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한번쯤 떠올리게 되는 자작시가 'Don't cry for me!'이다. 물론 이 제목과 함께 떠올려지는 멜로디는 영화 <에비타>의 주제가로 에바 페론이 부르는 'Don't cry for me Argentina', 즉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다오!'이다. 한때, 봄바람이 날 때면, 나는 이 지구 반대편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떠나가는 꿈을 꾸곤 했다. 나의 '이민'을 결정적으로 가로막은 것은 '또다른 삶'으로서의 이민에 대한 이러한 '몽상'이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울지 말아다오!'란 청유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나는 간혹 그러한 연민으로 자기연민을 쓰윽쓰윽 지운다, 지워버린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관한 영화 <해피 투게더>의 이미지들을 군데군데 찬조출연시켰다. 피아졸라의 탱고음악과 함께 잠시 아르헨티나로 떠나본다.

 

Don't cry for me!

눈이 내리고 눈꺼풀이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봄이다 궂은 일도 아니다 


엊그제 내다버린 어항 속 개구리밥처럼

희망은 뿌리 없이도 푸른빛을 띠었고

사랑은 사당 사거리로 가는 길처럼 꽉 막히다가

이게 아니구나 싶어도 돌아갈 수 없었다

하긴

 

봄이다 다행이다

몇 년만에 본 여자는 아르헨티나에 갔었다는 여자는

사지가 멀쩡하고 아이도 있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남편은 외교관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도 눈은 내리고 바람은 분다

사실은 잘 모른다

나도 언젠가는 이민을 가려고 짐을 꾸리는 중이다

 

봄이다 봄바람 이젠 궂은 일도 아니다

몇 년만에 본 여자는 아르헨티나에 갔었다는 여자는

하필이면 사지도 멀쩡하고 아이까지 있을까

나는 혼자 이 여자를 사랑했나 보다

흔한 일이다

나를 위해 울지 말아다오 

 

눈은 더 내리지 않고 바람도 더 불지 않는다

그래도 봄이다 눈꺼풀이 감긴다   

 

눈은 더 내리지 않고 바람도 더 불지 않는다
그래도 봄이다 눈꺼풀이 감긴다  


엊그제 또 내다버린 어항 속 개구리밥을 걱정하다가 
나는 배가 고프기도 하고 아침 내내 꽉 막히던 길에 부아도 난다  

하지만 

나는 결코 울지 않을 테다

 

봄이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나는 이민 간다


봄이다 봄 그리고 여름 가을 겨울

여전히 눈이 내리고 눈꺼풀이 내리고 바람이 불겠지

이게 아니구나 싶어도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

나는 여차하면 이민을 가려고 짐을 꾸리는 중이다

 

나는 한푼도 예금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때나 울지 않는다 절대로 울지 않는다


봄이다 봄바람 다행이다 이젠 정말 궂은 일도 아니다

제발 나를 위해 울지 말아다오    

 

 

 

06. 03. 26. 

 

P.S. 이 글은 '집'에서 쓰는 본격적인 첫 페이퍼이다. 집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의 이미지 여행이 가능한 것은 물론 인터넷 덕분이다. 인터넷-몽상 때문에 이제 이민 가는 건 정말로(!) 글렀다고 봐야지. 나는 매번 짐만 꾸리다,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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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자파 2011-10-03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에 심장이 흔들려 김어준버전으로 한 줄 적어놓습니다 - 전지적 어준시점, 닥치고 시!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이란 제목으로 재작년 6월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을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고종석에 대한 부분만 따로 떼내어 보강하려다가 '자료' 차원에서 글 전체를 다시 옮겨놓기로 한 것이고, 대신에 이미지들을 보강해 넣기로 한다.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정의한 바대로 문체가 '양파' 껍질 같은 것이라면, 내가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김훈, 김규항, 고종석이라는 세 종류의 양파가 되겠다.  

문체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을 적고자 한다. 먼저, 자신만의 독특한 ‘얼굴’ 혹은 ‘손가락’을 가진 작가로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는 사람이 김훈이다. 그는 소설가이기 전에 에세이스트였고, 에세이스트이기 전에 언론사 기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과 표정을 그렇게 변화시켜가고 있지만, 나에게 소설가로서의 김훈은 좀 낯설다. 문학판의 각광에도 불구하고(그는 두번째 장편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고, 첫번째 단편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런 건 그들만의 ‘비즈니스’이다. 작품이 있으니까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상이 있으니까 작품을 찾는 것이 문학/출판계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소설가의 손가락’이 아니라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주제를 모른다거나 어리석은 것은 결코 아니다. 에세이로서는 ‘밥벌이’를 할 수 없는 나라가 한국이며, 그는 ‘밥벌이’의 신성함을 누구보다도 ‘지겹도록’ 맹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현재 오랜 기자생활을 그만 둔 그에게 소설쓰기는 그의 밥벌이, 즉 그의 비즈니스이다. 도둑질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게 아닌 이상 남의 밥벌이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다. 그건 각자의 문제이다. 그래서 예컨대, 화장실 청소원에게 혹 “그것도 밥벌이냐?”고 묻는 것은 우스운 일을 넘어서 아주 무례한 일이다. 세상의 밥벌이에는 귀천(貴賤)이 없으므로.

 

 

 

 

나는 김훈의 에세이들을 ‘숭배’하지만(나는 그것들이 국어교과서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소설들은 아직 한편도 읽지 않았다. 그의 에세이들은 출간되자 마자 사들였지만(어떤 건 몇 권씩),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 세 장편 소설에 대해서는 무심하게 대했다. <빗살무늬>는 품절된 이후에야 사려고 돌아다녔는데, 결국 내가 샀는지 못 샀는지도 기억나지 않으며, <칼의 노래>는 대폭 할인할 때에야 ‘싼 맛’에 샀고, <현의 노래>는 사두지 못한 채 모스크바에 왔다. 그러니 내가 그의 소설들에 대해서 말할 ‘지분’은 별로 없는 셈이다.

대신에 나는 북매거진 <텍스트>(2004년 4월호)에서 <현의 노래>에 대한 두 편의 서평을 읽었고, 이 소설에 대한 그림을 대충 그려볼 수 있었는데, 그건 읽지 않은 상태에서 그린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이하의 인용은 모두 두 서평으로부터의 재인용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그를 잘 안다고도 말할 수 있다(하긴, 소설을 제외한 그의 글과 인터뷰 대부분을 찾아 읽었으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장편소설’이라고 표지에 박혀 있더라도, 그런 걸 세 권이나 냈더라도 그는 아직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 그가 쓴 건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이 쓴 역사 ‘에세이’이고, 혹은 그에 대한 ‘판타지’이거나 ‘모노드라마’들이다. 그건 박상륭의 ‘잡설’들이 ‘소설’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어떻게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그의 ‘문체’ 때문이다. 흔히 ‘아름답다’ 혹은 ‘현란하다’고 일컬어지는 것 말이다. 요컨대, 그의 문체는 소설이란 장르, 품위 없고 잡스러운 장르가 요구하는 바 일상적 디테일, 저자거리의 언어를 담기에는 너무 고상하며 품위가 넘쳐난다. 그래서 어색하다. 마치 장미희가 떡장사를 연기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가 아무리 “소설이요!”라고 외쳐도 내겐 “똑 사세요!”로 들린다.

<텍스트>의 두 서평은 ‘모노톤의 복화술’(김용필)과 ‘문체의 아름다움이 놓친 몇 가지’(조은영)란 제목으로 돼 있는데, 서평자들이 지적하는 바나 내가 지금 얘기하는 거나 같은 얘기이다. 그의 소설은 ‘모노드라마’이며, 문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소설을 ‘망쳤다’는 얘기니까. 조은영 기자의 서평은 “그렇다면, 김훈의 진정한 3인칭 소설, 최초의 3인칭 소설은 아직 씌어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조심스러운 진단으로 마무리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물론 신중함은 기자로서의 조건이다). 그는 3인칭 소설은커녕, 소설 자체를 쓴 일이 없고, 앞으로도 별로 쓸 일이 없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예컨대, 김훈은 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악기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그 구멍과 줄과 떨림판과 건반 어디에도 소리의 흔적은 없다. 악기는 소리의 집이지만, 소리는 그 집에서 살지 않는다. 소리는 어디에 있느냐. 소리는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죽느냐. 나는 소리의 거처를 알지 못하지만, 소리는 악기와 그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몸 사이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태어나고 죽는다.”(<밥벌이의 지겨움>, 19쪽) 이런 건, 그의 에세이들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사유이고, 문장이지만, 소설로는 옮겨질 수 없는 문장이다(뿐만 아니라 번역되기도 곤란한 문장들이다. 박상륭의 잡설들이 번역 불가능한 것처럼, 김훈의 에세이들도 번역 불가능하다).

그것이 <현의 노래>에서 “소리는 몸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몸이 아니면 소리를 빌려올 수가 없다. 잠시 빌려오는 것이다. 빌려서 쓰고 곧 돌려주는 것이다. 소리를 곧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 자리는 적막이다. 그 짧은 동안만 흔들리고 구르고 굽이치는 것이다. 소리를 거스를 수 없다.”라는 우륵의 말로 가장(假裝)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게 김훈의 목소리임을 이미 알고 있다. 요컨대, 그의 소설의 언어는 에세이의 언어를 “잠시 빌려오는 것이며, 빌려서 쓰고 곧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 에세이의 자리는 그가 <풍경과 상처>나 <자전거여행>에서 적었듯이 물론 ‘적막’이다(이 적막으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짧은 동안만 흔들리고 구르고 굽이치다가”(빨리 한몫잡고서!) 곧 제자리, 에세이스트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에세이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 정신, 그 문체, 그 손가락, 그 적막을!



김훈의 보수주의를 이문열의 보수주의와 비교하는 시각도 있는데(하긴 쿤데라와 이문열도 양립 가능하다고 동렬에 놓는 시각에서라면야), ‘보수주의’에 대한 얘기를 잠시 미뤄두고, 일단 ‘소설가’ 김훈과 이문열을 비교하는 것 자체는 흥미롭다. 일단 둘 다 ‘소설가’가 아니라는 점, 즉 ‘소설가’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김훈은 이제 막 소설로 밥벌이하고 있으며, 이문열은 소설로 밥벌이를 할 만큼 하자 딴짓을 하고 있다(사실, 한때 소설가이긴 했지만, 요즘도 소설가 이문열 운운하는 것은 좀 우습다. 그의 대표작은 <삼국지>이며, 이번에도 동아일보에 <초한지>인가를 연재하는 듯하던데, 그걸로 미루어도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의 본업은 ‘고전 번역가’이다). 근래엔 둘 다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소설들만 썼다는 것도 공통적이고, 그 소설들이 ‘에세이 정신’으로 충만해 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가령, 이문열의 <선택> 이후의 ‘소설들’). 차이라면, 문체에 있어서, 품위에 있어서, 그리고 언변에 있어서 김훈이 한 수 위라는 것 정도(그런 이문열도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리고, 보수주의. 요즘 좀 특이한 한국사회의 풍경은 자칭 보수주의자들, 즉 ‘자각적인’ 보수주의자들이 (특히 젊은 세대에서) 늘어나고 있는 것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B급 좌파’들이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마치 이전에 ‘보수꾼’들이 ‘빨갱이’(혹은 ‘사회주의자’)란 딱지를 적대자들에게 갖다 붙이듯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술어논리에 의하면, ‘B급좌파’나 ‘보수꾼’이나 똑같게 된다). 그런 식으로 보수주의나 진보주의(혹은 사회주의)의 외연이 넓어지는 것은 ‘언어의 경제’상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보수주의’나 ‘진보주의’란 말의 의미가 불분명해지는 탓에 앞에다 수식어를 더 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노무현 정부는 한쪽에서 보기엔 좌파 사회주의 정부이고, 다른 쪽에서 보기엔 우파 보수주의 정부이다. 그런 ‘딱지’들이 가리키는 바는 대개 “당신은 우리편이 아니다!” 내지는 “우리는 당신이 싫다!”는 정서적 상관물이자 자기정체성의 확인이지 지시적 연관성을 갖는 논리가 아니다.

김훈과 이문열의 보수주의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건 대국적 견지에서의 ‘통찰’이긴 하지만, 섬세하지는 않다. 김훈은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이다(이문열도 허무주의자인가?). “아마도 소리와 병장기는 같은 것인 모양이구나”(<현의 노래>)라는 통찰, 즉 악기와 무기는 등가이며, 펜과 칼은 같은 것이라는 그의 주장 혹은 자기암시는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변증법적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그게 그거라는 허무주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허무주의야 말로 모든 것을 ‘풍경’의 자리에 갖다 놓는 그의 에세이스트 정신에 부합한다. 풍경의 자리에 놓일 때,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의 사계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충만하며 허무하고 부질없다. 역사 또한 그는 그 ‘풍경’의 자리에다 놓고 묘사할 따름이다.

<현의 노래>의 한 장면에서 김훈이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이 빨아당기는 속살이 어째서 왕의 무덤 속에 들어가 쇠와 함께 썩어야 하는가. 야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117-8쪽)라고 묘사할 때, ‘야로’는 김훈 자신이며, “이 질퍽거리는 구멍”이야말로 그의 ‘허무주의’의 근거이고, 그의 표현을 빌자면, 풍경의 ‘적막’이다. 그는 언제나 그 풍경 앞에서, 허무 앞에서, 적막 앞에서 기진맥진하였고, 그러면서 마치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이 험난한 사투 끝에 돛새치의 뼈다귀만을 건져 올리듯이 자신의 문체를 길어냈다. 언제나 칼로 깎은 연필을 손가락에 쥐고 원고지에 쿡쿡 눌러써가면서 말이다(왜 칼과 펜이 등가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그의 ‘기진맥진’에, 그의 ‘문체’에 나는 언제나 경의를 표한다.

반복하자면, 내가 보기에 김훈에게서 더 핵심적인 건 그의 보수주의가 아니라 허무주의이다. 그가 ‘보수주의자’라면, 그에겐 ‘보수’나 ‘진보’가 무의미하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가 가부장(家父長)적인 사고의 틀을 고수한다는 의미에서일 뿐이다(언젠가 이 때문에 ‘김훈 파동’이 한번 있었다). 그는 무어라고 말하는가?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 언어를 다루는 일의 힘겨움을 생각한다면 등에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이 고백에 그의 진실이, 핵심이 담겨 있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가 뜻하는 바는 말의 허무주의, 의미의 허무주의이다. 그래서 그에겐 그러한 의미(=기의)보다 말의 뼈(=기표), 말의 잔해, 말의 화석이 더 중요하다. 그가 일상적 시간(=밥벌이의 시간)이 아닌, 역사적 시간, 더 나아가 지질학적 시간에 언제나 매혹되며 거기에 붙들려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예컨대, <현의 노래>의 구상 또한 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우륵의 가야금에서 얻어졌다고 하지 않는가? 그 천년의 ‘적막’이 곧 그의 ‘질퍽거리는 구멍’이다.



작가는 ‘천년의 적막’을 탐사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문체를 낳은 허무주의는 좀더 실제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고백한바 있지만, 그는 5공 때 한 일간지의 젊은 기자로서 군사정권에 대한 ‘용비어천가’에 앞장섰던 경력이 있다. 그가 신념(=이즘)을 갖고 그 일에 나섰던 거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것이 ‘신념’이 아니라 ‘처세’였더라도 마찬가지이다(그랬더라면 이후에 다른 ‘기자들’처럼 금배지라도 달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를 그 일에 내몬 것은 ‘신념’도 ‘처세’도 아닌 ‘체념적 자학’이고 ‘허무’였다. 당당하게, 폼나게 사표를 던질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의 논리는 좀 다르다. 그 대신 다른 누군가가 결국 그 일을 해야 했을 거라는 것. 즉, 한 사람이 폼나는 대가로 또 다른 누군가가 오물을 뒤집어써야 하는 것이다. 그럴 거라면, 자신이 하겠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라는 건 그러한 ‘자발적 부역’에 대한 변명의 논리이다. 그의 ‘부역’은 오직 그가 문장에서 ‘의미’를 버릴 때에만 가능했다. 그것이 그의 의미론적 허무주의의 기원이다.



 

 

 

한편으로, 대장부의 길과 가장(家長)의 길은 좀 다른 길이다. ‘질퍽거리는 구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달리 식구(食口)들의 ‘입구멍’이다. 한 가장이 해야 할 최소한이란 그 구멍을 채워 넣을 밥벌이를 하는 것이다. 유구한 일이지만, 대장부의 ‘명분’은 우리를 한번도 밥 먹여주지 않았다(밥 먹여주기는커녕 죽이지만 않아도 다행이겠다. 오, 계백이여!) 후배 박래부 기자와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문학기행>이 책으로 묶여 나왔을 때, 김훈이 썼던 서문에는 그의 가족사 한 자락이 들어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엄하고 혹독한 분이었는데, 자주 ‘세상을 저버린 자’처럼 세상에 대한 분노와 허무를 무지막지한 술로 달랬다. 그리고 그런 날 새벽이면, 소년 김훈은 해장국 심부름을 가야 했다고. 어느 추운 겨울날 새벽에도 그는 해장국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그만 뚝배기를 바지와 길바닥에 다 엎지르고 말았다. 새벽녘 길바닥에서 그는 목놓아 엉엉 울면서 절대로 아버지와 같은 삶은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아버지와 같지 않은 삶? 그건 대장부의 삶이 아니라 충실한 가장의 삶이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라는 것은 대장부의 논리가 아닌 바로 가장의 논리이며(대장부는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지만, 가장은 한 입으로 두 말 해야 할 때가 있다), 가장으로서의 김훈이 발명해낼 수밖에 없었던, 발명해내지 않으면 안되었던 논리이다(자신의 아들에게 주는 편지에서 그가 가장 강조하는 바도 ‘자기 밥벌이’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당연하다. 그 ‘밥벌이’에 그의 오욕과 영광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허무주의는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장(家長)의 허무주의’이다. 그 허무주의는 결코 겉멋이나 잘난 체가 아니며, 젊은 치기나 늙은 달관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자 김훈이 밥벌이를 하기 위한, ‘유능한’ 가장이 되기 위한 허무주의였다. 어찌 그의 허무주의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나는 6하원칙의 신성함을 믿는다. 다만 6하의 가치와 존엄을 인정하되, 6하로서 충족될 수 없는 진실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뿐이다.”라고 그는 또 말한다. 복습하자면, 그가 말하는 ‘6하원칙’이란 ‘밥’과 동의어이다. 기자 김훈은 어떤 원칙의 신성함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밥의 숭고함과 밥벌이의 신성함을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기자의 밥벌이란 ‘6하원칙’에 맞게 기사를 쓰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또한 ‘6하원칙’이라거나 ‘밥벌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건 앎일 수도 있고, 직관일 수도 있고, 양심일 수도 있다.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가져오자면, ‘죽음 충동’이라 지목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죽음충동은 삶 혹은 생존에의 의지를 ‘전부가 아닌(not-All)’ 것으로 잠식하며, 거기에서 기자 김훈이 아닌 에세이스트 김훈이 태어난다.

 

 

 

 

가장은 자기 식구들의 밥벌이를 하는 것으로 충분히 존엄하지만, 한편으로 세상은 그가 다 먹여 살릴 수 없는 ‘구멍들’ 천지이다. 그 구멍들 앞에서, 어느 봄날 전군가도(全群街道)에 무지막지하게 흩날리는 ‘사쿠라’ 꽃잎들 앞에서, 그는 할딱이며 기진맥진이고 속수무책이다. ‘6하’로 기술될 수 있는 세상의 진실들은 몇십 년 기자생활의 ‘짬밥’으로 어떻게든 카바한다지만, 그걸로 충족되지 않는, 그걸 넘어서는 진실들은 다 어찌한단 말인가? 에세이스트 김훈은 그 ‘충족될 수 없는 진실’들을 (‘가부장적’ 책임의식을 가지고!) 기록하고자 분투하지만, 그의 자백대로 언제나 ‘백전백패’이다. 그의 문체는 그 싸움에서 얻어진 전과이되, 패장(敗將)의 그것이어서 아름답지만 속절없다. 아마도 김훈 자신이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스트 김훈의 허무주의는 기자 김훈의 그것과 같이 ‘가장의 허무주의’이되, 이 대책 없는, ‘무능한’ 가장의 허무주의이다. 어찌 그 허무주의가 안쓰럽지 않겠는가? 하여 그 ‘허무주의들’에 비하면, 보수주의란 딱지는 사소하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사르트르에 의하면, 현실과 지시적 연관을 갖는, 그러니까 현실을 ‘앙가제’하고, 현실에 ‘앙가제’하는 문학은, 곧 소설은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에 복무해야 한다(그는 총구를 제대로 겨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무엇을’을 달리 ‘의미’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순수한 음악의 상태, 무의미의 상태를 지향하는 시와는 달리, 산문(=소설)은 무엇보다는 ‘의미’해야 하며, 의미-지향적이어야 한다(그것이 시와 산문의 차이이다). 비록 그 의미가 단선적이거나 독백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카뮈와의 논쟁에서 사르트르-장송이 지적했던 바는 카뮈의 아름다운 문체가 ‘앙가주망’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달’이 아니라 ‘손가락’만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의 아름다운 문체,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허무주의적 세계관(“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은 소설에 적합하지 않다. 소설가의 문체는 적당히 아름다워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 그것이 ‘산문적 일상’을 묘사/기술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즉 소설가가 자신의 얼굴, 필체, 문체를 갖는 건 바람직하며, 동시에 좋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긴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문체’이어서는 안된다(<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란 프랑스 영화의 문제의식이기도 한데,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아내’로서 적합하지 않다. 결혼생활은 ‘산문적’이기 때문이다).



<현의 노래>의 서평이 들어 있는 <텍스트>(4월호)에는 ‘여성’을 주제로 한 서평들도 여러 편 모아져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한국어로 ‘아름다운 페미니스트’란 부제를 달고 나온 <글로리아 스타이넘>이다. 플레이보이의 바니걸로 위장취업할 정도로 미모가 뛰어난, 미국의 이 대표적인 ‘스타’ 페미니스트 운동가의 평전인데, 스타이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녀의 ‘너무 아름다운 외모’는 페미니즘에 혼란과 지장을 초래한다. “곧 그녀는 페미니스트이기에는 너무 예쁜 여성인 것이다.” 그래서 튄다. 다르게 말하면, 그녀는 ‘문체적/문채적’이다. 가령, 그녀의 50세 생일파티 풍경. “보스턴의 부동산 부호가 파티준비를 돕겠다고 나섰고, 파티 장소는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 그랜드볼륨이었다. 베트 미들러의 축하공연이 있었으며 스타이넘의 어린 시절과 젊었을 적 사진이 실린 생일 책이 전시되었다. 언론 또한 이 파티를 크게 다루었다. 스타이넘은 일에서나 개인적으로나 인생의 정점에 서 있었다.”

페미니스트의 삶이 불행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성공적인’ 페미니스트란 건 뭔가 어색하다. 결국 페미니즘은 그녀의 미모와 상승작용하며 스타이넘이란 한 여성에게 ‘성공한 삶’을 가져다 준 것이지만, 그것이 전체 페미니즘, 혹은 억압받는 여성 전체의 삶과는 과연 얼마만큼의 관계가 있을까? 그녀를 비판하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대로, 차라리 스타이넘이란 ‘스타’ 없는 페미니즘이 더 낫지 않았을까?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못생겨야 할 필요는 없지만, 적당히 못생길 필요는 있다(그래야 얼굴을 보는 게 아니라, 주장을 듣는다). 즉 적당히 예뻐야 한다. 그건 다른 모든 ‘산문적’ (정치적)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시적인’ 외모는 ‘산문적’ 일상에 적합하지 않다.


 

 

 

이건 너무 ‘마초적인’ 생각인가? 가부장적인 김훈은 ‘마초적’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그 자신은 거기에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념적으로 그와는 좀 거리가 먼 ‘B급 좌파’ 김규항조차도 똑같이 ‘마초적’이란 비판을 받곤 한다는 점이다(술어논리에 따르면, ‘보수주의자’ 김훈과 ‘진보주의자’ 김규항은 똑같다). 그건 그가 성모순보다 계급모순이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그리고 그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공격적으로 드러낸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사실 나로선 그의 비판자들보다는 그의 의견에 공감하는 바가 더 많다. ‘중산층 페미니즘’, 즉 “계급과 사회구조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페미니즘은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다른 여성, 빈민, 식민지인)’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벨 훅스, <행복한 페미니즘>)는 의견에 동의하기 때문이다(<텍스트>의 서평에서 인용).

그런 의미에서 이 페미니즘은 민주주의와 똑같은 딜레마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 또한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민주주의의 기원으로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바탕은 노예제였다). 미국, 프랑스, 영국 등 대부분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경영국가, 제국주의 국가였던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라크 침공을 거론하면서 이런 것이 미국의 민주주의냐고 비판하는 것은 따라서 예리하지 못하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반민주주의적, 제국주의적 행태이기 때문이다.

다른 데서 착취해야지만, 자국의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한국의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국내적 ‘평등’은 국외적 ‘차별’에 의해서 지탱된다). 민주주의가 고상하고 고급스런 제도라는 건 그런 뜻에서이다(어느 정도의 경제적 바탕, 가령 1인당 국민소득 1만불 이상이라든가 하는 토대가 마련돼야지만, 민주주의란 제도는 작동한다). 이러한 사정은 ‘고상한’ 페미니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고상한 것들이란 원래 그 모양이다). 나는 다른 민주주의, 다른 페미니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자신할 수 없다.


 

 

 

내가 김규항을 처음 알게 된 건, 그러니까 그의 글을 처음 읽게 된 건 <씨네21>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지면을 통해서였다. 공동으로 연재하던 몇 사람의 필자들 가운데에서 유독 그가 눈에 띄었는데(그는 아마도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지면이 낳은 최고의 ‘스타’일 것이다), 그건 그가 자신의 ‘문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의 이름이 공개되지 않더라도 그의 문장들은 ‘김규항’을 입증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비유컨대, 김훈의 문체가 아름답고 유장한 ‘패장(敗將)의 문체’라면, 김규항의 문체는 ‘자객의 문체’이다. 백전백패를 ‘자랑하는’ ‘패장의 문체’와는 달리, ‘자객의 문체’는 ‘무엇을’에 ‘어떻게’가 복무하는 문체이다. 마치 자토이치의 검술처럼, 그는 짧게 끊어서 군더더기 없이 급소들만을 공격한다. 그래서,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때에라도 그의 문장(=수사학)에는 매료되었다. 이후에 내가 가급적이면 그가 쓴 모든 글을 챙겨 읽고자 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최근에 인터넷에서 그가 쓴 글을 읽고 다소 실망했다. 유시민에게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붙이는 글이었는데, 내용에 실망한 게 아니라(“나는 유시민을 보수주의자로 본다”는 데 어쩔 것인가?), 문체가 예전의 문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온라인 글쓰기의 특수성을 고려한다고 해도(설마 그런 류의 글들이 공식적으로 출판되는 걸까?) 그의 글은 더 이상 김규항의 ‘얼굴’도 ‘필체’도 보여주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손가락’ 대신에 글의 ‘내용’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되었다.

김규항의 문체를 ‘자객의 문체’라고 했는데, 그의 칼끝이 유독 예리하게 겨냥하는 것은 우파(=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자신이 유사-좌파(=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것이 좌파 전체의 ‘이익’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유시민을 전여옥과 ‘똑같은 놈’이라고 배제함으로써, 좌파는, 혹은 민노당은 어떤 이익을 챙기는지) 모르겠지만, 유사-좌파들을 걸러내는 일을 이 ‘B급 좌파’는 자신의 소명으로 간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단순하게 말해서, 민노당을 지지하지 않은 90% 국민들, 혹은 요즘 지지율이 좀 올라갔다고 하니까 한 70%의 ‘불순한’ 국민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들을 어떻게 걸러내고 순화/훈육/계몽해야 하나?). 그것은 한국의 논객 중 가장 ‘좌파적’이라 할 만한 자신의 입지/주장을 ‘B급’이라고 공언하는 그의 ‘결벽’에 이미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좌파의 ‘최소한’이라고 간주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기준에 미달한다면, 모두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뒤집어써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준에 따를 때, 제도권 좌파, 즉 개량주의적 ‘의회주의 좌파’는 진정한 좌파인가? 동급의 의원으로서 한나라당 의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정을 논할 민노당 의원들은 과연 좌파다운 좌파인가? 대학에 몸담고 있는 제도권 좌파, 자칭 ‘좌파’ 교수들은 과연 진짜 좌파이며 진보주의들인가?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면서 ‘아빠’로서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일(“너희는 이렇게 바르게 살아라!”)은 진정 얼마나 좌파적인가? 혹은 한국의 자본주의라는 ‘식인체제’ 하에서 구차하게 계속 살아가는 일은 과연 얼마나 좌파적인가? 등등.

‘자객식’으로 말하자면, 사실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놈들”은 전부 보수주의자이고, “죽지 못해 안달인 놈들”이 진보주의자이다. 유기체의 생존은 ‘항상성(호메오스타시스)’이라는 걸 조건으로 한다. 항상성이란 건 ‘기브 앤 테이크’, 즉 주고받는 타협을 통해서 유지된다. 단칼에 자결하지 않고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일은 언제나 그러한 ‘타협’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인간조건이다. 그럴 경우, 급진적인 진보주의 혹은 절대적 진보주의(‘숭고한 A급 좌파’란 게 있다면)란 그러한 타협과 인간조건으로부터의 ‘단절’을 뜻한다. 즉, 결코 타협하지 않으며, 죽음을 무릅쓸지언정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것(지젝 같은 좌파가 ‘죽음충동’에 그토록 매혹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다. 그에게 유일한 ‘행위(act)’는 상징적 ‘자살’이다). 지젝과 네그리 같은 좌파들은 모두 기계-인간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바, 그것은 현재의 인간조건이 극복되어야지만 진정한 ‘진보’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김규항도 그러한지?).



 

 

 

사실, 새로운 사회를 위한 ‘새로운 인간’이란 테마는 러시아문학에서는 이미 고전적인 테마이다.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1863)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가 정면충돌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를 둘러싸고서이다. 1917년 혁명 이후에 역사는 한동안 체르니세프스키의 편이었다. 사회주의 인간형, 혹은 공산주의 인간형이 인민들에게 요구되었고(그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벌레’로 낙인찍혔다), 인간개조론이 제기되었다. 요컨대, 일차적 본성이든(공병호가 얘기하는), 이차적 본성이든(아도르노가 얘기하는), 현재의 ‘이기적인’ 인간본성을 가지고는 사회주의 유토피아(=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공산주의는 ‘인간들’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천사들’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왜 누구는 대학교수를 하고, 누구는 탄광노동자를 해야 하는가? 그걸 누가 결정하는가? 제비뽑기로 결정하는가? 혹은 로테이션을 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허용해서는 사실상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자발적인 ‘의무감’에 따라 마치 ‘기계’처럼 처리되는 수밖에 없다. 즉 인간-기계, 기계-인간들을 만들어내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좌파적 휴머니즘’이란 말은 ‘듣기 좋은 소리’이거나 넌센스라고 생각한다(그런 얘기를 들먹이는 좌파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C급이다). 휴머니즘을 가지고는 ‘좌파’를 할 수도 없고, ‘좋은 세상’을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진보가 변화/변혁에 대한 요구를 의미할 때 가장 먼저 변화/변혁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며, 인간조건 자체이다(기계-인간이 되기 전이라도 최소한 ‘강철 인간’은 돼줘야 한다. ‘스탈린’이란 이름에 새겨진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인간복제라거나 유전자 조작을 가장 앞장서서 환영해야 할 사람들은 라엘리안들이 아니라 좌파들이다. 그리고, 인간본성 운운하며, 인간복제에 반대하는 하버마스 같은 철학자야말로 유사-좌파, 즉 보수주의자이다. 진정한 좌파가 되기 위해선, 모성을 버리고, 부성도 버리고, 인간성 자체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유토피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리라(모스크바-유토피아의 ‘새로운 러시아인’들처럼). 좌파, 혹은 ‘에덴의 기계들’에게 입력된, 프로그래밍된 행복!

말이 좀 길어졌다. 요점은 보수주의자니, 진보주의자니 하는 딱지 붙이기가 얼마만큼의 준거성, 혹은 의미연관성을 갖는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급진적 환경주의자들에 따르면, 환경문제의 해결은 이 지구의 암종인 인간이란 종이 완전히 사라질 때에야 가능하다. 거기에 무슨 타협의 여지가 있는 게 아니다. 그러한 관점에 서면, 좌파니 우파니 하는 구분은 사소하다. 좌파 박테리아와 우파 박테리아가 아웅다웅하고 있는 것이기에. 빨간색이건 파란색이건 박테리아는 박테리아일 뿐이다. 거꾸로 그런 게 아니라면, ‘작은 차이’를 중요하게 간주해야 한다. 좋은 사회, 혹은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하는 강박관념이나 순수에의 결벽에 들려 있지 않다면 말이다.

김훈과 이문열은 다르며, 유시민과 전여옥도 다르다. 그리고 전두환과 김대중이 다르며, 노무현과 이회창도 다르다. 그리고 부시와 케리도 다르다. 그들은 아주 조금 다를 뿐이지만, 그 다름을 인정하는 게 내 상식이고 정치적 감각(이기 이전에 일상적 감각)이다. 나는 우리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될 거라고 믿지 않지만 적어도 ‘덜 나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덜 나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식과 감각이 필요하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덜 나쁜 사회’의 의의를 가르쳐준 이는 기자(요즘은 편집위원이던가?)이자 에세이스트이며 소설가인 고종석이다(자칭 ‘자유주의자’인 그가 복거일의 제자를 자처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 또한 ‘문체’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 문체는 화려하지도 간결하지도 않으며 그저 담백하다. 그리고 상식적이다. 그는 허무주의자(혹은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B급 좌파도 아니다. 그는 개인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이다. 이념의 스펙트럼 속에 굳이 자신을 분류해 넣어야 한다면, 나는 그와 같은 칸에 분류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즉 나의 정치적 입장은 그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것은 내가 그만큼 그에게서 감화를 받은 바가 많은 탓일 것이다(그에 따를 때, 외모에 의한 서열화는 지성에 의한 서열화보다 더 나쁘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이것도 마초적인가?).

김훈, 김규항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고종석의 (모든 글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글들을 읽었고, 읽고자 했다.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서얼의식’은 갖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특별한 트라우마나 결벽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 논리적이지만, 모나지 않고 둥글다. 따라서, 그런 그의 문체가 소설이란 장르와 잘 어울리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김훈이 소설을 못 쓰고, 김규항이 소설을 안 쓰는 데 반해서, 고종석은 소설을 잘 쓴다(이 세 ‘글쟁이’를 내 식대로 분류하자면, 김훈은 ‘예술가’이고, 자칭 ‘출판인’이어서 ‘출판운동’을 하는 김규항은 ‘운동가’이며, 고종석은 ‘지식인’이다). 더불어, 그에게선 기자와 에세이스트와 소설가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아름답지도 날카롭지도 않지만 담담하면서 유려한 그의 문체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체는 그렇게 그 사람이 된다…

06. 03. 19 -20.

P.S. 언젠가 김규항의 홈피에 들렀다가 인상깊게 읽은 것이 그의 '문장론'이다. 작년 8월에 씌어진 것인데, 이상하게도 9월에 나온 그의 책 <나는 왜 불온한가>(돌베개, 2005)에는 실려 있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의 '문체'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필히 읽어볼 필요가 있는 글이다. (저작권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여기에 옮겨놓는다(부분 발췌하고자 했으나 저자의 뜻이 훼손될 우려도 없지 않아 그냥 그대로 옮겨놓는다). 여기서도 군말과 강조는 나의 것이다.

-이따금 “문장론이 뭐냐”는 식의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현실에 익숙하지(하고 싶지) 않아서 늘 대답을 흐리곤 한다. 사실 나는 어떤 문장론을 갖고 글을 쓰진 않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다. 나는 글의 소재를 얻기 위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글을 쓴다. 어쨌거나, 문장론이 있든 없든, 내가 초고를 써놓고 퇴고를 거듭하는 걸 보면 나에게도 문장에 대한 어떤 태도는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건 두 가지일 것이다. 간결함과 리듬.(*그러니까 그에게 글, 혹은 문장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소통을 위한 수단이다.)

-내가 쓰는 글의 8.5할쯤에 해당하는, 공을 들여 쓰는 글은 초고를 쓰면 적어도 서너 번 이상은 퇴고를 한다. 군더더기라 느껴지는 건 망설임 없이 없애거나 좀 더 간결한 표현으로 바꾼다. 나는 중언부언 하는 것만 군더더기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쓸데없이 화려한 표현도 군더더기라 생각한다. 그리고 부러 반복 효과를 내려는 게 아니라면 같은 글에선 같은 단어를 쓰지 않는다. 10매 이하 칼럼에선 반드시, 30매가 넘어가는 긴 글에선 되도록 그렇게 한다. 동시에 리듬을 만들어간다. 거창하게 말해서 운율을 맞추는 건데, 눈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서 리듬감이 흐트러지거나 호흡이 끊기는 부분은 글자 수를 고치거나 단어를 바꾼다.(*'간결함'이 그가 첫손에 꼽는 글의 요건이다. 앞에서 나는 그의 '자객의 문체'가 '자토이치의 검법'을 연상시킨다고 적었다.)  

-간결함과 리듬이 덜 다듬어진 글을 내놓는 것처럼 불편한 일은 없다. 어쩌다, 내 글의 1.5할쯤에 해당하는 글에서, 이런저런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도리 없이 그러곤 하는데 그런 글들은 그저 실용적인 이유를 위해 일회용으로 존재한 것일 뿐, 내가 썼지만 더 이상 내 글은 아니라 여긴다. 간결함과 리듬 말고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쉽게 쓰는 것이다. 나는 왜 거의 모든 글쟁이들이 글은 쉬우면 쉬울수록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배운 사람들이나 알아먹는 어려운 말을 이유 없이 쓰지 않는 건 물론이려니와 되도록 한자말을 줄이려고 애쓴다.(*하지만, 모두가 간결하고 쉽게 쓴다면 '간결함'과 '쉬움'이라는 미덕 자체가 증발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간결함, 리듬, 그리고 쉬움 같은 문장에 대한 내 모든 태도들은 오로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이오덕 선생이 말씀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믿는다. 모름지기 글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글을 씀으로서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

앞에서, 김규항은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다"라고 적었지만, 이 마지막 문단에 의거할 때 그건 그의 문장론으로서 불충분하며 부정확하다.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고 할 때 '문장'은 '삶'과 등가화되고 있으며, 그럴 때 '문장'은 단지 수단에만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그의 삶이다. 그러니, "문체는 곧 사람이다"(뷔퐁)라는 고전적인 명제에 기대지 않더라도 나는 그가 '문체주의자'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 또한 'B급 좌파'이면서 동시에 '양파'인 것이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양파'는 롤랑 바르트의 그것처럼 그저 텅빈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러시아 정교회 사원 지붕들에서 보듯이 신성함에의 의지와 염원을 담고 있다. 내가 문체주의자들을 존중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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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3-19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많은 부분에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자객식’으로 말하자면, 사실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놈들”은
전부 보수주의자이고, “죽지 못해 안달인 놈들”이 진보주의자이다.

아주 흥미롭습니다.^^

blowup 2006-03-1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한번쯤은 이 세 사람을 묶어서 글을 쓰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로쟈 님이 하셨네요. 저는 소설가 고종석에게서는 허무주의자의 숨결을 느끼곤 합니다. 그의 문체가 담백하다고 하셔서 사실 놀랐습니다. 의미의 뭉개짐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가, 가르고 고르고 조합하고 만들어내는 단어들에서 저는 현란함을 느끼거든요. 그 어지럼증을 즐기는 거지만. 글 퍼갈게요.

twoshot 2006-03-19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에 대한 혐오가 그득했는데 로쟈님의 글을 읽고 조금 누그러 졌습니다. 보수주의자도 좋고 허무주의자도 좋은데 그것이 넘치는 자기연민처럼 보일때는(그러니까 '용비어천가'를 부르던 시절에 대해 말할때) 참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고종석의 경우 인물과 사상에 쓴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 대한 신랄한 비평에서 보듯 더이상 제자로 남고 싶는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krinein 2006-03-20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행중'이라면 아직 완성된 글이 아닌 건가요? 괜찮으시다면 글을 퍼가겠습니다.

로쟈 2006-03-20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아직 진행중이고 가급적이면 완성되 후에 퍼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페일레스 2006-03-20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로드무비님과 나무님 말씀에 공감하며... 제가 왜 김훈(의 글)에 그리 끌렸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yoonta 2006-03-21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로쟈님 페이퍼중에서도 발군인듯..^^
다만 좌파이기 위해서는 기계-인간이 되어야한다라는 부분은 좀 논란이 될만한 야이긴데..A급좌파이기 위해서 인간개조의 이론을 가져야만 하는지 아닌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좌파이기 위해서는 "기계-인간은 아니더라도 강철인간은 되어줘야 한다"라는 말은 현실에 타협하면서 (생계형) B급좌파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기자신을 변명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로쟈 2006-03-21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계를 돌보지 않고 썼던 것인데, 많이들 읽어주시는군요.^^ '기계-인간' 문제는 나중에라도 자세히 얘기할 기회가 있겠죠. 그리고, '생계형 B급 좌파'라고 보신 건 yoonta님 나름의 분류이시겠으나 저와는 다소 무관합니다('우파가 아니면 좌파다'란 잣대를 적용하지 않는 한). 본문에 적었다시피, 저는 김훈과 김규항과 고종석을 모두 지지하니까요(정치적 포지션상 가장 가까운 '자유주의자' 고종석은 '좌파'가 아닙니다). 단, 그들의 문체를. 굳이 분류하자면, '문체파' 혹은 '문장파' 그도 아니면 '양파'로 해주십시오...

로드무비 2006-03-21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퍼갑니다.^^

이리스 2006-03-21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파! ㅎㅎㅎ
저도 이글 퍼갑니다.. ^^;;

마늘빵 2006-03-2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로쟈님의 내공은 깊이를 모르겠군요. 퍼갈게요. ^^ 꾹.

urblue 2006-03-21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

Koni 2006-03-21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양파 중에 고종석 양파에 가장 관심이 있어서 열심히 읽었는데, 고종석 부분이 너무 짧아요.ㅠ_ㅠ

로쟈 2006-03-2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오님/ 그게 원래는 김훈에 대한 걸 쓰다가 두 사람 얘기로 확장돼서 그렇습니다. 한데, 세 '양파' 중 가장 덜 튀는(공감하는 바가 가장 많기도 하고) 고종석에 대해서는 그만큼 할 얘기가 없기도 합니다. 저로선 그의 칼럼들을 열심히 읽는 것으로 당분간은 만족할 거 같습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03-28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보고 퍼갑니다-

wnsgml 2007-12-01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게 읽게 되었네요 글 조금 가져갑니다 ㅡ

turk182s 2008-01-0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로쟈님 늦게읽었네요..아마도 로쟈님한테 알라딘에서 상줘야해요,,님덕분에 구입한 책이 저도몇권인지..이런게 플라톤의 극장의우상 이라고하나? 암튼 직장이 이런거하고 전혀 먼분야인지라 ,,그냥 이렇게 도움받으며 사네요,, 인문학을 공부하는게 겨우 지적만족을 향유하는거라면 저도 결국 상류층적 상징자본을 쫓는 것일테고..요즘은 그냥 어떻게 생각과 실천이 결합해야하나 라는 20대 초반때의 원론적 고민이 뼈저리게 생각이 듭니다. 귀족적인냄새가 조금나지만 그래도 노조쪽에 참가해야하나라는 생각,시골에 내려가 풍류나 읅으며 살겠다는생각등등.. 이러다 생각정리되면 뭐가나오겠죠,근데로쟈님은 서울쪽에 계신지.나중에기회되면 술이라도 한잔 ㅎㅎ 글퍼갑니다.

외계인교신장치 2008-03-01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미학적 행보의 끝에 위치한 관념이 무엇인지 잘 보고 갑니다 가지런하고 반듯하게 잘 골라 분류하셨네요 서재가 참 풍부하고 아름다와 좋습니다
 

 

 

 

  

 

최근에 출간된 알베르트 망구엘의 <독서일기> 때문에 생각된 글이 있다. 재작년 봄에 모스크바통신에 번역해서 올렸던 것인데, 애서가에 관한 움베르토 에코의 기명 칼럼. 이탈리아 잡지 <레스프레소(L’Espresso)>지에 실렸던 것이 당시 러시아 신문 <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우리말로는 ‘문학신문’이고 매주 수요일 발행)에 번역/소개되었었다. 그걸 중역한 것. 

에코의 <레스프레소> 칼럼들은 <미네르바 성냥갑>(열린책들, 2004)이란 제목으로 두 권 분량이 국내에 번역된 바 있다. ㅡ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나 <작은 일기> 등도 역시 이런 류의 칼럼들을 모은 것이다. '애서가'에 관한 그의 칼럼도 언젠가 이탈리아어에서 직역될 듯하지만, 여기서는 중역된 것을 창고정리 차원에서 옮겨놓는다. 이미지들을 좀 집어넣어서.  

  

최근에 나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두 차례 ‘책 수집’이란 테마를 다룰 기회가 있었고, 두 번 다 청중 가운데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책 수집에의 열정’을 애서가 자신들에게 말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보편적인 ‘읽기에의 애호’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르네상스 시기 회화나 중국의 도자기를 수집하는 사람의 집이 갔다고 해보자. 물론 당신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당신에게 다 바랜 17세기의 소책자를 보여주면서 그 주인이 손가락으로 따라가며 읽었을 거라고 단정지을 때, 따분한 손님은 대개 헤어질 시간만을 겨우겨우 기다릴 것이다.


 

 

  

 

책 수집 – 이것은 책에 대한 사랑이지만, 그 책의 내용에 대한 사랑까지 늘 뜻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당신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 알고 싶을 경우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애서가라면 그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책을 갖고 싶어하며, 더 나아가 가급적이면 초판본을 구하고자 할 것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어떤 애서가들은(나는 찬성을 하지는 않지만 이해는 한다) 손에 넣은 책을 심지어 열어보기조차 하지 않는다. 책을 망칠까봐서. 그들에게서 희귀본의 책장을 여는(열기 위해 자르는) 것은 시계 수집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시계 뒤쪽을 열어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애서가는 단테의 <신곡>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곡>의 특정한 판본이나 특정한 책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책을 만져보고, 책의 페이지들을 쓰다듬어보며, 책의 장정을 손에 들고 다니는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마치 자신을 매혹시키는 어떤 대상처럼 책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책은 그에게 자신의 내력과 삶에 대해서, 자신을 소지했던 많은 사람들의 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때로는, 엄지 손가락 자국, 난외의 메모들, 밑줄들, 속표지의 자필서명들, 심지어 책벌레의 흔적들 등등이 이런 이야기들을 해준다. 하지만, 더욱 황홀한 일은 500년 전에 발간된 책이 당신의 손이 새 책처럼 깨끗한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살짝 갈라지는 소리를 낼 때이다.

 

 



 

 

하지만, 50년이 안된 책이라 하더라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 나에겐 50년대 초에 발간된 E. 질송의 <중세철학>이 있는데, 이 책은 내가 학위논문을 방어할 때부터 지금까지 내 곁을 지켜오고 있다. 그 당시에는 종이의 질이 열악해서 지금은 종이가 다 부서져 심지어 책장을 넘기기도 힘들다. 만약에 이 책이 공부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서만 쓰였다면, 나는 저렴한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새 판본을 찾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밑줄과 여러 잉크로 씌어진 메모들이 있는 바로 이 낡은 책이며, 세월과 무관하게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성장해 가던 시절뿐만 아니라 최근의 기억들까지도 상기하게 된다.

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했다. 왜냐하면 보통 ‘책 수집에의 열정’은 돈 많은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수억 리라씩 하는 희귀본들도 있다(몇 년 전에 <신곡>의 초판본이 15억 리라에 경매에 나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책에 대한 사랑은 고서(古書)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거기엔 현대시의 초판본 같이 단순히 좀 오래된 책에 대한 사랑도 포함된다. 예컨대, <살라나>출판사에서 나온 <아동문학전집>을 구하는 애호가들도 있다.



3년 전에 나는 한 헌책방에서 지오반니 파피니(1881-1956)의 <곡>, 제본됐지만 진본 종이 표지를 가진 초판본(*무슨 말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2만 리라에 구입했다. 하지만, 캄파노(?)의 <오르페우스의 노래> 초판본은 10년 전에 우연히 (경매)목록에 들어 있는 걸 보고 천 3백만(리라)에 구한 것이다(물론, 이 가련한 사람이 이런 책을 뜯어볼 기회를 가진 것은 다해봐야 몇 권에 불과했다). 하지만, 20세기 책들에 대한 훌륭한 수집(컬렉션)도, 피자가게에서 저녁을 먹는 걸 제외하고 이따금 모든 걸 희생하면서라면, 가능하다.

헌책방을 순례하면서 나의 학생 하나는 특이하게도 다양한 시대의 여행 안내책자를 수집했다. 처음엔 그런 발상이 나에겐 좀 별스러운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퇴색한 사진들로 채워진 이 책자들에 기초하여 이 학생은 나중에 아주 훌륭한 졸업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에서 그는 여러 도시들에 대한 시각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추적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별로 가진 거 없는 젊은이들도 ‘포르타 포르테제’나 ‘상트 암브로지오’ 시장에서 뜻하지 않게 16세기나 17세기 책들과 맞닥뜨릴 수 있다. 이 책들이 지금은 좋은 운동화 한 켤레 값 정도이고, 진품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시대를 증언해 줄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책 수집은 우표 수집과 아주 유사하다. 물론, 진짜 수집가들에게는 언제나 엄청난 고가의 어떤 것이 있다. 하지만, 내가 회상하는 건, 아직 어린 꼬마였을 때 신문판매점에서에서 10장 혹은 20장으로 포장된 우표를 사서는 그날 저녁을 내내 이 다채로운 색깔의 직사각형(=우표)에서 본 마다가스카르나 피지 군도를 상상하면서 보내던 때이다. 이런 우표들은 물론 결코 드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런 것들에 대한 향수(노스텔지어)를 경험한다.

06. 0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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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99 2006-03-15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제본됐지만 진본 종이 표지를 가진 초판본(*무슨 말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은 초판본인데 (표지도 초판본의 표지를 그대로 사용해서) 제본만 새로한 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언뜻 생각이 떠올라 주제 넘게 끄적여 봅니다.

로쟈 2006-03-15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내에도 그렇게 만드는 책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대략 그런 식이지 않을까라고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south99 2006-03-15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끔 그런 식으로 제본합니다. 아끼는 책이 너덜거리면 다시 해체해서 제본합니다. 페이퍼백의 경우 2-3천원이면 되더라구요. 항상 로쟈님의 서재를 흥미롭게 드나들고 있습니다. 인사 겸 해서 다시 끄적입니다.

로드무비 2006-03-15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흥미롭습니다. 퍼갈게요.^^

twoshot 2006-03-1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수집이 우표수집과 유사하다는 말씀에 슬쩍 찡한 느낌이 오네요. 제가 가지고 있는 박정희우표, 최규하우표, 전두환우표가 밉지만은 않은 것이...

로쟈 2006-03-21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귀님/ 정확하게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페이퍼는 그래도 읽어주시는군요.^^
 

아래의 글은 레비나스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로서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것이다. 시간상/분량상 레비나스에 대한 '비판들'은 언급하지 못했다. 따로 기회가 있을까? 장담하기 어렵다...

 

 

 

 

 

 

 

 

 

 

올해는 지난 1995년 성탄절에 세상을 뜬 프랑스 철학자 엠마누엘(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해 말에 출간된 강영안 교수의 <타인의 얼굴 - 레비나스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5)과 ‘레비나스 탄생 100주년’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 <세계의 문학>(2006년 봄호) 등은 20세기를 관통하는 생애를 살았던 이 ‘최고의 윤리학자’의 삶과 철학을 기념하는 의미를 갖는다.


레비나스는 누구인가? 1906년 1월 12일 리투아니아의 수도 카우나스(코우노)에서 태어나 1995년 12월 25일 새벽에 프랑스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 프랑스 철학자이다. 그의 모국어는 러시아어였으며, 그가 처음으로 읽은 책은 히브리어 성경이었다고 한다. 이 히브리어 성경과 탈무드, 그리고 푸슈킨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러시아문학이 그의 유년기를 채운 정신의 수프였다.


프랑스로 건너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레비나스는 베르그송을 경유하여 현상학에 몰입하게 되고 후설과 하이데거가 있던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대학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한다. 그리고 1930년 프랑스로 귀화한 이후에 현상학을 소개하면서 독창적인 자기 철학, 즉 ‘제1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전개하게 된다. 요컨대, 레비나스는 히브리어와 러시아어,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책을 읽고 그 문화와 함께 숨을 쉬면서 작업한 철학자였으며, 때문에 ‘네 문화의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오래전 그의 생전에 그의 철학을 소개하는 글들을 처음 접하면서 나는 매혹된바 있는데(‘타자=무한자로서의 신’을 핵심으로 한 그의 종교론은 내가 유일하게 동의하고 공감하는 종교론이다. 그에게 신은 ‘존재자’가 아니다!), 이제 그를 기념하는 계절을 맞이하여 비록 ‘거창한’ 기획들에 동참할 만한 역량은 갖고 있지 않지만 그에게 진 빚은 조금이라도 덜고 싶다. 이 자리에서 나대로의 ‘입막음 의식’을 갖는 이유이다. 그 의식은 레비나스라는 ‘타자’가 나에게 강요하는 명령이자 거기에 답하는 나의 응답이기도 하다.


비유컨대, 출석부를 부르는 윤리 선생님 레비나스 앞에서 “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래서 ‘너 어디에 있느냐?’라는 독촉을 사전에 입막음하는. 이 자리에서 그 입막음은 레비나스의 철학적 여정, 혹은 ‘사랑의 지혜’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나의 손가락으로 가름될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지혜라고? 그렇다. 사랑,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지혜에 대한 사랑’(필로소피아)이 있기 이전에 ‘사랑의 지혜’ 혹은 ‘사랑하라’는 무한자의 명령이 있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어쩌면 철학은 아테네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란 ‘사랑의 지혜’를 그 가능조건으로서 미리 전제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가족을 나치의 수용소에서 잃은 유대 철학자 레비나스는 ‘존재의 망각’에 대한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염려 이전에 ‘사랑의 상실’에 대한 근심이 우선적이라고 간주했을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울고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웃고” 하는 그런 사랑으로 세상은 넘쳐나는 듯도 한데, 어찌하여 사랑이 부족하며 사랑이 상실되었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거기에 사랑의 정념은 넘쳐나되 ‘사랑의 지혜’, ‘사랑이라는 지혜’는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편재하는 탐욕과 각자 자신만을 위해서 군림하는 자기중심성과 무사무욕의 가치를 대립시키는 사상”(핑켈크로트)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지혜’란 레비나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즐겨 인용하는바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고백하는 지혜이다. 어쩌면 용기이기도 한.    

 

 

나는 이러한 지혜로 가는 길에 굳이 우회의 여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철학은 사랑에 봉사하는 사랑의 지혜”(la philosophie: sagesse de l'amour au service de l'amour)라고. 이걸로 충분하지만, 이에 대한 주해가 필요하다면 알렝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동문선, 1998)를 읽어보시길. 레비나스 관련서들 가운데 아마도 철학에 문외한인 일반 독자들도 따라가며 읽을 수 있을 거의 유일한 책이며 레비나스의 (윤리학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수준 높은 개관이다. 게다가 감동적이기까지 한.  


그러한 개관을 통해서 레비나스에 대한 영감을 좀 얻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게 ‘뭐, 그런 정도군!’이 아니라 ‘영감의 폭탄’이어서 자신의 존재가 주체할 만한 수준을 좀 넘어서까지 뒤흔들리는 경험을 한다면 보다 본격적으로 레비나스를 입에 담고 중얼거려볼 수 있겠다. 레비나스의 육성을 그대로 따라서 말이다. 우리말로 녹음된 레비나스의 육성은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현대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 1998)의 한 꼭지인 ‘무한성의 윤리’에서 레비나스는 대담자인 리처드 커니의 질문들에 답하여 자기 철학의 핵심을 일목요연하게 해설해준다(한두 군데 흠잡힐 만한 번역이지만 레비나스 관련 번역으로는 가장 우수하다).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사랑은 신과 인간의 사회이다. 하지만 인간이 더 행복한데, 신은 인간을 동료로 갖고 있는 반면 인간은 신을 동료로 갖고 있다”(273쪽)는 대목에 이르러 왠지 행복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못난 놈들끼리는 서로 얼굴만 봐도 즐거운 법이다!).   


그리고 ‘필’을 받은 김에 필립 네모와의 대담을 담은 <윤리와 무한>(다산글방, 2000)까지 내처 읽어볼 수도 있겠다(우리말 번역은 ‘외재성’을 ‘외모’라고 옮기는 식의 부정확한 대목들을 군데군데 포함하고 있다). 대략 레비나스의 연대기를 따라가는 열 개의 대담 꼭지들은 한 철학자의 철학적 생애를, 혹은 지혜의 생애를 자세히 되짚어준다. 그 끄트머리에서 레비나스가 던지는 말(혹은 벼락): “참으로 사람다운 삶은 있음의 차원에 만족하는 조용한 삶이 아니다. 사람답게 사는 삶은 다른 사람에 눈뜨고 거듭 깨어나는 삶이다. 철학전통에서 자신있게 말하는 것과 달리, 있음이 곧 있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158쪽) 즉,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쯤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레비나스가 문제삼는 것은, 스피노자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존재하고자 하는 노력(conatus essendi)', 즉 존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끈질기게 노력하는 자기보존욕이다. 그것이 그 자체로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타자의 현현으로서의 타인의 얼굴 때문이다. 우리에게 무한책임을 떠맡기면서, 우리로 하여금 ’대속적 주체‘로 다시 깨어나도록 발목을 잡는 그 얼굴은 이방인과 과부와 고아의 얼굴이다. 아, 젠장, 나는 나대로 좀 살고 싶은데, 어쩌자고 내 앞에 있는 당신은 헐벗은 이방인이고 젊은 과부이며 배고픈 고아인가? 그런 물음을 무겁게 등에 짊어질 때 우리는 ’사랑의 지혜‘로 가는 도상에 서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직선적인 여정에 자신을 내맡기기엔 머리나 엉덩이가 너무 무거운 이들도 없지 않겠다. 이 분들을 위해서는 보다 우회적인, 현학적인 여정이 필요할 듯한데, 그건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철학자’ 레비나스를 읽어나가는 것이다. 사실 이 또 다른 방향의 여정은 아직 다 개발되지 않은 코스의 여정이어서 언제 ‘사랑의 지혜’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레비나스의 철학적 주저에 해당하는 <전체성과 무한>(1961)과 <존재와 다르게 혹은 존재사건 저편에>(1974)가 아직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건 그의 초기 철학을 입에 물게 해주는 <시간과 타자>(문예출판사, 1996)와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 2003)인데, 1947년에 발표된 이 두 작품은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서 레비나스 자신의 윤리학으로 이행해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러한 저작들을 읽어나가는 데 매뉴얼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이 앞서 언급한 강영안 교수의 <타인의 얼굴>과 함께 콜린 데이비스의 <엠마누엘 레비나스>(다산글방, 2001)이다. 거기에 국내 박사학위논문을 바탕으로 한 김연숙의 <레비나스 타자윤리학>(인간사랑, 2001)도 레비나스 해설서로 참고할 만하다.  

물론 이 책들은 <시간과 타자>, <존재에서 존재자로>에 대한 해설뿐만 아니라 레비나스의 철학 전반과 주저들에 대한 해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나 데이비스의 책은 개인적으로 경탄할 만큼, 분량에 걸맞지 않게 섬세하고 정교한 안내서 역할을 해준다(국역본은 가독성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곳곳에서 오역을 범하고 있기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한편으로 강영안 교수와 함께 국내에서 레비나스 철학에 가장 정통한 서동욱 교수의 <차이와 타자>(문학과지성사, 2000)와 <일상의 모험>(민음사, 2005)에는 레비나스를 직접 다루거나 레비나스적 영감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글들이 여러 편 실려 있으므로 읽어봄 직하다.

 


 

 

 

 

 

 

 

 

시야를 좀 넓히면, 레비나스와 영감을 주고받은 가장 중요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레비나스론(최초의 본격적인 레비나스론이기도 하다) ‘폭력과 형이상학’(1964)을 그의 <글쓰기와 차이>(동문선, 2001)에서 읽어볼 수 있다(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는 데리다의 비판을 고려하여 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데, 이 글 또한 레비나스의 주저인 <전체성과 무한>을 주로 다루고 있기에 막바로 읽기에는 무리가 없지 않다(우리에게 레비나스는 여전히 풍문이다). 해서, ‘레비나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체성과 무한> 등의 주저들이 번역돼 나오는 것이겠다. 우리의 무거운 엉덩이만 믿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아닐까?


자, 여기까지가 나의 응답이고 책임이다. 레비나스라는 타자에 대한 이 책임은 무한책임이기에 이건 고작 ‘입막음’에 불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언제나 중과부적이어서 겨우 틀어막은 틈새로 새어나오는 준엄한 무한자의 목소리를 나는 어찌할 수 없다. “너 어디에 있느냐?” 오, 신이시여, 제발!..

 

06. 03. 03 - 04.

 

P.S. 내가 보기에 레비나스에 대한 비판은 주로 '타자'의 일상성에 걸려 있다(바디우와 지젝, 고진 등의 비판). 레비나스식의 '타인의 얼굴'에 대한 이들의 카운터 펀치는 (지젝이 언급한 것이지만) 영화 <페이스 오프>(1997)이다. 이에 대한 숙고는 다른 자리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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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04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PS에서 언급하신 레비나스에 대한 비판을 참고할 만한 책좀 소개해 주세요..

로쟈 2006-03-0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언젠가 읽은 지젝의 언급은 출처를 못 찾아서(!) 적어놓지 못했습니다. 고진의 언급은 <트랜스크리틱>에 있고(다른 데도 있을 듯하지만), 바디우의 비판은 <윤리학>에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전체성과 무한>에 대한 비판이고, <존재와 다르게> 정도로 가면 데리다의 비판과 마찬가지로 상당 부분 카바가 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듭니다...

twoshot 2006-03-06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감사드립니다.

sgtchoi75 2023-04-2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레비나스와 관련된 지문이 계속 나오는데 속수무책이더군요
그러다가 예전에 사두었던 ‘책을 읽을 자유‘에서 그나마 깨우침을 좀 얻었습니다
(아니면 깨우침을 얻었다고 제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든가요....)
추천해주신 개론서를 읽을 만큼의 깜냥은 저한테 없는 거 같구요
대신 ‘책에 빠져 죽지 않기‘를 구입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또다시 지적 대화를 위한 입막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열린책들)을 읽은 건 개역본이 나오기 80년대 후반이거나 90년대 초반이었던 듯한데, 그때 읽은 건 '호르헤' 수도사가 아직 '요르게' 수도사로 활약하던, 그러니까 개역본이 나오기 전 초판 번역이었다. 이후에 개역본도 무슨 사은품으로 받아서 갖게는 됐지만 아직 들춰보지는 못했다. 대신에 2001년 봄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열린책들)를 읽었고, 작년 봄인가 언젠가는 (<장미의 이름> 개역본에 지대한 기여를 한) 강유원의 <장미의 이름 읽기>(미토, 2004)를 대충 읽었다(책은 <장미의 이름>과 같이 읽어나가야 효과가 있다). 물론 숀 코너리 주연의 영화 <장미의 이름>(1986)도 보았으니까 할 만큼은 한 셈.

 

 

거기에 내가 더 갖고 있는 것은 러시아어본 <장미의 이름>이다(왼쪽 이미지, 오른쪽은 영화의 러시아판 포스터. 러시아어본으로는 두툼한 <푸코의 진자> 주석/해설서도 나와 있었으나 구입하지는 않았다). 중세에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 <장미의 이름>을 보다 정밀하게 다시 읽어보았을 테지만, 내 관심과 여력은 현재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다만,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를 읽으면서 옮겨적은 대목들이 있기에 일단은 여기에 다시 옮겨놓는다(분류상 '밑줄긋기'에 들어가는 게 알맞지만, 이미지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그냥 '페이퍼'에 쓰기로 한다). 박식한 학자이면서 동시에 재주꾼 소설가인 에코의 '창작론' 강의 정도이겠다(인용문에서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작품이 끝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 죽음으로써 그 작품의 해석을 가로막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p.20) 작가는 해석자가 아니다. 그러나 해석자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왜 썼고 어떻게 썼는가 하는 것은 말할 수 있다.(*이것이 '작가' 에코가 '창작노트'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작품에 개입하는 근거이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소설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소설의 세계를 구축해 놓으면 언어는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즉 <주제를 붙잡으라, 그러면 언어가 뒤따라 온다>인 것이다. 내가 알기로 이것은 시의 경우와는 정반대이다. 시의 경우는 <언어를 붙잡으라, 그러면 주제가 뒤따라 온다>이다.(p.43).

 

-세계 창조의 작업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제약 조건을 만들어 심어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주변 세계가 제한 조건이 되어 준다. 이것은 리얼리즘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따라서 전혀 비현실적인 세계, 가령 나귀가 하늘을 날고, 죽었다가도 키스 한 번으로 되살아나는 왕자가 나올 수 있는 세계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가능한 세계, 비현실적인 세계라고 하더라도 소설로 존재하려면 처음에 정의된 구조에 따라야 한다(우리는 먼저, 그 세계가 공주가 왕자의 키스 한 번으로 되살아날 수 있는 세계인지, 아니면 마녀의 키스 한 번으로 되살아날 수 있는 세계인지, 공주의 키스가 개구리, 혹은 아르마딜로 왕자로 변하게 할 수 있는 세계인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창조한 소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한 요소는 역사이다. 내가 중세의 연대기를 읽고 또 읽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중세의 연대기를 읽으면서 나는 모름지기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애초에는 작가의 머리 속에 없던 것, 가령 청빈을 둘러싼 논쟁, 소형제회 수도사들에 대한 심문관의 적의 같은 것들도 소설 안으로 껴안아 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pp.44-45)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등장 인물은 소설이라는 세계에서 자율적인 생명을 지니는 것이고,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종의 망아(忘我) 상태에서 그 등장 인물이 지향하는 방향대로 행동하게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작중 인물은 자신의 현실인 소설 세계의 법률에 따라 행동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화자는 자기가 내세운 갖가지 전제 조건의 포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p.47)(*그러니까 작가는 그 '소설 세계의 법률', 혹은 '소설 세계의 법칙'에 대한 입법자로서의 권능을 갖는다. 그리고 작중 인물은 (입법자로서의 소설가가 아니라) 이 법률/법칙의 구속을 받는다. 이 차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소설이 아마추어 소설이다.)  

 

-소설의 경우 작품이 완성되면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는 대화의 채널이 이루어진다. 집필 단계에는 두 가지의 대화가 존재한다. 하나는 텍스트와 이미 쓰여진 다른 텍스트와의 대화, 또 하나는 저자와 그 모범 독자와의 대화이다.(pp.71-72)

 

- 추리의 추상적인 모델은 바로 미궁이다. 미궁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이 '미궁'의 다른 말이, 플롯(plot), 곧 '음모'이겠다.) 

 

 

(1)하나는 그리스적 미궁, 즉 테세우스의 미궁이다. 이런 미궁에서는 들어간 사람이 길을 잃지 않는다. 이런 미궁에 들어가면 중심에 이르게 되어 있고, 바로 이 중심에서 바로 출구에 이르게 되어 있다. 이 중심에 미노타우로스가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미궁이 나오는 소설에서는 독자가 공포를 느껴야 하는데, 이때 공포는, 우리가 미궁에서 어디에 이를지 모른다는 점, 미노타우로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데서 생긴다. 그러나 고전적인 미궁을 해명해 들어가는 독자는, 미궁이라고 하는 데는 한 실타래, 아드리아네의 실타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고전적인 미궁은, 아드리아네의 실타래가 있는 미궁이다.

 

(2)그런가 하면 매너리스틱한 미궁도 있다. 이것을 해명해 들어가는 독자들은 자기 손 안에 일종의 나무 같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출구는 하나뿐이다. 그러나 이 출구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도 길을 잃지 않으려면 아드리아네의 실타래가 필요하다. 이런 미궁은 시행 착오 과정의 모델 노릇을 한다.

 

 

(3)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물, 혹은 델레우제와 구아타리가 <리조메>(뿌리)라고 부른 것도 있다(*'리좀'이라고 더 잘 알려진 것). 리조메는 구조상, 한 줄기는 어떻게든 다른 줄기와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는 중심도 없고, 주변도 없고, 출구도 없다. 이것은 잠재적 영속성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추리의 공간의 리조메의 공간이다. 내 소설에 나오는 미궁은 일종의 매너리스틱한 미궁이다. 그러나 윌리엄이 경험하게 되는 미궁은 리조메의 구조를 지닌 미궁이다. 말하자면 구축될 수 있는 미궁이기는 하나 완벽하게 구축된 미궁은 아닌 것이다.(pp.80-83)

 

06. 0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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