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봄에 쓴 독서일기의 일부분을 옮겨온다. 칼 뢰비트(1897-1973)의 <지식, 신앙, 회의>에 관한 대목인데, 그의 책으론 <헤겔에서 니체로>(민음사, 2006)가 얼마전에 새단장을 하고 재출간된 바 있다. 기억에 뢰비트는 하이데거의 제자로서 가다머급의 지명도를 갖고 있었던 철학자이다. 저서로는 <역사의 의미>(문예출판사) 등이 더 번역돼 있다.

 

 

 

 

도서관에서 서머셋 모옴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김성한 옮김(신양사. 1958)와 칼 뢰비트의 <지식, 신앙, 회의>, 임춘갑 옮김(창림사, 1961)을 대출했다. 앞엣것은 The Art of Fiction(1955)의 일부를 옮긴 것이고, 나중것은 Wisen, Glaube und Skepsis(1956)를 옮긴 것이다.

뢰비트 책은 양질의 종이로 되어 있어서 거의 새책이나 다름이 없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교양서적이었을 것이다(*가끔 도서관에서 1960년대에 나온 책들을 찾아보고 감탄할 때가 있다). 물론 키에르케고르와 도스토예프스키 때문에 대출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그리스도교의 훈련>은 70년대말에 평화출판사에서 나온 걸로 돼 있다.

(*)임춘갑 선생 번역의 <그리스도교의 훈련>은 2005년말에 다산글방에서 재출간됐다.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1>(새물결)에서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언급을 참조할 수 있다. 아마 그 책에 대한 관심은 고진에게서 비롯됐을 것이다. <탐구1>에서는 일역본을 따라 <그리스도교의 수련>이라고 옮기고 있다. 아마 이 글은 고진의 책들을 읽던 시절의 일기인 듯하다. 아래 사진은 칼 뢰비트.  

주말에 뢰비트의 <지식, 신앙, 회의>를 다 읽고, 야스퍼스의 전기를 읽고 있다. 뢰비트의 책은 얇은 분량이지만, 힘과 재미가 느껴지는 책이다. 문제의식이 살아있고, 초점도 명확하다. 역자는 저자의 주장을 “철학은 다시금 철학의 본영토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도 그리스도교의 창조설의 사상에 물들지 않은 그리스철학의 모습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요약한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를 비판하면서 니체야말로 유일한 현대철학자라고 추켜세우고 있는 점도 이채롭다. 또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아르키메데스의 점과,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적 아르키메데스의 점에 대한 비교의 꼬투리(이건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다.)

3장에서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비판: “키에르케고르의 역설적 그리스도교는 오로지 세계를 잃고 실존하는 외톨이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잃은 신, 이 두 개밖에는 모른다. 인간과 세계가 창조주를 통하여 서로 연결되고 서로 병렬케 하는 그런 창조에의 신앙이 키에르케고르에게는 결핍되어 있다. 창조에 관한 이 실존신학적인 결함은 이미 데카르트파의 파스칼에게서 시작되었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온갖 종류의 실존철학에 있어서는 언제나 존재하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이 자연적으로 살고, 또 죽는 것, 그러한 것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자연적인 개념이 결핍되어 있다.”(123쪽, 강조는 나의 것)

각주에는 “니체의 동일물의 영겁회귀의 철학“이란 글을 참조하도록 되어 있다. 아무튼 이 세계라는 개념의 결핍은 비단 키에르케고르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리다. 생물학과 형이상학, 두 가지만은 사고의 축으로 삼아온 나에게도 근래에 경험하는 현실은 또 다른 실세에게 관심을 갖도록 부추긴다. 그것은 돈, 혹은 경제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돈의 철학으로서의 경제학, 거기에 숨겨져 있는 법칙과 비약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그런데 이런 건 누구에게 배워야 하나?). 이건 물론 포지티브한 관심은 아니다. 문제를 배제하고 소거시키기 위한 관심이다. 내가 거기에 얽매여 있기 때문.

마지막 4장 “창조와 실존”은 실존철학에 잔재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비판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토미즘이라는 것이다. “파스칼에서 시작하여 사르트르에 이르러 극단화되어, 비그리스도교화 되고만 현대의 실존 개념은 창조설을 제거한 그리스도교적, 토마스학파적인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158쪽)

(*)'유령-독자들'을 의식하지 않을 때 나는 그냥 인상적인 구절들과 그에 대한 짤막한 코멘트만을 기록했었다. 이런 빛바랜 글을 밖으로 꺼내놓으니까 좀 머쓱하군. 창고에나 집어넣어야겠다...

06. 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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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3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twoshot 2006-05-13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쓱해서 창고에 집어넣으시면 안됩니다. 삼삼오오, 귀를 쫑긋세우고 모여드는게 어디 유령 뿐이겠습니까...

2006-05-13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5-13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여기에 댓글을 달도록 하겠습니다. '문자로 창작되지 않은 것은 문학이 아니다'란 주장에서 방점은 '문자'가 아니라 '창작'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구술된 것을 받아적은 것'은 같은 '기록성'을 갖지만 문학이 아니다라고 하신 걸 보면요. 거기에는 아마도 "'문학'은 '문학을 한다'는 자의식을 가진 개인에 의해서 창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암묵적으로 전제돼 있는 듯합니다('넓은 의미의 문학'도 아니라는 뜻은 모순적인 거 같습니다. 구비문학, 구술문학이란 용어를 우리가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더불어, 저는 개인적으로 네 가지 다른 문학적 태도(문학관)을 분류하는데, 그것들이 반드시 일치될 필요는 없습니다(이념적 태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음유시인적 전통에서 진정한 시인은 (기록된) '시를 쓰지 않은 사람'으로 정의됩니다. 쓴다는 건 어떤 타락이나 진정성의 훼손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 경우에 '기록된 시'는 '텍스트'가 아니었습니다('텍스트'는 그 가치에 대한 인준을 요구합니다). 아마 이 문맥에서는 '문학'이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문학'이 너무나도 외연이 넓은 용어인지라 그 개념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는 건 좀 소모적인 듯합니다. 다만, 역사적/형식적으로 정의될 수 있고, 그 경우에도 태도에 따라서 몇 가지 분류/유형학이 가능하다는 것 정도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2006-05-13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5-13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음유시인에 관해서 제가 읽은 건 러시아 기호학자의 논문이기 때문에 별로 도움이 안되실 거 같습니다. 그리고, 후배님의 경우에 '근대문학'을 상당히 폭넓게 정의하는 거 같습니다. '문자'만이 문학의, 근대문학의 충분한 정의를 제공하는 건 아니니까요. 거기에 근대적인 의식, 혹은 문학에 대한 자의식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더불어, '철학'이란 말도 말씀처럼 그렇게 '엄밀하게' 정의될 수 있는 건지는 의문입니다(특히나 한국어에서 '철학'이란 말!). 우리에게 주어진 건 '철학들' 아닌가요?..

2006-05-13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근에 눈길을 끈 외신 기사 두 건을 옮겨놓는다. 나중에 글감이 될 만하겠기에 일단은 '자료'로서 보관해놓고자 하는 것인데, 주제는 '남성'이다. 두 기사 모두 한국일보에 게재된 것으로 첫번째 기사는 '남성 피임약 세계 첫 개발'이란 제목이고, '슈퍼 정자'를 다룬 두번째 기사는 "아빠는 큰 키…푸른 눈…만능 스포츠맨…박사"란 제목이다.

 

 

 

 

한국일보(06. 05. 01) 정자 생산을 중단 시키는 남성 피임약이 세계 최초로 개발된다. 세계적인 의학전문지 란셋(Lancet)은 최신호(28일자)에서 호주와 유럽 14개 지역 등에서 1990~2005년 18~51세 남성 1,500명을 대상으로 30차례 실시한 임상시험 결과,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과 여성호르몬 프로게스트로겐을 함유한 남성 피임약이 100% 효과를 거두었다고 보도했다. 독일 쉐링과 네덜란드 오가논 제약사가 개발한 이 피임약은 향후 3~5년 내에 세계 최초로 시판될 것으로 보인다.

-이 호르몬제 남성 피임약은 여성용 피임약이 배란을 중지시키는 것처럼 정자 생산을 중단시켜 피임효과를 거둔다. 제약사들은 몸에 심는 임플란트와 먹는 약 등 2가지 형태로 만들어 시험해 왔다. 이 남성 피임약은 성욕감퇴 체중증가 우울증 등의 부작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며, 일부 임상시험자는 오히려 성욕이 증가했다. 남성 피임약 사용을 중단하면 3~4개월 뒤에는 정자 생산 능력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

-연구 책임자인 호주 시드니대 피터 리우 박사는 “이 남성 피임약은 신뢰성이 높고 복원이 용이하기 때문에 콘돔이나 정관수술 등 기존 남성 피임법보다 더 우수하다”고 말했다.

(*)여성 피임약의 개발이 원하지 않는 임신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프리섹스'를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여성의 자기결정권 향상에 혁명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은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피임의 책임은 상당 부분 여성에게만 전가해온 것도 사실이다(더불어 '구멍난 콘돔'의 공포도 여전히 연인들을 부자유스럽게 했었다). 이제, 번거로운 수술 대신에 사용이 간편한 먹는 피임약이 상용화된다면, '피임'에 대한 책임은 남녀가 공평하게 나누어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경우, 남성 피임약은 남녀평등이라는 '의식'의 한 가지 물적 토대가 되어주는 것. 상상임신은 가능하지만, 상상피임은 가능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피임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리고 '현실'이 바뀌어야 '관념'도 바뀌게 된다(혹은 현실은 관념의 변화를 강제한다).   

한국일보(06. 05. 08) 몇 차례 인공수정을 시도했다 실패한 미국 여성 멜리사 와이스(39)는 며칠 전 인터넷에 ‘물건’을 내놓았다. 6년 전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정자은행에서 3,000달러를 주고 산 ‘401호 정자’ 세트였다. 인공 수정이 실패한 그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내놓았는데 순식간에 팔렸다. 뒤늦게 ‘돈을 달라는 대로 줄 테니 남은 것이 없느냐’는 간청도 쏟아졌다. 와이스가 내놓은 401호 정자는 ‘슈퍼 정자’라 불리는 최고품이었다. 수요가 너무 많아 이미 2년 전 동난 것이었다.


 

 

 


-좋은 유전자를 갖고 있거나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충할 정자로 수정하는 ‘맞춤형 수정’이 늘면서 이처럼 일부 품질 좋은 정자는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 401호 정자를 제공한 주인공에 대한 관심도 가히 폭발적이다. 정확한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일계로 193cm의 큰 키에 푸른 눈과 갈색 곱슬머리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사 학위에다 만능 스포츠맨이며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효자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제공받아 태어난 아이가 매년 3만명이 넘었고 특히 같은 정자로 태어난 아이가 갈수록 늘고 있다. 401호 정자로 25명이 태어났고 한 보디빌더의 정자로도 같은 수가 탄생했다. 언론은 401호 정자 제공자를 추적하는 한편 미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401호 정자로 태어난 아이들을 일일이 찾아 이들을 비교하는 기사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401호 정자를 통해 아이를 낳은 엄마들은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받은 여성과 제공받은 정자로 태어난 사람들을 위한 인터넷사이트에서 육아 정보를 주고 받고 있다. 직접 만나 휴일이나 주말을 함께 보내기도 한다.

-이들 역시 정자 제공자가 누구인지 무척 궁금하지만 ‘사생활을 보호 받고 싶다’는 정자 제공자의 바람대로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같은 정자로 태어난 아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근친상간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영국은 법으로 같은 정자를 제공 받을 수 있는 여성 수를 10명으로 제한했지만 미국은 개별 정자은행 자율에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기사를 읽고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올린 것은 네덜란드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1995)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안토니아는 임종을 앞둔 어머니를 찾아 딸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마을에 정착해 어머니의 오래된 농장을 운영하면서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 영화는 독립적인 여성, 안토니아를 중심으로 모녀 4대가 엮어가는 삶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그려나가는 가족 연대기라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적 삶의 방식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인 이 영화에서 아이를 갖기 위해 남자를 구하러(실상은 '정자를 구하러') 다니던 모녀의 모습이 얼핏 떠오른 것.

 

 

 

 

정자은행은 이제 그런 '수고'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시대를 만들어놓았다. 더불어, 일부일처제의 근간도 미래에는 위협받을지 모르겠다. 자신의 정자로 25명의 아이들을 낳는다면, 유전자적 관점에서는 이미 '일부다처제'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큰 키…푸른 눈…만능 스포츠맨…박사"의 정자(유전자)가 선호된다면, 그보다 열등한 남성의 정자는 피임은커녕 갈수록 짝을 찾기 힘들어질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도래할지도 모르는 '슈퍼 정자의 시대', 그건 역설적으로 남성이 '제2의 성'으로 확실하게 전락하는 시대를 뜻하게 될는지?..

06. 05.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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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05-0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공공연한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에도 난자 불법거래가 있잖아요. 공부 잘 하는 이쁜 여대생 난자가 극히 선호되죠. 쩝.

2006-05-09 0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6-05-09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끌리는 제목이군요. 저도 한국일보서 그 기사 봤어요. ^^

로쟈 2006-05-09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관련 분야에 계신가요?^^
아프락사스님/ 뭔가 쓰고 싶도록 만드는 기사였습니다. 한데, 이 페이퍼는 (당장에는) '쓰지 않기 위해서' 올려놓은 것이긴 합니다.^^

조선인 2006-05-10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관련 분야가 아니라요, 여대 나왔거든요. 사례를 좀 알죠.-.-;;
 

요즘 이 서재를 찾는 분들이 하루에 400여분 안팎이 되는 걸로 뜨지만, 즐찾이 늘거나 주는 것도 아니고 댓글이 더 달리는 것도 아니므로 대부분의 경우 유령-독자들이 아닌가 싶다(아니면 400이란 숫자 자체가 허수이거나). 이런 류의 블로그가 생기기 이전에 혼자 PC에 쳐넣곤 하던 일기와의 차이점이라면 이 '유령들'의 존재인데, 그건 좀 자극적이면서 동시에 성가신 일이기도 하다. 무슨 '유령수업' 같기도 하고...

 

 

 

 

공개된 서재(블로그)인 이상 얼마간의 '공공성'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지만, 또 얼마간은 '사적인' 공간인 이상 나만의 '자유'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해서, 이 공간에 적어놓는 글들은 교묘한 줄타기, 혹은 이중적인 플레이의 산물이다.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면서, 또 나 자신을 위한 것만은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작년 1월초 모스크바 통신에 '언더그라운드에 대하여'라고 올려놓았던 글을 다시 정리해서 옮겨온다. 대체 너의 포지션이란 게 뭐냐, 란 질문을 바람결에 듣기도 하는데, 거기에 답한다는 의미도 있다(그러니까 나는 두 번 대답하는 셈이 되겠다).

글의 내용은 대부분 당시에 읽었던 김규항의 칼럼 '희망에 대하여'에 대해 코멘트를 덧붙이는 것으로 돼 있다(칼럼은 <나는 왜 불온한가>에 포함돼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기생적'이며, 텍스트라기보다는 '곁다리텍스트'이다. 사실, '블로그'가 아니라면 이런 류의 텍스트가 살아남았을 리 없다. 좋은 세상이고, 좋은 세월이다. 그럼, 고대되는 이창동의 신작 <밀양>에서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보도록 한다.   

 

김훈의 치정소설이 밀양을 배경으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온 이창동의 신작은 밀양이배경이다(나는 두 주 전쯤에 <씨네21>에서 그런 내용이 실린 인터뷰를 읽었다). 밀양(密陽), 혹은 ‘시크릿 선샤인(Secret Sunshine)’(신작의 영어제목이다).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이 그곳에서 일어났다는 걸 보면, 밀양은 햇빛이 좋은 만큼이나 그늘도 깊은 모양이다. 나는 밀양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지만, 어쩌면/잘하면 올해 안에 밀양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크린에서.

홍상수의 신작 <극장전>도 크랭크인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불과 작년초를 기준으로 한 얘기인데, 왜 이렇게 코믹하게 느껴지는지!). 그의 행보가 빨라진 건 아마도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실패’를 보상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그럼, <친절한 금자씨>를 찍는 박찬욱은? <올드보이>의 믿기지 않는 ‘성공’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어쨌거나 이들이 빨리-찍기에 있어서 김기덕과 경쟁하는 것은 (관객으로서) 고무적이다. 허진호도 신작을 찍는다고 하고. 보기에, 한국영화는 현재의 세계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활력을 자랑하는 듯하다. 그건, 그렇고 이어지는 건 김규항의 한 최근(?) 칼럼이다(최근에 인터넷에서 읽은 것일 뿐이어서 정말로 최근의 칼럼인지는 자신할 수 없다. 제목은 ‘희망에 대하여’인가 그렇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은 80년대가 준 것이다. 젊은이들의 알록달록한 머리색,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을 권리, 그 대통령을 욕할 자유, 북한군을 인간으로 그린 영화, 민주적인 노동조합...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어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것들의 9할은 80년대, 그 불의 시대가 준 선물이다. 한국의 80년대는 특별했다. 인류 역사에서 그렇게 많은 인텔리 청년들이 일신의 안위를 뒤로 한 채 세상을 바꾸는 일에 투신하고 스러져간 시대가 있었던가.

이 시작부터 두드러지는 건 그의 ‘나르시시즘’이다: “한국의 80년대는 특별했다.” ‘386’이라는 언론의 표현 대신에 ‘80년대 청년들’이라고 그는 쓰지만, ‘인텔리 청년들’이라고 하는 걸로 봐서 ‘80년대 청년들’의 9할은 ‘80년대 학번의 대학생들’을 지칭한다. 그리고 사실, 그 대학생들/인텔리들이 그렇게 많아진 건 5공의 ‘선심성’ 대학정책 때문이었다(더불어 군사정권은 통행금지를 해지하고, 중고등학교의 두발과 교복을 ‘자율화’했다. 머리에 물을 들이려면 ‘머리’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사립대학의 설립조건을 완화함으로써 대학들이 우후죽순 늘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졸업정원제라는 걸 도입하면서 대학 입학생 수를 더 늘려놓은 것이다. 해서 “그렇게 많은 인텔리 청년들”의 ‘물적 토대’는 역설적이지만, ‘파시스트들’이 마련해주었다.

더불어, 당시는 경제호황국면이었기 때문에 요즘과 같은 대졸자 취업문제가 거의 없었다. 90년대 후반 이후 대학생/졸업생들이 좀스럽게도 취업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반면에 ‘80년대 청년들’은 군사정권 타도와 조국의 민주화 같은 ‘대의’에 ‘투신’하다가도 원하기만 하면, 직장인/생활인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물론 일부 스러져가기도 했지만. 그런데, 김규항은 그런 ‘희생’에 대해서, 다른 세대들이 어떻게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기념관’이라고 세워달라는 것일까?

 

 

 

 

자기 세대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과 나르시시즘이 김규항만의 것은 아닐 것이기에 더 트집을 잡지는 않겠지만(가령, 4.19세대의 자부심, 이명박 세대의 자부심, 김훈 세대의 자부심 등), 그런 자부심을 객관적인 것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하면 곤란하다. “인류 역사에서” 운운하는 것이 그렇다. 사실, 그런 청년들의 원조는 러시아이며, 인텔리’란 말 자체가 러시아어 ‘인텔리겐챠(intelligentsia)’의 준말이다(‘인텔리겐챠’란 말 자체는 러시아의 고유어가 아니지만). 그러니 ‘인텔리’라는 부정확한 표현 대신에(흔히 고학력자를 ‘인텔리’라고 지칭하므로) ‘인텔리겐챠’(표준어는 ‘인텔리겐치아’)라고 써주는 것이 옳지만, 김규항은 이 말의 소속을 (무)의식적으로 부인/거부한다. 그 이유는 곧 알게 된다.)

-80년대 청년들의 땀과 피가 땅에 베어(*배어) 파시스트들이 권력의 전면에서 물러나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전될 무렵,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물론 그것은 사회주의의 붕괴가 아니라 사회주의의 한 졸렬한 시도의 붕괴였지만) 더 이상 왼쪽으로 당기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적인 우경화가 시작되었다. 이 모순된 상황은 일견, 한국은 살 만한 나라가 되었고 사회주의적 가치는 시효를 다한 것처럼 보였다. 10여 년을 극악한 군사 파시즘과 싸우던 청년들의 긴장은 그 변화한 상황 속에서 혼란에 빠졌고, 정처 없이 흐트러져갔다.

이 대목에서 현실 사회주의 붕괴를 ‘사회주의 한 졸렬한 시도의 붕괴’라고 한 것은 유감스럽다(짐작에는 이 때문에 이 칼럼에서 ‘인텔리겐챠’는 ‘인텔리’가 되었다). 러시아 인텔리겐챠들의 땀과 피가 땅에 배어(이건 ‘비유’가 아니다. 그들의 희생은 사실 양적으로 한국의 ‘80년대 청년들’과는 비교가 안된다. 남의 나라 역사라고 해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결과적으로 성취한 것이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며, 2,000만명으로 ‘인민의 적’으로 몰아 희생시켜가면서 건설한 것이 (스탈린식의) 현실 사회주의였다.

이전에 한번 인용한 바 있지만, “스탈린 시대에 소련은 농업집산화, 중공업 중심의 급속한 산업화, 문화혁명 등 여러 조치들을 통하여 위대한 성취와 사회적 변화를 이루어 내었고,(…) 당시 소련은 자본주의 세계가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높은 경제성장률을 계속 유지하였고, 그 결과 소련 사회의 모습은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문맹자들의 농업국가에서 국민 다수가 문맹에서 벗어난 도시 중심의 산업국가로 완전히 변모하였다.” 

조금 더 인용하자면, “이런 변화는 소련의 많은 사람들, 특히 노동자와 농민 출신의 젊은이들에게는 영웅적인 희생, 교육, 신분 상승 등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도시의 노동자들과 중간계층들은 당시의 어려운 상황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 있다는 확신을 지낸 채, 국민의 모든 힘을 경제 발전에 최대한 동원하려는 정부의 노력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호응은 산업 및 관료제의 팽창, 대대적인 숙청, 교육 기회의 확대 등과 연결되면서 노동자 및 농민 출신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신분 상승의 기회를 제공하였고, 그 결과 노동계급 및 농민 출신의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고등학교 학생수는 1926-7년의 1,834,260명에서 1938-9년의 12,088,772명으로 증가하였고, 고등교육기관 학생수는 1927-8년과 1932-3년 사이에 159,800명에서 469,800명으로 증가했는데, 그 중 노동계급출신의 비중은 25.8%에서 50.3%로 증가하였다. 또한 고등교육기관 졸업생들의 승진은 매우 급속하여 이미 1941년에는 1928-32년 졸업생의 89%와, 1933-7년 졸업생의 72%가 국가 및 당의 지도적인 간부로 성장하였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2,000만 명 이상이 희생됐지만, 이게 ‘현실사회주의’였다. 이게 왜 ‘한 졸렬한 시도’인가? 희생자들 때문에? 하면, (A급 좌파가 아닌) ‘B급 좌파’가 정권을 잡게 되면(설마 중앙집권적 권력이라는 게 필요없는 것인가?), 좀 달라지는가? 과연 사회주의건설에 반대하거나 적극 동참하지 않는 세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거기서는 ‘희생’ 혹은 ‘숙청’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가? 가령 개량적 진보주의에서부터, 중도보수, 수구보수, 수구꼴통에 이르는, 그리하여 아마도 현재 인구의 70%는 확실히 넘을 만한, 3,000만 명은 확실히 넘을 만한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어떻게 개량하고 개조할 것인가? 무엇으로 그들의 동참을 ‘강제’하는가? 그들의 자발적 동참을 기다리는가?

소련은 자연자원이라도 풍부했지만 그마저 없는 한국의 생존은 어떤 방식으로 확보할 것인가? (자본주의 이후) 생산수단의 공유,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라는 ‘아름다운 원칙’을 과연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일국사회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그럼, 전세계의 사회주의화, 공산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사회주의적 가치’가 시효를 다하지 않았다면, 다른 프로그램은 무엇인가? 혹 모든 (이성적인)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 실현불가능한 자기모순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기대하는 건 이런 물음들에 대한 대답 혹은 의견이지만, 김규항의 칼럼은 무력한 ‘적전(敵前) 분열 이후 10년’으로 넘어간다.

-10년이 지났다. 오늘 그들은 대략 셋으로 나뉜 것으로 보인다. (80년대의 내용은 폐기하고 이력만을 팔아 장사에 나선 부류는 접고 가자. 그런 천박함까지 80년대의 이름으로 언급할 순 없으니.) 첫째, 세상이 달라졌다는 의견에 명백하게 반대하며 80년대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들이다. 손에 꼽을 만치 적은 그들은 곤란한 처지에 있다. 그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세상이 변했다고 합의했고, 그런 합의를 기반으로 하는 방식의 운동이 각광을 받는 상황에서, 그들이 지키는 신념은 낡은 것으로 비쳐지기 일쑤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는 의견에 찬성하고 안 하고를 떠나) 그들은 ‘여전히 남은 문제들’과 싸우는 유일한 세력이다. 그들은 낡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새로운 세상에 접근한 사람들이다.

“오늘 그들은” 대략 셋으로 나뉘었다고 하지만, “어제(=80년대) 그들은” 그렇게 구분될 수 있었을까? “80년대의 내용은 폐기하고 이력만을 팔아 장사에 나선 부류”라고 몰아붙이고 있는 이들의 상당수가 80년대 운동권의 (잘나가는) 핵심들이었다(이 ‘장사꾼’들이 ‘386 국회의원들’을 지칭하는지, ‘벤처사업가’들을 지칭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그들이 10년 후에는 ‘이력을 팔아 장사에 나설 천박한 부류’들로 분류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지금 그들이 그런 식으로 분류되고 걸러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80년대라는 폭압적 상황하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던 ‘사소한’ 차이들이 ‘오늘’ 드러난 것.

레닌주의의 기치하에서는 스탈린도 트로츠키도 부하린도 모두가 한몸이고 한 통속이었다. 하지만, 혁명이 성공하고 세상이 달라지자 그들은 스탈린파와 트로츠키파와 부하린파로 분리/분열돼 가고 사회주의의 적통과 반동으로 구분/숙청된다. 그런 식으로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적이다(김규항의 박노해 비판을 떠올려보라. 하지만, 80년대 누가 박노해를, 혹은 노동해방문학을 비판할 수 있었을까? 혹은 김수환 추기경은? 80년대 누가 추기경을 비판할 수 있었을까?). 왜?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상이 달라졌다는 의견에 명백하게 반대하며 80년대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들”로 분류되는 이들은 쿠스투리차의 영화제목을 빌리자면 ‘언더그라운드’의 사람들이다. ‘80년대의 연속성’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전두환(파쇼정권)이나 김영삼(문민정부), 김대중(국민의 정부), 노무현(참여정부)이 다 똑같다는 것이다. 전선(戰線)의 외양만이 바뀌었을 뿐, 근본적인 사회적 적대관계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으며 그런 적대의 혁파를 위해 자신을 희생/투신하는 사람들! 이러한 논리의 자연적 귀결은, 이전에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인간개조 혹은 인간복제이며(그것만이 ‘근본적인 변화’이기에), 네그리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기계-인간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이다. 그것은 김규항의 입장이기도 한가?

하지만, 그는 한 문단 내에서 이야기를 묘하게 비튼다. “80년대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들”이 “(세상이 변했다는 의견에 찬성하고 안 하고를 떠나) 그들은 ‘여전히 남은 문제들’과 싸우는 유일한 세력”으로도 지칭되는 것이다. “세상이 변했다는 의견에 찬성하고 안 하고를 떠나”라는 건 이들간에도 두 부류가 있다는 얘기인가? 이 문단의 시작에서 이들은 “세상이 달라졌다는 의견에 명백하게 반대”한다고 분명히 언급되었다. 이 두 구절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그들은 “세상이 변했다는 의견에 찬성하고 안 하고를 떠나” “세상이 달라졌다는 의견에 명백하게 반대”하는 것인가?

그리고 “여전히 남은 문제들”은 뭔가? ‘남은 문제들’이란 말은 해결된 문제들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는데, 해결된 문제들은 무엇인가? “여전히 남은 문제들만” 마저(!) 해결하면 ‘근본적인 변화’가 성취되는가? 여기에 논리적 균열이 있는 건 아닌가? 나로선 이 균열이 “그들은 낡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새로운 세상에 접근한 사람들이다.”라는 역설적인 결론에 의해 봉합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둘째, 이른바 90년대 이후의 변화한 상황을 근본적인 변화로 규정하고 적응한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90년대 중반 이후 급부상한 부르주아적 시민운동이다. 그런 새로운 방식의 운동은 80년대의 전체운동 중심 운동의 그물에 담지 못했던 중산층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챙기며, 준 정당에 가까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그 성과야 지나칠 만큼 충분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런 운동이 오늘의 유일한 운동인 양 주장되는 일이다. 그런 주장들은 바로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운동을 어리석고 낡았다고 비난하는 일이 된다.(그들은 여전히 ‘80년대의 연속성’이나 ‘변혁의 전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들의 실제 활동 속에서 그런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유지를 위해 많은 것을 타협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언론에 의지하다 보니 언론문제에 불분명한 입장을 보인다든가, 언론에서 다뤄줄 만한 주제에 편중한다든가, 그 번듯한 살림을 꾸리기 위해선 과격해 보이지 않아야 한다든가 하는 문제들은 그들의 족쇄다.)

여기에 또다른 부류가 있다. 이들과 첫번째 부류와의 종차(種差)는 90년대 이후의 변화를 보는 시각에 달려 있다. 첫번째 부류(=언더그라운드)가 90년대를 80년대로부터의 근본적인 변화라고 인정하지 않는 데 반해서, 두번째 부류는 그걸 인정한다. 그리고 거기에 적응한다. 그런데 여전히 ‘80년대의 연속성’이란 말을 쓴다. 그런 그들을 김규항은 ‘부르주아적 시민운동가들’이라고 일컫을 모양이다. 이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이중적인데, 그들의 인식과 운동방식에 ‘반대’하진 않지만, 그것이 운동의 전부인 걸로 간주되는/간주하는 건 반대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운동은 (부르주아적) 한계를 명백하게 갖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론 그들과 달리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운동”을 사람들로 하여금 간과하게(결과적으론 ‘낡은 운동’으로 비난하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 이력을 팔아 장사에 나설 만큼 간교하지도 변화한 상황에 적응할 만큼 재빠르지도 못했지만, 여전히 신념을 지키며 살기엔 변화한 상황의 혼란과 피로를 이길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80년대의 청년들의 가장 많은 부분일 그들은 말 그대로 청년 시절의 노고가 허망해져버린 사람들이다. 남들이 일신의 안위를 준비하느라 열심일 때 거리와 현장을 내달려야 했던 그들은, 꼭 그만큼 경쟁에 뒤진 삶을 어색하게 꾸려간다. <한겨레>를 구독하고 남들보다 진지한 책을 읽고 선거 때면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정당에 투표하기도 하지만, 그런 작은 노력들은 이미 천민자본주의의 정신에 사로잡힌 그들의 주변으로부터 은근한 경멸의 대상일 뿐이다.

어떤 근거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김규항은 이 세번째 부류를 ‘80년대 청년들의 가장 많은 부분’, 즉 대다수로 규정한다. 아마도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그의 ‘80년대 청년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제한된 범위의 ‘운동권’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소위 ‘운동권’ 바깥에 있었던 나로선 그 속뜻을 알지 못하겠다). 정말로 그 운동권 ‘대다수’는 “말 그대로 청년 시절의 노고가 허망해져버린 사람들”인지? 그래서 “경쟁에 뒤진 삶을 어색하게” 꾸리면서 “주변으로부터 은근한 경멸의 대상일 뿐”인지?

나로서 약간 혼란스러운 것은 칼럼의 서두에서 “인류 역사에서 그렇게 많은 인텔리 청년들이 일신의 안위를 뒤로 한 채 세상을 바꾸는 일에 투신하고 스러져간 시대가 있었던가.”라고 감회를 섞어 얘기한 것과 그 인텔리 청년들(=80년대 청년들) 대다수가 “주변으로부터 은근한 경멸의 대상일 뿐”이라는 이 대목에서의 지적 사이의 간극이다. 내가 아는 ‘그렇게 많은 인텔리 청년들’은 ‘경멸의 대상’이 아니며(그들은 오히려 나보다 잘나간다. 집행유예를 받았던 한 친구는 10년후 내게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를 읽어보라고 권했었다), 혹 ‘경멸의 대상’일지도 모르는 ‘80년대 청년들’은 ‘대다수’가 아니라 ‘소수’이다(어떤 다수가 ‘경멸받는다면’, 오히려 경멸받지 않는 소수가 비정상 아닌가?).

‘은근한’ 경멸? “(겉으론 아니지만) 네들이 속으로 날 경멸하는 걸 다 알아!” 같은 건가? 그건 자의식의 일종이고 피해의식의 일종 아닌가? 사회/운동의 대의(大義)를 위해서 거리와 현장을 내달려야 했다면, ‘그만큼 경쟁에 뒤진 삶’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거꾸로 그런 경력 때문에 ‘경쟁에 앞선 삶’이어야 정상인가? 더불어, 운동을 했으면 반드시 ‘보상’을 받아야 하나? 민주화 운동 유공자들처럼? ‘고상하지만 무력한’ 이들(=아름다운 영혼들)의 주변은 ‘천민자본주의 정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는데, 이 주변인들은 다수인 세번째 부류보다도 더 다수인가? 이러한 의문들은 칼럼의 주장에 시비를 걸려는 게 아니라 그 ‘진의’를 좀더 명료하게 해두기 위해서 제기하는 것이다.

-오늘 80년대의 청년들은 (변화한 세상에 적응한 사람들을 빼고는) 대개 세상의 경멸에 처해 있다. 희한한 일은, 사람들은 그 청년들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을 주었다는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그 청년들을 마치 어리석은 과거를 가진 사람처럼 경멸하곤 한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동의는 그런 경멸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 그 청년들이 ‘그 80년대에 데모 한번 안 해본 놈들’에게서까지 받는 그런 경멸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

여기서도 ‘80년대 청년들’이라고 다소간 모호하게 지칭되고 있는 이들은 ‘그 80년대에 데모 한번 안 해본 놈들’과 대비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 모호성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80년대 청년들’은 ‘한번이라도 데모 해본 놈들’부터 ‘데모현장이 강의실이었던 분들’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갖기 때문이다. 전자라면 절대 다수이고 후자라면 소수 정예이지만, 내가 보기에 김규항은 이들을 뒤섞는다. ‘절대 다수’가 ‘어리석은 과거를 가진 사람’으로서 경멸 받는 것은 넌센스이므로, ‘어리석은 과거를 가진 사람’이라고 지칭되는 이들은 적어도 운동 경력 때문에 ‘훈장’이라도 달고 나온 이들을 가리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로 ‘80년대 청년들’로 지칭될 만큼, ‘인류 역사’를 들먹일 만큼 다수였는가? 운동을 위해서 일신을 내던질 수 있었던 그들이 지금에 와서 새삼 주변(=사람들)의 시선에 그토록 민감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분명 사람들의 정신이 ‘천민자본주의 정신’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들의 경멸이야말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오히려 그런 주변인들로부터 환영/존경받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 아닐까? ‘천민자본주의 정신’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사람은 제대로 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존경해줄 수 있는 것인지? 자세하게 읽으려고 하면, 칼럼은 이해되지 않는 대목들이 수두룩하다.

가령, “희한한 일은, 사람들은 그 청년들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을 주었다는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그 청년들을 마치 어리석은 과거를 가진 사람처럼 경멸하곤 한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동의는 그런 경멸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라는 대목은 전형적인 히스테리증자의 담론을 떠올리게 한다(예컨대, 히스테리증자에게는 어떠한 사랑의 고백도 변심으로 의심받을 것이다. “저 남자가 갑자기 무관심해졌어. 딴 여자가 생긴 거야!” “저 남자가 왜 갑자기 친절하지? 딴 여자가 생긴 걸 감추려고 하는군!”).

이 ‘동의’를 ‘존경’으로 바꾸어도 사태는 역전되지 않을 것이다. 히스테리증자에게서는 그 ‘존경’ 또한 ‘경멸’을 위한 준비일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경멸이 아닌 진정한 동의이며, 존경인지는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가? (궁예처럼) 보면 아는가? 하여간에 이런 식의 징징대는 소리는 듣기에 불편하다(영화 <람보>의 끝장면에서 남들의 ‘경멸’에 대해 자못 억울하다는 듯이 징징대는 ‘람보’ 실베스타 스탤론과 무엇이 다른가? 참고로, 이 <람보>는 레이건 시대의 미국, 80년대 시대정신의 영화적 상관물이었다).

“그 청년들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을 주었다”는 대목은 어떤가? 그들은 무얼 돌려받기 위해서 주었는가? ‘인류 역사’는 차치하고 한국의 근현대사만 보더라도 모든 앞선 세대는 자신들이 피땀흘린 노고의 대가를 후대에 물려주었다. 이건 당연한 것 아닌가? 이전 통신문에서 살펴본 김훈의 세대만 하더라도 한국사회의 ‘물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한국전쟁의 참전세대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있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얼 말하자는 것인가?

사실, 김규항이 80년대 청년들이 주었다고 주장하는 건 비판적 사회 ‘의식’ 아닌가? ‘의식화’란 당대의 상투어. 그 ‘의식’이란 소프트웨어는 ‘물적 토대’라는 하드웨어가 없이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을까? 결국 이건 하나마나 한 얘기 아닌가? “그 청년들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을 주었”는데, 어쩌라는 얘기인가? ‘80년대 청년들’은 무슨 특별한 역사적 사명의 유전자라도 갖고 태어났었더란 말인가? 지금의 2000년대 학번들도 노무현 정부가 아닌, 5공 정권하에서였다면, 일신의 안위를 뒤로 한 채 세상을 바꾸는 일에 투신했을 것이다. 그건 한 개인의 앙가주망 이전에 ‘시대정신’이자 시대적 요청이(었으)니까.

-하는 말대로, 그들이 80년대의 후반기에 그렇게 열심하던 사상 투쟁이나 사회구성체 논쟁은 분명 과열된 부분이 있었고 그들의 운동엔 편중된 부분이 있었다. 그들이 90년대의 혼란에 그렇게 무력하게 흐트러진 일 또한 그런 부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전망을 찾기 위해선 그런 오류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다. 오히려 80년대가 종료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그런 오류에 대한 정확한 비판과 토론이 진행되지 않은 일은 아쉬운 일이다.

김훈의 인터뷰에서 이 대목에 상응하는 부분은 박정희의 ‘정치적 과오’에 대해서 “물론 그런 것까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라고 답하는 부분이다. 김규항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물론 80년대 운동에 과열된/편중된 부분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김훈의 경우에도 지적했지만, 이런 판타지야말로 자기기만이다. 나는 당시에 그렇게 ‘열심하던’ 사상투쟁 등속도 혐오스러웠지만(그들은 주체사상이나 스탈린주의는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소프트 스탈린체제’였던 박정희나 그 ‘외설적 이면’으로서의 전두환은 혐오했다), 그러한 ‘오류/과오’까지가 온전하게 80년대 청년 정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때문에 그와는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우경화된 파쇼정권에 대응하기 위해서 필요 이상의 ‘좌경화’가 요구되었던 건 당연한 일, 이해할 만한 일 아닌가? 그게 옳거나 그르다고 판정하는 것은 이차적이다. 운동은 이성에 의해 조율되지 않으며, 거기에 언제나 동반되는 것은 ‘광기’이다. 김규항의 지적대로, (80년대 청년들이) “90년대의 혼란에 그렇게 무력하게 흐트러진 일 또한 그런 부분과 관련이 있을 것”인바, (김규항의 주장대로) 그들이 현재 사람들로부터 경멸받는다면, 그건 일정 부분 자기책임이다. 이제 결론이다.

-문제는, 80년대의 오류에 대한 그런 비판들이 새로운 전망을 찾기 위한 생산적인 목적이 아닌 엉뚱한 목적,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확실히 80년대의 정신은 ‘지나친 자본주의’로서 신자유주의 정신과 적대적이며, 80년대의 정신이 아무 구분없이 경멸되어야 할 필요가 바로 거기 있다. 오늘의 정신, 신자유주의의 정신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루가 다르게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를 당연시하는, 모든 경제적 실패를 노동자의 책임으로 넘겨지는, 아이들이 아파트 평수대로 신분을 나누는, 일류대학이 부자의 자식들로 채워지는, 오로지 돈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부모가 자식에게 선생이 제자에게 올바로 살라고 가르치는 일이 자식과 제자의 인생을 망치는 일이 되는, 정신이다. 과연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희망은 부당한 경멸을 돌려주는 일에서만 출발할 것이다. 80년대, 그 위엄을 되찾아야 할 때다.

“80년대의 정신이 아무 구분없이 경멸되어야 할 필요가 바로 거기 있다.”라는 대목은 문맥과 맞지 않는데, 오타가 아니라면 아이러니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80년대의 정신’은 ‘신자유주의 정신’과 적대적이기에, 그 ‘신자유주의 정신’이 지배적인 정신, ‘오늘의 정신’이 된 우리시대에 ‘경멸’받는다는 것. 그런 맥락에서라면, 사람들의 경멸은 ‘80년대 정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징표일 것이므로 (부당한 것으로 불평해야 할 게 아니라) 오히려 환영해마지 않아야 할 것이다. 더불어, ‘80년대 청년들’이 김규항의 주장대로 경멸받는 ‘다수’라면, 신자유주의 정신을 상대로 좌절할 이유는 무엇인가?

저항의 ‘물적 토대’를 문제삼는 거라면 모를까(그건 좀 어렵고 복잡하다), 그가 내내 내세우고 있는 것은 ‘정신’, 곧 ‘의식’ 아닌가? 부당한 결멸 정도를 (되)돌려주는 일에서 ‘희망’이 출발될 수 있다면, 이 또한 너무도 쉬운 일 아닌가? 자신을 은근히 경멸하던 주변 사람들에게 당장 내일 아침부터 경멸의 시선을 되돌려주면 되는 것이니까. 그걸로 80년대, 그 위엄을 되찾을 수 있는 거라면 말이다.

끝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 위엄’의 내용이다. ‘그 위엄’을 되찾아야 하지만, 그리고 그걸 ‘재단언(reassert)’해야 하지만, 정작 그 위엄의 내용은 아직 정리되지/갖춰지지 않았다. 80년대의 오류에 대한 비판이 (그간에 편파적으로 진행되었을 뿐) 아직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80년대가 종료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그런 오류에 대한 정확한 비판과 토론이 진행되지 않은 일은 아쉬운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 그대로 적용가능한 것은 재작년 연말인가 하머바스(독일)와 데리다(프랑스) 등 대표적인 서유럽 지식인/철학자들의 ‘시국선언’에 대한 지젝의 비판이다.

 

 

 

 

자신들의 선언서에서 두 철학자는 유럽이 자신의 “윤리-정치적 유산”을 재단언할 힘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바, 지젝은 그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왜나면, “우리가 미국 정치와 문명 속에서 비난받아야 하는 것으로 그리고 위험한 것으로 발견하는 것은 유럽 자체의 일부이며, 유럽적 기획의 가능한 결과들 중 하나”(<이라크>, 50쪽)이기 때문이다. 즉 “미국은 유럽 자체의 왜곡된 거울이다.”(즉 미국이란 거울에 비쳐지고 있는 것은 유럽 자신의 얼굴이다.)

해서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자기비판이다. “유럽 자체에 대해 비판적으로 개입하기를 원치 않는 이들은 미국에 대해서도 침묵해야 한다.”(51쪽) 그것이 지젝의 단언이며, 이는 새로운 주장으로 이어진다. “유럽적 유산의 방어가 연대와 인권이라는 위협받는 유럽적 민주주의 전통의 방어에 국한된다면 전투는 이미 패배한 것이다. 유럽의 유산이 방어되기 위해서는 유럽이 스스로를 재창안해야 한다. 방어의 행위 속에서 우리는 방어해야만 하는 그 무엇을 재창안해야 한다.”(51쪽)

즉 한쪽에서는 우리의 ‘금송아지’를 보호/방어하기 위해서 피 흘리는 가운데, 한쪽에서는 그 ‘금송아지’를 열심히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김규항이 옹호하며 재단언하고자 하는 ‘80년대 정신’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 자체의 오류를 제거한, 순수하게 진보적인 ‘80년대 정신’(=금송아지)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그 정신의 윤곽과 아직 ‘참호’(=언더그라운드) 안에서 전투를 계속하고 있는 소수의 전사(戰士)들, 그리고 대다수 ‘패잔병들’뿐이다. 때문에, “80년대, 그 위엄”을 한편으론 되찾아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런 게 아직 없으므로) 만들어내야 한다.

해서, 남들의 경멸에 신경쓰거나 발목 잡혀 있을 때가 아니며, 자화자찬하거나 징징댈 시간이 아니다. 과연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그건, 한가한 질문이다. “누가 승리를 말하는가? 극복이 전부인 것을.”(릴케)이란 시구를 조금 비틀어서 말하자면, “누가 희망을 말하는가? 전진이 전부인 것을.” 묵묵한 전진이…(*여기까지가 본문이었다. 이어지는 것은 본문에 덧붙인 군말이었다.) 

 

 

 

 

김규항의 칼럼에 대한 논평에 생각보다 길어졌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은 80년대가 준 것이다.”란 첫문장을 읽으면서부터 마음이 답답해지기 시작해서, 결국은 한때 그의 칼럼의 애독자였지만 나는 더 이상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나는 분류하자면, “세금 왕창 내는” ‘중도 우파’도 부르주아도 아니지만, 김규항의 분류대로라면 ‘80년대 청년’도 아니다. ‘80년대 인텔리’이긴 하지만, 나는 일단 ‘팔아먹을 이력’이 없고, 세상이 좀 달라졌다고 믿기 때문에 ‘80년대적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지 않으며, 남들만큼 ‘간교하지도’ ‘재빠르지도’ 않아서 경쟁에 뒤진 감은 있지만, 그건 자업자득 정도로 여긴다(그러니 굳이 분류하면, 세번째 부류의 ‘변이형’ 정도 될까?).

단 하나, 내가 내심으로 자긍심을 갖는 것은 세상이 좀 달라지긴 했어도 나의 정치적 태도는 80년대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김훈의 분류대로 하자면, 나는 ‘회색분자’이어서(최인훈의 명명에 따르면, ‘회색인’), 그다지 달라질 게 없는 건지도 모르지만. 내 주변에서 80년대에 ‘운동’을 잘하던 이들은 대부분 지금도 잘나간다(한나라당 공천까지 신청해 가면서). 그들에 주눅들어 하던 이들은 지금도 그냥 그 주변에서 주눅든 채 살아가고. 그리고, 나 같은 회색분자는 지금도 회색분자이다(나도 기회주의적으로 좀 처신하고 싶고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빌어먹을 ‘기회’란 게 안 주어진다. ‘기회’는 나를 경멸하는 모양이다). 이건 일종의 생태학이다. ‘운동생태학’. ‘운동윤리학’ 이전에 말이다.

나는 김규항이 자신을 어떻게 분류할지 궁금하다. 아마도 “세상이 달라졌다는 의견에 명백하게 반대하며 80년대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들”에 속하리라, 혹은 속해야만 하리라. 적어도 ‘B급 좌파’라는 명패에 값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손에 꼽을 만치 적은 그들”의 “곤란한 처지”에 합류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또한 정말로 ‘곤란한 처지’에 있는지? ‘언더그라운드’의 처지라면, 세 부류를 ‘개관(槪觀)’할 만한 처지가 안된다. 그걸 개관하기 위해서는 언더그라운드 ‘바깥’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세상이 변했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하며(그럴 경우, 운동방식 또한 바뀌어야 한다) 동시에 그럼에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그럴 경우, 운동방식은 바뀌면 안된다). 그러니까 그의 처지를 규정하는 건 모종의 아포리아이다. 본문에서 “세상이 변했다는 의견에 찬성하고 안 하고를 떠나”라는 애매한/유보적 표현은 짐작에 아마도 그래서 들어갔을 것이다. 김규항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본문에서 한번 언급했던 쿠스투리차의 영화 <언더그라운드>(1995)의 줄거리는 이렇다. “1941년 독일에게 점령당한 유고의 베오그라드. 무기밀매를 하던 블래키와 마르코는 지하실에 무기생산고를 만든다. 이로부터 3년후, 마르코는 블래키를 독일군으로부터 구출해 지하실로 숨게 한다. 하지만 유고가 해방된 후에도 마르코는 지하실 사람들을 속여 계속 무기를 만들게 하는 한편 블래키가 사랑하는 여자 나탈리아를 빼앗고, 티토의 측근이 되어 부와 명예를 누린다. 블래키의 아들 요반의 결혼식날 언더그라운드는 사고로 파괴되고 아직도 전쟁이 진행중인 것으로 믿고 있는 블래키는 자신의 영웅담을 영화화하고 있는 촬영현장에 도착해 진짜 총을 발사한다. 1992년 다시 전쟁에 휩싸인 베오그라드. 마르코와 나탈리아는 블래키의 지하군에 의해 살해된다. 마지막, 블래키의 죽음에 의해 잉태된 꿈의 장면, 모든 죽은 사람들이 햇살 밝은 곳에서 축제를 벌이는데 그들이 딛고 있는 땅이 육지로부터 떨어져 나간다.”(김소영 교수의 요약)

유고 내전에 관한 이 ‘블랙 코미디’에서조차도 언더그라운드의 사람들은 관객의 마음을 무겁게 했었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세상이 달라졌다는 의견에 명백하게 반대하며 80년대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들”로 분류되는 이들은 이 ‘언더그라운드’의 사람들을 닮았다. 나는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내는지 가늠할 수 없다(1980년부터만 잡아도 벌써 25년째이다!). 그들과는 달리 나에게 먹구름 같던 80년대는 지난 김영삼 정부때 전두환, 노태우가 내란수괴죄 등으로 수감되면서 비로소 막을 내렸다. 두 사람이 구속되는 날, 나는 젊은 날 머리속을 내내 감싸던 무거운 안개 같은 것이 걷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87년 6월의 ‘함성’이 그날에서야 비로소 결실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했다). 나는 그 이후의 한국 정치사에 대해서는 케세라 세라, 될 대로 되라이다. 그건 무관심이 아니라 낙관이다(더 이상의 후퇴는 없을 거라는).

나는 우리의 삶에서 정치가 해줄 수 있는 몫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며, 나머지 문제들, “여전히 남은 문제들”은 종교(=종교 없는 종교)와 예술/문학에 의해서 해결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본다(데리다의 저작들 중 일부는 'Acts of Religion'과 'Acts of Literature'란 제목으로 묶였는데, 나의 모든 관심 또한 그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엊그제, 그러니까 지난해의 마지막날 저녁에 읽은 단편소설은 체홉의 <다락방이 있는 집>(1896)인데(‘운동’의 방식에 대한 두 가지 입장 차이가 이 단편의 이데올로기적 테마를 구성한다), 거기에 등장하는 화자(=화가)는 이렇게 말한다. “필요한 건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아니라, 정신적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초등학교가 아니라 대학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보기에, 정신의 자유, 정신의 대학은 정치가 충족시켜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대학(교육)’을 유보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구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어떻게 너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고 말할 수도 없다. 그건 또다른 ‘폭력’이다(인간에겐 생명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있다!).

내게 ‘언더그라운드’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80년대의 연속성’이란 무엇인가? <언더그라운드>에서 2차 대전이 계속 진행중이라고 믿고 있듯이, 군사파쇼 정권과 피억압 민중간의 대립구도의 연속성인가? 아니면, 다국적자본의 신자유주의와 전세계 노동계급간의 대립구도의 연속성? 어쨌거나 5공 때의 구호는 매번 반복되었다. “김영삼 정권 타도하자!” “김대중 정권 타도하자!” “노무현 정권 끝장내자!”(하지만, 그 구호들이 언제 실현됐던가? 메아리 없는 구호는 ‘구호를 위한 구호’로 귀결되는 것 아닌가?) 그러한 구호들에서 지속적인 것은 ‘타도하자/끝장내자’라는 ‘관성’이다. 영어로는 ‘overthrow’.

'Overthrow'는 타도/전복하다란 뜻도 되지만, 야구 용어로는 폭투(暴投), 그러니까 투수가 공을 너무 멀리 너무 높게 던지는 걸 말한다.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요구는 폭투처럼 콘트롤이 안되는 요구이다. ‘근본적인 변화’라는 건 아무도 정의/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와일드(wild)하며, ‘정의(正義)’를 닮았다(짓궂게도 5공의 집권여당은 ‘민주정의당’이었다. ‘80년대 청년들’과 집권여당의 지향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일치했던 것. ‘민주주의’와 ‘정의’!). 단, 그것이 ‘근본주의’에 붙들리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하지만, ‘폭투로서의 정의(Justice as a Overthrow)’가 힘을 갖기 위해서는,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혹은 위엄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해야 한다.

 

 

 



정의로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요구하는 사람들이 왜 경멸 받는가? 그건 힘이 없기 때문이다. 김훈의 표현을 갖다 쓰자면, ‘물적 토대’가 없기 때문이다(그런 이유로 김훈은 좌파를 ‘멸시’한다). 몽테뉴-파스칼의 통찰을 다시 반복하자면,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경멸)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데리다, <법의 힘>, 27쪽)

책임질 수 없는 구호들만을 남발하는 걸로 자신이 정의(=근본적인 변화)에 편에 서 있다고 믿는 건 착각이거나 오만이다. 그건 자신들이 ‘물적 토대’(=힘)를 갖고 있기에 곧 정의롭다고 믿는 것만큼이나 오도된 것이다. 자신의 말(=구호)에 책임지고, 그 말에 ‘물적 토대’(=힘)를 부여함으로써, 말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을 때만이 정의는 반격/경멸을 받지 않게 된다. 거기에 비하면, “그 청년들이 ‘그 80년대에 데모 한번 안 해본 놈들’에게서까지 받는 그런 경멸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라고 따위의 질문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라는 질문만큼이나 부차적이며 한가하다. 사자가 양을 잡아먹는 것은 그것이 정당(온당)해서가 아니다.



지난주에(*2005년초) 인터넷에는 지난해 10월에 사망한 철학자 데리다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창간 50주년 기념연설(발체)문이 영역본과 함께 올라왔었는데(강연은 5월에 있었고, 강연문은 11월호에 게재됐다),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다음의 문단이었다. 나는 한 문단을 둘로 나누어서 영역과 국역을 같이 제시하겠다(국역은 신기섭님의 것을 약간 수정했다).

Caught between US hegemony and the rising power of China and Arab/Muslim theocracy, Europe has a unique responsibility. I am hardly thought of as a Eurocentric intellectual; these past 40 years, I have more often been accused of the opposite. But I do believe, without the slightest sense of European nationalism or much confidence in the European Union as we currently know it, that we must fight for what the word Europe means today. This includes our Enlightenment heritage, and also an awareness and regretful acceptance of the totalitarian, genocidal and colonialist crimes of the past. Europe’s heritage is irreplaceable and vital for the future of the world. We must fight to hold on to it. We should not allow Europe to be reduced to the status of a common market, or a common currency, or a neo-nationalist conglomerate, or a military power.

“미국의 헤게모니와 중국의 떠오르는 힘, 그리고 아랍/이슬람의 신권 정치 사이에 낀 유럽은 독특한 책임을 지고 있다. 나는 ‘유럽 중심적인’ 지식인이 아니며, 지난 40년 동안 정반대의 이유로 곤욕을 치러왔다. 하지만, 나는 한치의 유럽 국수주의도 갖지 않고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유럽연합에 대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오늘날 ‘유럽’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를 위해서 우리가 싸워야만 한다고 확고하게 믿는다. 여기에는 계몽주의의 전통과 함께, 과거 전체주의의 범죄행위와 인종학살, 식민주의적 범죄행위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유감도 포함된다. 이러한 유럽의 전통은 대체될 수 없으며, 세계의 미래를 위해서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이걸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우리는 유럽이 그저 하나의 시장이나 하나의 통화체제, 혹은 새로운 형태의 국가연합이나 통합된 군사력 등으로 축소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

문단의 이러한 전반부가 연설의 핵심을 구성하지만, 내가 더 주목한 것은 이어지는 후반부의 유보조항이다: “Though, on that last point, I am tempted to agree with those who argue that the EU needs a common defence force and foreign policy. Such a force could help to support a transformed UN, based in Europe and given the means to enact its own resolutions without having to negotiate with vested interests, or with unilateralist opportunism from that technological, economic and military bully,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비록, ‘통합된 군사력’이라는 이 마지막 요점에서는 유럽연합이 공동의 방위력과 외교정책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동조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말이다. 그러한 힘은 유엔이 기술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불량배 국가인 미국과 타협하지 않고, 미국의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는 가운데 유럽에 근거를 두고서 독자적으로 그 결의를 실행할 수 있는 기구로 탈바꿈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강조는 나의 것인데, 강조된 것은, 그리고 데리다가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힘’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군사력(a military power)’. ‘불량배’(=미국)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유엔이 자신의 결의를 독자적으로 실행하는 걸 도와주기 위해서라도 유럽연합의 힘(군사력)은 불가불 요구된다고 이 ‘해체철학자’는 보는 것이다. 이 힘이 바로 어떤 발언이나 결의에 수행력을 덧붙여주는 ‘물적 토대’이다. 이러한 물적 토대에 의해서 뒷받침되지 않는 정의는 곧 반격 받으며,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철학자마저 이러할진대, 하물며 ‘운동가’가 세상 사람들의 경멸이나 탓하고 있다는 건 넌센스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은 80년대가 준 것이다.”에서 내가 읽는 것은 바로 그 넌센스이다...

06. 05.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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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기계 2006-05-08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개인적으로 로쟈님의 글을 따로 프린트해서 보관하기도 하는 애독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가끔 로쟈님이 이렇게 자신의 옛글을 정리하실 때 유령 같은 독자의 입장에선 정리하기가 조금 성가시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결벽인지는 모르지만 '초판 글'과 '개정판 글'을 다 함께 챙겨 보관합니다. 정말 맘에 드는 글은 (이미지 버전을 위해) 칼라로 뽑아내기도 하고요. 개인적인 일이지만, 한편으론 로쟈님의 "이중적인 플레이"에 대한 최소한의 화답입니다. 만난 적도 없는데, 자신만을 위한 글을 정리하는 로쟈님의 글을 챙겨 읽을 땐 제게는 로쟈님이 유령 같이 느껴집니다.^^ 꾸벅.

로쟈 2006-05-08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령-독자 한분이 자수하셨군요.^^ 관심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애초에 3조각인가로 나뉘어 올려졌었기 때문에, 한데 모아놓으면 시각적으로도 보기 편하지 않을까 싶네요. 거기에 이미지들도 몇 개 들어가 있으니까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고. 뭐, 핑계를 대자면 그렇습니다. 가끔은 교정과 비판도 해주시길...

로쟈 2006-05-08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교수신문'의 기사를 담뽀뽀님의 서재에서 읽곤 합니다. '러시아문학'이란 리뷰란을 따로 빼놓아도 많은 분들이 제 '출신성분'에 대해서 오해하거나 되묻곤 하시더군요...

여울 2006-05-08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수하게 진보적인 ‘80년대 정신’(=금송아지)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그 정신의 윤곽과 아직 ‘참호’(=언더그라운드) 안에서 전투를 계속하고 있는 소수의 전사(戰士)들, 그리고 대다수 ‘패잔병들’뿐이다. 때문에, “80년대, 그 위엄”을 한편으론 되찾아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런 게 아직 없으므로) 만들어내야 한다.

" 과연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그건, 한가한 질문이다. “누가 승리를 말하는가? 극복이 전부인 것을.”(릴케)이란 시구를 조금 비틀어서 말하자면, “누가 희망을 말하는가? 전진이 전부인 것을.” 묵묵한 전진이" ... 그쵸!!! 좋은 하루 되시구요.

릴케 현상 2006-05-08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라딘에 서재를 만든 계기가 재작년쯤에 네이버에서 '알라딘에 로쟈라는 사람 글이 읽을 게 많다'는 코멘트를 보고 들어와 본 거였더랬는데, 그동안 읽기는 거의 다 읽었더랬는데요^^ 사실 사소한 교정들은 가끔 봐드릴 수 있지만(가끔 눈에 띈다는...) 별로 중요한 건 아닌 듯해서염=3=3=3

로쟈 2006-05-08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로 중요하지 않더라도 알려주십시오. 서재주인장에게만.^^ 제 눈의 티를 못보는 것처럼 자기 글의 오타나 오류도 잘 눈에 띄지 않거든요. 고친다고는 하지만...

yoonta 2006-05-09 0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글 그냥 스킵하려다가 읽었는데 좀 논란의 소지가 있는 글이네요..스탈린식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평가부분에서 님은 김규항씨가 졸렬한 시도라고 평한것을두고 2000만명이라는 큰 희생을 치르고 획득한 정치제도이기 때문에 혹은 2000만명을 희생시키는 행위자체가 졸렬하지 않고 위대한? 업적 혹은 시도라고 보시는 건가요? 당시의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한 레닌주의노선이 당시의 러시아 상황에서 가장 올바른 결론이었다고 보시는건가요?


p.s.끝까지 읽으려는데 어디가 인용글이고 어디가 님의 코멘트인지 넘 헷갈리네요..
-가 문단 맨 앞에 있는 것이 인용글이고..-가 없는 것이 님의 코멘트인가요? 전에는
(*)표시로 구분하신거 같은데 이글에는 그런 구분이 잘 안되어있군요. 번거로우시더라도 (*)표시 혹은 다른 표시로 확실히 구분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로쟈 2006-05-09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문에만 (-)표시가 있습니다(인용문이 많지 않을 때는 굳이 *표를 달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실사회주의'에 관해서, '가장 올바른 결론'과 '가장 현실적인 결론'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역사는 가장 올바른 경로를 선택하지 않습니다(그것이 '현실적'이지 않을 경우엔 더더욱). '현실 사회주의'와는 '다른 사회주의' '진정한 사회주의'를 꿈꾸는 이들에게 갖는 저의 불만은 그러한 상상력이 '현실 자본주의'에 대해서 면죄부를 준다는 데 있습니다(우리는 또 얼마든지 '이상적 자본주의' '도덕적 자본주의'를 꿈꿀 수 있으니까요).

2000천만명 운운은 '대단하다'는 뜻에서입니다. 그러한 '공포정치'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었던 것은 사회계급의 전면적인 교체 덕분이었다고들 얘기합니다. 그 많은 자리는 물론 숙청된 이들이 마련해준 것이며, 적어도 그 희생자들의 수만큼 사회적 신분 이동이 가능했던 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그러니까 모두가 '피해자'는 아닌 겁니다). 저는 그러한 피의 숙청 없이, 어떠한 방식의 계급투쟁이 가능한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본문에서 지적한대로, 소위 진보좌파라는 이들이 나머지 (최소한) 70%의 '반동분자'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하구요. 이에 대한 해명 없이 '가장 올바른'을 늘어놓는 것은 아름다운 소리이기는 하지만, 귀기울여볼 만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yoonta 2006-05-09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는 그런 피의 숙청이 필요할만큼 강제와 폭력이 필요한 혁명이라면 차라리 '일어나지 않는게 좋았던 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만명의 희생을 치러서 얻은 댓가가 과연 무엇이었던가요? 2000만명을 죽인다음 그 위치를 차지할수있었던 노동계급?들의 신분상승이 그 희생만큼의 값어치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서 그렇게 피로서 성립된 현실사회주의가 오늘날까지 잘 작동되었던가요?

물론 "가장 올바른 결론"이 항상 "가장 현실적인 결론"이 되지는 않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당시에 '현실적'이었던 레닌주의,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에 "면죄부"를 준는 것도 마찬가지로 아닙니다..

로쟈 2006-05-09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제와 폭력'이 불필요한 '혁명'에 대해서는 제 상상력이 따라가지 못하겠습니다(더불어, 레닌-스탈린주의적 '과잉'이 혁명을 이끈 것이므로, 사실상 그러한 '과잉'을 제거한다면 말씀대로 혁명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한데, 모두가 좋은 게 좋은 건가요? 노동자도 좋고, 자본가도 좋은? yoonta님의 '가장 올바른 결론'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경청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단, 그것이 윤리적인/추상적인 결론만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yoonta 2006-05-09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야기하는 일반적 의미의 정치적 혁명에는 일정정도의 "강제와 폭력" 수반될수밖에 없죠. 하지만 그것이 꼭 2000만명을 숙청시키는 야만이어야만 했을까요?

레닌이 죽기직전에 그랬다죠. 스탈린은 너무 잔혹한 인물이기 때문에 자신의 후계자가 될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레닌에 의해 성공한 10월혁명은 스탈린에 의한 권력장악과 그의 전횡을 가능하게한 밑바탕을 마련해주었죠. 로쟈님도 잘 아시겠지만 당시의 러시아에서 볼세비키는 사회주의계열 내부에서도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그들에 의한 혁명은 어떻게 보면 혁명이라기보다는 소수에 의한 쿠테타에 가까웠다고 봅니다. 혁명?의 성공후 그들은 수많은 노동자들을 배신했죠.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로 간 것이 아니라 모든 권력은 레닌에게로 갔으니까요..-_- 크론슈타트에서는 레닌에 의한 이러한 권력독점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반혁명적 성격을 인지하고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고요..

10월혁명에 대한 평가는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는 이런 일련의 논의들을 꼼꼼히 점검해보아야 하는 사항이기 때문에 그리 간단히 다루어질만한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가장 올바른 결론"은 아직은 이곳에서 이야기할 상황은 아닌것 같네요. 단 그것이 윤리적이고/추상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만 밝힙니다.

yoonta 2006-05-09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마저 읽었네요..중 후반부도 마찬가지로 논란거리가 많은 내용이군요..

한마디만 코멘트해보면..그렇다면 좌파가 획득해야만 하는 그 "물적토대"란 무엇인가요? 돈인가요? 아니면 정치적 군사적 권력? 만약 그렇다면 이런 것들이야 말로 좌파가 혐오하고 거부해왔던것들 아닌가요? 그런 것들이 아니라면 그들의 물적 토대는 도대체 무엇이죠?

님이 이부분에서 비판하려고 하는 좌파의 문제점 즉 공허한 구호만 남발하고 그 구호의 실천성, 물적토대를 담보하지 못하는 모습들은 여러점에서 비판받을 만한 부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구호의 의의조차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죠. 많은 경우 그들의 구호나 이야기가 공허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도 애초부터 그들에게 (자본주의적)기회가 주지 않는 현실, "(자본주의적)기회가 그들을 경멸하"는 현실때문이니까요. 그들이 필요로하는 "물적토대"는 자본주의적 기회나 물적토대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외부를 지향하는 물적토대이기 때문이고, 기회이기 때문이니까요.

한가지 동의하는 부분은 왜 우리를 경멸하느냐고 투덜대는 것보다는 "금송아지"를 계속해서 묵묵히 만들어내는 일들을 해야한다는 부분입니다. 그런점에서 김규항씨의 이글은 그가 아직도 80년대의 향수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로쟈 2006-05-09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구호의 의의조차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죠. 많은 경우 그들의 구호나 이야기가 공허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도 애초부터 그들에게 (자본주의적)기회가 주지 않는 현실, "(자본주의적)기회가 그들을 경멸하"는 현실때문이니까요. 그들이 필요로하는 "물적토대"는 자본주의적 기회나 물적토대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외부를 지향하는 물적토대이기 때문이고, 기회이기 때문이니까요."로 yoonta님의 생각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략 어떤 입장이신지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이진경주의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혹 차이가 있다면, 나중에 덧붙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자본주의의 외부'에 대한 상상력도 시간이 되시면 나누어주시길. 제 기본적인 생각은 노마디즘 유행에 대한 간략한 코멘트의 형태로 조만간 제시될 것입니다...

yoonta 2006-05-09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저는 이진경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그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제가 "자본주의적 외부"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그런 추측을 하셨나본데 그것은 이진경주의 혹은 노마디즘을 염두에두고 쓴 표현은 아닙니다. 저는 단지 좌파적 상상력이라는 것이 자본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을 목표로 작동되는 것이고 그것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외부'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외부'라는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2006-05-09 2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5-09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필요없는'은 그대로 놔두어도 될 거 같고, 나머지는 모두 수정했습니다. 저보다 꼼꼼하게 읽으시니까 두렵기도 하네요.^^
 

미국의 경제학자 갤브레이스 교수가 어젯밤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1908-2006). 아마도 내일 아침 신문마다 이 저명한 경제학자의 타계 소식을 전할 듯한데, 강의 계획안을 만드는 일을 하다가 잠시 짬을 내어 고인의 부고기사와 사소한 추억 거리를 떠올려본다. 기사는 한겨레와 세계일보의 것이다.

한겨레(06. 04. 30) 부의 분배와 같은 논란적인 주제를 연구해 온 세계적인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29일 밤(현지시각)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의 마운트 오번 병원에서 숨졌다고 <아에프페 통신> 등 외신들이 전했다. 향년 97세.

-1908년 10월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태어난 갤브레이스는 1934년 이후 하버드대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경제학뿐 아니라 경영학·역사학·사회학도 폭넓게 연구했다. <뉴욕타임스>는 “갤브레이스는 복잡하고 재미없는 주제를 학식있는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데 능력을 보임으로써 존경과 질투를 한몸에 받았으며, 때론 장광설로 경멸을 받기도 했다”고 고인을 평가했다. 33권의 저서를 남긴 갤브레이스는 58년 펴낸 <풍요로운 사회>에서 “미국의 경제는 개인의 부를 낳았지만 학교나 고속도로와 같은 공공수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며 성장 위주의 미국 경제정책을 통렬히 비판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해 온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년 동안 미국 정치 무대에서 거물로 통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에서 빌 클린턴에 이르기까지 민주당 대통령의 자문역으로 일하거나 연설문 작성에 관여하는 등 미국 민주당의 방향과 민주당 지도자들의 사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 시절인 61∼63년에는 인도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베트남전 탓에 린든 존슨 대통령과 결국 결별하기는 했지만, 존슨 대통령이 ‘위대한 사회’ 정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크게 기여했다. 정부에서 일한 경험 등을 토대로 <트라이엄프>(1968년) 등 소설 세 편을 쓰기도 했다.

-미국의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이 그를 “경제학자보다 경제학 외부에 더 영향을 끼친 경제학자”라고 표현한 대로, 그의 업적이 과대포장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홍기현 서울대 교수(경제학)는 “그의 제도경제학이 사회적인 비판에 자주 이용됐지만 실제 그의 이론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경제학자는 미국이나 한국에서도 별로 없다”며 “다만 그가 사회적 발언을 많이 했다는 점에서 경제학자로서 높이 살 만하다”고 평가했다.

-홍 교수는 “그의 비판이론의 핵심은 ‘집단간 갈등이 직접적 의사소통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예컨대 자원배분을 왜곡하는 독점도 시민단체·전문가 집단의 비판, 곧 ‘정치적 대항력’을 통해 조절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갤브레이스는 사회에 비판적이었지만, 이런 정치적 대항력을 들어 사회에 대해 비관적이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세계일보(06. 04. 30) '자유주의 경제학자’로 미국에서 널리 알려진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하버드대 명예교수가 지난 29일 향년 97세로 사망했다. UPI통신 등 미 언론에 따르면 갤브레이스 교수 가족은 이날 그가 최근 2주 동안 입원해 있던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소재의 한 병원에서 고령으로 숨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출신 갤브레이스 교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빌 클린턴 행정부까지 오랜 기간 민주당 정권의 경제 자문역으로 활동했으며,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는 인도 주재 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또 1946년과 2000년 각각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자유메달을 수상했고, 미국 경제학회장을 역임했다.

 

-갤브레이스 교수는 온타리오 농대와 토론토대를 다녔으며, 버클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1934년 하버드대에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는 <풍요로운 사회>, <불확실성의 시대>, <대공황> 등의 저서를 통해 자유주의 경제학자로 이름을 알렸으며, 특히 1958년 발간된 <풍요로운 사회>는 미국의 모던라이브러리 출판사가 구성한 도서 평가위원회에서 ‘금세기 영어로 된 논픽션 분야 100대 서적’ 가운데 46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2차대전 이후 각종 사회 문제 해결에 대한 정부 개입을 지지했다. 저서 <풍요로운 사회>에서도 그는 “미국 경제가 개인적 부를 창출하고 있지만 학교와 고속도로 등 공공 수요에는 적절히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 개입을 촉구했다.

-1975년 하버드대 교수에서 은퇴한 그는 자신의 저서와 같은 제목의 영국 TV 시리즈 ‘불확실성의 시대’를 진행해 더욱 명성을 얻었다. 신랄하고 통렬한 풍자로 미국 사회를 비판해온 신장 2m의 거구 갤브레이스 교수는 집필을 위해 버몬트주 산악지역에 있는 별장에서 수개월 동안 칩거하는 등 억척스러운 ‘일벌레’로 알려져 있다.

-1998년에는 소련 경제학자 스타니슬라프 멘슈코프와 <자본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공존:고통스런 과거에서 더 나은 가능성으로>를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공존>(영남대출판부, 1990) 등으로 번역돼 있다).  

내가 대학에 들어왔을 때 가장 유명했던 현역 경제학자가 갤브레이스였고, 가장 유명한 책은 <불확실성의 시대>였다. 그래서 아마 소장하게 된 것이 범우사판 <불확실성의 시대>였을 것이다. 세로읽기여서 다 읽어볼 엄두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내가 산 최초의 경제학 관련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977년의 BBC TV강좌를 토대로 한 만큼 대중적이었던 이 경제사 책은 칼 세이건(1934-1996)의 <코스모스>를 떠올리게 한다(학원사판 <코스모스>를 나는 고등학교 때 사서 읽었다. 내가 산 최초의 천문학 책). 두 사람 다 소위 '최고의 경제학자나'나 '최고의 천문학자'로 남지는 않겠지만, 가장 친근하고 대중적이었던 경제학자와 천문학자로 기억될 듯하다.  

 

 

 

 

<불확실성의 시대> 이후로도 나는 갤브레이스의 책들을 여러 권 더 샀다. 비교적 두껍지 않은 책들이었지만, <만족의 문화>(동아일보사, 1993) 정도를 빼면 완독한 책은 거의 없다(폴 크루그먼의 책들도 그런 식이다). 그래도 나는 갤브레이스가 '기본'이라고 생각해왔다(이른바 '각인' 행동이란 것. 정신의 '성장기'에 영향을 준 저자나 책들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더불어 '비판적 거리'를 갖지 못한다).

이번에 부음을 듣고 갤브레이스의 책들을 검색해보다가 다소 놀라고 실망했는데, 그토록 많이 번역되었건만 제대로 남아있는 책이 한두 권밖에 없었다! 미국 현지사정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국내에서는 '잊혀질 경제학자'에 속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우리는 '불확실성'이 제거된 시대에 살고 있는가? 하긴 우리 사회는 '위험사회'요, 우리 시대는 '확실한' 테러리즘의 시대, 제국주의의 시대이다!).

비록 그의 업적이 '과대 포장'된 점이 없지 않다고 하나 젊은 날의 '영웅들'을 하나둘 잃어간다는 건 쓸쓸한 일이다. 우리는 아마도, 앞으로 궁극적으로는 '풍요로운 사회'의 '만족의 문화'를 지향하게 될 터인데(그게 대한민국의 꿈인가?), 갤브레이스의 충고쯤은 기억해둠 직하지 않을까? 고인의 명복을 빈다.

06.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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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oli 2006-04-30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확성실의 시대를 재밌게 읽었는데, 참 안타깝네요.
거인의 죽음을 직접 목도하는 데 은근한 기쁨도 있긴 하지만요.^^

로쟈 2006-04-30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근한 기쁨'의 이면은 이제 '우리'도 나이를 좀 먹었다는 '슬픔'이죠...

maritime 2006-09-05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다큐를 보니 빈국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정책를 꼬집는 고령의 갤브레이스가 나오더군요. 지식인이 걸어가야할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6-09-05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정도 '양심'도 드문 시대인 거 같습니다...
 

강의준비를 위해 지난 학기 강의자료들을 정리하다가 프린트아웃 해놓은 모스크바 통신문 하나를 읽었다. 2005년 1월 17일에 모스크바에서 씌어진 것인데, 귀국을 2주 가량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거의 막바지 통신문이었고, 분량으로 보아 5-6시간은 족히 걸렸을 법하다. 최근에 교수신문에서 '우리 학문과 철학'이란 기고문을 옮겨놓은 바 있는데, 그와 관련한 '나의 의견'으로 참조가 될 만하겠기에 정리해서 '창고'로 옮겨놓는다(다시 읽으면서 '철학적 농담'이라면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초월적 비평과 치과적 진료'라는 이전 통신문의 '보유'로 씌어진 것이지만, 여기서는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로 제목을 고쳐달도록 하겠다. 내가 보유하고자(보태어 채워넣고자) 했던 문단(=구멍)을 밝히고 있는 대목에서부터 시작해보자(아래는 모스크바 대학 건물의 일부).

 

짐작에 주로 ‘구멍’에 해당한 건 다음의 한 단락이다: “한편,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에 대한 참조 없이 철학적 로고스만으로도 철학은 구성될 수 있다(주로 수학/논리학에서 바탕을 마련하고 있는 후설의 현상학이나 초기 분석철학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하지만,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를 끊임없이 참조함으로써 자극과 영감을 얻는 철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들뢰즈, 데리다, 후기 하이데거 등을 단번에 꼽을 수 있으며, 사르트르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와 탈무드로부터 근원적인 영감을 얻고 있는 레비나스의 윤리학까지).” 이와 비교할 때 다른 구멍들은 부차적/부수적이거나 사소한 듯하며, 나는 이 문단에 대해서만 주로 군말을 채워넣기로 하겠다.

이 문단에서 나는 로고스에 대한 모종의 유형학을 제시하고 있는데(‘로고스’는 이성, 논리, 언어를 포괄하는 말로 사용하겠다), 나열된 걸로만 따지자면 로고스에는 철학적 로고스도 있고, 소설적/시적 로고스도 있다(다른 문단에서 ‘과학적 로고스’도 언급했지만, 여기선 생략한다). 그리고 그러한 전제하에서라면, 소설적/시적 로고스(‘문학적 로고스’라고 통칭하겠다)의 포함 유무에 따라 (내가 보기엔) 철학의 두 가지 유형이 가능하다. (1)철학=철학적 로고스, (2)철학=철학적 로고스+문학적 로고스. 그러니까, 인용한 문단은 그러한 유형학을 풀어서 얘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첫번째 유형의 사례로 후설의 현상학과 초기 분석철학(전기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을 들었고, 두번째 유형의 사례로 들뢰즈, 데리다, 후기 하이데거, 레비나스 등을 들었다(흔히 ‘철학의 미학화’라고 비판받기도 하는 유형이다).

나는 이 두 유형 사이에 어떤 우열을 가정하지 않았다. 내가 주장한 건 이 두 가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건 반대로 문학의 경우에도 두 가지 유형이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1)문학=문학적 로고스, (2)문학=문학적 로고스+철학적 로고스. 문학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를 모두 구성인자로 갖고 있음에도, 어떤 경우엔 철학이 되고 어떤 경우엔 문학이 되는가란 질문이 가능한데, 나는 각각의 경우에 (야콥슨의 용어를 쓰자면) ‘지배소(dominant)’가 다른 거라고 답하겠다(쉽게 말하면, 방점이 다른 것). 해서, ‘문학적인 철학’(실존주의가 대표적이다)이 있는 반면에, ‘철학적인 시/소설’(릴케나 퐁주의 시, 혹은 투르니에나 아이리스 머독의 소설을 예로 들 수 있을까)도 있는 것이다.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를 양 극점으로 놓는다면, 철학과 문학의 이 네 가지 유형은 스펙트럼화될 수 있다.

<철학적 로고스 – 철학적/문학적 로고스 – 문학적/철학적 로고스 – 문학적 로고스>

이러한 스펙트럼이 갖는 장점은 철학과 문학의 관계를 (단선적으로가 아니라) ‘중층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즉 철학이냐 문학이냐라는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 더불어, 너무 철학적이라거나 문학적이라는 이유로 각각의 ‘동네’에서 배제되는 ‘경계적’ 작가/철학자들을 이러한 구도에서는 정당하게 고려할 수 있다(가령, 니체의 경우).

흔히 이성이나 논리와 동일시되는 로고스를 언어적 차원에서 재규정할 경우에, 스펙트럼의 양 극단에 놓이는 것은 ‘기의-논리의 극대화’와 ‘기표-논리의 극대화’이다. 기의-논리가 극대화된 지점에서 우리는 자연어에서 기표성을 배제한, 아니 자연어 자체를 배제한 기호논리학의 세계를 만나게 되며(‘자연어’란 한국어, 영어, 일어 같은 개별 언어를 말한다), 기표-논리가 극대화된 지점에서 우리는 자언어의 기의성을 최대한 배제한 (기표의) 순수유희를 만나게 된다(가령 칼리그람이나 철자시). 전자는 세탁기처럼 기표의 때를 계속 세탁해대며(그렇게 해서 언어를 ‘흰 빨래’처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내가 이해하는 ‘백색의 신화’이다), 후자는 단어에 폭탄을(아니면 쓰레기통이라도) 갖다 퍼부음으로써, 기의를 증발시키거나 해체시킨다.

즉, 극단적으로는 철학적 로고스가 자연어를 인공어화 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면 문학적 로고스는 자연어를 자움어(러시아 미래파의 표현을 빌자면 ‘새의 언어’)화 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자움'은 '초이성'이란 뜻이다). 가령,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란 동요에서 리듬을 만들기 위해 들어간 “나리 나리”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기에 철학적 로고스의 관점에선 불필요한 ‘잉여’이지만, 문학적 로고스의 관점에선 오히려 필수적인/본질적인 ‘요소’이다. 더불어 지난 통신문의 제목을 만들어준, 나보코프의 칼람부르 ‘dental and transcendental’은 철학적 로고스가 보기엔 불쾌한 넌센스에 불과하겠지만, 문학적 로고스가 보기엔 유희적 ‘통찰’을 담고 있다. 거기에서 암시되는 바이지만, 언어의 유형학 또한 하나의 스펙트럼을 구성한다. 그건 아래와 같다.

<인공어(=기호) - 자연어 - 시어 - 자움어(=새의 언어)>

‘2차 모델화 체계’(유리 로트만)로서의 문학어는 자연어를 재모델화, 재코드화한 것이다. 그러한 재모델화/재코드화의 방식은 다양해서, 장르나 문체, 기법 등을 포괄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슈클로프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문학)이란 기법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로트만에 따르면, 이 기법에는 또 플러스(+) 기법과 마이너스(-) 기법이 있다. 문학이론도 깊이 들어가자면 나름대로 복잡한데, 여기선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조금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문학이란 자연어를 낯설게 사용한 것이다(해서, 지각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오브제를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함으로써 미적 효과를 창출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공통적인 건 어떤 형태(form)에 대해서 사고한다는 점이고, 그런 점에서, 문학은 조형예술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미국의 신비평가들은 시를 ‘잘 빚어진 항아리’에 비유했다).

문학적 로고스는 기본적으로 언어의 조형화, 혹은 조형적 언어를 통해서 의미를 산출한다(야콥슨을 따라서 좀 어렵게 말하자면, 그것은 통합체적인 언어를 계열축에 따라 투사한다). 즉, 문학은 어떤 조형적 입체이며, 거기서 중요한 건 볼륨이다. 언어는 문학적 로고스 안에서 자신의 풍만함을 자랑한다(철학에 코기토가 있다면 문학에는 코르셋이 있다).

반면에 철학적 사유의 근간은, 그것이 형식논리(아리스토텔레스)이건 변증법적 논리(헤겔)이건 간에 논리에 있으며(해서 ‘논증’은 철학적 로고스의 가장 중요한 구성소이다. 논리는 철학의 정신을 구성하는 ‘뼈다귀’이다), 논리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order)이다(문학의 언어가 주로 분칠하고 치장하는 언어라면, 철학의 언어는 명령하고 주문/요청하는 언어이다). 똑 같은 언표들이라도 배치순서가 바뀌면 (문학에서는 새로운 의미가 창출되지만) 철학적 논리는 한순간에 비논리 혹은 모순으로 전락한다(예컨대 3단논법의 논항들을 뒤섞어보라). 그러한 논리가 지향하는 것은 모순의 배제 혹은 지양이다. 의미론적 차원에서 논리적 모순의 등가물은 넌센스(무의미)이다. 때문에, 어떤 철학적 논증/저작에 대해 ‘넌센스’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 된다(가령, “그게 말이 되냐?”) 반면에 문학에서의 ‘넌센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기법이자 전략이며, 장르, 더 나아가 사조를 이루기도 한다.

철학적 논리를 구성함에 있어서 순서가 중요하다고 하면, 철학적 담론의 구성인자가 되는 언어에 대해서 엄격한 훈령이 하달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른바 ‘동작 그만!’이 요구되는 것이다. 해서, 풍만한 문학이 ‘언어의 카니발’을 떠올리게 한다면, 강파른 철학은 ‘사유의 학교’(야스퍼스)를 넘어서 ‘사유의 군대’이기도 하다(우리가 학교 졸업하면 군대 가듯이). 그리하여 좋은 문학이 우리를 도취시키는 문학이라면, 좋은 철학은 우리에게 어떠한 빈틈도 내보이지 않는 깐깐한 철학이다(칸트에게, 헤겔에게, 스피노자에게 빈틈이 있던가?). 이러한 철학이 요구하는 언어는 당연히 바지춤 추스르기에도 바쁜 어영부영하는 자연어가 아니라 깍두기 머리에 자세 제대로 나오는 보편어 혹은 인공어이다(JSA 출신인 한 후배는 요새도 자세가 나온다).

 

알다시피, 철학사에서 그러한 보편어의 역할을 해온 것이 중세와 근세의 라틴어였고, 요즘은 영어이다(아마도 독어가 넘버2 정도이고). 해서, 적어도 국제적인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니 하다 못해 철학 전공이라고 명함이라도 내밀기 위해서는 영어로 책이나 논문을 써야 하는 것(한국어로 논문을 쓴 철학박사들? 그들도 최소한 번역투의 문장으로 논문을 써야 한다. 영어나 독어에서 바로 번역한 듯한 논문. 즉, “이게 원래는 한국어 논문(수준)이 아닙니다”는 걸 보여주고 암시하는 논문 말이다). 이때 영어는 일개 자연어가 아니라 특별한 자연어, 즉 보편어로서의 위상을 점유한다(미국이 일개 국민/민족국가 레벨을 넘어서듯이). 그러니 다들 철학은 주로 미국에서(혹은 독일에서) 공부하는 것이며(러시아 철학 전공자는 내가 아는 한 한 명도 없다), 철학을 말할 때는 영어나 독어를 반드시 병기해야 하는 것이다(한국어라는 자연어는 철학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 미국철학회 회장까지 역임한 재미철학자 김재권의 경우, 미국의 철학과 대학원생들에게 철학논문 문장의 모범으로 제시될 정도로 탁월한 영어를 구사하는데, 대학생 때 미정부 장학생으로 유학을 떠난 그가 한국어를 거의 망실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한국어라는 자연어가 그의 ‘보편적’ 사고에 거의 ‘간섭’을 하지 않는 것). 나는 대학 1학년때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심재룡 편)이란 책을 읽었었는데, 거기에 수록된 글에서 김재권이 강조한 것은 한국에서 철학하는 ‘보편적’ 자세였다. 즉, 철학함에 있어서 국적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 그 국적이란 건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언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철학함에 있어서 자연어의 구속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 왜냐? 철학의 문제들이란 보편적이기 때문에(하지만, 그에게 자연어인 영어는 동시에 보편어이기도 하다는 걸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분석철학 계통의 심리철학 권위자인 김재권의 ‘보편적 문제’란 심신문제, 즉 ‘mind-body problem’이다. 주로, 마인드(=심리현상)와 바디(=물리현상) 간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 형식논리상으로 기본적인 입장은 둘로 나뉜다. 관념론(마인드는 바디와는 별개로 ‘실재’한다)과 유물론(마인드는 부재하거나 바디에 수반되는 현상이다). 물론 각각의 입장은 다시 세분되며(가령, 유물론은 환원적 유물론과 비환원적 유물론으로 나뉠 수 있다) 김재권은 자신이 제창한 ‘수반이론’으로 유명한데, 분류하자면 ‘환원적 유물론’에 속한다(내가 이해한 대로 얘기하자면, 기본적으로 심리현상은 물리현상으로 환원가능하며, 물리현상에 수반되는 현상이라는 것).

나는 그의 주장에 많은 부분 동의하지만, 그 동의는 ‘심신문제’라는 (임의적인) 문제틀을 고수하는 한에서이다. 그 문제틀의 임의성에 대해서는 언젠가 김재권의 내한 강연을 언급하면서 김용옥이 지적한 것인데(아마도 무슨 TV강연에서였다), 가령 기(氣)철학적 세계관 혹은 논리에 선다면, 마인드와 바디라는 별개의 ‘실체’는 인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마인드가 바디에 수반된다든가 하는 논리도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된다(우리말의 ‘몸’/‘맘=마음’ 또한 마인드/바디와는 다른 ‘논리’를 갖고 있다). 김재권은 심신문제의 보편성을 주장하지만, 그의 수반이론이 진지하게 수용/검토되는 것은 (제도적으로) 영미권의 분석철학계 내에서일 뿐이다(혹은 그러한 문제틀이 ‘이식된’ 한국 대학의 철학과도 포함될는지 모른다).



물론 수반이론은 대단히 ‘논리적인’ 이론이며, (비판도 허용하지만) 설득력 있는 이론이다. 하지만, 이론의 논리성이 반드시 문제틀의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그건 나름대로 재미있는 ‘미식 축구’가 ‘재미의 보편성’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 수반이론을 말하고 김재권을 대단한 철학자로 추켜세우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이론이 보편적이거나 최고의 심신이론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한국인, 적어도 한국계 철학자이기 때문이다(비록 그가 한국어를 거의 잊었다고 하더라도).

김재권이 분석철학계의 가장 저명한 한국인 철학자라면 현상학계에서 대가급으로 인정받는 한국인 철학자는 역시 미국과 독일에서 활동하는 조가경이다(훨씬 아래 세대로는 분석철학의 이승종, 현상학의 이남인 정도가 유명한 듯하데, 공통적인 건 영어/독어로 책을 썼다는 것). 그의 초기 주저가 한국어로 쓴 <실존철학>인데, 이후에 외국으로 떠난 그가 독어, 혹은 영어로 써서 명성을 얻은 책들은 내 기억에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20세기 전반기 서구철학의 가장 대표적인 두 조류가 현상학과 분석철학이라고 할 때, 두 한국인 철학자가 관련학계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물론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둘 것은 두 사람이 ‘한국인’ 철학자일 뿐이며, 자연어로서의 ‘한국어’가 걸려있는 ‘한국철학’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그건 ‘한국인 문학’이 ‘한국문학’과 별개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두 사람은 한국어 철학, 즉 자연어 철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인데, 사실 그러한 문제의식의 결여/부재는 현상학과 분석철학의 철학적 입장/강령에 기본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결여/부재가 새겨져 있다?).

 

20세기 서구철학을 흔히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로 특징지을 때(한때 분석철학계의 기린아였던 리처드 로티는 <언어적 전회>란 책을 편집하기도 했다), 그것이 주목한 것은 사유와 언어의 관계, 보다 구체적으로는 사유에 있어서 언어의 매개성이었다. 아주 당연한 듯하지만, 우리는 ‘언어’로 사유한다는 것. 즉, 사유의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이 ‘언어적 전회’의 일차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이때의 언어란 바로 ‘자연어’로서, 그리고 ‘일상어’로서의 개별 국어이며, ‘언어적 전회’는 이 자연어/일상어의 ‘존재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태는 정반대로 간다.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의 이면은 이러한 자연어/일상어의 ‘병리성’에 대한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사유는 자연어로 이루어지는바, 철학적 사유가 오류를 범하는 주된 이유가 그 자연어의 병리성(=결함)에 있는 게 아닌가 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비유컨대, 철학적 작전이 매번 실패하는 원인이 ‘병력 자원’의 부실에 있다는 걸 사단장-철학이 알게 된 것. 이후에 대대적인 군기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건 아주 당연하다(아예 “적은 우리 안에 있다!”고 선언하면서).

 

 

 

 

철학의 과제가 ‘언어비판’, 더 나아가 ‘언어치료’에 있다고 하는 주장은 이러한 사정을 잘 요약한다(주객이 전도된 것이지만, 분석철학은 전투의 승리가 아니라 사병-언어의 닦달에 더 관심을 두게 된다. 맥아더-비트겐슈타인은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해소’일 뿐”이라는 어록까지 남기며 철학계에서 잠시 사라지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다시 등장하는 것이 기호로서의 인공어이다. 철학논문은 가급적 기호논리와 명제함수, 수식 등으로 가득 채우고, 자연어는 가급적 배제할 것(비유컨대, 이러한 인공어들이 ‘특전사’라면, 자연어는 ‘방위병’이었다). 철학은 점점 소수정예화하며, 자신들의 은어만으로 소통하게 된다.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방위병-자연어의 애환이 무시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한편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이 직면했던 문제는 영미의 분석철학과는 다소 달랐다. 한전숙의 <현상학>(민음사)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어릴 적에 후설은 무슨 공이 같은 걸 죽창 갈아서 송곳을 만드는 일에 몰입했다. 이런 케이스를 의대생들은 흔히 ‘옵세(obsessed)’라고 부르는데, 저자는 후설의 ‘라디칼리즈무스’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든다. 중도적인 입장에서 내가 현상학을 정의하자면, 그건 ‘Obsessed Radicalism’쯤 되겠다(‘강박적 급진주의’ 혹은 ‘강박적 근본주의’?). 왜 근본적/급진적이냐면,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을 다시 정초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로티의 분류에 따르면, 현상학 또한 정초주의적 철학에 속한다. 정초주의적 철학들이 목을 매는 것은 철학의 확실한 토대, 곧 ‘확실성’이다. 어떠한 ‘지진’과 ‘해일’로부터도 자유로운. 혹은 그럴 거라고 착각하는).

자세한 내막을 알지는 못하지만(주저인 <논리연구>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그러니, 현상학에 대해서 한마디 하려면 그 방대한 저작을 영어나 독어로 읽으라는 것. 나는 <현상학> 입문서나 <현상학적 운동> 같은 책을 참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러시아어로는 후설이 제법 번역돼 있다), 후설은 수학적 대상들이 논리적인 것이냐(=논리주의) 심리적인 것이냐(=심리학주의)는 논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제3의 것이라는 걸 입증하고자 했는데, 주로 그의 문제의식은 당시에 대두하던 심리학으로부터 철학 고유의 영역을 발견/보존하는 것이었다(당시 늙은 철학은 학문계의 새로운 강자인 심리학과 ‘의식’이란 방을 같이 쓰게 됐으므로 자기-갱신이 요구됐던 것. 철학의 회춘).

상식적인 얘기를 좀 늘어놓자면, 그렇게 해서 그가 발견한 것이 ‘지향적 의식작용’(=노에시스)과 ‘지향적 대상’(=노에마)이다. 지향적 의식이란 건 특정 개인의 심리상태나 의식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초월적 의식’이고(<논리연구>와 거의 동시에 나온 책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인데, 현상학은 철저하게 ‘의식철학’이라는 점에서 ‘무의식의 과학’인 정신분석학과 대비된다. 현상학적 입장에서 프로이트를 수용한 것이 사르트르의 실존적 정신분석이다. 그는 무의식을 ‘자기기만’이자 ‘넌센스’로 간주했다), 지향적 대상은 그러한 의식에 현상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실제 대상을 넘어서는 ‘초월적 대상’이다.



어떤 개별적 의식이 어떻게 초월적 의식이 되는가? 그건 옵세적 ‘집중’을 통해서이다. 공이를 갈아서 송곳을 만들듯이 한 가지 일에 집중하다 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텅빈 상태가 된다. 멍청하게 되는 거지만, 좋게 얘기하면 사심(私心)으로부터 자유로운 ‘맑은 연못’처럼 된다(현상학과는 좀 다른 방식이지만, 롤즈의 <정의론> 또한 그런 식의 ‘맑은 연못’, 혹은 백지상태로의 환원을 상정한다. 정의의 조건으로서). 그 ‘맑은 연못’이 초월적 의식이다. 그건 개별적인 의식과 무관하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의 상관물로서 연못에 비치는 것이 초월적 대상이다. 이제 그렇게 비친 것이 대상의 본질이며 그것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 그게 현상학적 기술이다.

대학 1학년 첫학기에 들은 종교학 강의에서 ‘종교현상학’에 정통하던 담당교수는 현상학의 예로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篇 意自現)”이란 한문 구절을 들었다. 책을 백번(백편?) 읽으면, 뜻이 저절로 나타난다는 것(현상학적 연애술? 백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책을 백번 읽는 게 말하자면 ‘송곳 갈기’이고, 지향적 의식작용이다. 그러면, 먹물 뿌려놓은 글자들(=실제 대상)에서 ‘뜻’이라는 지향적 대상이 우리의 머리속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옳거니, 그거로군!”).

사실 여기까지는 방법론상으로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그러한 지향적 대상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 무엇으로? 자연어로! 후설의 철학적 작전은 나무랄 데 없지만(제갈공명 뺨 치지만), 작전을 실행할 병사들(=방위병들!)을 그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비유컨대, 분석철학은 훈련만 뭐빠지게 하고, 현상학은 작전만 아주 열심히 세운다. 해서 분석철학엔 작전이 부재하고, 현상학은 병사들이 부실하다). 그의 관심은 주로 언어보다는 의식이며, 언어 이전의 경험에 집중돼 있는 것이다(이것이 내가 후설이 ‘언어적 전회’ 이전의 철학자라고 보는 이유이다).

 

 

 



지난번 통신문에서 사르트르의 <구토> 얘기를 잠깐 했지만, 이 소설은 셀린느의 소설 외에도 후설의 현상학이 없었더라면 씌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1933년(28세) 베를린에 있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불어를 가르치면서 1년간 체재하는데(레이몽 아롱이 부추겼다던가?), 거기서 후설의 현상학을 접하고 폭 빠지게 된다. 아마도 후설을 오래 사숙했더라면, 후배인 메를로-퐁티처럼 ‘정통’ 현상학자가 됐을지도 모르지만(메를로-퐁티는 벨기에의 루뱅에 있는 후설-아카이브에서 후기 후설의 원고들을 직접 열람하고 <지각의 현상학>을 구상한다), 사르트르는 살짝 현상학의 맛만 보고 돌아오기 때문에(혹은 폼만 잡고 돌아오기 때문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현상학을 전개하게 된다. 그게 <상상력>과 <존재와 무> 등의 저작으로 출현하게 되고.

이 사르트르(혹은 로캉탱)의 지향적 대상은 주로 잉크병이나 물컵 종류이다. <구토>는 시작에서부터 현상학적 집중/환원을 시연(試演)해 보이는바, “예를 들어 여기에 나의 잉크병이 든 종이 상자가 있다고 하자. 내가 ‘전에’는 그것을 어떻게 보았으며 지금은 그것을 어떻게… 그런데 그것은 직육면체요 테이블 위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런 것이라면 아무 할말이 없다. 바로 그런 일을 피해야만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신기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구토>, 하서, 5-6쪽)

로캉탱의 말을 빌어오자면, 현상학은 현상학적 환원이란 절차를 통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신기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다. 그것은 잉크병 하나, 맥주병 하나에 대해서도 책 한권 분량을 써낼 만한 ‘꺼리’들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현상학이 아니라면 <존재와 무>는 분량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상학이 그런 꺼리를 제공해주지 못하는 구석이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역사’이다(‘역사현상학’이라고 최근에 좀 개척되는 듯도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는 지향적 대상으로 삼기에는 너무 덩치가 크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시간 경험이나 지각 경험 따위는 자신의 직접적인(내밀한) 경험의 대상으로서 ‘현상학적 환원’이 가능하다(후설이나 하이데거나 다 ‘시간’만을 존재의 중요한 범주로서 다루었다. 그건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를 어떻게 환원하는가? 역사는 어디에 있는가? 더불어, 현상학은 현실의 긴급성에 대응하지 못한다. 송곳이 될 때까지 갈아야 하고, 뭐가 나타날 때까지 백번을 보거나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라크 폭격 장면을 백번쯤 반복해서 보면 혹 모르겠다, ‘미 제국주의’라는 뜻이 노에마로서 현상하는지도...

 

나는 앞에서 언어적 전회의 내용이 사유의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이면서 동시에 (철학어로서) 자연어의 자격미달(=병리성)에 대한 인식이었다고 했는데, 그럴 경우 그에 대한 방책으로서 두 가지 방향성이 주어진다. 왼쪽으로도 갈 수도, 오른쪽으로 갈 수도 있는 것. 비유컨대, 방위병-자연어/일상어에게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다. 특전사-인공어로의 길과 당번병-시어로의 길(특전사와 ‘특권층’인 당번병은 무시당하지 않는다).

<인공어 ← 자연어 → 시어>

(1)<자연어→인공어>라는 방향은 이미 라이프니츠가 주장한바 있는데, <논리-철학논고>의 비트겐슈타인이나 비엔나학파(논리실증주의)의 철학자들이 선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의 언어(=일상어)에 오염되지 않은 언어로 통해서 ‘건강한’ 사유가 구축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수축주의적 방향은 언어-의존성이란 문제를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것이다(반면에 현상학은 언어-의존성이란 문제를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인간이 너무 잡다한 종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성찰을 아바타나 사이버 모델에 의존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2)<자연어→시어>라는 방향은 후설의 수제자였지만, 현상학에서 존재론으로 ‘전향’함으로써 후설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하이데거에서 사례를 찾을 수 있다(‘우리말로 철학하기’에 나선 이기상 교수가 하이데거 전공자인 것은 자연스럽다). 어차피 사유가 언어-의존적이라면, 최상의 언어, 최고의 언어를 사유의 질료로 삼아야 한다는 건 자연스러운 요구이다. 그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할 때, 그 언어는 ‘일요일의 언어’인 시어인 것이다. 은유적인 언어가 개념어보다도 더 탁월한 사유의 질료라는 걸 입증해 보인 니체의 경우도 이러한 계보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문학적 대상의 이념성’이라는 후설적 주제의 박사학위논문을 구상했지만(‘철학자 데리다’에 대한 정치한 분석서를 쓴 로돌프 가셰는 데리다에게 가장 중요한 철학자가 후설이라고 말했다), 끝내 완결짓지 못하고 그라마톨로지와 차연의 세계로 넘어가게 되는 데리다의경우도 하이데거와 유사한 ‘전향’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데리다 전문가로서 김상환 교수가 가장 유려한 문체를 자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데리다 전문가가 글을 못쓴다는 건 넌센스이다). 지향성이나 이념성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언어인 것이다(사실 언어와 철학이란 문제는 훨씬 방대한 규모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이런 정도의 글은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 나는 이 문제와 정면대결할 기회가 오기를 기대한다. 방위병들을 데리고?).

대략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서두에서 ‘구멍’으로 제시한 문단을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한편,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에 대한 참조 없이 철학적 로고스만으로도 철학은 구성될 수 있다(주로 수학/논리학에서 바탕을 마련하고 있는 후설의 현상학이나 초기 분석철학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일단 나의 방점은 철학적 로고스만으로도 철학이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며, 괄호안의 내용은 그 사례이다.

 

 

 

 

러셀은 자신의 <서양철학사>에서 서양철학자들을 신학적 계보와 수학적 계보로 구분한바 있다. 그에 따를 때, 후설이나 비트겐슈타인 등은 모두 수학적 계보에 속한다. 나는 후설의 현상학이 수학/논리학에서 바탕을 마련하고 있다는 지적이 어떤 근거에서 무리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가 현상학적 환원의 사례로 자주 드는 것도 삼각형 같은 것인데 말이다(어떠한 변양에도 동일성이 유지되는 이상형/이념형으로서의 삼각형이 삼각형의 노에마이다). 사실, 후설에 대한 관심은 일차적 관심이 아니라, 하이데거나 데리다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이차적 관심이다. 내가 직접적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철학자에 대해서 여러 말을 늘어놓지 않겠다(그런 후설이 내게 지향적 대상으로 현상할 리도 만무하고).

그리고 이어서, “하지만,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를 끊임없이 참조함으로써 자극과 영감을 얻는 철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들뢰즈, 데리다, 후기 하이데거 등을 단번에 꼽을 수 있으며, 사르트르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와 탈무드로부터 근원적인 영감을 얻고 있는 레비나스의 윤리학까지).” 이제껏 해명해 온 것이니 여기서도 이해하기에 억지스러운 대목은 없어 보인다(에스토니아 태생의 레비나스는 어린시절 읽은 러시아 문학에 깊은 감화를 받았음을 고백한다).

나는 두 가지 유형의 철학에서 어떤 우열을 가정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두번째 유형, 즉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의 교합으로 이루어진 철학(그건 문학이어도 무방하다)에 애착을 갖고 있다(나는 이미 지난번 통신문의 말미에서 갈채와 꽃다발을 던진바 있다). 때문에, 사르트르와 데리다가 나의 ‘영웅’이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나는 로고스의 마임극을 사랑하는 것이다… 

 

 

 

 
P.S. 짧게 마감하려고 했던 글이 본의 아니게 또 (예상보다) 길어졌다. 좀 딱딱한 글이었던 것 같아서 시 한편을 옮겨둔다. 오규원의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이다(언젠가 한번 인용한 적이 있다). 아마도 ‘한국현대시와 현상학’이란 테마의 평문을 쓴다면, 내 생각에 오규원은 가장 먼저 거론돼야 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다만, 그의 주된 관심은 의식과 대상이 아니라 현상과 언어이다). 그는 사르트르가 잉크병을 바라보듯이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를 바라본다. 아마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으리라. 세보고 또 세보았으리라. 그리고 그걸 기술한다. 정확하게 있는 것들만. 정확하게 반짝이는 것들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들, 하지만, 없지 않고 차라리 있는 것들이 때로 정겹고 그냥 아름답다. 비록 깨어져 있더라도.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플라타너스가 쉰일곱 그루, 빌딩의 창문이 칠백열아홉, 여관이 넷, 여인숙이 둘, 햇빛에는 모두 반짝입니다.

대방동의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양념통닭집이 다섯, 호프집이 넷, 왕족발집이 셋, 개소주집이 둘, 레스토랑이 셋, 카페가 넷, 자동판매기가 넷, 복권 판매소가 한 군데 있습니다. 마땅히 보신탕집이 둘 있습니다. 비가 오면 모두 비에 젖습니다. 산부인과가 둘, 치과가 셋, 이발소가 넷, 미장원이 여섯, 모두 선팅을 해 비가 와도 반짝입니다.

빨간 우체통이 둘, 학교 담장 밑에 버려진 자전거가 한 대, 동작구 소속 노란 소형 청소차가 둘, 영화 포스터가 불법으로 부착된 벽이 셋, 비디오 가게가 여섯, 골목에 숨어 잘 보이지 않는 전당포 안내 표지판과 장의사 하나, 보도 블록 위에 방치된 하수도 공사용 대형 원통 시멘트관 쉰여섯이 눈을 뜨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표 가변 차선 표시등 하나도!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한 줄에 아홉 개씩 마름모꼴로 놓인 보도 블록이 구천오백네 개, 그 가운데 깨어진 것이 하나, 둘…… 여섯…… 열다섯…… 스물아홉…… 마흔둘……

 

P.S.2. 이 ‘깨어져 있음’에 대한 관심이 내게 빈틈없는 철학적 로고스보다는 문학적 로고스에 끌리도록 만든다(‘빈틈없는 것들’이 철학적 로고스에 끌린다면, ‘깨어진 것들’은 문학적 로고스에서 안식을 찾는다). 우리는 거기에 그렇게 깨어져 있는 것들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 즉 ‘거기에 있음(being-there)’을 비틀어서 말하자면, 우리는 ‘거기에 깨어져 있음(being-broken-there)’이다. 그렇게 ‘널브러져 있음(being-scattered-there)’이다. 그렇게 ‘찌그러져 있음(being-battered-there)’이다. ‘모어-베터-블루스(More better blues)’를 들으며(이 ‘blues’에 군복이란 뜻도 있다는 건 아이러니이다)... 그렇게 (얼룩덜룩) ‘희미해져 있음(being-blured-there)’이다. 그렇게 ‘어색해져 있음(being-awkward-there)’이다.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긴 싫었어…”를 흥얼거리며, 신병반(awakward squard)으로 들어갔었지… 몇 달이 지나고 나는 당번병 방에서 <자기 앞의 생>을 읽었지. 거기서 제대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기다리고 있음(being-waiting-there)’. 그리고 또 몇 달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고 나는 출근하는 대신에 시립도서관에 가서 <농담>을 빌려와 읽었지. 그리고는 이렇게 물어보았어. “O my life, o my God, you have to be joking?!” 그러더니 쩝쩝, 아직도 이런 농담을 쓰고 있네, 젠장...

06. 0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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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4-26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님 철학의 어떤 분야 강의하세요? 궁금궁금.

로쟈 2006-04-26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문학강의 하는데요(--;)...

마늘빵 2006-04-26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로쟈님 철학 전공 아니셨나요? 아 러시아 문학이세요? 엄... 온갖 철학자들을 다 다루셔서 철학전공하신줄 알았어요.

로쟈 2006-04-26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적 농담'이 부전공입니다...

마늘빵 2006-04-26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대단하신 내공이십니다.

로쟈 2006-04-26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담에도 내공이 필요하긴 합니다. 거울 보면서 매일 연습합니다.^^

2006-04-27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육체쇼와 전집 2021-09-29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시다는 말밖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