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18 ‘엉뚱하’거나 ‘나답’거나



  누군가 어떤 일이나 말을 할 적에 ‘엉뚱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둘레에서 나를 바라보며 ‘엉뚱하다’고 말할 수 있고, 내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엉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엉뚱하다’는 어떤 뜻으로 쓰는 낱말일까요? 이 낱말은 모두 세 가지 뜻으로 씁니다. 첫째, “사회에서 흔히 바라보는 눈길이나 생각과 크게 다르다”입니다. 둘째, “말이나 몸짓이 제 주제에 맞지 않게 지나치다”입니다. 셋째, “사람·일·것이 오늘 이곳에서 어떤 사람·일·것하고 얽히지 않다”입니다. “엉뚱한 생각은 그만두렴(1)”이라든지 “엉뚱한 짓을 일삼는다(2)”라든지 “엉뚱한 사람이 다친다/엉뚱한 곳에 왔다(3)”처럼 씁니다. 그러니까, ‘엉뚱하다’고 할 적에는 ‘사회 흐름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나 ‘사회에서 세운 틀을 넘어선다’나 ‘사회에서 시키는 길을 가지 않는다’는 느낌을 가리키는 낱말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나는 사회의식을 따라야 할까요? 나는 시사상식이나 고정관념을 내 머릿속에 새겨야 할까요? 나는 남들이 하는 대로 똑같이 해야 할까요? 나는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어서 예순 몇 살까지 달삯을 받으며 일하다가 그 나이부터 일을 쉬고는 연금을 받아야 할까요?

  한국 사회를 본다면, 대학교를 안 가는 몸짓만으로도 ‘엉뚱한’ 셈입니다. 고등학교를 그만두어도 엉뚱하다 할 테고, 초등학교조차 안 다닌다고 하면 아주 엉뚱하다 할 터입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이나 학원을 아예 다닌 적이 없다면 그야말로 엉뚱하다 할 테지요. 가시내가 치마를 안 입고 바지를 입거나 머리를 짧게 치거나 민다든지, 사내가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린다든지, 머리카락을 노랗거나 빨갛게 물들인다든지, 옷차림이나 몸매나 얼굴에는 마음을 안 쓴다든지, 도시에서 안 살고 시골에 살려 한다든지, 이러구러 사회의식에서 가리키는 ‘엉뚱한’ 모습은 참으로 많습니다.

  ‘엉뚱하다’라는 낱말은 사회에서 사람을 길들이려고 쓰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사회의식을 거스르려는 사람’이나 ‘사회의식과 동떨어지려는 사람’을 붙잡거나 옭아매거나 가두려고 쓰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사회에서 흔히 바라보는 눈길이나 생각과 크게 다르다고 한다면, 이러한 눈길이나 생각은 어떠한 모습일까요? ‘내가 나다운 눈길이나 생각’입니다. 말이나 몸짓이 제 주제에 맞지 않게 지나친 모습이란 있을까요? 없습니다. 사람·일·것이 다른 어떤 사람·일·것하고 얽히지 않는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엉뚱하거나 뜬금없는 모습일까요? 이 또한 ‘내가 나다운 모습으로 가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사회의식과 얽히지 않는 모습이란 ‘홀가분한(자유로운)’ 모습이니까요.

  대학교에 가야 한다면 가면 됩니다. 대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면, 아니 대학교에 갈 까닭이 없이 내가 내 길을 손수 닦아서 즐겁게 간다면, 이 길은 언제나 ‘내 길’이요 ‘내 모습’이며 ‘내 삶’이자 ‘내 숨결’입니다. 나다운 삶이라면, 나로서는 고등학교이든 중학교이든 초등학교이든 굳이 안 다녀도 됩니다. 따로 무엇을 남한테서 더 배우고 싶으면 학원에 갈 수 있습니다. 따로 무엇을 배우려고 하는데 스스로 배울 수 있으면 학원에 갈 일이 없습니다.

  나는 남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남이 나더러 숨을 쉬라고 하니 숨을 쉴까요? 아닙니다. 나는 내가 스스로 오늘 이곳에서 살고 싶기에 숨을 쉽니다. 오직 내 넋이 바라는 뜻에 따라서 숨을 쉽니다. 남이 나더러 밥을 먹거나 잠을 자라고 하니까 밥을 먹거나 잠을 자나요? 아닙니다. 나는 내가 스스로 오늘 이곳에서 살면서 일하거나 놀고 싶으니 밥을 먹거나 잠을 자면서 새로운 기운을 얻으려고 합니다.

  나는 남이 보기에 ‘엉뚱한’ 짓을 하거나 ‘엉뚱한’ 말을 하거나 ‘엉뚱한’ 데에 끄달려서 ‘엉뚱한’ 훈련이나 공부를 할까요? 아닙니다. 나는 내 삶을 짓는 길을 기쁘게 걸어가면서 내 넋을 사랑스레 가꾸는 숨결이 되고자 웃고 노래하면서 훈련이나 공부를 합니다. 길에서 춤을 추든 노래를 하든 입맞춤을 하든, 나는 스스로 마음에 일으킨 기쁜 생각에 따라 움직이면서 하루를 삽니다. 사회의식은 이를 모두 ‘엉뚱하다’고, 때로는 ‘미쳤다’고 할 테지만, 나는 늘 ‘나답게’ 삽니다.

  남들은 나더러 ‘너 참 엉뚱하네!’ 하고 손가락질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한테 기쁘게 ‘나는 참 나답네!’ 하고 웃으며 말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식에 젖은 사람들은 ‘나다운 결’을 가꾸려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자꾸 ‘엉뚱하다’라는 낱말을 심으려 합니다. 나다운 생각을 바꾸어서 사회의식으로 돌리려고 하는 생각에서 이러한 낱말을 씁니다. 그래서 나는 사회의식한테 말하지요. 그래, 그런데 말이지요, 내가 나로서 이녁을 바라보자니, 이녁이야말로 엉뚱하네요, 하고 말합니다. 이녁이야말로 이녁다움을 찾거나 느끼거나 바라보거나 생각하려 하지 않으니까, 이녁이야말로 참으로 엉뚱하네요, 이녁도 부디 이녁다움을, 그러니까 ‘나다움’을 찾고 느껴서 바라보면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요, 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엉뚱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엉뚱합니다. 우리는 우리답습니다. 나는 엉뚱하지 않습니다. 네가 엉뚱할 뿐입니다. 나는 나답고, 너도 너답기에, 서로 ‘나다운’ 길로 함께 갑니다. 4348.2.13.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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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17 ‘차다’와 ‘모자라다’


  우리가 어떤 일이나 놀이를 할 적에는 ‘마음에 차’야 비로소 끝낼 수 있습니다. ‘마음에 차’지 않으면 일이나 놀이를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에 덜 차’더라도, 다음에 다시 해서 ‘마음이 차’도록 하겠다고 생각하면 일이나 놀이를 끝냅니다.

  밥을 먹을 적에는 ‘배에 차’도록 먹습니다. ‘배부르다’라는 낱말로 ‘배에 밥이 찬’ 모습을 나타냅니다. 배에 차도록 밥을 먹지 않으면, 남이 보기에는 많이 먹었다고 여길지라도 ‘배고픈’ 모습이에요. ‘배에 차도록 먹는 밥’은 남 눈길로는 따질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두어 숟가락으로도 배가 찹니다. 어떤 이는 두어 그릇이 되어야 배가 찹니다. 사람마다 먹는 부피가 다르니 ‘배가 차는 부피’가 다르고, 배가 차는 부피가 다른 만큼, 내 둘레에서 다른 사람이 먹는 모습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거나 따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에 차다’ 같은 말을 씁니다. 성에 차지 않으면 안 되지요. 옷을 손수 짓든, 아니면 옷집에서 옷을 사든, 이런저런 물건을 장만하든, 또는 이런저런 물건을 선물로 받든, ‘성에 찰’ 때에 비로소 즐겁거나 기쁩니다.

  차다 → 보람차다 . 알차다 . 올차다 . 옹골차다 . 기운차다 . 힘차다 . 우렁차다

  ‘차다’라는 낱말은 여러 가지로 가지를 뻗습니다. ‘찬 모습’에 따라 어떤 느낌이거나 마음인가를 놓고 ‘배부르다’라든지 ‘기쁘다’나 ‘좋다’ 같은 낱말을 쓰기도 하는데, ‘차다’를 넣는 낱말로 ‘올차다’가 있고, 이와 맞물려 ‘올차다’라든지 ‘옹골차다’ 같은 낱말이 있어요. 사람은 예부터 일과 놀이를 하면서 으레 노래를 불러요. 그래서, ‘우렁차다’ 같은 낱말이 있습니다. 일을 하든 놀이를 하든 기운을 씁니다. 마음으로 기운을 쓸 적에는 ‘기운차다’일 테고, 몸으로 힘을 쓸 적에는 ‘힘차다’일 테지요. 머리로 생각을 지어 내 숨결이 생각을 씨앗으로 받아서 마음에 심을 때에 기운이 생기니, ‘기운차다’라는 낱말을 먼저 썼을 테고, 기운차다라는 낱말과 함께 곧바로 ‘힘차다’라는 낱말이 태어났으리라 느낍니다. 마음과 몸이 함께 움직였을 테니, 두 낱말(기운차다·힘차다)은 같은 때에 태어났으리라 봅니다.

  오늘날에는 ‘보람차다’라는 낱말을 퍽 널리 씁니다. ‘차다’가 붙은 낱말 가운데 아마 가장 널리 쓰는 낱말이지 싶어요.

  이 여러 가지 낱말을 하나하나 살핍니다. 먼저 말뜻을 살핍니다. ‘차다’는 “가득 있어 흐뭇하다”를 뜻합니다. ‘보람’은 “잊지 않거나 다른 것과 잘 가려서 알아보도록 할 때에 쓰는 것”과 “어떤 일을 한 뒤에 반갑거나 좋은 열매를 맺어서 흐뭇한 마음”을 뜻합니다. ‘알차다’는 “속에 가득 있어서 아주 야무지다”를 뜻하고, ‘올차다’는 “풀(곡식)에 맺는 열매(알)가 일찍 들어서면서 가득 있다”와 “흐뭇하면서 기운이 가득 있다”를 뜻합니다. ‘옹골차다’는 “속이 매우 야무지게 꽉 차다”를 뜻하고, ‘우렁차다’는 “소리가 매우 크면서 힘이 가득 있다”를 뜻해요.

  ‘차다’와 맞서는 낱말은 ‘모자라다’입니다. ‘차다’는 사람마다 다 다른 부피와 무게와 모습이나 숫자가 되는데, ‘모자라다’도 사람마다 다 다른 부피와 무게와 모습이 되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밥을 네 그릇을 먹었으나 모자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100억 원을 벌었으나 모자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열 시간 동안 쉬잖고 했지만 모자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책을 100만 권 읽었으나 아직 모자라서 더 읽고 싶을 수 있습니다.

  ‘차다·모자라다’는 ‘많다·적다’하고는 사뭇 결이 다릅니다. 찬 모습이나 모자란 모습은 ‘많다’나 ‘적다’로 가리킬 수 없습니다. 마음에 들 때에 ‘차다’요,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 ‘모자라다’입니다. 마음대로 될 때에 ‘차다’요, 마음대로 안 될 때에 ‘모자라다’입니다. 이리하여, ‘차다·모자라다’를 읽을 수 있다면 ‘좋아하다·좋다·그리다·사랑’이 어떻게 다른지 더 깊고 넓게 헤아릴 만합니다.

  ‘좋아하다’는 차거나 모자란 모습을 따지거나 살피지 않습니다. 무턱대고 들이미는 몸짓이 ‘좋아하다’입니다. 하나도 안 찼어도 ‘마냥 좋아할’ 수 있습니다. ‘좋다’는 어느 만큼 마음에 찬 모습입니다. 어느 만큼 모자랐어도 어느 만큼 차다고 여기니까 ‘좋다’고 합니다. ‘그리다’는 ‘모자람이 없다’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다만, ‘마음에 차다’라고 할 수는 없어요. ‘차다’를 따지지 않고 ‘모자람이 없다’를 헤아리는 마음일 때에 ‘그리다’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어떤 마음일까요? 네, ‘사랑’은 마음에 찬 모습입니다. 마음에 찰 적에는 ‘모자람이 없다’를 따지지 않습니다. 오로지 ‘마음에 차다’만을 헤아리는 마음이 바로 ‘사랑’입니다.

  ‘차다’를 더 생각하면, ‘올차다’는 “일찍 알이 차다”를 가리킨다 할 수 있고, ‘알차다’는 “알이 차다”를 가리킨다 할 수 있습니다. ‘알’은 ‘열매’입니다. 열매는 동그랗습니다. 동그란 모습이 바로 ‘찬’ 모습입니다. 찬 모습은 ‘가득’ 있는 모습입니다. 빈틈이 없고, 가장 튼튼하거나 단단한 모습입니다. 사랑이란 바로 동그라미 같은 모습이면서 빈틈이 없고 튼튼하면서 단단한 결이라고 할 만하지요. 4348.2.10.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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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16 고맙다



  학자는 으레 책‘만’ 살핍니다. 책‘도’ 살필 수 있을 테지만, 책‘만’ 살피는 학자는 아주 조그마한 것만 아주 조그맣게 바라볼 뿐입니다. 이를테면, 훈민정음조차 없던 때까지 ‘한국사람이 쓰던 말’은 어떠한 책에도 거의 제대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나마 훈민정음이라도 태어난 때부터 몇몇 지식인과 학자가 훈민정음을 빌어서 적은 한국말이 있으면, 이러한 ‘책’을 바탕으로 삼아서 말밑을 살핍니다.


  지난날 한국 사회에서 태어난 책은 거의 다 중국글인 한자를 빌어서 썼습니다. 정치를 하건 학문을 하건 문학을 하건, 지난날 사람들은 ‘한자’가 아니면 ‘글’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이들은 어떤 낱말로 “이녁이 나한테 넓게 베푼 마음을 흐뭇하게 여기는 뜻”을 나타냈을까요? 바로 ‘감사(感謝)’입니다. 그러면,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씨를 뿌리고 풀을 뜯으면서 아기한테 젖을 물리고 자장노래를 부르면서 베틀을 밟고 흙집에서 노래하던 사람도 ‘감사’ 같은 한자말(또는 중국말)을 썼을까요? 아니지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여느 시골마을 시골사람이 쓴 말은 ‘고맙다’입니다. ‘고마우이·고맙네·고마워·고맙소·고맙구마·고맙군·고맙습니다’처럼 ‘고마-’를 앞가지로 놓고 말끝을 달리하면서 내 뜻을 이녁한테 밝혔습니다.


  ‘고마-’는 “이녁이 나한테 넓게 베푼 마음을 흐뭇하게 여기는 뜻”을 나타내고, 이런 말을 할 적에는 어른도 아이한테 고개를 숙입니다. 잘 살펴야 하고, 잘 보아야 합니다. ‘고맙다’ 하고 말하는 사람은, 나이 여든 살이어도 여덟 살 아이한테 꾸벅 절을 합니다. 참말 ‘절’을 하지요. 절을 하는 까닭을 생각할 노릇입니다. 왜 절을 할까요? 이녁을 ‘섬기’거나 ‘모시’거나 ‘높이’려는 뜻으로 절을 합니다. 왜 이녁을 섬기거나 모시거나 높이려 할까요? 이녁이 나한테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흐뭇함 같은 마음이 일어나도록 너른 사랑을 따스한 손길로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웃·동무)은 나한테 새로운 빛을 보여줍니다. 나는 새로운 빛에 눈을 뜨고, 새로운 빛에 눈을 뜨기에 기쁘거나 즐겁거나 흐뭇해요. 이리하여, 내 눈이 새롭게 뜨이도록 이끈 사람을 섬기거나 모시거나 높이려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저절로 일어나는 이 기운에 따라서 몸이 움직여 ‘절’을 합니다. ‘절’이라는 몸짓으로 나타나는 ‘이녁을 섬기거나 모시거나 높이려는 마음’을 바로 ‘고맙다’라는 말로 빙그레 웃으면서 보여줍니다.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흐뭇함이 일어나도록 너른 사랑을 따스한 손길로 베푸는 사람은 어떠한 숨결일까요? 바로 ‘님’입니다. 이른바 ‘하느님’입니다. 내 앞에 있는 님(하느님)인 이녁한테 절을 하는 뜻은, 네가 바로 님(하느님)이기 때문이고, 네가 바로 님이기에 ‘고마-’라는 말을 빌어서 절을 합니다. 이리하여, ‘고맙다’와 같은 말마디로 절을 할 적에(인사를 할 적에)는, “너는 바로 하느님입니다” 하고 섬기거나 모시거나 높이는 뜻이 되지요.


  삶을 새롭게 보도록 이끌었기에 ‘나는 너를 섬길 만해’ 하고 느껴서 ‘고맙다’고 말합니다. 삶을 새롭게 짓는 길을 배웠기에 ‘나는 너를 모실 만해’ 하고 여겨서 ‘고맙다’고 말합니다. 삶을 새롭게 가꾸는 사랑을 알았기에 ‘나는 너를 높일 만해’ 하고 헤아려서 ‘고맙다’고 말합니다.


  ‘감사하다’ 같은 낱말을 쓰는 일이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은 중국말도 쓸 수 있고, 영어도 쓸 수 있으며, 일본말도 쓸 수 있어요. ‘아리가또(ありがとう)’나 ‘땡큐(thank you)’를 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외국말을 쓰듯이, ‘여러 외국말 가운데 하나’인 ‘感謝하다’를 쓸 수 있어요.


  다만, 한국말 ‘고마-(고맙다)’가 무엇을 뜻하고, 어떤 마음을 드러내려 하는가 하는 대목을 제대로 알면서 외국말을 함께 쓸 수 있어야, 비로소 내 넋이 제대로 열리면서 내 눈은 제대로 이웃을 바라보고, 나 스스로 나를 제대로 살필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 이곳에서 쓰는 말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나는 오늘 이곳에서 어떤 넋을 키워서 어떤 삶을 지을 수 있을까요? 4348.2.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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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15 ‘안 된다’와 ‘된다’



  ‘안 된다’고 생각할 때에 모든 일이 ‘안 되는’ 줄 안다면, 사람은 누구나 삶을 스스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된다’고 생각할 때에 모든 일이 ‘되는’ 줄 사람들 스스로 모를 뿐 아니라, 이러한 얼거리를 제대로 알려 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누구나 삶을 스스로 못 바꿉니다.


  학교와 사회에서 오랫동안 길드는 탓에 스스로 삶을 짓는 길로 못 나아가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학교와 사회에서는 으레 ‘굳은 틀’에 맞춘 지식만 퍼뜨리는데, 사람들 스스로 머릿속에 ‘굳은 틀’에 맞춘 지식만 집어넣고, 이 굳은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스스로 못 합니다. 어떤 일이든 스스로 하려면 ‘굳은 틀’로 된 지식이 아니라, ‘열린 생각’을 스스로 길어올려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한 ‘나는 안 돼’ 같은 말을 학교와 사회에서 늘 듣는데다가 집과 마을에서까지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은 삶이 어떻게 될까요? ‘하면 돼’나 ‘해 봐 돼’ 같은 말을 언제나 들으면서 사는 사람은 스스로 삶을 어떻게 가꾸거나 지을까요?


  택시가 안 온다고 하는 곳이 있다는데, 이렇게 생각하니 참말 택시가 안 옵니다. 택시를 타고 싶다면 ‘택시를 곧 타야지’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나들이를 가고 싶으면 ‘이제 나들이를 가야지’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일터에서 많이 고단하기에 며칠쯤 말미를 내고 싶으면 ‘며칠 말미를 내야지’ 하고 생각하면 돼요. 모두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을 지레 못박으니 모든 일이 안 되고 맙니다. 잘 갈아 놓은 밭에 씨앗을 심을 때에 무럭무럭 자라듯이, 잘 다스린 마음에 생각을 심을 때에 비로소 모든 일이 술술 풀리기 마련입니다.


  되려고 하는 사람이 됩니다. 안 되려고 하는 사람이 안 됩니다. 하려고 하는 사람이 합니다. 안 하려고 하는 사람이 안 합니다. 보려고 하는 사람이 봅니다. 안 보려고 하는 사람이 안 봅니다. 그래서, 하려고 보면 해 볼 수 있고, 하려고 보지 않으면 해 볼 수 없습니다. ‘해’ ‘보’면 ‘되’는 까닭은, ‘하’고 ‘보’기에 ‘될’ 뿐입니다. 하려는 생각을 심으니 보려는 마음으로 가고, 하려는 생각으로 보려는 마음으로 가기에, 되는 삶을 이룹니다.


  사람이 못 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안 하는’ 일은 있어도 ‘못 하는’ 일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되려고 하면 무엇이든 되지만, 안 되려고 하기에 무엇이든 안 됩니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마음이 달라지니, 생각에 어떤 씨앗을 심는지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생각을 어떻게 다스리려는 넋이고, 생각을 어떻게 살찌우려는 숨결이며, 생각을 어떻게 키우려는 머리인지 내가 스스로 나를 보아야 합니다. 내가 나더러 움직이라고 말해야 내 몸이 움직이고, 내가 나한테 하자고 외쳐야 내 몸짓이 춤으로 거듭납니다.


  삶은 아주 쉽습니다. 안 되고 싶다면 ‘나는 안 돼’와 같은 생각을 자꾸 심으면 됩니다. 되고 싶다면 ‘나는 돼’와 같은 생각을 웃고 노래하면서 한결같이 심으면 됩니다. 4348.2.9.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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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14 파란 거미줄



  영어 ‘웹(web)’은 “거미집”을 뜻한다고 합니다. 거미집은 ‘거미줄’과 같은 말입니다. 거미가 살기에 거미집일 텐데, 거미가 사는 집은 ‘줄을 쳐서 지은 집’이기에 ‘거미줄’이라고도 합니다.


  ‘블루 웹(blue web)’은 “파란 거미줄”이나 “파란 거미집”을 가리킵니다. 거미줄이나 거미집 빛깔을 ‘파랗다’는 느낌으로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거미줄이나 거미집은 처음에 어떠한 빛깔일까요?


  비가 오거나 이슬이 맺히는 날 거미줄을 바라보면, 빗물 빛깔이나 이슬 빛깔하고 같은 거미줄 빛깔입니다. 흐린 날에는 흐린 빛이 거미줄에 어립니다. 밝거나 맑은 날에는 거미줄도 밝거나 맑아서 우리 눈에 잘 안 보입니다. 그리고, 파랗게 물든 하늘이 바다에 드리우면 바닷빛이 하늘빛을 닮아 새파랗게 바뀌듯이, 파랗게 물든 하늘빛을 거미줄이 받으면 “파란 거미줄”이 됩니다.


  거미줄은 언제나 빛깔이 바뀝니다. 아니, 거미줄에는 따로 빛깔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거미줄은 그저 맑습니다. 거미줄은 모든 빛깔을 받아들여서 새로운 빛깔로 된다고 할 만합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파란 거미줄”을 남다르게 바라보거나 새롭게 마주합니다.


  다른 수많은 빛깔 가운데 “파란 거미줄”을 바라보는 까닭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파란 하늘은 지구별에 깃든 모든 목숨을 살리는 바람빛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있어야 뭇목숨이 살아요. 밥을 먹지 않아도 뭇목숨은 살지만, 바람을 마시지 않으면 뭇목숨은 곧바로 죽습니다. 그러니까, 바람이야말로 뭇목숨한테 가장 대수로운 숨결입니다. 바람이 있을 때에 뭇목숨이 있고, 바람이 없을 때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람을 마셔야 뭇목숨이 살듯이, 파란 하늘과 같은 파란 숨결이 될 때에 뭇목숨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이러한 얼거리를 헤아린다면, 왜 “파란 거미줄”인지 새롭게 짚을 수 있습니다.


  거미줄은 거미가 스스로 뽑아서 짭니다. 거미 몸에서 나오는 실이 거미줄이 되고 거미집을 이룹니다. 거미는 제 몸에서 뽑은 실로 집을 지을 뿐 아니라, 이 실을 다시 몸에 넣어서 새로운 실을 뽑고 새로운 집을 짓습니다. 거미는 늘 새로운 무늬를 보여주는 새로운 집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거미는 제 삶을 언제나 새롭게 짓는 셈입니다. 거미줄은 ‘제 삶을 손수 새로 짓는 얼거리’를 보여준다고 할 만합니다.


  거미는 거미줄을 뽑아서 새로운 집을 짓듯이, 우리는 우리 몸을 새롭게 짜서 새로운 기운을 낼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이 “파란 거미줄”로 이루어진 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 몸에서 아프거나 다친 곳이 있을 적에 어떻게 다스리거나 고치면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미는 ‘찢어진 거미줄’을 한 올 두 올 새롭게 먹은 다음, 새로운 줄을 뽑아서 새로운 집을 이룹니다. 우리는 우리 몸에서 다치거나 아픈 곳이 있으면, 이곳을 “새로운 파란 거미줄 같은 얼거리”로 다시 짜거나 엮어서 새로운 기운이 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기운을 어떻게 스스로 우리 몸에서 길어올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밥도 먹’지만, 무엇보다 ‘파란 바람’을 마시는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파란 바람을 마시면서 파란 몸을 이루고, 파란 몸은 파란 춤을 추는 흐름을 타면서 새롭게 깨어납니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흐릅니다. 파란 하늘에 흐르는 구름을 바람이 실어 나릅니다. 파란 몸인 사람들이 파란 몸짓이 되는 파란 춤을 추기에 파란 숨결이 흐르고, 파란 숨결은 하얀 꿈(생각 씨앗)을 실어 날라서 새로운 기운이 솟습니다. 4348.2.6.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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