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마실꽃 2022.8.7.

나그네채에서 2 머리카락



  나그네채에 머물면, 맨 먼저 모든 짐을 내려놓는다. 등에 맨 책짐, 어깨에 가로지른 글붓짐, 찰칵이(사진기)를 담은 짐인데, 글붓하고 글종이(수첩)을 담은 짐은 셋이다. 때로는 손에 책짐을 따로 쥐기도 한다. 책을 워낙 많이 장만하느라 끈으로 책을 묶어서 안거나 들고 다니기도 한다. 도무지 안거나 들고 다닐 만큼 책짐이 넘치면, 책숲마실을 누린 마을책집에 여쭈어 우리 시골집으로 부쳐 달라고 여쭌다.


  이렇게 짐을 다 풀고 나면 손낯을 오래오래 씻는다. 시골집에서는 참 자주 손낯을 씻는다. 글을 쓰면, 글을 쓰느라 손에서 배어난 손기름을 씻는다. 집살림을 하면, 집살림이란 내내 물을 만지는 일이다. 그러나 나그네가 되어 시골집을 떠나 머나먼 서울이나 큰고장(도시)을 돌아다닐 적에는 손낯을 씻을 데가 드물고, 애써 손낯을 씻을 데를 찾아도 시골집처럼 맑거나 차갑거나 살아숨쉬는 물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이 고맙고 아름다운 물이여!” 하고 읊으며 한참 손낯을 씻는다.


  이러고서 고무신을 빨지. 하루 내내 걸어서 돌아다녀 주느라 애쓴 발바닥하고 고무신을 오래오래 빨래하고 씻는다. 이다음에는 머리를 감으면서 서울·큰고장에서 묻은 때를 씻기고, 비로소 몸을 씻어서 땀내음을 털어낸다.


  이래저래 씻고 빨래를 하노라면 머리카락 몇 올이 빠지는데, 내 머리카락이 나그네채 씻는칸에 안 남도록 찬찬히 훑는다. 모든 나그네채에서는 치움이(청소부)가 있으나, 치움이 손길이 미처 못 닿는 데가 있게 마련이다. 적잖은 나그네는 앞선 나그네가 남긴 머리카락을 찾아내고서 “여긴 왜 이렇게 지저분해!” 하면서 나그네채를 마구마구 나무라기도 한다. 치움이를 나무라기 앞서 우리가 살뜰히 치워 놓고 나그네채를 떠나면 된다.


  그래서 나그네채를 떠돌 적마다 늘 생각하는데, 나그네채에 빗자루하고 쓰레받기가 있기를 바란다. 나그네가 스스로 바닥을 슥슥 쓸어서 애벌치움을 해놓도록 하면 얼마나 즐거울까. 나그네로서도 짐을 풀기 앞서 바닥부터 슥 쓸고 싶다. 난 맨발로 지내고 싶으니 더더욱 바닥이 깨끗하기를 바라고, 손수 바닥쓸기를 하고서 맨발로 나그네채에서 짐을 풀고서 쉬며 새아침을 맞고 싶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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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마실꽃 2022.8.7.

나그네채에서 1 ‘나그네채’라니?



  우리 터전을 보면, 예전에는 중국을 섬기느라 한문을 써야 거룩하거나 훌륭하다고 여겼다. 일본이 총칼로 쳐들어와서 서른 해 넘게 윽박지르는 사이에, 숱한 사람들은 이제 이 나라는 일본 그늘에서 못 벗어난다고 여겼고, 이 마음은 일본스런 한자말을 써야 뛰어나거나 똑똑하다는 쪽으로 흘렀다.


  일본이 무너질 줄 모른 일본바라기(친일부역자)가 수두룩하다. 이들은 일본이 무너졌어도 일본 한자말을 붙들었다. 1945년 8월 16일부터 새뜸(신문·언론)에는 “우리말 도로찾기를 하자”는 목소리하고 “일본 한자말도 마흔 해 가까이 썼으니 우리말이다” 같은 목소리가 자주 부딪혔다. 우리나라는 일본바라기(친일부역자)를 하던 이들이 벼슬자리(공무원)를 아주 잡아먹었고, 배움터(학교)도 거의 잡아먹은데다가, 글밭(문단·언론계)도 거의 다 일본바라기였다.


  이런 슬픈 민낯이기에, 1945년 8월이 지난 뒤에도 “일본하고 싸운(독립운동) 이들이 낸 우리말 도로찾기”라는 목소리보다는 “‘일본바라기로 힘·이름·돈을 거머쥔 이들이 외친 일본 한자말 그냥쓰기”라는 목소리가 온나라를 집어삼켰다. 애써 배움책(교과서) 말씨를 우리말로 손질해서 새로 엮었으나, 1950년부터 불거진 한겨레싸움(한국전쟁)이 끝난 뒤로는, 또 이승만이 우두머리(대통령)로 이어가고, 1961년부터 박정희가 새 우두머리로 서슬이 퍼런 동안, “일본하고 싸우며 우리말을 되찾으려던 목소리”는 거의 목아지가 잘렸다.


  앞소리가 길었다. 지난날에는 ‘여인숙’이나 ‘여관’이란 한자말을 썼다. 이러다가 ‘모텔’이란 영어가 들어서면서 ‘여인숙·여관’처럼 한자말로 지은 이름은 값싸거나 낮거나 허름한 곳으로 바라보는 물결이 퍼졌다. ‘호텔’은 예전에도 있기는 했으나 비싼 곳이란 이름이 높았다면, 요새는 여관이나 모텔조차 다 ‘호텔’이란 이름을 붙인다.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며 나라 곳곳 마을책집을 찾아다니는 사람으로서 우리말 이름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행객·관광객’이 아닌 ‘길손’이라서 ‘길손집·길손채’란 이름을 지어 봤다. ‘나그네집·나그네채’나 ‘손님집·손님채’란 이름도 지어 보았는데, 이 가운데 ‘나그네채’를 쓰기로 한다. ‘채’는 집을 세는 이름이기도 하고, 따로 두어 머무는 작은 칸을 가리키기도 한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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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마실꽃 2022.8.7.

나그네채에서 0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예나 이제나 똑같이 있다. 스스로 애쓰지 않아서 가난할 수 있고, 나라·무리(조직·단체)나 우두머리·힘꾼(권력자)한테 미운털이 박혀서 가난할 수 있고, 땀흘린 보람을 거의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얼개라서 가난할 수 있고, 애써도 자꾸 쓴맛을 보느라 가난할 수 있고, 나라·마을이 팔짱을 낄 뿐 모둠살이라는 품을 헤아리지 않기에 가난할 수 있다.


  나는 일 때문에 바깥마실을 한다. 서울이나 인천이나 광주나 부산이나 대구나 대전처럼 커다란 고장에서 산다면, 일 때문에 바깥마실을 하는 날이 적을 만하리라. 아니, 어쩌면 더 있을 수 있겠지. 시골에서 살며 여러 고장을 찾아다니기에, 전남 고흥부터 전남 순천이나 광주를 다녀오는 길조차 하루로는 빠듯하다.


  부릉이(자동차)를 모는 이라면 고흥부터 순천이나 광주쯤 아무렇지 않게 오갈 텐데, 시외버스로 오가는 이라면 이 길이 얼마나 멀고 길삯이 드는가를 알리라.


  나는 부릉이를 안 몬다. 푸른배움터(고등학교)를 마치는 1994년 2월까지, 그러니까 배움수렁(입시지옥)을 마친다는 셈겨룸(시험)을 치룬 1993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배움터에서는 아무것도 안 가르쳤다. 그냥 꼬박꼬박 나가야 했다. 이때 푸른배움터에서는 ‘운전면허 따러 학원에 간다’고 하면 안 나와도 받아들이더라. 나는 길잡이(교사)한테 “이제 이곳은 학교가 아니라, 시간때우기를 하는 곳이니, 저는 스스로 책집을 다니면서 하루 내내 책읽기만 하겠습니다.” 하고 밝혔는데, ‘운전면허 따러 학원에 갈 적에는 결석 처리가 아니’지만 ‘스스로 배우려고 책집을 간다고 하면 결석 처리를 하겠다’고 하더라.


  푸른배움터 길잡이가 꼰대질을 보여주었기에 “그러면 전 앞으로도 자동차 따위는 안 몰 생각입니다.” 하고 대꾸했다. 낮 네 시 무렵 겨우 배움터에서 풀려나면, 인천 배다리 책집거리로 달려가서(말 그대로 달려갔다. 버스삯조차 아깝고, 책집이 닫을 때까지 더 읽을 생각으로 달렸다) 땀범벅인 채로 저녁 늦게까지 책읽기를 했다.


  아무튼 2022년 8월 6일에 찾아간 대전 마을책집 〈우분투북스〉에서 《우리는 군겐도에 삽니다》란 책을 장만했고, 대전에서 서울로 기차를 달리는 길에 다 읽었다. 이 책을 쓴 분은 “가난했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일로 첫걸음을 떼었다 하고, 가난했기에 할 수밖에 없던 일이 오히려 나중에 그분한테 빛나는 새 일거리로 자리잡았고, 두멧시골에 새바람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일판까지 꾸릴 수 있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이 책은 1/4까지는 재미있었고, 그 뒤는 ‘자랑(나 이렇게 성공해서 돈 잘 벌고, 일꾼도 많이 거느리거든?)’만 늘어놓은 듯해서 따분했다.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나그네채를 잡을 적에 언제나 이모저모 살핀다. 2022년으로 치면, 여느날(평일)에는 4∼6만 원 사이를, 쇠날·흙날·해날(금요일·토요일·일요일)이라면 5∼7만 원 사이를 어림해서 잡는다. 하룻밤 묵는 삯을 10만 원이 넘어도 아무렇지 않게 쓸 만한 살림이라면 나그네채를 잡는 일이 수월하겠지. 또한 구시렁대는 일조차 없으리라.


  그러나 가난하기 때문에 더 싼 나그네채를 알아보며 살아왔고, 혼자 움직일 적에는 가장 싼 곳에서 묵었다. 곁님을 만나기 앞서인 2008년까지는 하루 5000∼1만 원인 나그네채를 용케 알아내어 묵었고, 둘이 움직일 적에는 삯을 조금 더 들이는 데를 찾았고, 큰아이가 태어난 뒤에는 삯을 더 들이는 데를 보아야 했고, 작은아이가 태어난 뒤에는 더더 삯을 들이는 데를 찾아본다.


  마흔 살에 이르기까지 ‘가난하기 때문에’란 말을 곧잘 썼으나, 이제는 이 말을 안 쓴다. 마흔 살로 넘어선 뒤부터는 ‘시골사람 눈으로’라든지 ‘숲빛 마음으로’라든지 ‘살람하는 어버이 손길로’라든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같은 말을 쓴다.


  모두 사랑으로 바라보고 싶다. 뻔히 보이는 바가지를 씌워서 5000원이나 1만 원을 더 챙기려는 나그네채 일꾼도, 고무신을 꿴 내 발을 딱딱한 구둣발로 질끈 밟고 지나가면서 아무 말도 없는 서울 젊은이도, “요즘도 책 사러 서점 가요?” 하는 철없는 말을 읊으며 ‘밀리의 서재’에서 얼굴을 파는 김영하 같은 글쟁이도, 그저 사랑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난 모든 풀꽃나무하고 풀벌레하고 헤엄이한테 다 다르게 이름을 붙이면서 살아간다. 모두를 사랑하려니까. 오롯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그네채 이야기를 한 올씩 풀어내려고 한다. 이제는 쓸 만한 때에 이른 듯하다. 나그네채를 1994년부터 다녔구나.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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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는 그랬다

 


  1996년 1월에 군대에서 처음 휴가를 받아 강원도 양구를 벗어난 뒤, 지오피 경계근무를 마치고 다른 산속으로 주둔지를 옮기고서 두 번째 휴가를 받았는데, 나를 아끼던 고참 한 분이 한 가지를 부탁했다. 〈이등병의 편지〉 노랫말을 알고 싶은데 바깥에 나가면 알아보아 달라고 했다. 그래서, 이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하나 장만하고, 노랫말을 종이에 옮겨적어서 부대로 돌아갔다. 노랫말 적힌 종이를 고참한테 건네고, 그러니까 이이는 전역을 곧 앞둔 병장이었는데, 더듬더듬 노래를 불러 주었다.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지만, 고참은 노랫말을 새기고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김광석이 아닌데 내가 부르는 이 노래로도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는구나.


  고참은 테이프를 받아 이 노래를 몰래 한참 들었다. 김광석 님은 군부대로 공연을 다니시기도 했지만, 내가 있던 부대로 위문공연을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있을 무렵뿐 아니라 내 앞에 다른 이들 있을 적에도, 강원도 양구에서도 한참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간 비무장지대 아닌 ‘완전 무장지대’에서도 영토가 남녘이 아닌 북녘 경계에 있던 우리 부대로는 참말 어느 누구도 위문공연을 오지 않았고, 그런 일도 없었다 한다. 우리 부대에서는 ‘위문공연’이라는 말조차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김광석 님 노래는 부대에서 ‘불온노래’였고, ‘반입금지 물품’ 가운데 하나가 김광석 님 노래테이프였다.


  언젠가 그 고참이 이 노래테이프를 듣다가 하사관한테 걸려서 빼앗겼다. 노래테이프를 부대로 갖고 들어온 나까지 하사관한테 불려갔다. 한참 꾸지람을 듣고 얼마 뒤, 하사관이 이 노래테이프를 들어 보았는지, 아무 말 없이 돌려주었다. 불온노래요 반임금지 물품 목록에 든 노래태이프였지만, 아무 말썽이 없이 지나갔다.


  이 노래테이프는 여러 사람 손을 거치면서 우리 중대에서 그야말로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돌아갔다. 이등병에서 일등병이 되고, 어느덧 병장이 되고 여섯 달 뒤에 전역할 무렵, 내가 아끼는 후배한테 이 노래테이프를 물려주었다. 이 노래테이프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너무 늘어져서 못 듣게 되었을까.


  그때에는 그랬다. 이 노래테이프가 걸릴까 걱정한 고참들은 겉에 붙은 스티커를 박박 벗겼다. 이렇게 하면 안 걸릴까 싶어. 그런데, 내무반검사를 하는 행정보급관이나 중대장이나 하사관은 ‘스티커를 벗긴 노래테이프’를 오히려 더 의심하고 빼앗는다. 참말, 그때에는 그랬다.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살아서 바깥으로 돌아가려고 노래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 4347.1.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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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걷는 길 2. 자전거와 함께 살기
― 한 해 동안 주마다 300킬로미터

 


  충주 무너미마을에서 이오덕 님 글과 책을 만지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이오덕 님 곁에서 이녁 말씀을 들은 분들 가운데 막상 이오덕 님 넋을 알뜰히 받아먹으며 스스로 마음을 키운 분은 뜻밖에 몹시 적구나 싶었다. 왜냐하면, 이오덕 님은 ‘나를 따르라’ 하지 않았는데, 모두들 ‘이오덕 제자’라는 이름을 내걸며 ‘이오덕 따르기’만 하기 때문이다. 이오덕 님은 사람들이 이녁을 ‘스승’이나 ‘선생님’으로 모시는 일을 매우 싫어하셨다. 모두 다른 사람이고 모두 다른 목숨이며,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살아가는 넋이라고 말씀하셨고, 이러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멧골학교에서 마흔두 해를 지내셨다. 그러면, 이 넋과 뜻을 제대로 살피면서 모두들 ‘제자’ 아닌 벗님으로서 ‘어깨동무’ 하는 두레나 품앗이를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이오덕 님이 쓴 일기를 날마다 읽으면서 새삼스레 생각했다. 이오덕 님 일기책은 2013년 봄에 드디어 ‘다섯 권으로 간추린 책’으로 예쁘게 나왔는데, 이 일기책에는 알짜 이야기가 많이 빠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오덕 님 넋을 새롭게 돌아볼 수 있을 텐데, 이번에 나온 일기책에서 빠진 알짜란 무엇인가 하면, 이오덕 님이 ‘이녁 둘레에서 제자라고 스스로 밝히는 사람(거의 다 현직 교사, 또 거의 다 초등학교 교사)’을 마주하며 느낀 아쉬움을 밝힌 글이다. 한국글쓰기연구회라는 모임을 이오덕 님이 여셨는데, 이 연구회 현직 교사들이 연수모임을 할 적마다 늘 술만 마시고, 제대로 된 공부모임이 이루어지지 않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오덕 님은 이 모임 집어치우고 모임이름을 ‘술 연구회’로 바꾸라는 말까지 자주 하셨다.


  연수모임이 아니더라도, 다른 회원(현직 교사)들이 저마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가르치고 배우면서 얻은 이야기를 글로 써서 내놓지 못하곤 했고, 회원들 스스로 저마다 다른 학교와 다른 아이들을 마주하며 느낀 이야기를 책으로 엮을 만큼 되어야 하는 줄 느끼지 못한다. 오직 이오덕 님만 혼자서 꾸준하게 글을 쓰고 책을 엮었을 뿐이다.


  이오덕 님 일기를 원본으로 읽고, 책으로 나오지 못한 글을 원고지로 읽고, 이오덕 님이 온삶을 걸쳐 읽어 건사하신 책을 아침저녁으로 나란히 읽고, 이정우 님이 들려주는 아버지 이야기를 귀로 듣고, 《우리 글 바로쓰기》 책을 내려고 모은 엄청난 신문자료를 샅샅이 읽었다. 이러는 동안 곰곰이 생각 하나를 키웠다. 나는 이곳에서 이오덕 님 글을 모두 갈무리한 뒤에는 ‘내 넋을 살찌워 내 글을 쓰고 내 책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내가 이곳에서 이오덕 님 글과 책을 만지면서 차근차근 갈무리하는 뜻이 하나도 없겠다고 느꼈다.


  보리 출판사에서 어린이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할 적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보리 출판사에서 ‘보리 어린이 국어사전’이 나오는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하지만, 이 국어사전이 나온 뒤에는 내 나름대로 ‘내 넋을 더 살찌워 한결 아름답고 알찬 새 국어사전’을 혼자서 스스로 만들 만큼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한길사 김언호 대표가 저지른 말썽, 창비 김이구 님이 보여준 안쓰러운 모습, 보리 출판사 옛 동료들이 내 가슴에 새긴 생채기, 이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속이 쓰려 죽을 노릇이었다. 마음속에서 솟는 눈물과 아픔을 달랠 길이 없었다. 이즈음, 2004년에, ‘발바리’라는 모임을 알았다. 서울 광화문에서 한 달에 한 차례 ‘떼거리 잔차질’을 하는 모임이다(http://bike.jinbo.net). ‘두 발과 두 바퀴로 하는 떼거리 잔차질’이라서 발바리 모임이다. 서울 한복판부터 자동차를 줄이고 자전거로 살아가자는 뜻을 알리려는 모임인데, 운영자도 주최자도 따로 없다. 스스로 모이고 스스로 달린다. 집회도 시위도 아닌 ‘자전거 타기’이다. 버스가 경적을 울리며 자전거 타는 사람을 윽박지르건 오토바이가 자전거 앞에서 배기가스 춤을 추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또 천천히, 서울 시내 한복판을 한 시간쯤 달리는 모임이다.


  처음에는 이 모임에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서 함께했다. 그런데, 어차피 자전거모임에 갈 바에는 아예 충청북도 충주부터 서울까지 자전거로 달려야 제맛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는 동안 길눈을 익힌다. 길그림책을 펼쳐서 충주에서 서울로 가는 일반국도와 지방도로를 살핀다. 이정우 님과 서울이나 인천으로 볼일 보러 함께 움직일 적에 지나가는 일반국도와 지방도로를 눈여겨본다. 이러고서, 어느 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새벽 여섯 시 즈음 길을 나섰다.


  얼마나 설레던지. 편도 150킬로미터를 자전거로 달린다.


  처음 자전거로 150킬로미터를 달리던 날, 다섯 시간 반이 걸렸다. 사이에 쉬며 도시락을 먹느라 이만 한 시간이 나온다. 한 번 이렇게 달리니 등허리와 팔다리가 되게 저리고 결리다. 도시락 먹느라 쉰 삼십 분을 빼면 다섯 시간 고스란히 달린 셈인데, 다섯 시간을 거의 쉬지 않고 달리자니, 땀이 물꼭지 틀어 놓은 듯이 떨어진다. 등에 멘 가방은 내 땀으로 젖고, 옷은 벗어서 짜면 땀물이 줄줄 흘렀다.


  팔다리 안 쑤신 데가 없지만 마음은 홀가분했다. 그래, 이제부터 자전거로만 다녀 보자.

  첫 주는 충주로 돌아가는 길에 시외버스를 탄다. 다음주부터는 오로지 자전거로만 오간다. 충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충주로. 여름, 가을, 겨울, 봄, 네 철을 고스란히 자전거로 달린다. 비가 오건 태풍이 지나가건 눈이 오건 자전거로 달린다. 비가 오면 비를 맞는다. 눈이 오면 눈을 맞는다. 이제 150킬로미터 편도를 달리는 길이 익숙해, 한 번도 안 쉬고 달리면 네 시간 반만에 서울에 닿는다.


  바보짓이라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재미있다. 네 시간 반을 한 차례도 안 쉬고 엉덩이에 불이 나든 말든 달린다. 비가 와서 온몸과 가방이 옴팡 젖어도 그대로 달린다. 꽁꽁 얼어붙는 한겨울에 손가락과 얼굴과 발가락 모두 꽁꽁 얼어붙어도 그대로 달린다. 한겨울에 너덧 시간 자전거로 달리면, 몸을 녹이는 데에 두 시간쯤 걸린다. 몸을 녹이느라 이불 뒤집어쓰고 새우처럼 몸을 말아 덜덜 떨면 아주 천천히 몸이 녹고, 피가 따스하게 다시 돈다. 이때에 느낀다. 나는 이렇게 살아서 숨쉬는 사람이로구나.


  서울에서 충주로 돌아갈 적에는 가방이 터지도록 책을 산다. 자전거 짐받이에 책을 십 킬로그램쯤 묶는다. 이러던 어느 날, 짐받이 붙인 안장 조임쇠가 부러진다. 서울을 벗어나 이제 막 용인을 지나는데 안장 조임쇠가 부러지네. 책이 너무 무겁구나. 아슬아슬한 자전거를 천천히 달려, 여느 날보다 한 시간 반쯤 더디 달려 충주에 닿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사람들이 아이들 태우려고 마련하는 수레를 장만하기로 한다. 다른 사람들은 수레를 자전거에 붙여 아이를 태우지만, 나는 서울에서 책방을 돌며 책을 200∼300권씩 장만해서 책을 싣는다. 45킬로그램까지 싣는 수레이건만, 나는 60∼80킬로그램쯤 되는 책을 싣는다.


  이제 수레를 단 자전거를 달려 충주에서 서울로 가자니, 가는 데에 네 시간 오십 분 걸린다. 수레에 책을 가득 채워 충주로 돌아가자면 아홉 시간 걸린다. 자전거가 너무 힘들겠지. 내 몸보다 자전거가 벅차겠지. 이렇게 자전거를 달리니, 바퀴가 이내 닳는다. 체인이 끊어진다. 여러 부속을 모두 갈아끼운다. 내 자전거는 몸통을 뺀 모든 부속을 여러 차례 간다.


  충주 무너미마을은 시골이다. 이정우 님과 읍내마실을 다니다가 장날에 신가게 들러 고무신을 함께 사곤 했다. 이무렵, 고무신을 처음 신으며 아주 좋았다. 비로소 내 발이 내 발답게 숨쉬는구나 하고 느꼈다. 남들은 뒷꿈치 까진다며 고무신을 안 신는다는데, 나는 겨울에도 맨발로 고무신을 꿸 적에 참 즐거웠다. 발가락 꼬물꼬물 숨을 쉬고, 발바닥은 땅바닥을 가까이 느낀다. 맨발 고무신으로 자전거를 달리면, 이 발바닥과 앞꿈치로 발판을 굴러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더 싱그러이 살아난다.


  이오덕 님이 이녁 삶을 언제나 글로 꼬박꼬박 적어서 남기셨듯, 나도 자전거로 이 땅을 달린 이야기를 꼬박꼬박 적어 놓는다. 누가 읽어 주거나 말거나 대수롭지 않다. 자전거를 타고 충주와 서울을 오가는 동안 겪거나 만나거나 느낀 이야기를 그날그날 저녁에 조곤조곤 적바림한다. 자동차들이 얼마나 자전거를 깔보고, 때로는 갑자기 밀어붙이며 괴롭히는지 적는다. 아주 드물게 ‘자전거를 지켜 주려’고 밤에 내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며 다른 자동차를 막아 주는 분을 만나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화이팅!’ 외쳐 주는 분을 만나는데, 이런 분들 이야기도 적는다. 바보스러운 사람들을 많이 겪은 만큼, 아름다운 사람들도 많이 겪는다. 그래, 그렇지. 이오덕 님 곁에서 ‘이오덕 제자’라고 내세우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바보스럽게 스스로 삶을 못 가꾸는 사람이 있을 테고, 조용히 아름답게 삶을 잘 가꾸는 사람이 있을 터이다. 왜 모든 사람들이 다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러나, 이런 생각에 이를 때마다 슬프다. 왜 모든 사람들이 다 아름답게 살아가지 못하는가?


  자전거로 국도를 주마다 300킬로미터 달리며 느낀다. 어느 국도이든 사람이 걸을 자리가 없다. 사람이 걸을 자리가 없으니 자전거가 달릴 자리가 없다. 국도란, 시골에 난 길이다. 도시 한복판에는 따로 ‘인도’가 있다. 사람들 거니는 자리가 도시에는 있다. 그런데,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사람이 다닐 길’은 송두리째 사라진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할매와 할배가 어디 마실을 다닐라면, 찻길 가장자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움직여야 한다. 시골에서는 자동차가 할매와 할배 들이받아 죽이는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시골 할배들은 자전거에 불을 안 붙이고 밤마실을 다니시는데, 시골 국도에서 사람들은 100킬로미터나 120킬로미터까지 마구 달리곤 하니, 그만 밤에 할배 자전거를 치고는 뺑소니로 사라지는 일이 잦다.


  왜 국도 한쪽에 시골사람 걸어다닐 자리를 안 만들까. 왜 국도 한쪽에 시골사람이 걷고 자전거로 다닐 자리를 안 만들까. 관광상품으로 ‘자전거 나들이’ 하는 길을 수백 수천 억 원을 들여 짓지 않아도 된다. 아니, 이런 관광상품을 만들기 앞서, 마을사람이 자동차 걱정을 하지 않고 느긋하게 다닐 자리를 마련해야 옳지 않은가. 제대로 된 거님길을 마련하면 자전거길은 저절로 생긴다.


  응어리진 마음을 풀려고 타는 자전거였는데, 두 달 넉 달 여섯 달, 이렇게 흐르고 흐르는 동안 외려 마음이 더 아프다. 이 나라 행정과 정치와 문화와 산업 모두,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새삼스레 몸으로 배우니, 자꾸자꾸 아프다.


  뼈빠지게 자전거로 달려 한밤에 충주에 닿는다. 아홉 시간을 달린 끝에 다리힘이 거의 풀려 마지막 오르막을 가까스로 달린다. 땀에 젖은 옷을 벗는다. 알몸인 채 방바닥에 드러눕는다. 처음 이곳에 오던 일을 떠올린다. 나는 서울에서 무너미마을로 올 적에 시외버스를 타고 생극이나 무극에서 내린다. 되도록 생극에서 내리는데, 생극에서 내리려 한 까닭은, 생극면에서 신니면 광월리 무너미마을까지 걷는 길이 무척 곱기 때문이다. 무극(금왕읍)에서 내려 걸으면, 자동차가 너무 많아 한갓지지 못하다.


  생극면에서 내려 무너미마을까지 오는 데에 12.4킬로미터이다. 빠른걸음이라면 한 시간 사십 분이면 닿는다. 숲바람 마시고 들내음 맡으며 느긋하게 걸으면 두 시간이나 두 시간 반쯤 걸린다. 걸어서 오느라 땀투성이 되면, 보리밥집에서 일하는 노금옥 아주머님이 “전화 하지, 왜 걸어왔어요. 이 더운 날에(또는 이 추운 날에).” 하고 말씀하신다. “길이 좋아서 걷고 싶어서요.”


  이오덕 님 글을 갈무리하던 네 해를 더듬는다. 자가용 안 몰고 버스를 타고 면소재지에 내려 천천히 걸어서 이오덕 님 무덤으로 찾아온 손님이 다섯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밖에 없다. 모두들 자가용으로 달려오고, 또 자가용을 몰아 무덤 언저리까지 간다. 이오덕 님이 굳이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새소리·바람소리·개구리소리·풀벌레소리 누리면서, 숲노래와 풀노래 듣던 넋을 짚거나 헤아리지 않는다. 꼭 글쓰기연구회 교사들한테뿐 아니라, 다른 분들, 이른바 스스로 ‘이오덕 제자’라는 분들을 볼 때면, 부디 큰길가 보리밥집부터 무덤까지라도 걸어서 오십사 하고 바라지만, 이렇게 걷는 사람이 없다. 이오덕 님이 듣던 꾀꼬리 노래를 듣거나 소쩍새 울음을 들으려 하는 사람이 없다. 감잎 지는 빛깔과 구름 흐르는 빛결 받아안으려는 사람이 없다. 자가용 유리창으로 어떤 소리와 빛을 맞아들일 수 있을까. 자가용에서 어떤 이웃을 사귈 수 있을까. 자가용 달리면서 시골 논흙 밭흙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문득 생각한다. 이오덕 님은 운전면허증을 딴 적 있을까. 아마 면허증을 딴 적이 없지 싶다. 이오덕 님은 자가용을 몬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가만히 보면 처음부터 ‘자가용과 사귀지 않’았다. 그래, 맞구나. 처음부터 자가용하고 사귀지 말아야지. 4346.11.1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내가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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