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말 과 19세기 초,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전쟁 중에 낭만주의Romamticism로 알려진 격정적이고 생생한 감정을 표출한 미술운동이 반세기 동안 유럽을 쉽쓸었다. 프랑스의 혁명정신에 고무되어 사람들은 합리주의보다는 자유와 감정을 존중하는 주관적인 개인의 체험을 소중하게 여겼다. 사랑의 격정은 이성이 통제할 수 없는 압도적인 감정으로, 상처를 입으면 죽음까지도 동반할 수 있는 무서운 힘이었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년)에서 약혼한 남자가 있는 로테를 사랑하는 정열적이고 숙명적인 베르테르를 동정적인 시각으로 소설화했다. 이루지 못할 짝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베르테르는 로테 남편의 총을 빌려 그녀의 손길이 스친 총의 촉감을 어루만지며 자살한다. 이 소설은 유럽의 모든 젊은이들을 사랑에 미치게 만들었다. 이런 광적인 사랑과 자살 같은 비합리적인 감정과 폭력이 낭만주의 예술의 핵심적인 주제가 되었다.
고야Goya로 알려진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치엔테스Francisco Jose de Goya y Luciemtes(1746~1828)는, 인간의 합리적인 얼굴 밑에 꿈틀거리는 비합리적이고 광적인 심성을 그림으로 폭로했다. 그는 가벼운 환상의 로코코 세계를 배제하고 인간의 순화되지 않은 격정과 광기, 잔인한 동물성을 그의 작품에서 드러내 보였다.
고야는 화가 수업을 위해 이태리도 방문했지만 고전주의나 르네상스 시대 미술도 별로 그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고야는 당시의 새로은 미술 양식인 다비드의 신고전주의도 싫어했다. 그는 당시 마드리드에 와있던 이태리의 로코코화가 티에폴로Tiepolo의 영향을 받고 낭만파 풍의 자신의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의 나이 50세가 넘은 1799년에 고야는 스페인의 첫 궁정화가가 되었다.
Francisco de Goya [카를로스 4세와 가족] Charles IV and His Family. c. 1800
1800년에 그린 왕가의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은 초상화의 최대 걸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왕실의 인물들의 모습은 추할 정도로 우습다. 흰머리의 왕은 늙고 살찐 얼굴에 피부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붉다. 배와 가슴이 나온 상체에 찬 수없이 많은 휘장과 훈장들은 오히려 그를 천하게 보이게 한다. 머리가 군데군데 빠진 왕비의 헤어스타일은 쥐가 뜯어먹은 것처럼 흉하다. 그녀의 흘기는 것 같은 눈매나 큰 입, 얼굴보다도 커 보이는 지나치게 굵은 긴 목도 아름답지 않다. 그가 팔짱을 끼고 있는 딸 왼편의 여인은 왕자의 왕비 같은데, 옅모습도 희미하다. 왕자와 왕비사이로 앞을 째려보는 노모는 코가 길고 턱은 늘어진 올빼미 같아 추한 늙은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알퐁스 도데Alphomse Daudet는 '왕가의 사람들은 대 로토 상금을 방금 탄 빵장수의 가족 같다' 라고 야유했다. 미술사학자 잰슨W.H. Jason은 이런 추한 그림을 그려주고도 어떻게 고야가 왕으로부터 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마도 그들의 의상이 현란하도록 아름다운 색상과 빛깔을 지녔고.가족들이 찬 훈장과 머리에 쓴 다이아몬드 왕관, 그 외에 갖가지 장식들이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까닭에 왕과 왕비는 반하여 흡족해했던 것 같다.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으로 왼쪽 구석에서 화가 고야와 그의 켄버스를 볼 수 있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
The Third of May, 1808: The Execution of the Defenders of Madrid. 1814
고야는 나폴레옹의 군대가 마드리드를 점령하고 스페인 궁전 앞에서 애국자들을 처형한 1808년 5월 3일의 잔인한 현장을 목격했다고 전한다. 그가 그린 [1808년 5월3일]은 우리나라 광주의 5 · 18같은, 인간이 인간을 살해한 무서운 처형행위를 고발하는 작품이다.
얼굴도 볼 수 없고 이름도 없는 프랑스 군복을 입은 무장군인들이 일렬로 늘어선 채 무장하지 않은 수많은 양민들을 칼을 꽃은 총으로 사살하고 있다. 그들은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에 교회의 종탑이 보이는 언덕 아래에서 등불을 켜놓고 신속하고 능률적으로 양민들을 대량 학살하고 있다. 속수무책으로 그냥 당할수밖에 없는 양민들은 혹은 절망과 두려움으로 주저앉을 듯, 혹은 반항의 몸짓으로 짐승처럼 처참하게 학살당하고 있다.
그림 왼쪽에는 벌써 처형당한 시체들의 피가 대지를 물들이고 있다. 양민들의 한가운데는 흰옷의 지도자 같은 남자가 팔을 높이 쳐든 채 주먹을 쥐고 다른 최후의 순간까지 반항한다. 처형당할 양민들은 등불 앞에서부터 시내의 성문까지 장사진을 치고있다. 고야는 이 그림에서 역동적인 X의 대각선 구도를 택했다. 고야는 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성보다는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죽이는 비인간적인 잔인성을 특별히 강조했다. 인간의 무지에서 오는 악 · 오만 · 우둔함 · 변태적 난폭성을 이 작품은 숨김없이 폭로한다.
1793년에 귀가 먼 후 고야는 점점 비관적인 성격으로 변해간다. 그는 1819년에 그의 집에다 죽음과 파괴, 잔인성을 주제로 한 검은 그림들을 그렸고, 심지어 사탄이 자기 자식들을 잡아먹는 그림도 그렸다. 그는 자기가 지지하는 자유 스페인 공화국이 전복되었을 때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에서 그로, 제리코, 들라크루아 같은 낭만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