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산책자 - 대영박물관에서 떠난 13갈래 문명기행
이케자와 나츠키 지음, 노재명 옮김 / 산책자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대영박물관이 품은 문화유산은 쓰레기
 [책읽기 삶읽기 5] 이케자와 나쓰키, 《문명의 산책자》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을 가리킨다는 ‘문명(文明)’이라고 합니다. “세계의 모든 사람”을 일컫는다는 ‘인류(人類)’랍니다. 온누리에 손꼽는 몇 가지 커다란 ‘문명’이 있다고 하는데, 커다란 문명을 돌아보면 모조리 ‘큰 도시를 이룬 터전’입니다. 수수하거나 조촐하게 농사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든지, 짐승을 사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놓고는 ‘문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갖가지 전기·전자 제품을 쓰는 사람을 가리켜 ‘문화인’이라 합니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는 사람을 두고 ‘문화인’이라 합니다. 하다못해 손전화를 안 쓴다거나 셈틀을 안 쓴다거나 하면 ‘원시인’이라 합니다. 극장에 갈 일이 없거나 텔레비전을 집에 들여놓지 않거나 하면 ‘원시인’이라 합니다.

 “대영박물관에서 떠난 13갈래 문명 기행”이라는 이름이 붙은 《문명의 산책자》라는 책을 읽으며 ‘문명’이란 무엇을 말하고 ‘문화’란 어떤 대목을 가리키는지 자꾸자꾸 알쏭달쏭합니다. 몇 가지 흙그릇이나 돌연장을 남겨야 문명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무덤이나 건물을 지어 놓아야 문명을 이룩한 셈인지 아리송합니다. 조용히 살며 쓰레기(문화재) 하나 안 남기는 삶이란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문화재로 삼는 ‘유물’이란 “남겨 놓거나 대물림을 하는 물건”이기도 하지만, 땅에서 캐낸 ‘쓰레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몇 백 해가 흐르거나 즈믄 해가 흘렀어도 썩거나 바스라져 흙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고 남아 있으니 ‘쓰레기’인 셈입니다. 사람들은 ‘값어치’를 따져 비닐봉지하고 문화재는 다르다 말하지만, 앞으로 즈믄 해가 흐른 뒤에는 오늘날 우리가 이토록 많이 쓰는 비닐봉지를 놓고 ‘2000년대 생활문화 발자국’으로 삼아 문화재가 될는지 안 될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 똑같은 비닐봉지 가운데에서도 2005년 대구 중구청에서 쓰던 쓰레기봉투하고 2008년 광주 동구청에서 쓰던 쓰레기봉투하고 2010년 인천 서구청에서 쓰던 쓰레기봉투를 따로따로 뜻깊은 문화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2100년쯤 ‘비닐봉지 박물관’을 누군가 세운다면 이런 비닐봉지는 얼마든지 문화재가 됩니다. 2010년 오늘날에도 1970년대 새우깡 과자봉지나 1980년대 초코파이 과자봉지는 얼마든지 문화재 노릇을 합니다. 아니, 문화재 노릇을 톡톡히 하며 무척 비싼 값에 사고팔립니다. 쓰레기통에 처넣으면 그예 쓰레기입니다만, 1985년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서 쓰던 ‘까만 봉지’라는 자취가 남아 있으면 이런 비닐봉지 또한 얼마든지 문화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어제 구멍가게에서 사다 마신 깡통맥주를 안 버리고 서른 해쯤 놓아 둔다고 생각해 보셔요. 아니, 스무 해나 열 해만 그대로 놓아도 ‘어, 옛날엔 이랬구나.’ 하면서 문화재 구실을 합니다. 베스킨라빈스 얼음과자 주걱이든 700원짜리 얼음과자 막대기이든, 어떻게 바라보거나 다루느냐에 따라 쓰레기가 되거나 문화재가 됩니다.


.. 일본 음식은 미국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음식이라기보다 공업 제품에 가깝다 ..  (25쪽)


 이야기책 《문명의 산책자》는 영국에 있는 대영박물관에서 만난 문화재를 ‘박물관에 갇힌 유물’이 아닌 ‘이 문화재가 처음 있던 곳에서 어떤 모양으로 사람들 손을 탔는가’를 몸소 알아보고 싶어 지구 곳곳을 찾아다닌 발자국을 차곡차곡 담습니다. 아무래도 “공업 제품 아닌 밥”을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글쓴이라서, 유리 진열장에 처박힌 쓰레기가 아니라 사람들 손을 타는 살림살이를 만나고 싶었겠지요. 유리 진열장에 처박히면 무척 값나가거나 값비싼 쓰레기가 되지만, 사람들 손을 타는 동안에는 값어치를 따지지 않을 뿐더러 몹시 값싼 살림살이입니다. 할머니 적부터 쓰던 숟가락이란 집에서 늘 쓰면 그냥 살림살이이며 돈값으로 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 밥숟가락 하나일지라도 박물관에 옮겨놓으면 비싸구려 문화유산이 됩니다. 자개장이든 노리개이든 무쇠솥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살아가며 쓰면 소담스러운 살림살이인 지게이지만, 박물관에 들어서면 곰팡이가 슬고 좀이 먹는 나무쓰레기요 짚쓰레기입니다.


.. 인도에서는 나무가 있으면 그 아래 사람이 있다. 이런 햇살 아래에서는 나무 밑이 아니라면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이 없다. 인도인은 사람이 바깥에서 활동을 해 나가려면 우선 그곳에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  (96쪽)


 오늘 이 나라 한국땅 어디에서나 무섭도록 올라서는 아파트와 고속도로를 바라볼 때면 우리 스스로 ‘아파트와 고속도로를 문화재처럼 여긴다’고 느낍니다. 2020년이나 2030년이나 2050년에 새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갈 뒷사람한테 오늘날 아파트와 고속도로를 문화유산으로 물려주고 싶어하네 하고 느낍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그대로 뒷사람한테 물려주지, 우리가 살아가지 않는 대로 뒷사람한테 물려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참되고 착하며 아름다이 살아간다면 참되고 착하며 아름다운 삶자락을 물려줍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사랑하며 살아가면 뒷사람한테는 자동차를 물려줍니다. 우리가 더 많고 큰 돈을 바라며 살아가면 뒷사람한테는 더 많고 큰 돈을 물려줍니다. 우리가 따순 사랑과 너른 믿음을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면 뒷사람은 따순 사랑과 너른 믿음을 물려받겠지요.

 《문명의 산책자》를 쓴 일본사람은 당신 두 발로 이 땅을 단단히 디디며 살아가려는 수수한 몸가짐을 보여줍니다. 이 책 하나는 퍽 알뜰히 엮었습니다. 어디 모자라거나 어줍잖은 구석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문명을 찾아나선다는 사람”이 찾아나선 문화재라는 물건이 얼마나 어떻게 문화재답다 할 만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인류가 이룩한 발전이 드러난 물건’이란 무슨 잣대로 잴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인도사람은 사람이 바깥에서 일하자면 나무그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고 말하지만, 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기까지는 몇 해가 걸리는가요. 나무는 어떻게 해야 심을 수 있는가요. 사람이 억지로 심을 수 있는 나무일까요. 씨앗 하나가 땅에 뿌리를 내려 줄기를 올리는 나날이란 무엇인가요.

 쓰다 버린, 또는 쓰다가 버려진, 때로는 잘 쓰고 있는데 권력자가 일으킨 싸움 때문에 그만 망가지거나 나뒹굴고 만, 더군다나 큰 싸움을 일으키며 이웃나라한테서 빼앗은 물건이 제아무리 아름답거나 빛나거나 값있다 하더라도 이런 물건을 살피며 ‘인류 문명’을 따지는 일이란 부질없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문명에 앞서 내 삶과 이웃 삶과 동무 삶을 들여다보며 어깨동무할 고운 사람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4343.9.27.달.ㅎㄲㅅㄱ)


― 문명의 산책자 (이케자와 나쓰키 씀,노재명 옮김,산책자 펴냄,2009.8.25./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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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제발 잡히지 마 -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주노동자들의 삶의 기록
이란주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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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만날 수 있는 ‘이주노동자 삶’ 이야기책이기를
 [책읽기 삶읽기 3] 이란주, 《아빠, 제발 잡히지 마》(삶이보이는창,2009)



 지난 2009년 5월 8일에 장만해서 이해 5월 21일에 다 읽은 《아빠, 제발 잡히지 마》인데, 한 해가 지나고 넉 달이 지나도록 이 책을 읽으며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는가를 갈무리하지 못한다. 글쓴이 이란주 님 첫 책 《말해요 찬드라》 때문일까. 생각해 보면, 몇 해 앞서 《말해요 찬드라》 느낌글을 쓸 때에도 책을 다 읽고 곧바로 쓰지는 못했다. 한 번 쓴 느낌글을 나중에 크게 고쳐서 다시 썼다. 이 책을 놓고 나 스스로 삭이며 되뇔 대목이 많아 아직 느낌글 하나로 실타래를 풀기 어려울 수 있다. 아무래도 이주노동자 삶을 더 깊이 헤아리지 못하는 내 삶이기에 《아빠, 제발 잡히지 마》에 깃든 이야기를 섣불리 풀어내지 못한달 수 있다.

 “인천 부천 사는 사람들은 늘 낡은 전철에, 늘 많은 사람에 시달려야 하니 도대체 무슨 죈지 모르겠다(183쪽).”는 대목에 밑줄을 긋고 한참 싱긋 웃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푸념을 하는 글쟁이(또는 활동가)는 생각 밖에 꽤 드물다. 인천이나 부천에 제 삶터가 있어도 이렇게 못 쓸 뿐더러, 서울에 제 삶터가 있는 사람은 도무지 모르는 이야기이다. 서울이나 부산에 제 삶터가 있는 사람은 이런 대목을 어떻게 받아들이려나. 그래도 부천은 인천보다 훨씬 낫다. 부천은 인천보다 서울이 가까울 뿐더러 인천처럼 어마어마하게 크고 많은 공장들로 산업단지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인천은 제국주의 일본이 이 나라를 다스릴 때부터 일본땅하고 경성에 물건을 올려바치는 공장터였다. 서울로 잇는 철길과 찻길을 가장 먼저 뚫은 데가 바로 인천인 까닭을 깊이 살피는 사람이란 아주 드물다. 강원도 산골짜기 군대에서 썩어 본 사람 가운데 몇몇은 알 텐데, 양구 산골짜기에서 휴가를 나오며 받는 ‘휴가비(그래 봤자 집으로 가는 데에 드는 버스삯일 뿐이지만)’는 인천보다 부천을 더 높게 쳐 주었다. 부천은 서울보다 가깝고 인천이 서울보다 먼 데에도 인천은 휴가급지가 서울과 같이 3급이었고 부천은 2급이었다. 부산이나 대구나 광주는 1급지였다. 1급지이면 휴가비가 3만 얼마였고 2급지이면 2만 얼마, 3급지이면 1만 얼마였다. 인천으로 가자면 서울로 기차나 버스를 타고 들어가서 전철로 갈아탄 다음 들어가야 하니까 부천보다 멀면 멀지 가까울 수 없다. 이를 놓고 따지니까 윗사람(소대장하고 중대장하고 행정보급관)이란 이들이 하는 말, “인천은 직할시이고 부천은 경기도잖아?”

 “중동이니 상동이니 하는, 같은 부천에 있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에는 흔하디흔한 것이 공원이요 분수다. 그러나 중동과 상동에서 별로 멀지도 않은 낡은 동네 도당동에는 쉼터 한 자락 없이 빽빽하여 도무지 숨 돌릴 자리가 없다(108쪽).”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쟁이(또는 활동가)는 몇 사람 꼽을 수 있을까. 모두들 경부운하나 4대강에 푹 빠져 있는 터에, 내 살림터나 내 고향동네에 깃든 말썽거리와 고름을 들여다보며 땀흘리는 글쟁이(또는 활동가)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서울에서 큼지막하게 촛불집회를 한다고 외치며 서울로 모이기만 하면 일이 잘 풀릴까. 서울에서 꼭 큼지막하게 뭔가를 해야 하는가. 서울에서 뭔가를 큼지막하게 할 터이니 다들 모이라 한다면 사람들이 서울로 오는 데에 드는 찻삯은 누가 댈까. 더구나 사람들이 서울로 모일 때에 걸어서 오겠는가. 하나같이 버스나 기차나 자가용을 탄다. 경부운하이든 4대강이든, 또 국가보안법이든 한미자유무역협정이든, 이밖에 숱한 골칫거리이든, 이런저런 아픔과 생채기를 풀자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4대강 사업을 막자는 뜻은 무엇일까.

 지난 2009년 5월 21일에 《아빠, 제발 잡히지 마》를 다 읽으며 책에 몇 가지 이야기를 끄적였다. 먼저 책 속종이에는 ‘땀으로 쓴 책은 다르다. 온몸 부대끼며 오래도록 껴안고 땀으로 쓴 책은 다르다. 땀없는 사람을 탓하거나 나무랄 까닭이 있겠나. 낮거나 얕은 그릇이라면, 그러려니 하거나 해야지.’ 하고 끄적였다. 책 안쪽에는 5월 13일에 끄적인 이야기가 하나 보인다. ‘땅에 뿌리박은 사람, 땅을 보살피는 사람, 땀흘려 일하는 사람, 사랑으로 손잡는 사람, 믿고 어깨동무하는 사람, 모두모두 한국땅에서는 바보.’

 이란주 님이 할 일은 무척 많고 몹시 바쁜 줄 안다. 이런 가운데 바지런히 글을 써서 이주노동자 삶을 두루 알리거나 나눈다. 가만히 보면 나도 내 삶이 참 빠듯하고 바쁘다. 아이 하나랑 아픈 살붙이 하나랑 복닥이며 보내는 삶이란 얼마나 빠듯하고 바쁜지. 마감에 쫓겨 얼른 보내 주어야 하는 글이 아니라면, 이제는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글을 쓸 겨를을 내지 못한다(제대로 말하자면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책을 읽을 틈조차 낼 수 없다). 집식구 모두 잠든 깊은 새벽에 홀로 부시시 일어나 신나게 한꺼번에 몰아서 쓸 뿐이다(제대로 말하자면 밤에는 건넌방에서 불을 켜며 책을 읽기도 어렵다). 여느 때에는 ‘잘 하지 못하며 잘 다스리지도 못하는’ 집안일을 붙잡느라 코가 빠진다. 아이 하나일 때에 이런데 아이가 둘이 되면 어떻게 바뀔까. 형과 나를 키운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아이 셋이나 너덧이나 대여섯이나 ……를 키웠거나 키우는 수많은 어머님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어디 먼 나라 이야기를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 내 삶을 들여다보기만 하여도 이주노동자로 이 땅에 들어온 사람들 삶을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가려는 이 땅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 삶과 내 어머니 삶과 내 어버이 삶과 내 이웃 삶을 곰곰이 돌아볼 사람은 어느 만큼 될까.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고, 집에서 가르치지 못하니, 따로 배우지 않아도 좋은 우리 삶인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배우고, 집에서 이르는 대로 받아들이며, 딱히 돌아보지 않아도 괜찮은 우리 삶인가.

 얼마 앞서 장정일 님 독서일기 한 권이 새로 나왔다. 1994년부터 장정일 님 독서일기가 띄엄띄엄 나오지 않았느냐 싶은데, 이란주 님이 쓰는 ‘이주노동자 삶’ 이야기 또한 띄엄띄엄일지라도 더 자주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 바란다면 해마다 한 권씩 이주노동자 삶 이야기책이 우리 누리에 나온다면 기쁘겠다. 2003년에는 찬드라한테 말하라 했고 2009년에는 어린 친구 샤프라를 만났으니, 2010년에는 또다른 누군가와 사귄 삶을 풀어낼 수 있으면 반갑겠다. (4343.9.24.쇠.ㅎㄲㅅㄱ)


― 아빠, 제발 잡히지 마 (이란주 씀,삶이보이는창 펴냄,2009.5.1./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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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에 숨은 과학
정창훈 지음, 한성민 그림 / 봄나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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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에 깃든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43] 정창훈, 《자전거에 숨은 과학》


 자전거 한 대에는 숱한 과학 이야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과학 이야기를 좀더 헤아리거나 살필 수 있으면 자전거를 한결 즐거우며 사랑스레 즐길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자동차 한 대에도 숱한 과학 이야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자동차를 즐기는 사람들 또한 이와 같은 과학 이야기를 더욱 돌아보거나 보듬을 수 있으면 자동차를 한껏 즐겁고 신나게 즐길 수 있을 테지요.

 따지고 보면 우리가 쓰는 모든 물건에는 과학이 깃들어 있습니다. 과학 이야기 하나 깃들지 않은 물건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들이 이러한 대목을 살피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로서는 이러한 대목을 애써 살피지 않고도 얼마든지 이러저러한 물건을 쓸 수 있기도 합니다.

 아이들한테 많이 파는 책 가운데 ‘과학 그림동화’와 ‘과학 글동화’가 꽤 많습니다. 아이들이 재미나게 읽을 무언가를 건넨다(교양)는 뜻에다가 아이들한테 무언가 가르칠 수 있다(학습)는 뜻을 더한 책입니다. 우리 삶 어디를 보더라도 과학이 깃들어 있으니 굳이 ‘과학 무엇’이라 내세우지 않아도 되건만, 이처럼 ‘과학 무엇’을 내세워야 아이를 키우는 분들이 주머니를 엽니다. 아이한테 교양과 학습을 한꺼번에 집어넣고 싶어 이러한 책을 선뜻 장만합니다.

 《자전거에 숨은 과학》이라는 책은 책이름부터 아예 ‘자전거와 과학’이라는 틀을 내세웁니다.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는 아이들한테 이러한 책을 선물로 내민다면 아이들로서는 자전거를 한결 더 아끼거나 살필 수 있어 무척 좋다고 여길 만하겠지요. 이를테면 “자전거 전국 여행”이랄지 “자전거 세계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에도 아이들 눈길을 금세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전거를 다루는 손”이라든지 “자전거에 담은 마음”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아이들 눈길은 얼마나 쏠릴 수 있을까요.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는 이러한 이름을 얼마나 눈여겨볼까요.

 만화책 《내 마음속의 자전거》(미야오 가쿠 그림) 13권 20쪽을 보면, 자전거집 딸내미가 제 동무한테 “자전거는 기계라, 마음 따윈 갖고 있지 않아. 하지만 만약 마음이 있다면 너한테 이렇게 말했을 거야. 매일 타 줘서 고맙다고. 더러워져도, 흠집이 나도. 아마 자전거에게는 그게 가장 기쁜 일 아닐까?” 하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참말로 자전거는 기계이기 때문에 자전거를 놓고 자전거에 무슨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생각날개를 펼쳐서 ‘자전거한테 마음이 있다면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할까?’ 하고 떠올릴 수 있습니다. 자전거에 깃든 과학을 말한다 할 때이든, 자전거에 숨은 과학을 보여준다 할 때이든, 우리는 자전거와 얽힌 과학이 우리 삶과 넋에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를 함께 돌아볼 수 있어요.


.. 자전거 핸들도 자동차 핸들처럼 축에 붙어 있어. 물론 자전거 핸들은 둥근 원이 아니라 막대 모양이지. 어쨌든 자전거 핸들도 자동차 핸들과 마찬가지로 축바퀴의 원리를 이용한 도구야 ..  (44쪽)


 과학을 이야기하면서 자전거를 글감으로 삼은 책 《자전거에 숨은 과학》은 자전거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전거에 깃든 과학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자전거 책이 아닌 과학 책입니다. 자전거 이야기책이 아닌 과학 이야기책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은 지식이나 학문으로는 거의 모르거나 생각조차 않으나, 몸으로는 다 알거나 깨달은 이야기를 과학으로 풀어낸 책 《자전거에 숨은 과학》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자전거를 사랑하려는 사람보다는 과학을 사랑하려는 사람한테 걸맞거나 어울립니다. 자전거를 즐겁게 타려는 사람보다는 과학을 즐기고 싶은 아이한테 알맞거나 들어맞습니다.


..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려면 힘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필요해. 하지만 페달을 밟지 않아도 자전거에는 여러 가지 힘이 작용하고 있잖아. 바퀴와 지면 사이의 마찰력, 바퀴의 축에서 생기는 마찰력, 공기의 저항력 같은 힘들 말이야. 이런 힘들은 모두 자전거가 달리는 걸 방해하고 있어. 그래서 페달을 밟지 않으면 자전거가 저절로 멈추는 거야. 자전거 바퀴 축에 윤활유를 치는 이유는 마찰력을 줄이려는 거야. 그럼 자전거가 더 잘 달리지 ..  (110∼111쪽)


 사람들이 자전거를 장만할 때에 ‘자전거 설명서’를 챙기는 일은 아주 드뭅니다. 모든 자전거에는 다른 물건하고 똑같이 ‘제품 설명서’가 들어 있습니다. 손전화 한 대를 사도 두툼한 설명서가 딸립니다. 사진기를 사도 사진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밝힌 설명서가 들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전거를 장만하는 사람치고 자전거에 딸린 설명서를 챙겨 읽는다든지 꼼꼼히 살핀다든지 하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거의 아무도 없다 할 만합니다. 그러면서 ‘설명서에 다 나온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한테 묻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자전거를 이야기하는 책’에 깃든 적잖은 이야기라든지 ‘자전거를 손질하는 정보를 다룬 책’에 깃든 웬만한 이야기는 모조리 자전거 설명서에 들어 있습니다. 자전거 설명서만 잘 읽으면 자전거를 어떻게 배워서 타야 하는가부터, 자전거를 올바르게 타는 매무새에다가, 자전거가 망가졌을 때 고치는 법까지 찬찬히 익힐 수 있습니다.

 마땅한 소리인데, 자전거에 깃든 과학 이야기 또한 자전거 설명서에 낱낱이 적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전거 설명서는 ‘과학’을 내세우지 않으나, 자전거가 구르는 법이나 멈추는 법이나 미끄러지는 법 모두 ‘과학’하고 잇닿아 있거든요.


.. 앞 브레이크는 제동력이 좋지만, 회전력이 생기기 때문에 조심해야 해. 또 뒤 브레이크는 회전력이 생기지 않지만, 제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미끄러지기 쉽지. 자전거의 속도를 낮출 때는 이 두 브레이크의 성질을 잘 이용해야 해 … 자전거의 페달을 힘껏 밟으면 자전거가 움직이기 시작해. 자전거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되면 먼저 뒤 브레이크를 잡아. 그래야 자전거가 흔들리지 않거든. 뒤 브레이크를 급하게 잡으면 자전거가 미끄러져. 관성의 법칙에 따라 몸과 자전거는 계속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이지 ..  (114쪽)


 자전거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 거의 모든 아이들이 헬멧이나 보호장구를 하지 않습니다. 시골마을에서 자전거로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이든, 도시 아파트숲에서 자전거를 타고 노는 아이들이든 헬멧이나 보호장구를 하지 않기 일쑤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보호장구를 알뜰히 챙기라고 이야기합니다. 보호장구를 하지 않은 어버이를 보면 나무라는 분도 제법 있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로서는 헬멧이나 보호장구를 하지 않으면 퍽 아슬아슬하다 할 만합니다. 아이들은 자전거를 탈 때에 반드시 보호장구를 하도록 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지난날을 거슬러 생각하면, 지난날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어느 누구도 헬멧이나 보호장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에는 도시 골목길도 시멘트가 깔리지 않은 흙길이 꽤 많았습니다. 아니, 도시 골목길에 시멘트가 깔린 지는 그리 오래지 않았습니다. 흙길에서는 달리다가 넘어져도 무릎이 크게 벗겨지는 일이 드뭅니다. 으레 긁힌 생채기만 납니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질 때에도 비슷합니다. 풀숲이 우거진 자리에 넘어질 때하고 시멘트 전봇대나 쇠붙이 자동차를 들이받을 때하고는 사뭇 다릅니다.

 이제는 법으로 못박았을 뿐 아니라 길바닥에도 큼직한 글씨로 새겨 놓는데, 학교 둘레에서는 30킬로미터를 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 앞 길에서 자동차를 30킬로미티 밑으로 해서 달리는 자동차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자동차를 모는 이들 마음이 이렇습니다. 골목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서울 한강에 있는 자전거길을 달릴 때에 이곳 한강 자전거길이 ‘몇 킬로미터 넘는 빠르기’로 달리지 않도록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자전거길에서 자전거한테 달리도록 하는 ‘가장 높은 빠르기’는 20킬로미터입니다. 20킬로미터를 넘게 달리면 서로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이 빠르기를 넘지 않도록 못박습니다. 그렇지만, 서울 한강 자전거길에서 20킬로미터 밑으로 달리려 하는 자전거꾼은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또한, 자전거길에서 20킬로미터 밑으로 달릴 때에 자전거끼리 부딪히면 서로 얼마나 다치는지, 또 10킬로미터나 15킬로미터, 또는 7킬로미터로 달리다가 넘어져서 길바닥에 엎어지면 얼마나 다치는가를 제대로 아는 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헬멧은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꼭 착용해야 하는 보호 장구예요. 헬멧을 쓰면 자전거 사고가 났을 때 머리 손상의 85퍼센트, 그리고 뇌 손상의 90퍼센트를 막을 수 있다고 해요. 헬멧 안쪽의 완충재나 바깥쪽의 플라스틱은 깨지면서 충격을 흡수해요. 따라서 완충재나 플라스틱에 금이 가 있으면 완충 기능이 떨어져요 ..  (141쪽)


 자전거에 숨어 있다는 과학을 말하는 《자전거에 숨은 과학》은 책 끝자리에 아이들보고 헬멧을 반드시 쓰라고 이야기합니다. 틀림없이 헬멧을 썼을 때에는 안 썼을 때보다 한결 낫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생각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아이들 자전거는 20킬로미터를 넘는 일이 드뭅니다. 아니, 아이들 자전거는 10킬로미터를 살짝 넘는 빠르기입니다. 서울이든 시골이든 아이들이 마음 놓고 자전거를 탈 만한 자리를 어른들은 마련해 놓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겨우 자전거를 타겠다 싶은 골목이나 빈터에는 어른들이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자동차를 내달릴 뿐 아니라 아무 데나 차를 세워 놓고 있습니다. 그나마 아이들은 사람들이 걷는 거님길로 자전거를 자주 다니는데, 사람들이 걷는 거님길에는 얼마나 많은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아무렇게나 서 있는지요. 또, 가게마다 얼마나 많은 짐과 물건을 거님길에 쌓아 놓고 있는지요. 게다가, 거님길에는 얼마나 많은 전봇대와 배전반과 맨홀 따위가 있으며, 턱은 얼마나 높은지요.

 참말, 우리 터전을 돌아본다면, 우리들은 자전거 한 대를 놓고 과학을 말하기 앞서 자전거에 얽히거나 깃들어야 할 만한 따스하고 너른 마음을 이야기할 노릇이 아니랴 싶습니다. 자전거로 여행을 한다든지 자전거로 출퇴근한다든지 하는 이야기책은 곧잘 나오지만, 정작 자전거를 내 몸으로 여기듯이 사랑하는 이야기책이라든지 자전거를 내 삶으로 곰삭이는 이야기책은 아직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제 막 자전거를 좋아하려고 하는 아이들한테마저 더 많은 지식과 더 새로운 정보를 집어넣어야 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앞서 든 만화책 《내 마음속의 자전거》 13권 70∼71쪽을 보면, 자전거집 딸내미가 “이 푸조(자전거)는 20년도 더 된 프랑스제 평범한 대중 자전거. 부품 따윈 전부 고철들이야. 그래도, 그래도! 내겐 이 세상에 이걸 대신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더! 소중한 것에 구형이나 가격 따윈 상관없다고!” 하고 외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말마디처럼 우리들이 타는 자전거는 이 자전거 한 대와 얽힌 이야기와 삶이 소담스럽고 사랑스럽습니다. 이 자전거 한 대에 얽힌 과학 또한 돌아볼 만하고 생각할 만한 대목임에는 틀림없을 테지만, 자전거에 얽힌 과학을 아이들하고 나누기 앞서 자전거를 즐기는 마음과 자전거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전거를 아끼는 마음을 먼저 밝히고 나누며 이야기할 우리들이 아니랴 싶습니다.

 《자전거에 숨은 과학》이라는 책을 덮으면서 무엇보다 이 대목이 아쉽습니다. 자전거에 숨은 과학을 이야기하면서 얼마든지 자전거를 사랑하는 마음과 돌보는 마음과 아끼는 마음을 펼칠 수 있는데, 이러한 마음자리 이야기는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더욱이 책 끝자리에 넣은 헬멧 이야기는 ‘헬멧 완충 기능’만 다룰 뿐, 어떠한 길에서 어떠한 빠르기로 달리다가 어떻게 부딪힐 때에 ‘완충하는 기능’인지를 제대로 과학답게 다루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산을 타는 자전거나 갖은 재주를 부리는 자전거를 탈 수 있으나, 여느 아이들한테는 여느 자리에서 타는 ‘생활자전거’입니다. 이 책 《자전거에 숨은 과학》에서도 여느 아이들이 여느 자리에서 타는 생활자전거를 사랑하고 아낄 수 있도록 이끄는 생활과학 이야기에 눈길을 맞추고 마음길을 모두어 놓았으면 한결 알차고 아름다우며 신났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른한테든 아이한테든 학문하는 과학이 아닌 살아가는 과학일 때에 뜻이 있습니다. 지식이 넘치는 과학이 아니라 살아숨쉬는 과학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4343.8.5.나무.ㅎㄲㅅㄱ)


 ┌ 《자전거에 숨은 과학》(봄나무,2010)
 ├ 글 : 정창훈, 그림 : 한성민
 └ 책값 :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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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의 길
마루야마 겐지 지음, 조양욱 옮김 / 현대문학북스 / 200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149 ― 살아숨쉬는 사람만이 쓰는 글
 : 마루야마 겐지, 《산 자의 길》



- 책이름 : 산 자의 길
- 글 : 마루야마 겐지
- 옮긴이 : 조양욱
- 펴낸곳 : 현대문학북스 (2001.3.30.)
- 책값 : 8000원



 (1) 글쓰는 사람이 걷는 길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글이란 내 삶을 송두리째 담아내어 보여주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란 잘나거나 못나거나 가리지 않고 내 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글이 담긴 책이란 즐겁거나 슬프거나 따지기 앞서 먼저 내 얼굴을 꾸밈없이 내보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없는 이야기를 지어서 글을 쓰든 겪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담아내는 글을 쓰든 매한가지입니다. 어느 쪽 글이 되든 내 삶이 글에 묻어납니다. 어떠한 글로 나아가고자 하든 내 넋이 글에 스며듭니다. 스스로 벌거벗는 삶이요 스스로 벌거벗으면서 거리끼지 않아야 할 삶입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언제나 만만하지 않은 삶입니다. 믿음을 섬기는 삶이든, 아이들과 부대끼는 삶이든, 법이나 의료를 다루는 삶이든, 행정이나 기계를 다루는 삶이든 한결같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 일을 어떤 마음결로 붙잡든 일하는 사람 삶과 넋과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글을 쓰는 사람한테는 글에 그이 삶과 넋과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행정을 하는 사람은 행정서류에 그이 삶과 넋과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따로 글을 쓴다고 해서 더 벌거벗은 삶이 되지 않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우리들은 내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바라보기 마련입니다. 우리 스스로 제대로 못 느낄 뿐이지, 우리는 내 삶을 둘레에 보여주고 둘레 삶을 고스란히 바라봅니다.

 자전거를 타고 도시 찻길을 달리다 보면 어김없이 길가마다 서 있는 자동차하고 부대낍니다. 자동차들은 찻길만 차지하지 않습니다. 찻길에다가 길가에다가 사람들 거님길까지 차지할 뿐 아니라, 사람들 살림집 앞이나 가게 앞자리까지 차지합니다.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이나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는 사람은 어디로든 움직이지 못합니다. 늘 가로막힙니다. 자동차에 탄 사람 가운데 자전거로 달리는 사람이나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을 헤아리는 이를 만나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자동차에 탄 당신이 가야 할 곳으로 얼마나 더 빨리 길이 덜 막히면서 달릴 수 있는가에 마음을 기울일 뿐입니다. 이러는 삶에 익숙해지면서 시나브로 책읽기하고는 동떨어지고, 이러한 매무새로 책을 읽는다 할지라도 내 둘레에 이웃과 동무가 있음을 깨닫는다든지 내 둘레 사랑스럽고 따스한 살붙이가 있음을 헤아린다든지 하기란 힘듭니다.

 자전거를 타고 시골 찻길을 달리고 있으면 길가에 서 있는 자동차를 만나지 못합니다. 시골길을 달리는 자동차들은 시골길에서 차를 세워 둘 곳이 없음을 뻔히 알기 때문에 길가에 차를 대지 않습니다. 길 안쪽 쉴 자리라든지 나무 그늘 자리를 찾아가서 차를 세웁니다. 아무 데나 차를 세울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시골길에서 자전거로 달릴 때에는 자동차하고 똑같이 찻길 한복판을 달려야 합니다. 시골길에서는 길섶이란 거의 없어 사람이 거닐 길이든 자전거가 다닐 길이든 아예 없기 일쑤입니다. 이런 길이지만 시골 자동차는 무시무시하게 내달립니다. 어르신과 어린이가 느릿느릿 거니는 시골길에서 팔십 킬로미터로 달리는 자동차는 드뭅니다. 으레 백 킬로미터나 백이십 킬로미터를 밟습니다. 도시처럼 차가 많지 않아 막힐 일이란 거의 일어나지 않으나 다들 ‘자동차 최고성능’을 낼 생각인 듯 마구마구 달립니다. 이러는 삶에 길들면서 아주 마땅히 책읽기하고는 등을 돌리고, 이러한 매무새로 책을 읽는다 해 보았자 내 둘레 이웃과 동무 삶을 곱씹을 책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생각합니다. 나는 글을 쓰기 때문에 자동차를 몰 수 없습니다. 운전면허조차 딸 수 없습니다. 나중에 내 주머니에 돈이 엄청나게 들어온다 할지라도 운전사를 하나 두며 자동차에 내 몸을 실을 수 없습니다. 나는 글을 쓰는 삶을 일구는 동안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탈밖에 없습니다. 나는 글을 쓸 뿐 아니라 책을 읽는 삶을 꾸리는 동안 드문드문 버스를 타거나 다른 이 차를 얻어 탈 수 있을는지 몰라도, 내 손으로 차를 몰거나 장만할 꿈은 꾸지 못하겠다고 느낍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새삼 곱씹습니다. 글을 쓴다고 하면서 자동차를 모는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글을 쓴다고 하면서 자동차 몰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말재주만 피우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글을 쓴다고 하면서 두 다리로 걷지 않거나 자전거를 탈 마음이 아니라면 도무지 내 이웃과 동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글쓰기란 다름아닌 삶쓰기입니다. 글나부랭이를 종이에 이냥저냥 끄적이면 되는 글쓰기가 아니라, 온몸으로 내 삶을 껴안고 복닥이면서 땀흘리고 있어야 비로소 이루어 내는 글쓰기입니다.

 돈벌이에 눈먼 글쓰기가 아니라 내 삶을 사랑하며 아끼려는 글쓰기를 하고 싶은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돈벌이에 눈먼 글쓰기 또한 글쓰기가 아니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고 싶은 글쓰기는 내 삶을 사랑하며 아끼려는 글쓰기 한 가지입니다. 나 스스로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면서 나 스스로 고운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은 글쓰기 한길을 가고 싶습니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일이 나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글을 써서 돈만 벌고 돈으로 내 삶을 망가뜨리는 모습이 나쁘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우며 좋은 책 하나를 찾아내어 읽는 가운데 내 삶을 나부터 나 스스로 아름다우며 좋게 일구고 싶은 매무새일 때에는, 아주 마땅하면서 부드러이 내 삶을 나 스스로 글 하나로 담아내자는 꿈을 품습니다. 아름다우며 좋은 책 하나 읽기, 곧 책읽기란 줄거리를 머리속에 집어넣는다든지 갖은 지식과 정보로 내 온마음을 감싸려고 하는 뻘짓거리하고 사뭇 다릅니다. 책읽기라는 이름이 붙으려면 나 스스로 고르고 살펴 장만하여 읽고 집안에 건사해 놓는 책으로 내 삶을 꾸리겠다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장만하거나 갖춘 책으로 내 삶을 다시 보며 내 삶을 새로 읽어 내 삶을 올바로 돌보겠다는 마음이 되어야 책읽기라 할 수 있습니다. 무슨무슨 베스트셀러를 읽었다던지 어떤어떤 스테디셀러를 얼마나 알아보고 읽었다 할지라도 책읽기가 아닙니다. 몇 만 권이나 몇 천 권에 이르는 책을 읽었다 해서 책읽기가 되지 않습니다. 책읽기는 나를 내세우는 이름값이 아니고, 책읽기는 내 몸값을 부풀리는 돈값이 아니며, 책읽기는 우쭐우쭐 어슬렁거리는 권력이 아닙니다. 글쓰기가 삶쓰기라면 책읽기는 삶읽기입니다. 글쓰기가 삶쓰기인 만큼 사진찍기는 삶찍기입니다. 사진찍기가 삶찍기인 터라 그림그리기는 삶그리기입니다. 그림그리기란 삶그리기인 까닭에 노래부르기란 삶부르기요, 춤추기란 삶추기입니다.

 살아가기에 글을 씁니다. 살아가며 글을 쓰기에 책을 읽습니다. 살아가며 글을 쓰고 책을 읽기에 사진 하나 찍고, 그림 하나 그리거나 즐기며, 노래 하나 부르거나 듣고, 춤을 추거나 바라봅니다. 삶이 온통 글이고 책이며 그림이고 사진인 가운데 춤과 노래입니다. 살아 있음을 느끼기에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립니다. 살아내고 싶어 글을 쓰고, 살아숨쉬는 넋으로 책을 읽습니다. 삶결이 글결로 묻어나고, 삶마디가 사진마디로 이어지며, 삶무늬가 그림무늬로 새겨집니다.


 (2) 살아 있기에 글을 쓰는 마루야마 겐지


 일본사람 마루야마 겐지 님이 쓴 《산 자의 길》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글쓴이 마루야마 겐지 님이 말하는 “산 사람이 걷는 길”이란, 당신 스스로 살아 있어서 글을 쓰고 있는 길이라는 소리입니다. 당신이 똑바로 살았건 그릇되이 살았건, 당신이 아름다이 살았건 엉터리로 살았건, 당신이 착하게 살았건 짓궂게 살았건, 당신이 참다이 살았건 바보스레 살았건, 당신은 오늘 이 땅에 두 다리를 디디고 있음을 잘 느끼고 있기에 이렇게 글조각을 푼푼이 그러모아 책 하나로 가만히 내놓는구나 싶습니다.

 《산 자의 길》을 읽은 사람 가운데 스스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분이라면, 마루야마 겐지 님과는 또다른 길을 걷는 당신 삶을 책 하나로 가만히 여밀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산 자의 길》을 읽으면서도 스스로 어떻게 어디에서 살아 있는가를 느끼지 못한다면,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헤아리지 못하는 한편, 나 스스로 내 삶을 엮어 책 하나로 일구는 길을 보지 못합니다.

 마루야마 겐지 님은 참으로 살고 싶어서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음을 느끼고자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먼바다를 누비는 배를 타는 일꾼이 되고 싶었든, 소설 《모비딕》에 흠뻑 빠진 사람으로 지냈든, 혼인은 했으나 아이는 낳지 않고 지내든, 자동차나 오토바이에 미친 듯이 빠져 지낸 적이 있든, 마루야마 겐지 님은 당신 삶을 하나도 숨기지 않습니다. 당신 삶을 조금도 덧바르지 않습니다. 당신 삶을 보기 좋게 꾸민다든지, 그럴싸하게 허울을 입히지 않습니다. 그예 당신 몸뚱이가 살아숨쉬는 그대로 말을 하고 글을 쓰며 일을 하고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뿐입니다. 마루야마 겐지 님 글은 온통 꾸밈없이 숨쉬고 사랑하며 생각하는 삶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 하나입니다. 보면 볼수록 새로운 모습을 새삼스레 찾아볼 수 있는 그림 한 장입니다.

 한국땅 어느 소설쟁이는 ‘살아남은 사람이 느끼는 슬픔’을 이야기했는데, 마루야마 겐지 님은 따로 슬픔이건 기쁨이건 밝히거나 다루지 않습니다. 그저 살아남아 있음만 밝히거나 다룹니다. 살아내는 동안 느끼는 슬픔은 언제까지나 슬픔이기만 하지 않고, 살아 있는 가운데 받아들일 기쁨은 노상 기쁨이기만 하지 않으니까요. 슬픔은 그예 슬픔이고 기쁨은 그저 기쁨입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뀐다든지 기쁨이 슬픔으로 달라지는 일이란 없습니다. 사라지지 않고 잊히지 않습니다. 다시 태어나거나 새로 샘솟지 않습니다. 삶에는 모든 이야기가 골고루 있으며, 우리가 숨을 쉬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이야기를 내 몸뚱이로 붙잡고 있을 뿐입니다.

 소설을 쓰는 마루야마 겐지 님이니, 당신은 당신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무대에 풀어놓습니다. 이 무대에는 당신이 보낸 삶이 알알이 묻어나 있는 한편, 당신이 바라보는 삶이 소록소록 담겨 있습니다. 당신이 느끼는 삶이 차곡차곡 쌓이는 가운데, 당신이 꿈꾸는 삶이 새록새록 깃듭니다. 딱히 수수하다거나 투박하다 할 대목이란 없습니다. 무언가 한결 곱다거나 멋있다 할 대목 또한 없습니다. 어딘가 남다르다거나 돋보인다 할 대목은 없습니다. 새삼스레 따스하다거나 넉넉하다 할 대목도 없습니다. 마루야마 겐지 님 소설은 오로지 마루야마 겐지 님 삶이기에 좋은 소설이고 문학입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당신 삶만큼 소설을 쓰며 즐기고 있기에 좋은 이야기입니다.

 살아 있기에 글을 쓰고, 살아가는 만큼 글을 쓰며, 살아숨쉬는 그대로 글을 씁니다. 글 하나 쓰는 밑바탕이란 오직 이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로 글을 쓸 뿐이고, 이 세 가지로 책을 읽을 뿐이며, 이 세 가지로 사람을 사귀고 사랑을 나누며 일을 하거나 놀이를 즐길 뿐입니다.

 살아 있지 않다면 글을 쓰지 못하고, 살아 있지 못한데 글을 쓸 까닭이 없으며, 살아 있지 않은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없습니다. 소설을 놓고 으레 ‘꾸미는 이야기’라 하지만, 더욱이 글쓴이 스스로 아직 겪어 보지 못한 이야기를 쓸 뿐이라고도 하나, 아직 겪어 보지 못했다기보다 느껴 보지 못한 삶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쓴다고 해야 알맞다고 느낍니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뭇사람 삶이기에 이러한 삶을 이야기 한 자락으로 갈무리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글쟁이 한 사람은 ‘느끼는 가슴’으로 ‘살아 있는 목숨’일 때에 비로소 붓을 놀립니다. 책쟁이 한 사람은 글쟁이 한 사람이 느끼는 가슴으로 살아 있는 목숨을 담아낸 글을 또다른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가슴’이 되고 ‘살아 있는 목숨’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책읽기가 이루어집니다. 글쓰기와 책읽기란 동떨어진 일이 아닙니다. 글쓰기와 책읽기란 한동아리입니다. 《산 자의 길》이라는 책을 읽은 분이라면 적어도 이만한 느낌을 선물로 받으면서 내 글쓰기와 삶쓰기와 책읽기와 삶읽기를 고이 모두어 내리라 믿습니다. 이 책 하나를 손에 쥐면서 섣부른 생각이나 치우친 마음이 없었다면.


 (3) 살아숨쉬는 글월 새롭게 읽기


 나온 지 제법 되기는 했지만 아쉽게 판이 끊어져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산 자의 길》입니다. 아무래도 이 나라에서는 이 같은 문학이 옳게 읽히기는 힘들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 땅 사람들 스스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지 않으니까요. 손꼽히는 몇몇 대학 졸업장을 따려 하고, 연봉 높은 일자리를 얻으려 하며, 자동차 굴리기에 허덕이는 가운데, 더 크고 값나가는 아파트를 장만하는 쇠사슬에 꽁꽁 묶여 있는 한국땅에서 《산 자의 길》이란 꿈 같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살아숨쉬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어느 구석도 읽히기 힘든 《산 자의 길》인데, 이렇게 살아숨쉬지 않는 한국사람들한테 더욱 읽힐 《산 자의 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다시 그은 대목을 곰곰이 되읽습니다. (4343.7.13.불.ㅎㄲㅅㄱ)


[9∼10쪽] 어떠한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어떠한 집단에도 의지하는 법이 없으며, 그렇다고 세상을 등진 사람의 부류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에 코웃음을 날리면서,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신과 권리를 추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격렬한 기질의 소유자야말로 참된 창작자이며, 참된 산 자이다.

[24, 58, 88, 91∼92쪽] 국가 권력에 의해 잔혹한 대변화를 강요당한, 저 전쟁(태평양전쟁)의 시대를 용케 헤쳐나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어른들로서는, 필경 그처럼 아무런 자극도 없는 안정이야말로 다시없는 보물이었으리라 …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도회의 번잡함이 아니라 우주에 직결되어 있는 광대한 바다였다 … 주변에는 샐러리맨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은 인간이 수두룩했다. 적응력이 풍부하다고 할까, 순종하는 체질이랄까, 전형적인 현실파라고나 할까 … 왜 그들은 돌과 화염병과 쇠파이프밖에 손에 쥐려고 하지 않는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어린아이 장난 같은, 아예 무기류에도 들어가지 않을 소도구를 휘두르는 것이 어떻게 과격파인가 하는 의문도 생겼다.

[43, 44, 125, 145쪽] 이토록 많은 책을 읽어도 고작 이 정도 사내밖에 못 되는가. 분수도 모르는 꿈을 주책없이 쫓아가다가는 결국 어떻게 되어 버리는가 하는, 그런 간단한 일마저 자신의 아내에게 이해시키지 못한단 말인가. 자식이 헤매고 괴로워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여기에 있노라고 가르쳐 주지도 못한단 말인가. 그런 사내가 지금까지 수십 년이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왔다는 말인가 …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도저히 현명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부모를 가짐으로써, 나는 확실히 자립과 독립의 길을 망설이지 않고 나아갔던 것이다 … 나는 소위 지식인은 아니었다. 또한 지식인 사이에 끼워 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식인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자들의 대다수가 도저히 올바른 지식인으로는 비치지 않았던 탓이다. 만약 그들이 참된 지식인이라면 제 발로 신문사를 찾아가거나, 텔레비전에 나가고 싶어하거나, 마음대로 먹고 마신 외상값을 출판사에 떠넘기거나, 직책에 연연해 하거나, 권위에 추파를 던지거나 할 리가 없다 … 술냄새가 풀풀 나는 입에서 튀어나오는 묘하게 차원 높은 이론은 대체적으로 자신들의 작품에는 전혀 반영되어 있지도 않았다.

[52, 108쪽] 나는 《백경》을 탐독했다. 거듭 되풀이해서 읽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발견과 감동이 솟았으며, 더군다나 그것은 퍼올려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았다 … 일본문학에서는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커다란 스케일과 높은 질. 너무나도 리얼한 대모험의 이야기. 철학적이자 박물학적이면서도 일직선으로 혼에까지 도달하는 깊은 감동. 파워, 볼륨, 기품의 3박자가 갖추어진 대걸작 … 외국의 걸작에는 믿어지지 않을 만치 시간을 허비한 경우가 많았다. 5년, 10년이라는 세월을 아낌없이 썼으며, 그것이 예사였다. 그 중에는 한 작품에 일생을 공들인 작가마저 있을 정도였다. 어쩌면 외국문학과 일본문학의 극심한 수준 차이는, 소비한 시간의 차이가 크게 연관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영화이건 문학이건, 그런 짧은 시간에 해치우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오는 게 뻔한 일이 아닐까.

[63, 77쪽] 위험한 이상을 뒤집어쓴 자본주의가 너무나도 일본적인 해석과 일본적인 활용에 의해 사회와 개인의 자유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무리 엄격한 공산주의 국가이더라도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개미나 벌들의 사회를 빼다 박은 듯한 국민 통제는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 빈부의 차가 아무리 벌어져도, 그럭저럭 밥을 먹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진심으로 몸을 던져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과격한 노동조합이더라도 무장봉기가 되면 즉각 넙죽 엎드리고 말 것이다.

[126, 127, 131, 163쪽] 예술의 핵심이 아니라 예술의 분위기만을 즐기는 듯한 무리들의 혼은 출발점부터 이미 썩은 것이 아닌가 … 내가 열성적인 문학 독자였더라도 그런 야단법석은 혐오했을 것이다. 자신이 읽고 싶은 소설은 스스로 찾지, 문학상이나 광고 문구에 이끌려 사는 것 같은 짓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 그러나 많은 문학 팬들은 헤밍웨이와 파장이 딱 들어맞았다. 헤밍웨이가 꾸며 보이는 그런 세계에 왜 자신이 도취되는가 하는 것은 거의 따지지 않고, 도리어 그런 것에서는 얼굴을 돌리고 천진스럽게 빨려들어 갔다 … 발표 무대가 늘어남에 따라 작품의 질은 점차 떨어졌고, 그렇게 하는 사이에 무엇보다 팔리는 작가를 발굴해야 한다는 숙명을 짊어진 편집자들도 눈에 듸게 변해 갔다. 사무적인 업무에 쫓겨 감성을 연마할 시간이 없어졌고, 시야가 좁아졌으며, 편집자의 생명과도 같은 ‘모든 것에 대한 흥미와 관심’의 정도가 극단적으로 얕아지고 말았다.

[156, 204, 208, 220쪽] 시대나 세대에 장단을 맞추어 일시적인 총아가 되기보다는, 보편적이고 중후한 테마에 과감하게 도전하여 활자 중독자들의 싸구려 자기 현시욕에서 나오는 경박한 문학론을 고통스럽게 여기는, 진짜 안목을 갖춘 참된 독자가 탄성을 지르도록 만드는 작가를 지향할 수 있다면, 이 세계에 머물러 있을 의의와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 오랜 세월 그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고, 앞으로도 그들의 기분에 맞춰 줄 소설은, 그들로서는 틀림없는 문학일지 몰라도,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 진짜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참된 미란 현실의 진흙탕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간파하고 있어야 했다 … 나만은 독자적인 문학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새삼 각오를 다졌다. 읽어 줄 독자들의 시선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작품을 써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157쪽] 학교 공부를 지독하게 싫어한 이유는 좋아하지도 않는 여러 지식을 일방적으로 퍼부으며, 무조건 외우기만 하면 된다는 납득되지 않는 교육이었던 탓이다.

[227쪽]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나는 즉시 나의 생활로 돌아갔다. 나로서는 장편소설을 마무리짓는 일 쪽이 더 중요했다. 꺼져 버리는 촛불처럼 깨끗한 마지막을 맞기 위해서라도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말고, 부지런히 소설을 써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이튿날에는 아버지의 일은 이미 내 머리에 없었다. 몇 십 년이나 전에 죽은 친구와 마찬가지의 희미한 인상이 되고 말았다. 필경 아버지 역시 몇 십 년 전부터 가족의 일 따위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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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산토 -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
마리- 모니크 로뱅 지음, 이선혜 옮김 / 이레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숫자는 삶도 사람도 경제도 평화도 아니다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40] 마리-모니크 로뱅, 《몬산토,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밭갈이나 논삶이를 하는 젊은이나 푸름이나 어르신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사람은 1/1000이 채 안 된다고 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스스로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 꽤나 배불리 먹고 있습니다. 배불리 먹을 뿐 아니라 밥쓰레기 또한 어마어마하게 내놓습니다. 벌써 열 몇 해 앞서부터 ‘남녘사람이 먹다 버린 밥쓰레기 부피만으로도 북녘사람을 모두 먹이고 남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제 땅을 일구며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사람은 밥쓰레기를 내놓지 않습니다. 다 못 먹었다든지 남기고 썩힌다든지 하는 일이란 없지만, 어쩌다가 남는 밥이 있다면 땅한테 돌려주거나 짐승한테 내어줍니다. 그러니까, 제 땅을 손수 일구는 사람한테는 밥쓰레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개밥이든 돼지밥이든 거름이든 되도록 다시금 손을 놀립니다.

 밭갈이나 논삶이를 하는 사람이라든지 해 본 사람이라면 압니다. 밭에서 돌을 고르고 흙을 뒤엎으며 판판하게 다지는 데에 얼마나 많은 품과 땀과 나날을 보내야 하는지를.

 고기집에서 상추 한 접시 더 달라고 말하는 일은 쉬울 뿐 아니라, 돈조차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흔한 푸성귀 상추 하나를 접시에 올리도록 씨앗을 뿌리고 돌보고 거두고 손질하여 내놓기까지 드는 품과 땀과 나날이란 참으로 많고 깁니다. 그런데 돈으로 치면 ‘스스로 땅을 일구어 얻는 상추’보다 ‘돈 몇 푼 치르는 일’이 아주 적게 치일 뿐 아니라 품이며 나날이며 안 써도 됩니다. 요즈음 도시사람들 ‘한 시간 일삯’이라 하여도 ‘농사꾼이 일구어 거두는 상추’ 부피란 꽤나 많으며, ‘하루 일삯’만 되어도 열흘 내내 배터지게 먹어도 다 못 먹을 만한 부피가 됩니다.

 조금이나마 머리가 구르는 사람이라면 흙을 만지며 땅을 일구는 일은 안 하기 마련입니다. 형편없는 품삯에 몸은 고되며 얼마나 긴 나날을 땀흘리는 일에 바쳐야 하는데요. 책상맡에 앉아 펜대를 굴린다든지 셈틀을 또닥거리며 수백 수천만 원이나 억대 돈을 벌어들여 돈굴리기를 하는 데에 마음과 머리와 몸을 쓸 뿐입니다.


.. PCB는 50년 동안 변압기와 산업용 수력기계의 냉각액뿐만 아니라 플라스틱, 도료, 잉크, 종이 등 다양한 제품의 생산 과정에서 윤활액으로도 사용되었다 … 몬산토케미컬스컴퍼니는 최초의 인공감미료인 사카린을 제조하여 조지아에 위치한 신흥기업인 코카콜라에 전량 판매했으며, 뒤이어 바닐라와 카페인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 우리는 그가 ‘유령도시’라고 부르는 곳으로 들어갔다. “다 버려진 집들이에요.” 데이비드 베커는 심하게 낡았거나 아예 폐허가 되어 버린 허름한 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야채를 기르던 텃밭이랑 물이 심하게 오염되었기 때문에 다들 떠날 수밖에 없었죠.” … “우리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산업화된 농업의 팽창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수출에 역점을 두는 이러한 농업 형태는 가족농을 몰아내고 있어요.” ..  (30∼31, 416쪽)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시골집을 사랑하거나 아끼며 시골살림을 신나고 즐겁게 꾸리려는 젊은이나 푸름이나 어르신은 그리 안 많습니다. 모두들 하나같이 도시로 나오며 도시에서 일감과 놀이감을 찾고 도시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동무를 사귑니다.

 가만히 보면, 오늘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쓰는 교과서에서 시골살림을 옳고 바르게 다루는 적이란 없습니다. 아이들한테 ‘직업을 알려주거나 보여준다’는 자리에서는 으레 도시에서 하는 일만 나오지, 시골에서 하거나 할 만한 일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과서며 사회며 문화며 예술이며 정치며 경제며 온통 도시에만 쏠려 있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면서도 내 손에는 물을 안 묻히는 데에 쏠려 있습니다. 밥하기, 빨래하기, 쓸고 닦기, 애 키우기, 살림 꾸리기는 아예 다루지 않습니다. 오늘날 어떤 어린이나 푸름이나 젊은이도 ‘학교에서 밥하기를 배운’ 적이 없을 뿐더러,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 가운데 손수 ‘빨래하고 집안 쓸고 닦거나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분은 거의 안 보입니다.

 누구나 전문 기능인이 되어 있으며, 누구라도 전문 기능인이 되도록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교사는 교육 전문 기능인이지, 옳거나 바르거나 곱거나 참되거나 착하며 아름다운 한 사람이지 않습니다. 교과서를 잘 다루는 교육 기능인일 뿐인 오늘날 우리 터전 사람들입니다. 법을 잘 다루고 의료 기술을 잘 다루고 자동차를 잘 다루고 기계를 잘 다루고 할 뿐입니다. 그저 공만 잘 차서 나라밖 무슨무슨 대회에 나가면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그예 얼음판을 잘 지쳐서 무슨무슨 기록을 세우면 뛰어난 사람이 됩니다. 피아노만 잘 치면 된다거나 책만 들입다 파면 된다거나 연구실에서 온 하루 파묻히면 된다거나 빵 반죽만 잘 하면 된다거나 할 뿐입니다.

 스스로 제대로 된 삶을 꾸리지 않아도 되는 도시살이입니다. 밥·옷·집에다가 아이를 키우는 몫은 돈을 들여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된다고 여기는 도시살이입니다. 틀림없이 바깥밥을 사먹을 날이 있고, 손수 누에를 치고 물레를 자으며 베틀을 밟고 바느질을 하여 옷을 기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쁘고 할 일이 많은데 내 집을 어떻게 손수 지어서 사느냐 할 만합니다.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은 마땅히 있어야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밥·옷·집에다가 아이마저 다른 사람 손에 맡긴 채 돈 하나만 벌면 내 삶이 아름다이 마무리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밥·옷·집에다가 아이를 다른 사람 손에 떠맡기는 가운데 내 삶을 즐겁고 알차게 꾸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모든 사실을 뻔히 알면서 오로지 이익을 위해, 환경을 오염시키고 사람들을 유독물질로 오염된 환경에 방치시킬 수 있었을까? … “어떻게 해서든 이윤을 남기려는 생각이 그들의 영혼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어요. 그들에게는 오로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는 거죠.” … 대법원의 놀라운 판결은 아무도 감히 입에 담지 못하는 표현인 ‘생명체의 사유화’를 가능하게 했다. 뮌헨이 위치한 유럽 특허청은 미국의 판례를 근거로 1982년부터 미생물에 대한 특허를 발부했으며 1985년부터는 식물, 1988년부터는 동물 그리고 2000년부터는 인간의 태아에 대해서도 특허를 발급하고 있다 ..  (36∼37, 324쪽)


 《몬산토,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요즈음 들어 비로소 알려지고 있는 ‘죽음을 만드는 기업’ 가운데 하나인 몬산토를 파헤치는 책입니다. 500쪽을 웃도는 두툼한 책은 몬산토 하나만 다루고 있는데, 이 책은 몬산토가 얼마나 거짓부렁이요 거짓말쟁이요 거짓스레 돈을 벌어들이는가를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나 또다른 ‘죽음을 만드는 기업’ 이야기를 다루자면 고작 500쪽 남짓 한 책으로는 모두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 둘레 모든 ‘죽음을 만드는 기업’ 이야기를 다루자면 500만 쪽이 아닌 500억 쪽으로도 모자라리라 봅니다. 몬산토는 ‘죽음을 만드는 기업’ 가운데 겨우 하나입니다.

 〈록키 호러 픽처 쇼〉라는 영화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름 ‘RKO’를 세운 자본가는 또 다른 곳에서는 전쟁무기를 만들어서 팔아 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쟁무기를 만들어서 팔아 거둔 돈으로 영화배급을 하고 영화 찍을 돈을 댄다 할 수 있는 노릇입니다. 우리들은 즐겁고 재미나게 보는 영화 하나일 뿐이지만, 정작 어느 영화 하나를 즐겁게 재미나게 보고 있는 동안 지구 맞은편에서는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대준 무기를 갖고 피튀기게 싸우며 죽고 죽이는 아픔이 터지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삶터 맞은편에서 전쟁무기가 어마어마하게 팔리고 쓰이기 때문에 우리가 안방이나 극장에서 하하호로 깔깔낄낄 웃으면서 영화 하나를 즐길 수 있습니다.


.. “세수할 때나 고기를 구워 먹을 때 에이전트 오렌지가 담겨 있던 빈 통을 이용하는 동료들도 있었어요. 제초제에 다이옥신이 들어 있다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정부는 모든 걸 알고 있었죠.” … “누군가 박사님께 rBGH를 투여한 소의 우유를 권한다면 드시겠습니까?” “아마도 사양할 겁니다.” 마가렛 하이든이 대답했다 … 1998년 10월 몬산토 홍보 담당 이사인 필 엔겔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GMO의 안전성을 보장하는 것은 몬산토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가능한 한 제품을 많이 파는 것이다. 안전성 확보는 FDA가 할 일이다.” ..  (79, 211, 281쪽)


 ‘죽음을 만드는 기업’이란 사람들과 사람 삶터와 뭇 짐승과 푸나무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면서 돈 하나만 벌어대는 기업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이들 ‘죽음을 만드는 기업’은 어떻게 죽음을 만들어 팔면서 엄청나게 큰 돈을 벌어댈 수 있을까요? 이 몹쓸 기업은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는 이를 알아채지 못하면서 우리 스스로 죽음이라는 벼랑으로 굴러떨어지고 있을까요?

 ‘우리 몸을 살리고 우리 터전을 살리는 먹을거리’를 지구라는 터전에서 일구어 마련하자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에, 인공감미료이든 화학첨가물이든 유전자조작식품이든 식품첨가물이든 만듭니다. 우리 몸을 살리기 때문에 인공감미료를 만들어서 쓰지 않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어서 인공감미료를 씁니다.

 우리들은 ‘아주 값싼’ 인공감미료를 넣은 먹을거리 앞에서 게걸스레 굽니다. 아주 값싼 인공감미료를 넣었으니 ‘우리 몸을 살리고 우리 몸에 좋은 먹을거리’하고 견주어 대단히 값싼 ‘공장에서 만든 먹을거리’를 사들입니다. 참말로 유기농과 무농약이 좋다고 여긴다면, 농사꾼이 땀흘려 땅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얻기까지 얼마나 긴 나날과 많은 품이 드는가를 헤아리면서 ‘옳고 바르며 알맞춤한’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옳고 바르며 알맞춤한’ 값을 치르려 하지 않습니다. 되도록 더 싸게 장만하고 싶어 합니다. ‘죽음을 만드는 기업’은 바로 이 같은 우리들 매무새를 꿰뚫어보고 나서 죽음을 만들면서 떼돈을 법니다. 우리 스스로 더 값싼 것만을 찾으며 우리 삶을 살리려 하지 않으니까, 죽음을 만들어도 돈은 돈대로 벌고 이름은 이름대로 높이며 권력은 권력대로 누립니다. 이러는 동안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죽음 구덩이에 내몹니다. 처음에는 아주 적은 돈으로 온갖 물질과 먹을거리를 누리는 듯 보이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우리 몸이 망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마음과 삶 또한 허물어지고 있는데, 이를 하나도 못 느끼고 못 알아채며 못 보고 맙니다.


.. “사람들은 녹색혁명 덕분에 인도가 식량자급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 오늘날 인도는 매년 7400만 톤의 밀을 생산하는 세계 제2의 밀 생산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아세요? 토양은 황폐해졌고, 수자원은 염려스러울 만큼 감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환경 전반에 걸쳐 오염이 발생했고, 단일경작의 확대로 다양한 식량생산에 차질이 생겼어요. 또,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는 농업 형태에 적응하지 못한 수만 명의 영세농이 농토를 잃고 빈민굴로 이동했어요.” ..  (491쪽)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일 때에는, 적어도 집 안쪽에서 스티로폼 농사를 짓거나 꽃그릇 농사를 지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삶터 얼거리와 내 몸과 마음 틀을 깨달은 사람일 때에는, 더 많은 돈이 아닌 더 아름다울 내 삶을 헤아리며 시골살림으로 돌아설 줄 알아야 합니다.

 한 달에 천만 원을 벌거나 삼백만 원을 번다고 해서 내 삶이 즐거울까 모르겠습니다. 한 달에 천만 원을 번다지만 내 몸을 살리지 못하는 먹을거리만 받아들이는 가운데 나 스스로 내 손을 놀리며 흙을 만지고 싱그러운 물과 바람을 맛보는 기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답거나 기쁠까 모르겠습니다. 몸과 마음이 망가져서 우리 곱고 좋은 나날을 병원에 ‘돈을 갖다 바치며’ 마무리를 해야 할까 모르겠습니다. 맨 처음부터 돈바라기 삶이 아닌 사랑바라기 삶으로 나아가고, 학벌바라기 아닌 믿음바라기 삶으로 나아가며, 권위바라기 아닌 꿈바라기 삶으로 나아갈 노릇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몬산토,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이라는 책을 읽고 몬산토라는 기업이 얼마나 돈에 눈이 멀어 죽음을 만들고 있는가를 알아챘다면, 몬산토 하나로 그치는 ‘죽음을 만드는 기업’이 아니요, 우리 나라에도 숱하게 ‘죽음을 만드는 기업’이 넘치고 있음을 읽어내는 가운데, 나 스스로 죽음이 아닌 삶을 생각하고 찾는 매무새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래, 내가 여태껏 엉터리로 살았네. 이제부터는 참되게 살아야지.’ 하고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을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시살이를 떨쳐내며 아름다운 삶을 찾아 돈을 손에서 놓을 수 있을는지요.

 숫자는 삶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며 경제도 아닙니다. 숫자는 평화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며 교육도 아닙니다. 숫자는 평등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며 과학도 아닙니다. (4343.7.5.달.ㅎㄲㅅㄱ)


 ┌ 《몬산토,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이레,2009)
 ├ 글 : 마리-모니크 로뱅
 ├ 옮긴이 : 이선혜
 └ 책값 : 2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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