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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 장정일 단상
장정일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80 ― 책읽는 생각, 살아가는 생각, 장정일 생각
 : 장정일, 《생각, 장정일 단상》



- 책이름 : 생각, 장정일 단상
- 글쓴이 : 장정일
- 펴낸곳 : 행복한책읽기 (2005.1.17.)
- 책값 : 8900원



 (1) 책읽는 생각


 생각없는 사람이라면, 생각없는 줄거리 가득하고 생각없이 만들어진 책을 으레 집어들게 마련입니다. 생각있는 사람이라면, 생각있는 줄거리 차곡차곡 담기고 생각있게 만들어진 책을 저절로 집어들게 마련입니다. 누구나 제 눈높이에 따라서 책 하나 집어듭니다. 누구나 제 눈높이에 걸맞게 사람을 만나고 어울리게 마련입니다. 누구나 제 눈높이에 어울리게 집자리를 알아보며 살고, 제 눈높이에 따라 일거리를 찾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생각없는 삶이요 생각없는 눈높이요 생각없는 사람이라고 하여 ‘나쁜’ 쪽으로만 빠지지는 않습니다. 생각있는 삶이요 생각있는 눈높이요 생각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좋게’만 흐르지는 않아요.


.. 취미에 빠진 사람에 의해 그의 가족이나 친구가 착취당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다. 그들은 자기 취미 속에 빠지기 위해 늘 “다음에” 하면서 달아나 버린다 ..  (22쪽)


 생각이 있다면 아무 책이나 집어들지 않습니다. 생각이 없다면 주어진 책을 곧이곧대로 받아먹습니다. 생각이 있어도 돈이나 이름이나 힘에 매여서 책을 집어들곤 합니다. 생각이 없으나 이웃에서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책을 건네주는 바람에 철부지 매무새를 하루아침에 벗어던지기도 합니다.


.. 종교인은 자신의 행동으로 자기가 믿는 신의 가르침을 나타내야 한다. 아주 모범적인 시민이 알고 보니 불자로 밝혀지거나 카톨리커로 밝혀졌을 때 이웃은 그와 종교가 달라도, 그 종교를 편견 없이 이해하게 된다. 예수님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던 것은 인간들에게 신앙의 가장 바람직한 태도를 일깨워 주신 것이지 단순히 자선의 원칙으로 새겨서는 안 된다 ..  (36쪽)


 우리 나라 사람들이 나라밖 사람들보다 좀더 책을 안 읽거나 멀리한다고들 합니다. 얼마나 책을 안 읽기에 그러느냐 싶곤 한데, 조금만 생각을 해도 이와 같은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아이한테 책을 읽히는 어버이는 몹시 드뭅니다. 그저 책이 좋고 아름답고 훌륭하기에, 책에 깃든 좋음과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아이한테 선물해 주고 싶어서 읽히는 어버이가 매우 드뭅니다.

 나라안에서 손꼽히는 대학교에 철썩 붙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아가 손꼽히는 대학교 졸업장으로 손꼽히는 재벌회사 직원이 되거나 공무원이 되어서 연봉 수천만 원이나 억대를 떵떵거리며 받으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쥐어 주는 권장도서나 교양도서 목록만 있습니다. 더욱이 학과 공부라는 이름으로 책을 멀리하도록 하는 일이 법으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교과서 공부를 잘해서 시험을 잘 치러야지, 교과서 아닌 책을 읽다가 교과서 지식하고는 담을 쌓고 시험을 못 보면 낙오자가 되고 맙니다. 교과서가 얼마나 올바르게 되어 있는지를, 교과서가 얼마나 알맞게 짜여져 있는가를 살피는 눈이 없습니다. 교과서는 그야말로 간추린 이야기일 뿐인데, 아이들 스스로 교과서 틀을 넘어서 제 몸뚱아리로 세상을 부대끼면서 참 지식과 참 슬기를 갈고닦도록 하지 못합니다.


.. 예쁜 사람이 머리 나쁜 것은 신이 그만큼 공평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지 쪽팔릴 일도 아니고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안티미스코리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엄청 잔인하게 느껴진다. 모든 분야에서 완벽할 수 없기에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서 가장 뛰어난 장점과 특기로 성공하고자 노력한다. 예를 들어 나처럼 구구단도 못 외우고 영어도 할 줄 모르지만 기막히게 예쁜 얼굴과 몸매를 가진 여자가 있다면 그녀에게도 1등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야 하고, 타고난 두뇌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듯이 타고난 미모로도 자긍심과 성취욕을 느낄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예쁘고 머리 나븐 여자는 이벤트 도우미나 대형 마트의 점원을 해야만 당신들의 직성이 풀리나? ..  (39쪽)


 우리들은 학교를 다니는 기나신 세월에 걸쳐서 ‘책방 나들이’를 배우지 못합니다. 새책방 나들이건 헌책방 나들이건 배우지 못합니다. 하물며 도서관 나들이는 배울는지요. 요즈음은 학교마다 도서관이 생기고 있으나, 아이들이 학교 도서관을 마음껏 드나들면서 책을 즐길 수 있게끔 ‘시험 공부 짐’이 적은지, 교과서로 모자란 지식을 채우도록 도서관이 활짝 열려 있는지 궁금합니다.

 국어사전 찾기도 제대로 배워야 하는 한편, 책을 읽을 때 몸가짐이 어떠해야 하고, 책장은 어떻게 잡아서 어떻게 넘기는지, 책을 다치지 않게 하는 길, 책꽂이에 알맞게 꽂는 일, 책꽂이를 손수 나무질을 해서 짜기, 책을 끈으로 묶어서 나르기(이삿짐), 책을 봉투에 넣어서 보내기(동무 생일선물로 보낼 때)처럼, 아주 밑바탕이 되는 이야기들을 학교에서는 얼마나 알뜰히 가르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교사 된 분들이 학교(교대나 사범대)에서 ‘책읽기를 가르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뿐더러, 교사 되기 앞서 스스로 책하고 벗삼지 못했기에 자기가 교사가 된 다음에 아이들하고 책읽기를 삶으로 즐기는 버릇을 못 들이지 않으랴 싶기도 합니다. 교사가 먼저 책을 즐겨야 아이들이 책읽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교사가 먼저 아이들한테 책읽는 삶이 기쁨임을 몸으로 보여주어야 아이들이 책에서 기쁨보따리를 찾으려고 나설 수 있습니다.


 (2) 살아가는 생각


.. 민중을 위하여 시를 쓰는 민중시인이 일류 호텔의 바텐에 앉아 칵테일을 마시고 있다면 사기꾼처럼 보일 것이다. 반대로 모던한 시인이 거진 인민복 차림으로 시장통에 죽치고 앉아 있으면 표절가로 보인다 ..  (42쪽)


 부모님 집을 나와서 혼자서 살림을 꾸린 때는 1995년 4월 5일입니다. 어느덧 열세 해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제가 살고 있는 집은 어디에서나 찬방입니다. 제가 추위를 덜 타서 차디찬 방에서 깃드는지 모릅니다만, 언제나 짐차로 여러 번 날라야 할 만한 책더미를 이고 지고 다니는 터라, 책더미를 집어넣을 만한 집을 적은 돈으로 얻어서 달삯 내고 살자면, 살림집이 추운 곳 아니고는 얻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군대에 있던 스물여섯 달 동안에도 내무반은 늘 추웠고, 부대는 참으로 추웠습니다. 남녘땅에서 가장 추운 곳이기도 했지만, 한여름인 8월에도 밤에는 0도로 떨어져서 야상을 입어야만 했어요. 눈이 녹는 때는 부처님오신날이었고, 첫눈은 시월이 다 갈 무렵 비로소 내렸지만, 한 번 내린 눈은 두 번 다시 녹지 않는데다가, 영 도 밑으로 20∼30도 내려가는 일은 아주 우스웠어요. 1997년 12월 31일에 전역하던 그날까지 뻬치카를 쓰던 내무반이었기에, 난로가 아닌 난로에서 떨어진 곳은 내무반이었음에도 영 도 밑으로 내려가 있었습니다.

 신문사 지국에서 먹고살 때에도 한결같이 추위에 떨었는데, 한겨울에도 실장갑 한 켤레 끼고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자전거를 몰면서 집집마다 신문을 두어 시간 돌리고 돌아오면, 한 시간 가까이 이불에 파묻힌 채로 눈물을 흘리면서 손가락과 발가락을 녹이고 코와 귀를 녹이며 사타구니와 팔다리를 녹였습니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으니 실장갑이고 옷이고 찬물로만 빨래를 했어요. 나이 서른이 넘어간 뒤부터는 겨울 찬물 빨래는 도무지 힘들어, 물을 덥혀서 쓰곤 하는데, 빨래를 마친 뒤 손가락이 뻣뻣해지는 일은 다르지 않습니다.


.. 버스 요금보다 비싼 돈을 주고 택시를 탈 때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대중교통이 아닌 바에야 그것은 아주 사적인 공간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진짜로 조용한 택시를 타 보지 않아서 그게 얼마만큼 호젓할 수 있는지, 그래서 도시생활 속의 내밀한 축복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걸 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문득 내 영혼을 돌아보게 하는 정일한 공간과 시간을 상상하지 못한다 ..  (58∼59쪽)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살며, 서울을 떠나 강원도 양구에서 살며, 강원도 양구에서 벗어나 서울에서 살며, 서울을 떠나 충북 충주에서 살며,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서 살며, 잠자는 방을 뺀 집구석 다른 데는 겨울이면 꼭 영 도 밑입니다. 그래도 한데에서 안 자고 기름보일러라도 돌릴 수 있는 집이니 얼마나 고마우랴 싶습니다. 다만, 잠자는 방에서도 잠바떼기를 걸치고 손가락을 엉덩이에 깔아 녹이면서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안 마르는 기저귀를 다리고 아기 기저귀를 갈고 쌀을 씻어 밥을 하고 감자와 당근을 헹구어 찌개를 끓이고 있는데, 서른 줄이 꺾이는 나이에 다다르면서 ‘겨울에 추위 걱정을 않고 느긋하게 보낼 수 있는 방 하나 얻어서 지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빨래를 했을 때 한나절이 지나면 제법 마르게 되는 곳에서 지낸다면 얼마나 넉넉할까. 글을 쓸 때 손가락이 뻣뻣하게 얼어붙어서 눈물이 찔끔 나오는 일이 없으면 얼마나 잘 써질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따순 방에서 살게 된다고 하여 아이를 더 잘 키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따뜻한 방에서 지내게 된다고 하여 우리 살림이 더 넉넉해질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따사로운 방에서 일하게 된다고 하여 내 글이 더 알차고 훌륭해질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영화평론가가 일반적인 관객보다 더 잘 볼 수 있는 비법은 물론 ‘다섯 번 이상’이 기본인 준비 과정에만 있지 않다. 오랫동안 영화를 공부해 왔다는 사실을 감안하고서라도 그들은 제작 현장을 방문할 수 있고 제작자와 감독ㆍ작가ㆍ스태프 등과 작품에 대해 캐물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기술 시사회와 같은 중요한 자리에 초대받을 수 있다 ..  (77쪽)


 아기를 안고 길을 걷거나 전철을 타거나 어디 가게에 들어갈 때면, 우리한테 고이 마음써 주는 분들이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틀림없이 우리가 아기를 안고 있음을, 아기를 안고 건널목에 서 있음을 알면서도 바로 옆에서 담배를 태우는 어르신(모두 다 남자입니다)이 꼭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차림새를 본 분은 그림이 그려질 텐데, 앞뒤로 가방 서너 개씩 대롱대롱 매달면서 사진기까지 오른어깨에 걸치고 아기를 안고 걷는 사람 앞에서 길을 터 주지 않을 뿐더러 툭툭 치고 가는 분들(거의 모두 남자입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도 많고 아가씨나 어린 학생도 많습니다)이 참 많습니다. 전철을 타고 일산 처가집에 찾아갈 때, 아기가 젖을 먹어야 되어 물려야 하는데, 빈자리가 없어서 맨바닥에 털푸덕 앉아서 젖을 물리지만, 자리 두 칸을 내어주는 분을 보기란 힘듭니다(‘두 칸’을 내주어야 하는 까닭은 아기와 애 엄마가 둘이기도 하지만, 십 킬로그램에 가까운 아기를 내내 무릎에 올려놓고 젖을 물리거나 안는다는 일이 얼마나 팔 빠지고 무릎 뽀개지는 일인 줄을 모르면, 그야말로 모를 뿐입니다). 가만히 보면, 거의 할머님들이 ‘노약자 장애인 임산부 영유아 동반자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라고 부르시지만, 한 자리만 날 때에는 차라리 맨바닥에 털푸덕 앉아서 젖을 물리고, 제가 무릎 꿇고 앉아서 무릎에서 오줌기저귀를 갈아 줄 때가 훨씬 수월합니다.

 용케 세 자리를 모두 얻어서 아기를 눕힌다고 해도, 전철 걸상은 살짝 기울어져 있으니 아기 목이나 허리에 참 안 좋습니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영유아 동반자’ 자리라 한다면, 갓난아기가 어린 아기를 눕힐 때를 헤아려야 할 텐데, 그런 마음씀이란 없어요. 인천에서도 동인천역에는 ‘수유실(젖먹이는 방)’이 마련되어 있습니다만, 그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며 드나드는 신도림역이나 서울역이나 용산역이나 시청역이나 종로3가역이나 동대문역 들에서 젖 물릴 수 있는 조용하고 바람 안 드는 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 반면 인간들은 배우는 일에 속수무책이다. 예를 들어, 유치원 시절부터 대학 졸업까지 ‘거짓말하지 말고, 훔치지 말고, 싸우지 말라’는 도덕과 교훈을 배우지만, ‘배운 놈이 더 무섭다’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배움은 아무 소용 없고 말짱 도루묵이다 ..  (82쪽)


 그러나, 이렇게 온몸으로 부딪히게 되니까 보일 뿐이에요. 이처럼 온몸으로 살아가니까 깨닫고 있을 뿐이에요.

 어느 시인 말마따나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머리로는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 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버스나 전철을 탈 때에 거의 자리에 앉는 일이 드물었고, 자리에 앉았어도 벌떡벌떡 일어나서 다른 이가 앉게 내어주었지만,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어머님들한테 자리 하나 내어준다고 해서, 그분들 나들이길이 수월하지는 않음을 뼛속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막상 아이를 낳아 키우기까지, ‘아기를 어떻게 안아야 하는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아기를 어떻게 재우는가’를, ‘아기를 어떻게 씻기는가’를, ‘아기 사는 집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를 조금도 살피지 못했습니다. 겨우겨우 알아가고 있으며, 차근차근 깨닫고 있습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듯 세상을 보고 있으며, 앞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고 삭여야 할 일이 많다고 느낍니다.


.. 예를 들어, 가야산에 골프장을 만드는 일을 반대하기 위해 100만 인 서명운동이 필요할까? 혹은 시인 이상화의 생가를 보존하기 위해 그게 필요할까? 박정희기념관을 반대하기 위해서는 그것도 필요악일까? 열 명 혹은 다섯 명으로는 안 될까? 진정 단 한 명의 의견이라도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고심하는 사회에서라면 100만 인 서명운동 따위는 우스갯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명운동의 규모와 목표가 걸핏하면 100만 인이 넘는 진풍경은 우리 사회의 병폐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100만 인 서명운동은 그것이 어떤 선의에서 행해지든지 간에 우리 사회가 물량과 물리적인 세가 득세하는 사회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처럼 머릿수가 말하기 시작할수록 소수 의견은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되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  (88쪽)


 (3) 장정일을 생각


 소설쓰는 장정일 님을 딱 두 번 보았습니다. 두 번 모두 헌책방에서 보았습니다. 두 번 보기 앞서는 장정일 님이 자주 들렀다고 하는 헌책방 아저씨한테 틈틈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헌책방 아저씨는 처음에는 몰랐다고 하는데, 나중에 다른 분한테 이야기를 듣고는, ‘《장정일의 독서일기》에서 장정일 님이 당신이 보던 책을 헌책방에 내놓았다’는 대목을 읽고 당신 헌책방에 ‘장정일 님이 내놓았음직한 헌책’을 찾으려는 손님이 꽤 있었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무렵, 나라 안팎에 내로라하는 분들 말 한 마디와 글 한 줄이 얼마나 큰힘을 내는가 싶어 새삼 놀랐습니다. 내로라하는 분들이 헌책방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면, 이분들을 따르거나 좋아하는 분들도 으레 헌책방을 사랑스럽게 바라봅니다. 내로라하는 분들이 헌책방을 개골창만도 못한 낡아빠진 시시껄렁 껍데기로 바라보면, 이분들을 따르거나 좋아하는 분들도 으레 헌책방을 개골창만도 못한 낡아빠진 시시껄렁 껍데기로 바라봅니다. 이냥저냥 아무 눈길도 안 두면, 이때에도 마찬가지로 강 너머 불 구경입니다.


..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해석이 있어 왔지만, 나에게 영화란 너무나 명확하게 규정된다. ‘두 번 본 것’만이 영화다. 한 번 보고 만 것은 영화가 아니다. 그건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목격하게 된 교통사고와 같은 것 ..  (131쪽)


 다른 헌책방에서 듣는 장정일 님은 ‘헌책방 아저씨와 때때로 술잔을 부딪히기도 하는 사이’였기에, 좀더 다른 이야기를 들었고, 또 만났습니다(다만, 아직 장정일 님과 술잔을 부딪혀 보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장정일 님하고 술잔을 부딪히면서 두런두런 시끌버끌 수다를 떨게 된다면, 그 뒤로 읽는 장정일 님 책은 사뭇 달라질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하루에 다섯 차례씩 헌책방 나들이를 한다’고 했는데, ‘글쓰느라 바쁜데 하루에 다섯 차례나 오려니 너무 힘들다’고, ‘나(장정일)한테 돈이 많다면 헌책방을 통째로 사서 집에서 신나게 책만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장정일 님은 책을 참으로 좋아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부럽기도 합니다. 비록 한 군데만 다섯 차례를 들락거린다고 하지만, 하루에 책방을 다섯 차례나 갈 수 있을 만큼 주머니 형편이 되는구나 싶어서 부럽습니다. 제 살림살이는 하루에 한 번은커녕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 가면 괜찮으려나 싶을 만큼이기에(저 또한 예전에는 날마다 두어 군데씩 들르곤 했습니다), ‘나도 돈을 넉넉히 벌면 날마다 한 군데씩 헌책방 나들이를 하고 싶구나’ 하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지금은 지금대로 좋다고, 지금은 날마다 책방 나들이를 하면 못 읽게 되는 책이 많이 늘어날 테니, 지금 이대로가 딱 알맞다고 느낍니다. 아이 돌보고 집살림 꾸리고 하는 데에도 밤잠이 모자라서 허구헌날 눈밑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데, 무슨 얼어죽을 책 타령을 하겠느냐 싶어요.


.. 이런 생각이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고 환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개꿈이라고 하더라도 신문 사회면을 매일 스크랩해서 읽는 작가가 어디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낸 L형의 신작 장편은 홍콩 느와르나 할리우드 문법과 너무 가까운 만큼, 내가 공들여 읽는 신문 사회면과는 동덜어져 있었다 ..  (175쪽)


 《생각, 장정일 단상》을 덮으면서, 저는 제 깜냥껏 생각합니다. 그동안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숱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만, 새롭게 생각하고 거듭 생각하며 또다시 생각합니다.

 민방위훈련장에 가서 졸음을 쏟아지게 하는 비디오를 보는 내내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흔들리는 전철간에서 아기 오줌기저귀를 갈고 나서 한숨 돌리는 가운데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고단하게 잠든 아기와 옆지기 머리를 쓰다듬다가 나 또한 잠이 쏟아졌지만 찬물로 낯 씻고 눈 부릅뜨고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합니다. 지금 내 삶은 얼마나 나다운 삶인지를. 지금 내가 손에 쥐는 책은 내 마음밭을 얼마나 일구어 놓는 책인지를. 지금 내가 어울리는 사람들은 얼마나 내 몸이 기쁨으로 들뜨게 해 주는 만남을 꽃피우고 있는지를. (4341.1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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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쟁이 우리 아이 책벌레 만들기
폴 제닝스 지음, 권혁정 옮김 / 나무처럼(알펍)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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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책벌레 만들기
- 글쓴이 : 폴 제닝스
- 옮긴이 : 권혁정
- 펴낸곳 : 나무처럼(2005.9.10.)
- 책값 : 1만 원


 어머니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책을 가까이했거나, 나중에라도 책을 가까이했다면, 딸이나 아들된 사람들도 책과 가까이하리라 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텔레비전을 가까이했거나, 나중에라도 텔레비전을 가까이했다면, 딸이나 아들 되는 사람도 비슷하게 영향을 받을 테고요.

 지난 열 해 사이, 어린이책이 참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린이책하고는 눈꼽만큼도 인연이 없던 출판사들도 어린이책을 펴내는가 하면 따로 부서를 꾸리거나 아예 새끼출판사를 차리는 곳도 있습니다. 그만큼 이 나라 어린이권리가 높아져서 어린이책을 이토록 많이 쏟아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요즘 어린이책은 웬만하게라도 찍어내면 기본은 팔리기 때문에 책 펴내 돈을 버는 데에는 딱 알맞습니다.


― 아동작가들은 좋은 이야기는 어른까지 사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63쪽)


 어린이책을 쓰는 사람은 어른입니다. 어린이책을 사는 사람도 거의 어른입니다. 하지만 읽는 사람은 거의 아이들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도움이 될 만한 책, 그러니까 교훈도 일깨우고 지식도 건넬 수 있는 책을 살피며 책을 사 줍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재미있어 할 만한지, 아이들 눈높이에 걸맞는지까지는 못 살핍니다. 어른들이 보기에 괜찮다 싶은 책을 만들고 읽힐 뿐, 아이들이 참말로 즐겁게 받아들일 만한지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또한, 아이들 마음과 생각을 아름답고 올바르게 가꾸고 이끌 만한지는 더더구나 헤아리지 않습니다.


― 먼저 책을 사랑하는 마음부터 철저하게 가르쳐야 한다. (19쪽)


 왜 그럴까요? 다 까닭이 있겠지요. 어린이책을 쓰는 분들, 어린이책을 엮는 출판사 분들, 어린이책을 사 주는 어버이들은, 어릴 적부터 ‘어린이책을 가까이하지 않은 사람이기 일쑤’라서 그렇습니다. ‘나중에라도 어린이책을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책은 교훈과 재미로만 엮을 수 없어요. 아이들 감성을 건드린다고 해서 읽힐 만한 책이 아닙니다. 발달단계나 지능지수를 살피며 읽히는 책이 어린이책일 수 없습니다.

 어린이책도 ‘책’입니다. 어린이도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린이책을 쓰거나 엮거나 사 주는 우리 어른들은 이 두 가지를 너무 손쉽게 잊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생각을 안 하는지 몰라요. 어린이책에 반드시 담겨야 할 이야기는 ‘책’에 담길 이야기와 마찬가지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기 마련입니다.


― 아이들은 자신이 직접 쓴 글을 읽을 때 철자가 틀린 단어도 그대로 읽는다. 그렇다고 이것이 글의 가치를 줄어들게 하지는 않는다. (132쪽)


 어린이책을 쓰는 분들은 ‘자기가 쓴 책을 빼고 다른 어린이책을 몇 권이나 읽’어 보았을까요. 어린이책을 엮어서 펴내는 분들은 어떨까요. 어린이책을 사 주는 어버이들은 어떻지요? ‘아이들한테 읽힐 목적’만 앞세운 나머지, 자기 스스로 ‘어린이책을 책으로 즐기는’ 마음은 없지 않나요? 아이들 눈높이를 ‘낮게’ 보면서 아이들도 우리(어른)와 똑같은 ‘사람’임을 잊은 채 이야기를 엮어 나가지 않는가요?


― 당신은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는 사랑받기를 원한다. 이런 사실을 책 읽는 상황에 주입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15쪽)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을 곧잘 만납니다. 초등학교 교사를 가장 자주 만납니다. 이분들을 뵐 때마다 꼭 한 마디를 합니다. “어린이책 좋아하셔요?” 언제나 듣는 대답, “글쎄요.” 교육대학교 다니는 후배들을 볼 때마다 꼭 한 마디를 합니다. “어린이책도 읽고 있나요?” 늘 듣는 대답, “시험 치기 바빠요.”

 교사가 되기 앞서 어린이책 한 권 제대로 읽은 사람은 몇쯤 될까요. 자기가 딸아들을 낳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되기 앞서 어린이책 한 권 제대로 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자기가 어린이책을 쓰는 작가가 되기 앞서, 어린이책을 펴내는 출판사 직원이 되기 앞서 어린이책 한 권 찬찬히 살피고 헤아린 사람으로 누가 있을는지.

 하지만 교보문고만 가 보아도 어린이책 자리는 북적북적 저잣거리가 따로 없습니다. 날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새 어린이책이 쏟아져 나옵니다. 어버이들은 이 책들을 부지런히 가방에 주워담고 카드로 책값을 직 긋습니다.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무섭게 “너, 오늘은 몇 권 읽어.” 하는 명령을 듣겠지요. 히유.

 적어도 이 나라에서 초등교육을 맡는 교사들이라도, 또 어린이책을 펴낸다고 하는 출판사 분들이라도, 또 어린이책 작가라고 자기 소개를 쓰는 분들이라도 《책벌레 만들기》 같은 책 하나 차분히 읽어 본다면, 세상이 이렇게까지 돌아가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4340.2.1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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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슬에서 풀리다 - 해방기 책의 문화사
이중연 지음 / 혜안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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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투, 농구, 배구, 씨름, 야구, 축구, K-1, 스타크래프트를 비롯한 온갖 게임, … 사람들 눈길을 끄는 운동경기(인터넷게임도 운동으로 친다면)가 넘칩니다. 운동경기는 가짓수가 하나둘 늘어나는데, 나라안에서만 하던 운동경기가 나라밖으로도 퍼지며 미국 프로농구, 프로야구, 미식축구, 아이스하키, 프로레슬링 들이 들어왔고, 월드컵축구라든지 올림픽이라든지 갖가지 새로운 운동경기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고되게 일하는 사람들은 몸이 고단하여 책을 즐기기 어렵습니다. 운동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땀을 뻘뻘 흘린 뒤에는 시원한 술 한 잔을 마시지, 무슨 책을 볼까요.


.. 책은 먼지에 쌓여 고통스러웠겠으나 해방의 준비였기에 가슴 벅찼으리라. 고서점 주인 황종수의 마음이 그랬으리라. 유길서점이나 일성당서점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대개의 한글책 고서점 경영인은 ‘지식인’이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책을 통해 역시 ‘실의의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학생이 찾아오면 ‘문화 사정 일반을 이야기해 주고 은근히 민족주의를 고취’했다. 한글 책이 하루에 한 권밖에 팔리지 않았지만 그 ‘한 권’을 찾는 이들을 통해 민족의식의 보존을 전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  〈29쪽〉


 지난날에는 지배계급만 누리던 책 문화였고, 지배계급 봉건통치 얼개가 무너진 뒤로는 일제식민지살이에 눌려서 숨막히던 책 문화입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며 책 문화도 비로소 숨통을 트려고 했는데, 곧바로 들이닥친 것은 끔찍한 전쟁과 또다른 독재정권. 전쟁은 그나마 싹트려던 자유와 민주와 평등과 통일과 독립을 밑바탕으로 우리 삶터 이야기를 다룰 만한 사람을 죽여 넘어뜨렸고 자연 삶터를 무너뜨렸으며, 독재정권은 온갖 방법으로 사람들을 짓누릅니다. 운동경기 퍼뜨리기는 이때 독재정권이 휘두른 ‘사람들 바보 만들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입시위주 주입식교육은 또다른 ‘바보 만들기’였고요. 더구나 입시로 짓눌린 젊은이들이 운동경기처럼 몸을 움직이기도 하고 흠뻑 빠져들 만한 것에 마음을 쏙 빼앗기게 한다면, 제아무리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뻗어나가려 하던 책 문화도 그만 고꾸라질밖에 없지 싶습니다.


 - 하지만 해방 직후 좌익서적이 많이 출판된 것을 좌익의 ‘선전활동’ 때문만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당대의 중심적 출판분야는 사회적 수요의 반영이다. 〈57쪽〉

 

 - 좌익서가 독서인에게 ‘충격’을 주었다면, 이들 계몽 서적은 ‘감격’과 ‘감동’을 주었다. 〈60∼61쪽〉


 요즘은 충격을 주는 책도, 감격과 감동을 주는 책도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독도 문제로 들끓으면 ‘일본놈 욕하기’나 잠깐 반짝하듯이 할 뿐, 일본이 우리 역사를 어떻게 비틀고 있는지, 독도 문제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사람들 스스로 책이라도 한 권 뒤져 보면서 알아보지 않습니다. 벌써 바보처럼 길들어 버렸는걸요.

 

 이제 책이란, 가벼운 재미를 담은 것, 또는 시간 때우는 읽을거리뿐일까요? 책으로 얻는 지식은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되고, 우리가 온몸 부대끼며 얻던 경험과 슬기는 괜히 땀 빼는 짓일는지요. 앎(지식-책)과 함(경험,슬기-실천)이 함께 움직이면서 세상을 올바르게 느끼고 자기가 걸어갈 길을 다부지게 이어 나가는 흐름은 사라져야 할 것일는지 모르겠습니다.


.. 이때 한성도서가 출판권을 갖고 있던 이광수의 《흙》(1933)을 다시 찍으면 공장을 새로 지을 수 있다고 주위에서 권고했지만, 사장 이창익은 ‘친일파’ 이광수의 책을 해방된 조국에서 간행할 수는 없다며 찍지 않았다 ..  〈25쪽〉


 젊은 힘, 다부진 부딪힘, 세상을 스스로 헤아려 보려는 움직임이 사라져 가는 이 마당이니, 옳고 바른 생각으로 자기 개성을 마음껏 뽐내면서 살아가려는 이야기는 뒷전으로 밀리는 일이 자연스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슬에서 풀려났으나 자유로이 뻗어나가지 못하는 우리 책 문화, 우리 삶터가 참 딱하고 안쓰럽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 모습을 딱하거나 안쓰럽다고 느낄 사람은 아주 드물게 되었지 싶습니다.

 

 《책, 사슬에서 풀리다》를 읽으며 우리네 역사가, 문화가, 사회가, 사람 삶이 참 억눌리고 짓눌린 얼개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음을 느낍니다. ‘책이 모든 것이라거나 책을 꼭 읽어야 한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책 하나로 열어젖힐 수 있는 모든 실마리와 아름다움’이 죄 사라지는 우리 모습이지 싶습니다. (4339.6.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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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기를 권함 - 2004년 2월 이 달의 책 선정 (간행물윤리위원회)
야마무라 오사무 지음, 송태욱 옮김 / 샨티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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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이름 : 천천히 읽기를 권함
 - 지은이 : 야마무라 오사무
 - 옮긴이 : 송태욱
 - 펴낸곳 : 샨티(2003.11.11)
 - 책값 : 8000원


 "천천히 읽기"는 좋은 읽기법
 - 책을 좀더 즐겁게 읽기


 <1> '다치바나 다카시'와 견주는 책


 .. 나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한 쪽 읽
 는 데 1초, 좀 늦더라도 2,3초'라는 읽기 방식이다. 그런데 이것
 은 불가능한 방법은 아니다. 굳이 심신에 무리를 주면서라도 훈련
 을 거듭하면 나한테도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책을 그렇게나 빠른 속도로 읽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것을 모르겠
 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내가 읽은 재미있는 책, 엉터리 책 그리고 나
 의 대량 독서술, 경이의 독서술>은 서평집이기도 하지만, 거기서
 예로 들고 있는 책 가운데 5분이나 15분에 읽어버리고 싶은 책은
 단 한 권도 없다. 매력이 있을 것 같은 책이라면 여느 때처럼 느
 릿느릿 읽고, 읽고 싶지 않은 책이라면 처음부터 아예 손에 들지
 않는다 ..   <18쪽>


 어느 일본 작가가 쓴 <천천히 읽기를 권함>이란 책을 보름에 걸쳐서 다 읽었습니다. 그 뒤로 닷새 동안 이 책에 담은 줄거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빨려들듯 읽던 <천천히 읽기를 권함>이라 하루 만에 1/3을 읽었고, 이틀 만에 절반을 넘겼는데, 그 뒤로는 어쩐지 지루하고 느슨해진 느낌에 책을 놓았고, 열흘 동안 들춰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책을 잡은 뒤 사흘 동안 나머지를 다 읽었습니다.

 <천천히 읽기를 권함>을 지은 야마무라 오사무는 '다치바나 다카시'를 비판하고자 이 책을 쓰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다만 다치바나처럼 '많이 빨리 읽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뜻과 소중함이 있겠으나, 자기 같은 사람에게는 '적게 천천히 읽는 일'이 더 알맞아 보이며, 책이 지닌 모든 것을 감동으로 받아들이지만 '빠르기'에 너무 매달리거나 얽매이지 말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말문을 열어요.

 야마무라 오사무는 책 앞에 이렇게 묻습니다. "그들(다치바나 다카시)이 주장하고 권유하는 독서법은 그들 외에 어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일까? (19쪽)"


 <2> 천천히 읽는 까닭


 에밀 파게, 엔도 류키치, 헨리 밀러를 보기로 들며 "책은 감동을 느끼려고 읽기 때문"에 "빨리 읽어서 많은 지식을 얻는 것도 좋겠으"나 천천히 읽기를 말하는 야마무라 오사무. 저도 이런 생각이 참 옳다고 봅니다. 한 권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야금야금 밥을 먹듯 찬찬히 즐기는 맛이야말로 책 한 권을 알뜰히 즐기는 맛이라고 보아요. 때로는 숨돌릴 틈 없이 읽어제끼기도 합니다. 추리소설이나 긴소설을 읽을 때는 줄거리와 인물을 둘러싼 이야기에 빠져서 '작가마다 다른 문장과 글맛'을 건너뛸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런 문학도 나중에 차근차근 문장을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다시 읽으면 지난날 줄거리에만 푹 빠져서 읽던 때와는 사뭇 다른 감동이 다가와요. 이런 느낌을 야마무라 오사무는 '책과 몸과 마음이 어울리는 일'이라고 말해요.


 .. 눈이 글자를 좇아가다 보면 그에 따라 정경이 나타난다. 눈의
 활동이나 이해력의 활동이 다 갖추어진다. 그때는 아마 호흡도
 심장 박동도 아주 좋을 것이다. 그것이 읽는다는 것이다. 기분
 좋게 읽는 리듬을 타고 있을 때, 그 읽기는 읽는 사람 심신의 리
 듬이나 행복감과 호응한다. 독서란 책과 심신의 조화이다 .. <38쪽>


 그런데 <천천히 읽기를 권함>이란 책을 보며 한 가지 끊임없이 걸리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천천히'란 말이에요. '천천히'란 말은 "어떤 일을 할 때 서두르지 않고 느리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느리게'란 말은 "어떤 일을 할 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이야기이고요. 그렇다면 "천천히 읽기"란 "시간이 오래 걸리도록 책을 읽는 일"이에요.

 자.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보아요. 책을 읽는 빠르기는 섣불리 '빠르다-느리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읽는 빠르기는 제가 느끼기에 그저 그렇다고 볼 수 있으나 어떤 이에게는 '너무 빠르다'라 할 수 있고 '너무 느리다'고 할 수 있거든요. 우리 아내나 다른 동무들과 책을 함께 읽다 보면, 제가 아내나 다른 동무보다 책을 느리게 읽음을 느껴요. 한 쪽을 다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제가 더 깁니다. 하지만 저도 꽤나 빠르게 읽는 때도 있어요. '문장과 낱말을 보지 않으려'고요. 말을 만지고 다루는 일을 하다 보니 책을 읽을 때에도 번역이 잘못되었거나 엉성하거나 창작이 우리 삶과 문화와는 어긋난 낱말과 문장을 만나면 읽기가 껄끄럽습니다. 그래서 문장이 덜된 글이지만 줄거리가 좋을 때에는 문장은 건너뛰면서 줄거리만 좇으며 읽어요. 이럴 때에는 책이 술술 읽히고 빨리 읽는 편입니다. 하지만 낱말 하나를 알뜰하고 골라 쓴 시나 좋은 문학을 즐길 때에는 참 느릿느릿 읽는 편이에요. 읽은 대목을 두어 번 곱읽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이 책은 이름을 잘못 붙였다고 보아요. 어쩌면 번역을 할 때 좀더 헤아렸어야 옳다고 보는데, '천천히'가 아닌 '찬찬히'라 했어야 맞겠다고 보아요. '천천히'는 그저 "빠르기가 느리다"를 말하지만 '찬찬히'는 "꼼꼼하면서 차분하고 지긋하게"를 말해요. 어느 책을 읽어서 감동을 받고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아무래도 '천천히' 읽을 때보다는 '찬찬히', 그러니까 '차근차근' 읽을 때라고 봅니다. 지은이 야마무라 오사무가 말하는 읽기법도 '천천히'라기보다는 '알맞은 빠르기'인 만큼 "차분하고 꼼꼼하게 지긋하게"를 뜻하는 '찬찬히 읽기'가 더 좋다고 봅니다.


 <3> 책을 왜 읽는가?


 <천천히 읽기를 권함>이 주는 아름다움 가운데 하나는 "책을 왜 읽는가?" 하고 스스로 묻고 스스로 풀이를 찾는 데에도 있습니다.


 .. 필요가 있어서 책을 읽을 때 나는 그것을 독서라고 생각하지 않
 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읽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펴본다'
 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혹은 '참조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설령 한 권의 책을 읽고 기획서나 리포트를 쓰는 데 도움이 되는 경
 우가 있어도, 나에게는 그것을 두고 독서라고 말하는 그런 감각이
 없다. 물론 필요가 있는 일이기 때문에 띄엄띄엄 읽기도 하고 건너
 뛰며 읽기도 한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을 띄엄띄엄 다 읽고 난 뒤,
 나는 그것을 독서한 책의 권수로 세지 않는다. 나만이 아닐 것이다 .. <46쪽>


 이 대목은 참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고 보아요. 저는 이 대목에 별을 둘 그리고 몇 번이고 다시 읽었습니다. '독후감 쓰기 숙제'를 하고자 읽는 책도 '책읽기'라 말하고자 애를 쓴다면 책읽기에 들어가겠으나 실질로 우리 삶과 마음과 생각에 도움을 주고 감동을 주는 책읽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신문을 '읽는다'기보다 '본다'고 더 흔하게 말을 하고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도 '본다'가 더 가깝다고 하는 까닭도 이런 테두리에서 말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때그때 보고 사라지는 소식과 정보를 얻는 일이 얼마나 '감동'을 주며 '아름다움'을 맛보게 하느냐, 바로 이런 테두리에서 책을 읽는 까닭을 밝힌다고 보아요. 쓱쓱 훑으며 어떤 줄거리인지만 지식으로 익히는 게 아니라, 어떤 글 편, 노래 한 소절, 그림이나 사진 한 장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곰삭여서 즐기는 일이 될 때에야 비로소 '책읽기'라고 말할 수 있지 싶어요.

 야마무라 오사무는 언젠가 "건강을 위해서는 하루에 30분이라도 낮잠을 자야 한다고 쓴 신문 기사를 보고 웃고 만 적이 있다. (144쪽)"며 "한 달에 몇 권, 몇십 권 읽으라는 것도 얼빠진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물어요. 사람에 따라 낮잠을 안 자는 게 좋을 수 있고, 한 시간을 자야 알맞을 수 있거든요. 책도 한 해에 한 권 읽는 편이 알맞은 사람이 있고 만 권을 읽어도 모자람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테니, '책읽은 숫자'를 말하는 일은 우스개밖에 안 된다고 여깁니다.


 <4> 책읽기가 주는 즐거움


 영화를 즐길 때 조금 빠르게 돌려서 2시간 30분짜리를 1시간 만에 본다면 어떨까요? 군데군데 가위질을 해서 30분 만에 본다면요? 노래를 들을 때 길어서 지루하다며 조금 빠르게 돌리면 어떨까요? 10분짜리 노래를 간주와 전주를 자르고 후렴도 잘라서 2분 만 돌리면요?

 책읽기가 주는 즐거움이란 어느 책 한 권을 자기 눈높이와 생각과 몸과 마음 상태에 알맞은 빠르기로 찬찬히 읽고 맛볼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좋은 책이 수백만 권, 아니 수억만 권도 넘게 있는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모든 책을 다 읽어낼 수 없어요. 책을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알맞으면서 재미있고 즐겁고 살가우면서 아름다울 책을 추리고 골라서 읽을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 좋습니다. '좋은 책'이라는 책 가운데 1000권을 빠르게 읽어제끼는 일도 나쁘지는 않지만, 10권이라도 차근차근 읽어서 제것으로 삼는다면, 또 그 작품에 깃든 모든 느낌과 이야기를 속속들이 파헤치고 헤아릴 수 있다면 더 나은 책읽기가 아닐까 모르겠어요.

 <천천히 읽기를 권함>은 책읽기가 주는 즐거움을 우리에게 차분하게 들려주는 한편, 저마다 가장 알맞은 빠르기로, '책 권수는 신경을 끄면서' 살자는 덕목을 펼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이 책은 쪽수가 186쪽인데 빈자리가 무척 많습니다. '천천히 읽으라'고 빈자리를 많이 주었는지는 모를 일이나, '천천히 읽는' 일은 빈자리가 많다고 그리 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독자가 알아서 읽을 일입니다. 지나치게 많이 둔 빈자리를 줄였다면 186쪽밖에 안 되는 이 책은 120~130쪽이면 넉넉한 책이 되었을 테고, 그렇다면 책값도 8000원이 아닌 6000원쯤만 해도 넉넉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이 책은 더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만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책읽기법을 말하는 책인 만큼, 책을 꾸밀 때에도 이런 대목에서 한 번 더 생각했다면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책일 될 뻔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낯선 일본 작가 이야기가 끝없이 나오는데,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한국에는 낯선 일본 작가 소개와 작품 세계' 해설(각주)이 줄어듭니다. 아직 우리 나라에 알려지지 않은 일본 작가라 하더라도 생판 낯선 사람들 이야기가 많은 책이라면 좀더 친절을 베풀으셨다면 더 나았으리라 보아요.

***
책읽기가 아직 서툴거나 낯선 분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는 책입니다. 책읽는 맛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느낄 수 있는가를 말하는 한편, 책읽기가 주는 즐거움을 듬뿍 안기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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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은 헌책이다 - 함께살기 최종규의 헌책방 나들이
최종규 글 사진 / 그물코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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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자기가 쓴 책에 별을 다섯 개 붙이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로서는, 제가 쓴 원고 가운데 1/10만 담아서 얇게 만든 책이라 아쉬워서 4.5점을 매기고 싶으나, 그렇게 점수를 주기 어려워 이렇게 했습니다. 아무튼, 책을 펴낸 사람으로서, 답변을 해야겠다 싶어서 글을 올립니다. 저는 '함께살기(http://hbooks.cyworld.com)'라는 모임을 꾸리고 있습니다. 책으로는 아쉽거나 모자라는 이야기는 이 모임 게시판에 올려놓은 엄청난... 글과 자료로 도움 받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 목표나 목적은, 사람들이 헌책방을 제대로 알고 느끼며, 그 맛을 헤아리는 데에 있습니다. 나나 님께서 제가 펴낸 책을 모자라다고 평가해 주셨지만, 헌책방에 얽혀서 여러 가지 펼치신 말씀은, 제가 펴낸 책에 다 나온 이야기이기도 하여, 한편으로는 고맙고 다행이라고도 봅니다. 아무튼 ^^
서울 용산 <뿌리서점>

 

'나나'님에게

먼저, 제가 쓴 책을 시간 내어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헌책방을 즐겨 찾는 이가 많지 않아, 이런 책을 내도 제대로 읽힐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 나나 님이 쓴 다른 글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제가 이 책에서 다루고 짤막짤막하거나 길게 소개한 '헌책' 가운데 저 말고 눈길을 지긋이 두고 찾거나 보거나 알려고 하는 책도 드물 테고, 읽어 보신 책도 드물 테니, 낯설고 지루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런 책들을 굳이 이야기하고 헌책방을 소개하고 헌책방이 어떤 곳이다... 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이 "헌책방이란 곳을 가 보지도 않고 자기 선입견과 편견으로 매도하는" 잘못된 흐름과 분위기를 일러 주고 싶어서입니다. 새책방이든 도서관이든 헌책방이든 "묻혀 있는 책"이 대단히 많습니다. 보통은 "널리 알려지거나 남들이 많이 읽거나 추천을 서로서로 하는 책"을 보지, "거의 알려지지도 않고 남들도 거의 안 읽고 추천도 하지 않"는 책은 거들떠보는 사람도 드뭅니다. 송건호니 리영희니 박현채니 이오덕이니 성내운이니 김교신이니 인정식이니 하는 분들이 남긴 책을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찾아서 읽겠습니까? 고전이라고 해도 서양고전이나 몇몇 나라안 이름난 사람들 책만 볼 뿐이지 박제가나 유형원이나 홍대용이나 서재필이나 유길준 같은 사람들이 남긴 주옥 같은 책을 찾아서 꼼꼼히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저는 이런 책들, 이런 사람들이 남긴 책들을 참 좋아합니다. 볼테르가 쓴 <깡디드>를 얼마 앞서 어느 출판사에서 퍽 비싼 고급판으로 새로 냈는데, <깡디드>는 헌책방에 가서 옛날 범우사 작은 판으로 1000원이면 사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도 헌책방이 우리에게 "책을 보는 눈을 새롭게 틔우는 구실"을 하는 데에 좋다고 생각합니다. 껍데기가 낡든 헐든 깨끗하든 곱든, 가장 중요한 것은 속에 담은 알맹이입니다. 속에 담은 알맹이가 허술하고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책은 알맹이로 진실을 말하고 겨루는 그릇이니까요.

그러나, 깊이가 얕고, 문체도 가볍고, 글솜씨도 모자라서 죄송합니다.

저는 깊은 것을 찾고 싶은 생각은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생긴 대로 살아야지, 어설프게 깊이나 너비를 찾는 일은 달가이 여기지 않습니다. 살면서 자기 모자람을 늘 깨달으면서 조금씩 거듭나고 고쳐나가면 좋을 텐데, 죽는 날까지 제대로 거듭나거나 고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입니다.

저는 가볍게 쓰는 글을 좋아합니다. 글에 어려운 말을 집어넣는 일을 참 싫어합니다. 제가 쓰는 글은 초등학교 3~4학년쯤만 되어도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는 초등학교 1~2학년쯤만 되어도 읽고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하게 쓸 생각이지만, 그렇게까지 쓸 수 있으려면 한두 해 갈고닦는다고 해서 뜻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지금 부지런히 애쓰고 있으니 열 해나 스무 해 안에는 이 뜻을 이룰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책을 말하는 비평책이나 수필이나 문학이나 다른 무슨무슨 책이나... 다들 참 글을 딱딱하고 메마르게 씁니다. 저는 이런 글을 싫어합니다. 시골에서 일하면서 사는 몸으로 생각해 보면, 시골 분들 가운데 책이나 신문 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책은 자기들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서울이나 도시만 와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뭐 그리 보는 것, 읽는 것이 많은지... 또 이 도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왜 그리도 어려운지... 껍데기만 잔뜩 뒤집어쓴 채 알맹이는 드러내 보이지 못하는지...

나나 님이 비평글을 쓴 이명원이나 강유원 씨 책은 저도 읽고 있습니다. 둘 모두 나름대로 자기 뜻과 생각을 찬찬히 펼치고는 있는데, 글에 쓴 말을 보면 '잘못되고 엉터리'인 낱말과 말투가 참 많습니다. 어설픈 일본 말투와 낯선 번역투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하나 고치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말하는 알맹이도 알맹이이지만, 알맹이를 나타내고 드러내는 말은 글을 읽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손쉽고 즐겁게 헤아리고 읽는 한편, '말 공부'도 시켜 주는 터라, 아무 말이나 함부로 쓰면 안 됩니다. 우리네 교과서와 방송과 온갖 책들은 우리 말 문화와 어긋나는 한편, 우리 말 문화를 죽이는 낱말과 말투와 문장을 너무도 많이 씁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라도 고등학교만 마쳐도, 대학교까지 나온다면, 참으로 문제투성이 말에 길들고 찌들어 이런 말이 아니고는 자기 생각을 펼쳐내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 글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요즘은 아이들도 티브이와 컴퓨터에 찌들고 물들어 엉터리에다가 얄궂은 말로 바뀌어 가고는 있는데, 그래도 아직은 나은 편입니다. 저는 이 아이들 말투로, 아이들이 쓰는 말로 글을 쓰는 일을 즐깁니다. 문장은 되도록 짧게, 낱말은 되도록 쉽게, 말투는 되도록 살갑게 해야 이 이지러지고 어지러운 지식인들 세상, 먹물들이 망쳐 놓고 있는 세상에서 숨구멍을 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펴낸 책이 모자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너그러이 봐 달라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음에 낼 책에서 더 곰삭이고 다듬어 내겠다는 말씀도 드릴 수 없습니다. 이미 펴낸 책에서 여러 가지 모자람과 아쉬움이 드러나니, 이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제가 쓴 글이 모자라든 형편없든, 글솜씨가 없든 그것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글쓰는 사람이 이런 것을 상관하지 않는다면 참말로 문제 많은 사람일 텐데요, 저는 그래도 좋습니다. 그럼 뭐가 중요하느냐? 하면, 부디 사는 곳에서 가까운 데에 있는 헌책방에 나들이를 가 보시면 좋겠고, 서울에 일이 있어 오실 때면, 서울 곳곳에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는 좋은 헌책방에 한 번이라도 가 보시면 좋겠습니다.

바쁘시고 다른 일도 많아서 모든 헌책방을 다 가 보실 수는 없을 테니, 다음 몇 곳만 추천하겠습니다. 제 책을 보셨으니 헌책방 연락처는 갖고 계실 텐데, 제 인터넷 누리집(http://hbooks.cyworld.com)으로 와 보시면 [헌책방 나들이-서울] 게시판과 [헌책방 나들이-전국] 게시판에서, '게시판 알림글'로 헌책방 연락처를 공개글로 올려놓았으니 받아 가셔도 됩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수준은 '높아 보이지 않는 게 좋다'는 게 제 믿음입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어야 하고, '낮은 수준'으로도 '하고픈 이야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수준이 있고 솜씨만 있는 사람들이 '옹글고 알차고 튼튼하고 고운 정신'도 없이 재주만 부리는 글이 넘쳐나는 것을 달가이 여기지 않습니다. 이번에 일본 극우잡지에 망령된 글을 쓴 한승조 같은 사람은 박정희 때부터 전두환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온갖 검은 권력 실세를 도맡아 해 왔는데 대단한 '학식'과 '경력'을 갖고 명예교수까지 받고 있더군요. 이런 사람들이 쓰는 글에 수준과 솜씨가 참 많을 텐데, 늘 이런 모습을 봐야 하다 보니 수준 있고 솜씨 있는 글을 쓰는 일이 참 두렵고 무섭습니다.

그나마 제가 찍은 사진이 조금 마음에 드신다고 하니... 다행인데요, 이달 끝무렵부터 6월 마지막날까지 서울 신촌 <숨어있는 책> 헌책방에서 다섯 번째 '헌책방 사진 전시회'를 엽니다. 틈나면 한번 놀러가 보셔도 고맙겠습니다.

'실망한 책'을 쓴 사람으로서, 나나 님에게 애꿎은 돈과 시간을 헛되이 쓰게 한 잘못을 뉘우치고자 이런 글을 썼는데, 이런 글도 실망스러울 수 있겠다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글을 마치겠습니다. 그런데 '나나'라는 글이름(필명)은 야자와 아이가 그린 만화책 <나나>에서 따오신 건지요?

 

- 서울 신촌 <숨어있는 책>
- 서울 연세대 앞 <정은서점>
- 서울 용산 <뿌리서점>
- 서울 낙성대 <흙서점>
-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
- 부산 보수동 <고서점>
- 전주 홍지서림 옆 <일신서림>
- 대구 경북대 뒷문 <합동서점>
- 대전 대훈서적 뒷문 <중도서점>
- 제주 제주시 <책밭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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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5-03-07 08:31   좋아요 0 | URL
이런, 이런...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자가 자기 책에 관한 리뷰를 볼 거라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알라딘이 상호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장도 되는군요... 다음부터는 리뷰 쓸 때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쓴 글이 님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너무 죄송합니다 그냥 책을 읽고 아무 생각없이 느낀 점을 쓴 건데, 저자가 직접 읽게 되니, 괜한 인신공격이 될 오해의 소지도 생겼나 봅니다 아, 정말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여러 가지로 죄송합니다 사실은 제가 헌책방을 애용하는 편이 아니라 님의 책을 대충 읽고 별 감동이 없었는지도 몰라요 헌책방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얼마든지 큰 감동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말하자면 저의 리뷰는 너무나 편파적이고 개인적인 글이었던 셈이죠 그냥 제 블로그에 올린다 생각하고 쓴 건데, 공개적으로 여러 사람이 읽는다는 걸 늘 망각하게 되네요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더구나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낸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는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쓴 글이 평가절하 당했을 때의 작가 심정도 조금은 알 것 같구요 무엇보다 제가 꼼꼼하게 책을 읽고 쓴 리뷰가 아니라거 더욱 죄송합니다 다음에 책을 내시면 그 때는 열심히 꼼꼼하게 읽고 리뷰를 쓰도록 할께요 그리고 헌책방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심을 갖겠습니다 참, 사진은 직접 찍으신 거죠? 책과 어울리는, 느낌이 참 좋은 사진들이었어요 ^^

marine 2005-03-07 08:36   좋아요 0 | URL
나나라는 닉네임은 에밀 졸라가 쓴 목로주점에 나오는 프랑스 고급 창녀의 이름입니다 발음하기 좋아서 오래 전부터 쓰는 닉네임이랍니다 그런데 금나나가 미스코리아 당선된 후 그 여자 이름에서 따 왔냐는 오해를 몇 번 받았습니다 나름대로는 유명 문학작품에서 따 온 건데, 속상했었죠 ^^ 참, 그리고 저는 생활이 넉넉치 않은 관계로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봅니다 님의 책도 도서관에서 대출한 거예요 그런데 바로 그 책을, 실은 제가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 신청했었어요 돈 주고 책 사 봐야 진짜 독자라는 글도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은데, 여러가지고 저는 함량 미달 독자인 셈이네요 ^^ 다음 번에 책 내면 그 때는 돈 주고 사서, 정말 꼼꼼하게 읽고 리뷰 쓸게요 좋은 책 내길 바랍니다 ^^

숲노래 2005-03-07 11:59   좋아요 0 | URL
따로 상처를 받은 것은 없습니다. 어떤 책이건, 어떤 일이건 어떤 모습으로도 읽힐 수 있고 보일 수 있으니까요. 저는 제가 쓴 글이나 하는 일에 여러 사람들이 여러 가지 눈길과 눈높이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 생각으로만 일을 하고 글을 쓴다면 '저한테는 좋아 보일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좋아 보일 수도 있거든요. 그런 것을 알면서 조금씩 가다듬어 나가야 할 텐데, 차근차근 가다듬고 갈무리하기란 쉽지 않고, 또 그냥 지나치기 쉬워요. 그래서 이렇게 죽죽 리뷰를 써 주신 일이 참 반갑고 고맙답니다. 그리고 이 책은 '헌책방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보면서 헌책방을 즐겁게 찾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펴냈는데, 나나 님이 비평을 해 주셨듯,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하게 된다'면, 지은이가 제대로 못한 거잖아요. 그러니 비판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음... 도서관에 신청을 하셔서 도서관에 진열이 될 수 있도록 하셨다니... 더할 나위 없이 고맙습니다 ^^ 저는.. 이런저런 일-보통 오마이뉴스 기사 쓰기를 하려고 책 검색을 하면서 책마다 붙어 있는 독자 리뷰나 비평을 낱낱이 읽어 봅니다. 제가 소개하려는 책마다요. 그래서 더러 제가 낸 책에 붙은 독자비평도 읽어 보곤 하는데요, 볼 때마다 움찔 하면서 조심스럽답니다. 이번엔 무슨 잘못을 비판받을까 하면서요 ^^ '나나'란 이름이 그런 것이었군요. '야자와 아이'란 사람이 그린 <나나>란 만화책과 <천사가 아니야>가 있는데, 한번 보시면 퍽 재미있으리라 봅니다. 댓글 달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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