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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1001-913] 책 읽어주는 남자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한다.

카오스 이론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이다.
변화무쌍한 날씨를 예측하기가 힘든 이유를
지구상 어디에서인가 일어난 조그만 변화로 인해
예측할 수 없다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 용어를 처음 알기 전,
그러니깐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아이였을 때이다.
인간의 삶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단순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작용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에는 착한 일만 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착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학교라는 어린이의 사회에 내딛을 때에도                                                                              열심히 공부하면 성공하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세상에 먼저 몸을 담가본 어른들은
아무도 세상의 수심(水深)을 알려준 적도 없었고, 어린 나는 거대한 세상을 너무 얕봤다.

김기림의 시에 나오는 흰 나비처럼 말이다.  

바다에 내려갔던 나비는 날개가 젖은 상태에 지쳐서 돌아오듯이,
어른들의 사회에 무심코 들어간 나는  

끝이 없는 깊이감에 빠져 헤매다가 후회 하면서 돌아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세상이란 그렇게 단순하고 만만하게 아니라는 것을.
또 내가 원하는 삶이란 그리 쉽게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타인들과의 얽히고 설킨 관계가 상충되어
예측 불허한 일들이 우리 삶에 일어나고 그것이 인생을 좌우하고 있었다.  

   

 

 책 읽어주는 남자, 사랑을 주는 여자  

 

이 책에 나오는 두 남녀 주인공도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사랑을 하게 되었으나
결국 비극적으로 끝나듯 애정 소설의 천편일률적인 전개에 벗어날 수 없는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예사롭지가 않다. 
소설 속 남자 미하엘은 15세 소년이고, 여자 주인공 한나는  

미하엘보다 21살 위인 36살이다.
미하엘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면 그녀는 보답으로 샤워를 해주고
서로 뜨거운 육체적 관계를 맺고야 만다.
그리고 열정적인 쾌락의 시간이 끝나면 연인은 잠깐 같이 누워 있는다.
그러고는 한나는 아무 일 없다듯 다시 일상적인 생활을 한다.
이렇듯 한나가 미하엘에게 아무 말도 안하고 홀연히 사라질 때까지
짧고 길었던 시간동안 연인은 그렇게 지냈다.
어린 미하엘은 마음의 상처를 입으면서 그녀와 만남은 시간 속에 묻어가기로 하였다.

세월이 지난 후, 미하엘은 어엿한 법대생이 되었는데
그때까지도 한나에 대한 추억이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미하엘은
우연히도 법정에서 그녀를 만난다.
8년의 세월은 그녀를 예전보다 늙어 보이게 만들었다.
무엇이 그녀를 늙게 만들었으며 왜 미하엘의 곁을 떠나야만 했었는가?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다 

 

그것은 평생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상처와 문맹이라는 인간으로서의 치명적인 수치심이다.
그녀가 살아오면서 항상 불안케하는 원인이었으며   
치유하기 위해서는 미하엘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든 커다란 원인은 전쟁이었다.
과거에 나치 친위대의 여성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그녀는 친위대에 잡힌 유태인 여자가 읽어주는 글을 통해  

문맹을 벗어나고 싶었고 두 여자는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싹틔우게 된다. 
하지만 정부의 명령을 어길 수 없는 그녀는  

그 여자를 포함한 유태인들을 죽이는 일에 참여한다.
전쟁이라는 잔인한 운명이 그녀를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든다. 

그래서 소년 미하엘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잠시나마 행복했던 그 때의 과거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기이하고 강렬했던 미하엘과의 만남부터 비극적인 자살로 생을 마칠 때까지  

그녀가 정작 갈망했던 사랑은 책을 읽는 나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사랑이 있는데
‘에로스(Eros)’‘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 가 있다.
과연 인간은 살면서 에로스와 플라토닉이 공존하는

이상적인 사랑을 추구할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이상적인 사랑은 오래 갈 수 있을까? 
 

한나는 비록 자신보다 어린 소년이지만
자신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그를 통하여 정신적인 감정 교류,  

플라토닉 러브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육체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에로스를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나의 사랑’ 이 투영된 에로스를 보는 독자의 관점이다.
우리는 에로스를 성 본능에 충실한 육체적인 사랑이라고
편향된 인식을 가지기 쉽다.
‘에로스=Sex' 라고 만든 사람은 프로이트일뿐
진정한 에로스는 시간을 거슬러 고대 철학자 플라톤으로 기원을 삼고 있다.
에로스를 보다 철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불완전한 자신을 자각하고 완전함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여 나아가려는 정신이다.

 

한나는 남성인 미하엘과의 섹스를 통해
사랑을 하고 있는 여성 ‘한나’ 로 재탄생되길 바랬던 것이다.
비록 오래가지 못하지만 한나는 미하엘을 통해
여성이 누리고 싶어하는 이상적인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미하엘 앞에서는 단순히 성적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여자이길 보다는

사랑을 하고 있는 완전한 여자로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정작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은 현실에서는 따라주지는 못했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잘 몰랐던 사춘기 소년 미하엘은
책을 읽어주면 육체적 쾌락을 맛볼 수 있는
가까우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여자로만 볼 뿐이었다.
자신이 원했던 사랑이 아니었음을 느낀 한나는 미하헬 곁을 떠나게 되고
그때부터 이 둘의 사랑은 어긋나게 되고  

미하엘은 평생동안 한나와의 추억을 오류가 점철된 사랑으로 간직하고 만다.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떠나가지 못하는 남자

  

한나의 자살 이후 미하헬은 그녀의 유품을 통해 죽을 때까지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의 죽음에 안타까워하게 된다.
오히려 한나의 자살을 통해 인간의 이상적인 사랑은 가능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한다는 뉘앙스를 지울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사랑을 보면 볼수록
한국의 비극적 커플 중의 하나인 선녀와 나무꾼이 생각난다. 
나무꾼은 끝까지 자신 곁에 남고 싶어하지만
정작 선녀는 자신의 근원지이지만 
이상적인 곳이기도 한 하늘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비록 한나-미하엘 커플과의 상황은 다르지만
남성은 현실에 순응하려고 하지만
여성은 현실을 넘어선 이상을 지향한다.
이렇듯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사랑이 달라
이별을 선택해야하는, 헤어지기 싫어도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 되는 점이
얼추 비슷하다.

하지만 꼭 이상적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소설은 작가의 눈을 통해 창조되는 현실일 뿐이며
참된 사랑에 대해 에로스든 플라토닉이든 추상적인 기준들을 가지고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사랑을 경험하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서로 차이점을 존중하고 이해하면
좋아하는 감정들을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독일 남녀의 사랑은 전쟁이라는 특수적인 환경적 요인이 컸다.
전쟁으로 인해 한나는 나치 친위대 일원이 될 수 밖에 없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우연히 미하엘을 만나 사랑의 감정을 키우게 된다.
그런데 한나의 과거 행적이 사랑을 오래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한나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전쟁이라는 커다란 나비의 날개짓이 
이들의 사랑을 비극의 토네이도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한나의 죽음 후에 미하엘이 그녀의 진실된 사랑을 
뒤늦게 알게 된 점에 대해 안타깝기보다는
과거에 두 사람이 한창 사랑했던 추억의 시간들이 더욱 애절하게 느껴졌다.
만약 한나가 조금 더 마음의 문을 열고 미하엘에게 다가왔더라면
그리고 미하엘이 조금 더 성숙한 마음으로 사랑의 의미를 깨달았더라면
과연 이들의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났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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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화 속 현대 미술 읽기
존 톰슨 지음, 박누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현대미술의 모든 것을 하나의 책에 담겨진 현대미술 gu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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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를 말하다 - 인류최초의 지식인간
존 스트로마이어.피터 웨스트브룩 지음, 류영훈 옮김 / 퉁크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Quiz. 다음 세 가지 보기의 공통점은? 

 

1) 한 스승과 제자들로 보이는 남자들이 병사들에게 쫓기어 도망가고 있었다.
    정신없이 도망가다 보니 그들의 앞에 넓은 콩밭이 있었다.
    제자는 스승에게 콩밭을 가로질러 가자고 재촉하였으나 스승은  

    콩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도망가기를 거부하였다. 결국 그들은
    병사에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살해되고 말았다.  

 

2) 어느 죄인이 왕이 보는 앞에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죄인은 마지막으로 부모님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왕에게 간청하였다. 
    왕은 죄인의 소원에 탐탁치 않게 여겼으나 사형장에 있던 죄인의 친구가  

    보증을 서겠다면서 만약 친구가 돌아오지 못하면 자신이 처벌을 받는다고 하였다.
    왕은 친구의 말을 믿고 죄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죄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왕과 주위 구경꾼들은 죄인이 도망갔다고 생각하였고 친구에 대한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하지만 죄인은 가까스로 약속 시간 안에 도착하였다.  

    왕은 약속을 끝까지 지킨 죄인의 행동과 친구의 우정에 감탄하여
    죄인을 사면하게 해주었다. 
 

 3) a2 + b2 = c2 
 

 

1번 보기는 생소한 일화라고 치더라도
2번 보기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친구의 우정을 강조하는 내용이고
3번 보기는 학창 시절에 수학 좀 했다거나 수학이라면 질색인 사람들도 수업 시간에
많이 보던 ‘피타고라스의 공식’ 이다.

이제 답은 나온 거 같다. 하지만 보기에 나오는 콩을 싫어하는 스승과
우정에 관한 일화가 피타고라스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일까?  

  

 

 수수께끼의 학파  

 

세 가지 보기의 정확한 답을 말하자면 ‘피타고라스 학파’ 이다.

그의 이름을 딴 수학 공식이 지금까지도 수험생(?)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고 있어
우리는 그를 수학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공동체 생활을 하는 집단을 만들었는데
그 집단이 ‘피타고라스 학파’다.
이 학파는 피타고라스가 제창한 지식과 계율을 실천하면서 집단 생활을 하는

지식과 종교가 혼합된 학파였다. 학파의 대표적인 계율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콩을 먹어서는 안 된다.

   2. 떨어진 물건은 주워서는 안 된다.

   3. 통째로 음식을 들지 말라.

   4. 말 위에 앉지 마라.

   5. 마음을 졸이지 마라.

 
   


특히 1번 계율은 앞에서 언급했던 1번 보기 내용과 일맥상통하다.

피타고라스의 죽음에 대해 많은 일화들이 와전되고 있는데
1번 보기는 그 중의 하나이며 그만큼 피타고라스가 자신이 세운 계율을  

끝가지 고수하는 면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는 모든 사물들은 조화(Philia)에 따라 구성이 되며 미덕이라고 강조하였다.
질서와 조화를 지니고 있는 우주, 즉 ‘코스모스(Cosmos)'라는 개념을  

처음 정립하게 된다.
그래서 피타고라스 학파는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이  

조화가 이룬 아름다움의 결정체라고 여겼고
소속되어 있는 학파 사람들과의 '우정'을 중요시 여겼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피타고라스 학파를 ‘수수께끼의 학파’ 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학파에 대한 기록들이 지금까지 많이 전해 내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피타고라스와 그의 학파들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전해 내려오는  

단편적인 기록들과 세월이 지나서 와전된 일화들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단체가 더욱 더 우리에게 궁금증을 증폭하게 만드는 이유는
아마도 비밀 종교 단체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입단 시에는 학파의 계율을 지키겠다는 절대적 복종과 학파에 대한 비밀을 유지해야 했다.
학파 내의 절대 복종은 스승 피타고라스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학파 일원들이 발견한 학문의 성과는 무조건 스승의 업적으로 돌려져야만 했다.
그런 학파의 독특한 분위기 속에 피타고라스는 교주로서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게 된다.
그의 신적 행동과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콩만 먹는 소에게 귓속말로 콩을 먹지 말라고 속삭였더니 소가 콩을 먹지 않았다거나
자신의 허벅지에 신의 증거가 있다는 등 마법과 기적을 부렸다고 전해진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사이비 종교단체로만 볼 수 밖에 없겠지만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피타고라스 학파 외에도 비밀 종교 단체와 같은 것이  

성행하였다고 한다.
학파 일원 중에도 귀족들도 있는 걸로 보아서는 대중적인 단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정치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몰락

 

하지만 동, 서양사에서 등장했던 밀교(密敎)들은 반짝 성행하다가  사리지게 마련이다.
결국,  피타고라스 학파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는데  

그 원인은 학파의 지나친 정치적 영향력 행사는 원로원 기득권층의 불만을 사게 되고
이를 구실삼아 역모를 꾸며 시민들을 선동하게 하여  

한 때 대중적이었던 피타고라스 학파는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학파 일원들은 추방당하게 되고 교주 피타고라스는   

도피 생활 중에 타지에서 죽었다는데
그의 죽음에 대한 일화가 많아서 죽음까지도 그의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자리 잡게 만들었다. 
 

피타고라스 학파 자체는 와해가 되었어도 그들의 사상은 고대세계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사상의 영향력은 중세까지도 전해져 내려왔다.
여기서 인상깊은 것은 그때까지도 '학자' 피타고라스보다  

피타고라스 '신'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비밀 종교를 바라보는 시선 

 

피타고라스 학파는 외부의 기득권층에 의해 무너졌다.
하지만 외부의 압력만으로 인해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학파가 쉽게 무너졌을까?
비밀을 고수해야 하는 폐쇄적인 종교 단체는 대중성을 잃은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그것도 대중성의 영향이 큰 정치계에 무심코 손을 뻗었으니
결국 피타고라스 학파 스스로 자멸하게 된 행동이었다.

우리 사회에서도 비밀 단체를 그닥 좋지 않게 보지 않는 이유가 있다.
밀교의 전형적인 특징인 비밀스러운 단체 분위기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는 것도 있고
더 큰 원인은 종교 단체를 대표하는 인물, ‘교주’의 맹목적인 신앙 강요와
비이성적인 행동은 더욱 더 그와 종교 단체를 대중들은 이상하게 여기게 된다. 
 

몇 년 전에 JMS 교주 정명석이 중국 도피 생활 끝에 체포, 구속된 적이 있다.
물론 그가 구속되어야 할 이유는 종교 단체를 만들어 혹세무민한 것도 있었으나
자신의 종교 단체의 여성 신도들에게 성폭행을 했다는 혐의도 있었다.
결국 사람들에게 참된 종교의 진리를 설파해야 하는  

종교인의 기본 자세에 벗어난 행동이다.

우리는 종교에 대한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만 해도 기독교, 불교, 천주교뿐만 아니라 이슬람 교, 힌두 교인들도 있다.
종교들마다 내용은 차이가 있으나
결국 우리가 종교를 가지는 이유가 종교를 가지면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일 것이다.
거기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그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자신에게 맞는 종교를 잘 선택하는 것이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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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단 한번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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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오늘 장영희 교수님의 1주기 추모행사가 생전 강단에 서던 서강대에서 개최하였다.
교수님의 유족이 주관하고 지인들의 참석하여 추모글을 낭독하였다.
이번 행사를 주최함으로써 어떤 삶을 살더라도 희망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고인의 메시지를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오늘 아침 뉴스에서 장 교수님의 추모행사 소식을 접하면서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주는 경외감의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예전의 시간이 떠올렸다.

작년 4월, 우스갯소리로 죽도록 일만 해야 한다는 일병 시절에  

장 교수님의 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생활관에는 3칸짜리 조그만 책장이 있었는데 비록 많은 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책장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군사 교본과 병사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잡지와 음악 CD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입대 후 제대로 된 책을 읽어보지 못한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책장에 눈에 띈 이 책을 집어 들어 읽게 되었다.
그 때는 ‘장영희’ 이름 석 자의 지은이에 대해 잘 몰랐었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중학교 때 배운 영어 교과서의 집필에 참여한  

유명한 분이었다.)
이 책이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독자들의 눈물을 훔쳤다는 사실을 몰랐다.   

   

  

마음에 영양분을 주는 글

 

교수님의 에세이들은 접했을 때 여성 특유의 섬세한 문장이 쉽게 읽혀졌고
자신의 투병 생활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은 점에서  

왜 이 책이 많은 독자들이 읽게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글을 통해 교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고 공감을 느꼈다.
교수님의 글 중에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후회하고 반성하는 내용이 있다.
어느 날, 교수님에게 편지 한 통이 왔는데 30년 전 초등학생 시절에  

술집 주인의 딸이라고 해서 친하기를 꺼려했던
친구의 이름이 편지 주소에 적혀 있는 것이다.
교수님은 그 편지의 이름을 보자마자 마음 한 구석에 지워져 있을 줄 알았던
친구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이 30년 후에 다시 찾아온 것이다.
비록 그 친구와의 재회 내용은 없었지만 (이 글을 집필 이후에 만났을 수도 있겠다)
글로나마 친구에게 미안함을 나타냈다. 
 

이 글뿐만 아니라 책에 수록되어 있는 교수님의 에세이들을 읽으면
군 생활로 지친 내 마음에 영양분을 얻은 거 같았다.
영양분을 얻은 힘으로 앞으로 남은 군 생활을 보다 긍정적으로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1달 후, 교수님의 사망 소식이 뉴스에 전파되었다.  

   

 

웃음으로 가려진 눈물 

 

사람이 부정적인 감정, 후회를 많이 느끼게 되면 마음의 정신적 스트레스가  

자신도 모르게 신체가 쇠약해지고 병이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교수님의 글이 항상 밝고 순수한 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교수님의 몇 몇 에세이들을 보게 되면 신체 불구자로서의 삶과 투병 생활에 대해
잠시 자괴심과 절망감에 시달린 적도 있고, 우울감에 빠졌다는 내용도 있다.
고골의 글은 ‘눈물로 가려진 웃음’이라는데
교수님의 글은 ‘웃음으로 가려진 눈물’이었다.
교수님은 글을 통해 의학적으로 치유 불가능한 자신의 부정적인 마음들을
자기 자신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서 마음 속에서도 투병 중이었던 것이다.
힘든 투병의 휴유증이 교수님의 수명을 단축하게 만들었을까?
조금씩 병들어 있는 마음을 치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불꽃같이’ 떠나버렸다.

교수님 부고 이후 다시 이 책을 읽었다. 
책에 ‘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한 마디’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내용은 교수님이 자신이 죽었다는 가상 설정 하에  

무슨 유언을 남기고 갈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처음 읽었을 때 몰랐었는데 이 글에 교수님이 멋진 유언을 남기셨을 거라는  

기대감에 읽어나갔다.
하지만 교수님은 얄밉게(?) 유언 같지 유언으로 이 글을 마무리지었다.
교수님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 하지 말고 살아있을 때 하고 싶은 말을 하란다.
하긴 이 글을 쓰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죽음이 자신 코 앞에 있었다는 것을  

느껴지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 그 구절을 읽으면서 교수님의 유머에 웃음을 머금었지만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책에 남긴 가상 유언이  

실제로 되어버린 것만 같아 슬펐다.
두 번째로 교수님의 글을 읽게 되어 ‘웃음으로 가려진 눈물’을 또 한 번 느꼈다.
    

 

때론 아프게, 때론 불꽃같이 

 

교수님의 삶은 이 책의 부제처럼 ‘때론 아프게, 때론 불꽃같이’ 살다 갔다.
교수님이 처음 쓰고 출판한 처녀작이 유언처럼 보이는 것은 나뿐일까? 
책 앞표지에 있는 불나방이 꼭 교수님을 상징하는 거 같다.  

(누구든지 이 책 표지 디자인을 보면 나비라고 생각하지만)

하늘을 훨훨 날기 위해 온갖 성장통을 감수하면서
자라나지만 결국 불꽃을 향해 뛰어들어 타버리는 것처럼.....
먼저 떠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힘찬 날갯짓을 하면서  

저 멀리 하늘로 날아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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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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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솝 우화와 동물 농장 

 

어렸을 때, 집의 책장에 자리하고 있는 아동문학전집에는 ‘이솝 우화’가 있었다. 
 

세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순진한 아이는

부지런한 개미와 게으른 베짱이를 보면서

착한 행동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나쁜 행동으로 살 것인가에 따라서
평생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는 다 읽은 책을 덮고나서 다짐한다.

"베짱이처럼 살지 않겠다고....."

이솝 우화가 어린 나에게 권선징악이라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솝 우화’는 책장 구석 한 켠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난 뒤, 집의 책장에 자리하고 있는 세계문학전집에는 ‘동물 농장’이 있었다.

세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단 맛, 쓴 맛 본 남자는
책장 구석에 꽂혀 있는 ‘이솝 우화’에 눈길을 준다.
이 책도 단순히 현대판 ‘이솝 우화’일거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하지만 우화가 주는 특유의 유머와 페이소스를 한번 더 느끼고 싶은 맘에 읽었다.
읽고 난 후 책을 덮고 나서 남자는 생각한다.  

 

"동물농장이라는 곳이 진짜로 존재하는 곳이구나....."  

  

 

 50년 후, 동물 농장은...  

 

이 책의 번역자 도정일 교수는 작품 해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웰이 그린 동물농장은 지금의 세계에도 있고 미래 세계에도 있을 것이다 
                                               - p 151, ‘작품 해설 [동물농장]의 세계’ 중에서 -

 
   


오웰이 이 책을 집필하고 있던 1940년대에는 소련의 스탈린이 정적 트로츠키를 축출하고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있을 때였다. 스탈린은 나폴레옹, 트로츠키는 스노볼  

그리고 나머지 동물들은 당시 소련 국민을 뜻한다. 그리그 그들의 에피소드는  

스탈린 체제의 사회상을 풍자한 것이다.
냉전의 벽과 철옹성 같았던 소련은 무너지고 많은 세월이 지났다.

과연 50여 년 전의 시대상을 풍자하고 있는 이 책은 아직까지도 유효한가?

그렇다. 동물농장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의 동물농장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인간 세태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동물들은 농장주 존즈 밑에서 안위된 생활을 누리지 못한 채 죽어라  

일만 하고 고생한다.
이는 곧 우리 사회의 ‘워킹푸어(working poor)’, 즉 ‘근로 빈곤층’이다.
그 동물들 중에 나폴레옹이라는 돼지는 농장의 생활 개선을 위해 동물 반란에 참가하고
그 공로로 농장을 이끌어가는 존재가 된다. 농장에서의 돼지가 동물들 사이에서  

계급 지배력이 높은 점을 이용하여 동물들을 선동하고 적인 스노볼을 쫓아냄과  

동시에 자신이 다른 동물보다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웃 농장주인 필킹턴과 화친을 맺게 되는데 결국 나폴레옹은 자본가와  

협력하여 특권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노동자, 즉 ‘노동 귀족’이다.  


소설은 동물들이 필킹턴과 나폴레옹의 만남을 그냥 창 밖에 지켜보고 있는 장면을
끝으로 마무리 지으면서 작가는 잘못된 권력 부패 사회를 비난함과 동시에
이를 그냥 의도적으로 묵시하고 있는 정치 앞에서 무기력한 대중을 비꼬고 있다.
벤자민이라는 당나귀는 여기에 나오는 동물들에 비해 등장 비중은 크게 차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이 당나귀는 동물 반란 이전이나 이후에도 여전히 농장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 관심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정치에 무관심을 가지며 정치를  

참여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책무를 기피하는 정치적 모라토리엄 인간인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우화는 동물을 의인화하여 그들의 행동을 통해 인간 사회를 풍자하고 교훈을 주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단순히 텍스트를 읽다보면 독자는 사회 풍자에 대한  

페이소스만 얻을 뿐 우화가 전달하고 싶어 하는 문학의 현실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결국 우화는 특유의 아우라를 발휘할 수 없게 되고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현대의 우화인 [동물농장]을 읽으면서 소설 속의 농장이 현실감이 느껴졌다.
이 책은 우화가 주는 재미와 동시에 앞으로 다가올 아니, 지금도 동물농장은 문을 닫지  

않았음을 경고하고 있다. 소설은 점점 부패하고 망가져가는 농장의 모습을 끝으로  

마무리 짓는다.  만약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지면 비참한 동물들의 생활이 계속  

이어져나가거나 동물들 중에 새로운 제3자가 등장하면서 나폴레옹 체제를 무너뜨려  

새로운 지배 사회가 등장할 수 있다.
 

역사는 반복 된다’고 토인비는 말했다. 동물농장의 역사도 그렇게 될 것이다.

 아마도 동물농장은 영원히 문을 닫지 못할 거 같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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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1-06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열린책들 에서 나온 버전으로 동물농장 을 봤는데 무척 몰입해서 흥미진진했던게

기억나네요.

도정일 이 번역한 민음사 판도 읽어보고 싶네요.

cyrus 2010-11-06 15:54   좋아요 0 | URL
열린책들 버전이랑 민음사 버전이랑 번역에 약간 차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이 재미있으면서도 독자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는,, 정말 훌륭한 작품인거 같습니다.

2016-11-04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1-04 14:21   좋아요 0 | URL
부끄럽네요. 옛날에 썼던 글을 보면, 앨범에 있는 아기 돌 사진을 보는 것 같아요. ㅎㅎㅎ

이때 서재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기라서 글에 서툰 표현이 많습니다. 그래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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