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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남 - 에르메스와 사랑에 빠진 전차남 이야기
나카노 히토리 지음, 정유리 옮김 / 서울문화사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2004년 일본을 뜨겁게 달군 <전차남> 열풍이 한국에도 찾아 왔습니다. 일본에서 <전차남>은 책도 100만부가 넘게 팔리고 영화, 드라마를 비롯한 온갖 매체로 재생산되면서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과연 <전차남>은 어떤 작품이기에 전일본을 뒤집어 놓을 수 있었을까요?
우선 <전차남>은 소설 형식의 책은 아닙니다. 인터넷 사이트의 게시판에 올라온 내용들이 순서대로 나열될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모티콘으로 도배된 귀여니의 인터넷 소설이 생각나는 형태입니다. 그러나 귀여니의 인터넷 소설이 순수 창작이라면, 이 작품은 실화라는 데 그 매력이 있습니다.
(실화인지 아닌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실화로 가정하겠습니다.)
일본에서도 사회 문제가 될 정도로 기묘한 오타쿠들이 모여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로 독자적인 공간을 꾸려 나가는 '투채널'이란 사이트가 있습니다. (웬지 '디시 인사이드'가 생각나는군요. ^^;;)
'투채널'에는 애니메이션이나 음란 영화를 비롯해 심지어 자살 사이트까지 있을 정도로 폐쇄적이고 음침한 공간인데, 그곳에 <독남毒男이 뒤에서 총 맞는 게시판-위생병 불러>라는 게시판이 있습니다. 애인하나 없는 독소같은 남자라는 뜻의 독남毒男과 외로운 남자라는 뜻의 독남獨男이 중의적으로 쓰인 게시판입니다.
한 마디로 솔로부대원들의 집결지라 이겁니다. 저도 여기 가입해야겠네요..T.T
그런데 이곳에 독남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는 한 방의 폭탄이 떨어집니다. 어느날, 전차남이라는 아이디의 한 남자가 자신의 사연을 적습니다. 지하철에서 술에 취해 여자들에게 못되게 굴던 아저씨를 우여곡절끝에 자신이 물리치게 됐는데, 그중 한 아가씨가 감사의 표시로 찻잔 선물 세트를 보내왔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전차남은 전형적인 오타쿠로 아키하바라를 내 집처럼 드나들고, 19금 에니메이션을 즐기며, 외모는 촌스럽기 서울역에 그지없고, 단 한 번도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는 초절정 독남이었던 것입니다.
전차남은 여자의 친절에 당황합니다. 물론 어여뻤던 그 여자에게 끌린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쑥맥인 그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합니다. 독남들은 전차남에게 조언을 하기 시작합니다. 누군가 그 찻잔의 상표가 뭐냐고 묻자, 전차남은 에르메스라고 답합니다. 여자의 별명은 이제 에르메스가 되었습니다. 독남들은 전차남과 에르메스의 사랑을 맺어주기 위해 온갖 조언과 격려와 꾸짖음을 다합니다. 전차남 역시, 기존의 찌질한 인생에서 벗어나 점점 자기 주관과 용기를 가진 진정한 매력남으로 거듭나구요. 전차남의 성장에 놀란 독남 중 한 사람은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뭔가 이 여유는? 이것이, 이것이 그때의 그 전차남이란 말인가!!?
우리는 이 어처구니없는 괴물을 세상에 내보내게 된 거란 말인가아아아아!!"
전화하는 것도, 손을 잡는 것도 우물쭈물 망설이기만 하던 전차남이 에르메스의 사랑을 얻기 위해 눈부신 용기를 발휘하자 독남들은 감동하기 시작합니다.
"설사 에르메스랑 잘 안 된다고 하더라도 전차는 이미 毒이 아니예요.
눈부시게 빛나고 있어요. 전차."
사랑을 하면서 점점 성장해 나가는 전차남의 멋진 모습과 모든 게 서툰 그를 따뜻하게 배려해주는 상냥한 에르메스의 연애담도 즐겁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가장 큰 감동은 추운 겨울도 녹일 듯한 독남들의 따뜻함입니다. 정말 이 책을 읽다 보면 성선설을 믿게 됩니다.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전차남의 성공을 기원하며 하나로 굳게 뭉친 그들의 모습은 더이상 인터넷 폐인이 아닌, 아름다운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심지어 그들 자신들도 의아해합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된 거지, 하고 말예요. ^^;;
전차남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마침내 사랑을 고백하러 간다며 새벽 일찍 게시판에 글을 남깁니다. 독남들은 초조한 마음을 안고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전차남은 꼬박 하루가 지나도록 게시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과연 잘 될까, 잘 안 되서 전차남이 상처받지나 않을까 초조가 극에 달합니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전차남을 응원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이는 36시간이 넘도록 게시판을 바라보고, 어떤 이는 회사에서도 10초에 한 번씩 리로드를 합니다. 저도 전차남을 열렬히 응원했습니다. 저는 버스에서 책을 읽으면 멀미가 나는 체질이라 읽지 않는데, 버스 바닥에 토하는 한이 있어도 전차남을 응원하겠다, 이런 각오로 책을 잡았습니다. 사람 마음이란 다 똑같은가 봅니다. 열정을 가진 누군가가 진심으로 잘 되길 바라는 마음 말입니다.
전차남은 마침내 성공을 거두고 돌아오고, 그 순간부터 작품의 진정한 하이라이트가 터집니다. 거의 20페이지 가까이 독남들의 축하글들이 쏟아지는데 진심으로 감동적입니다. 공들여 준비한 온갖 이모티콘과 감동적인 축하 메시지들, 독남들의 진심이 느껴져 너무너무 흐뭇한 독서였습니다. 책으로 읽어도 이 정도인데, 그 당시 직접 그 순간을 함께한 독남들은 얼마나 황홀했을까요..^^;;
그러곤 대망의 마지막 장...전차남은 이제 커플이 됐으니 커플게시판으로 가야 합니다. 전차남 게시판 글도 이제 100개만 더 올라오면 종료입니다. 그런데 독남들과 전차남 모두 서로에게 정이 잔뜩 들어 헤어지는 걸 안타까워 합니다.
"전차 빨리 가~ 간신히 붙잡은 에르메스의 손을 놓지 마. 뒤돌아볼 것 없어.
두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 그게 바로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줘."
"으아, 이제 100개 밖에 안 남았어. 정말로 눈물나기 시작했는데.
어쩌지? 이렇게 아쉬운 것도, 눈물나는 것도, 축하하고픈 것도 처음인데."
"우리들을 친구라고...
고마워요."
"꺼이꺼이, 어째서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떠나는 것이 이렇게 슬프다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작품은 끝이 납니다. 피와 살이 아닌, 전기와 회선에 불과한 차가운 인터넷 공간이지만 진심이 통한다면 세상 무엇보다 뜨거운 만남이 될 수도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말입니다. 인터넷에 얽힌 이런저런 사회 문제도 많지만, 그래도 이런 흐뭇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음에 인터넷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번쯤 사랑에 빠지고 싶게끔 만드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와 따뜻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는 수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