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읽은 책들은 다음과 같다. 





이 중 <조선인들의 청일전쟁>과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을 읽을 때 특히나 즐거웠다. 


<조선인들의 청일전쟁>은 리뷰, 페이퍼로도 글을 남겼는데 청일전쟁을 주제로 하여 중국, 일본을 비롯한 자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시각으로 뜯어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장점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아는 청일전쟁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겉핧기 식이었는지 여실히 느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역사적 배경과 시작, 전개, 그리고 결과와 영향에 이르기까지 통합적인 흐름을 엿볼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은 15~18세기 유럽인의 일상 생활에서의 소비 생활을 엿본다. 일상 생활이라는 친숙한 소재인데다 우리가 현재에도 사용하는 다양한 물품들이 어떤 식으로 시작되고 퍼져나갔는지 확인해볼 수 있었다. 음료인 커피나 차, 소금, 설탕, 후추 등의 식재료를 비롯한 먹거리, 집, 가구, 의복, 사치품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당시 흥미로운 소비 생활을 확인할 수 있다.


2달 동안 함달달 모임 원서로 <Three Keys>를 읽었다. 원래도 씩씩했던 미아였지만 난관에 빠진 친구 루페와 그의 가족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나라면 인종 차별이 일상인 그 곳에서 그런 적극성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생각은 할 수 있어도 행동으로 뛰어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 책 덕분에 미국의 이민자들에 대한 입장과 미국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여러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며칠 전 책을 주문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땐 역시 책을 사는 게 답인가. 


<When Stars Are Scattered>는 이 달에 읽기로 한 함달달 원서 책이다. 표지도 넘 좋고 안의 내용도 좋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키메라 - 만주국의 초상>은 장바구니에 계속 담겨 있었던 책이었는데 도서관에 신청해서 빌려보기에는 아까울 것 같아 과감히 질렀다. 만주국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현대중국의 탄생>도 마찬가지! 근 몇 달간 장바구니에 담겨 있었고 도서관에는 가격 때문에 받아주지 않는 책이라 그냥 샀다. 




지난 달부터 일이 폭풍처럼 밀려들어 며칠 전부터 야근이다 밤샘이다를 반복하고 있다. 이 달에는 더욱 중요한 일들이 많다. 어쨌든 걱정한다고 달라질 일은 없고 닥친 일을 수습해나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다.





철쭉이 떨어지기 전 아파트 근처에서 찍었다. 


친구분들 모두 5월도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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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05-06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근에 밤샘에 저 많은 책과 벽돌책을 어찌 읽으신거죠???
대단하십니다!^^
보기만 해도 뿌듯한 북결산이네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은 저도 얼른 읽고 싶은 책입니다.
5월도 응원합니다.
건강 챙기시며 행복한 독서생활 하시길요~~

거리의화가 2024-05-09 18:15   좋아요 1 | URL
초반에 읽은 것들이 많습니다. 주말 근무까지는 아직 하지 않아서 그나마 책을 읽고요. 주중에는 진짜 쉽지 않네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 읽기 시작하신 것 같더군요. 즐독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하수 님도 건강 잘 챙기시고 행복한 5월 보내세요.

자목련 2024-05-07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월에는 야근과 밤샘이 없기를 바라요.
건강 잘 챙기시며 초록초록한 기분으로 채워지길!!

거리의화가 2024-05-09 18:16   좋아요 0 | URL
야근은 괜찮은데 밤샘만 없었으면 좋겠어요^^;
자목련 님 행복하고 건강한 나날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 - 교환의 세계, 제2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2024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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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델은 마르크 블로크가 제안한 ‘장기 지속’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15~18세기에 걸쳐 다양한 공간을 배경에서 일어난 경제 활동을 역사적으로 비교한다. 거기에서 그는 하위에 존재한 일상의 교환 경제와 상위의 고차원의 경제가 구분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대립이 존재한다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두 층에는 각기 다른 사람과 경제 활동가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상위에는 자본주의가 존재하고 하위에는 일상 생활에 존재하는 경제 활동(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물질생활’, 非경제)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둘 간의 비율은 물질생활이 훨씬 더 크게 자리하는 구조이다. 


다만 ‘자본주의’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의문을 표시할 수도 있음을 이야기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이라는 책을 쓴 이후, 그러니까 20세기 이후나 되어야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15’~18세기에 진정한 시장 경제의 영역과 반대의 내용을 가진 이 영역에 대해서도 그것을 가리키는 특별한 말로 거부하기 힘든 말이 자본주의’라고 말한다. 논쟁이 있음에도 일부러 피할 필요가 없다고도 이야기한다. 궁금증을 가지면서 이 권을 읽기 시작했다.


1권이 아래 층인 ‘물질문명’과 일상 생활의 소비에 대해서 다루었다면 2권은 상위 층인 자본주의 활동에 대해서 다룬다. 생산과 소비 사이에 교환 활동이 존재한다. 교환 활동은 시장 경제의 초기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장 경제는 늘 균형을 고집하고 어쩌다 균형에서 벗어나더라도 곧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하나의 총체를 이루지만, 동시에 변화와 혁신의 영역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유통권이라고 지칭했는데, 나는 이 표현이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P23).


18세기가 되면 상점이 유럽의 도시를 비롯하여 시골 구석까지 생겨난다. 어느 곳에서나 상품 분배가 크게 늘어났고, 상점과 정기시(상설 시장)를 통해 교환이 가속화되었으며, 서비스업이 증가했다. 어느 한 곳에 상점 수가 늘다가 거리를 장악하여 포화되면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경제의 전반적인 발전으로 이어졌다. 행상 같은 떠돌이 상인이 아니라 고정된 가게에서 상품을 팔기 시작하면서 마을에 인구가 증가하였다. 게다가 물건만이 아니라 연극 등 볼 거리가 덧붙여져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또한 상점들은 고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신용 거래(외상)를 기꺼이 감수했다. 상인은 그에게 빚진 사람들과 그가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불안정한 균형을 이루며 살아간 것이다. 물론 잘못되면 파산으로 가기도 했다.

17세기에는 주식 투자가 등장했다. 이 때도 일부 사람들은 거래소를 “바람장사”로 부르거나 ‘투기’ 등으로 비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물) 화폐는 교환 기능을 모두 처리하기에는 불충분했다. 이 문제의 해결 방안은 상품-화폐-다른 모든 상품이 반영되며 측정되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상의 것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표시-화폐를 의미한다. 유럽의 대도시는 13세기부터 환어음(lettre de change)이 등장했고 공채나 은행 증권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거래소는 지폐와 금속화폐 간에 전환 등 중요한 기능을 하는 곳으로 자리했다.


이제 생산 영역에 대해서 다루려면 자본과 자본가, 자본주의의 개념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세 개념은 거의 순서대로 만들어졌다. 

자본은 12-13세기경 등장했는데 이 때는 자금, 상품 스톡, 많은 금액의 돈, 혹은 이자를 가져오는 돈이라는 뜻이었다가 점차 회사나 상인의 화폐 자본을 뜻하게 된다. 이 중 자금(빌려준 돈 중 자본은 포기하고 이자만을 받는 상태에 이른 것)이라는 말이 오랫동안 가장 많이 쓰였다고 한다. 18세기가 되면 자본이라는 단어가 점차 다른 단어를 압도하게 된다. 포르보네는 이미 “생산자본”이라는 말을 썼고 케네는 “모든 자본은 생산수단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일상적인 언어에서도 이 말이 비유적인 이미지로 쓰이고 있었다. 예컨대 볼테르가 죽기 몇 달 전인 1778년 2월에 트롱생 박사가 정확히 진단한 것처럼 “볼테르 씨는 파리에 온 이래 그의 재능이라는 자본을 소진시키면서 살고 있었으며” 친구들은 “그가 그 자본의 소득만으로 살기를 바랐다”고 말하는 식이다. 20년 뒤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에서 전쟁 중일 때 한 러시아 영사는 혁명 프랑스의 예외적인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프랑스는 ‘자기 자본을 가지고 전쟁을 수행하지만’ 적국들은 단지 ‘그들의 수입만 가지고’ 전쟁을 한다!” 이 명철한 판단 속에서 자본의 뜻은 한 국가의 재산이나 부를 바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P323). 

자본가라는 말은 17세기 중반에 시작된 것으로 “공채”, 동산, 또는 투자할 돈을 가진 사람 등 다양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다 대체로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용하여 더욱 많은 돈을 벌려는 사람이라는 부정적 늬앙스를 가진 말로 좁혀졌다. 

자본주의는 20세기 초에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어로 정치적 단어로 등장하였다. 탁월한 역사가인 히튼은 이 용어를 단순히 배제시켜버리려고 했다. “모든 -ism이 붙는 말 중에 가장 소란스러운 것은 자본주의(capitalism)이다. 불행하게도 이 말은, 제국주의(imperialism)라는 말이 그렇듯이, 너무 많은 뜻과 정의가 섞여버린 잡탕이 되어서 이제 존경할 만한 학술용어로서는 배제해야 한다.” 뤼시앙 페브르도 이 말이 너무 남용되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그렇다고 이 말을 버리는 것은 아깝다고 이야기한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인 총체와 비교하면 상이하고 낯설기까지 한 독립된 세계이다. “자본주의”의 정의는 나중에 발전해나올 새로운 자본주의적인 형태와 비교할 뿐 아니라, 앞에서 말한 사회적, 경제적인 총체와 비교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진정한” 자본주의는 19세기에 가서야 등장했다고 주장하면서 이와 같은 지난날의 경제의 이중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의 과거 위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 이 경제를 분석하는 데에 핵심적으로 중요한 포인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P329~331). 


자본주의는 일찍부터 유럽의 도시 뿐 아니라 시골을 포함한 주변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귀족들은 도시 근처의 땅을 사서 자산을 확보했다. 오늘날 돈이 있으면 토지에 투자하려는 사람들의 패턴이 떠오르기도 한다. 땅은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 안전한 투자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농민과 영주가 활동하던 유럽에서 자본주의는 새로운 질서였다. 그것에 성공한 영국의 농촌은 다음과 같은 변화를 보였다. 첫째, 토지에 들러붙어 있던 예속성을 털어버리고 국가에 대해서는 농민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거둘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보상해주었다. 그리고 봉건적인 자격으로 소유하던 재산을 근대적인 의미의 사유재산으로 요구했다. 둘째, 계약을 통해서 토지를 자본주의적 차지농에게 임대하면 이 차지농이 자신의 책임하에 경영한다. 셋째, 프롤레타리아의 면모를 띠는 임금노동자들을 고용한다. 넷째, 수직적 분업이 이루어진다. 지주는 땅을 임차해주고 임대료를 받는다. 임차인은 경영자가 된다. 그리고 임금노동자가 이 분업의 마지막 자리를 차지한다(P390). 그렇지만 이런 대도시 등 몇몇 곳을 빼면 수 세기동안 대부분은 주변 지역이었다 할 수 있다. 주변지역은 영주제적이며 동시에 봉건적 성격으로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유럽 전체로 따지면 농업자본주의는 아주 소수를 차지했다. 


산업이라는 단어는 노동, 활동, 숙련 등 이전의 뜻과 혼동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기술, 메뉴팩처, 공장이라는 단어와 오랫동안 경쟁하던 끝에 18세기경에 가서 오늘날 우리가 부여하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19세기에 산업은 점차 대규모 산업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에 저자는 전(前)산업이라는 용어로 앞선 세기의 활동을 지칭한다. 선구산업이란 현재 또는 가까운 과거에 자본과 이익, 노동력을 자신에게 끌어모으는 산업이며, 원칙적으로 그 산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주변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발전을 이끌어줄 수 있는(가능성만을 말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산업을 말한다. 과거의 경제는 사실 통합성이 부족해서, 오늘날 저개발 국가들에서처럼 흔히 분해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이 반드시 그 경계를 넘어 이웃 영역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그 결과, 전산업화 시기의 세계는 현대 산업처럼 분야 간에 차이가 생기고 또 대단히 앞선 분야가 있는, 기복이 심한 면모를 가지고있지 않았고 또 가질 수도 없었다는 점을 우선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전산업은 상대적으로는 중요성을 가진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보면 경제 전체를 자기 자신에게로 이끌어오지 못했다. 실제로 산업혁명기까지는 전산업이 결코 경제성장을 지배하지 못했다. 오히려 불확실한 성장을 보이는 데다가 고장과 급정거를 겪는 경제 전체가 전산업을 지배했다. 전산업이 주춤거리는 발걸음을 옮기고 툭툭 끊어진 곡선을 보이는 것이 그런 이유에서이다. - P430


상업의 근대화로 경제 생활이 발달하면서 시장 규모가 확대되고 교환이 증가하면서 분업이 증가했다. 상인들은 전략적 거점을 마련하고 가능한 빨리 새로운 정보를 모으는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특권을 이용하여 국가나 기업과 공모하며 원거리 무역(저자는 1등 복권이라고 표현한다)을 행했고 이는 독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상사는 자본주의와 직접 연관을 가지며, 자본주의의 진화를 이끌었다. 대규모 회사(동인도 회사 등)는 자본과 국가에 동시에 관련되어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바다가 뚫리며 후추, 향신료, 곡물, 금/은 등을 얻기 위한 무역 경쟁에 뛰어든 유럽은 세계의 계서화에 상층부를 담당하게 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특권층은 언제나 아주 소수였다. 전체 잉여는 증가하더라도 사회 상층의 소수 인구가 증가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그 자신이 유래한 자유경쟁을 완전히 배제해버리지는 않는다.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의 위에서 그리고 옆에서 공존한다. 왜냐하면 15-18세기의 경제-옛날부터 발달해온 몇몇 “중심들”로부터 시장경제와 교환경제의 승리를 통해서 공간을 정복한-역시 레닌이 19세기 말의 “제국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제시한 수직적인 구분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의 혹은 법률상의) 독점과 경쟁이 그것이며, 달리 말하자면 내가 정의하는 바의 자본주의와 발전 중인 시장경제가 그 두개의 층이다(P802). 


베버에게 자본주의는 경제발전이 마침내 찾아서 도달하게 된 약속의 땅이며 진보의 최종적인 만개로 보였다. (내가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면) 그는 자본주의를 결코 취약하거나 일시적인 체제로 보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의 죽음, 혹은 적어도 일련의 연속적인 격변이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현재 우리의 눈앞에서 진행 중이다. 어쨌든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역사 발전의 최종 단어로 보이지는 않는다. - P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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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지속은언젠가는 깨진다. 그것은 단번에 전체가 깨지는 방식이 아니라, 서서히 금이가면서 깨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카스티야의 블랑슈와 성왕 루이 9세의 시대에 파리 주변의 농노(여기에서 농노는 인두세, 결혼세, 상속세의 세 가지 봉건 부담을 지는 사람이다)와 자유농으로 구성된 농민이 영주에 대항하여 자유를 획득한 것과, 농노해방(affranchissement, manumission)이 증가했다는 것-사실 자유민이 농노와 섞여 있으면 언젠가는 그들 자신도 농노가 - P353

될 위험이 있었다 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띤다. 그리고 오를리, 쉬시-앙-브리, 부아시 등지에서처럼 농민이 유리한 경제적 배경을 이용하여 돈으로 그들의 봉건부담을 사버렸다는 것 역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이런 움직임들은 넓게 퍼져갔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농민의 자유는 마치질병처럼 유럽 일부에 퍼져서 우선 경제활동이 활발한 지역부터 먼저 건드리고 그다음에는 이웃 마을과의 교류에 힘입어 덜 활발한 지역까지 건드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 P354

서유럽 세계가 명백한 후진성을 드러내는 곳은-아라곤이라는 예외적인 곳을 빼면 모두 주변(périphérie) 지역이다(그러나 아라곤의 경우도 이베리아라는 복합적인 세계 속에서는 수 세기 동안 주변 지역이었다). 소수에 불과하며 아주 좁은 지역에 한정된 선진지역과 변두리에 몰려있는 후진지역을 나타낸 지도를 상상해보자. 정체해 있거나 아주 느리게 진화하는 지역, 즉 영주제적이며 동시에 봉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시대에뒤처져 있지만 그러면서도 서서히 변화해가는 그런 지역들은 이 지도상에서특별한 색깔로 칠해져야 할 것이다. 유럽 전체를 보면 농업자본주의가 차지하는 부분은 결국 아주 소수이다. - P406

선구산업이란 현재 또는 가까운 과거에 자본과 이익, 노동력을 자신에게 끌어모으는 산업이며, 원칙적으로 그 산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주변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발전을 이끌어줄 수 있는(가능성만을 말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산업을 말한다. 과거의 경제는 사실 통합성이 부족해서, 오늘날 저개발 국가들에서처럼 흔히 분해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이 반드시 그 경계를 넘어 이웃 영역에 영향을미치지는 않는다. 그 결과, 전산업화 시기의 세계는 현대 산업처럼 분야 간에 차이가 생기고 또 대단히 앞선 분야가 있는, 기복이 심한 면모를 가지고있지 않았고 또 가질 수도 없었다는 점을 우선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전산업은 상대적으로는 중요성을 가진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보면 경제 전체를 자기 자신에게로 이끌어오지 못했다. 실제로 산업혁명기까지는 전산업이 결코 경제성장을 지배하지 못했다. 오히려 불확실한 성장을보이는 데다가 고장과 급정거를 겪는 경제 전체가 전산업을 지배했다. 전산업이 주춤거리는 발걸음을 옮기고 툭툭 끊어진 곡선을 보이는 것이 그런 이유에서이다. - P430

몇 가지 예외가 있지만 자본가들다시 말해서 다양한 활동을 무차별적으로 하던 "대상인들은 생산에 전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결코 대지에 두 발을 굳건히 뿌리 박은 지주가 아니었다. 간혹 지대 수취인인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진짜 이익을 얻고 신경을 쓰는 곳은 다른곳이다. 이들은 또 자기 일에 갇혀 있는 수공업 작업장의 주인이나 수송업경영자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업가들 중에 누군가가 배를 한 척소유하든가 혹은 배의 일부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면, 또 선대제를 가까이에서 통제했다면, 그것은 참된 그의 모습과 관련을 가질 때에 한정되어서의일이다. 그의 참된 모습이란 시장, 거래소, 상업망, 긴 교환의 연결망 등에서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분배야말로 이익을 내는 참된 분야인 것이다. - P508

우리가 받는 인상(자료가 분산되어 있고 불충분하기 때문에 단지 인상만을이야기할 수밖에 없다)은 언제나 이윤이 높은 경제 분야가 있게 마련이지만그런 분야들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매번 경제 자체가 변화함에 따라 이윤율이 높은 분야도 변화하면, 그때마다 활동적인 자본이 이것들을 좇아가고 이곳에 머물고 번영을 구가한다. 일반적인 법칙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자본이 그런 영역을 창조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 P593

유럽 어디에서나 편재하는 밀을 보더라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틀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그것은 자체 소비의 대상으로서 물질생활이라는 1층에 머무를 수 있다. 그것은 또 대개 일상적인 곡창지대로부터가까운 도시-이 도시는 주변 농경지대에 대해서 "위치상의 우위를 가진다까지의 교역과 같은 근거리 사이의 규칙적인 교역품이 되기도 한다. 다음으로는 지방 간의 불규칙적인 그리고 때로 투기적인 교역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기근이 심화되고 반복되는 위기의 상황에서 원거리상으로 일어나는 대단히 큰 규모의 활기찬 투기 대상이 되기도 한다. 상업세계 내에서 층이 바뀔 때마다 다른 경제주체들과 다른 경제 행위자들이 개재되는 것이다. - P630

왕정은봉건제의 마그마로부터 나온 것이다. 프랑스 국왕은 영주들 중에 한 명으로서 단지 그들 중에서 뛰어난 인물일 뿐이며, 그들의 언어와 원칙을 함께 나누어 가지면서 동시에 그들을 뛰어넘은 자이다. 이런 식으로 국왕은 그 기원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귀족은 국왕과 동질적이다." 국왕은 귀족과 싸우지만 그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는 없다. 그는 궁정의 화려한 허식 속에 귀족들을 가두어두지만 그들과 함께 그 역시 갇혀 있는 셈이다. 국왕은 귀족을 근원으로부터 단절시키지만 반대로 귀족에게 상업의 문을 활짝 열어주지도 못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을 거두어서 책임을 져야 했다.
도시에 대해서 국왕은 특사와 특권을 많이 부여하면서도 한편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소득의 일부를 앗아간다. 그러나 도시로서는 조금씩 형성 중인전국시장으로부터 이익을 보았다. 또 도시귀족과 부르주아지는 상업의 독점권을 누린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국왕은 그의 권력의일부를 "상품으로서" 판다. 국왕의 관리들은 도시 출신이다. 도시민은 관직을 샀다가 다시 팔아버리거나 자손에게 물려준다. 관직 매매는 부르주아지의 일부를 봉건화했다. 관직은 마치 예전에 토지 조각들을 봉토로 주는것처럼 국가가 양도하는 공적인 권위의 조각들이다. 관직 매매는 피라미드처럼 위로 쌓아가는 왕정사회를 형성했다. 이 피라미드의 상층에는 성격이모호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계층인 법복귀족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귀족은국왕의 변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느리기는 하지만 핵심적인 행정기관이 발달하고 국가의 필요가 생기면서 만들어졌다. - P763

나 자신의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다소의정도 차이는 있으나 독점의 성격이 강한 과거와 현재의 자본주의 모두는그 자신이 유래한 (게다가 그것을 먹이로 삼고 있는) 자유경쟁을 완전히 배제해버리지는 않는다.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의 위에서 그리고 옆에서 공존한다." 왜냐하면 15-18세기의 경제 옛날부터 발달해온 몇몇 "중심들"로부터시장경제와 교환경제의 승리를 통해서 공간을 정복한 역시 레닌이 19세기말의 "제국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제시한 수직적인 구분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의 혹은 법률상의) 독점과 경쟁이 그것이며, 달리 말하자면 내가 정의하는 바의 자본주의와 발전 중인 시장경제가그 두 개의 층이다. - P802

베버에게 자본주의는 경제발전이 마침내 찾아서 도달하게 된 약속의 땅이며 진보의 최종적인 만개로 보였다. (내가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면) 그는 자본주의를 결코 취약하거나 일시적인 체제로 보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의죽음, 혹은 적어도 일련의 연속적인 격변이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현재 우리의 눈앞에서 진행 중이다. 어쨌든 그것은 "이제 더 이상역사발전의 최종 단어로 보이지는 않는다. - P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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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해방이며, 개방이며, 또다른 세계로의 접근이다. 그것은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과 인간이 교환하는 잉여는 조금씩 조금씩 이 좁은 틈을 통과해간다. 그것은 애초에는 성서에서 말하듯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지나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러나 그 구멍은 점차 커지고 또많아지며, 그러다가 이 과정의 마지막에 가면 "시장이 일반화된 사회(sociétéà marché généralisé)"가 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그 과정의 마지막에가서, 즉 뒤늦게 이루어진 일이며, 그것도 지방마다 제각각이어서 결코 같은 때에 같은 방식으로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장의 발전에 관한 단순하고 단선적인 역사는 없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것, 고졸한 것, 근대적인 것, 대단히 근대적인 것 등이 혼재한다.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 P25

화폐는 교환을 확대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언제나 불충분하다. 광산에서 산출되는 귀금속의 양이 모자라고, 해가 갈수록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하며, 퇴장(退)이라는 심연은 언제나 열려 있다. 이 문제의 해결 방안은 결국 상품-화폐(marchandise-monnaie)-다른 모든 상품이 반영되며 측정되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상의 것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표시-화폐 (monnaie-signe)를 의미한다. 11세기 초에 중국에서 최초로 이것을 만들었다. 467) 그러나 지폐를 만드는 것과 그것을 실제 사정에 맞게 유통시키는 것은 다른 일이다. 중국에서는 서양에서처럼 지폐가 자본주의를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사실 유럽은 아주 일찍부터 해결책 - 그것도 여러 해결책들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제노바, 피렌체, 베네치아에서는 13세기부터 환어음(lettre dechange)이라는 위대한 혁신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교환 속으로 아주 조금씩밖에 침투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침투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 P143

교역에 필수적인 지폐가 실제로 도입되는 데에는 거래소와 은행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모든 지폐를 시장에 내놓으며 거래소는 공채증권과 주식이 단번에 유동성 있는 지불수단이 될 가능성을 마련했다. - P144

지폐에서 금속화폐로, 또 그 반대로 쉽게 전환하는 것은 거래소가 제공하는 본질적인 장점이다. 영국의 연금은 단지 "바람장사"의 기회만은 아니다.
그것은 보조화폐이며 충분한 보증을 가진 화폐인 데다가 이자까지 붙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소유자가 유동성[현찰화폐/역자]을 원하면 곧 거래소에가서 그 증서를 판매하면 된다. 수월히 얻을 수 있는 유동성, 유통, 이런 것이야말로 네덜란드와 영국의 사업이 훌륭한 성과를 거둔 비밀이 아니었을까? - P145

16세기의전진은 정기시에서 정기시로 현찰과 크레딧이 이전되는 우월한 유통의 영향 아래 위로부터 조직되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모든 것은 꽤 높은 수준에 있는 국제적 유통―"공중(空中)에서의" 유통에 매여 있었다.525) 그후이것은 속도가 떨어지고 더 복잡해지다가 급기야는 엔진이 쿨럭거리기 시작한다. 1575년 이후 안트베르펜-리옹-매디나 델 캄포를 잇는 순환이 막혔다. 제노바인들은 이른바 브장송 정기시를 통해서 이것을 다시 이어보려고했으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17세기에는 상품을 통해서 모든 것이 다시 작동했다. 나는 이 재출발에 대해서 그것이 전적으로 암스테르담이나 그곳의 거래소 때문에 가능해졌다고하지는 않겠다. 물론 그것들이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보 - P173

다는 차라리 작은 반경, 나아가서 극도로 작은 반경을 가진 소박한 경제 유통로 속에서, 즉 기본적인 밑바닥에서 교환이 증가한 데에 그 원인을 돌리고싶다. 중요한 특징 내지 결정적 모터는 상점이 아니었을까? 이런 조건에서(16세기의) 물가상승은 상층 구조의 지배와 상응한다. 이와 반대로 하락과정체를 겪던 17세기에는 하층 구조의 우위를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가능한 설명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계몽주의 세기(18세기)의 재출발과 약진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1720년 이후의 움직임은 아마 모든 층위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핵심사항은 체제(system)에 균열이 생겼으며 그 균열이 점차커져간다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시장에 대항하여 반(反)시장(contre-manché)이 작용했다(나는 지금까지 사용해온 사거래[private market]라는 말보다는 이 반시장이라는 강한 뜻의 말을 더 좋아한다). 정기시에 대항하여 창고와 보세창고 교역이 증대한다. 정기시는 기본적인 교역의 차원으로 복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마찬가지로 거래소에 대항하여 은행들이 번성했다. 은행들은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해도 점차 수가 늘어나고 독자적인 기구가 되면서 식물의 꽃이 피어나듯 사방에서 뚫고 나왔다. - P174

지금까지 우리가 그려본 모델은 단지 서양에서만 타당하다. 그렇지만 일단 이렇게 만들어본 모델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유용성을 제공하지 않을까?
서양 발전의 핵심을 두 가지 들어보면 첫째, 상부에서 여러 [교환/역주] 도구가 발달한 것이고 둘째, 18세기에 여러 수단과 방법이 증가한 것이다. 이런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어땠을까? 유럽과 가장 거리가먼 경우는 중국으로서 이곳에서는 제국의 행정이 경제의 계서화를 가로막았다. 단지 효율성 있게 돌아가는 것은 하층의 읍 및 도시의 상점과 시장뿐이었다. 유럽과 가장 유사한 경우는 이슬람권과 일본이다. 물론 우리는 세계적인 차원의 비교사를 다시 시도해보아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주거나 아니면 적어도 정확하게 문제를 제기하도록 해줄 것이다. - P175

유럽 중세 및 근대에 벌어졌던 정치투쟁과 종교적 열정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자기 나라에서 쫓겨나고 외국에서 소수 집단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들과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도시들은 싸움질이 일어난 말벌집과도 같았다. 성벽내에는 시민만이 아니라 망명자가 따로 있었는데, 이들은 너무나도 수가 많아서 푸오루쉬티 (fuorusciti : 망명자들)라는 총칭적인 이름으로 하나의 사회카테고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쫓겨난 후에도 자신을 내쫓은 도시의 중심부에 재산과 사업관계를 계속 유지하다가 어느 날 다시 그 도시로 돌아가고는 했다. 이것은 제노바, 피렌체, 루카 등 여러 도시에서 많은 가문이 겪은역사이다. 바로 이 푸오루쉬티가, 특히 그들이 상인인 경우에, 큰 부를 쌓은것이 아닐까? 그들이 큰 사업을 할 경우에는 "원거리 교역"을 수행한다. 그들은 이 일을 맡을 수밖에 없다. 추방된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먼 곳에 나가있다는 이유 때문에 번영을 구가하는 것이다. - P220

금과 은이 언제나 경쟁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유럽은 은을 유출시켰고 이 은은 세계를 일주했다. 그 대신 유럽은 금을 과대평가했는데, 이것은 금을 집에 묶어두고, 상인과 상인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의 중요한 결제에 씀으로써 유럽이라는 "세계경제"의 내부에서 금을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또 중국, 수단, 페루 등지로부터 확실하게 금을 수입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 P274

은의 대량 유출은 유럽 경제의 내부에서도 빈번한 고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대신 이것은 지폐라는 임시방편이 큰 성공을 거두도록 하는 데에 일조했다. 또 먼 곳에서 광산을 개발하도록 부추겼고 상업에서 귀금속을 대체하는방편을 찾도록 만들기도 했다. 레반트에 직물을 보내고, 중국에 면직과 아편을 보내는 것이 그런 예이다. 아시아는 은을 얻는 대가를 직물, 특히 향신료, 약품(drogues), 차와 같은 식물로 갚으려고 한 데에 비해서 유럽은 수지를 맞추기 위해서 광공업에서의 노력을 배가한 것이다. 장기적으로 이것은유럽이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만든 도전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확실한 것은,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유럽이 향신료나 중국풍 물품 같은 사치품을 얻기 위해서 자기 피를 뽑아서 팔았기 때문에 빈혈에 걸렸다는 식의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P275

•시장이라는 말은교환, 유통, 분배 등과 상통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시장이라는 말은 흔히 상당히 규모가 큰 교환 형태, 이른바 시장경제, 다시 말해서 하나의 체제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에서의 어려움은 다음과 같다.
•복합체(complexe)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는 경제생활, 나아가서 사회생활이라는 전체 속에 옮겨놓고 보아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이 복합체 자체가 끊임없이 진보하고 변화하며, 따라서 어느 한 순간에라도 같은 의미, 같은 범위를 가지지 않는다. - P304

아무리 활동적인 경제라고 해도 변두리만이 아니라 그 중심부에-
서도-상당히 넓은 영역이 시장의 움직임과 거의 무관한 채로 남아 있었다.
단지 화폐나 외국의 희귀한 물건이 도착하는 것과 같은 몇몇 모습들만이 이 - P305

작은 세계가 완전히 닫히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따름이다. 그와 유사한타성 내지 정체성은 조지 시대의 영국이나 활발하기 그지없었던 루이 16세시대의 프랑스에서도 볼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경제가 성장하면서 바로 이러한 외진 지역들이 줄어들게 되고 그곳들이 생산과 소비의 일반 흐름에 동참하도록 만든다. 그러다가 산업혁명이 마침내 시장 메커니즘을 일반화시킨 것이다.
자체조절적이고 경제 전체를 지배하며 합리화시키는 시장, 이것이 경제성장의 역사의 핵심이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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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 - 일상생활의 구조, 제2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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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시장경제는 물과 기름처럼 그렇게 확실히 구분되지는 않는다. 어느 사람, 어느 대리인, 우리가 관찰한 어느 활동이 경계의 이쪽 혹은 저쪽에 있다고 단호히 결정하는 일이 늘 가능하지는 않다. 따라서 물질문명(civilisation matérielle)과 공존하기도 하고 이를 교란시키기도 하며, 또 물질문명과 모순됨으로써 오히려 물질문명을 설명해주는 경제문명(civilisation économique, 이렇게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면)을 물질문명과 동시에 소개해야 한다. 그렇지만 분명 그 둘 사이에는 경계가 존재하며, 그것이 매우 큰 중요성을 띤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경제문명과 물질문명의 두 요소로 구성된 이 복식부진화로부터 비롯되었다. 15-18세기의 물질생활은 거의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히 느리게 변화해온 고대 사회와 경제의 연장이다. 그 과정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 오래된 사회와 경제위에 필연적으로 그 무게를 짊어지우는 상부사회(une société supérieure)를조금씩 형성해갔다. 그리고 언제나 상부와 하부는 공존하되 그 각각이 가지는 크기의 비율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 P25~26


페르낭 브로델의 대표 저작 읽기를 이제야 제대로 하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은 어찌 보면 재밌고 또 어찌 보면 재미 없는 묘한 책이다. ‘왜 이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적어 놓았어?’ 하는 생각이 드는 반면 그래서 더 거시사를 통해 발견하지 못하는 재미를 찾을 수 있기도 하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전 세계 문명의 흐름을 엿보고 산업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자본주의의 씨앗이 될 만한 사례를 통해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을 어떤 기호로 읽느냐는 본인의 선택일 것이다. 나는 끌리는 주제에 좀 더 집중해서 읽었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음식(음료), 가구, 집, 의복부터 기술, 화폐, 도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을 다루는데 개인적으로 특히 음식, 가구-집, 의복이 재미 있었다. 


커피가 노동 음료로 각광을 받았다는 것에는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 초년생 시절 하루에도 맥심 커피를  몇 잔씩 때려 넣던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양 강장제로 하루를 버티는 힘이었다. 지금은 맥심 커피를 끊었지만 하루에 10 잔도 넘게 마시는 사람을 보면 놀라기도 했었던. 

노동자들이 해뜰 무렵에 일터에 나가면 등에 양철로 만든 통을 지고 가서 카페 오 레를 “흙으로 구운 공기 하나에 2수씩 받고” 판다. 이것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노동자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이 음식에서 경제성과 자양분과 향취를 발견했다. 그들은 이것이 저녁까지 버티는 힘을 준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식사를 두 번밖에 하지 않았다. - P347


그리고 포크, 젓가락, 수저 등 도구를 사용해서 음식을 먹기 시작한 것이 생각보다 늦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도구를 사용하기 전 식사 테이블에는 냅킨이 제공되었고 물병과 대야를 이용해서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식사 때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문명의 한 기준인 것처럼 되었지만 실상 그들도 그것을 사용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 아이러니다.

개인별 포크는 약 16세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베네치아에서부터 느리게 퍼져나갔다. 독일의 한 목사는 이 악마 같은 도구를 비난했다. “우리가 이 도구를 사용하기를 하느님이 원하셨다면 우리에게 왜 손가락을 주셨겠는가?” 몽테뉴가 음식을 너무 빨리 먹어서 “때로는 너무 급한 나머지 내 손가락을 깨뭅니다”라고 사과하는 것을 보면 그는 포크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 P270


중국인들은 뜨거운 물을 사랑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몸이 안 좋거나 아프거나 상태가 좋지 않으면 무조건 상대에게 건네는 한 마디가 있다. “多喝热水”(뜨거운 물 마셔요)!”  예전에 중국 여행을 하면 맥주조차도 시원한 것을 먹기 어려웠던 때가 있었다고 들었다. 지금은 시원한 것을 구비해 놓지만. 아무리 더워도 뜨거운 커피만 찾는 나와 비슷한 것인가. 

19세기의 한 여행자에 의하면 차 재배가 잘 되지 않는 북부 중국에서는 “하층 사람들이 차를 단지 사치품으로만 알고 있으며 부유한 사람들이 차를 마실 때와 같은 즐거움으로 뜨거운 물을 마신다. 그들은 여기에 차라는 이름을 갖다붙이고 만족한다.” - P341


(장롱과) 옷장도 18세기나 등장했다고 한다. 장롱이 최신식이었는데 옷장이 등장하면서 그 자리를 꿰찼다고 한다. 장롱 이전에는 아마도 벽장을 이용하여 물건을 보관했을 것이다. 예전에 시골집에 내려 가면 안쪽으로 벽에 공간을 내어 물건을 비치해놓던 기억이 났다. 그런 식이 아니었을까. 


인력과 기계 노동을 비교하는 부분에는 AI와 경쟁하게 될 인간의 노동력에 대해 잠시 생각하기도 했다. 사람의 힘만으로 따지면 그 어떤 것에 견주기 어려울 정도로 힘이 미약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장점이 있으니 그것으로 타개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사람은 보잘것 없는 모터라고 하더라도 일을 하는 데에 많은 도구들을 사용하고, 또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초보적인 동력기구들을 사용함으로써 극히 다양한 방식으로 힘을 배가시킬 수 있다. - P445


이런 소주제를 다루면서도 ‘문명’과 ‘문화’, ‘야만’이라는 화제를 꾸준히 글에 삽입해 놓았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중국, 이슬람이 13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발달된 문명과 문화를 갖고 있었는데 왜 유럽이 그들을 상대로 승리했나 하는 것일 것이다. 

예를 들어 석탄이나 화포를 일찍부터 사용한 중국은 산업혁명 무렵이 되면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가. 이는 수력을 이용하여 철을 이동시키고 용광로가 사용되었음이 이유라고 밝히는데 그렇게 발전을 이룬 것은 알겠지만 중국보다 왜 앞서갔는가를 설명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중국인들은 기원전 5세기경에 이미 철의 주조를 알고 있었고, 일찍이 석탄을 사용했으며, 기원후 13세기에 코크스를 이용해서 광석을 용해했던 듯하다. 유럽은 14세기까지는 용해된 상태의 철을 얻지 못했으며, 아마도 17세기에 코크스를 사용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영국에서 일반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대체로 1780년 이후이다. 중국이 때 이르게 앞서간 이유는 설명하기 힘들다. - P495

11세기나 12세기 이후 유럽에서 수차를 사용하자 결정적인 진보가 일어났다. 숲속에 제철소를 대신해서 강변에 제철소가 들어섰다. 여러 번 가열한 철을 두드리는 망치 등을 수력으로 움직였다. 14세기 말에 용광로가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 P499

서구의 장점은 “아시아 대륙의 곶” 정도에 불과한 좁은 곳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세계를 필요로 했으며, 밖으로 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 - P545

이것도 딱히 이유는 되어 보이지 않는다. 갇혀 있는 모두가 밖으로 나간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당시 중국과 이슬람은 오늘날 우리가 식민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진 부유한 사회였다. 그 옆의 서구는 아직 "프롤레타리아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13세기부터 장기적인 긴장이 물질문명을 흥기시켰고 서구세계의 심리를 변형시켰다는 점이다. 역사가들이 황금에대한 갈망, 세계에 대한 갈망, 혹은 향신료에 대한 갈망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 실용적인 적용에 대한 추구가 늘 함께 있었다. 그것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도록 인간의 노력을 경감시키고 동시에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세계를 장악하려는 의도적인 욕구를 드러내는 실제적 발견들의 축적, 그리고 에너지원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한 커다란 흥미는 유럽이 본격적으로 성공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유럽의 참모습이었으며 우월성을 약속했다. - P545~547

 

사치와 궁핍을 구분하는 것은 일차적 구분에 불과하며, 단순하고, 그 자체로는 아직 충분히 정확하지 않다.
이 모든 일이 강제적인 필요의 산물만은 아니다. 인간은 달리 어쩔 수 없으므로 먹고 입고 집을 짓고 살지만, 그래도 그가 하는 것과는 다르게 먹고 입고 집을 짓고 살 수도 있다. 유행의 급변은 이것을 "통시적으로(dia-chronique)" 이야기하고, 현재와 과거의 매 순간 세계의 대립은 이것을 "공시적으로(synchronique)" 이야기한다. 우리는 다만 사물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아니라 "사물과 말"의 영역에 있다. 이때 이 "말"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의미 이상의 것을 가리킨다. - P437~438

또 하나의 화제는 ‘사치’와 ‘궁핍’이다. 부자와 빈자라고 표현해도 좋겠다. 도시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면 대도시 주변에는 소도시가 존재하고 대도시 내부에서도 중심 지역과 외곽 지역이 있기 마련이다. 중심 지역에는 시청 등 관공서와 시장, 백화점 등 시설이 자리하겠지만 외곽 지역은 빈민가와 사창가 등이 자리한다. 그래서 대도시를 볼 때는 소도시를 함께 봐야 하고 그 곳에 자리한 다양한 사람들을 봐야 한다는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이 되었다. 


대도시는 그 하나만으로 측정해서는 안 된다. 대도시는 도시체제 전체 총량 속에 들어 있다. 대도시는 전체 도시체제를 활성화하고 전체 도시체제는 대도시를 규정한다. 18세기 말에 점진적인 도시화가 정착되어갔고 그것은 다음 세기에 더욱 가속화했다. 런던과 파리의 외면을 넘어서, 하나의 예술,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부터 새로운 예술,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이행했다. 4분의 3 이상이 농촌인 앙시앵 레짐의 세계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지고 쇠퇴한 것이다. 한편 대도시들만이 이 새로운 질서의 정착을 확고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대도시들이 이제 나타나게 되는 산업혁명에 구경꾼으로서참여한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은 런던이 아니라 맨체스터, 버밍엄, 리즈, 글래스고, 그리고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소도시들이었다. - P749


이제 1권을 읽었는데 잊어버리기 전에 2, 3권을 바로 이어서 읽을 수 있도록 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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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05-02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커피는 노동 음료. 야근 음료, 밤샘 공부 음료로 마셨지만 공부는 안 했던..
맥심 커피를 끊으셨다니, 대단하시네요. 저는 줄이고 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아요. ㅎ

거리의화가 2024-05-04 21:05   좋아요 0 | URL
ㅋㅋ 맞아요^^ 맥심 커피가 없었다면 미숙했던 직장인 초기를 잘 버틸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맥심 커피 맛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끝맛이 개운하지 않기도 하고 당도 많아서 이제는 마시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