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영혼 - 오늘의 작가 2
정찬 지음 / 세계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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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 대해서 지인들에게 장광설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정찬의 <그림자 영혼>은 그 연장선상에서 읽은 작품인데, 솔직히 먼저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읽기를 권한 작품이었다. 이른바 소설은 <악령>에 대한 정찬식 '다시쓰기'인데, <변신>의 최수철식 다시쓰기였던 최수철의 <매미>와 마찬가지로 별반 재미를 보지 못했다. 내 생각에 이 두 소설은 모두 부도덕하다.

밀란 쿤데라의 말을 따르자면, 인간 실존의 어떤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지 못하는 소설은 부도덕하다. <그림자 영혼>을 읽고 내가 새롭게 깨달은 것이나 발견한 것이 없으니 (적어도 나에겐) 충분히 부도덕한 셈이다. 한국 작가들을 폄하해서 하는 얘긴 아니지만, 이야기(서사성)가 강하면 깊이가 없고, 주제가 무거우면 이야기가 실종되는 걸 여러 차례 목도하게 되는데, 정찬의 관념소설인 <그림자 영혼>은 당연히 후자이다. 이 소설엔 소설의 실체는 없고 그림자만 어른거린다.

연극무대로서의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김일우의 장광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김일우가 러시아문학 전공자이고, 또 연극이라는 테마가 연극으로서의 삶, 정신분석(의식/무의식의 드라마)과 연계가 되기 때문에, 충분히 동기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인물이 앵무새처럼 맑스철학은 떠든다고 해서 그가 맑스를 표절했다고 볼 수 없듯이, 러시아 기호학자 로트만의 문화론을 들먹인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다만, 이 소설의 줄거리를 형성하는 부친살해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프로이트의 창안이지 정찬의 그것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점. 작가는 그런 점에서 너무 편한 구도를 선택했고, 인물의 복잡성을 전혀 복잡하지 않게 묘사함으로써 단순화시켰다. 더불어 신을 (인간이나 크게 다를 바 없는) 존재자의 일종으로 취급함으로써, 신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정신분석의 대상으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일우는 나다'라는 명제가 독자에게 가능하지 않도록 그를 일탈적인 인물로 제시함으로써 독서의 재미를 반감시켰다.

재미있는 부분(?)이 아주 없지는 않다. 김일우의 자살 소식을 듣고 '나'는 그의 집을 찾아가서 점심 대접을 받는데, 그런 상황에서 점심 식사 얘기가 나오는 것도 좀 우습긴 하지만, '점심식사는 곧 시작되었다. 풍성한 식탁은 아니었지만 씀바귀, 버섯무침, 간장에 절인 매실 등이 입맛을 돋구었다..'(158쪽) 같은 대목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이 정신과 의사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워지기에. 덕분에 이 소설은 전혀 입맛을 돋구지 못한다.

작가도 그 점을 시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직하긴 하다. 시종 화자는 자신의 무능력을 변명하고, 작가는 후기까지 붙여놓고 있다. 즉 이 소설은 <악령>을 베낀 것이라고. 일종의 축소 번안소설일 테다. 하지만, <악령>의 재미마저 축소 변질된 것은 유감스럽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에게는 물론 나 스스로에게도 의사가 되지 못했다. 나의 자괴감은 여기에 있다.'(171쪽) 화자은 이 작품에서 의사(=작가)가 되길 원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되지 못했다. 자괴감을 가질 만하다!

'보고서의 방향과 결론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독자들도 있을 줄 안다.'(170쪽). 우리의 작가는 아주 정직하다. 당연히 독자로선 못마땅하다. 그는 심리학이 아니라 윤리학을 붙들고 늘어졌어야 했다. 따라서 결국 이런 결말에 이르는 것은 필연이라 할 것이다.

'지금 나는 한잔의 술을 앞에 놓고 연구실의 어두운 창가에 앉아 있다. 보고서를 작성해 나가면서 내가 느꼈던 캄캄한 무력감과 함께,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한잔의 술이 내 곁에 있는 것이다.'(172쪽). 여기서 작가의 비밀을 엿볼 수가 있다. 그에겐 무력감과 함께 한잔의 술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조금 수정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작품들은 집어던지고 싶다. 이런 걸 읽음으로써 더이상 고통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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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에른스트 곰브리치 외 지음, 정진국 옮김 / 민음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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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주 오래전에 <장난감 말에 대한 명상>이란 에세이가 내가 접한 곰브리치의 유일한 글이었다. 얼마전 필요 때문에 곰브리치의 <예술과 환영>을 찾았는데, 뜻밖에도 절판이었다. 국내에서는 <서양미술사>로 번역된 그의 <미술 이야기The Story of art>가 스테디셀러로 팔려나가고 있는 것에 견주어볼 때 의아한 일이지만, 어쨌든 그 책을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대신 손에 든 것이 이 책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책은 미셸 푸코의 전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디디에 에리봉과 곰브리치와의 대화이다. 그러니 보다 정확하게는 '곰브리치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가 들려주고자 하는 것은 미술사가로서 자신의 학문적 자화상이다. 세 장으로 구성돼 있는 책의 1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의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어린시절과 학창시절, 그리고 2차 대전시 영국 런던에서의 피난생활 등이다. 전시에 그는 BBC의 독일방송 통역원으로 일했는데, 히틀러의 사망소식을 다우닝가의 처칠에게 전달한 메신저 역할을 했다고. 안정된 직장이 없던 차에 우연한 계기로 쓰게 된 <미술 이야기>는 뜻밖의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청소년을 위한 미술사로 기획된 대중적인 그 책을 그의 동료들은 거의 읽지 않았다고 한다!).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로 임명된 것. 이후의 삶은 비교적 탄탄대로였다.

2장, 3장에서는 '미술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미술가만이 있을 뿐이다'란 표현으로 시작되는 <미술 이야기>에서부터 대화가 진행되면서 그의 학문적 관심과 방법에 관한 얘기들이 오고간다. 특이하게도 그는 동물행동학자인 로렌츠와 틴버겐의 영향을 언급하는데, 미술사학자로서는 유일하게 동물학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내 접근 방식은 항상 생리학적인 것입니다. 나는 항상 모든 것의 뿌리를 잡고 싶습니다.'(149쪽)(조류의 <각인행동>을 <자취>로 옮긴 것은 옥의 티이다.) 더불어서 그는 독일적 미술사의 전통을 대변했던 파노프스키와 자신과의 차이점에 대해서 친절하게 해명하고 있는데, 예술을 어떤 시대정신으로 환원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그는 끝까지 반대한다. 그가 보기에 예술은 창조적 개인의 소산이다. 포퍼주의자(Popperian)로서 그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지지하는 듯하다.

역사가로서 그는 역사가 <정확한 과학>(엄밀한 과학)이 될 수 없음을 시인한다(그런 의미에서 그의 주저가 그냥 <미술 이야기>란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은 겸양이 아니다): '사실상, 나는 동료들에게 우리가 아직도 미술사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209쪽) 다만 합리적 포퍼주의자로서 그가 기대하는 것은 위대한 예술가들에 대해 감탄하면서 예술작품을 더 잘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아는 만큼 감동받는 것인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에필로그에서의 그의 마지막 말이다. 미술사가로서 수호하려는 가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서유럽의 전통 문명>이라고 간단히 말한다: '미술가는 우리 문명의 대번인입니다.... 위대한 예술에서 위로를 받지 못한다면 삶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겠지요. 이런 과거의 유산과 접촉할 수 없는 사람들을 안타갑게 생각해야겠지요. 모차르트를 들을 수 있고 벨라스케스를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겨야 하겠지요.'(213쪽) 측은한 축이 아닌 감사하는 축에 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곰브리치를 좀 읽어야겠다!(그런데 이 책도 절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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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5
조한욱 지음 / 책세상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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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간략하게 서양사학의 흐름을 정치사에서 사회사로, 그리고 문화사로 이어지는 큰 흐름으로 파악한다. 이들이 완전히 따로 분리되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말하자면 강세가 달라져 온 것이다. 그래서 이 새로운 문화사는 신문화사라 불리기도 하고, 역사학에 있어서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관지어 얘기되기도 한다. 이미 신문화사의 주요 저서들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는 저자이기에, 저자의 안목과 주장은 신뢰감을 준다.

저자가 주장하는 문화사의 의의란 것은 역사를 새롭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경험이 무겁다 할지라도, 그것을 읽는 방편의 무게까지 무거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라는 문제 의식에 걸맞게 서술방식과 사례인용에 있어서 가벼우면서도 진지함을 잃지 않고 있다. 다만 이 주제에 관심있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좀더 부피있는 책이 되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 바람은 기존의 역사책들이, 비록 요즘 많이 가벼워진 경향은 있지만, 재미와 진실을 동시에 전달하기에도 너무 무겁거나 가볍지 않았나 하는 판단에서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역사의 현장을 다룬 신문화사 책들이 더 풍성하게 나왔으면 좋겠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기 때문이다.

'문화를 통해 본 역사가 가야 하는 길은 역사의 현장에서도 밀려나고, 역사책 속에서도 밀려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주변부 사람들의 몫을 정당하게 찾아주는 일이다.'(121쪽)

그것이 바로 공정함으로서의 정의(justice)가 아닐까? 제발 과정하거나 부풀리지 말고, 박정희도 조선일보도 제몫을 찾아가기 바라며, 그 한편에서 잊혀졌던 우리의 '주변부의 사람들'도 제몫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그런 역사의 힘을 아직 우리가 믿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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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락의 전이 - 현대프랑스철학총서 33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만우 옮김 / 인간사랑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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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앞서의 독자서평에서도 오역이 지적됐지만, 지젝의 아주 재미있는 책이 너무나도 재미없게 번역되었다. 최근에 나온 번역서들 가운데 가히 압권이라 할 만하다. 라캉의 미로와 같은 원전보다도 더 난해하다니! 문제는 문맥은 물론이거나 기본적인 문법도 무시한 채 용감무쌍하게 번역을 진행해 나갔다는 데 있는 듯하다.(편집자는 왜 말리지 않았을까?) 오역의 향락이라고나 할까... 인용된 대중문화 텍스트들 거의 대부분을 역자는 경험해 보지 못한 거 같고. 심지어 데이빗 린치의 그 유명한 영화/TV시리즈 <트윈 픽스>조차도 '두 극단'이라고 옮긴다. 그런데 그 정도는 애교에 불과하다. 그보다 더한 극단적 오역들이 수두룩하다. 책의 역자와 편집자에 대한 정신분석이 필요해 보인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책을 왜 낸단 말인가?

저자 지젝이 난해한 작가라면, 정상을 참작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미 출간돼 있는 다른 번역본들이 비교적 용이하게 읽히는 걸 보면 사정은 그렇지도 않다. 항상 정신분석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라캉에게 물어볼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서, 슬로베니아 출신의 이 다재다능한 정신분석학자는 얼마나 재미있게 써내는가! 이 책을 통해 지젝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가급적 없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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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사회평론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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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의 책들이 번역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번역될 것이고, 번역될 필요가 있다. 최소한 그의 책을 읽으면 독자는 좀더 똑똑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이유에서만으로도. 최근에 무하마드 알리에 관한 자전적인 영화가 헐리우드에서는 만들어진 모양인데, 고진이야말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특기를 가지고 있다. 그는 가볍고 경쾌하지만, 정확하고 진지하다.

<윤리 21>은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 다시 읽기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칸트론을 의도한 것이 아니며, 자신의 사유를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칸트와 대면했을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책은 칸트의 도덕론/윤리학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입문서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고진은 도덕이란 말을 공동체적 규범이란 의미로 사용하고, 윤리를 '자유'라는 의무와 관련된 의미로 사용한다. 이것은 그만의 독특한 어법이며, 그에 따르면 칸트가 말하는 도덕은 윤리를 뜻한다. 나는 흔히 절대론적 윤리설, 형식주의적 도덕론 등으로 분류되는 칸트의 도덕론에 대해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좀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고진의 시각을 통해서 칸트의 도덕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그는 칸트의 원전을 직접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 가령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하는 자연세계에서의 인과율과 실천이성비판에서 말하는 도덕적 당위의 주체로서 인간이 가지는 자유(의지)가 어떻게 양립될 수 있을까 하는 물음 등에 대해서 글의 서두에서부터 아주 간명하게 규정/해결하고 있다.

'칸트가 말한 지상명령이란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한 명령 혹은 의무에 의해 비로소 '자유'라는 차원이 나온다. 그것은 원인에 의해 규정당하는 세계로부터는 나오지 않는다. 혹은 인식의 차원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동시에 타자도 '자유로운' 주체로 취급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칸트는 스스로 '자유롭다'는 것, 나아가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자유로운 주체)로서 대하라', 라는 것을 보편적인 도덕 법칙으로 삼았다.'(<머리말>)

다소 길게 인용되었지만, 이것이 고진이 말하는/이해하는 칸트 도덕론의 핵심이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 주체로서의 자기정립은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복종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고진은 그 명령/의무를 사르트르의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졌다'는 표현과 연관짓고 그러한 바탕에서, 마르크스를 코뮤니스트로 다시 읽어낸다(사르트르와 맑시즘의 관계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그때의 코뮤니즘이란 타자를 수단으로 하면서 또한 목적으로 대하는 사회적 관계에 근거한다. 이 코뮤니즘을 통해서 '독일 사회주의의 진정한 창시자'인 칸트와 마르크스는 만난다.

'따라서 코뮤니즘에 대해서는 임노동(노동력 상품)의 폐기가 핵심이다... 임노동의 폐기란 바로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고 한 말의 현실적인 형태다. 마르크스에게 그것은 '지상명령'이었다. 그것은 결코 자연사적 필연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적 경제는 영원할 것이다. 그것은 폐기하는 것은 윤리적인 개입이다. 즉 그것은 '자유'의 차원에서만 오는 것이다.'(189쪽)

내 생각에, 이 대목에 고진의 칸트와 마르크스론이 집약돼 있다. 여기서 일차적 폐기처분되는 것은 역사발전의 합법칙성 따위를 주장하는 사적 유물론이다. 고진이 보기에 칸트와 마르크스는 그런 인과율의 과학을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에게서, 특히 마르크스에게서 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을 읽어내려는 시도는 무망하다. 그의 정치학은 곧 윤리학이며,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의 실천과 책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제 단계로부터 코뮤니즘으로의 발전은 결코 역사적 필연'이 아니다.(191쪽) 자본주의(=인과율)로부터 코뮤니즘(=자유)로의 이행은 오로지 실천적(윤리적)으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그런 자유를 원하기는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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