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웨이스트 키친 - 식재료 낭비 없이 오래 먹는 친환경 식생활
류지현 지음 / 테이스트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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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 책의 실물이 궁금해 잠실교보에 갔다. 매대에 놓여진 이 책을 찾아 펼쳐보는데, 작가소개에 류지현 작가는 '냉장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식생활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써있는 게 아닌가. 제로 웨이스트 키친, 이라는 제목에서 그리고 '식재료 낭비 없이 오래 먹는 친환경 식생활' 이라는 부제에서 나는 이미 낭비 없는 식생활에 대해 얘기할거라 짐작은 했지만, 그것이 '냉장고 없이' 라고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좀 당황했다. 


저자는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하자 Save Food from the Fridge> 운동을 진행중이라 했는데, 당연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게 될까?'였다. 모든 음식과 재료를 구매하는 순간 냉장고에 넣어 쌓아두는 나로서는 그것이 될까,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거였다. 그것이 부정적으로 '안돼, 나는 냉장고 있어야 돼' 하고 책을 내려놓게 되는게 아니라, 그게 된다고? 하면서 펼쳐보게 만들었다. 이 부분에서부터 이 책을 읽는 독자와 그렇지 않은 독자는 갈리게 될 것 같다. 무슨말이야, 현대에는 냉장고가 필수지, 하고 그냥 내려놓는 사람들도 다수일거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는데, 처음 부분은 저자가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만들고 브런치를 먹고 그리고 점심 때는 있는 재료가 무언지 보고 이 재료들로 무얼 만들어 먹을까를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 재료가 이게 있으니 이걸 만들자, 그런데 저게 없네 그러면 저걸 사오자, 하고 나가는 그저 식사를 챙기는 일상적인 모습.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인데, 나는 사람들이 자기 먹을 거 잘 챙기고 먹고 사는 게 너무 좋다. 혼자 먹더라도 예쁘게 먹고 또 잘 먹는 거, 끼니를 잘 챙기는 걸 너무 좋아하는 거다. 그런면에서 이 책의 시작은 그 이야기 만으로도 내게 좋았다. 너무 좋았다. 아, 너무 좋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저기 멀리에서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 그것만으로 나는 마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활자로 만나는 느낌이랄까. 나는 리틀 포레스트도 너무 좋아했다.


내가 처음 이 책을 읽고자 한 이유는 어떻게든 쓰레기를 줄이고자 하는데 있었다. 배달음식을 시켜먹어도, 밀키트를 이용한 요리를 해도 쓰레기가 엄청 나오는거다. 그렇지만 시장에 가서 재료를 사 직접 해먹는 걸 선택해도 쓰레기가 나오는 건 마찬가지였다. 배달과 밀키트가 일회용 쓰레기를 만들었다면, 내가 사는 재료들로 만들 경우엔 재료 낭비가 되는 거였다. 밀키트로 밀푀유나베를 만들면 필요한 재료가 적당한 만큼만 들어있는데, 내가 시장에 가 직접 재료를 사온다면 고기도, 배추도, 깻잎도 모두 남을 터였다. 그걸 다시 어떻게 쓰나 고민하면서 냉장고에 넣어둘 것이고, 냉장고에 넣어두면 잊히기 일쑤였다. 지금은 밀키트가 그나마 가장 나은 대안이 아닌가, 그것말고도 대안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심정으로 이 책을 보고자 한거였는데, 아니 이 책은 세상에나, 냉장고에 의존하지 않는 삶에 대해 얘기하는 게 아닌가!



냉장고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부지런해야 했다. 몸을 재게 놀리는 것도 그렇고 나에게 남은 재료가 무엇인지도 기억하고 들여다봐야 했다. 게다가 오래 두면 상하니 조금씩만 사둬야 했고, 그렇다면 시장에 더 자주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지금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고 이 책이 너무 좋지만, 독립한 후에야 내게 쓸모가 있을 것 같다, 매대에 책을 다시 내려두고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도 이 책이 너무 생각나는 거다. 거기에 음식 저장방법에 대해 써져있었는데, 거기에 남은 음식들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도 적혀 있었는데, 거기에 음식을 오래 두기 위해 어떻게 조리하는지도 나와 있었는데, 라고 자꾸만 자꾸만 생각이 나는거다. 몇년 내에 독립할 예정인 나는 나 혼자 살림을 살게 되면 늘 식탁 위에 이 책을 두어야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런데 왜 꼭 그때여야 하는가 스스로 묻게 되었고, 지금 미리 준비해도 되지 않나 싶었던 거다. 그렇게 나는 하룻밤이 지나 오늘, 점심을 먹고 이 책을 사러 천호 교보에 갔다.



천호 교보에 도착해 이 책을 찾기 위해 검색창에 넣었더니 F6-4 에 있다고 했다. 천호점은 잠실점처럼 크지가 않아 매대가 거의 한 눈에 보이는 수준인데, F 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직원에게 어디냐고 물어보니 저기, 에스컬레이터 지나서 우측으로 가라고 했다. 오, 거기에도 책이 있었어? 그간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쪽인데. 그렇게 나는 F 를 찾았는데, 거기에는 생뚱맞게 아이들 학습지와 참고서가 있는거다. 하는수없이 근처에 있던 직원에게 F6-4 가 여기뿐이냐 물었더니 내가 찾는 책이 무어냐 했다. 나는 제로 웨이스트 키친이다, F6-4 에 있다고 했는데 아닌 것 같다. 아마도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가보다 했더니 그럼 다시 검색해보자는 거다. 그렇게 직원은 직원용 컴퓨터로 가서 책을 다시 검색창에 넣었고 거기에는 F6-4 대신 E6-4 가 써있는 게 아닌가. 아아, 제가 잘못봤네요 죄송합니다, 하고 직원과 나는 서로 웃었는데 그러면서 나는 물었다. 그런데 E는 어느 쪽이지요? 직원은 저 쪽이라고 방향을 알려주면서 책 검색용지의 출력을 누르는 게 아닌가. 아아, 그렇게 종이가 쑥- 뽑혀버렸어... 이 내가, 그 종이 안쓸라고, 본 뒤에 쓰레기 되니까 굳이 안뽑고 외운건데, 아아, 이렇게 기어코 뽑혀버리는구나. 나는 아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내어 말했다.


"아아, 종이 안 뽑으려고 외운건데요.."


그러자 직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맞네요. 웨이스트....."


그렇게 함께 웃었다는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이 책에 담긴 나의 사연이다.



나는 보통 도서관에 가도 그리고 서점에 가도 책 검색을 한 뒤에 종이를 뽑지 않는다. 여러권이거나 외울 힘이 없으면 핸드폰으로 화면을 사진 찍는다. 그것이 출력되고 이내 버려지는 게 영 신경쓰이기 때문이다. 그냥 외우면 되는데, 사진 찍으면 되는데 뭐하러 출력하나, 나는 이 종이 낭비에 보태지 말자, 싶어 늘 그러했는데, 아아, 외우면 어떤 일이 생기냐면, 내가 이렇게 잘못 외우게 되고 ... 그러면 기어코 시간과 노력을 들인 뒤에 낭비에도 보태버리게 되는 거다. 이 일은 내게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걸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 낭비 없이 친환경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몸을 재게 놀리고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그것은 당연히 불편할 터였다. 냉장고가 없는 삶은 냉장고 있는 삶을 살았던 나로써, 당연히 더 불편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와 이 책의 책장을 한장씩 다시 넘기면서, 그래도 도전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이 이탈리아에서 이렇게 살고 있다면, 내가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살지 못할 게 무어람. 내가 다른 식구들과 함께 하는 게 아니라 나 혼자라면, 그리고 혹여라도 내 앞으로의 삶에 나와 뜻이 맞는 사람이 나와 함께하게 된다면 나는 혼자 그리고 또 누군가와 함께, 냉장고에 의존하지 않는 삶을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이 필요하다. 아예 냉장고를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냉장고가 부엌 한 켠에 있다 하더라도, 모든 재료를 처박아두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이 책이 필요하다. 냉장고 없이 보관하는 방법이 이 책에 있고, 오래 보관하는 방법 역시도 이 책에 있다. 맛있게 먹기 위해 최소한 며칠 내에 다 먹어야 하는지도 이 책에 있고, 심지어 채소들을 먹고난 껍질들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이 책에 있다. 


저자가 이렇게 살게 되기까지 어떤 과정들을 거쳐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는 음식과 재료에 대한 관심도 많고 또 요리도 잘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나 같은 경우 요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재료의 특징도 알지 못하니 처음부터 누가 알려주는대로 해보면서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이 필수일 터였다. 오래 보관하기 위해 그리고 맛있게 먹기 위해 잼을 만들고 또 기름에 저장하면서, 양념 및 조미료로 저장하면서 산다는 것이 내게는 아주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만든 걸 내가 먹는 삶. 잼을 만들거나 기름에 저장한다면 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선물할 수도 있겠지. 저자는 자신이 가진 재료들로 무엇을 만들어볼까, 잠깐 고민하면 요리가 뚝딱 나오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런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자연스레 오늘은 이런 것들이 있으니 이걸 해서 저 채소들을 다 먹을까, 할 수 있지 않을까. 


텃밭을 가꾸며 산다면 상추며 깻잎, 토마토와 피망을 길러 먹을 수도 있을 것이고 이 책에 있는 것처럼 바질이나 부추도 가능할 것이다. 윽, 바질과 부추를 내가 먹을만큼 키우면서 사는 삶이라니. 너무 좋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부지런하고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은 이렇게 살고 싶다,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간 이런 거에 관심없이 살았던 내가 앞으로는 관심을 두면서 살 수 있을까? 나는 쓰레기를 줄이고 싶고 먹거리를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이 마음만으로 실천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이 나를 설레이게 한다. 나는 이 책에 실린 모든 사진들이 좋고 모든 이야기들이 좋다. 저자가 지나치게 소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그 점이 나랑 살짝 어긋나지만(왜 아침 그렇게 무시해요? 왜 그렇게 간단하게 먹어요?), 무엇보다 잘, 건강하게 먹고 사는 것 같아서, 그러면서 친환경적이라는 게 진짜 자지러지게 좋다. 


이 책에는 위에 언급한것처럼 재료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저장할 수 있는지 여러가지 방법이 실려있는데, 무엇보다 나는 생강술, 생강술에 아주 큰 관심이 있다. 생강술은 내가 꼭 한번 도전해서 맛보도록 하겠다. 생강술, 컴온!


아, 역시 이 책은 내 식탁위에 언제나, 언제나 있어야 된다. 나의 패이버릿이 될 것 같다.



생강술은 '시간이 만드는 저장 음식'(p.159) 이라는데, 여러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생강술을 가지고 돌아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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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1-07-04 19: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혼자 사는 사람으로서 여러 모로 반성하게 되는 글이네요ㅜㅜ 생강술 궁금합니다ㅇ_ㅇ!

다락방 2021-07-05 10:29   좋아요 1 | URL
근데 생강술을 조미료처럼(그러니까 미림처럼)쓰려고 만들자는 의도인것 같아서 제가 생각하는 의도와는 빗나가는듯합니다. 하여, 생강술 대신 페스토를 만들어볼까.. 해요. 흠흠.

붕붕툐툐 2021-07-04 2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저랑 공통점 발견~ 저도 종이 뽑는 거 싫어서 핸드폰으로 찍어요~ 냉장고 없는 삶을 지향하지만, 그러려면 진심 김치가 없어져야 할까요?ㅎㅎ 김치는 포기 못하겠다. 포기김치~

다락방 2021-07-05 10:32   좋아요 1 | URL
아, 툐툐님. 저는 이거 읽으면서 한 순간도 김치 생각을 안했거든요. 맙소사.. 김치 ㅠㅠ 저 김치 정말 너무나 사랑해요. 김치 만세입니다. 아파트에 살면 땅에 묻는 것도 불가하니, 흐음, 그렇다면 김치는 겉절이로만 먹어야 할까요.. 묵은지가 맛있는데.. 냉장고를 아주 없앨 순 없고 의존도를 줄이면서 살아가는 걸로 방향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저는 그 종이 한 번 보고 쓰레기 되는게 너무 싫어요 진짜 ㅋㅋㅋㅋㅋ

블랙겟타 2021-07-04 22: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학교 도서관 이용하고 집에 와서 가방 속을 보면 그 청구기호 종이들이 한 가득이였거든요..(언제 이렇게 뽑은거지?;;;)
뒤늦게 ‘한번 보고 나면 버려지는구나’ 라는 걸 깨닫고 요즘엔 검색대에서 청구기호 기억하고 책을 찾으러 가지요..
(까먹고 다시 돌아와 검색하는 건 가끔 있지많요..)
(이 글 보고 느낀것: 아! 검색 화면을 핸드폰으로 찍으면 되는구나!😅)

다락방 2021-07-05 10:32   좋아요 1 | URL
저도 한 권이니까 기억해야지 했다가 시간을 배로 들이는 바람에.. 아 정확히 기억하자, 그리고 가급적 내 머리 믿지말고 폰에 의존하자.. 하였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핸드폰으로 찍으세요, 앞으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7-05 02: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뭘 사도 깨알스토리를 덤으로 사오는 인생!! 🤓

다락방 2021-07-05 10:32   좋아요 2 | URL
나는 사람들이 참 좋아.. ♡

독서괭 2021-07-05 0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실천 어려울 것 같지만 참 좋은 생각이고 궁금한 책이다.. 이러며 읽다가 마지막 보고 왠지 빵 터졌네요 ㅎㅎ 생강술 ㅎㅎ

다락방 2021-07-05 10:34   좋아요 1 | URL
근데 생강술 대신 바질 페스토로 바꿔타야 겠어요. 생강술... 조미료로 쓰라는 말인 것 같아요. 먹으면 안되나? 소주 들어가는데... 흐음. 흐음...
중간에 아주 많이 재료 보관법이나 사용법 같은게 나와있긴 하지만 저는 처음 부분에 작가가 밥 해먹고 시장보러 나가고 하는 것도 너무 좋더라고요. 제 취향의 책입니다!! >.<
 
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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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니 에르노를 싫어하지 않고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은 두 번 읽었을 정도로 좋아했다. 그래서 이번 책도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읽기 시작했는데 화자가 결혼한 후부터는 읽기가 너무 힘들어 책 던져버릴까 엄청 고민해야 했다. 그래도 아니 에르노니까, 하고 참으면서 꾸역꾸역 읽긴 했지만, 《남자들은 항상 나를 잔소리하게 만든다》,《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에서 느꼈던 바로 그 짜증이 나온다. 아니 에르노는 이 책에서 여자 아이가 소녀에서 자라면서 받게 되는 성차별도 얘기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얼마나 확 갈리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어휴, 너무 피로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결혼하고 나면 여자들 진짜 빡세고 우울하다...는 고발만 계속할건가 싶어 답답하다. 과연 이렇게 고발만 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론 이렇게 여성의 삶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보여주는 게 안하는 것보다 낫겠지만, 읽고 읽고 또 읽는 과정은 피로하기 짝이 없다. 이런 거 진짜 그만 읽고 싶다.


이 소설 속 화자는 외동딸이었고 상점을 하며 아이를 자유롭게 키운 화자의 엄마는 그녀에게 교육을 받게 해주면서 앞으로 쭉쭉 나아가라고, 움츠리지 말라고 한다. 이에 그녀는 어릴 적부터 가사노동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다. 넌 이런거 하지마, 넌 이런거 할 사람 아니야, 공부해서 나아가, 남자들 나아가는 만큼 나아가. 그러나 그녀의 엄마가 그녀를 그렇게 키웠다해도 세상은 그녀를 그렇게 두지 않는다. 그녀는 힘겹게 공부를 했지만 여러차례 미래를 생각해 진로를 바꿔야 되는건 아닐까 고민하게 됐고, 그렇게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니, 같이 공부하는 입장이었는데도 집 안의 가사노동이 자연스레 자신의 일이 되는 걸 느낀다. 우리 이런거, 이미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만나지 않았나. 남자 혼자살 때 자기 빨래 자기가 했고 여자 혼자 살 때 자기 빨래 자기가 했지만, 둘이 사니까 모두의 빨래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자가 하게 되는거, 그래서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스테퍼니 스탈'도 나중에 빨래 다 창밖으로 집어 던져버렸잖아.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서는 더한다. 아이를 낳고 나서 남편은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왔을 때, 퇴근 했을 때, 집은 자신의 휴식처이길 원하지 자기가 가사 노동에 참여하고 육아에 참여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극장에 가고싶어 했을 때는 그 남자의 목을 쥐고 조르고 싶었다, 책을 읽는 나는.




아마 흐린 어느 일요일이었을 거다. 관광 시즌이 지나면 늘 그렇듯 우중충한 오후가 시작될 때였다. 분명히 내가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우리는 점심으로 로스 비프, 강낭콩을 먹었고 아마 커스터드도 먹은 것 같다. 마지막에 설거지도 끝냈다. 갑자기 경쾌한 목소리, 자연스러운 문장이 들려온다. "리츠에서 베르그만의 마지막 작품이 상영된대." 또 다른 문장이 들려온다. "내가 오늘 오후에 거기에 가면 당신 화낼 거야?" 내가 침묵하니까, 마지막 문장이 들린다. "아이 보는 데 두 명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나는 주저앉지도 고함치지도 않았다. 냉소적이고 논리적인 결론, 이게 결혼이다, 둘 중 어느 한 명의 우울을 택하는 것, 둘이 함께하는 것은 낭비다. 내 자리는 아이 곁이고 그의 자리는 영화관이며, 그 반대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영화관에 갔다. 나중에 그는 여름이면 테니스 치러 갈 것이고, 겨울이면 스키 나러 갈 것이다. 나는 아이를 보살피고 산책시킬 것이다. 참 멋진 일요일들 ……. -p.230-231



여자는 자기 직업을 갖고 싶었다. 그렇게 중등교사 자격증을 따고 드디어 일하러 가게 되었지만, 일하고 돌아와서는 남편이 그러는 것처럼 씻고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신문을 읽는 일은 불가하다. 퇴근후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아이 밥을 차려내고 자신과 남편의 밥을 차려내야 한다. 집안 정리도 그녀의 몫이다. 밖에 나가 일하는 건 같았지만 그녀는 남편만큼 돈을 벌어오지도 못했고, 돌아와서는 또다시 노동이 시작된다.




이런거, 이제 나는 읽기도 지친다.



그런데 여자가 둘째를 가졌다. 임신을 하고 또 아이를 낳고...



아 빨리 읽고 팔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가까스로 다 읽어냈는데 옮긴이의 말은...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정말 나를 미치게 한다. 옮긴이 고광식은 이렇게 썼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커플이 함께 읽어보기를 권한다. 여성은 공감을, 남성은 여성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양쪽 모두 상대편의 관점에서 서로를 바라볼 기회를 얻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철저하게 여성의 시각에서 쓰인 이 책에서 배제된 남성의 목소리 또한 들어볼 필요가 있으리라. 그것이 함께 산다는 모험을 조금은 덜 위험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옮긴이의 말, 고광식, p.254



아니 에르노의 얼어붙은 여자를 읽고 '배제된 남성의 목소리'를 언급하다니..


아 끝까지 지치는 독서였다.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언제 어디서나 독서에 몰입한다. 그 점에서 나는 지역 소식을 알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저녁 식사 후에 신문을 훑는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나를 벗어나, 우리를 벗어나, 굳어진 낯선 그 얼굴이, 어머니가 빠져드는 그 침묵이, 꼼짝도 하지 않는 완벽한 부동자세에 빠져 무거워진 그 몸이, 나는 부럽다. 오후마다, 저녁마다, 일요일ㅇ마다, 어머니는 신문이나 시립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때로는 새로 산 책을 꺼내 든다. 그러면 아버지는 "내가 말하고 있잖아, 그 소설책들 지겹지도 않아!" 하고 고함을 치는데, 어머니는 "이 이야기 다 읽게 좀 내버려둬"라고 대꾸한다. 그때 나는, 나도 읽을 줄 알게 되기를 얼마나 바랐던지, 어머니를 열광시키는 그 그림도 없는 긴 이야기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 P33

적어도 집안을 꾸려가는 건 여자들이다. 돈을 헤프게 쓰면 안된다는, 너무나도 많은 의미가 담긴 이 문장을 백번도 넘게 들었다. 최소한 일요일에는 대 빼고 광내서 아이들을 가게에 보내고, 술 마시는 데 월급을 탕진하지 않고 사소한 일로 직장을 바꾸지 못하게 남편들을 관리하는 것. 여자들의 거의 모든 불행은 남자들 탓이라는 사실을 나는 어렴풋하게 알게 된다.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나의 롤 모델은 내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푼돈에 휘둘리는 사람은 아니다. - P46

부모님은 내가 숙제를 할 때면, 물론 놀고 있을 때도 그렇지만, 식탁을 차리거나 접시를 닦으라는 말로 절대 방해하지 않는다. 부모님은 "넌 너만 생각하면 된다"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큰 선물인가! 자기를 희생하는 맏딸의 미덕이나, 식전주에 어울리는 안줏거리를 가져오는 심부름 잘하는 막내딸의 매력, 그런 종류의 일은 우리 집에서는 필요하지 않고, 심지어 못마땅해 한다. 여자아이가 자신이 쓸모 있다고 여기는 기쁨, 사랑받기 위해서는 자기 방을 잘 정리하고 ‘얌전하게‘ 식탁을 치워주는 걸로 충분하다는 생각 같은 건 난 해본 적이 없다. 나 자신과 나의 미래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을 뿐이다. - P53

"얘야, 넌 품행으로는 이걸 받을 자격이 없단다. 단정함으로도 못 받아. 알아둬라." 교장 선생님은 나를 엄한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본다. "전 과목에서 10점 만점을 받을 수는 있어. 하지만 그걸로 선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지는 못한단다. 옛날에 정말 재능이 뛰어난 소녀가 있었단다. 너희들 중 누구도 그 아이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거야. 그 아이는 시험이란 시험은 다 통과했어, 전부. 그런데 그 아이가 지금 뭐가 돼 있는지 아니?" 쥐 죽은 듯한 고요. 나는 여전히 메달을 받으려고 서 있다. "사람들이 휠체어에 탄 그녀를 밀어주고 있단다. 그 아이는 지금 두 살 정도 지능을 갖게 돼버렸어. 하느님이 내리신 병에 걸린 거란다." 한순간, 내가 반에서 꼴찌였으면 싶다. 물론 그런 생각은 다시 들지 않는다. 하느님은 산수도 문법도 좋아하지 않는 게 분명한데 어머니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하고, 얌전함이나 암송문 공책에 그려야 하는 작은 그림들은 고양이 오줌처럼 별 볼 일 없는 것이라고 한다 - P71

그러면소도 동시에, 부조리하게도, 대개는 불확실하지만 믿어볼 만한 남자가 어딘가에 존재하기를 희망한다, 예정된 함정, 오 미친 사랑, 초현실죽의적 운명, 나는 그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떤 남자가 있을 것이다, 나를 모든 함정과 굴욕으로부터 피신시켜줄 남자가 어딘가 있을 것이다. - P162

물론, 나는 한 방에서 그와 2미터 떨어져서 라브뤼예르나 베를렌을 공부한다. 알다시피 아주 유용한 결혼 선물인 압력솥이 가스레인지 위에서 칙칙거린다. 둘이 함께 있으면, 닮은꼴이 된다. 또 다른 선물인 주방용 조리 타이머의 날카로운 소리. 이제 닮은꼴은 끝. 둘 중 한 명이 일어나서, 압력솥 아래의 불을 끄고, 미친 듯 도는 압력추가 느려지길 기다리고, 압력솥을 열고, 수프를 체에 거르고, 다시 자신의 책 더미로 돌아온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생각하면서. 나다. 차이는 시작되었다. - P181

대학 식당은 여름에 문을 닫았다. 정오와 저녁에 나는 냄비 앞에 혼자가 된다. 나는 그보다 더 요리를 잘하지 못했다. 그저 빵가루 묻힌 송아지고기 커틀릿, 초콜릿 무스나 할 줄 알았지, 특별한 것은 할 줄 몰랐다. 그나 나나, 어머니 치마폭에서 요리를 도운 과거가 없었다. 왜 둘 중에서 나만 이것저것 해봐야 하나, 닭은 얼마나 오랫동안 삶아야 하는지, 오이의 씨는 제거해야 하는지, 그런 걸 알아보려고 왜 나만 요리책을 탐독해야 하고, 그가 헌법을 공부하는 동안 당근 껍질을 벗기고, 저녁을 먹은 대가로 설거지를 해야 하는가? 어떤 우월성의 명목으로 이런 일이 가능한가? - P181

결혼 초부터 나는, 항상 나를 회피하는 평등의 꽁무니를 쫓아다닌다는 느낌이 든다. - P229

알고 보니 만능 집사는 여성이었다. 그래서 남자와 똑같은 일을 하지만 결코 자신의 가정을 눈에서 떼어내지 못하고, 고등학교 정문에 가정을 내려 놓았다가 학교를 나갈 때 가정을 다시 들고 간다. 저녁에 스파게티 뭉치를 끓는 물에 쏟아붓고, 내 주변을 맴도는 아이와 함께 있으면, 정말 사소한 뜻밖의 일도, 최소한의 호기심도 밀어 넣을 자리가 없는, 가장자리까지 꽉 찬 포화상태의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 나는 감히 이런 생각들을 하지 못했다, 어떤 생각들인지 한 번 들어보시라, 선생은 ‘여자에게‘ 정말 멋진 직업이다, 열여덟 시간의 수업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집에 있고, 자신의 아이들을 볼보기 좋은 방학, 꿈, 요컨대 주변 사람들에게 전혀 고통을 주지 않는 직업, 자아를 ‘실현‘하는 여성, 돈을 번다, 훌륭한 아내이자 훌륭한 엄마로 남는다, 그러니 누가 이 직업에 대해 불편하겠는가. - P237

일만 하는 여자들, 흥분하는 여자들은 알다시피 골칫덩어리들이다. 당신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다행이야, 그 말은 내가 내 직업에 대해 입을 닫았다는 뜻이다. - P239

두렵고, 허둥지둥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여성의 인내심, 그들은 그것을 애정이라 부른다. 나는 둘째 아이를 잘 키우고, 세 개 학급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장을 보고 식사를 만들고 고장 난 지퍼를 바꿔 달고, 아이들의 신발을 사는 경지에 이르렀다. 놀라운 일은, 그가 항상 나를 설득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일주일에 4일하고도 반나절 동안 집에서 가사 도우미의 도움을 받는, 특권을 누리는 여자라고. 그렇다면 남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부인을 일주일 내내 도우미로 부리는데, 대체 어떤 남자가 특권을 누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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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6-28 10: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첫 문단에 특히 공감합니다!
며칠 전에 읽은 책에서도 삼시 세끼 남편한테 따뜻한 밥 지어주고, 국이나 찌게에 다섯 가지 이상의 반찬 새로 만들어주면서 20년 가까운 (시집살이 말고) 남편살이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요즘 세상에.
제가 여자라도 전업주부니까 세끼는 해주겠는데, 전기 밥솥에다 이틀치 밥 해놓고, 니가 알아서 퍼 먹어. 반찬 냉장고에 있으니까 꺼내 먹고.... 이렇게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요즘 제가 읽은 책들 보면 여성들이 오히려 자진해서 더 지독하게 외통수로 몰아가면서 말입니다,
싸워야 할 거 아녜요!!!
(이하생략.)

하긴 뭐 그런 새끼들하고 같이 사는 여자들도 있긴 하겠지요. (씨... 그럼 갈라서야지, 재산 분할 확실하게 하고 말입니다.)

다락방 2021-06-28 10:45   좋아요 3 | URL
물론 그렇게 된 사회적 환경과 배경이 존재하지요. 특히나 아니 에르노가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던 때에는 여자가 교육받는 것보다 결혼 빨리 해서 애낳고 사는 걸 여성의 이상적 삶으로 정해둔 때였으니 더 그랬을 거고요. 그러니 그 삶으로 끌려 들어갔다가 이게 뭐지, 우울하다, 그런데 나만 이러는건가, 다들 이렇게 사는데 나만 이상한건가, 하고 고통스러워 하는거 이해를 하고도 남음이고요. 그런데 이런 소설이나 에세이를 반복해 읽으니까 너무 힘들고 지겨워요. 82년생 김지영이 국내에서도 그리고 세계적으로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받은 이유는 분명 그 삶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점에서 공감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82년생 김지영 같은 소설을 많이 읽고 싶진 않아요. 특히나 저는 소설속 인물들과 거리두기를 못해서 그런건지 이런 소설 읽는게 너무 화가 나요 ㅠㅠ

잠자냥 2021-06-28 11: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리뷰만 봐도 지치네요, 옮긴이는 뭔 배제된 남성 운운..... 이 책은 보관함에 담아두고 선뜻 사게 되지 않던데 보관함에서도 빼야겠습니다...; 아니 에르노 많이 읽었어;; 굳이 이 책까지 않 읽어도 될 것 같네요;;

다락방 2021-06-28 11:32   좋아요 3 | URL
전 진짜 결혼해서 가사노동하고 독박 육아로 힘들다, 그래도 우리 남편은 다른 남편보다는 좀 낫다.. 이러는 거 그만 읽고 싶어요 ㅠㅠ 너무 힘빠지고 지쳐요 ㅠㅠ 막 속에서 천불이 나요 ㅠㅠㅠ

페넬로페 2021-06-28 1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페이퍼의 글만으로도 이 책을 읽으며 얼마나 지쳤을지 저도 같이 피로감이 느껴져요~~근데 결혼해서 살아보면 뭔가가 딱 양분되지 않는다는게 문제인거죠 ㅠㅠ 그래서 전 인간이 세 끼를 먹는 몸을 리셋시키고 싶어요
어떤 기계(제발 발명해주소서)를 만들어 우리가 다 거기 들어가 바뀌어 나오는 거예요. 아님 알약(제발 만들어주소서)으로 먹는것을 해결하는 방법말고는 집안에서의 노동은 없어지지 않을것 같아요^^

다락방 2021-06-28 12:00   좋아요 3 | URL
네 어차피 딱 5:5는 안되는 것 같아요. 그건 무슨 일에든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것이 여자의 일이다, 라는 것만큼은 이제 버릴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남자들은 절반이 아니라 30프로만 해도 뭔가 좋은 남편 되잖아요. 또 세끼 식사 아니어도 가사노동은 너무 많고요. 빨래며 청소는 어쩌나요..
이 리뷰 마지막 밑줄긋기 보면 남편이 아내에게 ‘일주일에 나흘 도우미 쓰니 너는 특권을 누린다‘라고 말하는데, 그런 거요. 그런 마인드. 원래 여자들이 일주일 다 가사노동 하지만 너는 그보다 덜하니 특권을 누린다고 말하는 바로 그 마인드. 진짜 지구 밖으로 내보내고 싶어요. 어휴..

새파랑 2021-06-28 11: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치는 독서이셨는데 밑줄은 엄청나군요~!! 리뷰만 봐도 책을 읽은느낌이 듭니다~!!

다락방 2021-06-28 12:00   좋아요 4 | URL
네네. 밑줄 긋고 이렇게 적어두면 나중에 피가 되고 살이되는 밑줄긋기!! ㅋㅋㅋㅋㅋ

난티나무 2021-06-28 17: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번역 다시 해달라고 출판사에 편지 쓰십시다. 여성 번역가가 다시 한다면 조금 다른 소설이 되지 않을까요.ㅠㅠ
저는 원서로 사두었습니다. 번역본 사지 말아야 겠어요.ㅠㅠ

다락방 2021-06-28 17:17   좋아요 2 | URL
소설 자체의 번역이 나쁜건 아니고요, 다만 제가 너무 스트레스 받아하는 내용들이라서 ㅠㅠ
제가 현재 비혼이고 이렇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이 소설에 대해 더 스트레스 받는지도 모르겠어요. 등장인물과 거리두기를 해야 되는데, 거기에서 실패하는 바람에 저에겐 지치는 독서가 됐네요. 어휴..

옮긴이의 말은 가끔 왜 있을까 싶어요. 여기서 갑자기 배제된 남자..가 왜 나오는지. -.-

난티나무 2021-06-28 17:24   좋아요 2 | URL
그렇다면 제가 원서를 읽고 번역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언제 읽을지 알 수 없다는 게 함정이네요. 푸핫.
옮긴이의 말에 딴지를 걸어야 겠군요.

다락방 2021-06-28 17:26   좋아요 2 | URL
네, 난티나무 님. 천천히 시간 되실 때 읽으시고 다 읽으시면 리뷰 써주세요! 후훗.
이 책 저 말고는 다른 리뷰어들은 별 다섯 준 책이긴 합니다.....

공쟝쟝 2021-06-28 19: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옮긴이 밥숟가락으로 정수리샷

다락방 2021-06-29 08:4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느 날 로맨스 판타지를 읽기 시작했다
안지나 지음 / 이음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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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엘리자베스 샌키' 감독의 다큐멘터리 《로맨틱 코메디 Romantic Comedy 2019》를 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로맨스 영화를 보며 낭만적 사랑을 꿈꾸었던 여자들이 이제는 거기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잘못되었는지를 짚어내고 말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이를테면 능력있는 전문직 여성이 영화에 등장할라치면 어김없이 진흙탕에 넘어진다거나 엉뚱한 실수를 하는 귀여운 면을 가지고 있고, 그녀들은 반드시 사랑을 쟁취한다는 것. 혹은 지금 현실의 나와 비교했을 때 나는 뚱뚱하지 않은데 나랑 비슷한 몸무게의 여자주인공은 영화속에서 비만녀로 등장한다는 것들. 게다가 그 억지 설정들은 어떤가. 남자들은 집착하고 또 집착하고 싫다는데도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그러다보면 여주인공이 그 진실한 사랑에 감명받아 그 스토커랑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고 이 다큐멘터리의 끝은 어떻게 될까 궁금해하던 차에, '안지나'의 책 《어느 날 로맨스 판타지를 읽기 시작했다》를 알게 됐다. 저자가 비교문학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고 게다가 로맨스 판타지에 대한 책이라니, 이것은 내가 지금 시청중인 다큐멘터리와 비슷한 성질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두 매체를 함께 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구매하고 읽었는데 일단 얇은 만큼 금세 읽을 수 있었지만, 이 책이 내가 생각한 그런 책은 아니었다.


나는 웹소설을 전혀 읽지 않는다. 웹소설의 세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사두고 안읽은 책들을 보며 한숨 쉬기도 바쁘다. 그래서 로맨스 판타지란 장르 자체를 알지 못했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하면서 제목에서 '로맨스 판타지'를 보았을 때는, 로맨스가 실제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나 마찬가지이므로 그런 용어를 쓴 거라고 생각했다. 쉽게 말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속 그레이 같은 존재가 내게 다가와 나에게 연애하자고 할 가능성은? 이건 가능성이 5프로도 0.5프로도 아니라 정말이지 제로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잖은가. 그런 의미에서 로맨스는 그야말로 판타지다, 라는 뉘앙스로 읽었던 거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는 참, 순진하기도 하지. 내 생각은 틀렸다. 이래서 사람이 고지식하면 안돼..



로맨스 판타지는 웹소설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장르였다. 게다가 저자는 그 웹소설을 읽으면서 그 안에 담긴 페미니즘과 여성연대를 캐치하고 현재 웹소설의 흐름을 파악하며 그걸 우리에게 들려주는거다. 주 독자가 10대-20대의 여성들인만큼 쓰는 주체도 그러한데, 그들이 그려내는 웹소설에서의 로맨스 판타지는 로맨스 판타지라는 그 틀 안에서 로맨스를 부정하고 있다고 안지나는 말한다. 그러니까 그들이 현재에서 과거의 어느 때로 간다거나 지금의 나로서는 죽었지만 다른 시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남으로써 다른 인생을 산다는건데, 그렇게 다르게 살아보는 생에서는 기존에 살았던것과 완전히 다른 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나아갈 수 있다는 거다. 분명 남자주인공이 등장하고 그 남자와 사랑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은 그 소설 안에서 여성이 자립하고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일뿐. 기존의 로맨스라는 장르가 남자와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며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웹소설속 로맨스 판타지 안의 로맨스는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데 필요한(사실 그다지 썩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수단일 뿐이라는 거다. 이것이 로맨스 판타지의 장르이니까 일단 이 책 속 주인공이 되어, 이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남자를 만나고 사랑을 하긴 할게, 그렇지만 이 나라가 잘 되어가는 것, 불행한 아이를 학대로부터 지켜내는 것, 곤경에 처한 여자를 돕는 것들이 내겐 더 중요해, 그걸 위해 사는 거야, 하는 걸 보여준달까. 내가 읽고 있지 않은 웹소설 속 로맨스 판타지 안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현재에서 이동하는 주인공들이 나오는만큼 가부장제가 어떤 식으로 여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고, 현재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술(혹은 능력)로 그 시대에 맞게 개혁을 이끌어낸다. 그러니까 여왕의 코르셋을 벗겨주고 바지를 입힌달까!



내가 기대한 책은 아니었지만 전혀 알지 못하던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읽노라니 재미있었다. 읽다보니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작품들도 여럿 되는 모양인데, 사람들은 각자가 아는 한도 내에서 각자가 아는 방식으로 무언가 읽고 쓰고 있구나 알게 되니 그 점 또한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젊은 여성들이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들의 삶이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 과거의 어느 때에든 여자들의 복장이 불편했을 거라는 것, 우리가 아는 백설공주에서 어린 백설공주가 학대를 당했었다는 것들을 인지하고 그것을 지금이라도 새로운 이야기로 바꿔보고자 하는 것들은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을 읽고 비교문학을 가르치는 누군가는 이렇게 책을 써냈고 여기의 나는 읽는다.



이렇게나 많은 여성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하는데 안티페미인 젊은 남성이 당대표가 되었다며 온갖 신문에 등장하고 또 지지받는 걸 보노라니 역시 가장 중요한 건 힘인가, 권력인가.. 하는 생각에 좀 암담하다. 뭔가 기운 빠지지만 기운 빠진다고 넋 놓고 있으면 안되겠지. 우리들은 가던 길을 계속해서 가자.




신데렐라는 가부장의 보호를 잃고 가정 내에서 보호자에게 학대를 받는 상황이었다. 하룻밤 춤을 함께 췄을 뿐인 왕자가 나타나 그녀에게 공개적으로 구혼했을 때, 신데렐라는 과연 그 구혼을 거절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신데렐라는 신데렐라가 왕자를 어떻게생각하는지 묘사하지 않는다. 그녀가 가진 조건과 입장에서 볼 때 왕자의 구혼을 거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그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영리하게도 『신데렐라는 성대한 결혼식으로 끝나며 신데렐라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신데렐라는 무엇을 기준으로 그녀의 행복을 말하고 있는가? - P45

『신데렐라』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라고는 젊고 아름다운 신데렐라가 멋진 왕자와 만나 결혼했다는 사실뿐인데 말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대중문화가 암묵적으로 젊고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조건 하에서 결혼을 통한 여성의 사회적 계급 이동을 인정하고 때로 열광하며 소비하지만, 결혼 이후의 삶에는 무관심한 것과 비슷하다. 일단 여성이스스로 결혼을 선택한 다음에 이어지는 부정적인 이야기는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결혼을 선택한 것만으로가정 폭력이나 학대, 부당한 대우, 정신적인 괴롭힘을 받는 것에까지 동의했다는 듯이. - P46

가부장의 보호를 잃고 보호자에게 학대받던 신데렐라가 과연 그 신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왕자와의 결혼역시 위험한 모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 안다고해도 그녀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들이잘 알고 있는, 하지만 좀처럼 크게 이야기하지는 않는 어떤 진실을 이야기한다. 위태로운 입장의 여성이 오직 불행한 가정에서 탈출하기 위해 선택하는 결혼은 도박에 가까운 모험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 결혼 자체가 그렇다. - P46

이제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아무도 신데렐라의 결혼식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듯이, 남성과의 낭만적 사랑은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겨울왕국)에서 안나와 한스의 서사가 보여주듯이, 이제 아이들조차도 남녀 간의 낭만적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 믿지않는다. 아리스티아가 회귀 후 황후가 아닌 자신의 삶을개척하려 했듯이, 나비에가 하인리에게 너무 의존하지 않으려 자신의 마음을 단속하려 했듯이, 이제 로맨스 판타지의 작가와 독자 모두 그 진실을 알고 있다. 황제 옆의 빛나는 듯이 보이는 자리는 기실 누가 앉아도 상관없으며,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공허한 자리라는 것을. - P67

21세기 한국에서도 명절날 모인 친척들이 어린아이에게 애교를 요구하거나 대중매체, 특히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이돌에게 애교를 청하는 것은 흔한 풍경이다. 말하자면 자신들에게 귀엽게 보이려는 태도를 의식적으로 취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웃는 낯으로 태연하게 그런요구를 하고 훈훈한 웃음이 터지는 단란한 풍경이 가끔우 어색하게 보인다.
최근의 ‘애교는 약자의 언어’라는 지적은 그래서 수긍할 만하다. 어른은 아이에게 애교를 부리지 않는다. 예능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아이돌에게 애교를 부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때때로 로맨스 판타지에서 애교는 딸의 생존전략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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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6-15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하, 요즘 웹소설은 그렇군요. 이 글 때문에 웹소설에 대한 편견이 조금 깨졌습니다. 로맨스 판타지라는 말에 저도 다부장님처럼 해석했다는...;; ㅎㅎㅎㅎ

다락방 2021-06-15 16:10   좋아요 2 | URL
저도 웹소설을 읽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게 되지만 편견이 좀 깨지긴 했어요. 로맨스 판타지라는 것이 하나의 장르일 줄은 몰랐네요. 전 이 세상에서 로맨스는 그저 판타지인줄 알았죠.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독서괭 2021-06-15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의 길티플레져가 로판 읽기 입니다 ㅋㅋ 절대 결제는 하지 않고 1일마다 무료 이런 걸로 찔끔찔끔 보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뺏기지는 않습니다만.. 요즘은 그것도 식상해져서 거의 안 보고 있네요. 이번에 팟캐스트 책읽아웃, 김하나의 측면돌파에 <멋있으면 다 언니>를 쓴 황선우작가가 출연했는데, 카카오페이지에서 이 책을 기획한 이유가 로판에서는 여성들이 권력을 쥐고 활약하는데 현실로 돌아오면 그게 아니어서 허무하게 느껴지니,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멋진 언니들을 보여주자는 거였다는(취지의) 얘기를 했어요. 이 얘기를 듣고 나서 바로 저 책 주문했습니다 ㅋㅋ 소개해주신 책도 흥미롭네요. 읽어보고 싶어요.

다락방 2021-06-15 16:34   좋아요 2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나니까 현실이 너무 잔인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결국 여자가 과정과 결과를 바꿔버리는 것은 로맨스 판타지 안에서나 가능한가 싶고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읽고 쓰는 그 많은 여자들이 있는데, 그런 여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이 깨달은 바를 책으로 써주기도 하는데, 책에서 눈을 딱 들면(그러니까 웹소설로부터 빠져나오면) 이준석이 당대표 되는 현실이라니... 이렇게 되어버려서. 세상 뭔가.. 싶더라고요. 하하하하하. 이준석이 당대표된게 왜이렇게 힘빠지는지요 ㅠㅠ

꼬마요정 2021-06-15 16: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 나비에 황후 반가워요 ㅎㅎ <재혼황후> 좀 재밌게 봤어요.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였네요. 기존의 질서 속에서 순종하던 인물이 죽음이나 회귀를 통해 정말 다시 살아가는데 자신을 구하거나 가족을 구하거나 나라를 구하거나 하면서 다가오는 사랑을 이루더라구요. 애초에 사랑이 전부였다면 두 번째 삶은 사랑이 어쩌다보니 오더라.. 근데 놓치지는 않겠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저도 이 책 읽고 싶어요!!!

지역감정, 세대갈등도 안 통하니까 남녀갈등으로 가자는 거겠죠.. 갈등을 넘으려면 갈등이 최고조에 달해야 하는 건가봐요ㅜㅜ

다락방 2021-06-15 17:36   좋아요 3 | URL
이 책에서 재혼황후 얘기하더라고요. 그외 몇가지 웹소설 가져와서 로판 흐름과 그 안의 메세지들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어요. 저는 웹소설을 모르지만 재혼황후 읽어본 꼬마요정 님이라면 저보다 더 이 책을 재미있고 또 의미있게 읽으실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 생에서 죽었지만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 자신을 구하고 나라를 구하고 다른 약한 존재를 구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더라고요. 사랑은 뒷전으로 밀린 것 같았어요.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를 입었지만 결국은 여성들이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고 안지나는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꼬마요정 님, 이 나라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ㅠㅠ

잠자냥 2021-06-15 16: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준석 사진 도배되는 현실.... 너무 밥맛 떨어지는 현실... 다요트가 절로 될 듯. ㅠㅠ
근데 다부장님이 며칠 전 트이타에 이준석 사진 올려서(물론 욕하려고지만) 순간 팔로우 끊고 싶어졌.......ㅋㅋㅋㅋㅋ
다신 그러지마요!!!!!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6-15 17:34   좋아요 4 | URL
그건 제가 진짜 잘못했습니다. 저도 뉘우치고 있습니다. 제가 순간 욱하는 바람에 생각이 짧았어요. 여러분들께 큰 폐를 끼치고 말았습니다. 어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호프만의 허기
레온 드 빈터 지음, 지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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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만은 1968년 9월 6일 이후로 줄곧 불면증에 시달려왔다. 그날 이후 그는 자신의 죄수가 되었다. -p.48



59세의 펠릭스 호프만 대사는 네덜란드에서 체코로 발령받았다. 젊은시절 서기관으로 일을 시작했던 호프만은 타고난 식탐이 있긴 했지만 사랑하는 '마리안'과 결혼하고 그토록 염원하던 딸들을 한꺼번에 둘이나 얻음으로써 그 식탐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는 행복했고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딸중에 한 명이 어릴 때 백혈병을 앓고 사망하는 일이 일어나고 그는 그 이후로 불면증에 시달린다. 대사를 환영한다는 연회가 열린 자리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먹고 마시고 혼자 있을 때도 밤이 새도록 먹는다. 그는 잠을 자기 위한 노력을 하는 대신 날이 밝아오는 걸 보면서 먹고 그렇게 한참을 먹다가는 위에 밀어넣었던 음식들을 손가락을 넣어 게워내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신의 식탐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1968년 딸 하나를 잃어 그가 불행을 맞이하게 됐다면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 남은 딸은 성인이 되어 약물중독으로 죽었다. 그는 진작 승진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대사가 되어 발령받았고 그러나 사랑했던 딸 둘은 자기보다 일찍 죽었으며, 아내와는 그저 한 집에 살 뿐 더이상 다정하지도 않다. 다만 외교관들을 상대로 한 부부 모임에서 정확히 그 역할들만을 해낼 뿐. 그는 허기졌고, 그래서 먹는다. 의사가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다며 그만 먹으라고 말리는데도, 그는 콜레수테롤이 정말 건강에 안좋은건지 믿지 못하겠다며 자기 고집대로 한다. 사실 그는 딱히 살 의지도 없고 의욕도 없어 보인다. 그런 그에게 친한 친구이자 직장 동료는 말할까 말까 망설였다며, 최근에 극장에 가 본 포르노 영화에 네 죽은딸이 배우로 나왔다고 말해준다. 이에 호프만은 놀라서 그 영화를 보고, 그리고 은퇴후 자신의 비상금으로 마련해두었던 돈을 모두 쏟아부어 그 필름의 원본과 복사본을 사들인다. 내 딸이 사람들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는 이 필름을 사람들이 보게할 수 없다.



이렇게 삶에 있어 뭐하나 재미도 행복도 없는 것 같았던 호프만이 스피노자를 읽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에서 체코에 마련해준 관저에는 그간 머물렀던 대사들이 놓고 간 물건들이 쌓여있고, 그 다락방에서 우연히 스피노자의 『지성의 개선 및 지성을 사물의 참된 인식으로 인도하는 방법에 대한 논고』를 발견하게 된거다.

과거 한 때 철학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인생에 대한 고민도 했던 그인만큼 비트겐슈타인도 읽었고 버트런트 러셀도 읽었으며 한나 아렌트도 읽었지만 또한 시오랑과 레비나스의 책을 읽어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스피노자는 감히 가까이해볼 생각이 없는 호프만이었다. 그런 호프만이 스피노자를 읽기 시작한다. 캐비아를 먹으면서, 샴페인을 마시면서, 거위간을 먹으면서, 와인을 마시면서, 햄을 먹으면서 스피노자를 읽는다. 구절 하나하나 읽으면서 그는 자신의 식대로 해석하고 또 자신이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예를 든다. 이건 이런 뜻이 아닐까, 이건 이렇게 예를 들면 될것이다, 하면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진실과 지식과 지복에 대해서 알고자 하고 깨닫고자 한다. 그리고 계속 읽고자 한다. 그가 스피노자를 읽는 것은 그러므로 먹는 중에도 계속되고 그가 배설하는 중에도 계속 된다. 딸의 과거에 대해 알고 고통스러운 가운데에도 계속되고 그가 문제에 휩싸여 도망치는 와중에도 그는 스피노자를 들고 간다. 심지어 그의 죽음을 늦춰야 하는 이유도 스피노자에 있다. 끝까지 읽고 싶다는 그 열망에 그에게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심한 허기를 가진 호프만의 스피노자 책 읽기가 전부인 책이 아니다. 호프만 보다 먼저 등장하는 엄청난 비만인-세계에서 가장 비만한 백 명 가운데 한 명- '프레디 맨시니'라는 미국인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프레디 맨시니는 다이어트에 도움이 될거라며 아내의 설득에 넘어가 유럽여행을 가게 되고 그렇게 체코에 도착했다. 때는 1989년. 저녁 식사때 패키지 여행객들의 스테이크까지 다 먹어치운 그였지만 새벽 두시에 허기가 져서 참을 수가 없다. 그러나 프라하의 호텔은 그 밤에 룸서비스가 불가능하고 그가 밖으로 밥 먹으러 나가겠다는데 호텔 보안요원들이 제지한다. 이 새벽에 나간다고? 안돼. 너 불량한 자들에게 잡혀가. 그러나 그는 기어코 바깥으로 나갔고, 택시를 잡아타고 이 새벽에 영업하는 식당을 향해 가려다가 가진 돈을 다 털리고, 그런 와중에 납치사건을 목격하게 되는 거다. 그런데 그 납치된 자가 미국 정보부요원이었고 이에 그는 증인이 되어 '안가'로 불려가고 그런데 그 안가에서는 그를 극진히 대접하며 세상 최고 맛있는 칠면조 요리를 대접하고 그래서 그는 거기에서 집에 가기 싫어지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면 이 책으로 '레온 드 빈터'는 밀란 쿤데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있는데, 책을 읽기 전의 나는 그 표현을 보고 '이런거 진짜 별로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장 읽지도 않고 오 맞네 맞네, 밀란 쿤데라 완전 딱이네, 하게 되었는데, 특히나 이 책의 끝부분 프레디 맨시니의 삶을 보노라면 '밀란 쿤데라'의 《농담》도 생각나는 것이다. 이중 스파이와 시대적 상황에 대한 갈등과 한 인간의 깊은 내면에 대해 드러내면서 그런데 스피노자까지 배치하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겉으로 보면 프레디 맨시니도 그리고 호프만도 그저 식탐에 차 건강을 챙길줄도 모르는 비만인이다. 그런데 프레디는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걸 먹는 걸로 채우고 있으며, 호프만 역시도 지독한 불면증과 고통을 갖고 있었다. 호프만은 자신의 딸들이 이른 나이에 둘다 사망한 것에 대해 '내가 벌을 받은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일찍이 나치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나를 쉬게 해줄 사람들은 내 부모님 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일에도 딱히 열심이지 않고 자기 몸 하나 챙길줄 모르는 호프만이지만 그 내면과 정신이 누구보다 치열했다. 내가 이러는 것은 이 나이에 해서는 안될짓이겠지 너무 수치스러워, 하면서 삶의 지복을 찾고자 하고 진실을 찾고자하는 그라는 인간을, 겉에서 호프만 대사로 만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들여다볼 수 있을까. 왜 어린 시절 부모의 상실감을 겪었던 그에게 청년시절 찾아왔던 행복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으스러졌을까. 그는 자꾸만 자꾸만 죽어갔던 어린 딸에 대해 생각하고 상황을 망치는줄 알면서도 연회에서 과음하다 쓰러진다. 어쩌면 이것이 상황을 망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지옥불에 뛰어들기도 한다. '어떤 연줄이 있어서 운좋게 저 자리에 있는 것 같은 저 뚱뚱한 인간' 인 호프만이 가지고 있는 그 자신만의 역사가 무엇인지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타인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알지 못하는 채로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과연 온당할까.



현재를 살고 있는 호프만이지만 늘 불행한 과거와 함께 가고 있었다. 불행환 과거는 당연하게도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미래까지 손을 뻗는다.



파괴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을 파괴하는 사람은 그 방법도 다양하지만 대상을 달리하기도 한다. 나를 파괴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파괴하고 다른 사람을 파괴하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을 파괴하기도 한다. 프레디가 이혼을 통보한 아내를 죽여버리고 싶어하는 그 욕망과 원망은 자신을 망가뜨리면서 살아온 그가 그 대상을 달리한 게 아닐까.



아주 재미있고 똑똑한 소설이다. 밀란 쿤데라를 좋아하는 이들과 밀란 쿤데라를 모르는 이들, 스피노자를 좋아하는 이들과 스피노자가 대체 뭔데 하는 이들 모두 읽으면 좋을 책이다.



무엇보다 호프만이 스피노자의 『지성의 개선 및 지성을 사물의 참된 인식으로 인도하는 방법에 대한 논고』를 완독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 책 안에 그 답이 있다.






그는 허기를 채우기 위한 여정에서 부딪히는 모든 난관을 무조건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다. 그는 약자였다. 위장의 노예였다. - P21

모에 샹동 맛도 그리 나쁘지 않으나 호프만은 테탱제를 선호했다. 동 페리뇽이 최고라고들 하지만 호프만 생각으로는 값만 터무니없이 비싸며, 돈푼이나 있고 감식력은 전무한 졸부들을 위한 샴페인이었다. - P39

스피노자도 직장을 가진 한 가족의 가장이었고, 다른 사람들처럼 부를 추구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의혹을 품기 시작했고, 결국 양자택일하는 도박을 감행하기로 했다. 즉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포기하고 지복을 찾아 나설 수도 있었고 아니면 소유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 수도 있었다. - P49

스피노자는 지성의 개선과 정화에 이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무엇보다 먼저 대중이 이해할 수준에서 말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다. 이것은 학교 교사나 이미 개선된 지성을 갖춘 교양인에게 해당되는 규범이었다. 그래서 호프만 같은 초보자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이었다.
두 번째 규범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바로 그만큼만 쾌락을 즐길 것‘, 세 번째 규범은 ‘반드시 생계를 꾸리고 건강을 유지하며, 목적에 저해되지 않는다면 돈이나 다른 물질은 관습에 맞춰 살만큼만 소유하도록 할 것‘이었다. - P71

"프레디, 당신은 그냥 뚱뚱한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은 우리 미합중국에서, 말하자면 세계에서 가장 비만한 백 명 가운데에 들 겁니다. 우리 비서가 요즘 당신들이 애독하는 잡지의 편집부에 문의해봤는데 백 명의 가장 비만한 사람들 가운데 기혼자는 겨우 네 명에 지나지 않고 또 그 네 명 중 셋은 본인 못지않게 뚱뚱한 상대와 결혼해 누구랄 것 없이 부부가 모두 생활의 대부분을 끝없이 먹기만 하며 지낸다고들 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랑으로 결혼 생활을 유지한 사례는 단 한 명뿐이었는데, 그 유일무이한 실례의 장본인이 다름 아닌 바로 프레디 당신이었다는 겁니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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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6-08 1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전 이 책 미국인 맨시니 나오고, 호프만 나온 부분까지 읽다가 지금 다시 다른 책 읽고 있는데, 걍 쭉 읽어야겠어요. 호프만 딸한테 그런 일이 있었구나.... 중얼중얼.

다부장님은 스피노자 안 읽으세요? 이 책 보니 읽으실 거 같은데. ㅋㅋㅋㅋ

다락방 2021-06-08 11:35   좋아요 3 | URL
잠자냥 님.. 저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계시네요?
마침 스피노자 입문서 친구가 추천해줬던 거 있어서 사려고 했는데 절판이에요.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중고도 판매자 중고밖에 없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피노자 읽으면서 호프만의 허기 같이 읽으면 좋을것 같아요. 저는 호프만의 허기를 재독할 예정입니다. 후훗.

Falstaff 2021-06-08 1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흥미 돋습니다. 일단 보관.
그럼 이만.

다락방 2021-06-08 11:33   좋아요 3 | URL
제가 이 책 읽으면서 폴스타프 님과 잠자냥 님 두 분을 생각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 두 분은 좋아할 것이다!! 폴스타프님은 이 책 읽으시면 엄청 재미난 리뷰 적어주실 것 같아요!

syo 2021-06-08 12: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피노자의 동물 우화>가 절판인 관계로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가 차선입니다. 심지어 얘는 더 쉬워!
그렇지만 가능하면 먼저 대출을 권합니다.....

다락방 2021-06-08 14:56   좋아요 1 | URL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메모메모.
오케바리. 땡큐!

그레이스 2021-06-08 13: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을것 같네요
똑똑한 소설,
일단 밀란 쿤데라 좋아하고, 스피노자에 관심있으므로 읽어봐야겠네요.

그레이스 2021-06-08 14:36   좋아요 2 | URL
빌려왔죠
제발 읽고 반납해야 하는데...^^;;

다락방 2021-06-08 14:56   좋아요 2 | URL
아니 댓글 쓰고 한시간만에 가서 빌려오셨네요? 행동력 천재십니다! ㅋㅋ

그레이스 2021-06-08 15:06   좋아요 2 | URL
마침 반납할 책이 있었어요^^
도서관이 집앞이라...

새파랑 2021-06-08 14: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쿤데라라고 하니까 급 읽고 싶어지네요 ㅎㅎ 스피노자는...잘 모르지만 ^^

다락방 2021-06-08 14:57   좋아요 3 | URL
새파랑 님 정말 재밌게 잘 읽은 소설입니다. 크- 추천추천합니다!
저는 스피노자도 모르지만 이 책 펼치기 전에는 스피노자 나올 줄도 몰랐답니다? ㅋㅋ

북다이제스터 2021-06-08 19: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스피노자를 읽었다. 에서 ‘그리고’가 긴 여운으로 맘에 와 닿습니다.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다락방 2021-06-08 20:06   좋아요 2 | URL
여운으로 마음에 와 닿았다니 좋네요. 잘 읽어주셔서 기쁩니다. :)

붕붕툐툐 2021-06-08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결론은 모두 읽어도 좋다인거죠? 다부장님의 추천이라면 기꺼이~😉

다락방 2021-06-09 08:49   좋아요 2 | URL
네네 모두 읽어야 한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붕붕툐툐님은 항상 캐치가 빠르세요. 감 천재 이십니다! ㅋㅋ

새파랑 2021-07-07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옆에 있는 서재의 달인 메달이 장난 아니네요👍👍 당선 축하드려요 😄

다락방 2021-07-08 10:13   좋아요 2 | URL
아이쿠, 감사합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1-07-07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축하합니다

다락방 2021-07-08 10:13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초딩 2021-07-07 23: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관왕 축하드려요~

다락방 2021-07-08 10:13   좋아요 3 | URL
아이참.. 감사합니다!!
 
허쉬
존 하트 지음, 권도희 옮김 / 구픽 / 2021년 4월
평점 :
절판


어쩌다보니 '존 하트'의 책은 절판된 한 권의 책을 제외하고는 번역된 걸 다 읽었다.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존 하트를 대지는 않지만 존 하트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 하고 반가워하며 냉큼 사게 된다. 이번 책도 그랬다. 출간 소식을 알고는 오오 존하트~ 이러면서 잽싸게 구입했었다.


당연히 그간 읽은 존 하트 책의 내용들이 다 기억나진 않지만, 존 하트에겐 뭔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신간 소식이 반가운 작가이니 뭔가 있었던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당황한다. 존 하트, 이런 작가였어?


'허쉬 아버'라는 야생의 땅에서 조니는 혼자 살고 있다. 그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곳이고 숲과 늪으로 펼쳐진 곳이다.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은 뭔가 알 수 없는 시선과 힘을 느끼며 그곳에서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는 죽음을 맞게 된다. 살아 돌아온다 해도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되고. 조니의 가족과 친구는 조니가 그곳에서 나와 시내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바라지만, 십년 전 여동생과 아버지를 잃은 조니는 이 야생의 장소에서 오두막을 짓고 사는게 편안하다. 이 사회화가 부족한 조니는 이 늪에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용의자로 의심받게 되고 조니 역시도 이 곳에서 사람을 죽이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한다.


영문을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시체를 부검해보면 사람이 한 짓으로는 보이지 않는 일들이 허쉬에서 일어난다. 신비와 마법이라는 단어가 책에 등장한다. 나는 이 '신비'와 '마법'앞에 당황하는 것이다.


'샤론 볼턴'도 신비한 일에 대한 소설을 쓴다. 인간의 일같지 않은 사건과 일. 그러나 샤론 볼턴의 소설을 읽노라면 그런 신비한 일 앞에, 그러나 샤론 볼턴이 다 설명해줄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탐욕으로 벌어진 일이며 인간이 벌인 일이라는 것을 샤론 볼턴은 나에게 말해줄 것이다, 라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신비한 일을 존 하트가 써버리니 존 하트가 과연 이 일을 설명해줄 것인가 의심하게 되고, 도대체 이걸 어떻게 풀어나가려는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존 하트는 신비한 일을 신비한 힘으로 남겨둔다. 나는 이 지점에서 존 하트의 허쉬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이 신비한 힘은 분명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벌이는 차별과, 여성에 대한 혐오를, 그것이 가져오는 불행한 결과들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끝까지 여성이 여성에게만 전할 수 있는 이 힘으로 여성들은 다른 곳의 위기에 놓인 혹은 불행한 여성들을 돌볼 것이라고도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게 내 마음을 울리지도 건드리지도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비한 힘이고, 그 신비한 힘이 정말 그렇게 작용한다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이 그것이 신비한 힘인걸, 이게 말이 되는가, 하게 되어버리는 거다.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인디아나 존스를 보듯 재미있게 볼 수 있겠지만, 사실 나라는 인간의 개인적 취향은 신비로운 세상,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결국은 인간이 사는 이야기, 인간이 살아가는 이야기, 인간이 벌인 문제를 인간이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신비한 힘 혹은 종교적인 힘이라는 것은 믿는 자에게 그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러나 이 책에 등장하는 이런 식의 힘이라면 그저 내게 먼 곳의, 내 손에 닿지 않는 판타지처럼 느껴질 뿐이다. 존 하트, 이런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었어? 전작과 지금 이 작품 사이의 시간동안 존 하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내가 그동안 알아온 존 하트와 다른걸까. 물론 이것도 존 하트이고 저것도 존 하트이며 앞으로 써낼 작품도 존 하트의 작품이겠지만, 다음에 신간이 나온다면 오 존 하트! 하면서 반갑게 사기 전에 잠깐 망설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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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1-05-31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니라는 이름에 혹시? 했더니 책소개 보니까 라스트 차일드 10년 후라고 되어있네요. 저도 존 하트 무척 좋아해요. (그러나 신간소식 몰랐네요ㅎㅎ) <라스트 차일드>랑 <구원의 길> 참 좋았는데. 이전의 작품들과는 좀 다른 모양이에요 그래도 읽어볼래요^^

다락방 2021-05-31 14:45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문나잇 님! 존 하트라 산 것도 있지만 라스트 차일드 후편이라 얼른 읽고 싶었어요. 저도 라스트 차일드, 구원의 길 다 좋아했습니다. 으흐흐흐. 이건 좀 기존과 다르고 제겐 별로였는데, 문나잇 님 얼른 읽고 감상 적어주세요! 다른 분들 리뷰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