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공식적으론' 방학에 들어간지라 집에 있는 날이 많아지게 됐다(강의 없는 강사는 대략 백수이다. 즉, '니그로'이다. 아무리 할일이 많다고 저 혼자 우길지라도 말이다). 당장 딸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데려오고 피아노학원에 보내고 데려오고 하는 일이 '아빠의 일'로 다 떨어진다. 그나마 유치원으로 데리러 가는 일도 딸아이와 사이가 좀 좋아졌기에 '허락'받은 일이다.

학원에서 데려와 이것저것 챙겨주고 잠시 놀아주고 저녁 먹이고 양치질 하게 하고 공부하자고 꾜셔서 한글 두어 쪽과 수학 두어 쪽 문제풀게 하고(이런 공부도 딸아이는 '연극놀이'로 하는 걸 좋아해서 내가 친구나 동생 역을 맡아서 문제를 풀어달라고 졸라야 한다) 자리 펴주고 재우고 나니 9시 반이다.

아이는 자기 전에 꼭지점 댄스를 두번 연습했고(아이는 모레 상암경기장에 견학을 간다), 박지성이 골 넣는 장면에서 프랑스 선수가 뒤늦게 볼을 잡으려고 애쓰던 장면이 너무 웃겼다고 어제 새벽의 경기를 한번 더 되새기고는 잠이 들었다(보다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좀 늦게 퇴근한 엄마에게 꼭지점 댄스를 한번 더 보여주고 잤다). 아이는 어제 경기 후반전의 후반에 잠이 깨어 극적인 무승부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비로소 '자유시간'이 됐길래 학회 발표문을 정리한답시고 책상머리에 앉아 머리를 굴리면서 이곳저곳의 뉴스들을 훔쳐보는데 딸아이의 블로그에도 한번 들어가보라는 핀잔이 들려온다. '무관심한 아빠'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이미 듣고 있지만) '쑥쑥 자라는 종팔이!'(박찬욱 감독이 써먹은 거지만, 나도 그냥 '종팔이'라고 해둔다)에 들어가 새로 올려진 사진들을 훑어본다. 그리고는 그 중 한 장을 옮겨놓는다(두 손가락 포즈가 아이의 '공식' 포즈이다). '자상한 아빠'의 가장 확실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놓기 위해서.  

아빠, 엄마의 '결점'들을 모두 타고난 탓에 (한)약을 달고 사는 편이지만, 아이는 잘 먹고 잘 자라주었다. 그래서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달력에다 스케줄을 잔뜩 적어놓으면서도 문득 딸아이를 위한 스케줄은 전혀 없다는 걸 얼마전 발견하고 반성한 적이 있는데, 이번 방학때는 얼마나 교정될 수 있을지(사실, 나는 내 스케줄도 다 소화를 못하고 있다. 무슨 '업적'을 남기는 이들은 대체 어떤 묘수를 갖고 있는 것인지?). 

아이는 혼자서 그림 그리고, 무얼 만들거나 오려붙이면서 노는 걸 좋아하는데, 엄마가 올려놓은 건 그 중 하나인 '우리 동네'이다. 말은 '동네'이지만, 아이의 '우주'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부동산과 교회와 가게와 만화가게는 피아노 학원이 있는 건물 하나에 다 들어 있지만, 아이는 모두 독립시켜서 따로 그려놓았다. '우리동네'인 아파트는 15층 건물이지만, 아마도 정서적인 축약을 거쳐서 2층짜리가 된 듯하다. 내가 읽어낼 수 있는 건 그런 정도이다. 아이의 마음을 읽기 위한 투자를 좀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에게 어떤 아빠로 기억될 수 있을까? 아주 오래전 스무 살 남짓 되던 나이에 나는 인생의 목표가 한 여자에게 존경받는 거라고 친구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때 염두해둔 '한 여자'는 '딸아이'였다. 적어도 딸아이에게만은 존경받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게 나의 심사였고 그럴 경우 구제받을 만한 인생이 아닐까라는 게 계산이었다. 한데, 이후에 여러 '딸들'에게서 확인한 바이지만, 그 '존경'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노력 없는 결과란 없는 법이다.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반복적인 일상이다. 그리고 물론 가끔씩의 이벤트이다!

 

다 뒤져보니 지난 겨울에 롯데월드에 데리고 갔던 게 마지막 '이벤트'였다(장시간 걷고 기다리고 하느라고 아이는 녹초가 됐고 결국 저녁을 먹으러 들른 분식집에서 오후에 먹은 걸 다 토해냈다. 덕분에 나는 롯데월드에 다시는 안 가도 될 '명분'을 쌓았다!). 아이의 생일이 여름방학때인지라 이번엔 뭔가 또 '계획'을 세워야 한다(작년 여름을 조용히 보낸 탓에 더더욱). 이 또한 한참 머리를 굴릴 일이다.

흔히, 학문은 이루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생각해 보면, 아빠의 일, 곧 부업(父業)도 마찬가지이다. 그걸 '아르바이트'로 대충 때우려고 하면 금방 들통난다. 대개 아이들은 아빠의 머리 꼭대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건 아이들이 능숙하게 꼭지점 댄스를 추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지 않은가? 

아이가 자는 모습을 보면서 어떨 때는 이 아이가 혹 아빠의 인생이 구제할 만한 것인가를 탐색하러 온 '스파이'가 아닌가란 생각도 한다. 그 정도면 나는 이미 '세상의 음모'를 모두 간파한 수준이다. 그래서 오늘도 딸아이의 볼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몰래 이 페이퍼를 쓴다. 내일 아침에는 고구마 맛탕을 해줄 것이다(아빠식 맛탕이다). 이틀 정도는 아빠를 존경해주지 않을까? 아니면 반나절? 안되겠다, 좀더 연구해봐야겠다...

06. 0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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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6-20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재밌다가 끝났네요...;; 로쟈님 글을 이렇게 편하게 읽을 수 있다니. ^^

Joule 2006-06-20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예뻐요. 지적인 미모네요. 아빠와 딸,이라고 해서 저는 마이클 두 독 드 빗 감독의 저 유명한 애니메이션 <아버지와 딸>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어 들어왔다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림도 잘 그리는군요.

twoshot 2006-06-20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뛰어난 미모+근사한 그림+꼭지점 댄스를 더해보면 '결점'만 닮은 건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로쟈님의 독자에게는 '고구마 맛탕(?!)'같은 페이퍼였습니다.:)

LAYLA 2006-06-21 0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인 미모라는 쥴님의 표현에 왕동감입니다

로쟈 2006-06-21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도 물정을 다 알아서 귀엽다는 말보다는 예쁘다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칭찬해주신 분들께는 아이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아이는 자고 있어서). 참고로, 종팔이는 저를 별로 안 닮았고 저보다 그림을 잘 그리며, 저보다 춤도 잘 춥니다(이건 비교 자체가 안되지만). 대신에 아직 저만큼 책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조선인 2006-06-21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딸에게 존경받는 건 쉬워요. 다 큰 딸에게 존경받는 거, 그건 정말 정말 어렵다는 거 강조해 드립니다. =3=3=3

로쟈 2006-06-21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제 목표는 '다 큰 딸'에게 존경받는 겁니다. 한데, '다 큰 딸'은 이해심이 많아지지 않나요? '어린 딸들'은 변덕이 심해서, '존경'을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릴케 현상 2006-06-21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을 듯 웃지 않는 아이의 표정이 아주 예술이군요^^=3=3=3

바벨의도서관 2006-06-2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이 이렇게나 이쁘다니요... 저도 그런 딸 있으면 좋겠습니다^^부럽습니다...

biosculp 2006-06-2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애들 환심(아부) 사기위해서 엄마들이 질색하는 일에 맞장구를 치는데요.
가끔 피시방 데리고가 메이플이나 스타시켜주기, 드래곤볼 만화 전질 사주기, 유희왕 카드 사주기. 길거리 음식(불량식품이라고 못먹게 하는것) 사주기 뭐 이정도랄까요.
저는 아들들인데 딸들보면 이쁜 수첩에 스티커 붙이기 이런거 좋아하더군요. 그리고 어린이 보기에 유치찬란한 색이들어있는 장식품등. 저녁에 시간나시면 앞 문방구에 가서 유치찬란한 스티커만 같이 보고 사주셔도 환심정도는 얻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애들 눈높이에서

nada 2006-06-21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는 인상적인 사건 한두 개라도 기억 속에 남아 있으면 언젠가는 이해하는 거 같아요. 핏줄이란 징글징글하지만 그런 미덕이 있죠. 자잘한 건 좀 미흡해 보이십니다만 큰 거 한두 방으로 때우세요.ㅋ 그나저나 저 시도 때도 없는 V자는..ㅋㅋ 전형적인 성배형 V자가 아니어서 좀 다행이긴 합니다만.. 깜찍한 얼굴에 어울리는 사랑스러운 포즈를 좀더 개발해 주시어요~~~

로쟈 2006-06-21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언들 감사합니다. 스티커북들은 저도 사줍니다(기본이죠!).^^ 큰 거 한두 방이 글쎄, '자기방'을 만들어주고, '피아노' 사주고 하는 것들이라(--;), V자형 포즈는 유전형인지 다른 포즈는 어색해하더군요.^^

로드무비 2006-06-21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리바이라기보다는 자랑 페이퍼 같은데요.
딸에 대한 애정을 감출 수 없는.
너무 이쁩니다.^^

로쟈 2006-06-21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복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꽃핀 나무들의 괴로움'입니다. "어쩌자고 세상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라는 난감함...

Joule 2006-06-21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복 시인의 그 싯귀가 있는 시집 제목이 뭔가요.

SMOKE 2006-06-21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쁘군요.

에바 2006-06-21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반갑습니다. 이 서재를 거의 매일 찾고 있는데 배울 게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이쯤 되니 너무 진부한 인사말입니다. 그리고 따님 사진을 자주 보다 보니 꼭 제 딸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로쟈 2006-06-2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oule님/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입니다.
껄껄선생님, 에바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보다는 딸아이가 더 인기가 있는 듯하네요(^^;)...

기인 2006-06-26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로쟈님 이쁜 따님 처음 뵙겠습니다 :) 저는 또 오타 말씀드리고 갑니다. ^^;;;
따님 사진 바로 아래 아래 문단.
아이는 혼자서 그림 그리고, 무얼 만들거나 오려붙이면서 노는 걸 좋아하는데, 엄마가 올려놓은 건 그 중 '하니인'
요즘 친구들도 '달려라 하니'를 알까요. 생각해보니, 로쟈님도 모를수도;;;
(달려라) 하니가 아닌 '하나'로 추측됩니다. 저도 이쁜 딸-스파이 ^^ 한 분과 함께 할 날이 오기를... :)

로쟈 2006-06-26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밝으시군요.^^ 스파이 한 분 모시고 사는 게 공부보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참고하시길...
 

재작년 8월 중순에 모스크바 통신에 올렸던 글의 일부를 따로 떼서 옮겨놓는다. '열차 속의 이방인 농담'이란 글에서 번역에 관한 몇 마디로 어쩌다 들어갔던 대목인데, 중요한 저작들이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우리 독서계의 '관행'에 대한 불만을 얼마간 늘어놓고 있다. 그 관행은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제목은 '침묵에 대하여'라고 고쳐달도록 한다.

 

 

 

 

낮에 (모스크바의) 인터넷카페에 갔다가 알라딘의 신간서적들을 검색해봤는데, 지젝의 경우 ‘최신간’인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 2004)의 경우 ‘기이하게도’ 한 건의 리뷰도 붙어 있지 않았다(*적어도 이 글을 쓸 시점에서는 그러했다. 지금도 이 책은 부당하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요컨대, 아무도 읽지 않았다는 얘기인가? 거의 100쪽 분량의 2판 서문까지 쓸 만큼 지젝이 애착을 갖고 있는 책이며,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요즘 가장 인기 있다는(지젝은 곧 들뢰즈를 추월할 것이다) ‘지식인’ 혹은 ‘사상가’의 ‘대표작’이 이런 ‘냉대’를 받는다는 건 기이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답지 않은 일이지만, 모두들 갑자기 ‘신중해진’ 것인지?

물론 두뇌를 긴장시키는(‘머리를 아프게 하는’이 아니라) 두툼한 ‘이론서’를 완독하고 뭔가 한 마디(=리뷰) 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년 전에 하버마스의 주저 가운데 한 권인 <사실성과 타당성>(나남, 2000)이 번역돼 나왔을 때에도 이와 같은 ‘기이한 무관심’이 조성되었는바, 나는 아직도 그 책에 대한 ‘리뷰’를 보지 못했다. 짐작에, 그런 사정이 지젝의 경우에도 재연되지 않을까 싶다. 이건 지레짐작일까? 하지만, 내 ‘경험’은 그런 지레짐작의 편을 들도록 부추긴다. 다시 번역돼 나온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 2004)에 대해서도 너무나 ‘조용한’ 걸 보면(민음사본이 나왔을 때 얼마나 떠들썩했던가!), 한국의 ‘독서계’(혹은 ‘지식사회’)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모종의 ‘카르텔’이라는 게 있지 않는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침묵의 카르텔…



얼마 전에 한 출판사에서 책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이 거의 없는 말 그대로의 아이디어 제안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누설’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이 제안은 구체화되지 않았다). 하여간에, 제안자는 내가 러시아문학을 공부한다는 걸 알고 나의 ‘책읽기’에 ‘유로지비’란 말이 들어간 제목을 붙이는 건 어떨지 구상해본 듯했다. ‘유로지비’란 러시아어는 ‘바보 성자’로 흔히 번역되지만, 일차적으론 ‘광신도’를 뜻한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를 일컫는 말이 이 ‘유로지비’인바(그는 리자베타 또한 ‘유로지비’라고 부른다), “이 여자는 유로지비구나!”란 말은 “이 여자는 바보 성자로구나!”라는 긍정적 경탄이 아니라, “이 여자는 광신도로구나!”라는 부정적 인지를 뜻한다. 광신도는, 대체적으로 ‘냉정하다’는 얘기를 듣는(‘쿨하다’로 번역하면 나쁜 뜻이 아니지만) 내가 가장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자기-이미지이지만(평소에 나는 좀처럼 흥분하거나 분노하지 않으며 나는 그걸 성격상의 ‘결함’이라고까지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비위가 강한 모양이다), 몇몇 사람들에게 혹 유로지비의 인상을 주었다면, 그건 아마도 남들이 적당히 침묵할 때 떠들어댔기 때문인 걸로 보인다(‘조용히’ 떠들어댔음에도!).

무엇에 대해서 떠들어댔는가? 책을 읽고 쓰는 일을 ‘권리’이자 ‘의무’로 생각하는(물론 그런 일이 아직 밥벌이도 못 된다는 게 유감스럽다) 나의 주된 관심은 좋은 책들을 읽는 것이고 내 생을 바꿔치기할 만한 책들을 쓰는 것이다(그리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다). 후자는 물론 떠들면서 해야 할 일이 전혀 아니며, 내가 떠드는 건 주로 전자에 대해서이다. 즉, 어떻게 하면 좋은 책들을 읽을 수 있을까? 제대론 된, 제값을 하는 책들을. 나는 그런 책들에 경탄하는 한편으로 그렇지 못한 책들, 제대로 안된, 제값을 못하는 책들을 혐오한다. 이건 생태계의 문제이다(가타리가 ‘생태학’을 문제삼는 것과 유사하게). 더불어, 건강의 문제이다(그리고 돈의 문제이다). 불량서적들은 불량식품들만큼이나 유해한바, 정신의 양식이 아니라 독이다.

물론 적당한 불량식품(가령 불량감자들)을 섭취함으로써 그에 대해 ‘내성’을 키우는 것도 생존의 한 가지 방법일 수는 있으리라. 즉 불량서적들도 익숙하게 읽다 보면 또 그런대로 적응이 된다. 하지만, 그런 건 코흘리개들을 등쳐먹는 값싼 불량식품이나 불량서적들에나 해당한다. 그리고 대개 그런 불량식품/불량서적들은 ‘나 불량식품/불량서적’이라고 자신을 공개/공표하며, 오히려 그런 ‘불량함’으로 식자들을 유혹한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불량식품/불량서적이라고 공개돼 있고, 또 그걸 인지한 상태에서 먹거나 읽는 행위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나의 관심사도 아니다.

내가 문제삼는 건, 값비싼 불량식품/불량서적들인바, 이런 것들은 겉으로는 멀쩡하고 고급/고상한 척하지만, 실상은 엉터리 약재와 정교한 무지로 가득 채워진 건강보조식품들이고 ‘고급 교양서’들이다. 즉, 대체로 ‘냉정한’ 나를 분개하도록 만드는 것은 (1)값비싼 것들이면서, (2)그래서, 고상한 체하는 것들이면서, (3)실상은, 부실한 엉터리인 것들이다. 물론 이 세 가지가 모두 결합돼 있는 경우. 그런 경우에 나에겐 ‘저자에의 의지’가 아니라 ‘교정원에의 의지’가 발동한다. 그 ‘교정원에의 의지’란 건, 세상을 좀 바꿔보겠다는 ‘거룩한 의지’가 아니라(세상이 좀 바뀌는 건 부대효과로서나 기대할 만한 일이다), ‘체하는 것들’의 (문화적) 상징폭력을 못 봐주겠다는 ‘저항에의 의지’이다(왜, 문화적 폭력뿐이겠는가, 경제적 착취이기도 하다! 나처럼 벌이도 변변찮은 사람의 돈을 갈취하는!).

지식인들이 위선적인 거야 그들의 유구한 내력이지만, 적어도 책은 정직해야 한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결을 말하자면, 위선적인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자리(=포지션)을 보전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책을 쓰거나 옮기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식인으로서의 ‘상징적 위임’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흔한 방법도 책을 쓰거나 옮기는 것이다. 이건 딜레마일까? 이 딜레마를 돌파/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는 않은바, 두 가지 방법, 혹은 두 가지 ‘행위’가 있다(지젝의 독자라면, 그에게서 ‘행위’란 말이 얼마나 숭고한 의미를 갖는지 알 것이다).

첫째는, 아무도 모르게 책을 쓰거나 옮기는 것이다(이땐 책이라기보다는 ‘논문’이라고 해야겠다). 혹은 자기가 낸 책은 자진해서 자기가 다 사들이는 것이다.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않을 책이지만(대학출판부들에서는 이런 책들을 곧잘 낸다), 덕분에 안전하게 저자로서 행세할 수 있다. 이걸 ‘유사-행위’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리고, 둘째는, 정말로 ‘흔하지 않은’ 방식으로 책을 쓰거나 옮기는 것, 즉 ‘제대로’ 책을 쓰거나 옮기는 것이며(이런 경우는 유감스럽게도 흔하지 않다. 진정 고상하고 고귀한 것들은 드문 것인지?), 이것이 진정한 ‘행위’라고 불려질 만한 것이다. 창작행위, 번역행위...

다른 자리에서 나는 번역자들을 ‘성자들’이라고 일컬은바, ‘자학적일’ 만한 사회적 홀대와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읽을 만한/먹을 만한 ‘정신의 양식’을 생산해내는 일이야말로 성자의 일, ‘바보 성자’의 일에 값한다(나는 이 성자들이 합리적인 보상을 요구함으로써 ‘바보’란 딱지를 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들을 사랑하며 존경한다. 물론 여기서도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성자들과 유사-성자들이 있는바(유사-성자들은 성자들의 이면인 것인지도 모른다. 즉, 유사-성자들을 제거한다면, 성자들도 남아나지 않을지 모른다), 이에 대한 분별을 게을리하는 것은 “굶주림과 다이어트를 등치시키는 것”만큼이나 외설적이며 무책임한/부도덕한 일이다(지젝은 <이라크>에서 이 비유를 두 번이나 사용하고 있는데, 한번은 네그리/하트의 ‘다중(multitude)’ 개념을 비판하면서이고, 또 한번은 레오 스트라우스의 ‘비교적(秘敎的) 지식’ 개념을 비판하면서이다).

 

 

 

 

지젝의 비유를 계속 쓰자면, 내가 떠들어대는 건 일종의 ‘다이어트 비판’이다. 정신의 ‘부실한 양식’에 대한 이 다이어트주의자들의 변명? “다 당신의 다이어트를 위해서야!”(“아는 게 병이잖아?” “그거 알아봐야 체한다구!”) 하지만, 언제나 굶주려 있는 나의 정신은 ‘다이어트 사절’이며, 정말로 알고 싶다. 우리에겐 정말로 ‘침묵의 카르텔’이 있는 것인가? 거기에서 나만 제외/배제돼 있는 것인가?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떠들어대는 건 정말로 순진한 ‘바보짓’인가? 유로지비의 짓인가?..

지젝이 지적한바 ‘음모론’은 불쌍한 사람들(=가난한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런데, 더불어 그가 지적하는바, 우리주변엔 진짜로 음모들이 있다!..

04. 08. 14./ 06. 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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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8월말에 '번역의 속도에 대하여'란 모스크바 통신문에서 다루었던 내용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놓는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읽기에 앞서서 몇 마디 주절거린 것인데, 내용상 독립적이기에 아예 따로 떼놓으면서 제목을 따로 붙여둔다. '늙어가는 느릅나무들'은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자작시의 제목이다.

“신은 죽었다!”란 선언이 니체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돼 있지만, 알다시피 그때의 ‘신’이 뜻하는 것은 어떤 인격체가 아니라 초월적 의미(=기의)인바 우리에게 주어진 것, 즉 ‘이 삶’을 넘어서는, 혹은 ‘이 삶’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신은 죽었다!”라는 그 선언에는 함축돼 있다(“이게 다예요!”). 아무것도 없는 대신에 도대체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힘에의 의지’인바, 생물학 교과서적인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Eat, Survive, Reproduce”(먹고 살아남아서 자손을 퍼뜨리는 일) 외에는 따로 일이 없는 존재들이다(우리는 교량일 뿐이다). 그 ESR이 우리의 존재근거이자 원리이다. 너무도 단순하지만, 너무도 이해되고 있지 않은!



“자연은 잔인하기보다는 단지 무자비하고 냉담할 뿐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내용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선의도 악의도 없고, 잔인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으며, 단지 냉담할 뿐인 어떤 사물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사람의 뇌 속에는 목적이 가득 들어있다. 어떤 사물을 보면서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또는 그것을 만든 동기나 이면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목적에 대한 강박관념이 병적인 상태로 발전하면 그것을 편집증이라 부른다. 즉 실제로는 우연한 불운일 뿐인데도 그 속에 어떤 악의가 있지 않나 하고 의심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모든 것은 목적이 있다는 생각에 깊이 사로잡힌 존재이기 때문이다.”(R. 도킨스, <에덴 밖의 강>, *<에덴의 강>으로 재출간됨)

하여간에 나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결코 당신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우리의 몰이해 또한 ‘냉담한 무관심’의 결과라고 믿기 때문이다(진실 혹은 냉담!).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니체의 철학을 ‘아줌마 철학’이라고 부른바 있다(아줌마는 가족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가족 바깥은 없다!”). 니체는 자신을 경계로 하여, 철학사를 니체 이전과 니체 이후로 구분했는데, 그러한 구분을 조금 비틀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아줌마 철학을 경계로, 아줌마 철학을 문턱으로 하여 양분된다고. 아줌마 철학은 무엇과 경쟁하며, 무엇을 부정하고 거부하는가? 그건 형이상학으로서의 ‘이데아 철학’이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이데아 철학은 (유클리드)기하학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리고 기하학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우리 주변에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것들이다.

가령, 점이란 무엇인가? 가장 단순한 도형으로서 점은 “위치만 있고 크기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점이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표시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관념 속에만 있다. 우리가 종이나 칠판에 찍는 점은 모두 그러한 가상(=이데아)의 유사물이고 복사물일 뿐이다. 선이란 무엇인가? “한 점이 연속적으로 움직여 이루어진 자취”가 선인바, 그것은 “길이와 위치는 있으나 넓이와 두께는 없”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런 선을 우리가 도대체 어디에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현실에서 그릴 수 있는 것은 고작 이데아적 선의 (넓이와 두께를 갖는) 유사물, 복사물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모든 도형이 본질상 가상적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이데아를 본질로서, 실재로서 전제할 때, 현실은 그 복사물이고, 복사물의 복사물이다. 그리고, 가장 어리석은 일은 이러한 복사물 내지는 복사물의 복사물을 진본(=오리지널)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동굴의 우화’는 바로 그러한 착각에 대한 우화이다.

 

 

 



진정한 어떤 것이, 현실 너머에 있다는 관념. 진정한 삶은 지상의 삶 이후에 온다는 관념. 그것이 바로 형이상학(=메타피지카)적 사유의 요체인바, 모든 것은 메타(meta), 즉 이것 ‘너머에’ 있고, 이것 ‘다음에’ 있다. “이게 다가 아니야!” 그것이 이데아 철학의 구호이다. 하지만, 다시 반복하자면, 아줌마 철학은 “이게 다예요!”라고 말하는 철학이다(그것이 여전히 철학이라면). 어째서 이게 다인가? ‘메타’라는 건 가상이고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즉, ‘메타’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캉 버전으로는 “메타언어란 없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필요하지도 않다. 이미 현실은 그 자체만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메타란 것은 (모자라는) 현실에다가 무엇을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고르지 않지만 충만한 현실을 대패로 깎아내서 판판하게(그래서 모자라게) 만드는 것이다. 곱슬머리를 다리미로 펴듯이.

 

 

 



칸트의 ‘보편 철학’과 니체의 ‘가치 철학’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 칸트적 보편성은 차이를 지우고 개별성을 깎아냄으로써 얻어진다. 그에겐 남성과 여성이 철학적 주체로서 아무런 차이를 갖지 않는다. 실상 시계에 맞춘 듯이 똑같이 반복되던 그의 하루하루가 아무런 차이를 갖지 않는 ‘보편성’이었다. 하지만, 니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세상엔 고급하고 고귀한 존재들이 있는 반면에 저급하고 저속한 존재들이 있다고. 이 ‘적대적’ 차이는 결코 극복되거나 지양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성이란 없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일 따름이다. 존재하는 건 고르지 않은 차이들(=시점들)이고, 각각에 충만한 현실뿐이다.

니체 철학의 핵심은 철학에 ‘의미(Sens)’와 ‘가치’를 도입한 데 있다고 들뢰즈가 규정할 때, ‘도입’이란 말은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그것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가져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편)철학이 삶에서 깎아낸 의미와 가치를 다시 회복시킨다는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시점의 변경 혹은 도약이 있다. 혹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다. 가령, 현대 물리학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칸트 대 니체'는 '뉴턴 대 아인슈타인'이다. 즉 철학에 의미와 가치를 도입한다는 것은 뉴턴의 절대적 시/공간 대신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시공간(=크로노토프)을 도입하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유클리드 기하학적 공간에 곡률을 도입함으로써 유클리드적 공간을 상대화함과 동시에 시공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하는 것, 그것에 견줄 수 있는 것이 니체 철학이 칸트 철학에 대해서 수행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때도 ‘도입’이란 것은 어떤 편의성 때문에 직선으로 간주(=계산)되었던 세상의 곡률이 회복되는 것이지, 전혀 새로운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적어도 상대성 이론이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면).

요컨대, 현실은 이미 의미-담지적이며, 세상은 이미 곡률-의존적이다(유클리드적-평면적 세계란 보편성의 세계가 아니라, 곡률=0인 특수성의 세계이다). 그러한 사정에 대해서 우리가 의미를 도입하고, 곡률을 도입하는 거라고 말하는 것은 편의상의 이유에서일 뿐이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미 그 자체로 전부인 현실이란 무엇인가?

“모든 생명체가 자연이 갖고 있는 유전자 모두를 성공한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기 때문에 성공적인 유전자를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장차 조상이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 조상이 된다는 것은 살아남아 자손을 남긴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생물들이 훌륭하게 설계된 기계를 만드는 유전자를 물려받는 경향이 있는 이유이다. 그것은 바로 새는 왜 잘 나는가, 물고기는 왜 헤엄을 잘 치는가, 원숭이는 왜 나무를 잘 타는가, 바이러스는 왜 잘 번식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그것이 바로 왜 우리가 삶을 사랑하고 섹스를 좋아하며 아이를 사랑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이 세상은 장차 조상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생명체들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다위니즘(Darwinism)이다.”(R. 도킨스, <에덴 밖의 강>)

 

 



 

반복하자면, 우리는 “Eat, Survive, Reproduce”(먹고 살아남아서 자손을 퍼뜨리는 일) 외에는 따로 일이 없는 존재들이다(우리는 교량일 뿐이다). 그 ESR이 우리의 존재근거이자 원리이다. 인간이 ‘의미의 질병’을 앓는 동물인 것은, 그러한 ESR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에서는 이걸 우리의 대뇌가 급속하게/불완전하게 진화한 결과로 본다(보다 근본적인 건 언어 때문이다. 언어는 ‘의미의 질병’을 낳는 산파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그건 상당히 덩치가 큰 문제이기 때문에).

니체의 표현대로, 우리의 위장을 닮은 대뇌가 해야 할 일은 위장과 마찬가지로 ‘소화작용’일 뿐이며, 그러한 작용으로써 우리를 생존하게 하고 기운 나게 하는 것뿐이지만, 이 대뇌는 언제부턴가 자신이 소화해낼 수 없는 물음을 던지게 되었는바, 그것은 “What’s it all about?”(이게 다 무슨 수작일까? 혹은, 이게 다 무슨 의미일까?)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에의 물음이다.

알다시피 형이상학의 표준적인 물음은 “What is it?”, “그것은 무엇인가?”이다(WIT라고 부르자). 그 물음은 ‘무엇을 넘어선 무엇’에 대한 물음이다. 이것은 달리 목구멍에 걸리는 물음(=뼈다귀)인바, 이 물음을 떠안게 되면서부터, 혹은 이 물음(=뼈다귀) 자체로부터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병든 인간’이다. 즉 그 물음으로부터 인간은 쇠약해지기 시작했다(인간은 ‘무엇들의 세계’뿐만 아니라 ‘무엇을 넘어선 무엇들의 세계’에 살게 된 것. 즉 그는 양다리를 걸치기 시작한 것이다. “삶은 다른 여자에게 있다!”).



생각건대, 모두가 ESR에 몰두할 때, 어느 날 문득 이 물음을 처음으로 던진 인간은 위트 있는 인간이었음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병적인 인간이었다. 문제는 이 WIT가 상당한 전염성을 갖고 있다는 것(역시 언어 때문일 것이다). 마치 일본의 ‘이모 원숭이’가 모래 섞인 모이를 바닷물에 던져서 모이만을 골라내는 방법을 ‘발견’한 이후에 이것이 원숭이 사회에 ‘문화’로 전파되었던 것처럼. 한 ‘위트 있는 이모’가 발견했을 이 물음은 인간의 문화를 병든 문화, 병적인 문화로 변모시켰다(종교사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역사이면서 동시에 병리학사 아닌가? 모든 종교의 전제는 삶=질병이라는 것이니까. 그래서 치료가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하다는).

 

 

 



그리하여 ‘병든 인간’은 ‘병든 인간들’이 되었고, 언젠가부터 인간 자체가 돼 버렸고, 인간 자체의 존재방식이 돼 버렸다. 해서, 원래의 병들지 않은 인간, 위트에 물들지 않은 인간으로 되돌아가는 여정에 붙여진 이름이 초인(=위버멘쉬)이라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인간은 인간을 극복함으로써만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호모 로쿠엔스가 극복될 수 있을까? 물론이다. 하지만, 그건 오직 언어를 통해서일 것이다!), 이젠. 초인(=위버멘쉬)에 대한 구구한 설들이 있지만, 내가 이해하는 바의 초인은 병들지 않은 인간, 건강한 인간, 그래서 ‘현재의 이 삶’을, ‘이 모양’을 긍정하는 인간이다. 즉 그에게 다른 삶은 없다(“삶은 다른 곳에 없다.”). 모든 남자는 ‘이 남자’이고, 모든 여자는 ‘이 여자’이다(해서 “세상에 옛 애인이란 없어요!”).

헤겔의 말을 비틀면, 초인, 그는 “현실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이며, 긍정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현실에 대한 아무런 부정도, 비판도 않는 니체는 보수적인가? 결코 아니다. 역시 헤겔의 예를 따라서, 니체 우파가 “현실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이라고 고집한다면(이들의 구호는 “이대로!”이다), 니체 좌파는 “긍정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즉, 긍정적이지 않은 것은 현실이 아니며, 현실은 긍정적인 것일 때 비로소 ‘현실’이다)이라고 주장한다. 니체는 현실에 맞서는 어떠한 가상(illusion)도 거부하는바, 진정한 빛은 현실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발하는 빛이다.

요컨대, 인간과 초인, 혹은 병들고 나약한 인간과 씩씩하고 건강한 인간이 있다. 전자가 중언부언하면서 수사적으로 말한다면, 후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동어반복적으로 말한다. “나는 나야!”라고. 먹는 건 먹는 거고, 싸는 건 싸는 거고, 싸지르는 건 싸지르는 거라고.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자들은 부득이 위트를 섞어서 말한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우리 사는 날들이 전부는 아닐 거라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당신은 어느 쪽인가, ESR의 편인가, WIT의 편인가?(혹은 생각 없는 편인가, 생각만 많은 편인가?)



두서없는 말이 많았는데, 요점은 니체 철학의 의의이며 니체를 읽을 필요성이다. 니체를 읽는 재미는 정신의 스트립 쇼를 보는 재미이다. 그는 고상한 체하는 우리의 정신을 발가벗긴다. 그리고 말한다. “이거예요, 이게 다예요!” 그런 점에서 니체는 유머러스하다고 말하고 싶다(이때의 유머는 형이상학의 ‘위트’와 대조되는 것이다). 이 유머는 니힐리즘의 유머이다. 니힐리즘에서 니힐(nihil), 즉 무(無)가 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더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가치나 권위도 니힐리즘은 부정하는바, 그것은 그러한 가치/권위가 부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존재 혹은 사실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더불어,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그러니까 어떤 존재가 고귀해지는 것이 아니라(고귀한 의미를 부여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고귀한 존재가 있는 것이다. 어떤 존재가 저속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저속한 존재가 있는 것이다. 그건 당신이 머리를 싸맬 일이 아닌 것. 그냥, 멍게가 있고 해삼이 있듯이(멍게적인 해삼과 해삼적인 멍게가 있는 게 아니라), 쏘가리가 있고 왜가리가 있듯이(거기에는 물론 매운탕도 있다), 제법 있는 것들이 있고, 또 없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찬 것들이 있고, 빈 것들이 있는 것이다(“빨간 우산, 노란 우산, 찢어진 우산…”).

중요한 건, 그걸 당신이 긍정하느냐 마느냐이다(기독교 버전으로는, 보기에 좋으냐 싫으냐). 긍정? 그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정도의 긍정을 말한다(다시 태어나도 이 남자/이 여자를?!). 그러니까 그럭저럭 보기에 괜찮은 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나는 나다!”라는 동어반복에 이르는 여정(“높다란 학교길”)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닌 것이다(그런 생각만 하면 나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어쨌든 그런 확정/판결(“나는 나다!”)을 통해서, 우리는 제 자리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간다. 인간이란 가면을 벗어 던지고, 혹은 양의 탈을 벗어 던지고, 늑대에서부터 성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같은 놈’이란 딱지를 떼고서 정말로 무엇임을 확증하게 되는 것이다(그레고르 잠자처럼 말이다). 나-말미잘, 나-촌닭, 나-너구리를 거쳐서, 나-거머리, 나-하이에나, 나-청소부, 나-나폴레옹, 나-아저씨, 나-아줌마, 나-세컨드, 나-어리버리에 이르기까지. 왜 동물성뿐이겠는가? 나-콩알, 나-잡초, 나-호박, 나-해바라기, 나-물망초, 나-도깨비풀, 나-옥수수, 나-고목나무, 나-가여운 풀벌레 등등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이들의 쟁투이고 합창이다(“우산 셋이 나란히, 티격태격 걸어갑니다”). 그런 세상에 대한 ‘인식’을 나는 예전에 몇 편의 시들로 옮긴 적이 있다. '늙어가는 느릅나무들'은 그 중 하나이다.

 

 

 



느릅나무는 다형질적이다, 다형질적 조합이다.
여럿이 나란히 도열한 느릅나무들, 은
제각각 나이를 먹는다, 나눠먹지 않는다. 어릴 적
느릅나무는 무얼 모르는 느릅나무, 물정에
눈을 부릅뜨면서 느릅나무 뿌리가 조금씩 굵어지면서
느릅나무는 다혈질적이다, 다혈질적 조합이다.
여럿이 나란히 도열한 느릅나무들, 은
제각각 느릅나무를 꿈꾼다, 꿈으로 무장한다.
극좌와 극우의 곁가지들을 모두 가지치기한
중도적인 느릅나무, 중도좌파적인, 중도우파적인
느릅나무, 옆에 다소곳이 신파적인 느릅나무,
신좌파적인, 신우파적인 느릅나무, 들
저마다 한 그루의 느릅나무 이상을 꿈꾼다.
느릅나무의 극복을 꿈꾼다. 꿈꾸며
아, 이 겸손한 느릅나무들! 물길을 찾고
햇빛을 쬐고 탄산가스를 마시며 부지런히
동화작용한다, 작용하며 늙어간다. 어릴 적
여럿이 나란히 뿌리내린 그 자리들에서
제각각 비틀리고 말라가며 쪼그라진다.
곧 느릅나무 조합에서 제명된다.

느릅나무는 다형질적이다, 다형질적 조합이다.
여럿이 나란히 제각각 살아남는 느릅나무들-

다시 반복하자면, “모든 생명체가 자연이 갖고 있는 유전자 모두를 성공한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기 때문에 성공적인 유전자를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쩔 건가요?” 우리가 목적이 아니라 교량이고, 과정이며 몰락이라는데(도킨스 버전으로는 ‘유전자 운반체’), 어쩔 건가요? “어쩌긴요, 더없이 유머러스한 일인 걸요! 어쩜 그럴 수가!..”

06. 06.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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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그 2006-06-08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시는 (몇 편 안 읽긴 했지만) 항상 어렵군요! 어쨌든 잘 읽고 갑니다.^^

로쟈 2006-06-0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계인'들의 시를 안 읽어보셨군요. 이 정도는 어려운 시의 축에도 못들어갑니다!..

2020-06-08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8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작년 2005년 연초에 모스크바 통신문으로 '서비스란 무엇인가'란 글을 띄운 적이 있다. 오늘 예상대로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둔 지방선거 결과를 보면서(여론조사에 따르면 여당의 선거 참패 원인은 노무현 정권의 '무능' 때문이라고. '무능력'이라는 게 노정권의 '프레임'이 돼 버렸다), 문득 김훈의 인터뷰에 관해 쓴 그 글이 생각나서 옮겨온다. 그 글 또한 AS차원에서 작성됐던 것인데, 격으로 치자면 이 글은 AAS(애프터 애프터 서비스)쯤 되겠다. 강의준비를 잠시 손놓고 잠시 AS를 손본다(그나저나 지방선거 이후의 정국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언젠가 나는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이란 통신문을 쓴 적이 있는데(*이건 '양파, 혹은 문체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다시 정리해놓았다), 최근에/연말에 인터넷에 뜬 이들의 인터뷰/칼럼을 우연히 읽으며 세 사람에 대해서 한번 더 몇 마디 덧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김규항에 대해서 쓴 걸 재정리한 것이 '희망에 대하여'이다). 어쩌면 연말연시이고 귀국날짜가 다가오면서(*나는 한달 후에 귀국했다) ‘한국사회’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는지도 모르고(젠장!), 또 어쩌면 ‘반복’에의 욕구가 우리에게 기본적인 것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냥 AS(애프터 서비스) 정신인지도.

(*)김훈과 관련하여 최근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건 그가 과거 직장 후배들인 한국일보 기자들과 나눈 인터뷰(대화)이다. “우리는(=후배들은) 17년 동안 한국일보에서 기자로 일한 선배 김훈(56)을 보았고, 이 시대 문장가요, 소설가인 그를 만났다.” 아마도 오랜만에 만났을 선후배들이므로 대화는 장시간이어졌을 테지만, ‘정리’된 건 (기대보다) 소략했다. “대화는 45만부나 팔린 소설 <칼의 노래>로 시작됐다.”고 하는데 역시 작가의 ‘밥벌이’로서는 소설만한 게 없다는 걸 다시 확인한다.

 

 

 

 

(*)권당 인세를 1,000원씩만 잡아도 4억 5천만원이다. 이 정도면 그는 한때의 이문열과 조정래, 황석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공지영, 은희경을 뺨치겠다. 그만하면, ‘가장(家長)’으로서 그가 목에 힘을 줄 만하다(생각하면, 나도 이런 통신문들 대신에 소설을 써야 하지 않을까? 나는 언제쯤 큰소리치는 ‘가장’이 돼 보나?).

(*)그러니, 그가 ‘소설가’를 주업으로 삼고, ‘에세이스트’를 부업 정도로 삼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아니, 필연적이다. 파스칼의 단장을 비틀자면, “적성, 돈 -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돈되는 일을 하는 것은 필연적”이니까. 하긴 에세이스트로서 그가 벌어들인 돈은 소설가로서 번 돈에 1/10이나 되었으면 다행일 것이다(소설가의 책상을 쪼개면, 에세이스트의 책상이 열 개도 더 나올 것이다. 아니 열의 열제곱?). 이하의 인터뷰는 부분적으로 축약된 것이며, 내 생각은 (언제나 그렇듯이) (*)표시가 돼 있다.

-<칼의 노래>에 대한 우리사회, 특히 정치권의 반응과 그 작품을 원작으로 한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대한 느낌은.

(*)이순신 외에도 이명박, 이병철에 관한 드라마들이 방영중인 걸로 안다. 이런 군인/기업가들의 ‘실명’ 내지는 ‘모델’ 드라마가 유행하는 것은 ‘미지근한’ 현정부의 소위 ‘무능력’을 보상하기 위한 차원이 아닌가 싶다. 질베르 뒤랑 같은 상상력 이론가의 용어를 빌리자면, ‘상상력의 균형잡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라캉의 용어를 쓰자면, 한국사회는 이른바 ‘주인’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순신, 이명박, 이병철은 모두 한 시대의 ‘주인기표’들 아닌가? 왜 이런 주인기표들이 요구되는가? ‘노무현’이란 기표가 주인의 행세를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집의 제목을 비틀자면(<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현정부의 지난 2년은 “한다던 일 하지 않고”로 요약될지도 모른다. 정치적 카리스마를 갖고 견주자면, 김대중-노무현의 비주류정권 커플은 과거 군사정권의 전두환-노태우 커플을 반복하고 있다. 집권초기 노무현 정부는 ‘권위주의’를 청산하겠다고 하면서 필요한 ‘권위’마저 청산해버린 것은 아닌지?

“(단호하게) <칼의 노래>를 386애들이 읽고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 때 배 12척 갖고 300척을 부순 것처럼 하겠다는 거야. 무지몽매에 빠진 거지. 이순신이나 되니까 한 거야. 걔들이 갖고 나가면 다 죽어. 12과 300은 현대사회에서 적용이 안되는 이야기야. 중세 이야기를 쓴 건데 어떻게 현대 지도자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TV에다 대고 말하는 거야. 그걸 보고 눈물이 나오더라고. ‘미쳤구나. 요새 내가 글을 잘못 써 가지고 어린 것들 망치는구나’ 했어. 진짜로 내 소설을 읽는 건 고마운데, 적이 300척 갖고 나올 때 지도자라면 최소한 200척은 갖고 나가야지. 12척을 갖고 나가야 할 일이 없도록 해야지. ‘니들이 12척을 갖고 나가면 백전백패다’는 말을 TV에서 했는데 MBC가 빼버려 나만 바보가 된 거지. 얼마나 약 오르는지. 드라마? 안 봐. 처음 한 번 봤는데 아동극 수준이야.”(*김훈이 약이 올랐다고 하길래 이 대목은 축약하지 않았다.)

-그럼 왜 쓰셨어요.

“그때, 그분(이순신)의 실존적인 부분을 썼는데, 현실을 지휘하는 리더들이 12척으로 300척을 깨듯 ‘경제를 살리겠다’니. 미치겠다 이거야. 적이 300척이면 500척 갖고 나가도 이길까 말까 하는데. 그래서 상종을 안 했어.”

(*)현정부의 ‘아마츄어리즘’에 대한 비판을 김훈도 공유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 그리고 그 자신이 판단하기에도 김훈은 소설가로서는 아마츄어이지만, 둘의 범주가 다르므로 넘어가기로 하자.

-이런 과정에서 우리사회가 극단적 이분법으로 갈라진 것 아닌가요.

“회색분자가 많아야 좋은 세상이야. 회색과 중도가 깃발을 꽂지 않으면 우리사회는 어려워져. 그 깃발 아래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지만 양심적인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 해. 그러면 희망이 있어. 중도란 인간의 상식이지.”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지만 양심적인 사람들”, 곧 ‘회색분자들’이 나의 용어로 하면, “덜 나쁜 사람들”이고 (천국이나 지옥이 아닌) 연옥에 갈 사람들이다. 소설은 그런 사람들의 세계이며, (혁명이 아닌) 정치는 그런 사람들이 적당히 타협하면서 꾸려나가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는 윤리와도 구별된다. 이 대목에서만큼은 나는 김훈과 의견을 같이한다. 나는 우리가 ‘적당히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우리의 나쁜/얕은 본성을 간과/무시하는 태도는 아이러니컬하지만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인간은 ‘벌레’로서 과소평가돼서도 안되지만, ‘천사’로서 과대평가돼서도 안된다.



-이어 그는 특유의 섬세한 분석으로 지금, 우리 사회를 해부했다. “386이 리더가 됐잖아. 근데 걔들은 사회의 물적 토대를 건설한 경험이 전혀 없는 아해들이야. 그래서 도덕적인 거지. 인간의 선의를 모아 가지고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는 낭만주의, 아름답지.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거든. 엄청난 세금을 내고, 반드시 아들을 군대 보내는 것은 우익이거든. 우익에겐 세가지 즐거움(右翼三樂)이 있어. 세금 왕창 내고, 아들 최전방으로 보내고, 질서를 지키고. 아 그래야 우익이 완성되는 거 아냐. 그런데 강남에 잘 나간다는 성형외과 의사들이 소득세 50만원 나왔다고 항의하지. 그런 사회는 부숴야지.”

-그러면서 자신도 굳이 말하라면 ‘중도 우익’이라고 했다. <칼의 노래>의 성공으로 세금도 왕창 냈고, 아들 군대 갔다 왔고. “우익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세상을 책임지는 거야. 좌익과 진보는 세상을 맡을 수 없어. 물적토대가 없으니까. 비참하게도 우리 시대의 물적토대의 역사는 우익이 만든 거야. 좌익이 반항하더라도 우익 토대 아래서 반항한 거라고. 그리고 한국사회의 물적 토대를 건설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야."

(*)내가 강조한 대목들에서 김훈의 기본적인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미 지난번에 김훈의 세계관을 ‘가장(家長)의 허무주의’라고 규정했는데, 그러한 세계관/태도가 여기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물적 토대’라는 건 물론 ‘밥벌이’로 치환될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는 ‘밥벌이’의 토대를 건설한 ‘가장(家長)’이고(그러니까 여기서 ‘박정희’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보통명사이며 일종의 메타언어이다. ‘이순신’이 그런 것처럼). 이 밥법이란 건 항상 ‘타협’을 전제로 한다(흔히 하는 말로, ‘기분대로’ 직장생활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가장(家長)의 세계란 건 도덕적인 선, 혹은 아름다움에 못 미치는 세계이면서 동시에 그와는 무관한 세계이다. 가장들이 휴일에 주로 하는 일이란 낮잠 자는 것이며, 그들의 주특기는 한입으로 두말하는 것이다(“내가 그랬었나?” “그게 아니고…”). 그런 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부도덕한 가장’이 아니라 ‘무능력한 가장’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다른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적당한 부도덕’은 용인되거나 오히려 ‘능력’으로 인정된다. 이건 아주 상식적인데, “차라리 죽을지언정”을 내세우는 도덕적이고 기개 높은 유전자들은 아름답고 고상할지언정, 굶어죽기 십상이어서 자손을 남기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의 ‘성공한’ 조상들은 도덕/명분을 고집하기보다는 가족을 위해서 적당히 불의와 타협도 하고 남을 이용해먹기도 했던 양반들일 것이다. 적어도 남들만큼은.

(*)단, 남들 이상은 곤란하다. “강남에 잘 나간다는 성형외과 의사들이 소득세 50만원 나왔다고 항의하는 사회”는 곤란하다(그런 사회는 부숴야 한다!). 그러니까 우익삼락(右翼三樂)을 누리지 못하는 우익은 우익으로서 자격미달이다: (1)세금 왕창 내고, (2)아들 최전방으로 보내고, (3)질서를 지키고(공공질서?). 한데, (1)세금 왕창 내기는커녕 공과금 내기도 버거운 데다가, (2)(아들 군대보낼 일은 물론 없거니와) 최전방 ‘부근’에서 단기사병(방위병)으로 복무하고, (3)무단횡단으로 두 번 범칙금 낸 바 있는 나는 우익이 되고 싶어도 못되겠다. 근데, 반대로 좌익의 조건은 어떤 건가? 이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나? 김규항한테 물어봐야 하나? 아님 홍세화?

(*)하여간에 그런 조건이라면, 우익단체에서 자발적으로라도 엄격하게 심사를 해서 우익 자격증이라도 부여하는 게 어떨까 싶다. 그래야 우익으로서 자부심/자긍심을 가질 것 아닌가? 또 그래야지 (1)탈세/탈루를 밥먹듯이 하고 (2)돈주고 아들 군대 빼고 (3)각종 편법으로 국가기강을 문란하게 하는 작자들이 ‘족보’도 없는 우익 행세를 하거나 어중이떠중이들이 그런 작자들한테 일당 받고 우익으로 동원되는 일이 없어질 것 아닌가. 해서, 사이비-우익들만 판을 치는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는 좌익의 준동이 아니라 우익의 결핍이다.

(*)김훈의 말마따나, 경험도 없는 ‘아해들’(=좌파들)이 무얼 알겠는가? 우리 사회의 물적 토대, 즉 펀더멘털을 책임지고 있는 건 우익 아닌가? 그러니, 작금의 경제불황도 다 우익의 책임이며, 현정부의 무능도 (그들을 쥐고 흔드는) 우익의 책임 아닌가? 상황이 이러할진대, 비분강개하여 자진(自盡)하는 우익 하나 없는 것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우리의 우익은 일본의 야쿠자만도 못한 것이다).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서 그토록 ‘우려’하면서(그 우려는 ‘값싼 노동력’ 상실/훼손에 대한 우려인가?) 통일에 대해서는 경원시하는 우익들만 득세하는 것도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런 현실에 비추어볼 때, 나는 김훈의 ‘커밍아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김훈의 ‘보수주의’를 비난하는 좌익 소아(小兒)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건 “새는 좌우의 양날개로 난다”(이영희)는 기본적인 ‘진리’이다.

 

 

 



-박 대통령이 그렇게 위대한가요.(*내 식으로 번안하자면, “가장이 그렇게 위대한가요?”)

“5,000년의 역사를 바꾼 게 박정희야. 가난에서 가난이 아닌 것으로 바꾼 건 단군 할아버지와 맞먹는 힘이야. 우리나라에 차가 돌아 다니고, 고층 빌딩이 서고, 지금 고기를 먹고 있는 것도 그의 덕이야. 그건 사실이고 리얼리즘이야.”

 

 

 

 

(*)아마도 이런 ‘기성세대’의 마인드가 ‘젊은’ 독자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킬 만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박정희’란 기표는 ‘박정희의 시대’를 가리키는 주인기표이다. 그건 ‘정주영’이라고 바꿔불러도 무방하고, ‘이병철’이라고 바꿔불러도 무방하다. 소위 한국사회의 산업화/근대화라는 ‘물적 토대’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면, "부르주아는 역사에서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게 ‘사실’이고 ‘리얼리즘’이다. ‘민주주의’란 상부구조는 그런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 내가 더불어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런 역사적 ‘사실’과 ‘리얼리즘’이 생물학적/생태학적 사실과 리얼리즘이기도 하다는 것이며, ‘사실’은 ‘당위’와는 또다른 차원이라는 점이다.

-그의 정치적 과오는 어떻게 하고요.

“물론 그런 것까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리더는 반드시 대중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해. 다중(대중?)이 하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 반대로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해. 박정희나 이순신이나 강감찬이나.”

 

 

 

 

(*)내 생각에 김훈의 착각은 박정희의 ‘정치적 과오’가 그의 ‘치적’과 구별/분리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까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하지만, 실상 박정희의 ‘치적’을 낳은 ‘물적 토대’는 그의 ‘정치적 과오’가 아니었을까? 과연 그 시대의 ‘성장 드라이브’가 (‘정치적 무과오’로 가정될 수 있는)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었을까? 성장과 도덕이 양립할 수 있었을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라에서 우리는 더 잘 살면서 동시에 더 바르게 살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김훈은 ‘박정희주의자’로서, 그리고 ‘가부장적 마초’로서 불충분하다. 그는 박정희/가장(家長)의 (불가피한) 정치적/도덕적 과오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는 ‘사실’/‘리얼리즘’을 강조하지만, ‘실재(the Real)’와는 대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어때요.

“노대통령의 마음은 로맨스야. 선한 마음을 담아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거지. 그의 낭만주의야말로 역대 누구에도 없던 아름다움이야. 뜻은 옳고 바르고 도덕적이지만, 그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한 현실적 물적 토대가 없는 거야.”

(*)여기서도 김훈은 ‘아름다움/물적 토대’의 이분법을 쓰고 있다. 그 이분법은 ‘아름다움/책임’의 이분법이기도 하다. 현정부는 아름다운 소리들을 늘어놓지만, 그걸 책임질 만한 ‘물적 토대’가 없다는 비판이다. 이 대목에서 음미해볼 만한 것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이다. 즉 박정희 말기에 은밀하게 추진되다 실패하고 만 핵미사일 보유 시도 말이다. ‘가장(家長)’으로서의 박정희는 군사적/외교적 대미 종속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소리들’이 필요한 게 아니라 ‘물적 토대’(=핵)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사실, 북한이 미국에 대해서 뻣뻣하게 나오는 것도 그 긴가민가한 핵 때문 아닌가?(물론 실상은 외부의 ‘군사적 위협 요인’에 대한 미국 자체내의 요구가 그런 ‘북한 판타지’를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있는 듯하지만.)

 

 

 

 

(*)무얼 가지고 있지도 않은 (대장부들의) 큰소리는 ‘허튼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더불어, 평화는 말이 아니라 평화를 지켜낼 만한 힘에 의해서 지켜진다. 그럴 만한 힘이 없다면, 알아서 기어야 한다. 해서, 나의 의견은 (일부 수구보수들의) 친미/숭미적 태도와 박정희 숭배는 모순적이라는 것이며(물론 기회주의적 꼴통들이 이 ‘모순’을 헤아리기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일부 ‘아름다운’ 좌파들의) 물적 토대(=힘) 없는 정의에의 요구는 기만적이라는 것이다.

-기자와 소설가 중에 어느쪽이 좋은지.

“기자로 못한 원한을 지금 풀고 있는 거야. 기자 할 때는 6하원칙에 맞게 써야 하는데 소설을 쓰니까 너무 편해. 근데 나는 사실 6하원칙이 위대한, 최고의 문장이라고 생각해. 사실과 그것을 확인하는 것의 존엄함을 알아야 해. 지금 신문들을 보라고. 사실과 의견을 혼동하고 있어. 보수신문이나 진보신문이나 똑같아. 의견을 사실인 양 떠들고 있으니 미쳤지. 나는 두 발짝 세 발짝 물러났어. 너무 진이 빠져서.”

(*)나는 6하 원칙이 ‘최고의 문장’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존엄’하다고는 생각한다. 이 존엄함을 던져버린 신문들은 보수나 진보나 곧 다 망할 것이다.

-이번 문학동네에 소설 <머나먼 속세>를 쓰셨던데, 만족하십니까.(*얼마전에 출간된 <강산무진>에 수록돼 있다.)

 

 

 

 

“작가는 실패할 수도 있지. 기자라고 기사를 매일 잘 쓸 수 있냐? 내년 2월부터 ‘치정’에 관한 소설 쓰려고. 앞으로 인류가 소설을 쓸 일이 없도록 만들게. 여기 후배들 예쁘지만 다들 소설 못쓰게 해야지(웃음).”

(*)이런 대목에서 김훈은 아주 재미있는 ‘캐릭터’이다. 그가 “앞으로 인류가 소설을 쓸 일이 없”을 만한 걸작, 그것도 ‘치정’에 관한 걸작을 써주길 나도 기대한다. 치정(癡情)? “남녀 간의 사랑으로 생기는 온갖 어지러운 정”을 말한다. 그걸 끝내줄 수 있는 치정소설? 그가 그 어지러운 미로 속에서 그저 생환해 오기만을 바란다.

-좋아하는 후배들이 많다.(*요즘은 좋아하는 후배들이 아니라 부러워하는 후배들이 많은 거 아닌가.)

“나는 잡놈이여.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서 깨지는 인간이 바로 김훈이야. 내 살과 뼈는 김구 선생 따라다니던 아버지(김광주)에게서 받은 것이거든. 염상섭, 채만식을 존경하지 않아. 세상의 바탕이 폭력이라는 걸 알았던 아버지를 존경하지. 난 대학에서 배운 게 없어. 길바닥, 잡놈 사회서 배운 거야. 기자라는 건 잡놈 근성이 있어야 돼. 아카데미즘도 아니고 리얼리즘의 세계라고.”

 

 

 

 

(*)여기선 약간 오버하는 듯하다. 염상섭, 채만식(?)도 기자였으며, 그들의 소설세계란 것이 또한 아카데니즘이 아닌 리얼리즘의 세계인데 말이다(이념적으로도 두 작가는 김훈과 마찬가지로 ‘중도 우파’ 정도 아닌가?). 그러니까 그가 소설가로서 “염상섭, 채만식을 존경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건 소설가로서 아직 덜 깨져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하긴 그의 책임만은 아니다. 쓰는 족족 상을 받으니. 참고로, 작가의 부친은 기자였으면서 중국 고전의 번역자, 무협소설 작가로도 활동했다.  

-한 후배의 고향이 경남 밀양이라고 하자, 그는 최근 그곳을 다녀왔다고 했다. 바로 여중생 집단 성폭행이 자행된 그 곳. 그는 탄식했다. “나라가 망했더라. 남자 새끼 엄마들이 미쳤어. 도덕과 윤리가 없어. 단군 이래 최악의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자기 자식밖에 몰라.”

(*)이 대목에서 김훈은 ‘사실’과 ‘의견’을 혼동하고 있다. “나라가 망했더라”거나 “단군 이래…”라는 식의 수사는 기자의 것으로도, 소설가의 것으로도 좀 수준이하이다. 물론 잡담의 수준은 된다. 집단 성폭행 사건의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나(‘남자 새끼들’이 ‘여중생’을 집단 성폭행하고 살해 암매장이라도 한 건가?), 짐작에 ‘단군 이래’ 그보다 더한 사건도 널리고 널린 게 대한민국이고, 새삼스러울 것 없는 우리의 역사다. 따라서, “나라가 망했더라”라는 호들갑은 오히려 사건/현실의 준엄함을 욕보이는 것이 된다.

(*)대신에, 나로서 흥미로운 건 “남자 새끼 엄마들이 미쳤어. 도덕과 윤리가 없어.”란 김훈의 표현이다. 자세히 지적한바 있지만, ‘가장(家長)의 허무주의’에서 핵심적인 건 도덕/윤리로부터의 ‘열외’이다(그것이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대장부’와 두말하는 ‘가장’의 차이이다). 열외이긴 하지만 완전한 면제는 아니어서 그것은 심리적 외상, 곧 트라우마로 남는다.

 

 

 

 

(*)알다시피, 박정희의 아킬레스건은 ‘정치적 과오’이며, 거기에 견줄 만한 김훈의 아킬레스건은 (한국일보 기자로서) ‘5공 시절의 부역’이다. 그런 그로서 가장 입에 담기 어려웠을 말, 그래서 좀 해보고 싶었을 말은 대놓고 속시원하게 “도덕과 윤리가 없어!”라고 남들을 비판하는 말일 것이다. 거기에 걸려든 것이 ‘남자 새끼 엄마들’이다. 그런데, 그 ‘미친 엄마들’이야말로 가장(家長)으로서 ‘정신없는 아빠들’의 대응물 아닌가?

(*)아빠들이 ‘식구들’ 때문에 정신없었듯이, 엄마들은 ‘자식들’ 때문에 미쳤다. 그러니, 도덕과 윤리가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여기서도 김훈은 자신의 트라우마의 실재(the Real)과 대면하지 않으며, ‘남자 새끼 엄마들’이란 판타지(=핑계)로 빠진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그가 자기 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들보다도 흥미로운 ‘캐릭터’라고 생각한다(캐릭터가 아닌 김훈은 에세이스트 김훈이며, 그 김훈이 내가 존경/존중하는 김훈이다).

(*)부분적으로 축약한다고 해놓고서는 인터뷰 전문을 옮겨놓고 말았다. 분량이 늘어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아무런 ‘농간’도 부리지 않은 것이 된다. 개인적으론 김훈이 내년 2월부터 쓰겠다는 ‘치정’에 관한 소설이 관심이 간다. 그것이 우리 동시대의 이야기라면. 알다시피, <칼의 노래>나 <현의 노래> 등은 ‘역사소설’(루카치)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며, 그냥 역사적 인물이나 소재를 빌미로 한 ‘이야기’이다(우리말의 ‘이야기’도 상당한 오지랖을 자랑한다).

(*)그러니 그런 걸 쓴 작가를 내가 소설가로 불러야 할지, 이야기꾼으로 불러야 할지 헷갈리는 게 나의 결벽에서 비롯되는 건 아니다(이전에 감상을 썼지만, 나는 <화장> 같은 ‘분바른’ 단편도 지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치정’이라면 사정이 좀 다를 수도 있다. <보바리 부인>이나 <안나 카레니나> 등과 같은 근대소설의 걸작들이 다 치정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훈은 그들과의 경쟁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고 또 단련될 것이다...

06. 05. 31. 

P.S. 김훈의 <강산무진>을 사놓은 지 오래 되었으나 아직 읽을 짬을 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번 방학 때나 무진 기행을 다녀올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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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6-01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종석이나 김규항 보다는 김훈 얘기를 하실때가 더 흥미롭습니다. "그는 ‘사실’/‘리얼리즘’을 강조하지만, ‘실재(the Real)’와는 대면하지 않는다"...언젠가 김훈론으로 정리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로쟈 2006-06-0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부분 상식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따로 정리할 필요가 생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김훈에 대해서는 다른 두 사람보다 아무래도 훨씬 오랜 인연을 갖고 있으니까요...

블루비니 2006-06-03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다른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적당한 부도덕’은 용인되거나 오히려 ‘능력’으로 인정된다. 이건 아주 상식적인데 -> 동물세계에 인간사회의 개념인 '부도덕'이라는 판단을 할수가 있을까요 ㅎㅎ

로쟈 2006-06-04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도덕'이란 건 '이기적 유전자'란 표현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점에서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따옴표는 그래서 붙인 겁니다...

종이달 2022-05-16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2004년 연말에 쿠스투리차의 영화 'Life is a miacle'(2004)를 빌미로 하여 "쿠스투리차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요?"란 제목의 모스크바 통신문을 쓴 적이 있다. 주된 내용이 '기적'에 대한 것이어서 다시 정리하는 김에 '기적에 대하여'란 제목을 붙이도록 한다(이 글은 기적에 대한 나의 수다이다).

“지금 나는 졸리지만 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종이와 펜을 가지고 이야기를 쓸 것이다. 나는 내 안에서 어마어마한 힘을 느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어제 이미 다 생각해놓았다. 이것은 기적을 행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는 우리 시대에 살면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기적을 행하는 자이며, 어떤 기적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를 아파트에서 쫓아낸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그 아파트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대신 아파트에서 고분고분 떠나 교외에 있는 헛간에서 지낸다. 그는 이 낡은 헛간을 아름다운 벽돌집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 헛간에서 살다가, 평생 동안 단 한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은 채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이전에 한 차례 인용한 바 있지만, 하름스의 <노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앞에서 나는 ‘기적으로서의 삶(Life as a miracle)’과 ‘여행으로서의 삶(Life as a tour)’의 대립양상에 대해서 언급했는데(*단순하게 말하면, 여해에서 기적을 구하는 '여행으로서의 삶'은 '유사-기적으로서의 삶'이다), ‘기적을 행하는 자’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는 (1)평생 동안 단 한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았다. (2)평생 동안 단 한번의 여행도 행하지 않았다(“계속 헛간에 살다가”)는 걸로 특징지어진다. 이건 변증법적 지양의 길인가, 아니면 제3의 길인가? 이하의 내용은 이 한 대목에 대한 주석의 성격을 갖게 될 것인바, 겸사겸사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쿠스투리차의 영화 얘기로 되돌아올 것이다.

 

 

 



아마도 ‘기적을 행하는 자’의 라캉적 명칭은 ‘주인기표’가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며 나는 내가 말하는 바이다.” 여기서 기적이란 내가 나인 것이다. 왜냐하면, “상징적인 동일시와 상상적인 동일시의 불가능한 ‘원의 사각형’은 반드시 어떤 잔여물을 남”(<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216쪽)기기 때문이다. ‘원의 사각형’이란 말은 ‘square of the circle’의 번역인 듯한데, 사전에 다 나와 있는 바이지만, 그건 숙어적으로 (원을 네모지게 하는) ‘불가능한 일’을 가리킨다(우리말 ‘원의 사각형’이 그런 뜻을 갖고 있는가?). 때문에 “불가능한 원의 사각형”은 동어반복이며, “불가능한 일”로 충분하다. 다시 옮기면, “상징적인 동일시와 상상적인 (완벽한) 동일시는 불가능하며 그것은 반드시 어떤 잔여물을 남긴다.”

즉, 상징적/상상적 동일시는 불가능한 일이며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러니, ‘나(I)는 나(me)다’라는 상징적 동일시가 ‘기적’인 것은 당연하다. 특히나 나(me)가 ‘주인’ 혹은 ‘주인기표’일 경우에는 더더욱. 68혁명 이후의 현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대학 담론’에서(그 담론 공식의 하단부에서) 드러나는 바는 (에릭 샌트너가 말하는바) ‘임명(investiture)의 위기’ 혹은 서임(敍任)/수임(受任)의 위기이다(지젝, <이라크>, 188-9쪽).

그러니까 (주인으로서의) 어떤 임무나 역할을 주려고 하지만, 아무도 안 받겠다며 거부하는 걸 말한다(예컨대, 아무도 반장 안 하겠다고, 아무도 대통령 안 하겠다고, 못 해먹겠다고 버티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주체가 S(=주인기표)와 관계 맺는 것의 불가능성, 주체가 주인기표와 동일화하는 것의 불가능성 혹은 주체가 부과된 상징적 위임을 떠맡는 것의 불가능성”(<이라크>, 189쪽)을 가리킨다. 이 불가능성이 산출하는 것은 ‘상징적 동일성(=정체성)’의 상실이다. 즉, 상징적/사회적 정체성으로서의 ‘나(Me)’를 상상적 ‘나(i)’가 거부/회피함으로써 ‘나(i)≠나(Me)’가 되는 것이다(사회학자 미드의 ‘I-me’ 관계를 ‘i-Me’ 관계로 수정했다).

거꾸로, 기적이란 ‘내가 나인 것’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나란 말인가?”란 부인으로부터 “나는 다름 아닌 나란 말이야!”란 수락에 이르는 여정(물론 이때의 ‘나는 나다’라는 건 동어반복이 아니다. 그것이 표시하는 건 역설적으로 동어반복의 불가능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은 ‘운명애’의 인간이다(비록 라캉은 니체를 참조하지 않지만). 그리고 이때의 운명은 (니체를 따를 때) 다리로서의 운명이고 몰락으로서의 운명이다. 너는 너의 운명(=몰락)을 사랑하는 자인가?

운명애로서의 ‘나=나’가 ‘기적’이라면, 그것에 대한 거부/회피로서의 ‘나≠나’가 흔히 가리키는 것은 투어이고 일탈/도착이다(흔히 ‘나’를 찾아간다는 명목의 이 행은 실상은 ‘나’로부터 미끄러지는 여행이다. 이런 여행담의 종결은 보통 집에 돌아와 보니까 거기에 ‘나’가 있더라는 식이니까). 그걸 좋은 쪽으로 말하면, 유목이고 탈주가 된다(무엇의 유목이고 탈주인가?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블랙메일과 핫머니 아닌가? 정작 유목/탈주의 ‘모델’인 집시들은 탈주하고 있는가? 자신들이 탈주한다고 생각하는가? 무엇을 재배치하는가? 매번 재배치되는 건 전략 핵무기 아닌가? 사고/사유의 재배치는 뉴에이지즘과 과연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 생각을 바꾸면, 파트너를 재배치하고 체위를 바꾸면 새로운 세상이 되는가?).

하지만, ‘나=나’라는 상징적 동일시의 “상실의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갖가지 형태와 장치를 갖춘 향락으로 인해 온통 사방에서 시달리는 일이다…”(<이라크>, 189쪽) 번역문의 ‘향유’를 ‘향락’으로 고쳤다. ‘향유에 시달린다’는 건 우리말로 넌센스이다. 여기서 ‘갖가지 형태와 장치를 갖춘 향락’이란 지젝의 말은 비유적인 말이 아니며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



러시아의 한 TV채널에서는 ‘플레이보이’사(社)에서 만드는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매일같이 보여주는데, 요즘은 주로 스트립쇼와 ‘섹스의 모든 것’이란 제하의 프로그램이 나온다(‘모든 것이 가능한 섹스’라고 해야 할 듯하다). 스트립쇼야 흔하게(?) 보는 거지만, ‘섹스의 모든 것’에 나오는 것들은 간혹 엽기적일 때가 있다.

성기 피어싱부터 각종의 도구와 장치들을 이용한 새도-마조히즘과 집단섹스에 이르기까지 르포식으로 보여주는데(<아이즈 와이드 샷>에서도 보여지는 집단섹스 등은 ‘판타지’가 아니다), 참가자들은 다들 희열에 차 있는 듯하지만(혹은 희열을 연기하는 듯하지만) “온통 사방에서 시달리는” 그들은 사실 너무 고생스러워 보인다(아무런 마취도 없이 성기를 피어싱한다고 생각해보라).

‘향락’이라는 이름의 바로 그러한 고생/고통이 우리가 ‘나=나’라는 기적을 포기하는 대가로 얻는 ‘보상’이다(웬만하면 기적을 택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나는 소위 ‘성 범죄자들’이 보내져야 할 곳은 감옥이 아니라 이러한 (어떠한 금지도 없는) ‘섹스 천국’이라고 생각한다(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라!).(‘섹스 천국’의 유일한 금지는 외부에서는 절대로 아는 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르톨루치의 문제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나=나’(라는 ‘파시즘’)에 대한 알레르기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안티-오이디푸스’적이다. 영화에서 말론 브란도와 마리아 슈라이버는 자신들의 이름을 지우며, 아파트라는 익명성의 공간에서 섹스만을 소통(불)가능성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들은, 특히 이해할 수 없는 아내의 자살 때문에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진 말론 브란도는 남편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으로부터, 자신의 수많은 (가짜)이름들로부터 필사적으로 벗어나고자(탈주하고자) 한다.

그에게서 ‘나=나’의 세계란 가식적인/의례적인 탱고의 세계에 다름 아니기에(그는 탱고경연장에서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까 보임으로써 그러한 세계를 욕보이고자 한다). 그러한 그가 도달하게 되는 마지막 지점은 물론 죽음이다(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지는 것이지만, 그에겐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죽음도 ‘껌’이었다). 그의 죽음을 순전히 부르주아 여성의 변덕/배신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 소박한 견해일 것이다.

‘나=나’라는 테마를 사이에 두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대척관계에 놓일 수 있는 것이 자크 도마엘의 <토토의 천국>이다(원제는 ‘영웅 토토’였던 듯하다). 신생아 병동에 난 화재소동 때문에 자신의 운명이 부잣집 아이의 운명과 뒤바뀌었다고 ‘믿는’ 토토는(자신의 연인도 빼앗긴다) 노인이 되어서 부도 위기에 몰린 이 재벌 친구(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한스’라고 해보자) 대신에 암살당하는 운명을 선택한다. 그는 그럼으로써 ‘나=한스’로 이행해가며, 자신의 ‘진정한 나(=한스)’로서 죽음을 맞는 ‘기적’을 연출한다. 그는 자기 운명의 주인공/영웅(Hero), 즉 주인-기표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 주인기표가 말 그대로 ‘죽음’을 의미하는 텅 빈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캐나다 감독 장 클로드 로종의 <레올로>에서 다루어지는 것도 같은 테마이다(나는 이 영화를 10년 전에 한 영화제에서 연거푸 보았다. 이 영화 또한 내게 ‘기적’을 보여주었다). 제대로 똥싸는 일에만 관심이 집중돼 있는, 몬트리올의 한 빈민가정에 태어난 소년 레오는 자신의 본래적 아버지는 시실리의 농부라고 ‘믿으며’ 그래서 자신의 이름도 이태리식으로 ‘레올로’라고 부른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무식한 아버지, 그리고 미친 누이들과 정신박약의 형 사이에서 삶을 버텨나가는 그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리고 옆집 처녀 비앙카를 사랑한다. 그러다가 비앙카가 돈을 받고서 할아버지에게 매춘을 한다는 걸 알고서는 할아버지를 죽이려다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영화의 나레이터에게 남겨진 것은 레오, 아니 레올로가 남긴 기록들뿐이다. 그것은 레오가 레올로라는 상징적 위임을 떠맡고자 분투했던 날들의 기록들이기도 하다(하면, 기적들도 웬만하진 않다).

 

 

 



어쨌든 인상적인 것은 죽음/정신을 담보로 하더라도 끝까지 ‘나(me/Me)’라는 상상적/상징적 정체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혹은 그걸 유지하고자 하는 분투들이다 가령, 모파상의 단편 <쥘르 삼촌>은 여기서 좋은 분석거리가 된다. 거기서 문제되는 것은 한 가족의 상징적 정체성이다. 부자가 돼서 돌아올 걸로 이들 가족이 꿈꾸는 ‘쥘르 삼촌’이 아무리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허울은 필수적이다.

멕시코 감독 립스테인의 걸작 <짙은 선홍색>에서 자신의 ‘가발’에 악착같이 집착하는 대머리 이발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그 자신을 ‘가발을 쓴 나’하고만 동일시하고자 강박적으로 애쓴다. 가발을 안 쓰면 어떤가? 하지만, 그에게서 ‘가발을 안 쓴 나’는 곧 비존재(nothing)이다. 허리에 달랑 ‘새끼줄’ 하나만 두른 걸로 ‘의상’을 대신하는 한 원주민 부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새끼줄로 가려지는 부분도 없지만, 그들은 새끼줄을 안 찬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다(새끼줄도 안 차고 어딜 돌아다닌단 말인가?).

여기서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은 모두 동일한 의미연관을 갖는다. 즉,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실제로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다) 나/우리의 상징적 정체성에 필수적인 보증물이며 버팀목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 이전의 차원에 있는 향락의 무의미한 중핵”으로서의 그것들은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이데올로기의 최종적인 버팀목으로 기능한다. <이데올로기>에서 지젝은 욕망의 그래프를 해설하면서 잉여 향락의 차원을 끌어오는바,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호명’(알튀세르) 너머의 차원에 있는, 이데올로기의 최종적인 버팀목으로서의 이러한 잉여물을 고려하기 위해서이다. 이에 따라 이데올로기 비판은 두 가지 상보적인 절차로 구성된다(이하 <이데올로기>, 217-223쪽 참조).



-하나는 담화적인 차원으로서 이데올로기 텍스트의 ‘증상/징후를 읽는 독법’이다. 이는 의미의 즉각적인 경험을 해체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의 영역이 얼마나 서로간에 이질적인 ‘부유하는 기표들’의 조립을 통해, 다시 말해 어떤 ‘매듭’의 개입을 통한 전체화를 통해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입증해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의미의 즉각적인 경험’이란 건,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순진한 지각/수용을 뜻한다. 서로 이질적인 기표들이 어떤 ‘매듭’을 통해 얽어 매지고, 조립(=편집)됨으로써 산출되는 게 이데올로기적 텍스트인데(가령 신문의 지면을 보라), 그걸 자연스러운 것으로 지각/수용하는 데 이데올로기의 함정이 있다. 증상/징후 읽기는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해체’하는 것인바, 이러한 작업은 바르트의 신화 읽기와 유사하다.

-다른 하나는 향락의 중핵을 추출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가 (환상 속에 구축된 이데올로기 이전의) 향락을 함축하고 조작하고 산출하는 방식을 밝혀내는 것이다.

첫 번째의 ‘담화분석’을 두 번째의 ‘향락의 논리 분석’으로 보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예증하기 위해서 지젝이 들고 잇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가장 순수한 육화’로서의 반유태주의이다. “담화분석의 수준에서 유태인의 형상 속에 투자된(=투여된) 상징적인 중층결정의 네트워크를 밝혀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첫째, 거기엔 전치의 과정이 있다. 반유태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계략(=속임수)은 사회적인 갈등(=적대)을 건전한 사회조직체와 그것을 부패시키는 힘으로서의 유태인 사이의 갈등(=적대)으로 전치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전치는 유태인과 돈 거래를 연관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착취와 계급적인 적대의 근원은 노동계급과 지배계급의 기본 관계 속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조합이 계급투쟁을 대치하면서 ‘생산’력(노동자, 생산의 주최자…)과 ‘생산’계급들을 착취하는 상인들 사이에 위치하게 된다.”(218-9쪽)

마지막 문장은 오역인데, 러시아어본을 참조해서 다시 옮기면 이렇다: “그렇게 되면, 착취와 계급적 적대의 근원은 노동계급과 지배계급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생산계급(노동자+산업자본가)과 (생산계급을 착취하고 건강한 협력관계를 계급투쟁으로 변질시키는) 상인계급 사이의 관계가 된다.” 즉, 반유태주의는 ‘노동계급과 지배계급의 적대’를 ‘생산계급과 상인계급의 적대’로 전치시킨다. 이러한 전치를 보조하는 것이 응축(=압축)인데, “유태인의 형상엔 상하위계급들이 연상되는 특징들이, 상호 대립적인 특징들이 응축되어 있다. 유태인은 예를 들어 더러우면서도 지적이고, 음탕하면서도 (성적으로) 무기력하다 등등.”

담화분석에서는 이러한 유태인의 형상이 징후/증상이라는 걸 읽어낸다. 즉 그것이 코드화된 메시지이자 암호이고, 사회적 적대의 왜곡된 표상이라는 걸 읽어내는 것이다. 그러한 읽기가 바로 전치/응축작업의 ‘해체’이다. 하지만, 이러한 은유(=전치)-환유(=응축)의 논리 분석은 유태인의 형상이 얼마나 우리의 욕망을 사로잡고 있는지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유태인이 환상의 틀 속에 들어와 우리의 향락을 구조화하는 방식”을 고려하는 것이다.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목적은 바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적대관계에 분할되지 않으며, 각 부분들 사이의 관계가 유기적이고 상보적인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경우는 물론 사회를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로서, 하나의 사회적 신체로서 보는 통합주의적인 관점이다… 우리는 물론 이러한 ‘하나로 통합된 신체로서의 사회’는 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환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220쪽)

그렇다면, 이러한 통합주의적 비전과 적대적인 갈등에 의해 분열된 실제 사회간의 거리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유태인이다. “유태인은 건전한 사회조직을 부패시키는 이질적인 신체, 외부적인 요소이다. 요컨대 ‘유태인’은 물신이다. ‘사회’의 구조적인 불가능성을 부인하는 동시에 구현하는 물신인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것은 사회적인 장 속에서 향락이 분출되는 지점을 표시한다. 따라서 사회적인 환상이란 개념은 적대라는 개념에 대한 필수적인 대응물이다. 환상은 정확히 적대적인 균열을 은폐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기능은 (사회의 구조적인) 이러한 비일관성을, 다시 말해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실패한 동일시를 보상해주는 것이다.” 예컨대, “파시즘에 있어 ‘유태인’은 파시즘 자체의 불가능성을 고려하고 표상하는 방편이다… 결국 ‘유태인’은 단지 어떤 근본적인 장벽에 대한 물신적인 구현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221-2쪽) 더불어 지적하자면, 스탈린 체제에 있어서 ‘인민의 적’들은 사회주의 자체의 불가능성을 고려하고 표상하는 방편이었다. 왜 우리가 완전한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도달하지 못하는가? 인민의 적들 때문이다! 왜 진정한 세계화가 실현되지 못하는가? 분파적 테러리스트들 때문이다! 등등.

“따라서 이데올로기 비판은 전체주의적인 응시에 의해 인식된 인과율의 연쇄를 전도시켜야 한다. ‘유태인’은 사회적 적대의 실제 원인이라기보다는 단지 사회가 하나의 완결되고 동질적인 전체로서 자신의 완전한 동일성은 획득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장벽과 불가능성의 구현물일 뿐이다. 유태인은 사회적인 부정성의 실제 원인이라기보다 사회적인 부정성이 실제의 현존을 떠맡는 지점이다.”(222쪽)

마지막 문장을 다시 옮기면: “유태인은 사회적 부정성의 원인이 아니다. 유태인의 형상은 사회적 부정성 자체가 실정적인 것으로 전화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 비판은 어떤 주어진 이데올로기적인 구성물 속에서 그것 자체의 불가능성을 표상하는 요소를 탐사하는/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인 환상의 횡단’은 이런 식으로 ‘증상과의 동일시’와 상관적인 게 된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사회적 환상으로 다루는데, 사회적 환상과 개인적 환상이라는 (불)가능한 구분을 도입하자면,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은 가족적/개인적 환상이기도 하다. 보다 일상적인 용어로 말해서, ‘환상’을 우리의 (구조적인) 실패에 대한 ‘핑계’가 되어주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의 기본문형은 “그것만 없(었)다면(if not only)” 혹은 거꾸로 “그것만 있(었)다면(if only)”이다. 쥘르 삼촌만 있다면, 가발만 있다면, 새끼줄만 있다면, 상징적 동일시가 가능해지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될 거라는 기대/가정이 바로 환상의 중핵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상의 횡단이란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이 다만 허울이며 핑계라는 걸 인지/확인하는 것이다. 즉,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과 유태인은 모두 ‘환상’이며, 그 너머에 있는 건 ‘실재라는 사막’이고 ‘shit’이며, ‘개똥’이고 ‘nothing’이라는 걸. 거기에 있는 건 궁극적으로 죽음 충동뿐이라는 걸. ‘개똥-되기’에의 충동.

앞에서 나는 ‘나=나’로의 이행이 (불가능한) 기적이며, ‘나≠나’(투어적 존재론)가 그러한 기적에의 거부/회피라고 말했지만, 그때의 불가능한 기적은 불완전한 기적이기도 하다. 보다 온전한 기적의 내용은 ‘나=나’가 아닌 ‘나=0’라는 사실의 인지/확인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그걸 ‘기적의 횡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즉, 진정한 기적이란 “나는 나이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기적이다(“주여,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걸 순차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기적은 두 번 일어나며, 두 번 일어나야만 한다. “나는 나다”라는 기적,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기적.



다시 반복하자면, 하름스의 <노파>에서 ‘기적을 행하는 자’는 (1)평생 동안 단 한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았다. 왜인가? 그는 기적을 행하는 자이지만, 동시에 그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기적을 행하는 자이며, 어떤 기적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자신을 ‘기적을 행하는 자’와 동일시하기가 첫 번째 기적이라면, 그 ‘기적을 행하는 자’를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자’와 동일시하기가 두 번째 기적이다.

흔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적’이라고 일컬으며 축복하지만, 그건 기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거야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이지만, 그리스도는 신이며 최소한 신의 아들이 아닌가? 벼룩이 뜀뛰기를 잘 하는 게 기적이 아니듯이, ‘특별한 존재’가 기적(奇蹟)을 연출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기적은 다른 데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물리고 싶다고 했지만,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모든 걸 뒤바꿔놓을 수 있었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정한 기적은 바로 그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음’이다. 그걸 나는 ‘기적 없는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기적을 행하는 자’는 (2)평생 동안 단 한번의 여행도 행하지 않았다. 투어로서의 삶을 ‘나=나’로부터의 도피라고 했지만, 그러한 도피의 이면은 ‘나=0’과의 대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우리가 진정으로 주체가 되는 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승인함으로써이다. ‘주체의 공백/궁핍(destitution of subject)’이란 말이 뜻하는바, 진정한 주체의 자리란 텅 빈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걸 무위(無爲)의 주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라고 한 가수는 노래했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한, 내가 ‘당신’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이란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비라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으며, 혁명의 시간도, 민주주의도 도래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날 때, 혁명의 시간과 민주주의가 도래할 때,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우리는 결코 그것이 기적이라고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아무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타르코프스키(1932-1986)의 마지막 영화 <희생>(1986)은 전적으로 ‘기적 없는 기적’에 바쳐진 영화이다. 자신의 아들 안드류샤에게 바친 이 영화의 이야기는 “은퇴한 노배우 알렉산더가 생일을 맞이하여 꾸는 세계 종말의 꿈과 그것을 막으려는 노력의 하루 낮 하루 밤”을 다루고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에 따르면, ‘우리 세기(=지난 세기)의 마지막 우화’인 <희생>은 한마디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 관한 영화다. 그는 3차 대전(=세계의 종말)에 맞서서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지켜내고자 간절한 기도를 드리며 신에게 (종말 대신에) 오늘과 같은 하루가 내일 또 주어진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는 다음날, 어제와 같이 밝은 햇살의 아침을 맞이하게 되자 그는 신에게 감사하며 가족들 몰래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는 결국 앰뷸런스에 실려간다.

사실 이 영화는 암투병중이었던 타르코프스키가 자신의 영화적 유언으로 만든 것이며, 자신의 아들과 인류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 영화 속 알렉산더처럼 모든 걸 희생하겠다는 각오로 찍은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의 기적은 알렉산더의 간구대로 다음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다른 가족들에겐 일상적인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 것이었지만, 알렉산더는 그 하루에서 신의 은총과 기적을 본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한다(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자신의 ‘말씀’, 즉 로고스 또한 신에게 제물로 바친다). 만약에 당신이 이 ‘기적’ 같은 영화를 보면서 눈물 흘리지 않았다면(동시에 이 영화는 아주 코믹하다), 아직 당신의 삶은 기적이 아니라 투어에 가까운 것이리라.

바라건대, 당신 스스로가 ‘기적을 행하는 자’임을 믿을 것이며 세상은 너무도 많은 기적으로 충만해 있음을 믿을지어다. 아멘.

06. 05. 30.



P.S. 쿠스투리차의 <삶은 기적이다>에서는 시작 장면에서 “삶은 정말 기적이군!”이란 대사가 나온다. 우체부가 주인공 루카의 집 암탉이 닭장 둥지에 잔뜩 낳아놓은 달걀들을 보면서 감탄하며 내뱉는 대사이다. 전쟁과 난장 속에서도 (일상적) 삶이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 그것이 쿠스투리차가 보는 기적이다.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버전으로 말하자면, (지진과 같은 재난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 기적이다. 그렇듯, 기적은 활달하고 기적은 눈물나며, 기적은 충만하다. 눈물 흘리는 성상/성화나 불상/탱화를 찾아 다니는 이들만 모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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