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여름에 한 카페에 올려놓았던 글을 다시 옮겨놓는다. 종교에 관한 토론/논쟁에 부득이하게 끼어들어 한 마디 거들었던 글인 듯하다. 다시 읽어보면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무엇이 변하고 안 변하고 하는지를 알겠다.

저는 굳이 밝히자면, 무신론자이고, 범신론자입니다. 저에겐 무신론과 범신론의 차이가 잘 구별되지 않기에 그냥 막연하게 그렇게 분류하기로 하지요. 하긴 유신론이나 무신론이냐 하는 것이 대개는 기독교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판단 혹은 태도에 따른 것이어서, 그러한 사유 전통이나 범주의 바깥에서 바라볼 경우,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해야겠죠.

그리고 사실, 러시아의 무신론이란 것도 19세기에는 일종의 신앙이었기에, '무신론'에 말에 대한 '체감' 또한 저마다 다를 거라는 점도 인정해야겠구요. 하여간에 신의 존재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자연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길게 논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또 제가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유대교적 전통이나 부정신학에서의 신은 똑같은 기독교적 신이라 하더라도 양상이 좀 다르다는 건 말씀드리고 싶어요. 요는 우리가 신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것. 왜냐면, 우리는 무능력하고 어리석으며 모자라니까. 조금 만용을 부려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해서, 그 증명 때문에 신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만약에 '존재'한다면, 존재 '증명'이 안된다고 해서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겠죠.

요는 신의 존재 증명이니 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빌리면) 기독교적 담론 체계(/전통) 내에서의 언어게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믿는 자에게만 중요한. 믿지 않는 자에게는 바람에 흩날리는 비닐 봉다리만큼이나 사소한. 그러면서 때로 거룩한.

 

 

 

 

이러한 토론/논쟁에 제가 깊이 참여하지 않는 것은 오래 전부터 그러한 '게임'에 멀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의 <대심문관>)이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재미있게 읽었더랬습니다. 하지만, 관념이 주는 재미라는 건, 한 인류학자가 지적한 대로, 그저 '생각하기에 좋은 것(good to think)'이어서, 우리 삶을 가상으로만 지배할 따름입니다. 삶을 철학화하는 데 대해 반감을 가졌던 체홉의 경우를 떠올릴 수도 있겠네요.

이반 카라마조프가 가졌던 의문 중의 하나는 신의 존재라기 보다는 신의 의미입니다. 하여간에 이러저러한 신의 존재한다고 칩시다. 그리고 그러한 신(들)에 의해서 이 세계가 창조되었다고 칩시다.(그런 믿음은 가정이 아닐 경우, 대개는 용기의 결여에서 나오는 것인데- 즉 끝까지 가보지 않는 사유)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얼마만큼 달라지는지요. 순진한 어린아이들의 무고한 고통이 감면됩니까? 소위 세계 고가 탕감됩니까? 예수만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아침마다 전철역에서 설교하는 분도 있는데, 정말 그런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제 생각에 그 믿음의 환희 때문에(혹은 두려움 때문에) 심장이 터져 죽든가 혼절하든가 해야하지 않을까 싶군요.

주인 의식을 가지고 사는 건 좋지만, 주인 의식이라는 게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의식이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내가 사는 곳, 내가 속한 공동체, 내가 가진 믿음이 반드시 옳은 것이고 절대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보다 태만하며 부정직한 믿음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그러한 믿음은 '인간적'이기조차 합니다. 무능력하고 이기적이며 모자란...

 

 

 

 

'하늘을 나는 새, 들의 백합'이란 성경 구절도 있지만("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자신의 존재를 그 새들과 백합과 차별화시키면서 잘난 체하기보다는 그 새들과 백합의 자유로움과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본받아 보려는 삶이 제겐 좋아보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말할 수 있고,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걸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타자로서의 자신뿐만 아니라(우리는 자신에게 낯설지 않던가요?) 다른 이, 다른 존재들의 언어에 귀기울이기 위한 것입니다. 일종의 말건넴이지요.

정말로 보기에 좋더라는 세상에 살고 싶은 건 모든 사람의(모든 사람은 아닐 겁니다) 꿈이고 열망일 겁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을 손에 물 안 묻히고, 무슨 믿음 하나로 이루려고 하는 건 교만이겠지요. 믿거나 말거나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의 조그만 정의들을 위해서 조금씩 노력해 가는 것, 가끔은 퇴보도 하고 방황도 하면서 하여간에 어딘가를 주시하며 가는 것, 그것이 저에겐 신의 존재 증명보다도 신의 의미보다는 중요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신론자이고, 굳이 말하자면 범신론자입니다. 당신들이 모두 신으로 보이니까...

 

 

 

 

(*)마지막 멘트는 그냥 유머이다. 그리고 그 유머의 다른 말이 '이데올로기'이다.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인간을 신이나 벌레로 간주하는 태도가 이데올로기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사이의 어중간한 무엇이다. 혹은 침팬지와 보노보 사이의 '제3의 침팬지'일 뿐이다...   

06.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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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으러 갈 시간인데, 막간 창고 정리를 한다. 이미 모스크바 통신에 '언어는 무의식적으로 탈구조화되어 있다'란 제목으로 올렸던 글에서 김훈의 <현의 노래>에 관한 대목만을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2004년 7월초에 씌어진 그 글은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업그레이드 버전은 '양파, 혹은 문체에 대하여')에 대한 보론의 성격을 겸하고 있었다(때문에 이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이라면 먼저 문체에 대한 글을 참조하시는 편이 좋겠다). 나머지는 나의 수다이다(단, 이 '수다'는 18세 이상만 접근가능한 이미지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유의하시길).  

 

 

 

 

갑작스레 ‘정치론’을 꺼내들기 전에(*이 '정치론'에 대해서는 나중에 정리하겠다) 내가 몇 마디 거들었던 소설은 김훈의 <현의 노래>였다. 나는 김훈의 문체를 얘기하면서 그의 ‘허무주의’를 지적했고, 보다 구체적으론 그의 허무주의가 ‘가장(家長)의 허무주의’라는 걸 주장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이 빨아당기는 속살이 어째서 왕의 무덤 속에 들어가 쇠와 함께 썩어야 하는가. 야로는 식은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란 구절을 제시하면서 ‘질퍽거리는 구멍’을 김훈 문학행위의 핵심으로, 라캉의 용어를 쓰자면 ‘아갈마’(=숨겨진 보물)로 규정했다. 지젝을 흉내내어 말하자면, 그의 문학행위는 그 ‘질퍽거리는 구멍’을 중심으로 순회한다.

이에 대해서 ***님은 (어제 읽어보니까) 이 ‘질퍽거리는 구멍’이 ‘여성의 성기’를 가리킬 뿐이라고 반박하는 답글을 달아놓았는데, 좀 의외의 답글이다. 내가 제시한 건 그것의 ‘지시적 의미’가 아니라 ‘해석’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그 ‘질퍽거리는 구멍’의 주인은 “왕의 죽어 썩어가는 육체를 피해 도망친” ‘아라’이다. 나는 인용한 구절에서 “‘야로’는 김훈 자신이며, ‘이 질퍽거리는 구멍’이야말로 그의 ‘허무주의’의 근거이고, 그의 표현을 빌자면, 풍경의 ‘적막’이다.”라고 했다. 즉, ‘야로=김훈’이며, ‘질퍽거리는 구멍=허무주의의 근거’라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하면, ‘질퍽거리는 구멍’은 ‘아라의 성기’일 뿐이라는 ***님의 지적은 ‘야로’는 ‘김훈이 아니라 야로일 뿐’이라는 얘기인데, 이게 ‘반박’으로서 성립하는 것인지? 혹은 ***님은 그것이 ‘반박’이라고 정말로 진지하게 믿고 있는 것인지? 이건 메타언어로서의 비평 원론에 관한 것인데, 나는 그냥 농담으로 간주하겠다(혹 진담이라고 밝혀주신다면, 다음 번에 제법 진지하게 ‘반박’하도록 하겠다).

김훈의 에세이들을 얼마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의 ‘형이상학적’ 상상력 혹은 묘사는 음(陰)과 양(陽), 즉 암컷-수컷의 대립과 교접을 근간으로 구축돼 있다(‘여자-남자’라고 말하는 건 김훈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는 ‘암컷-수컷’이라고 말한다).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라는 시리즈의 제목 자체가 이미 그러하다. ‘질퍽거리는 구멍’이라는 음(陰)과 암컷(성)이야말로 (야로가 아니라) 작가 김훈이 “식은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 채워 넣어야 할 구멍이고, 먹여 살려야 할 구멍이며, 궁극적인 미스터리이자 ‘적막’이다. 나는 이 또한 김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The Origin of the World'(1866).

내가 개진한 것은 그러한 상식을 좀더 보충하는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보충하는 김에 더 확장하자면, ‘질퍽거리는 구멍’ 즉 바기나(vagina)는 ‘주인-기표(Master-signifier)’로서의 팔루스(phallus)에 대응하는 ‘여주인-기표(Mistress-signifier)’라 할 만하다. 라캉에게서 팔루스가 생식기관으로서의 남근, 즉 페니스(penis)와 구별되듯이, 바기나는 생식기관으로서의 음문(陰門), 즉 불바(vulva)와 구별된다. 프로이트에서 라캉으로의 이행, 혹은 정신분석학의 언어학적 전회가 <‘아버지’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페니스’에서 ‘팔루스’로>란 표어로 정리될 수 있다면(그리고 <‘징후’에서 ‘징환’으로> 또한 주요한 표어이다), 우리는 거기에 <‘불바’에서 ‘바기나’로>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주인-기표’의 짝으로 ‘여주인-기표’를 덧붙이면서 말이다.


 

 

 

라캉 정신분석은 ‘프로이트+소쉬르/야콥슨’으로 정식화될 수 있는바, “무의식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것이 ‘구조주의자’ 라캉의 맥심이다. 실제로, 라캉은 야콥슨과 깊은 교우를 가졌는데, 레비-스트로스의 소개로 그는 미국으로 망명해 있던 러시아의 언어학자 야콥슨을 알게 되며, 야콥슨은 프랑스에 갈 때마다 라캉의 집에 머물곤 했었다(레비 스트로스의 회고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참조). 유의할 것은 여기서의 전회가 이중적이라는 점이다.

즉, 라캉은 정신분석학을 언어학적으로 전회시킴과 동시에, 언어학을 정신분석학으로 전회시킨다. 그 전회는 <‘랑그’에서 ‘랭귀스테리’로>란 표어로 정리될 수 있는바, 알다시피 ‘랭귀스테리’란 ‘랭귀지(언어)+히스테리’이다. 여기서 ‘탈구조주의자’ 라캉의 ‘또 다른’ 맥심이 나올 수 있는바, “언어는 무의식적으로 탈구조화되어 있다”가 그것이다(물론 이건 그가 직접 언명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정리한 것이다.)

단순하게 대비시켜 말하자면, <에크리>(1966)의 저자로서 구조주의자 라캉이 ‘무의식의 언어’에 관심을 집중한 데 반해서(그의 주된 관심은 ‘상징계’였다), 흔히 ‘후기 라캉’이라 불리는 탈구조주의자 라캉은 ‘언어의 무의식’에도 관심을 돌린다(그의 주된 관심은 ‘실재’였다). 조이스에 대한 그의 관심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사실, 이 ‘언어의 무의식’에 관해서라면, 이리가레와 함께 라캉의 ‘나쁜 딸들’의 하나인 크리스테바의 기여를 빼놓을 수 없는바, 그녀의 <시적 언어의 혁명>(1973)은 그 대표적인 저작이다(그녀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이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불가리아 출신의 이 여성 ‘사무라이’가 일약 프랑스 지성계의 히로인으로 떠오르게 되는 건 <바흐친, 말, 대화 그리고 소설>(1967)을 발표함으로써이다(그녀가 26세 때의 일이다). 이 논문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일부 오역들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안 그래도 상당히 난해한 논문이지만). 해서 요컨대, 라캉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야콥슨에 대한 참조는 기본적이며, 크리스테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바흐친에 대한 참조는 필수적이다.

 

 

 



다시 ‘질퍽거리는 구멍’, 즉 바기나. 해부학적으로 ‘팔루스’란 단어는 원래 (남성의) 음경과 (여성의) 음핵, 즉 클리토리스를 가리키지만, 라캉 정신분석학에서는 “결여 혹은 상실의 기표”를 뜻한다(욕망은 언제나 이러한 결여와 관련된다). 그것이 ‘기표’라는 점에서, 음경과 무관하지만 한편으로 ‘결여/상실’의 기표라는 점에서는 음핵과 무관하지 않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여성의 음핵은 결여한/상실한 남성적 음경의 흔적이었기 때문이다(해서 팔루스는 페니스, 즉 남근이 아니지만 ‘남근적’이라는 이유에서, 라캉 정신분석학이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공격 받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반면에 바기나는? 해부학적 기관이 아닌 상징 혹은 기표로서의 그것은 ‘결여의 결여’, ‘상실의 상실’의 기표이며, 미스터리의 기표이고 ‘여주인-기표’이다. 즉, 남성에겐 미스터리가 없다는 의미에서(‘남성’은 다 드러나 있다!), 남성에게는 결여가 결여돼 있으며, 상실이 상실돼 있다. 카트린 브레이야의 표현을 가져오자면, 바기나는 ‘지옥’의 기표이며, 팔루스가 결여/상실하고 있는 것은 그 ‘지옥’이다.

라캉은 욕망을 ‘결여’하고만 관련짓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욕망의 반쪽이다. 나머지 반쪽은 바로 ‘결여의 결여’와 관련된 욕망이다. ‘무엇인가를 갖고 있는 자’는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지 않은 자’이며,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는 자’가 무엇인가를 갖고자 욕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지 않은 자’는 무엇인가를 안 갖고자 욕망한다(즉 소유에 대한 욕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소유에 대한 욕망도 있다). 주인-기표가 무엇인가를 갖고 있음으로써, 혹은 갖고 있다고 가정됨으로써 ‘주인’ 행세를 한다면, 여주인-기표는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음으로써, 혹은 안 갖고 있다고 가정됨으로써 ‘여주인’ 행세를 한다. 즉 칼이 아니라 칼집이 주인이며, 마개가 아니라 구멍이 주인인 것이다. 즉, 여주인.



다시, 야로의 말, 김훈의 말을 보자.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결여/상실이며, 부재이고 적막이다. “이 빨아당기는 속살” 앞에서, “야로는 식은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이다. 속수무책이다. 왜인가? 그는 구멍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결여의 결여이고, 상실의 상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주인-기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그는 여주인-기표를 욕망하며, 상실이고자 결여이고자 한다.

나는 게이에의 욕망, 팔루스를 제거함으로써 상상에서건, 실제에서건 ‘여성’(=암컷)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이 구멍(=바기나)에 대한 욕망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들은 ‘주인’이 아니라, ‘주인’을 지배하는 ‘여주인’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자신의 구멍으로, 부재로, 결여로, 상실로, 적막으로, 미스터리로, 지옥으로 여주인은 주인을 할딱이게 하며 지배한다(천문학에서의 反물질 혹은 ‘암흑물질’은 이 여주인-기표의 천문학 버전이라 할 만하다). 혹 이런 것이 라캉 정신분석학의 페미니즘 버전이 될 수 있을까? 혹은 거울상?

레비-스트로스가 <친족의 기본구조>(그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이다)를 구성하면서 여성을 교환의 대상으로 한 것에 대하여 남성중심적인 시각이 아닌가란 질문을 받자, 그는 그것이 편의적인 것이었을 뿐이라고 답한다(즉, 남성을 교환의 대상으로 한 ‘친족의 체계’도 이론적으론 가능한 것이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보다 많은 건 사실이고 따라서 더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그것이 오른손잡이에 대한 ‘필연성’을 보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어쩌다 보니 그러기가 쉬웠을 뿐인 것. 라캉의 욕망이론이나 ‘팔루스’론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라는 게 나의 짐작이다.

그렇다면, 유표적 언명으로서 “여성은 없다”란 그의 테제의 거울상 버전은 “남성은 없지 않다”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뒤집어서 얘기하면, 이상한 것은, 즉 유표적인 것은 ‘여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없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남자가 없지 않다고 상상해봐?”). 오, 없지 않아서 불행한 것들이여! 무덤 속에 들어가 썩을 것들이여!..

06.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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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5-23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에 모, 못볼 걸 봐서..........황급히 스크롤을 내려버리게 됩니다....

로쟈 2006-05-23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 '경고'해두지 않아서 죄송합니다(한데, 사진이 아니라 '누드화'일 뿐인데요)...
 

재작년 5월에 띄운 모스크바 통신문 가운데 '이론 이후에 무엇인 오는가?'라는 게 있었다. 당시에 모스크바에서 우편으로 받은 북매거진 <텍스트>(2004년 3월호)를 읽다가 해외서평란에 소개된 글을 읽고 간단한 코멘트를 적은 것이었는데, 그걸 다시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텍스트>에서 ‘직업상’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해외서평란에 연재된 것인데,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영국의 맑시스트 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신작 <이론 이후(After Theory)>(2003, 256쪽)에 대한 매튜 프라이스란 사람의 서평이 번역/소개돼 있었다(*이글턴의 책은 번역본이 근간 예정인 것으로 안다). 제목은 ‘자기비판(The Self Critic)’이고, 부제는 “수많은 학생들에게 문학이론을 권했던 남자가 이제는 그들이 문학이론을 폐기하길 바라고 있다”이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서평에서 전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문학이론입문>(1983)의 이글턴이다. 이 책은 국내에 2종(창비, 1986/ 인간사랑, 2001)이 번역돼 있고, 내가 알기엔 원저도 최소한 2판 이상을 찍었다(나는 원저의 2판을 갖고 있다). 물론 우리에게 친숙한 건 창비에서 나온 <문학이론입문>인데, 내가 이 책을 처음 본 건, 책이 나온 지 얼마 안된 시점인 학부 1학년 때 공대에 다니던 동창생의 하숙방에서였다. 물론 서점에서도 이 책을 봤지만, 비로소 이 책을 ‘알아’보고 흥미를 갖게 된 게 그때였던 것인데, 공대생도 읽는 문학이론서를 인문대생이 아직 읽지 않았다는 데 대해서 묘한 경쟁/분발심이 생겼던 것 같다. 이후로 나는 이 책을 최소한 서너 번은 읽었는데, 책이 재미있기도 했고 ‘문학학회’의 이론 교재로서도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 소개돼 있는 문학이론입문서는 이글턴의 것 말고도, 레이먼 셀던의 책이나 입슈/포케마의 책 등이 있지만, 역시나 가장 개성이 강하면서도 권장할 만한 것은 이글턴의 책이다(셀던의 책도 여러 종의 번역서가 나와있고 많이 읽히지만, ‘교과서’적이어서 개성이 떨어진다). 약간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은 8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문학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참조/인용하는 문학이론서로는 1위가 르네 웰렉과 펜 워렌의 <문학의 이론>이었다는 사실이다(2위가 미셸 제라파의 <소설의 사회사>였다). 요즘은 누가 웰렉/워렌을 읽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은 ‘적절한 시기’에 <문학의 이론>을 대체했다.

그런데, 제목과는 다르게,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은 문학이론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소개하면서 한편으론 공박하는 책이었다. 결론도 ‘정치적 비평’이 아니었나? 앞의 서평 부제는 ‘문학이론을 권했던 남자’로 이글턴을 지칭하고 있지만, 내가 아는 이글턴은 그러한 ‘이론’의 정치성을 폭로하면서, 이론의 과학성/객관성이라는 ‘허상’을 예리하고 비판하는 ‘반골적인’ 이글턴이다(그의 재치있고 신랄한 문체는 사르트르에 견줄 만했다!). 그러니까, 내가 읽기에는 이미 <문학이론입문> 시절부터 이글턴의 문제의식 속에 ‘이론 이후’가 함축돼 있었던 것인데, 신간은 웬 ‘뒷북’인가 싶기도 하다. “이론의 황금기가 지나간 지는 오래되었다”고?

 

 

 



현재 맨체스터대학의 ‘문화이론’ 교수로 재직중이라는 이글턴은 신간에서 이론이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혼란에 빠져 있는 것으로 진단/고발한다, 고 한다. 예컨대, “학계라는 거친 바닷가에서는 프랑스철학에 대한 관심이 매혹적인 프렌치키스에 대한 관심에 자리를 내놓게 되었다. 일부 문화연구 서클에서는 자위행위의 정치가 중동의 정치보다 훨씬 더 큰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은 “데리다를 이용해서, 세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프렌즈>를 해체”하게 되었는바, 이글턴은 이것을 ‘정치적 재앙’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론이 언제나처럼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이렇듯 이론(특별히 ‘포스트모던 이론’)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즉, 이론은 ‘문턱’이지만, 비평이 지향해야 할 ‘진정한 해방’ 혹은 ‘진리’는 이론 속에서 구해질 수 없다. 그런데, 이게 과연 새로운 주장인가? 이글턴이 언제 이론에 대한 환상적인 기대를 늘어놓은 적이 있는가? 이론은 언제나 필요한 도구였을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지 않았던가?

내가 혼란스러운 것은 이러한 입장이 과연 이글턴에게서 ‘변화된’ 입장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정세의 변화에 따른 방점의 이동은 있을지언정(이론은 진보적일 수도 있고, 보수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지지도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이론관’이다), <이론 이후>에서 제기하고 있는 건 이미 20년전 <문학이론입문>에서도 충분히 암시 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 결론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1)이론에 대한 이글턴의 입장이 정말로 달라졌으며, 나는 이글턴을 오해하고 있었다. (2)이론에 대한 이글턴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서평자(혹은 어쩌면 이글턴 자신이)가 이글턴을 오해하고 있다.

물론 어느 쪽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신간을 읽어봐야겠지만, 내 생각에 이글턴은 문학이론을 권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폐기하길 바랄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는 단지 이론의 오용/남용과 오염에 대해서 근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런 오용/오염이 제거될 수 없는 거라면, 물론 이론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때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은 ‘이론 이후의 이론’, ‘이론 이후에 관한 이론’일 것이다. 이글턴에 충실할 때, 우리는 이론이라는 ‘문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이론은 전부가 아니지만, 적어도 ‘최소한’이다). 비유컨대, 우리는 ‘언어’에 구속돼 있지만, 우리의 자유는 언어 ‘이전’이 아닌 ‘이후’에 얻어질 수 있듯이 말이다. 그것은 구원이 또한 우리의 비천한 삶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오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밝혀두자면, 상당한 식견과 적절한 언어구사를 통해서 이 해외서평을 번역하고 주를 단 역자에게서 나는 좋은 인상을 받았다(좋은 번역은 우리를 즐겁게 한다!). 이글턴의 이 신간이 번역된다면, 그 적임자의 한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한가지 궁금한 건, 역자의 주8)에서 이글턴의 ‘포스트모던 사상’을 공박하고 로티와 함께 지목하다는 스탠리 피쉬의 대표작 'Is There a Text in This Class?'(1980)가 <이런 기준의 텍스트는 있는 것인가?>로 번역된 점이다. 'Class'란 말이 여기서 중의적이긴 하지만, 보통은 ‘수업’이나 ‘교실’로 옮기기 때문인데, 내가 그 책을 읽지 않아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Class'를 ‘기준’으로 옮긴 것은 특이해 보인다. 참고로, 피쉬의 이 책을 패러디한 글의 제목 중에는 'Is There a Fish in This Text?'란 것도 있다...

06. 0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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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21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를 이용해서, 세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프렌즈>를 해체”하게 되었는바,

ㅋㅋㅋ

눈팅 2006-05-30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턴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에서 얼핏 생각나는 구절: "요즘 작가들은 탐스런 사과와 같은 작품이 아니라 축축한 겨드랑이와 같은 텍스트를 생산하고 있다."
‘이론 이후의 이론’이라는 표현은 벤야민의 '희망 없는 희망'이나 데리다의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포스트모더니즘도 모더니즘 이후의/없는 모더니즘이 아닐까요...

로쟈 2006-05-22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자주 써먹게 되는 구호들이기도 합니다...

비로그인 2006-05-23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근데요 이글턴의 문학 이론 입문 개정판 번역 상태가 어떠한가요? 역자가 질 들뢰즈의 비평과 진단의 역자이던데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지라... 초판의 판매량이 더 높은 것도 번역 상태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의심도 가구요..

로쟈 2006-05-23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비 번역판을 추천합니다. 인간사랑판은 검토해보지 않았지만, 기대할 만한 번역이 아닐 거라고 봅니다... 거기에 비하면 초판/개정판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006-06-23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23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교재'류의 책은 이름있는 책들이 이름값을 합니다. 베리의 책이 훌륭하다면, 입소문이 더 나지 않았을까 싶네요...

2006-06-24 0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tois 2006-07-07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문에 학생이 첫시간에 들어와서 "Is there a text in this class?"라고 질문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니 강의나 수업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맥락에도, 중의적 해석의 가능성에도 합당합니다. 참고로 이 책 아주 재미있습니다.
 

지난 2004년 11월말에 올린 모스크바 통신문은 "책은 무조건 즐겁게 읽어라"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그 후반부는 올해초에 '공부냐 학습이냐'란 페이퍼로 따로 정리해놓은 바 있다. 그 전반부를 이미지 버전으로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제목은 페나크의 소설에서 인용한 '즐거운 도망, 즐거운 저항'으로 바꿔달고. 다시 읽어보니 '나의 독서론'도 겸하고 있다. 

낮에 (점심이 아니라) 아침을 먹고서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나서는 참에 문 우편함에 인쇄 우편물이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북매거진 <텍스트>(23호)였다. 지난 22호부터 20일 간행 체제로 바뀌고서 두번째로 나온 것인데(22호에 나는 ‘체홉론’을 기고한바 있다), 표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실용적’이었지만, ‘책과 시대’란 가볍지 않은 주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었다. 제목의 인용구는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에 대한 서평의 제목이기도 한데, <텍스트>의 표지에는 그의 글이 조금 더 인용돼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해온 책읽기란 대개는 순응하고 따르는 책읽기라기보다는, 무언가에 반하고 맞서는 책읽기였다. 즉 이제껏 우리가 책을 읽어온 것은, 마치 세상과 등지듯 현실을 거부하고 현실과 대립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때론 우리가 현실 도피자처럼 여겨지고 현실마저 우리가 탐닉하는 독서의 매력에 가려져 아득해질지언정, 어디까지나 우리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도망자,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탈주자인 것이다. 모든 독서는 저마다 무언가에 대한 저항 행위이다.”(<소설처럼>, 103-4쪽)

두 개의 인용구를 종합하면, 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고, ‘즐거운 저항’이다. 도망치면서 저항하는 것인지, 저항하면서 도망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한없이 도망치고 한없이 저항한다. 아니, 도망치기 위해서, 저항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다. (페나크에 따르면) 그것이 책읽기의 의의이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것. 만약에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즐겁지 않(았)다면, 당신은 제대로 도망가지도, 저항하지도 못한 것이 된다(그건 당신이 변변찮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책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악착같이 즐겁게 읽을 필요가 있다(물론 애초에 그럴 만한 책을 고르는 안목이 중요하다).  


 

 

 

 

‘즐거운 책읽기’와 관련하여 나에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책이 두 권 있다. 그건 김현의 평론집 <책읽기의 괴로움>(민음사)과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동문선)이다. 기억에 <책읽기의 괴로움>은 최인훈의 <회색인>에 대한 평문의 제목을 표제로 한 책이었다. 나는 김현 전집으로 다른 책과 묶여서 나온 <책읽기의 괴로움>도 갖고 있지만, 내가 더 아끼는 건 민음사판의 초판본이다. <분석과 해석> 이전에 나온 것이니까 아마도 80년대 초반에 나왔을 법한데, 내가 중학교 때부터 문학평론집을 읽은 건 아니므로 내가 이 책을 구한 건 당연히 훨씬 나중이다(물론 책은 이미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다 읽은 뒤이다).  

절판됐던 그 책을 구한 건 아마도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90년대 초반에 새로 개장한 영풍문고에서였다. 아마 재고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책이 나온 듯한데, 나는 한 권 남아 있던 이 책을 집어들고서 쾌재를 부른 적이 있다(요컨대, 이런 게 ‘책 구하기의 즐거움’이다). 그게, 마지막 한 권이었는지는 어떻게 아느냐고? 그걸 확인해보려고, 책을 사고 며칠 안 돼서 서점에 또 가봤기 때문이다(더는 진열돼 있지 않았다). 해서, 한동안 내가 가장 즐겨 들르던 서점이 영풍문고였고, 영풍문고는 내게 <책읽기의 괴로움>으로 각인돼 있다. 

사실, (내 기억에) 김현이 말한 ‘책읽기의 괴로움’은 책을 통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세상 읽기의 괴로움’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 자체로는 ‘즐거운 책읽기’를 괴롭게 만드는 건 세상인 셈. 하지만, 책읽기의 즐거움은 그런 괴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도록 하는 즐거움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쾌락원칙을 넘어선다. 즉, 책읽기의 즐거움은 쾌락이 아니라 향락이다.

 

  

 

 

 

바르트의 책 <텍스트의 즐거움>은 우리말로 두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는데(나에겐 이 두 번역본과 영역본이 있다), 읽은 만한 건 김희영 교수가 옮긴 동문선본이다(연대출판부본은 ‘책읽기의 괴로움’을 강요하는 번역이다). 바르트의 책들은 우리말 전집이 기획/출간되고 있을 정도이니까 우리에게 친숙한 편이지만, 아쉽게도 그의 유미적인/유희적인 문체 때문에 쉽게 읽히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사랑의 단상>이나 <카메라 루시다> 정도가 예외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우리말로 번역된 바르트의 책들은 대부분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카메라 루시다>, 즉 <밝은 방>만 아직 보지 못했다). 더 번역된 건 두툼한 선집 외에 정도. 그 중에서 내가 산 건 아직까지는 <기호의 제국> 한 권뿐인데, 그건 내가 영역본을 따로 갖고 있지 않아서이다.

<텍스트의 즐거움>을 읽기 위해서 먼저 읽어야 하는 것은 '저자의 죽음'과 '작품에서 텍스트로(From Work to Text)'라는 바르트의 두 짧은 평문이다(동문선본에 같이 번역돼 있을 듯하다). 어떤 책을 ‘작품(Work)’으로 간주하는 건 간단히 말해서, 그걸 산출한 ‘주인’ 혹은 ‘아버지’로서의 저자를 상정하고, 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작품 읽기의 목적으로 삼는 태도이다(따라서 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태도이다). 반면에 어떤 책을 ‘텍스트(Text)’로 간주하는 건(‘교재’란 의미의 ‘텍스트’가 아니다), 더 이상 그런 의미작용의 중심으로서의 저자를 고려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래서, ‘저자의 죽음’이다(이건 반형이상학적이며 탕아적인 태도이다).

바르트는 ‘작품’의 은유로 ‘유기체’를 드는 반면에 ‘텍스트’의 은유로는 ‘덫’을 든다. 하나는 채워져 있고, 다른 하나는 비어 있다. 그래서, 작품은 독자가 ‘읽어내는’ 것이지만, 텍스트는 독자가 ‘채워넣는’ 것이 된다. 해서, (바르트의 다른 용어로 표현하자면) ‘작품’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에 대응한다면, ‘텍스트’는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에 대응한다.


나는 러시아 문학 이전에 ‘문학’이 전공이다 보니까 문학이론/비평 또한 관심에서 제쳐놓을 수가 없(었)는데(해서 문학이론서들을 지겨울 정도로 많이 읽었다. 그런데, 이 ‘이론’이라는 게 말 그대로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공부’하기엔 좋은 동네인 셈), 이른바 ‘이론’은 20세기 후반 인문학의 주도적인 담론이었다. 그 기폭제가 (프랑스) 구조주의였다면(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구조주의는 ‘현실’을 ‘구조’로 대체/환원했다) 문학비평에서 ‘구조주의 혁명’을 주도했던 바르트의 위치는 간과될 수 없다(물론 그는 <텍스트의 즐거움>(1973)을 경계로 포스트 구조주의로 넘어간다). 

 

특이한 건 그가 주로 아카데미즘의 바깥에서 활동했다는 것.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기호체계의 사상을 가르치는 교수로 취임하는 것이 1977년이니까 1953년 <글쓰기의 영도>(이 또한 우리말 번역이 있는데, ‘번역의 0도’쯤으로 불릴 만하다)로 ‘데뷔’한 지 22년이 지나서야 그는 ‘변변한’ 직업을 갖게 된다(이전에 그가 몸담았던 연구소 등에서의 지위나 보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는 것은 불과 몇 년 후이다(내 기억에는 1980년이고 그의 유작이 <밝은 방>, 곧 <카메라 루시다>이다).


아마도 그런 전기적 이력이 보다 ‘본격적인’ 구조주의 비평가라는 제라르 주네트보다 바르트에게 더 친밀감을 갖게 하는 듯하다(나는 두툼한 영어판 바르트 전기도 갖고 있으며, 1/3쯤 읽었더랬다). 그건 ‘불문학자’ 김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프랑스비평사: 현대편>(문학과지성사)에서 주네트 대신에 바르트에게 한 장을 할애한다(곽광수 교수 같은 이는 바르트를 딜레탕트 비평가, 좀 ‘재치 있는’ 비평가 정도로 평가절하한다).

 

 

 

 

 

 

 

 

 

 

참고로, 김현이 재구성한 프랑스 현대비평은 '사르트르-바슐라르-바르트-블랑쇼'의 4각형으로 이루어지는바, 이들의 키워드를 차례대로 나열하면 '참여-상상력-언어-죽음'이다(나는 문학을 구성하는 네 원소가 ‘사랑과 가난과 죽음과 언어’라고 생각하는바, 사랑과 상상력, 가난과 참여를 등가화시키면, 두 사각형은 동일한 매트릭스의 변주가 된다).

 

주인/아버지로서의 ‘저자의 죽음’을 선언한 바르트였지만, 사실 그에겐 아버지가 없었다(일찍 여읜 걸로 기억된다). 그래서 그에겐 내내 어머니밖에 없었으며(<밝은 방>은 그 어머니의 죽음에 바쳐진 책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교통사고이긴 했지만) 그는 얼마 더 살지 못했다(참고로 그는 동성애자였다). ‘유복자’ 혹은 ‘아비 없는 자식’이란 점에서 바르트는 한 세대 선배인 사르트르를 따르고 있다(프랑스의 20세기 지성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들은 사르트르-바르트-데리다이다. 데리다의 죽음으로 이들은 모두 고인이 됐다. 1980년부터 2004년까지이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시절 나에게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79년 박정희의 죽음이 아니라 80년 사르트르의 죽음이었다(*나는 '사르트르의 죽음과 철학'이란 글을 쓴 바 있다). 나는 신문지상에 보도된 그의 죽음에 매료됐고, (‘정치가’가 아닌) ‘작가’의 길을 선망하게 된다(그 길이 이 길이었다니!).

 

 

고등학교 때부터 사르트르의 소설들을 읽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책들을 모두 읽은 건 아니다(나는 <존재와 무>도 아직 읽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에서 나온 사르트르에 대한 책들은 거의 다 읽었다. 얼마 전에는 헌책방에서 러시아어로 된 사르트르 연구서를 샀는데(333쪽이고 1,600원) 레오니드 안드레예프란 저자의 이름은 낯설지만, 1994년에 나온 이 책이 러시아에서 나온 ‘최초의 사르트르 연구서’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레이몽 아롱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좌파였던 사르트르 세대의 프랑스 지식인들이 과거 소련체제, 그리고 소련의 작가들과 가졌던 ‘친분’을 고려하면(이들의 서신교환도 두툼한 책 한 권 분량이다), 90년대에 들어서야 그의 연구서가 나왔다는 점은 다소 의외이다(소련에서는 ‘부르주아 철학’도 열심히 연구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책읽기의 괴로움>과 <텍스트의 즐거움>, 두 권의 책이 생각난다는 얘기이다. 물론 ‘텍스트’가 그러하듯이 모든 ‘생각’에는 꼬리가 있다(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김현의 유작은 사후에 출간된 일기 <행복한 책읽기>인데, (내 기억에) 생전에 제목을 정해두었다는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책읽기의 괴로움>이었을 것이다(돌이켜 보건대, 그의 죽음은 90년대 한국문학의 최대 손실이다. 비평가와 불문학자로서 그의 ‘열정’과 ‘업적’을 넘어설 만한 이는 아직 없으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건 한편으로 고인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그 ‘행복한 책읽기’가 10년 정도만 더 연장됐어도, 우리는 (그는 4년에 한번 꼴로 책을 냈으므로) 최소한 두 권의 문학비평집과 (그가 <프랑스비평사>에서 포부를 밝힌바) 리쾨르와 데리다 등의 연구서를 더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도 1994년에 책이 나온 건 1964년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거부 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갖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올해는 그의 노벨상 수상/거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어제 날짜 <니자비씨마야>의 ‘엑스 리브리스’의 표제기사가 그걸 상기시켜주었는데, 러시아(소련)에 사르트르가 제일 처음 소개된 것이 바로 그 해 1964년이고, <노브이 미르>란 잡지(1962년에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발표됐던 잡지)에 <말>이 번역/소개됐다(그의 ‘자서전’ <말>은 ‘읽기’와 ‘쓰기’ 두 대목으로 구성돼 있다. *새로운 우리말 번역본이 출간되지 않는 것은 유감스럽다).

 

계기는 물론 그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 스웨덴 한림원의 선정에 대해서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상은 거부한다. 하지만, 돈은 받겠다.”(이를 인용한 러시아 필자는 이것이 ‘진정한 철학적 행위’라고 평한다. 그는 사르트르를 무척 좋아한다고 하니까, 반어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는(나부터도) 흔히 “나는 노벨상을 거부한다”란 그의 선언을 사르트르 철학(=자유의 철학)의 상징적인 제스처로 이해해왔는데, 알고 보면 그건 절반의 이해였던 셈이다.

 

거기에 덧붙여져야 할 것은 “하지만, 돈은 받겠다!”이다. 그럴 때에라야,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같은 구호가 아주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는가?(즉, 실존주의는 마음이 약하고, 돈에 약하다!) 그리고, 그럴 때에라야 실존주의가 왜 프롤레타리아 철학이 아니라 부르주아 철학인가가 명료해지지 않는가? 더불어, 우리는 사르트르를 더 좋아하게 되지 않는가?..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 사르트르는 <말>과 <구토> 등이 포함된 작품집과 <보들레르>, <상상적인 것>(그의 초기 상상력 연구서) 등이다(<존재와 무>는 너무 고가여서 사지 못하더라도 ‘전쟁일기’인 <이상한 전쟁의 기록>이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은 형편을 봐서 구할 생각이다. 어린시절 ‘영웅’에 대한 예의로서). <상상적인 것>은 그가 후설의 영향하에 쓴 것으로 흔히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연구와 비교된다(김현의 연구가 있다). 더불어, 얇은 분량의 <보들레르>는 그의 ‘실존적 정신분석’이란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적용된 사례이다.

 

<상상적인 것>은 우리말 번역이 없지만, <보들레르>(문학과지성사)는 오래 전에 번역/출간돼 있다(아마 절판됐을 것이다). 나는 지난 달에 2권짜리 보들레르 선집도 구했기 때문에(1권은 시집이고, 2권은 산문집이다) 이젠 좀 읽어보는 일만이 남았다(보들레르를 읽는 건 나의 오랜 숙제 중의 하나이다. 그가 현대시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한국어와 영어와 러시아어로(들뢰즈가 인용한 프루스트의 말을 빌면, “훌륭한 작품은 모두 외국어로 씌어져 있다”니까 읽는 것도 ‘외국어’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어 사르트르는 제법 풍족한 편이다. 작품도 <자유의 길>을 포함해 대부분 번역돼 있고(그의 일기와 플로베르론인 <집안의 백치>, 철학서인 <변증법적 이성비판> 정도를 제외하면) 정명환, 박이문, 박정자 선생들의 소개도 충실하고 수준도 높다. 사실 다른 작가/철학자들의 경우도 이런 정도의 소개 수준만 되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이에 견줄 만한 작가는 김화영 교수의 카뮈 정도이다). 사르트르의 전기로는 코헨-솔랄의 3권짜리 전기 <사르트르>가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바, 규모에 맞게 충실하면서도 재미있다.


실존주의 세대(4-50년대)와 구조주의 세대(60년대)를 대표하는 사르트르와 바르트는 각각 ‘타동사’와 ‘자동사’로서의 문학을 주창한 걸로 흔히 비교되는데(하지만 사르트르 자신도 시는 ‘앙가주망(=참여)’에서 제외시켰다), 폴 존슨이 쓴 <지식인들>을 보면, 딱히 그렇게 대조적인 것만도 아니다(지식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는 그의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브레히트 비판이다). 그는 사르트르를 ‘모피를 뒤집어쓴 잉크’라고 불르는데, 하여간에 이 ‘인간’은 평생 끊임없이 뭔가를 써댄 것이었다(그렇게 써대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으니 할말은 없지만).


즉, 그에게서 글쓰기의 발화주체는 타동사적 주체였지만(사르트르의 글쓰기 주어로서의 ‘나’), 발화행위주체인 사르트르 자신은 자동사적 주체였던 것이다(쉽게 얘기하면, 앙가주망(=타동사)을 주창하는 글들을 그는 자동사적으로 썼다). 그러니, 사르트르의 ‘참여’란 것은 좀 의심스러운 것일까? 거꾸로인 것 같다. 그는 모든 지식인의 참여가 갖는 자동사적 성격(‘자위행위적’ 성격)을 상기시켜주는바, 그런 의미에서 그의 앙가주망은 ‘진짜’ 앙가주망이다(오히려 우리가 의심해 보아야 하는 것은 그런 자위행위적 성격을 부인/배제하는 앙가주망이 아닐까?).


미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사르트르인바(‘문체의 기원’이란 제목인가로 책이 나와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형식>(<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로 번역됨)에서도 (여느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사르트르를 중요하게 다룬다. 하지만, 제임슨을 필두로 한 미국의 강단 좌파들의 ‘정치적 행위’는 (사르트르와 비교해 보더라도) 대학 등의 지식인 사회에만 한정된 것이다. 즉, 그들의 참여는 의미론적으론 타동사이지만, 화용론적으론 자동사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물며 대부분의 미국 학문은 기능주의적이지 않은가? (직접적인 경험담은 아니지만) 철학이 그렇고, 심리학이 그렇다. 분업화된 분석철학은 철학의 자기소외를 자기존립의 당위적인 조건으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자폐적이며, 자아(에고) 심리학은 사회에 대한 (병리적) 개인의 ‘적응’을 중심적인 과제로 설정함으로써 정작 사회의 병리성 자체는 사고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직면한다. 가령, 소비자심리학이나 유권자심리학이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까? 가령, 분석철학이나 자아심리학은 파농의 탈식민주의를 문제로서 사유할 수 있는가?(최근 파농의 <대지의 저주 받은 사람들>(그린비)이 번역돼 나온 걸로 돼 있다. 기억에, 재번역이다.)


이런 생각은 얼마전 미 대선 결과에 대한 김우창 교수의 시론(時論)을 읽고서 든 것인데, 정작 9.11 테러사건이 발생한 맨하탄 지역에서 부시의 지지율이 20% 미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케리가 패배한 것은 도시 지역의 진보적 지식인/중산층들과 그와는 전혀 다른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전통적/보수적 ‘시골’ 사람들이 서로 유리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건 마치 제정 러시아시절, 인텔리겐치아와 민중 간의 유리를 상기시킨다).

 

아무리 대학은 좌파 혹은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어도 그 영향력은 대학가 주변에 한정돼 있는 것(한국이라고 사정이 다른 건 아니다. 80년대 대학가와 지방 소도시의 ‘공기’는 너무도 달랐다). 그러니까 미국사회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네트워킹이 부족한 고립사회이다(아메리카는 ‘섬’들로 이루어진 대륙이다). 개방된 고립사회(서로 문은 열어두고 있지만, 아무도 왕래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리 (좌파)이론이 ‘첨단’을 가고, 좌파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하더라도 그 사회의 보수성은 쉽게 개선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사회적 의사소통의 네트워킹을 강화하는 것이다(데리다의 ‘새로운 계몽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건 흔한 말로 시민의식의 강화이면서 시민교양의 확충이며, 그로써 지식인과 대중간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지식인이 대중화되고, 대중이 지식인화되어야 한다. 마치 모든 노동자가 예술가이어야 한다는 사회주의의 구호처럼, 모든 노동자는 ‘지식인’이 될 필요가 있다. 의사나 교수보다 응급차 운전기사가 더 많은 월급을 받았던 과거 소련에서처럼).

 

 

 

 

 

 

 

 

 

 

그리고 거기에 기본이 되는 것은 기본적인 책들을 읽(히)는 것이고(가령, 시카고시에서 <앵무새 죽이기>를 단체로 읽듯이), 서로 대화/토론하는 것이다(학교에서 왜 ‘말하기’를 교육하지 않는가?).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것이 생활의 ‘기본’이 될 경우에(학교에서 왜 ‘글쓰기’를 교육하지 않는가?), 민주주의(=존재적 차원)는 (지젝이 지적하는바) 포퓰리즘(=존재론적 차원)으로 추락하지 않게 될 것이다(이런 경우엔 하이데거가 아니라 레비나스를 따라서, '존재에서 존재자로'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이 정도도 너무 거창한 것인가?

 

06. 0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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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노마드’, ‘노마디즘’이란 말이 우리 사회의 한 유행어가 되었다. 번역하자면, ‘유목’, ‘유목주의’ 정도가 될 이 단어들이 유행을 타게 된 데에는 대략 두 가지 계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첫째, 세계자본주의 단계가 냉전체제의 해체 이후 대략 1990년대부터 다국적 자본주의 단계로 이행하면서 자본주의하의 ‘보편적 삶의 조건’ 자체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알다시피, 신자유주의는 이 다국적 자본주의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이 시대에 군림하고 있다.

   

 

 

 

아예 인류사를 유목/정주라는 개념틀로 재기술함으로써 이러한 현 시대적 조건을 ‘오래된 미래’로 사유하려는 경향도 대두한바 자크 아탈리의 <호모 노마드>는 그 대표적인 저작이라 할 만하다. ‘잡노마드’니 ‘디지털 노마드’니 하는 신조어들도 그러한 맥락에서 파생하는 것들인데, 이러한 경향성을 ‘경제적 노마디즘’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제적 노마디즘의 우상은 칭기스칸인바, 오늘날 그 정신적 후예들은 전세계를 무대로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자본의 새로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애쓴다. 새로운 권력계급으로서의 ‘하이퍼노마드’이든, 새로운 하층민으로서의 ‘인프라노마드’이든.       

 

 

 

 

그런데, 이러한 경제적 노마디즘에 앞서서 反파시즘적 삶의 양식을 기치로 내걸었던 또 다른 노마디즘도 있었으니 그것이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돌로지, 곧 노마드의 철학이다. 국내에서는 이진경의 저작 <노마디즘>을 통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는 이 철학적 노마디즘은, 그 주된 전거가 되는 <천 개의 고원>이 1980년에 출간된 만큼 경제적 노마디즘과는 종류와 계보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진경에 따르면, 철학적 노마디즘이란 “끊임없이 자신의 사유를 변이시켜가는, 앉아서 하는 유목”을 가리킨다(그것이 들뢰즈의 노마디즘인지 이진경의 노마디즘인지는 여기서 따지지 않겠다). ‘앉아서 하는 유목’이 ‘싸돌아다니는 유목’과 동종일 리는 없다. 애당초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분열증적 교란과 그로부터의 탈주를 기획했던 만큼 철학적 노마디즘과 경제적 노마디즘은 동일한 이름으로만 불릴 뿐 내용물은 전혀 상반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구분 없이 통칭어로서 ‘노마디즘’ ‘유목주의’란 말이 남용되는 데 있지 않나 싶다(그러한 ‘남용’을 서로가 즐긴 것은 아닌가라는 혐의는 잠시 제쳐놓도록 하자).

최근에 천규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를 놓고 벌어진 논란은 노마디즘에 대한 이러한 동상이몽(同床異夢)에 기인한 것이지 않을까? 저자는 “질 들뢰즈나 펠릭스 가타리류의 유목주의(노마디즘)를 국가로부터의 해방철학이라도 되는 양 떠들면서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탈을 쓴 세계시장 제국주의와 신침략주의를 합리화하는 변설임을 애써 외면”하는 세력들에 일침을 가하고자 했지만,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적) 유목주의를 신자유주의, 세계시장 제국주의, 신침략주의의 이데올로기로 간주하는 건 과욕인 듯싶다(의혹을 제기하는 것과 단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농사꾼 철학자’라기보다는 ‘옹골진 농사꾼’으로서 천규석의 주된 비판은 들뢰즈/가타리보다는 칭기스칸에 더 집중될 필요가 있었다. 그랬다면, 아마도 국내 ‘철학적 노마디즘’의 또 다른 대표자 이정우의 강파른 비판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지의 용기 혹은 지적 몰이해’란 서평에서 이정우는 철학에 대한 천규석의 몰이해를 냉소적으로 몰아붙이는바, “저자야말로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차 지식인인 척하는 인간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비록 논리보다는 감정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는 비판이지만, 천규석 자신이 그런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철학적 노마디즘도 싸잡아서) 모든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라고 말해놓았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목’인가? ‘유목적 사유의 탄생’이란 부제를 달고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탐독>에서 이정우가 말하는 유목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여러 번 이사를 다니는 일 따위가 아니라 지적 편력으로서의 ‘지적 유목’이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역사, 문학 등 여러 담론의 세계를 유랑하면서 ‘가로지르기’가 곧 그에게는 ‘유목’이고 ‘유목적 사유’인 것. ‘앉아서 하는 유목’이란 점에서 이진경과 이정우는 노마디즘관을 공유한다. 그들이 대동소이하게 ‘철학적 노마디즘’으로 분류될 수 있는 근거이다(두 사람은 ‘수유+너머’와 ‘철학아카데미’ 같은 대학 바깥의 연구공동체를 꾸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된다).    

그러니까 노마디즘을 둘러싼 논란과 혼돈의 대부분은 “노마드란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 현재를 이해하고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는 방식으로, 특정한 소속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사유하는 존재”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정의하는 데서 비롯되는 듯싶다. 실상, ‘이동 마인드’(천규석의 표현)를 갖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존재와 ‘자유롭게 사유하는’ 존재는 현실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자본축적과 생계유지에 바쁜 하이퍼노마드나 인프라노마드는 사유하지 않으며(혹 겉멋으로 들뢰즈/가타리를 끼고 다닐지는 모르겠으나), 철학적 노마드들은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사유하는 게 아니라 앉아서 사유한다. 특정한 소속을 갖지 않거나 기존의 개념틀로부터 벗어나는 걸 지향한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이 두 부류가 직접 마주할 일도 별로 없을 것이다(요컨대, 경제냐, 철학이냐?). 

한데, 여기서 잠시 제쳐놓았던 문제를 끄집어내자면, 그리고 ‘혼돈 속의 노마디즘’에 대한 김진석의 진단을 빌자면, “탈현대론이 소비문화와 겹치는 과정에서 ‘유목주의’는 아주 광범위하고 모호한 문화적 소비욕망의 대상이 되었고, 90년대 중반 이후 ‘유목주의’는 애초의 철학적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바람을 타는 듯했다.”  

즉, “유목주의가 소비문화의 대상이 되는 과정에 다름아닌 철학의 이름을 내건 책들이 일조한 것은 아닐까”란 의혹을 갖게 되는 것인데, 이 경우 경제적 노마디즘과 철학적 노마디즘은 의미론적으로 무관하더라도 화용론적으로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은 모르게 서로 연루되어 있는 것.    

김진석의 ‘관전평’에 따르면, 들뢰즈 등도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듯이 실제 역사 속에서 유목성이 일종의 공격성을 띠었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들뢰즈 해설자들(혹은 철학적 노마디스트들)은 마치 자본이 전혀 노마디즘과 관계가 없거나 <천 개의 고원>의 주적이 자본주의인 것처럼 암시한다. 앉아서 유목하는 이들이 노마디즘을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건 아닌가라는 혐의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목주의자도 생태주의자도 아닌 이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김진석의 지적대로 ‘지역 자치공동체’라든가 ‘국가의 구속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이동하는 사유’라는 각각의 관념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관념성에서 벗어날 때, 분명 “침략적 이동성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김진석) 그것은 이미 우리 삶의 ‘보편적 조건’처럼 돼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우울은 우리가 오래 껴안고 누워서 뒹굴어야 할 우울이다. 정주민도 유목민도 아니었던 ‘산책자’ 보들레르처럼.

“이곳의 인생은 병원과도 같다. 그곳에서 환자들은 제가끔 침대를 바꾸어 다른 곳에 있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병원. 어떤 환자는 난로 앞에 누워 고통하고 싶어하는가 하면, 어떤 환자는 창문 옆자리에서라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에게는 내가 현재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라면 항상 좋은 것처럼 생각되어지는 것이다...”('이 세상 밖이라면 어느 곳이나')

06. 05. 14.

P.S. 원고지 20매를 청탁받은 원고인지라 분량을 거기에 맞췄다. 모든 글은 지 '팔자'를 갖는다. 보들레르에 대한 얘기는 다음에 자세히 적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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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05-15 0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뎌 올라왔군요..^^ 어디에 쓰신글인가요?

몇가지 의문나는 사항이 있어 여쭤보면..

"김진석의 ‘관전평’에 따르면, 들뢰즈 등도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듯이 실제 역사 속에서 유목성이 일종의 공격성을 띠었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들뢰즈 해설자들(혹은 철학적 노마디스트들)은 마치 자본이 전혀 노마디즘과 관계가 없거나 <천 개의 고원>의 주적이 자본주의인 것처럼 암시한다"

라는 부분입니다. 전 아직 <천개의 고원>을 읽어보지 못해서 들뢰즈가 말하는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 저작에서의 유목성 즉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은 자본주의와 "전쟁"하는 유목성을 뜻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그 반대라는 이야긴가요? 위 본문에서는 어느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인지 잘 모르겠네요.

만약 들뢰즈의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이 자본주의와 전쟁을 하는 반 자본주의적 유목성이라면 위에서 예로드신것의 두번째 측면 즉 "자본주의의 주적"으로 노마디즘을 보는것은 전자(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와 동일한 시각에서 유목성을 보는 것 아닌가요? 김진석씨는 그런 측면에서 들뢰즈의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을 이야기하신거 같은데..

혹시 제가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아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님은 이진경씨나 이정우씨의 노마디즘은 "관념적"이다라고 보시는것 같은데
님이 예로드신 보들레르식의 "산책자"적 관점과 이진경씨와같은 관념성은 어디가 서로 다른건지 잘 모르겠습니다..제가 보기엔 둘다 "관념적"으로 보입니다.. "관념적"이라는 것이 세상에 대해 실천적,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관조만하고 "산책"만 하며 우울해하는 것이라면 말이죠.

아 그리고

"어떤 환자는 난로 앞에 누워 고통하고 싶어하는가 하면"

여기에서 "고통하고 싶어하는가 하면"이란 말은 "고통받고 싶어하는가 하면"의 오자같네요..

yoonta 2006-05-15 0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다시 김진석씨의 글을 읽어보니.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이 지칭하는 말은 이진경씨나 이정우씨의 유목주의가 아니라 자본과 국가가 가지는 침략적 유목성을 지칭하는 말이군요. 그렇다면 어느정도 이해 안되는 부분이 해소되긴 하는데 이진경씨나 이정우씨가 자본의 이러한 침략적 유목성을 과연 인지하지 못했을까하는 회의가 좀 드네요. 어디선가 신자본주의와 국제투기자본에 대해서 비판하는 글을 본거 같아서요. 그리고 <천개의 고원>의 주적이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주적"은 무엇일까요? 그것도 애매하군요..

로쟈 2006-05-15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쓰던 게 날아가서 좀더 간략히 쓰겠습니다.^^ 들뢰즈의 유목주의에 대해서는 <천개의 고원>에서의 12장 '1227년 노마돌로지: 전쟁기계' 장을 막바로 참조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도 아직 다 읽지 못했습니다('주적'을 발견하시면 알려주십시오). 제가 받는 인상은 제목에도 표기돼 있지만,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은 자본주의 이전부터 유구하게 작동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자본의 '침략적 유목성'이라곤 하지만, 우리가 생존을 위해 하고 있는 것도 다 그런 거 아닌가요? 김진석의 견해에 공감하는 것은 그가 그러한 공범성(과 우울)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들레르의 시를 인용한 건 똑같이 관념적이라 하더라도 거기엔 아이러니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세상에 대해 실천적, 능동적으로 개입'만 하면 관념적 오류로부터 자유로운 건가요? 역사상의 많은 '실천적, 능동적 개입'을 떠올려보게 되는데, 좀 의문입니다(yoonta님이 실천적, 능동적이란 말을 또 다르게 정의하신다면 모를까). '고통하고 싶어하는가'는 좀 어색하지만('능동적인' 표현이지 않나요?), 민음사 번역본의 원문 그대로입니다. 그냥 놔두었습니다... 근데, 밤을 새시는군요?!

마늘빵 2006-05-15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려운 이야기들을 나누시는군요. 전 가져가겠습니다. 꾹.

yoonta 2006-05-15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공범성을 모르고 과연 이진경씨가 노마디즘을 이야기했을까?라는 회의를 저는 한단 거죠. 김진석씨의 비판에 한편 수긍이 가면서도 왠지 그분 의견도 공허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게 이런 의문점 때문입니다.

(보들레르식)문학적 실천이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시는 로쟈님의 견해에 대해서는 님의 보충설명이 좀 필요한것 같습니다. 나중에 다시 다루어주신다니 그때를 기다려려봐야겠네요..^^

제가 책보다가 종종 밤을 샙니다..^^


로쟈 2006-05-1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신문 인터뷰를 인용한 바 있지만, 이진경씨가 노마디즘에 대해서 얘기하는 내용은 한마디로 '수유+너머'입니다. 그게 '외부'인지에 대한 판단은 자유이겠지만, 저는 시스템 바깥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시스템의 구성적 예외 정도라고 해야겠죠. yoonta님의 '외부'는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만, 보다 진전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를 기대합니다...

딸기 2006-05-15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앉아서 하는 유목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지식인들이 노마디즘 논의를 하는 동안 진짜 노마드들이 '평평한 지구'에서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yoonta 2006-05-15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이야기하시는 이진경씨에 대한 판단은 존중합니다만. 전 님이 좀더 본격적으로 이진경씨나 이정우씨의 텍스트 내부로 들어가 그것의 내적 논리를 구체적으로 논파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김진석씨도 그렇고 님도 그렇고 지금처럼 텍스트 '외부'에서 간단한 인상비평을 하는 정도로는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봅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이진경의 <노마디즘>이나 <미-래의 맑스주의>같은 저작들을 독해하셔서 그들 텍스트 내부에 있는 논점들을 비판해주시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님이 그런 작업들을 하는것에 특별한 동기를 발견하지 못하신다면 뭐 할수없는 일이지만요.

로쟈 2006-05-15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그게 서로 다른 '노마드'라니까 뭐 할말은 없습니다...

yoonta님/ 저보다는 yoonta님이 더 잘하실 수 있을 거 같은데요.^^ <노마디즘>은 부분적으로 읽었습니다. 한데, 아시다시피, <천개의 고원>과 같이 읽어가야 하는 일이 '수유+너머' 같은 공간에서 세미나로 읽는 게 아니라면 여력을 내기가 힘든 일이지요. '노마돌로지' 장에 대해서만큼은 바쁜 일들이 끝나는 대로 마저 읽을 계획은 갖고 있습니다. <미-래의 맑스주의>도 책은 갖고 있는데,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무슨 -주의에는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고진의 <트랜스크리틱> 후반부를 마저 읽는 건 여름방학 때나 가능할 거 같습니다. 이정우씨의 <탐독>은 이 참에 얼마간 읽어보았는데, 도올 이상의 자뻑 스타일이더군요. 그게 '자부심'이면 나무랄 것도 없지만 개인적으론 르네 톰의 책들을 번역하는 일에 더 자부심을 갖는 게 낫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데, 실상은 그들보다 더 시급하게 읽어야 할 책들이 얼마나 더 많은 것인지요!..

yoonta 2006-05-15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를 지나치게 과대평가 하시는군녀..^^(근데 농담이시져? ㅋ) 저야 어학실력도 로쟈님만큼도 못되고 글쓰기 실력은 더욱 딸리고..생업에도 종사해야하니..그래서 이처럼 로쟈님의 독서의 흔적이나마 따라가보면서 같이 공부하는 척이라도 하고 있는겁니다..^^
이정우씨의 탐독은 저도 읽어보았는데 "도올식의 자뻑 스타일"이라는 님표현에 어느정도 공감은 합니다만 그분처럼 이과와 문과 그리고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면서 자유롭게 공부하시는 분도 드물죠. 그때문에 그분 특유의 '자부심'이 생기는 것 같기는한데 뭔가 더 생산적인데 그 자부심이 사용되었으면 좋겠다는 부분에서는 로쟈님과 생각을 같이합니다..^^ 트랜스크리틱은 예상외로 난해하더군요. 탐구나 윤리21이 차라리 더 쉽더라고요. 전반부를 조금 남겨두고 읽다가 말았는데 머리속에 정리해야 할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후반부 독해를 (이곳에서)하시게 되면 즐겁게 님 페이퍼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꼭 올려주시길...^^

로쟈 2006-05-15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담 아니었습니다.^^ 제가 말장난을 종종 하는 편이지만, 말장난의 전제조건은 말을 진지하게, 축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텍스트를 축어적으로 읽습니다. 일단은...

dhkd1246 2007-12-30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과학, 사회과학, 역사, 문학 등 여러 담론의 세계를 유랑하면서 ‘가로지르기’가 곧 그에게는 ‘유목’이고 ‘유목적 사유’인 것.]

[노마드란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 현재를 이해하고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는 방식으로, 특정한 소속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사유하는 존재]

라고하는 명제가 나에게는 많은 이해를 가져다 줍니다. 삶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을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