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61 | 362 | 363 | 36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세계사 시인선 65
박상순 지음 / 세계사 / 1996년 5월
평점 :
품절


지난밤 한 남자가 말했다

 

 

지난밤, 한 남자가 말했습니다ㅡ이제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지난밤, 술 취한 배들이 하늘을 날고, 술 취한 구름이 하늘을 덮고, 풀들의 뿌리는 어둠의 깊이를 미처 알지 못한 채 땅을 향해 거꾸로 솟아올랐습니다.

 

지난밤, 한 남자가 말했습니다ㅡ이제 하늘이 터질 것 같아. 큰 가방을 마련해, 큰 가방. 내 눈물을 거두고, 술 취한 배들, 술 취한 구름, 거꾸로 솟아오른 풀들의 뿌리를 거두어야 해.

 

지난밤, 한 남자의 머리 위헤서 하늘이 터져버렸습니다ㅡ술 취한 배들, 술 취한 구름, 거꾸로 선 풀들의 뿌리, 가방집의 가방들도 모조리 터져버렸습니다

 

지난밤,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터진 하늘과 긴 강물이 그의 곁에 숨죽여 앉아 있었습니다.

 

지난밤, 한 남자가 가방집 지붕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ㅡ꿈 속의 내 가방은 작은 뿌리, 내 가방은 취한 배, 내 가방은 술 취한 구름, 내 가방은 기나긴 강물, 그리고 내 가방은 거대한 눈물.

 

  만져 봐, 만져 봐.

 

지난밤, 한 남자가 세계의 끝에서 말했습니다. 만져 봐. 터진 하늘 아래 피는 봄, 터진 가방 아래 흐르는 거대한 강물, 꽃봄처럼 터져나온 내 심장이 너의 손을 잡는 꿈.

 

박상순,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中

 

 

+) 박상순의 시를 읽을 때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하는 것이 편하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꼭 보이는 것만큼만 상상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칫 지나치게 부풀려서 상상할 경우, 그의 의도와는 다른 전혀 엉뚱한 곳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있었다", "말했다", "갔다", "않았다" 등 이 시집에 쓰이고 있는 과거형의 어투는 '과거'라는 시간과, '경험'이라는 주체의 행동이 결합되어 강조된다. 게다가 그것은 과거에서 단절되지 않고 계속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나는 / 언덕 아래로 끝없이 // 굴러가고 있었다"[불 꺼진 창]) 이는 경험한 것들이 현재에 반사되어 그 잔향이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시어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상징을 내포한다. 앞서 언급한 경험의 잔향이 그 개인적인 상징성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있다. 그것이 기호를 시어로 선택한 시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닐까. 기호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시인이 그 순간 가장 편리한 것으로 선택한 것 뿐이다.([도넛을 만드는 A, ,B, C])

 

이 시집에서 '나'는 마치 청년의 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방황의 길 위에서 내성적인 자아의 독백처럼 들리는 시편이 보이며,("네가 네 청춘을 밟고 오는 소리가 들리는구나.[너 혼자]) 그 길 위의 동반자적 존재와의 관계에 고민하는 시편도 보인다.("마라나;없음 / 나;없음 // 꽃길;없음 / 나;없음"[마라나;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4])

 

그의 시는 불투명성을 갖고 있다. 내면을 보여주지 않고 표면상 언어로 주제를 짐작하게 하는데, 어쩌면 이게 그의 시적 매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불투명성이 그의 시를 난해한 것으로 만들수도 있다. 난해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불투명함의 끝에 거울을 만드는 재주가 필요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 랜덤 시선 8
최치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연못

 

 

연못에는 내가 들어가지 못한 숲이 있다

물푸레나무의 젖은 머릿결 속으로 은빛 잉어 한 마리 길을 간다

하늘과 새와 이름 모를 꽃들이 툭 툭 잉어의 지느러미에 깨어난다

비로소 세계가 몸을 튼다 틀어진 길의 끝에서

바람이 분다 숲이 숲으로 겹쳐진다

수면의 주름이 연못의 시간을 밀고 내 발끝까지 찰랑댄다

감당할 수 없는 주름의 시간이여 나에게도 삶은

이렇게 밀려왔었다, 밀려간다

온몸으로 우는 것은 누군가 내 속에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풍금처럼 가볍게 밟아도 일어서고 쓰러지는 것은

또렷하게 아픈 것이다 연못엔

내가 들어가지 못한 숲이 있다 그곳엔 은빛 잉어 한 마리

푸르고 깊은 상처를 내며 길을 간다

비로소 세상이 몸을 튼다

언젠가 숲에 들지 못한 날들이 단단한 돌멩이 되어

연못 속으로 던져진다

간절한 것들이 그리운 것들로 되기까지

나는 연못 위를 서성였다

 

최치언,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中

 

+) 그의 시집 처음 몇 편을 읽고서 한 30대 후반쯤, 인생의 굴곡을 겪고 있는 남자일꺼라 생각했다. 그건 "미상 밟는 아내"와 "올림푸스 세탁소"를 운영하는 "주인장"을 발견하는 시선때문이었다. 아주 단순하게도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그가 보는 것을 같이 바라보며 그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머리말에서 그가 언급한대로 "생을 뜨겁게 달구는 불"은 그의 시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 '생'을 선택한 것도 시인의 마음이겠지만, 생에 잠재된 '불'을 선택한 것도 시인의 판단이다. "여자", "남자", "노인", "아이(유아)", "그", "나," "당신" 등이 바로 그가 선택한 생의 주인공들이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그의 시에는 특별한 사람보다 일반적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가 고민했을 "불" 또한 마찬가지다. 특별한 것 같지만 사실 일반화시켜서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말","비명소리", "새", "시선", "꽃" 등으로 시인은 사람들의 삶을 조명한다. 그것들은 인생의 어떤 해결책이나 고민 혹은 고통의 장면이라기 보다, 인생을 그대로 드러내는 매개체다. 물론 "새"를 통해 자유를 갈망하는 화자의 욕망을 묘사하고, 타인과의 소통을 희구하는 "시선"을 형상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인이 연결하는 '생'과 그 생을 뜨겁게 달구는 '불'이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감정을 절제하며 바라보는 그 '생'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풍자와 비판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와 "노인"을 좇고 있는 그의 시선이 멈추지 않고 치밀하게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에서 사람에 대한 애정을 포착할 수 있다.

 

최치언은 언어유희를 즐기는 편인데 ("나는 불 안에서 불안에 떨고 있었지"[화장터]) 시를 읽을수록 감질맛난다. 그 언어유희가 시에서 한 문장으로서 혹은 시어와 시어를 복잡하게 이어주고 있는데, 그것은 생의 면모를 그려내는 것 같다.([도망가라 메기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winpix 2007-07-10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 읽었었는데, 이 리뷰를 읽으니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우비소녀 2007-07-10 15:34   좋아요 0 | URL
^^ 그런가요? 그런데 아마 저도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면 또 새롭게 보일 것 같아요. 시란 그런게 멋지잖아요 ㅋ
 
이 달콤한 감각 문학과지성 시인선 282
배용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오래된 사진관

 

 

세상에 잘못 인화된 장면이 나뿐이겠는가

버려진 사진처럼 바람에 떠돌다 내려진

소읍의 정류장 골목에

내 나이만큼 오래된 사진관이 걸려 있다

내부로 들어서자 창에 반사된 흑백사진 속에서

주인인 듯한 노인이 돌아본다

느릿느릿 사진첩을 펼치며 어색한 복고풍의 미소를 짓는다

플래시를 터뜨리던 나날들,

초점을 맞추지 못해 망쳐버린 때도 많았지만

세울은 절망할 여유도 없이 섬광처럼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빛바랜 시간들이 버려지는 세월 속,

밤은 몇 개의 풍경을 보관하고 있는지

날마다 똑같은 태양만 떠올랐다

누추한 기억의 암실,

벌써 이생의 장면을 다 진열해버린 노인은

얼마나 빛나는 날들을 안고 後生(후생)으로 건너갈 것인가

또 내 전생은 얼마나 우스꽝스런 순간들을 인화하고 있는가

너무 많은 무덤을 짓는 지구의 평면 위,

젊은 그가 늙은 얼굴을 향해 웃음을 짓는

사진첩을 넘기며 나는

내게 남아 있는 장면을 뒤적거린다

이빨을 드러낸 광기의 포즈가

아직은 내 일생의 렌즈를 통해 발광하고 있다

더 이상 방문할 풍경이 없는 노인은

두꺼운 돋보기안경 너머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 창밖을 힐끗거린다

희미하게 인화된 추억만 노인의 남은 액자에 끼워진다

세상의 저녁이 창에 걸린다

 

 

배용제, 『이 달콤한 감각』中

 

 

+) 시인은 말하는 "나와 관계된 것들"은 "나와 영혼 사이에 낀 모든 이야기"이며 "결국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것은 "우주의 풍경과 환각과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먼 너에게 이르는 그때까지" 접하게 되는 모든 것들이다.([시인의 말])

 

시인은 공감각적 이미지와 상징들을 접목하여 생의 무게를 관찰하고 있다. 그것이 사회적 상처이든, 개인적 시련이든 시인에게 있어서는 생성과 소멸의 궁극적 원인이 된다. 다시 생성하여 무거워진 생이 아니라, 애초부터 고정되어있던 무게감이 화자의 의식을 통해서 체화된 것이다. "어떤 땐 고통이나 불행조차 성급하게 집어삼"키며, "굶주린 무게를 흡수"한 화자는 "수십 년 부풀어왔던 거대한 살점의 무게가 순한 / 바탕이 되어" 자신을 비롯한 생의 무게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

 

온몸으로 느끼는 그 무게감을 털어내고자 그는 비워냄(空)의 진리를 기웃거린다. 하지만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다, 고 믿는 / 보편적인 사람들의 종교를 나는 믿는다"며 "사라진 것이 아니"라 "환생의 사원에" 들어선 것이라 생각한다.([노을]) 그것은 소멸에 대한 부정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너'를 만나러 가는 사이, 그를 둘러싼 것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화(氣化)하는 것이다.

 

"쏟아지면 금세 증발해버리고 / 사소한 흔적도 남지 않는 울음,"을 "발효시킨 일생의 용도"([발효된 울음에 대하여])는 시인에게 "가장 편하고 고요한 무게가 된다."([물끄러미]) 그것은 이 시집에 종종 등장하는 "한 방울", "줄줄 쏟아진다", "흘러 다니다", "울음" 등의 액체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데, 울음으로 상징되는 고통이 현실에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기화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시인은 '검은' 색감(어둠, 검은 빛, 검게 그을린, 검은 잿더미 등등)에 집착하는데 그것은 화자의 불안한 심리를 도출한다. "세상의 역사와는 너무도 무관하게" 살고 있는 화자, 그는 블랙홀에 빠져들어도, 응급실에 실려가도, 꼭대기에서 추락해도, 한줄기 '별빛'이 그에게 있다. 미래에 대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연민이고, 꿈에 대한 희망이기도 한 그 빛은 결국 "제 몫의 생애를 완벽하게 재생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세상과의 거리를 좁혀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또 다른 나를 복사해낸다.([저 별빛])

 

이처럼 기화의 법칙은 그로 하여금 생의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환생 혹은 윤회, 그러니까 결코 끝나지 않는 순환으로 만든다. 따라서 시인에게 '죽음'은 암울하고 슬픈 것만으로 나타나진 않는다. 죽음은 의식이 잠시 멈춘 상태이다. '잠', '꿈' 처럼 화자가 잠시 의식을 놓고, 무의식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 무의식의 세계에서 그는 쾌락과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제시한 많은 죽음의 상징은 "무수한 죽음을 안고 사는", "더 많은 죽음들이 들어찰수록 오래 사는", "완전한" 점치는 여자에게서 극대화된다.([점치는 여자 1]) 꿈 속에 애욕과 부패와 꿈과 희망이 한꺼번에 흘러 다니듯, 얽히고 설킨 관계의 혼란 속에서도 점치는 여자는 "온 힘을 다해 몸을 흔들"며 생의 "무게를 털어낸다." "태양이 끝없이 돌려대는 원형의 바퀴에 매달린 채 / 여러 생을 오락가락하며 정신을 놓는다." ([점치는 여자 4]) 즉, 죽음은 여러 목숨이자 꿈이고, 애욕이며 부패고, 쾌락이며 고통이다. 원형의 바퀴처럼 순환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시인의 "달콤한 감각"은 나와 너 사이, 죽음을 향한 길 위에서, 흘러가다 증발해버리고 다시 태어나는, 감각의 기화로 형상화된다. 순환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엥겔스 지음, 김기연 옮김 / 새날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p.11

 

 오늘날 부르주아지에 대립하는 모든 계급중에서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그 밖의 계급은 대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소멸되고 몰락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대공업의 가장 고유한 산물이다.

 중간 계급, 즉 소생산자, 소상인, 수공업자, 농민 등이 부르주아지와 투쟁하는 것은, 모두 중간 계급으로서의 자신들의 존재가 몰락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적이지 않고 보수적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반동적이기조차 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혁명적이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들이 프롤레타리아트로 몰락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그들이 현재의 이익이 아니라 미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이며, 그들 자신의 위치를 포기하고 프로레타리아트의 위치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p.35

 

『선언』을 일관하는 근본 사상은 이것이다. 즉 역사성 어떤 시대에도 그 경제적 생산과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사회 구조가 이 시대의 정치사와 지적 역사의 기초를 이룬다는 것, 따라서 (태고의 토지 공유제가 해체된 이래로)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 즉 사회 발전의 여러 단계에서 착취당하는 계급과 착취하는 계급, 지배당하는 계급과 지배하는 계급간의 투쟁의 역사라는 사실, 이제 이 투쟁은 동시에 전 사회를 착취, 억압, 계급 투쟁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지 않고서는,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그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계급(부르주아지)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근본 사상은 오로지 마르크스 혼자만의 것이다.

                                         pp.103~104 (1883년 독일어판 서문)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中

 

 

+)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아다니고 있다--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된 이 글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로 마무리된다. 마르크스는 어떤 사회에서도 계급 투쟁의 역사는  계속된다고 생각한다. 이 계급관계를 타파해야 평등한 사회를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가 등장한 이후로 사회는 돈과 자본에 의해 신분이 결정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있고, 노동자들은 생계 유지에 필요한 최저 수준의 임금을 받는다.

 

따라서 부르주아가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사적재산이 사라져야 계급으로 존재하는 인간 사이의 차별이 파괴된다고 그는 파악한다. 사유재산을 폐지하는 것이 공산주의의 주요한 정책이다. [공산주의의 원리]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새로운 사회질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새로운 사회 질서는 서로 경쟁하는 각 개인들의 수중에서 모든 생산 부문과 공업의 운영을 탈취할 것이다. 그대신 이들 모든 사업 부문을 사회 전체를 위해, 즉 사회 계획에 따라 그리고 모든 사회 성원의 참여 아래에서 운영할 것이다. 따라서 이 새로운 사회 질서는 경쟁을 폐지하고 협동체를 건설할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사적 소유 또한 폐지되어야만 할 것이고, 그 대신에 모든 생산 도구의 공동 사용, 공동 합의에 의한 모든 생산물의 분배, 즉 이른바 재산 공유가 등장할 것이다."

 

그들은 사적 소유의 폐지를 위해 평화스러운 방법을 고려하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행동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대의를 방어"하겠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이러한 생각은 세계 혁명, 즉 세계를 무대로 혁명을 꿈꾸는 것에 이르게 된다.

 

나는 이 글이 어느 한 시대나, 한 국가에 머무를 수 없는 힘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이글은 단호하며 논리적인 문체로 쓰여져,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 끝이 단단하게 뭉치도록 조율한다. (특히 부르주아지가 이뤄낸 업적들에 대해 차근차근 언급하며, 추후 그들과 프롤레타리아트 관계의 문제점을 짚어내는 부분은 탁월하다 [1.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마르크스는 마지막으로 만국의 노동자들에게 함께 혁명을 꿈꿀 것을 선동함으로써 그 에너지를 집중시켰다. 그러한 것들이 바탕이 되어, 그들의 사상이 지금 언급되는 세계화나 전지구적 태도에 결코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과 그밖의 것들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오늘의책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동료철학자 조지 산타야나가 한 말을 들었다면 러셀도 분명 공감을 표했을 것이다. :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반복하는 벌을 받게 되어 있다."

                                                                                     p.8

 

 통제할 수 없는 분노는 일종의 심리적 탈선이기 때문에 정신과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사악함의 징후가 아니라 질병의 징후이다.

                                                                             pp.57~58

 

 청년들이 품을 수 있는 최선의 희망은, 모든 개개인의 위대한 업적을 남길 능력이 있다고 믿어주는 분위기, 따라서 그들의 자부심이 질투에서 비롯되는 조롱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분위기에서 사는 것이다.

 청년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기대하라. 그러면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교훈이다. 더 적게 기대하면, 정말 당신이 기대하는정도만 얻게 되기 쉽다.

                                                                                    p.91

 

 불행 가운데 진정으로 보람된 불행이 딱 하나 있으니, 좋은 것을 상상만 하고 실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행이 바로 그것이다.

                                                                                  p.169

 

 우리 시대가 앞선 시대들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어린 세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짓에 대한 혐오감이다.

                                                                                  p.176

 

 불유쾌한 진실들을 알지 못하도록 차단시켜주는 습관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어른들은 생각하지만 사실은 어른들 자신이 솔직한 것을 괴로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채택되는 것뿐이다.

  현대교육의 가장 나쁜 결점 중 하나는 현실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p.212

 

 급속하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그저 전통만 고수하는 것이 지혜는 아니라는 것을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될 것이다. 열정 대신에 지성이 경제를 이끌도록 만들어주면 그 즉시 우리 모두가 부유해질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지성보다 열정을 따르는 것이 더 즐겁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대한 벌이 굶주림이라면 결국에는 그들도 합리적인 방향을 따르게 될 것이다.

                                                                                  p.275

 

 

버트런드 러셀, 『인간과 그 밖의 것들』 中

 

 

+) 비트겐슈타인의 저서를 읽으면서 그가 스승으로 만난 사람이 '러셀'이라는 것을 알았다. 친구가 권해준 러셀의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위트와 풍자에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는 그것 뿐만 아니라 고집까지 발견할 수 있다.

 

    읽다보면 풋,하고 웃음이 터지기도 하는데, 괴짜같은 그의 발상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 현실을 메마르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씁쓸함을 느꼈지만, 그만큼 객관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인간'에 중심을 두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그것은 감성에 좌우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책을 보면서 로맹가리의 소설을 떠올렸다면 무리일까. 어쩐지 로맹가리와 러셀은 세상이나 인간에 대한 시선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61 | 362 | 363 | 36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