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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계약 1 ㅣ 뫼비우스 서재
할런 코벤 지음, 김민혜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세계적인 인기 작가 할런 코벤, 그는 평범한 사람이 유괴, 살인 등의 범죄에 저도 모르게 말려들어 온갖 고생을 하다 겨우 일상으로 돌아오나 했더니 아찔한 반전 한 방으로 모든 게 뒤집어진다는 설정을 가진 일련의 완성도 높은 서스펜스 스릴러들로 정평이 나 있다. 국내에도 <영원히 사라지다> <밀약> <마지막 기회> <단 한 번의 시선> 같은 작품들이 소개되어 반응이 괜찮았는데 이 작품들은 각각 다른 주인공들이 활약하는 독립적인 이야기로 진행되어 서로 이어지는 바는 거의 없다(일부 작품들에서 등장인물을 한두 명 정도 공유하는 정도). 하지만 코벤의 진정한 출세작은 따로 있었으니 스포츠 에이전트인 마이런 볼리타가 매번 주인공으로 등장해 활약하는 8편의 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요즘은 독립적인 작품들(보통 스탠드 얼론이라 부른다)에만 몰두하고 마이런 볼리타 시리즈는 잘 쓰지 않는 것 같은데, 아무튼 1995년에 발표된 <위험한 계약>은 할런 코벤이 분신과도 같은 마이런 볼리타를 세상에 처음 선 보인 작품이라 제법 의의가 있다 하겠다.
작가가 아무리 같은 주인공으로 연속되는 시리즈를 쓰고 싶어도 독자들이 환영하지 않으면 제대로 시리즈가 이어지지 않을 텐데, 이 작품을 읽어보니 마이런 볼리타는 너무도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라 무려 8편이나 되는 시리즈에서 활약하고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날리던 농구 실력을 가진 그는 백인은 점프를 잘 못한다는 속설과는 달리 점프도 높았고, 투견과도 같은 투지가 있어 발군의 득점력과 리바운드 능력을 자랑하는 포워드였다. NCAA(전미대학농구)에서 우승컵도 거머쥐고, NBA에서도 명문 보스턴 셀틱스에 8위로 지명되지만 시즌 초반에 다리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첫 해에 은퇴하는 비운의 선수가 되었다. 올해야 보스턴 셀틱스가 잘나가지만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드래프트 2순위로 뽑은 선수가 약물로 사망하는 등 악재가 무척 많았는데, 만약 마이런 볼리타가 실제 인물이었다면 셀틱스의 저주 중 한 명으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계속 뛰었어도 크게 빛을 보긴 힘들었을 거라고 보는 게 고작 193센티미터의 백인 포워드가 NBA에서 성공한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NBA팬으로서 순간 흥분해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말았다.
선수로서는 운이 좋지 못했지만, 다른 스포츠 에이전트와는 달리 직접 스포츠 세계의 한복판에서 뛰었던 경험을 살려 선수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는 마이런 볼리타. 아직까지는 햇병아리 에이전트에 불과하지만 풋볼 계의 대학 최대어 크리스천을 손에 넣은 뒤로 모든 것이 달라질 태세다. 그런데 미남에 에이스 쿼터백에 성격도 좋은 크리스천에게는 한 가지 아픔이 있었으니, 치어리더였던 애인 캐시가 대학 내에서 실종된 채 2년이 지나도록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캐시가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가족들 마음은 어디 그럴까. 재미있는 건 지금은 헤어졌지만 마이런과 전에 사귀던 애인이 캐시의 언니 제시카라는 것이다. 제시카가 크리스천에게 마이런을 에이전트로 소개시켜줘 지금의 관계가 맺어졌다고 보면 틀림없을 듯. 캐시는 비록 없지만 관계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 서서히 아픔도 잊혀져갈 무렵 모든 것이 바뀌는 사건이 일어난다. 죽었다고 생각한 캐시의 누드 사진이 실린 잡지가 크리스천에게 배달되어 오고, 캐시로 추정되는 목소리로부터 전화도 걸려온다. 게다가 캐시 실종 사건을 나름 혼자서 조사하던 제시카와 캐시 자매의 아버지도 거리에서 칼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도 벌어진다. 혼란스러워져만 가는 상황 속에서 제시카는 사건의 재조사를 옛 애인 마이런에게 부탁하는데, 그는 제시카의 마음을 다시 얻기 위해 그리고 고객인 크리스천의 마음을 안정시켜주기 위해 진실을 파헤치기로 결심한다.
미국의 미스터리/스릴러에 등장하는 탐정을 보면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다. 필립 말로나 루 아처같이 세상의 모든 고민을 혼자 얼싸안은 듯한 우울하고 멜랑콜리한 분위기의 탐정들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 사건의 핵심을 파고들 것인가 보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농담을 구사할 수 있을까만 연구하는 듯한 유쾌한 재치꾼 타입이 또 있는 것 같다. 재치꾼 타입 하면 고전에 해당할 렉스 스타우트의 아치 굿윈 탐정도 있고, 그레고리 맥도널드의 플레치나 로렌스 샌더스의 맥널리가 떠오를 법한데, 마이런 볼리타 역시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끝내주는 농담 실력과 확실한 장난기를 보여주는 재간둥이다. 그에게는 캐시의 실종이라는 핵심 사건 말고도 그가 관리하는 선수가 갱들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는다는지 하는 온갖 악조건이 넘쳐나는데, 어떤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농담을 그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시종일관 미소를 띄며 페이지를 넘겼다. 꼬이고 꼬인 난제들을 거침없이 풀어나가는 마이런과 그의 절친한 친구 윈의 활약은 그야말로 시원시원해 적수가 없을 지경. 참고로 윈은 마이런 볼리타 시리즈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정도로 비중이 큰데, 엄청나게 잘 생긴 얼굴에 적들은 다짜고짜 죽여버리는 냉혹한 심장을 가지고 있다.
크리스천을 모든 걸 가진 사나이라고 표현한다면 마이런 역시 마찬가지다. 래리 버드 같은 농구 솜씨에 제리 맥과이어 같은 인간미, <다이 하드>의 존 맥클레인 형사 같은 유머 감각과 터프함, 셜록 홈스 같은 추리력을 한몸에 겸비했으니 요즘 유행하는 말로 엄마 친구 아들이 아닐런지. 마이런은 그간의 치밀한 조사를 통해 용의자를 몇 명으로 압축하고는 결말 즈음해서 용의자들에게 함정을 판다. 원래 미스터리/스릴러에서 논리와 추리로 범인을 압축하지 못하고, 함정 수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건 하수의 방법이다. 할런 코벤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낸단 말야, 하고 혀를 찼는데 기우였다. 범인의 정체를 마이런은 미리 알고 있었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도 결말에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추리로 밝혀낸다. 유머와 하드보일드적 세계관, 정통 미스터리가 공존하는 독특한 맛이 있는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 수준이 대단히 높다. 무엇보다 마이런 볼리타는 한번 믿어봐도 괜찮은 놈이라는 걸 보증한다.
p.s/ TV쇼나 시트콤 등 대중문화에 기반한 농담이 엄청나게 많은데 일일이 역주를 단 번역자, 편집자의 노력 덕분에 한층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