다는 데는 어느 정도 의견일치가 되고 있다. - P232


풍도는 현재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으로 되어 있는 곳으로 덕적군도의 작은 섬이다. 일본의 중고교 교과서는 풍도 해전이 지도와 함께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건으로 자세히 소개된다고 한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풍도 해전과 성환 전투에서 청국에 승리함으로써 청일전쟁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894년 7월 24일 일본 함대는 아산을 정찰하고, 아산만 부근의 풍도 앞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7월 25일 청국 함대가 일본 함대와 맞닥뜨렸다. 일본의 배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가운데 일본 함선은 청국 함대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청국 함대는 달아나다가 암초를 만나 좌초되자 군인들을 상륙시킨 후 폭파되었다. 전투 과정에서 청국군은 10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했다. 

성환 전투는 일본군이 7월 30일 성환 동북방의 고지를 점령하면서 일본군 기병이 아산 방면으로 퇴각하는 청군 보병을 습격하여 8명을 참살한 전투다. 성환 전투는 양국간 제1차 지상전으로 규모는 작았지만 그 영향이 매우 컸다. 청국군이 평양으로 밀려 올라가면서 일본군은 조선 중부를 완전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언론은 청일전쟁을 일본의 자위 행위로 미화하고 조선에 대한 우월감을 강조하는 등 그들이 이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문명 개화, 식민지적 발상이 이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일본 언론의 보도 행태는 사실과 거리가 먼, 왜곡된 것이었는데 이것이 실체로 자리잡으며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이른바 ‘군신‘들을 만들어 냈는데 그 공식적인 첫 번째 주인공이 기구치고헤이였다. 시라카미 겐지로와 같은 오카야마현 출신의 그는 1892년 입영했는데,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1등졸 나팔수로 참가했다가 총탄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1912년 도쿄고등사범학교 훈도 아이시마 카메사부로는 《심상소학수신서예어원거尋常小學修身書例語原據》의 ‘제17충의‘의 <예화 기구치 고헤이>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21연대 마쓰자키 대위는 제12중대의 전위로서 어두운 밤을 잘 이용하여 성환의 성루 앞으로 나아갔다. 기구치 고헤이는 그 첨병으로용기를 떨치며 앞장서 돌진의 나팔을 불었다. 적이 발사한 탄환이한층 더 격해지는 가운데 겨우 20여 인 만으로는 어떻게 하기 어려웠다. 기구치 고헤이는 2등졸의 몸으로 적의 앞 5~6칸까지 나아가 "앞서 나가라, 앞서 나가라"라고 나팔을 불어 우리 군의 용기를 북돋웠다. 우리 군은 이 용기에 격려되었고, 돌진하여 마침내 적병을부수었다. 이때 지금까지 계속 불던 나팔 소리가 갑자기 끊어져 괴상히 여기고 이를 보았더니 고헤이가 적탄에 맞아 용감하게 전사한것이었다. 그 시체를 정리하면서 봤더니 고헤이는 나팔을 꽉 쥐고입에 댄 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죽어 있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감탄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오호라. 충렬한 고헤이. 죽음에 이를때까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진실로 수천 년의 귀감이고 오랫동안 호국의 신이 되었다. - P316


성환 아산 전투의 전리품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비롯하여 일본 국내 주요도시에서 순회 전시되었다. 이후 평양 전투와 중국 관내에서의 전리품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 노획한 탄환 중 일부는 혼성제9여단 야전포병 제5연대의 사격 훈련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P307


성환과 아산의 전투에서 패한 청군은 평양에 도착했다. 청국군이 패배한 소식에 조선 청부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댈 곳이 없는 정부는 청 정부에 신속한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2차 청국군이 추가로 들어와 평양에 합류한다. 후발 청국군 4대 군은 웨이루쿠이의 성쯔군, 마위쿤의 의군, 쭤바오구이의 펑군, 리셩아의 펑톈 성쯔연군과 지린연군이었다. 

당시 평양 사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기록으로 패은당의 <서경패사초략>이 있다. 그에 따르면 웨이루쿠이가 거느리고 온 병사는 산명장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외촌으로 나가서 우마와 재화를 빼앗는 것이 강도보다 심했다. 그 결과 평양의 인심이 크게 동요했다. 의주부터 평양까지의 500리 거리 연도의 백성들 재산을 약탈한 것도 거의 다 웨이루쿠이 병사들이 저지른 짓이었다. 반면 나머지 3군은 상대적으로 덜 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양 전투가 벌어지기 전 평양성의 주민 대부분은 집을 버리고 도망가 인가에서 연기가 사라진 상태였다고 한다. 


선교리 전투와 모란대 · 현무문 전투가 평양의 3대 전투이다. 이 중 대동강 남안의 선교리 전투는 청국군이 완승하고 일본군이 패한 것으로, 당시 청국 측이 주장하던 ‘선승후패‘ 중 ‘선승‘ 단계에 해당한다.

선교리 전투는 청국군 2,200여 명, 일본군 3,600여 명이 참여한, 평양포위전 중 육박전을 포함한 가장 격렬하고 가장 오랜 시간의 전투로 기록된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장교 6명, 하사졸 134명 총 140명이었고, 부상자는 장교 17명, 하사졸 270명 등 총 287명이었다. 이때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도 가슴을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다." 니시지마 연대장, 나가타 포병대대장, 모리 보병대대장 외 중대장 3명의장교가 부상을 입는 등 일본군은 매우 큰 타격을 받았다. 그 결과 평양성 공격을 준비한 혼성여단과 5사단 본대, 원산·삭령지대는 전진을 포기하고 숙영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P466


자료에 따르면 평양 북부의 정주는 집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부서졌고, 의주는 청국군의 약탈과 방화로 3,000호 가옥 중 2,000호 이하만 남게 되었다 한다. 평양은 6만여 명의 주민이 전쟁 시 1만 5천 명으로, 안주는 3,000호가 300호로 10분의 1 규모로 줄어들었다. 성천은 650호의 가옥이250호로, 순안은 600호의 가옥이 60호로, 황해도 황주의 주민은 3만명이 6,000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한편 서울 일본영사관 서기생 오키 야스노스케의 현지 조사 보고에 의하면 경기 북부와 황해도·평안도의 피란민 현황과 호수와 인구 감소, 경제적 파급과 후유증 등을 주요 도시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조사한 25개 지역은 경기도의 고양·파주·장단·개성, 황해도의 금천·평산·서흥·봉산·황주·장연, 평안도의 중화·평양·순안·숙천·안주·박천·가산·정주·선천·철산·용천·의주·곽산·삼화·용강 등지였다. 이 지역들의 호구와 인구는 전쟁으로 인해 이전의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 P536


이 책은 청일전쟁만 집중적으로 다루어서 세세한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청일전쟁에 관한 자료나 출판물 등 청, 일본, 조선에서 가져온 다양한 기록물들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길 자료조사 및 정리에 무척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다 싶었다. 오래도록 조사한 자료를 이렇게 집에서 편하게 볼 수 있다니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나중에라도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아 구입할 작정이다.  


청일전쟁 동안 조선인들은 남의 전쟁에 동원되어 협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항을 했고 물리적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기에 청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당연히 부정적인 인식이 팽만했다. 그럼에도 청국과 일본의 전투장이 되었던 해당 지역 주민들은 ‘유원지의’를, 동학농민군은 ‘내자불자’의 인도주의 정신을 보이고 있었다.

유원지의는 “(국적 여하를 막론하고) 먼 곳에서 온 사람을 따뜻하게 대접한 후 되돌려보낸다”는 조선의 전통적 손님 접대 방식으로 서양인과 중국인들이 조선에 표류할 때마다 적용한 바 있었고, 고종 초 초반 흥선대원군 집정기에 평안감사 박규수 등이 실행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조선인들도 풍랑으로 부득이 중국에 표류할 수밖에 없었을 때 같은 이유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자불거는 <맹자>의 인생철학을 반영한 “무릇 가는 사람은 붙들지 말고 오는 사람은 누구든 막지 않는다”는 인본주의 원리에 따라, 청국군의 진압 대상인 동학농민군이 스스로 표명한 ‘상화相和’의 방식이었다. - P63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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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유산‘이라고 부르는 재산의 순환방식은 ‘시장‘이라고 불리는 순환 방식과하나하나 대비된다. 바로 ① 교환이 아니라증여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점 ② 행위자들은 서로 대체될 수 없으며 모부가 매긴 규칙에 따라 엄격하게 정해진다는 점 ③ 이때의순환은 행위자들, 즉 증여자와 수혜자의 선의에 의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 P11

국가는 거대한 가족이었다. 그러나 경제학이 ‘엄밀한‘ 과학으로 굳어지자, 이 경영과 부가 인간 행위 바깥의 우주적 움직임의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생겼다. ‘경제économie‘에 ‘정치 politique‘라는 단어가 더해지면서 경제는 ‘폴리티 politie‘ 즉 국가를 생산의 장소로 여기게 되었고 실제 생산의 장소는 도외시했다. 이처럼 경제가 생산과 그 조건들보다 교환에 더 집중하면서 경제와 시장 간의 등식이라는 이념적인 레짐이 탄생했고, 우리는 여전히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 P12

지위와 급여 면에서 사다리 아래로 추방당한 그들의 상태가 특정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이 상태가결혼에 대한 객관적인 유인이 된다(델피, 「결혼과 이혼」 참조).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본주의생산 양식, 적어도 노동시장이야말로 가정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가정 내 노동으로 인한 착취의 구조적 기반이자 선행 변수다. - P28

가정 내 생산 양식은 여성 종속의 다른 요소들, 특히 억압경제적 착취처럼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예컨대 물리적이거나상징적인 성화된 폭력 (대상이 여성이냐 혹은 남성이냐와 연결된)과 물리적이거나 상징적인 성적 폭력(해부학적 기관으로서의성기와 연결된)을 고려하지 않는다. - P31

사실 우리는 각 순간 제도의 존재를 그 순간의 맥락에 따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지속성-지속이라는 게 있다면은 현재의 맥락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 P38

우선 근본적으로 ‘대상‘은 ‘순수한‘ 사실 자체가 아니라 사실에 대한 즉각적이고비표면적인 인식으로서, 이는 세계에 대한특정한 시각, 파이어아벤트(1979)가 말하는
‘자연적 해석‘에 의해서 생겨난다. 다른 한편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풍경은 맨눈으로는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들을 내재할 뿐 아니라 ‘사진‘으로 보았을 때 분석에적절하지 않은 구성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 P45

사회적 측면에 최소한의 중요성만을 부여한다 해도, 우리가 그저 사회가 기능함에 있어 성별이 적절하다고 주장하는 데서 만족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적절성이라는 것이 결국 사회적 사실이라는 점, 따라서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설명을 요구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의무가 있다. - P53

‘아무 곳도 아닌‘ 곳에 대해 이야기하는듯한 태도는 결국 ‘모든 곳‘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이는 속인적인 권위를 행사하려는태도와 함께 간다. - P62

페미니즘에 반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페미니즘이 만들어낸 개념(예를 들면 젠더) 중 일부를 빌려야만 하기 때문에, 이 대표자들은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젠더가 ‘섹스‘와 동의어로 (개념이 아닌 용어로) 쓰이는 경우에도, ‘젠더‘라는 단어가 발화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는 담론에서 싫든 좋든,
가장 일반적인 차원에서 가장 전복적인 차원‘젠더‘를 사회 분열의 주요 쟁점으로 만드는에 이르기까지 젠더에 대한 모든 함의를 끌어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이들은 페미니즘의 영역으로 끌려 나온다. - P65

마르크스주의적 개념 가운데 일부는 부인할 수 없는 효용성을가졌기 때문에 사회를 사유하는 이들 대부분이 차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 개념 중 내가 사용한 것은 ‘계급‘이다(「주적」 및 「결혼과 이혼』 참조). 이 용어는 앞서 필요하다고 언급한 분석 방식에 적합하다. 즉, 이미 구성된대상 자체-여기에서는 여성 억압ㅡ를 잘게 쪼개어 (특정한 시각으로 조각을 만들어 - P67

낸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다) 조각내는 방식 말이다. 더 정확히는 경제적 차원과 같은, 더욱 자세하게는 경제적 착취의 영역과같이 비- 특정적인 차원으로 쪼개는 것이다. - P68

젠더 개념은 처음 등장했을때 단 한 단어로 ‘성적‘ 이분법의 사회적 측면을 인정하고 그 사회적 측면을 사회적으로다뤄야 할 필요성을 포괄했으며, 결과적으로 사회적인 측면을 성의 해부학적·생물학적인 면과 분리했다. 젠더는 성 역할에 대한시선을 ‘성‘의 구성 자체로 이동하게 할 방편을 잠정적으로나마 가지고 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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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도 해전에 대해서 그간 일본과 중국에서는 많은 학술적 연구와 글들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과거에는 군국주의 일본의 국제법적 승리와대외적 과시의 대상으로 이 사건을 크게 강조해 왔다. 반면 중국에서는 - P232

일본 해군이 이곳을 먼저 공격한 뒤 뒤늦게 선전포고를 한 것을 근거로일본제국주의의 불법 도발임을 부각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전투가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전쟁의 시발점이었다는 데는 어느 정도 의견일치가 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청일전쟁의 전황을 ① 풍도 해전, ② 평양 함락, ③ 황해 해전, ④ 뤼순· 다롄 전투, ⑤ 웨이하이웨이 전투, ⑥시모노세키조약의 6단계로 보고 있다. 치치장 교수도 풍도 해전을 ‘갑오전쟁의 제1전‘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 및 일본과는 달리 중국은 풍도 해전보다 이틀 앞선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문제를 청일전쟁의 전사로서 의미를 부여하거나 논외로 처리하는 것이 학계의 일반론이었다.
풍도 해전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중국과 일본 간의 국제법적 논쟁이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국제법적으로 조선 관련 문제는 전혀 언급되거나 논의되지도 않고 있다. - P233

청국군은 성환과 아산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즉각 전면전을 구상하지 않고 완만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는 조선 주재 청국군 수뇌부전체의 인식이라기보다는 일찍부터 전면전을 원하지 않았던 리훙장의전략적 판단과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그 결과 평양 주둔 청군도 남하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청국 정부는 평양 파견 부대와 평안도 주민의 협력을 크게 믿고 있었다." 이렇듯 청국군이 오판하여 장기 주둔책으로 일관한 반면 일본 군대는 계속 조선에 증파되었고 평양 방면에서 대회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 P261

8월 1일 일본 천황 메이지는 <선전조칙>을 공식 발포했고 같은 날청국 황제도 <개전조칙>을 발포함으로써 전쟁을 공식화했다. 원래 일본의 선전포고 초안에는 ‘청국 및 조선국에 대한 전투를 선언한다는것이 들어있었는데, 최종안에서는 ‘조선국‘이 삭제되었다. 조서에서 메이지는 조선이 ‘독립국가임을, 광서제는 ‘중국의 번속‘임을 강조했다.
전쟁에 임하면서 청국과 일본은 각각 조공을 매개로 하는 화이질서와국제법을 명분으로 하는 공법질서를 조선에 제시했다. 이는 외교력과군사력을 기반으로 하는 제국주의 시스템의 새로운 변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중 이른바 ‘독립국가‘ 이슈는 일본의 선전책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적지 않은 효과가 있었고 이로부터 청은 세계의 여론전에서도밀리기 시작했다. - P262

성환 아산 전투의 전리품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비롯하여 일본 국내 주요도시에서 순회 전시되었다. 이후 평양 전투와 중국 관내에서의 전리품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 노획한 탄환 중 일부는 혼성제9여단 야전포병 제5연대의 사격 훈련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P307

그런데 당시 전리품 순회 전시 품목에는 평양 전투 시 막사에서 수습했다는 ‘조선 부인의 상의‘도 있었다. 조선 부인의 상의를 전시한이유는 청국군이 진중에 ‘부인‘을 부를 정도로 군대에 기율이 없고, 싸울 의지도 없어 전투하면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위함이라고 설명하였다. 1894년 12월에 발간된 또 다른 상업 서적은
"성환의 역, 아산의 적영에서 분포한 물품・・・・・・ 중에는 조선 기의 상의가 있다. 이 상의는 조선의 민영준이 청국 장수를 위로하기 위진중에 보낸 관기가 착용한 것이다"라고 매우 악의적으로 소개하였다. 후일의 청일전쟁 공식 보고서인 《동경시축첩대회>에서도 특별히 "부인의 옷과 같은 것은 대개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입안의 밥알을 내뿜게 된다"며 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부녀자의 의복까지 수습하여악의적 선전도구로 삼은 것은 일본이 강조한 ‘문명‘이 아닌 ‘야만‘의광고 선전에 불과한 것임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아직도 이들 물품을 보관 중이다. - P305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이른바 ‘군신‘들을 만들어 냈는데 그 공식적인 첫 번째 주인공이 기구치고헤이였다. 시라카미 겐지로와 같은 오카야마현 출신의 그는 1892년입영했는데,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1등졸 나팔수로 참가했다가 총탄에맞아 사망한 것이다. 1912년 도쿄고등사범학교 훈도 아이시마 카메사부로는 《심상소학수신서예어원거尋常小學修身書例語原據》의 ‘제17충의‘의 <예화 기구치 고헤이>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21연대 마쓰자키 대위는 제12중대의 전위로서 어두운 밤을 잘 이용하여 성환의 성루 앞으로 나아갔다. 기구치 고헤이는 그 첨병으로용기를 떨치며 앞장서 돌진의 나팔을 불었다. 적이 발사한 탄환이한층 더 격해지는 가운데 겨우 20여 인 만으로는 어떻게 하기 어려웠다. 기구치 고헤이는 2등졸의 몸으로 적의 앞 5~6칸까지 나아가 "앞서 나가라, 앞서 나가라"라고 나팔을 불어 우리 군의 용기를 북돋웠다. 우리 군은 이 용기에 격려되었고, 돌진하여 마침내 적병을부수었다. 이때 지금까지 계속 불던 나팔 소리가 갑자기 끊어져 괴상히 여기고 이를 보았더니 고헤이가 적탄에 맞아 용감하게 전사한것이었다. 그 시체를 정리하면서 봤더니 고헤이는 나팔을 꽉 쥐고입에 댄 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죽어 있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감탄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오호라. 충렬한 고헤이. 죽음에 이를때까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진실로 수천 년의 귀감이고 오랫동안호국의 신이 되었다. - P316

일본인 특파원들은 객관적이고 정확한 사실 보도보다는 일본제국의 나팔수로서 ‘문명과 야만‘이라는 도식을 적용, 이웃나라를 모멸하는 배외적인 충군애국주의로 일관했다. 여기서 대조선 지배 정책실현 과정에서 청일전쟁이 조선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창출했는지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에서 정한론征논의가 다시 체현되고 이때 만들어진 왜곡된 ‘조선상‘이 실체적 진실처럼 장식되어이후 황국사관·식민사관 등을 거치며 이른바 ‘혐한‘의 기제로 크게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간 연구의 사각지대에 있던 종군기자의 활동상을 주요 언론사별, 특파원의 주요 직군별로 구분하고 체계적으로 조명하여 보다 객관적 시각에 근거해 연구해야 할 시급성이 있다. - P333

리훙장은 평양에 주둔한 4명의 통령에게 군기를 엄히 정돈하고 상민의 어려운 상황을 위무하여 소란한민심을 안정시켜 후환을 막도록 했다. 청국군의 엄정하지 못함으로 인해 심지어 ‘자진하는 주민들도 많았다 한다." 평양의 - P425

평양 주민의 전시 준비 상황은 동원과 자발적 협력이 병존했다. 평양에서 42일만에 축성한 요새는 17~50세 조선인 노역 동원의 결과물이었다. 보루마다 약 500명의 수비대 외에 360명의 조선인 인부가 견고한 요새를 축성했다"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은 관내 조선군 2,000명을 모집하여 청국군 부대에 부속시켰고, 800명의 민병을 징집했다. - P427

평북 용천 관아에서 보내온 서울 소식 ‘정사관한 두루정사에마리)‘을 보면 평안도의 구정과 신정, 즉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갑오개혁으로 인한 청국과 일본의 권력 교체 과정에 대한 양국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김영식에 의하면 관제와 의복제도 및 기타 장정은 한결같이 ‘왜제‘를 따랐고 대관은 모두 개화관료들을 임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군 진영에서는 황제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도백과 수령을 교체하지 못하도록 하고, 청국 조정에서 결정하기 전에는 마음대로 임지를 이탈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신정을 일체 발송하지 말도록 했다"면서 그 결과 감사의 거취가 기한이 없게 되었으니 한탄스럽다고 기록하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직후 반일무장전투를 전개하던 평양 병정의 부대였던 서영도 결국 해체되었다. - P443

일본군 부대가 황해도 강령을 왕복하면서 해주 서쪽 취야장에 머물던 때 최윤학이라는 자가 일본군들에게 취사를 제공한 일로 동학농민군에게 살해당하고 가산도 모두 빼앗긴 일이있었다. 8월 경기도 장단에서는 일본군 군량 수송 명목으로 군의 좌수남형철이 ‘군량을 실어 보내는 수레를 대신하는 돈[軍流馬代]’이라 가칭하고 각동집강을 비롯한 촌민을 수탈하고 각 면과 각 동에 강제로 징수하는 등 폐해를 일으켜 동민들이 원정을 올렸고, 그결과 그는 다음 해 4월 경기감영을 거쳐 법부 고등재판소로 압송되었다.‘ 남형철은 8월 24일 혼성여단 사령부가 장단에 도착했을 때 특이하게도 일본 군대를 위한 인부 동원을 주선하는 등 자발적으로 적극 협력한 자였다. 여단장 오시마는 이에 즉석에서 그에게 10원을 주어 격려했고 또한 경성의 오토리 공사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 정부가 포상하도록 한 바 있다. - P448

중화 전투의 특징은 초기 전투가 일본군과 조선 민중의 전투라는 데 있다. 평양과 중화에서 주민들이 격렬히 저항했기 때문에 여러명의 척후가 사망했고 남은 일본군들은 황주 방향으로 후퇴하지 않을수 없었다. 청일전쟁에 관한 일본 군부의 공식 기록으로 참모본부가 편찬한 《명치 이십칠·팔년 일청전사>에서도 평양을 정찰 중이던 마치구치 중위가 "한인이 그 위력을 빌려 공연히 일본인에게 반항했기 때문에 중화로 물러가 그 임무를 계속했다" 고 정리했다. 이미 평양 전투이전에 중화에서 진압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민들의 거센 저항을 우려 - P456

하였고 실제로도 일본군은 정찰대를 상실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일본.
통역관의 과실이 이를 초래한 것으로 축소 평가했다. 이후 일본군과 청국군은 각기 황주성과 평양성을 근거지로 하면서중화 지역을 최전선으로 하는 소규모 공방전을 계속했다. - P457

선교리 전투와 모란대 · 현무문 전투가 평양의 3대 전투이다. 이 중대동강 남안의 선교리 전투는 청국군이 완승하고 일본군이 패한 것으로,156 당시 청국 측이 주장하던 ‘선승후패‘ 중 ‘선승‘ 단계에 해당한다.
선교리 전투는 청국군 2,200여 명, 일본군 3,600여 명이 참여한, 평양포위전 중 육박전을 포함한 가장 격렬하고 가장 오랜 시간의 전투로 기록된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장교 6명, 하사졸 134명 총 140명이었고, 부상자는 장교 17명, 하사졸 270명 등 총 287명이었다. 이때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도 가슴을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다." 니시지마 연대장, 나가타 포병대대장, 모리 보병대대장 외 중대장 3명의장교가 부상을 입는 등 일본군은 매우 큰 타격을 받았다. 그 결과 평양성 공격을 준비한 혼성여단과 5사단 본대, 원산·삭령지대는 전진을 포기하고 숙영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P466

히야마 유키오는 1894년 6월~1895년 12월 기간 전쟁 지역 입원 환자 총 11만 5,419명 중에 조선에서 이질에 걸린 환자가전체의 9.7퍼센트인 1만 1,164명이 된다는 분석 자료를 제시했다. 그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조잡한 가옥과 불결하고 가난하다는 강렬한 조선멸시관이 만들어졌고 그러한 멸시관은 청국과 대비해 더 강화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히야마는 조선의 위생 문제만을 크게 강조하면서 일본 - P482

사들의 사활이 걸린 질병의 원인이 조선의 불결한 위생 문제에 있었던것으로 이해하려는 듯하다. 실제로 병사들은 조선과 청국의 열악한 위생환경 때문에 전염병에 감염되어 고생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일본군의 식량 부족에 따른 영양 결핍, 비타민 결핍, 오랜 기간의 노지야영생활, 죽음에 대한 공포감, 장기간 행군의 피로, 이문화에 대한 부적응 등은 간과하고 있다. 또한 같은 기간 일본에서도 창궐했던 것처럼이질은 주로 하절기에 유행하던 질병으로, 일본군 주력이 1894년 가을이후 청국 관내로 진입하여 봄부터 추석 이후까지 조선에 주둔함에 따라 이곳에서의 발병률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 P483

자료에 따르면 평양 북부의 정주는 집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부서졌고, 의주는청국군의 약탈과 방화로 3,000호 가옥 중 2,000호 이하만 남게 되었다한다. 평양은 6만여 명의 주민이 전쟁 시 1만 5천 명으로, 안주는 3,000호가 300호로 10분의 1 규모로 줄어들었다. 성천은 650호의 가옥이250호로, 순안은 600호의 가옥이 60호로, 황해도 황주의 주민은 3만명이 6,000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27한편 서울 일본영사관 서기생 오키 야스노스케의 현지 조사 보고에의하면 경기 북부와 황해도·평안도의 피란민 현황과 호수와 인구 감소, 경제적 파급과 후유증 등을 주요 도시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조사한 25개 지역은 경기도의 고양·파주·장단·개성, 황해도의 금천·평산·서흥·봉산·황주·장연, 평안도의 중화·평양·순안·숙천·안주·박천·가산·정주·선천 • 철산·용천·의주·곽산·삼화·용강 등지였다. 이지역들의 호구와 인구는 전쟁으로 인해 이전의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 P536

성환과 아산 전투에서는 3명, 풍도 해전에서는 84명, 평양전투에서는 566명을 체포했다. 내용 설명에 의하면 일본 육·해군에 포로가 된 자, 투항한 자 및 병상자로서 구호를 받은 자 등을 포함, 평양에서 사망자 59인 중 47인은 각기 반항하여 총살된 자를 포함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불명‘으로 표현된 60명 중 살아남은 자는 결국 단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포로 처형은 조선에서 행해진 것만은 아니었다.
이어지는 또 다른 표에는 만주 뉴장성에서 체포된 청국군 중 13명의 사망자 중에는 반항하다 총살당한 자를 포함했고 하이에서도 하사 이하 사망자 90인 중 반항 때문에 총살된 13인을 포함하고 있 - P582

다고 되어 있다. 청일전쟁 8년 후인 1902년 작성된 이 ‘일청전역 통계‘에서는 평양의47명 이하 포로 처형이 모두 ‘총살‘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을제외하면 당시 상황을 목격하고 기록한 모든 문서 자료와 종군일기, 상황을 묘사한 삽화 등에서는 총이 보이지 않았고 칼로 목을 벤 것으로만되어 있다. 예컨대 1895년 3월 25일 뉴장에서 일본군 제3사단 기병제3대대 제2중대 제4소대 일등졸 니시무라 마츠지로는 친구에게 보낸편지에 "최근 전투로 매사 소심한 소생이 한층 대담하게 되어 한두 사람을 목 베어 죽이는 것이 마치 평일에 이를 잡는 것 같은 마음"이라고 적고 있다. 그럼에도 위와 같이 공식 정리한 것은 후일 여러 나라로부터 야만적 행위를 비난받을 것을 우려한 일본군 수뇌부가 ‘참수‘를 ‘총살‘로 분식한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 P583

조선인 인부는 일본인 인부와 함께 일본군에 부속되어 압록강을어 중국 안동현과 여러 지역에서 양곡과 물자 수송에 동원되었다. 육포병 소좌로 압록강 전투에 참여했던 오시아게 모리조는 10월 30일 등기에, "후방에서 양곡을 취하여 전방인 청국 안둥현으로 전송했다. 겉은 날 매일 2,000~3,000명의 한인 인부를 사역하여 뒤에서 모집하고또 앞으로 보내기를 매우 바쁘게 하여 성황을 이루었다.....대체로 황군의 운이 우세하니 한인 인부의 위풍도 한결같다. 운반하는 일에 이익을 얻는 것도 큼에 따라 이 무렵 은화는 1원 화폐만으로 1역에 1원인고율로 은으로 지출했다. 대체로 지폐는 그들이 신용하지 않고 또 그들은 서로 신용도 없어 지불할 수 없었다" 6"라고 적고 있다. 오시아게의이 기록을 통해 조선인 인부의 중국 관내 동원은 일본군이 처음 압록강을 넘어가기 시작할 무렵부터 시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일의인원도 2,000~3,000명 정도였으며 임금은 1인당 1원씩 은화로 지불했다는 것이다. - P616

조선 정부가 청국으로보내는 인부 징집을 공식적으로 정지한 것은 그해 3월 중순 평안감사의 전보를 통해 알 수 있다.

의주부의 반접하는 일을 끝냈고, 물의를 빚은 육지 운송을 청나라땅에 바닷길로 옮기게 해서 인부의 차출을 정지시켰으며 백성에게농작을 권면하니 여러 읍이 편안하게 쉴 만합니다. 백성을 위한 일로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어제 15일에 임소로 돌아왔습니다.

평안감사 김만식은 의주에서 일본 군대를 영접하고 군수품 수송과인부 차출을 끝마치고 평양으로 되돌아온 사실을 중앙정부에 보고했다. 그는 그간의 육지 운송은 ‘물의‘를 빚었고 이를 해운으로 전환시킴에 따라 인부로 차출되었던 농민들이 비로소 농토로 돌아올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 이와는 달리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직전인 4월 12일까지도 주롄청으로 보내는 인부 1,081 인과 안둥현행선박 10척 등 조선인 인부와 조선 선박은 계속 동원되고 있었다. - P621

1894~1895년 청일전쟁 기간 조선의 민중들은 이방인들의 폭력으로 강요된 통제와 동원이라는 차별과 배제의현실에서도 타자를 대하는 방법에서 열린 태도open arms를 견지하고 있었다. 농민군들은 일찍이 동학에서 표명한 양반과 상놈의 차별 없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베풀고 돕는 나눔과 배려의 정신인 ‘유무상자와 가난하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서로 보살피는 ‘빈궁상휼을 기꺼이 실현하고 있었다. 인명존중 사상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무장포고문布告文>의 서두 외에도 정부군과싸우는 과정에서도 ‘배우고 실천하는 근본‘ 강령으로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배고픈자는 음식을 준다, 가난한 자는 진휼한다, 아픈 자는 약을 준다"고 규정하고 있다. 동학농민군 접주 유광화는 동생에게 보낸편지에서 "나라가 환란에 처하면 백성도 근심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라는 결의를 다졌던 그 또한 형장의 이슬로사라졌다. 공존을 위한 힘없는 자들의 포용, 그것은 같은 기간 전투력을 상실한 패잔 동학농민군과 청국군 잔류자와 상인들을 수색·살해·집단처형했던 일본군의 행위와는 크게 대비되는, 진정한 의미의 휴머니즘이었다. - P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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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스투파의 숲, 신비로운 인도 이야기> 전시회에 다녀왔다. 


이 전시는 2023년 7월부터 11월까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나무와 뱀, 인도 초기 불교미술>의 한국 전시다. ‘나무’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나무를 상징하는 것이고, ‘뱀’은 신화 속 머리가 여럿 달린 뱀인 ‘나가’를 의미한다. 




석가모니는 인도와 네팔 국경 근처 마을에서 태어나 북인도 지역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서 그의 제자와 수행자들에 의해 불교가 전파되면서 전 세계로 불교가 뻗어나갔다. 전시를 통해서 특히 데칸고원 이남인 남인도 지역에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았고 불교가 자리잡으며 표현되는 미술 세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원전 2세기 말 인도 최초의 통일 왕조인 마우리아 제국이 무너지고 남인도에 사타바하나 왕조가 들어선다. 이 기간 동안 남인도에 스투파가 세워진 것은 물론 많은 유물들이 만들어졌다. 전시에서도 사타바하나 왕의 관련 유물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왕실은 불교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신자들은 왕실의 후원을 바라며 많은 기부를 했다고 한다. 


남인도는 적도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덥고 습한 기후를 가지고 있어 식물들이 아주 잘 자라는 환경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시작부터 연꽃, 뿌리 식물 등 강한 생명력을 지닌 식물들을 배경으로 한 유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신의 모습을 한 정령이 입에서 연꽃 줄기를 뿜어내는 모습도 보이고 연꽃이 보물을 쏟아내기도 한다. 연꽃 무늬가 끝없이 이어지면서 끊어지지 않는 생명력을 표현하기도 했다. 항아리에는 물이 가득 차 있고 식물들이 솓아져 나오며 풍요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특수 효과로 식물 덩쿨 줄기를 표현하여 그 생생함을 업그레이드하여 보여주는 것 같았다.



특히나 불교가 전해진 이후에도 이런 고유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불교 미술과 접목하여 독특한 미술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이 돋보였다.


아래 그림은 생산과 풍요를 의미하는 풍요의 신 ‘락슈미’다. 풍요의 신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항아리 안에서 솟아나오는 연꽃 위에 신이 그 위에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건조한 겨울이 끝나고 나면 풍요의 계절이 시작됨을 표현한 것 같다. 




이번 전시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마카라’라는 바다 생물이다. 전설의 동물 마카라는 악어 입에 코끼리 코, 물고기 지느러미 모양의 귀, 달팽이처럼 말린 긴 꼬리를 지녔다. 언뜻 보면 악어인가 싶게 생겼다. 하지만 독특한 꼬리 덕분에 확연히 악어와는 다른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카라는 우리 식으로 보면 ‘봉황’이나 ‘용’처럼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생물이지만 신화 속에서 존재했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유물로도 남았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마카라는 사나운 모습이어서인지 석가모니를 지키는 존재로, 스투파의 입구를 표시하는 토라나에 조각으로 남아 있다. 



한반도도 과거에 자연 곳곳에 신이 있다고 믿으며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인도도 자연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중에서도 나무에 깃들어 풍요를 전해주는 신이 존재하는데 남성 신은 ‘약샤’, 여성 신은 ‘약시’라고 부른다. 

왼쪽에는 목과 엉덩이에 묵직한 장신구를 한 것이 약시이다. 약시는 다산을 가져오는 존재로 숭배되었다. 엉덩이에 걸친 띠에 연꽃 무늬가 눈에 들어오는데 오른쪽 손은 사라져서 알 수 없지만 연꽃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 락슈미가 풍요의 신이었던 것처럼 약시도 풍요의 신이 되었으나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존재로 승화된 것 같다.

오른쪽에  있는 것은 스투파를 지키는 인도 고유의 신으로 아까 소개한 ‘마카라’를 타고 다니는 물의 신인 ‘바루나’다. 그가 밟고 있는 것이 ‘마카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약샤’가 동전을 쏟아내는 중이다. 전시에는 영상 효과로 바닥에 동전이 주르륵 떨어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도 했다. 머리에서 돈이 나온다니 재치 있고 흥미로운 발상이다. 이는 재물과 생산의 신이자 상인들의 수호신인 ‘쿠베라’를 보좌하는 존재이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인도에서는 오래전부터 강에 사는 뱀인 ‘나가’를 신으로 숭배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머리 하나인 뱀이 아니고 머리가 여러 개인 것이 특징이다. 다수이니 이것도 풍요의 상징일 것이다. 나가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어 불교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아래의 나가는 머리가 7개로 표현되었다. 어떤 것은 3개이기도 하고 5개가 있기도 하고 전시에서도 다양한 나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우리아 왕조는 인도 전역에 불교를 전파한 제국이다. 그러나 제국은 국제적으로 다양한 국가와 교류를 한 것 같다. 아래의 유물들을 보면 서아시아를 넘어 그리스, 로마 헬레니즘 문화의 냄새를 확인할 수 있는 여러 유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을 장식한 원반이나 큐피드로 장식한 손잡이, 마차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페르시아에서 사자 모양 뿔잔이라고 한다. 너무 독특해서 눈이 번쩍 뜨였다. 여기에 술 마시면 술맛 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근데 씻기는 좀 불편할 것 같고.




<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1>에서도 언급되듯 스투파 유적 중 오늘날 그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중인도 지역의 산치 스투파 유적 뿐이다. 8만 4천 기의 스투파가 아쇼카 왕 시절 인도 전역에 세워졌지만 오랜 시절을 거치며 그 형태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아래는 스투파 사리 단지인 사리병이다. 스투파 모양을 한 것이 단 번에 눈에 들어왔고 특히나 수정이 재료로 쓰였다고 하니 정말 귀한 존재를 위한 사리병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사리를 사리함에 담는 전통은 인도 뿐 아니라 불교가 확산된 전역에 퍼져 나갔다. 우리 나라도 사리함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데 특히나 사리를 담는 가장 안쪽 재질은 이렇게 귀한 재료를 사용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것이 스투파를 표현한 양식 중 하나이다. 

‘나가’ 대신에 스투파 원형을 꽃줄로 휘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래 말이 있는데 석가모니의 출가를 도운 말로 짐작되며 왼쪽 아래에는 보리수 나무가, 오른쪽 아래에는 미니 스투파가 조각되어 있다. 석가모니의 출가를 상징하는 유물들을 한 곳에 표현한 스투파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나는 우산 형식의 차트라(산개), 돔 형의 안다가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다르게 확인할 수 있는 구조물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아래 그림은 영국인 프레드릭 메이지가  산치 스투파를 보고 스케치한 것이다. 19세기 영국이 인도에 닿았을 때 고고학적 관심이 폭발하였고 이때 다양한 유적과 유물들이 폭발적으로 복원, 발굴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스케치 덕분에 산치 스투파를 제외하고 형태가 온전하지 않은 스투파가( 장식 등) 어떤 형태일지 짐작해볼 수 있게 되었다. 



석가모니가 당분간 어머니를 볼 수 없게 되자 그녀를 위해 석가모니의 상을 만들게 하였다. 이 세상에 나온 최초의 불상이라고 하는데 바로 아래 불입상이다. 세밀한 옷 주름과 온화한 표정, 풍만한 몸의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아래 불상과 비교하면 인상이나 착의에서 다름이 느껴진다. 



아래와 같은 청동 불입상은 바닷길을 통해 스리랑카나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까지 수입된다. 아래 불상이 한반도에서 볼 수 있는 부처와 더 가까운 모습이다.




전시를 다 보는데 2시간 정도 걸렸다. 볕이 좋아서 나들이하기 딱인 날이었다. 미세먼지가 있어서 아쉬웠지만 박물관 뒤로 보이는 남산타워의 조망도 근사했다.






이 전시는 이번주가 지나면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간만에 콧바람도 쐬고 힐링도 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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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5-15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한 달 전에 전시가 끝났네요...2시간 걸리실만 하네요. 몇장 올려주신 사진만 봐도 놓칠 수 없는 전시라는 촉이 오는데, 이제서야 거리의화가님의 당선작을 봤다니 아쉬워요.

그리고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4-05-17 07:30   좋아요 0 | URL
알라 님 오랫만에 인사 드리는 것 같습니다. 전시를 좀 더 일찍 다녀왔다면 한 번 더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좋았어요.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이지만 한국에서 보는 불교 문화와 여러 모로 다른 점이 많아서 눈여겨볼 점이 많았습니다. 요사이 한국에서 불교가 젊은 대중들에게 힙하게 다가가고 있다니 신선하기도 하고요. 전시는 기간이 지나면 볼 수 없어 그 점이 아쉽죠^^; 알라 님 감사합니다. 일교차 큰 날씨에 건강 잘 챙기세요.
 

1부

중국과 일본의 연구는 일국사적 시각 또는 일국을 중심으로 한 양국간의 비교적 시각에서만 청일전쟁을 이해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같은 시기 활동했던 동학농민군에 관한 연구는 많지만 청일전쟁에 대한이해는 상대적으로 매우 부족하다. 때문에 전체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간 연구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청일전쟁의 전 과정을 조명하고, 보다 보편적 · 객관적 시각과 사료에 근거해 청일전쟁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 P19

일본의 조선 출병에 대한 주장과 목적은 각기 상이했지만, 최초의시도는 참모본부 차장 가와카미 소로쿠와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의 군사외교 합작으로 이루어졌다." 가와카미는 독단으로 비밀리에 서울에 파견한 후쿠시마 야스마사 중좌, 우에하라 유사쿠 소좌와 오토리 공사가 협력해 조선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문했다. 그에 따라 일본 군부는 혼성여단을 편성했고, 무쓰는 1882년 제물포조약을 명분으호 파병했다. - P41

일본군은 도성 내외수색과 중국인에 대한 감시를 한층 강화했고, 서울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전보도 차단했다.
이런 과정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위안스카이는 리훙장에게 병을 - P78

핑계로 여러 차례 귀국을 청원했으나 허락받지 못하했다. 그러자 전권을 탕사오이에게 일임한 후 7월 19일 비밀리에 인천으로 가 귀국길에 올랐다. 그런데 탕사오이는 아산의 청군 병력이 부족함을 감지하고 일본군이 그 기회를 이용할 것을 두려워하여 북양대신에게 10만을추가로 파병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리훙장은 총리아문을 통해
"일본군이 1,000명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함부로 3만을 일컫는가? 또한 일본군은 공사관과 상민 보호를 제외하면 결코 우리와 싸울일이 없을 것인데 너는 10만의 병사를 어디에 쓸 것인가?" 라며 이를일축했다. - P79

일본인이 지금 빈민들을 진휼하고 무너진 집들을 조사하여 은전을대가로줄 것이라고 하는데, 아직 나누어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민심을 수습하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범사업 수준의 인구 조사를 통해 조선의 실태를 파악하려 한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서울 도성 내 인적·물적·심리적 상황을 파악함으로써 치안을 확보하고 저항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여 안정적 지배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오사카아사히신문》 종군기자 니시무라 도키스케에 의하면 주민들은 미곡 - P95

을 받자마자 이를 팔아 술을 마시는 등 순식간에 소비하여 구조 목적은 허공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 P96

대황제께서 번진을 걱정하여 요청을 재가하셨다. 본 군문이 명을 받들어 토벌을 독려하여 밤에도 쉬지 않고 건너왔다. 부대는 모두 수많은 싸움을 치른 군대로 한번 공격하여 그들을 평정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협박을 받은 백성은 시세에 떠밀리고 또한 기꺼운마음으로 적을 따른 것도 아닌데,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니, 양인과악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걱정스럽다. 마음에 실제로 차마 하지 - P125

못하고 고시를 내어 알아듣도록 타이르니, 이 고시를 여러 읍의 사람들은 잘 알아야 한다. 너희들 중에 협박을 받은 양민은 기미를 보아 해산을 했는데, 혹시라도 군영에 와서 스스로 투항하면, 본 군문은 관대하게 용서하고 결코 심하게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무지하고어리석은 백성 가운데 적에게 잘못 쓰이고, 진심으로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만약 병기를 버리고 죄를 뉘우쳐서 투항한다면, 역시안하게 맞이하는 것 외에 은혜를 베풀 것이다. 내가 정벌을 하는데,
너희들과 약속한다. 싸움터에 나가는 때에 무기와 성을 버리는 자는결코 죽이지 않지만, 무기를 가지고 저항하는 사람은 바로 창과 포로 죽이지 않고 서서히 베어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다. 너희가 만약스스로 목숨을 돌아본다면 비도의 우두머리가 되지 마라. 공포한 것을 특별히 알리니 모두 잘 알라.
1894년 5월 11일 고시

이로써 청국군은 조선 정부로부터 인력 동원, 군수물자와 숙소·자금을 영접사를 통해 공급받으면서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 P127

일본 정부는 1894년 6월 5일 청일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천황 직속 최고 통수기관으로 육군과 해군을 휘하에 두는 전시 대본영을 설치했다.
대본영은 한 해 전 1893년 5월 22일 칙령 제52호 <전시대본영조례>에의해 처음 법제화되었다. 대본영은 막료장인 참모총장 대장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 참모차장 중장 가와카미 소로쿠, 육군대신장 오야마 이와오, 육군차관 소장 고다마 겐타로兒, 해군대신 중장 사이고 츠구미치西, 해군차관 소장 이토 토시요시(伊吉, 사법대신 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모여 협의하는 체제였다. - P162

가와카미 소로쿠는 이미 1893년 4월부터 6월까지 참모본부 제2국원소좌 이치지 코스케, 육군감독 사카다 겐산 등과 함께 신분을 숨기고 비밀리에 조선과 청국을 정탐한 경험이 있었다. 부산을 경유해 해로로 인천으로 들어온 이들은 4월 28일부터 5월 6일까지 서울에 머물며 조선 국왕을 알현하고 흥선대원군과도 면담했다. 동학당 활동 탐지와 조선의 병 - P166

영 시찰을 마친 가와카미는 5월 12일 중국 톈진으로 건너갔다.29도중에 일행과 헤어진 이치지는 이후 경성 주재 일본공사관 무관 와타나베 데스타로와 함께 함경도와 평안도를 여행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다. 이들의 여행은 청국과의 전쟁 준비를 위한 일본군의상륙지와 행동 루트에 대한 사전답사 성격이 짙었다. 이후 조선에서 동학농민군과 내부 상황을 탐지한 이치지는 1894년 5월 30일 가와카미관저에서 조사 결과를 보고하게 된다. 다음 날인 31일 가와카미는 참모총장 타루히토 친왕에게 그 내용을 상신하여 조선 출병을 승인받았다. - P167

7월 6일 경성 주재 청국 외교관 리위센리흥장의 대리인인 성수안화이에게 전보하여, "현재 중국인으로 한국에 있는 자는 병력을 쓰지 않는 것이 상책으로 봅니다. 우매한 소견으로는 만약 병력을 사용하면 반드시 내외에 포치布해야 하기에 한 번 틈이 없으면 바야흐로능히 하수로 절대로 가볍게 한 번 시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며 현상 유지책을 견지하는 선에서 머물도록 권유했다. 7월 20일 리홍장도 예지차오에게 "일본이 힘을 다해 전쟁을 고수하려고 미리 준비했지만 우리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 말아야 저들은 헤아리고 움직이지않을 것이다. 이것은 만국의 공례로 오직 먼저 전쟁을 일으키면 이치가 군색하게 된다. 절대 명심하고 잊지 말 것이다. 너는 성급하면 안된다" 라고 당부했다. 이렇듯 청국군이 손을 놓고 있던 결과 일본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평택 인근까지 빠르게 진군할 수 있었다. - P174

청일전쟁 시기 일본군의 징발 방식은 청국 관내와 조선에서 각기 차이점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제1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선을 통해 청국으로, 제2군 사령관 오야마 이와오는 청국으로 직접 출동했다. 그런데 제2군은 랴오둥반도 상륙 직후 군령 <제2군징발심득第二軍心得>(1894년 10월 29일)을 발령하여 점령지인 청국에서 ‘무상징발‘과 ‘유상징의 규정을 마련, 시행했다. 반면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이 필요했던 제1군이 관할하는 조선에서는 일본 국내법인<징발령>에 준거해서 강제로 징발을 실시했지만, <제2군 징발심득>보다 분명히 보상 정도가 낮거나 아니면 보상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 P183

스기무라 후카시의 술회에 따르면 평양 전투의 결과가 아직 도착하기전에 대원군이 중국에 의지하는 한편 동학당을 선동하여, 청군의 남하를기다렸다가 함께 일본군을 협공함으로써 중국의 추궁도 모면하고 자신의 목적도 달성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양전투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되자 그는 목적을잃고 계략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방문·초대·선물 등 겉으로는 일본에게 환호를 보내고 있다고 판단했다.
423이에 앞서 대원군의 종손자 이준용이 - P213

일본의 힘을 빌려 왕후를 폐위하려 했지만 청군이 평양에 들어와 위세당당하다는 소식을 듣고 대원군을 비롯해 모두들 일본군이 반드시 패배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한다. 이에 몰래 청국의 장군에게 환영의 뜻을 보내고 영국영사에게도 접근하는 한편 은밀히 사람을 보내 동학당을 선동하여 청군이 남하하기를 기다렸다가 일본군을 협공하려는 계획을 꾸미고있었다는 것이다. 일본군의 평양 점령 시 대원군이 청국군 장수에게 보낸 밀서가 제1군 사령관의 손에 들어와 다시 외무대신에게 전해졌다. 후임 공사인 이노우에가 이를 대원군을 축출할 빌미로 삼아 그를 힐문하고 결국 권좌에서 쫓아내게 된다. 원래 무쓰는 대원군 축출까지는 생각하지 않은것으로 보인다. 압수한 서류는 대원군이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에게 보낸 서한과 이재면. 김홍집의 서한 등 3통이었다. 이를 읽어 본 무쓰는조선이 청국과 일본 어느 쪽을 따를 것인가 내심 주저하고 있는 흔적을엿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무쓰는 이노우에에게 보낸 전보에서 바야흐로 조선의 사직이 ‘위급존망지추‘에 있는 때이므로 굳이 잘못을 통렬하게 추궁할 가치도 필요도 없다면서도 이의 정치적 활용 여부는 공사의재량에 일임했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밀서를 문제 삼아 결국 대원군퇴진을 관철했다. - P214

청일전쟁 시기 일본이 강제 체결한 군사동맹인 <양국맹약>은 청국과의 전쟁에 조선군의 동원과 협조, 인부와 식량 징발의 공식화를 명문화한 것이다. 주로 경제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진 전시 협정인 <합동조관>은 경부철도와 경인철도 부설권 양도, 경부·경인 간 군용전신선 부설, 목포와 진남포 개항 등이 주요 내용이다. 한편 조선 외부대신에게각 개항장에서 일본 선박의 무관세 통관을 강요했고, <신식화폐 발행장정>을 시행하여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화폐의 조선 내 통용은 일상화되었다. 그러나 서울-의주, 서울-원산 간 군용전신선은 명확한 협정을 체결한 바도 없고 비용 지불도 없이 사용했다. "승리를 틈타 과중한요구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의전의 본의에 맞지 않는다"는 귀족원의원 다니 다테키의 주장은 소수 의견에 불과했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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