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육에 이르는 병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대개 책뒤표지에 실려 있는 문구들은 실제 이상으로 과장된 경우가 많아 그 문구에 혹해 책을 집었다가 기대보다는 실망한 채로 책을 덮은 적이 종종 있다. <살육에 이르는 병>에 제일 크게 써 있는 뒤표지 문구는 '충격적인 결말을 확인한 순간,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이다. 이번에는 어땠을까? 무엇 하나 더하고 뺄 것이 없는 진실이다. 정말이지 마지막 장을 넘기자마자 제일 첫 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꼼꼼이 다시 읽어봐야만 했다. 차근차근 복기하면서 여기가 힌트였구나, 저기가 수상했구나, 확인하면서 빨려들 듯이 내리 두 번을 읽어야 했던 것이다. 입가에는 내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소문이 무성했던 신본격 미스터리의 걸작 <살육에 이르는 병>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여러모로 주의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절대로 속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밝혀진 진실에 완전히 무장해제당하고 말았다. 간단히 말해 서술트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장르 안에서는 현재까지 국내에 나온 작품에서는 최고가 아닐까 싶다. 독자들이 필연적으로 오독을 할 수밖에 없게끔 작가가 공들여 만든 상황들과 영리한 미스디렉션이 돋보이며, 단 하나의 실마리도 놓치지 않으려 작정하고 읽는 주의 깊은 독자들마저 한 방에 넉아웃시킬 충격적인 반전은 정말 놀랍다. 단서가 약간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범인의 정체와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때는 그야말로 세계가 붕괴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혼란에 빠져버렸다.

 

작품은 세 사람의 시점이 교차되면서 진행된다. 독특하게도 연쇄살인범이 검거되는 에필로그가 먼저 나온다. 이 연쇄살인범이 범행 대상을 물색하고, 구체적으로 범행을 저지르는 장면, 그리고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연쇄살인범의 비정상적인 내면 심리 묘사가 한 축이다. 또한 그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전직 형사의 시선이 두번째 축이고, 연쇄살인범과 굉장히 가까운 관계인 여인이 의혹을 품고 나름의 조사를 벌이는 것이 마지막 축이다. 이 세 시선은 클라이막스가 다가올수록 빠르게 교차되며, 독자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강한 몰입감을 전한다. 그러다 마지막 한 페이지, 아니 마지막 한 문단이 공개되면 누구나 당황하고 말 것이다. 아마도 그 다음에는 맨 첫 페이지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될 테고.

 

워낙에 반전이 핵심인 작품이라 최대한 정보 없이 읽는 게 가장 재미있을 것이니 내용 소개는 이만 줄인다. 다만 이 책을 읽는 분들은 꼭 저명한 추리소설가 가사이 기요시 씨의 해설을 놓치지 말기 바란다. <살육에 이르는 병>이 단순한 오락으로서의 추리소설이 아닌 일본 사회에 잠복한 사회 병리 현상을 심도깊게 그리려는 패기 넘치는 작품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트릭과 범인이 그렇게 설정된 데는 뜻깊은 이유가 있다. 작품 전체의 구조가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와 긴밀하게 호응하는, 신본격에서는 보기 드문 투철한 작가 의식으로 씌어진 수작이다.

 

19세 미만 구독 불가 딱지가 붙은 작품이므로 걱정하는 독자들이 제법 있는 것으로 아는데, 잔인성이나 엽기성, 선정성이 조금 과한 부분은 분명히 있다. 솔직히 심약한 독자라면 구토할지도 모르고, 여성 독자들이 불쾌할 구석도 많다. 그러나 단순히 화제를 낳기 위해 그런 식으로 붓이 간 건 아니라고 믿으며, 작가는 이 정도로 '세게' 쓸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이 작품의 핵심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수위가 적절했다는 말이다.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는 바로 얼마 전 <미륵의 손바닥>으로 국내에 첫 선을 보인,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로 <시계관의 살인>의 아야츠지 유키토의 직속 후배다. 트릭 지상주의인 신본격군에서 트릭도 만족스러우면서 주제 의식까지 잘 살려낸 <살육에 이르는 병>은 분명 손꼽히는 작품으로, 신본격 작가들이 우리 세력에서도 이 정도 작품을 내놓았다, 하고 자랑할 만하다.

 

개인적으로 추리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일까, 최근 쏟아져 나오는 추리소설 가운데 옛날 것들 만큼 결말에서 화들짝 놀라본 예가 별로 없다. 슬슬 물려가고 있던 참인데, 오래간만에 완전히 홀딱 속아 넘어간 반전을 선보인 이 작품을 읽으며 정말 즐거웠다. 세상 천지에 사기당하면서도(속으면서도) 이렇게 즐거운 것이 추리소설 말고 또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나는 추리소설을 좋아하며, 추리소설에서 멋들어지게 속아버리는 그 짜릿한 한순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이 진미를 알고 있는 모든 멋진 추리소설 애독자 여러분들께 이 작품을 추천한다.

 

<살육에 이르는 병>은 <관 시리즈>의 아야츠지 유키토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신본격 1세대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의 최고작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연쇄 살인범의 심리, 사회 병폐의 고발 그리고 최강의 반전이라는 세 요소를 단번에 만족시킨 걸작으로, 독자에게 진정한 추리소설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 <살육에 이르는 병> 뒤표지에서 발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aviana 2007-03-14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서재에 갔다가 이리로 넘어와 보니 여기도 역시 엄청남 뽐뿌네요.너무들 하세요.정말...ㅎㅎ

jedai2000 2007-03-14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죄송합니다. 이 책 평이 정말 좋죠? 제가 발간 전에 운좋게 좀 먼저 읽을 수 있었는데, 넘 오버하지 않았나 싶어 조마조마했어요. 그런데 읽어보신 분들이 모두 하나같이 최고의 찬사를 보내주시니 허튼 소린 안 했구나 싶어 마음이 놓이는 중입니다. ^^

nemuko 2007-03-14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 읽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장 읽은 다음 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가서 다시 확인했지요 ㅎㅎㅎ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점성술 살인사건>이랑 더불어 젤 재밌었던 것 같아요.

jedai2000 2007-03-15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한 번 더 보면 놓쳤던 복선들이 속속 튀어나오니 정말 재미있지 않습니까? 저는 정말 실실 웃으며 다시 봤어요 ^^ <점성술 살인사건>이 물리적인 트릭 면에서 한 정점이라면 <살육에 이르는 병>은 서술 트릭의 정점인 것 같습니다. 두 작품만큼 아니 보다 더 재미있는 작품을 빨리 만나고 싶습니다. ^^
 
복수는 나의 것 - 마이크 해머 시리즈 3 밀리언셀러 클럽 32
미키 스필레인 지음, 박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월이 가고 나이를 먹으면 언젠가는 죽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라지만, 우리 곁에서 거장급의 미스터리 작가들이 하나씩 사라져가는 것은 늘 가슴 아픈 일입니다. 2006년 6월 17일 그가 창조한 사립탐정 마이크 해머와 함께 다시 오지 못할 곳으로 떠난 하드보일드 소설의 거장 미키 스필레인 역시 많은 독자들의 아쉬움 속에 그렇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1918년생이니 88세로 굉장히 장수했네요.

 

미키 스필레인은 원래 코믹북의 스토리 작가로 생계를 이어가다, 2차대전 때 공군으로 참전했고 무사히 귀환합니다. 전후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자 1947년에 범죄자보다 더 폭력적인 사립탐정 마이크 해머가 첫 등장한 <내가 심판한다>를 내놓았습니다. 2작, 3작인 <내 총이 빠르다>와 <복수는 나의 것>은 1950년에 나왔는데, 하드커버로 나온 초기에는 반응이 그저 그랬다 합니다.

 

그러나 제지 산업의 발전으로 종이값이 낮아지고, 질 낮은 종이에 인쇄해 값싸게 파는 페이퍼백이 나오게 되면서 그의 작품은 폭발적인 인기를 끕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미키 스필레인의 작품은 대략 1억3천만부 이상 팔렸다고 추산되고 있으며, 이 수치는 그와 당대에 활동했던 작가 중에서는 제 생각에 애거서 크리스티 정도가 조금 더 혹은 조금 덜 팔았을까 비교될 작가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적당히 야해 눈요기도 되고, 시원스런 폭력 장면에 거침없는 마이크 해머의 행보는 푼돈을 들여 주말 밤을 짜릿하게 보내고 싶었던 당시 독자들의 마음에 그만큼 부합하는 최고의 오락거리였던 셈입니다.

 

그러나 비평적으로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1950년대부터 비평가들이나 레이먼드 챈들러, 앨러리 퀸 등의 동료 작가들에게 악평을 받았고, 지금도 새로이 높게 평가하는 분들을 만나보기는 쉽지가 않네요. 마초의 대명사로 낙인 찍혀 흔히 여성 독자들에게는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요. 그러나 마이크 해머 시리즈를 볼 때는 당시의 시대상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어떤 문학작품도 마찬가지지만, 소설 역시 그 시대를 반영합니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 자체도 19세기 들어서면서 이성과 논리가 추앙받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유행했던 것이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유명한 추리소설들에 등장하는 소도구도 마차-자동차-비행기 등으로 시대의 흐름과 변화, 발전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미키 스필레인이 반영한 시대상은 수많은 인명이 살상된 2차대전이 끝난 직후입니다. 사람이 죽는 걸 직접 눈으로 지켜보았거나 아니면 자기 손으로 직접 사람을 죽인 수만 명의 남자들이 미국 본토로 돌아왔습니다. 전쟁에서는 프로페셔널로 단련되었지만, 평범한 사회인으로 뿌리내리는 건 거칠대로 거칠어진 참전용사들에게는 적응하기 어려웠을 부분입니다. 그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디 신사가 남아 있었겠습니까? 마이크 해머 시리즈의 폭력성은 변모한 미국 남성들의 모습이 투영된 결과로 보여집니다.  

 

게다가 전쟁물자가 풀리고 경기가 좋아지기야 했겠지만 그게 어디 전직 군인들 몫이겠습니까? 비리를 저지르는 정치인이나 갱들, 졸부들이 가져가겠죠. 미키 스필레인은 주인공 마이크 해머를 참전용사 출신으로 설정하면서, 실제 참전용사들의 분노를 대표로 한주먹에 쏟아내게 만들었습니다. 마이크 해머는 악당이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총알밥으로 삼으며, 살인자라면 여자도 봐주지 않습니다. 아마도 당시에는(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마이크 해머의 지론을 좋아할 사람들이 무척 많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마이크 해머의 어마어마한 인기 비결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이크 해머는 마초의 대명사다, 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작가 대신 변명을 하자면, 그가 직접적으로 여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는 사실 없습니다. 여자를 때리지도 않고(물론 여자가 살인자일 경우에는 쏴 죽이기도...), 강제로 범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오는 여자 일부러 피하지는 않는다는 주의인데, 사실 미키 스필레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여자들이 마이크 해머에게 한 눈에 반하고 어떻게든 잠자리를 갖고 싶어 안달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미키 스필레인과 마이크 해머의 유치한 남성 판타지로 넘어가주는 아량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마이크 해머는 사랑에 빠진 창녀가 과거 때문에 고민하자 자기도 과거가 복잡했다, 앞으로가 중요하지 과거는 중요치 않다는 쿨함을 보여줍니다. 자기는 즐길대로 즐기면서 여성에게는 순결을 강요하는 그런 이중인격자는 절대 아니라는 거죠.

 

<복수는 나의 것>은 13편이 나온 마이크 해머 시리즈의 제3작으로, 전우와 우연히 재회해 코가 비뚤어지게 마신 다음 날 전우가 옆에서 죽어 있어 마이크 해머가 범인으로 몰리면서 시작됩니다. 사립탐정 면허증을 반납당한 마이크 해머가 비서이자 역시 탐정면허가 있는 벨다와 함께 사건을 조사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리즈의 인기 요인 중 하나는 마이크 해머와 벨다와의 애정의 줄다리기가 한 축인데, 벨다는 아니나다를까 마이크 해머에게 반했지만 벨다와 결혼하면 그녀까지 위험해질까 두려워하는 마이크 해머는 그 마음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조사 도중 위기에 처한 벨다를 구하기 위해 질주하는 마이크 해머의 명장면을 놓치지 말길 바랍니다.  

 

마이크 해머는 악당들과 대결하는 터프가이가 미녀도 줄줄이 손에 넣는다는 남성 판타지를 실현시켜주는 50년대의 제임스 본드였으며, 미키 스필레인은 간결하고 속도감 있는 하드보일드 문체에 그 이전에는 누구도 그렇게 쓰지 못했던 박력 있는 폭력 장면의 대가였습니다. 전후라는 혼탁한 사회 상황과 페이퍼백의 유행이라는 시운을 타고 두 마초는 대성공을 구가할 수 있었습니다. 마이크 해머가 인기 있는 사회는 그만큼 서민들의 억눌린 한이 많은 불행한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이크 해머는 소설에서만 영웅으로 남을 뿐, 실제로는 어디서도 그런 불행한 사회가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어린아이 같은 소망을 마지막으로 남겨 봅니다.

 

 

그녀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나는 수화기를 움켜잡았다.

클라이드는 이제 내 손에 죽은 목숨이다.

"마이크."

"말해 봐. 벨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들어야만 했다.

"그 사람이 거의.....할 뻔했어요."

수화기를 내려놓고 깊이 숨을 쉬었다. 클라이드는 이제 몇 분 안에 죽을 목숨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7-02-25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시대에도 3류소설로 평가받고... 그정도는 아닌데 참 아쉽습니다.

jedai2000 2007-02-25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류소설이었으면 1억부 판매는 불가능했겠죠. ^^ 분명히 매력이 있는 작품입니다.
 
한니발 라이징
토머스 해리스 지음, 박슬라 옮김 / 창해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한니발 렉터 박사가 돌아왔다. 하지만 안 돌아왔어도 좋을 뻔했다. 아니,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 걸 원하지는 않았다. 스릴러 장르의 영화와 소설을 통틀어서 우리 뇌리에 가장 인상적이고 공포스런 캐릭터로 남아 있는 한니발 렉터가 지금의 유명세를 얻게 된 건 1988년에 출간되고, 1991년에 영화화되어 전 세계적인 히트작이 된 <양들의 침묵> 때문이었다. 이 작품은 놀랍도록 치밀하고 탄탄한 줄거리에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엽기적인 살인마들의 끔찍한 범행에 대한 리얼한 묘사를 더하고, 한니발 렉터, 클라리스 스탈링, 잭 크로포드, 버팔로 빌까지 개성 넘치고 다차원적인 인물이 어우러져 커다란 성공작이 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조나단 드미 감독이 원작이 있는 영화는 항상 원작보다 못하다는 불문율을 깨고, 원작만큼의 혹은 원작보다 더 나은 완성도로 영화를 완성함으로써 소설과 영화 양쪽 모두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레드 드래곤>과 <양들의 침묵>에 등장하는 한니발 렉터는 악역이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연쇄살인범을 뒤쫓는 FBI 수사관보다, 한니발 렉터에 열광하게 된 건 많은 부분 한니발 렉터를 연기한 안소니 홉킨스 경의 신들린 연기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식인을 즐기면서도 어딘가 고상하고 기품이 흐르는 분위기와 뛰어난 정신의학 지식으로 날고 기는 수사관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노니는 지적인 모습만 보여주다,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마침내 감추어진 야수성을 폭발시키는 그의 강렬한 연기는 진정 영화 역사상 최고의 연기 중 하나로 꼽힐 만하다. 물론 원작이 한니발이라는 캐릭터의 토대를 마련해준 것이지만, 그 토대 위에서 마음껏 역량을 펼쳐보인 안소니 홉킨스 경의 역할도 못지않게 컸던 것이다. 소설이 영화의 기반이 되고, 영화는 소설을 더욱 빛내주었으니 아주 행복한 윈-윈 사례라고 하겠다.

 

이렇게 한니발의 인기가 대단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작가 토머스 해리스는 후속작에서 아예 한니발을 주인공으로 삼고 제목도 <한니발>로 붙여버린다. 전작의 후광을 업고 이 작품도 국제적인 성공작이 되긴 했지만, 한니발만큼의 인기가 있던 총명하고 굳센 신참 FBI수사관 클라리스 스탈링이라는 캐릭터를 완전히 망쳐버려(내 기준에선...) 개인적으로는 실패한 속편이라 본다. 그래도 여기까지면 어떻게든 참을 수 있다. <한니발>은 긴장감이나 치밀함 면에서는 전작만큼은 못해도 그런대로 봐줄 만은 했다. 그러나 한니발의 비밀스런 유년기를 그리는 <한니발 라이징>은 총체적인 실패작이다. 

 

리투아니아의 귀족 가문인 렉터 가는 2차대전이 발발하자 숲속의 은신처로 피난을 간다. 장남인 소년 한니발은 나이에 비해 놀라운 지식 수준으로 이미 천재의 싹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여동생 미샤는 겨우 아장아장 걷는 정도다. 기나긴 피난 생활은 굶주림으로 괴롭긴 해도 그런대로 평화로웠다. 무시무시한 불청객들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독일인도 아니면서 나치에 동조해 독일군을 따라다니며 앞잡이 노릇을 하는 악당들이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전범으로 처형될 걸 두려워 숲속으로 도망온 것이다. 악당들과 한니발, 미샤는 동거 아닌 동거를 하게 되고, 배고픔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한 그들은 미샤를 먹어버린다. 전쟁이 끝나고, 숙부 로버트 렉터와 숙모 무라사키 부인의 보살핌 속에 성장한 한니발은 그러나 여전히 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과거의 악몽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이상이 대강의 줄거리인데, 완전히 새로운 것도 아니고 전작 <한니발>에서 한니발의 과거를 언급하면서 대부분 나온 이야기다.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치밀함도 없고, 심장을 조이는 스릴감도, 그로테스크한 엽기 범죄의 충격도 거의 느낄 수 없다. 청년 한니발이 악당을 한 명씩 처치하는 구성으로 진행되는데, 악당들은 그야말로 존재감이 없어 한니발의 상대가 전혀 되지 못한다. 해서 별로 머리를 쓸 여지도 없다. 잠깐 발악하다 이내 죽어 나자빠지니 긴장감이 생길 턱이 있나. 애정과 우정을 넘나드는 한니발과 레이디 무라사키의 관계도 김빠진 콜라같이 변죽만 울리다 끝나니 별다른 애절함을 느끼기 힘들다.

 

영화와 소설에서 한니발 렉터가 그토록 우리의 심장을 서늘하게 했던 건, 그가 정체불명의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한니발이 식인에 탐닉하게 된 계기와 마음을 닫아버린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다.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괴물은 이미 괴물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이 정도 설명에 한니발을 동정하고 이해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한니발에게 감정을 주려고 마음먹었다면 이보다는 더 탄탄한 줄거리와 구성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다. 영화화에 맞춘 듯 급조된 이야기와 느슨한 전개, 번쩍이는 클라이막스가 없는 <한니발 라이징>은 이 점을 간과한 듯 싶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부분은 나치의 침공을 자진해서 돕는 '히비스'라는 민간인들이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역사적 사실이 유일했다. 전혀 몰랐던 부분이기에. 작가 토머스 해리스는 <양들의 침묵>으로 현대적인 스릴러의 기틀을 세웠으며, 제임스 패터슨이나 퍼트리샤 콘웰 등의 블록버스터 스릴러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엿가락 늘어뜨리듯 한니발만 붙잡고 늘어지지 말고(그의 작품 5편 중 4편에서 한니발 렉터가 등장한다), 좀더 참신하고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한번 독자의 마음을 송두리째 쥐고 흔들 만한 예의 그 충격적인 스릴러를 발표하길 기원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7-02-16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역시 대세는 돌아오지 말았어야 한다군요.

jedai2000 2007-02-16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오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져야 할 것 같습니다~.

sayonara 2007-02-18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니발' 후반부터 어영부영하더니...
내 이럴 줄 알아써요... -_-;

jedai2000 2007-02-19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정녕 토머스 해리스에게 제2의 <양들의 침묵>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인지요..-_-;;
 
당신들의 조국
로버트 해리스 지음, 김홍래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여지껏 지구 상에 존재했던 무수한 인물 중에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지고, 입에 올리기조차 웬지 혐오스러운 그런 사람은 누가 있을까. 후보(?)는 여러 명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일이 등을 다툴 이름은 아마도 아돌프 히틀러가 아닐까 싶다. 2차대전의 원흉으로 수천만의 생명을 앗아가고, 그 와중에 죄없는 수백만의 유태인까지 학살한 히틀러라면 과연 불쾌감을 절로 자아내는 역사 속의 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다들 알다시피 히틀러는 독일의 패전이 거의 확실시된 1945년 4월 30일에 벙커에서 애인과 함께 권총자살했다.

 

<당신들의 조국>은 2차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하고, 히틀러가 아직도 살아남아 철권 통치를 하고 있다면? 이라는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된다. 아직까지도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는 민간인들, 참전용사들, 유태인 피해자들이 생존해 지난 날의 악몽을 떠올리는 마당에 참으로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가 로버트 해리스는 이런 기발한 뼈대 위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서 제3제국에 튼튼한 살을 붙여 한 편의 인상적인 가상 역사소설을 창조해내었다. 일단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흥미로운데 더해 디테일까지 세심하니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간만에 진지하게 몰입해서 볼 만한 좋은 소설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가상 역사소설로도 충분히 만족스럽지만, 어둡고 암울한 사회를, 한 고독한 인물이 누비며 숨겨진 진실을 찾는 한 편의 느와르 소설로도 가치가 있다. 느와르 소설이란 전후에 주로 나타난 문예 사조로 전후의 혼탁하고 어두운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비정하고 냉혹한 인물들의 범죄를 주로 그린다. 이 작품에서의 독일 제국은 1964년 현재도 전시 체제로 시민의 자유는 억압된 채 전체주의의 이념 아래서 살아간다. 곳곳에 게슈타포의 감시의 눈이 번뜩이고 있으며, 모든 정보는 통제되고 있다. 여전히 전쟁 중인 독일 제국에서 발견된 한 구의 시체에서 나아가 제국의 실권자들이 연루된 거대한 음모가 밝혀지는 이 작품은 우수에 찬 주인공의 상념과 대사, 기계처럼 냉정하게 묘사되는 폭력 장면, 우울한 결말까지 완벽한 느와르 소설임을 증명한다.

 

주인공 크사비어 마르크는 고독한 인물이다. 왜냐면 그는 모두 깊이 잠들어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깨어 있기 때문이다. 전 유럽을 거의 병탄하다시피 한 독일 제국의 번영 속에 무언가 음험한 악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그는 전체주의 치하에서 꼭두각시가 되어야만 하는 소시민의 삶에 적응하지 못한다. 열렬한 나치주의자인 아내는 그런 그를 못마땅해 하며 이혼했고, 열 살이지만 하겐크로이츠가 새겨진 칼을 애지중지하는 아들 필리는 소년 나치친위대로 아빠가 다른 친구 아빠들처럼 나치당의 활동에 열광하지 않고 미온적인 것이 불만족스럽기만 하다. 독일이라는 국가와 국민 속에 잠복해 있는 악을 본능적인 후각으로 감지하고 있는 그는 가족들에게도 버림받고, 일터인 경찰계에서도 고독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도입부에서 크사비어 마르크는 새벽에 동료 대신 호숫가에서 발견된 노인의 시체를 조사하다 그가 전직 나치의 고위 간부임을 알게 된다. 이 장면은 시종일관 내리는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데, 독일 사회의 축축하고 어두운 이미지를 비로 상징해 표현하는, 한마디로 끝내주는 분위기다. 요즘은 이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글을 쓰는 작가를 좀처럼 만나볼 수 없어, 더욱 인상적이었다. 마르크는 노인의 주변을 맴돌다 제2, 제3의 피해자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우연히 알게 된 미국 기자 샬롯과 함께 그는 진실을 찾는 긴 여정을 시작하고, 결국 독일 제국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했던 비밀과 대면하게 된다.  

 

결말에서 스파이소설의 걸작,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가 연상되는 작품으로 픽션의 한계를 넘어 유명한 반제 회의 등 역사적인 사실을 충분히 담아냄으로써 여러모로 묵직하고 진지한 소설로 완성되었다. 이외에도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영미권에서 리버풀 출신의 정신 나간 밴드가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든가,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이든가 하는 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역사를 살짝 비튼 재기 넘치는 장면들도 잔재미를 준다. 무겁고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지배적인 소설이라 가벼움을 선호하는 요즘 독자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진지하게 곱씹어볼 만한 소설을 찾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물론 미스터리나 느와르, 스파이소설로서의 재미도 빠지진 않는다. 개인적으로 한 편의 소설을 볼 때 장점 하나를 찾으면 단점도 하나 지적하는 식으로 균형을 맞추는 버릇이 있는데, 솔직히 단점을 찾기가 거의 힘든 작품이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7-02-15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간 진부한 면이 없지 않은데 그것마저 매력으로 보이니 정말 좋은 작가를 만났습니다^^

jedai2000 2007-02-15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대에 유행했던 장르소설의 요소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 약간 상투적이지만, 매력적으로 배합해냈다고 생각합니다. ^^

bongbong 2007-08-10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부분은 감동 그 자체임다... 한편의 영화를 본듯한 느낌..눈물쬐끔 나려하네요ㅠㅠ

jedai2000 2007-08-10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감동적이죠. 이 작가의 <이니그마>는 아직 못 봤는데 어서 봐야겠어요. <시티즌 빈스>라는 작품도 새디님에게 잘 맞을 것 같은데 추천드립니다. 꼭 읽어보세요 ^^

bongbong 2007-08-10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 보았어요...
애드가상 수상작이라 무지 기대하면성^^
자극적 소설에 기들여진 탓에 첫부분은 몸에 받지 않는 음식을 먹는듯한 기분이었는데..
책장을 다 넘기고 하면 그 특별한 감동은 읽어본 사람만이 느끼게 되겠죠^^권하고 싶은 책이예요~~


jedai2000 2007-08-10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덧글이 두 개 올라갔네요 ^^

새디님은 정말 저랑 취향도 비슷하고 읽은 책도 비슷하군요. 이제는 약간 놀라울 정도네요 ^^ 저도 아주 특별한 감동을 느꼈던 책이라 소개드린 건데 뭐 이미 보셨다니 ^^ 다음에도 좋은 책을 발견하면 꼭 알려드릴게요 ^^

bongbong 2007-08-10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알려주세요~~^^

jedai2000 2007-08-11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기대하세요 ^^
 
누군가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리 성공한 작가라도, 기존의 성공작들을 답습하며 진화를 꿈꾸지 않는다면 그순간 그는 이미 문학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았다 할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같이 성공에 성공을 열 번쯤 더한 작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그간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이 면모를 일신하려 노력하는 미야베 미유키의 야심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도저히 소설의 주인공으로 쓸 수 없을 듯한 평범하기 짝이 없는 편집자 스기무라 사부로는 다행히(?) 재벌의 딸과 결혼함으로서 어느 정도 특별한 설정을 부여받는다. 물론 재벌의 딸이라지만 첩 소생이라 어마어마한 돈벼락을 맞거나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또래 친구들보다는 훨씬 넉넉한 살림이다. 장인의 회사인 이마다 콘체른의 사보 <아오조라(궁금해서 찾아봤는데 푸른 하늘이라는 뜻)>에서 장기를 살려 취재기자 및 편집자로 일하는 스기무라. 어느 날 하늘 같은 장인으로부터 뜻밖의 명령이 떨어진다.

 

장인의 운전기사였던 가지타 씨가 자전거에 치어 사망했는데 범인이 아직 잡히지 않았단다. 자전거에 부딪혀 어떻게 사람이 죽냐고 묻지는 마시길. 요즘 자전거 얼마나 좋고 빠른지 다 알지 않나. 가지타 씨의 인생을 책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두 딸을 만나 편집자로서 이야기를 들어주라는 장인의 명령을 받들어 그녀들과 대면한 스기무라는 어딘지 불안한 기색이 감돌고 있는 언니 사토미로부터 숨겨진 과거의 이야기를 듣는다. 친근하고 편안한 인상의 가지타 씨에게는 어떤 말 못할 비밀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사토미가 4살 때 유괴된 적이 있었다는. 아마도 아빠의 죽음은 옛날의 원한을 갚기 위한 계획살인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토미다. 평범한 교통사고(?)일 줄 알았던 가지타 씨 사건에 웅크리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미야베 미유키의 첫번째 야심은 미스터리와 일상성의 결합이다. <누군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매일 아침 출근길에서 마주칠 수 있을 듯한 평범한 인물들이다. 애처가이자 네살배기 딸을 목숨보다 사랑하는 스기야마나 지난 날의 야심은 묻어두고 평온하고 안락하게 늙어간 가지타 씨 등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현실감 넘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물론 스기야마의 처가인 이마다 가문은 재벌가이기에 어느 정도는 우리 현실과 괴리가 있겠지만, 이마다 회장 역시 몸이 약한 딸을 애지중지하는 등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똑같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는 미스터리의 비중 만큼이나 스기야마의 애처 행각을 비롯한 '가족간의 관계'에도 골고루 시선을 배분한다.

 

이렇게 평범한 인물들이 등장하니만큼 다루는 사건도 비교적 일상적이다. 자동차도 아니고 평범한 우리네 삶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자전거 사고라니 그야말로 일상의 냄새가 팍팍 나는 상징적인 설정이다. 사건을 조사하는 스기야마의 방법 역시 굉장히 현실적인데 별다른 조사 수단이 없는 그는 사고 현장에서 전단지를 만들어 돌린다거나 가지타 씨가 오래전 일했던 완구 회사의 사장을 찾아가 가지타 씨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묻는다든가 할 뿐이다. 사장 할아버지에게 좋았던 옛 시절 이야기를 듣다가 물색없이 할아버지의 지나온 인생에 감동받기도 하는 스기무라는 정말 귀여운 남자다(사실 완구 회사 사장 할아버지가 나오는 장면은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빼어나다).

 

이렇듯 소박한 사건을 소박하게 풀어가는 미스터리다 보니 결말에 이르러 약간 섭섭하기도 한데, 이 작품의 지향점이 결국 우리 삶속에서의 작은 미스터리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만약 스기무라가 아닌 민완형사나 경찰과 끈이 닿아 있는 정보빠른 탐정이라면 아마 이틀이면 풀 수 있는 사건이니까. 다만 이 책은 누가 범인인가, 어떻게 죽였는가가 중요한 작품은 아니니 미리부터 실망하지 말길 바란다. 비록 짜릿한 두뇌 회전을 시켜주지는 않지만, 스산하면서도 애잔한 결말에 책장을 다 덮고도 깊은 감흥이 남을 것임을 보증할 수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또다른 야심은 탐정 캐릭터의 창조다. 흔히 미야베 미유키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계승자로 알려져 있는데, 사회 현실의 부조리를 추리소설의 틀에 담아내 냉정히 관찰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은 그 정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실감이 필수다. 따라서 보통 사람은 평생에  만날까말까한 살인 사건을 철마다 만나는 명탐정 캐릭터는 사회파 추리소설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나마 사건과 접할 기회가 많은 형사나 기자가 주인공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미야베 미유키의 그 무수한 미스터리를 통틀어도 우리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는 탐정 캐릭터는 없다. 짐작컨대 그녀는 자신만의 포와로를 만들어낼 욕심이 생겼던 것 같다. 스기야마 사부로, 이 평범한 남자가 바로 미야베 미유키가 작심하고 키우는 탐정 역으로 영광스럽게 낙점된 인물이다. 이미 스기야마 탐정! 제2탄 <이름없는 독>이 일본에서 출간되고 전작을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았다니, 미야베 미유키는 또 한 번 성공한 셈이다.

 

개인적으로 국내 출간된 미야베 미유키 작품은 대부분 본 셈인데, <누군가>에 이르러 좀 다르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예전처럼 멋부린 비유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편하게 읽히는 문장을 쓴다. 그래서 별 사건이 없어도 쭈욱 읽힌다. 작가의 작품 목록에서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과 가장 비일상적인 미스터리를 결합하고, 그간 시도하지 않았던 시리즈 탐정 캐릭터를 선보인 이번 작품에서는 소박한 외양에 감춰진 작가의 야심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런 모든 시도들이 완벽하게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보기에 별은 네 개 반을 주지만 <이름없는 독>에서 다섯 개가 채워질 수 있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p.s/ 보잘 것 없는 글을 참으로 길게 썼지만 미야베 미유키가 간단하게 요약했다. 역시 작가의 힘이란 이런 것 같다.

 

인생에 부족함이 없거나, 또는 행복한 삶을 사는 탐정은 미스터리의 세계에는 무척 드문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평범하고 이렇다 할 장점도 없지만 일상생활은 안정되어 있고 포근한 행복 속에 사는 탐정. 이 작품은 그런 인물이 주인공입니다. 그 결과 그가 추적하는 사건은 아주 사소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 사소함 속에 독자 여러분의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 미야베 미유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ldhand 2007-02-09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라인중에서도 아주 독특한 작품임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소재와 내용을 이렇게 소화해 내는건 역시 미야베 미유키의 힘이겠지요. 만약에 비슷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기리노 나츠오가 작품을 썼다면? 하는 생각을 했더니 문득 <그로테스크>가. 하하하.
'스기야마의 애처행각'이라는 문구를 보니 제다이님의 '서지혜에 대한 사모행각'이 아울러 머리에 떠오르는군요. 하핫. =3=3=3

jedai2000 2007-02-10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작가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보니 <그로테스크>랑 사실 거의 같은 주제라는 생각이...물론 강도는 전혀 다르지만요 ^^
미야베 미유키가 특유의 선의의 결말을 내지 않고, 질투와 라이벌 의식이라는 악의를 결말로 택했다는 건 약간 놀랍더군요.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소설인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모행각'이라뇨 ㅋㅋ '스토커행각'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