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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공부의 즐거움 - 고전에서 누리는 행복한 소요유
이상국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처를 따라서 북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새벽,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몰려왔다. 내 여정의 첫발걸음을 먼저 맞은 것은 지리산 자락의 볼을 저미는 차가운 칼바람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어둠 속의 혹한은 시린 손끝을 타고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눈에 덮힌 숲을 바라보다가 문득 추사선생의 '세한도'를 떠올렸다. 이 정도의 추위 속에서 마음마저 얼어붙어서야 선비의 체면이 영... 그 혹한 난세를 이겨갔던 추사 선생의 곧고 강인한 정신력이 가슴 속에서 뜨거운 정신을 살아나게 만든다. 이 땅에 살다 갔던 수많은 옛 사람들, 그들의 그림과 글 그리고 삶 속에서 추구했던 정신적인 경지는 무엇이었을까? 이 여행과 더불어 내가 챙겨왔던 두 권의 책 중 하나가 바로 이 책이었다.
우리나라와 동양고전의 문턱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던 내게 이 책은 앞뒤가리지 않고 성큼 한 걸음을 내딛어 보라고 권한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보다 복잡해지는 삶의 모습과 온갖 물질과 쾌락적 삶의 향유에 촛점이 맞춰진 삶의 상품화에 대한 선비적인 꾸짖음이다. 비록 수다스럽고 거칠지는 않지만 꼿꼿이 세운 가슴으로 상대방의 눈을 뚫을 듯이 쳐다보면서 꼼짝하지 못할 비수의 말을 묵묵하게 뱉어내고 있는 삶의 스승이자 친구의 충고이다.
중국 어느 시대인가 왕은 그 나라의 화공들을 불러 모아 과제 하나를 던져 주었다. '꿀먹은 당나귀'를 그리라는 명이었다. 방을 본 화공들은 어리둥절했다. "과연 꿀의 향기를 어떻게 흰 종이에 담아낼 것인가?"가 그들 문제의 핵심이었다. 이윽고 화공들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림들은 하나둘씩 완성되었다. 신하는 장원에 뽑힌 그림을 빼어들었다. 그림을 본 화공들은 무릎을 쳤다. 그 그림엔 당나귀의 그림이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당나귀의 꼬리만 치렁거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 뒤로 많은 벌떼가 꼬리를 쫓고 있는 그림이었다. 이렇듯 옛 그림에는 있는 현실을 포착하되 보이지 않는 것을 담아내는 교묘한 멋이 있었고, 그 기술은 단지 기교가 아니라 나아가 그 시대의 정신을 표현하기도 했고, 난세의 혹한을 이기려는 꿋꿋한 정신과 삶의 지혜를 담아내기도 했다. 따라서 한 폭의 그림이라할지라도 그 속에는 한 시대와 그들의 삶과 정신이 모두 담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 그 난세를 살다간 선비들의 삶이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새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사상과 정신을 체계화했으며 그 속에서 구제도와 모순된 사회구조를 비판하고 개혁하려했다. 또한 추사는 난기류속에 우왕좌왕하는 지식인들에게 확고한 지적 가치관과 기준을 재확정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연암 선생도 당시 선배들의 문란했던 관념적이고 소모적인 이기논쟁에 의한 당쟁의 폐해를 비판하고 실질적인 탐구와 실천을 위한 지행합일의 학문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우리의 옛 지식인들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명에 소홀히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내적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정신적 성숙을 일구어냈다.
接一物則止於所接
應一事則止於所應
無間以他也則心能一
及事過物去而便收斂
湛然當如明鑑之空也
어떤 대상에 닿았거든 그 닿은 자리에서 더 나아가지 말고 멈추라
어떤 사태를 만났거든 그 만난 자리에서 더 나아가지 말고 멈추라
다른 무엇이 끼어들 사이가 없도록 해놓으면 마음은 한결같을 수 있다
사태는 끝나고 대상은 지나간다. 지나고 나면 쉽게 마음을 모을 수 있다
마치 깨끗한 거울 속이 텅 비어 있는 것같이 맑아지리라
이러한 내적 수양을 통해 대학에서 말하는 격물치지에 닿았던 화담 선생은 자신의 인격수양의 결과 황진이의 육탄공격에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으로서 느끼는 섬세하고도 미묘한 감정들을 벗들과 교우하기도 하는데 추사선생이 제주도에서 유배시절 벗처럼 지냈던 수선화를 보며 지은 시가 그러하다.
一點冬心朶朶圓
品於幽澹冷雋邊
梅高猶未離庭砌
淸水眞看解脫仙
한 점의 겨울 마음 송이송이 둥글다
성품은 그윽하고 담박하여 차갑고 우뚝 솟았네
매화가 높다지만 뜨락을 못 떠났는데
맑은 물 해탈한 신선을 진실로 보노라
자신이 한양에서 관직시절 흔히 보았던 매화보다 관직에서 밀려나 제주의 이름없는 곳에서 추위를 홀로 견디며 피어있는 수선화를 보았을 때 그는 바로 몰입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차가운 눈발을 견디며 홀로 청청했던 소나무와 같은 심정이지 않았을까? 그를 몰라 주는 세상과 몰라 주는 세상에서 한 걸음 초연해진 그래서 편해진 마음 속에 이미 신선의 경지가 있지 않은가?
저자 이상국은 삶을 통한 희노애락의 예술적 승화를 넘어서 이젠 인류의 정신적 유산의 최고봉이었던 경전에까지 달음박질쳐서 간다. 도덕경, 장자, 논어, 맹자, 금강경의 깊은 지혜를 소요유하고픈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역시 경의 말은 이미 말을 떠난 자리이므로 말로써 응대하는 것으로는 뭔가 석연치 않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을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곤과 붕'을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그것은 '여시아문'에서와 같이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가 된다. 듣는 주체의 의식 수준으로밖에 담은 수 없는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경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해야 하는가? '아문'에서 아가 없어야 한다. 여시에서 계합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주의 진리가 뱉는 소리가 그대로 들리게 된다. 어쨌거나 옛 사람들의 정신적 소요유를 넘어 인류의 가장 고귀한 정신적 유산까지 소요유하려는 그의 지적 용기와 모험정신만큼은 배울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