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중용 - 인문학연구소 고전총서, 동양사상 1
김학주 옮김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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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던 중 불교TV에서 종범스님의 설법을 듣게 되었다. 스님의 말씀 중에 반조라는 말이 가슴속으로 쏙 들어왔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볼 때 마음이 외부에 가서 달라붙지 않고 자신의 마음 속에서 받아들이는 바를 지켜본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감정과 생각이 생기고 사라지는 그 자리를 지켜보라는 말로써 받아들였다. 두번째로 들게 되는 대학과 중용은 나에게 반조하는 공부를 가리키고 있다.

  저자는 학자이기 때문에 마음의 경계로서 써내려간 글들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듯하였지만 그래도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해석을 충실하게 해놓았기 때문에 읽어내는 데 큰 거부감은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음에 다시 대학을 읽을 때에는 마음공부가 된 사람의 글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이 책에 담긴 글들이 이미 격물치지가 무엇인지 도가 무엇인지 성의와 지선이 무엇인지를 마음으로 점검한 이가 적어낸 글이기 때문에 단순히 학문적으로만 풀어서는 그 의미를 마음으로 담아내기가 쉽지 않고 따라서 죽은 글이 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격물치지인가? 치지격물인가? 이를 놓고 주자학과 양명학의 논쟁이 떠오른다.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사물의 본성에 다를 것인가? 치지하는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여 천지의 본성을 깨달아서 격물하는 것인가? 우선 마음으로는 후자에 더욱 끌린다. 그것은 수신하는 방법으로서 우선 나의 내면을 성찰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격물치지와 함께 대학을 대표하는 말을 고르라면 나는 '혈구지도'를 고르겠다. 이는 논어의 종심소욕불유구의 구를 가지는 것이 되고, 중용에서는 충서의 정신으로 나타난다.

   忠은 마음의 한가운데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흔들림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중심을 도의 한가운데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恕는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을 격물하는 대상과 같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 속의 곱자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과 같은 것이라고 보여진다.

  대학이 수신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먼저 읽어야 하는 방법론에 관한 책이라면 중용은 공부를 마친 사람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방법에 관한 책이다. 그래서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이 두 내용을 한 권에 묶어 둔 것이 어색하기조차하다. 하지만 마음으로 점검하는 공부에 시작과 끝이 어디있는가? 대학이든 중용이든 그것이 가리키는 진리는 다르지 않다고 할 것이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중용의 첫구절부터 마음이 환해진다. 천명이 제일 첫부분에 나온다. 자신을 비운 상태에서 떠오르는 마음이 바로 천명이 아니겠는가? 정성이 하늘의 덕이면 그것을 따라 정성되게 하는 것은 사람의 덕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따르는 것이 도라고 했다. 이 도는 멀리 있지 않으니 바로 우리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이라면 지성을 다하는 곳에 마음이 자리잡아야 하며 그러할 때 만물을 화육하게 한다.

  중용에서도 마음을 끌어당기는 말이 있었다.  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 그대가 방에 있는 것을 보건대, 방구석에 대하여서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했다. 군자는 사람들이 보나 보지 않으나 그 마음가짐을 지성에 닿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부를 통해 우리가 이르는 곳이 어딘지는 명백하다. 이런 공부가 세상에 나아갈 때에라야 비로소 다툼과 논란이 없을 것이다. 공부를 마치지 않고 세상에 나아가서 오히려 세상을 혼란되게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큰 공부는 비로소 치우침이 없는 삶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삶의 완성이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야할 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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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6-03-01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문으로 읽으면 씹으면 씹을수록 맛나는 음식처럼 더디더디 맛나게 다가옵니다. 저는 다양한 역주를 읽어본 게 없습니다. 그나마 읽은 것 중 하나가 감산 스님의 "중용"입니다. 감산 스님을 따라 중용을 읽으면 이렇게 읽으면 참 재미있구나, 허튼 말 없이 연관되어 쓰여져 있구나 싶습니다. 선지식이나 서적이 어떤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요즘은 내 하는 모양이 어떤지 살필 때 생활이 스승이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기자심이라고 가만히 보면 저 자신을 속일 수는 없더군요. 세상을 다 속여도 제 자신, 제 자신의 생활을 속일 수는 없더라구요.

달팽이 2006-03-01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불기자심...성철스님 책 사니까 끼워져있던 붓글씨가 생각나네요.
저는 불기자심을 나의 본성을 속이지 않는다고 풀이하고 싶었습니다.
고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몸마음에 착 달라붙는 맛이 있어
공부하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 같습니다.
감산 스님의 중용도 읽어보겠습니다.
 
한글세대가 본 논어 1
배병삼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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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학기 중에 들었다가 공야장편에서 이름도 잘 모르는 제자에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글들에서 중단된 좌절의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방학중이라 전편이라도 끝내리라라는 생각에 하루 한 편씩 한문을 중심으로 시작한 논어가 이제야 전편이 끝났다. 학이로부터 시작되어 자신의 인생의 단계를 담은 위정편과 공자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을 다룬 이인편이 아무래도 많이 기억에 남는다. 보수적인 유교공부의 대표격이 되어버린 논어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공자의 사상이 시대를 앞질러가서 혁신적이고 계급타파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 많았다. 나아가 사회개혁을 주장하면서 은둔적인 노장사상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면서도 마음의 중심을 수기하는데 두어서 늘 그것을 잃지 않고 사회에 나아갔다. 또한 마음의 중심을 인에 두고 벗어나려하지 아니하였다는 점에서 사회적 지위가 자신의 인격을 잡아먹는 현실의 위정자들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고 생각한다.

  논어 전체를 꿰뚫는 그의 정신은 호학에 있다. '호학' 얼마나 멋진 말인가? 어느 정도의 학위만 따면 이제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인격적 성장이 멈추는 것인데도 그것을 자랑삼아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면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의 호학하는 정신을 높이 사고 싶다. 배움의 길을 가는 사람들과 벗을 삼아 속으로는 자신의 공부를 부추키고 밖으로는 배움을 교류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하고 또 벗의 모습에서 자신을 비추어 면학하면 인생을 사는데 있어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학이편의 첫구절의 내용이 논어 전체를 통과하는 정신이라고 보기에 주저함이 없는 것이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배우고 이것을 몸에 익혀 자기 삶으로 만들어가니 이것이 기쁨이 아닌가?

배움을 함께하는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이것이 즐거움 아닌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나지 않으니 이것이 군자 아닌가?

 

그것은 배움이 자신의 내부를 성찰하고 닦는데 있는 공부이기에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에 무관하게 배움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으리라. 이러한 배움은 막힘이 없어야 하겠는데...그것이 군자불기이다.

 

 君子不器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그 편협한 시각만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가지겠지만, 사람이 사회에 나아가면 한 분야의 일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법, 나는 차라리 그 마음가짐을 드러난 세상에 두지 않고 수기하는 데 두었다라는 뜻으로 읽고 싶어진다. 마음 속의 진리와 그를 향한 배움에 뜻을 둔 호학인은 그릇 속에 제한된 편협한 마음을 품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이다. 

  

그는 십오세에 지우학, 삼십에 이립, 사십에 불혹, 오십에 지천명, 육십에 이순, 칠십에 종심소욕 불유구라 했다. 

 

  從心所慾不踰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도 천성을 따르는 곱자 즉 구로부터 멀어지지 않는다했다. 그 곱자란 무엇일까? 논어공부를 한 후 그 곱자 하나를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다면 논어 공부를 제대로 한 것이지 않은가 생각한다. 이러한 공부는 모든 공부와 모든 세상 살이를 하나로 꿰어내게 만들어주는 공부였을 것이다.

    吾道一以貫之

  논어를 읽으면서 나는 대학과 중용, 도덕경과 논어를 비롯한 동양고전을 하나로 꿰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관지하는 그 무엇은 무엇인가? 때로는 불교의 화두가 되기도 하고 배움의 화두가 되기도 하고 삶의 화두가 되는 그것을 위해서는 삶을 버려도 좋을 공부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삶을 꿰어낸 공부는 이제 더 이상 삶의 목적을 향해 매진하는 삶을 살게 하지 않는다. 이제 삶은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 되며 소요하는 것이 된다. '빈이락' '부이호례자'에서 빈이락은 가난해도 자신의 인품으로 남에게 부족한 것을 구해서 즐긴다는 뜻이 아니라 가난 그 자체를 즐긴다는 뜻이다. 즉, 가난은 삶을 즐기는 데 장애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장자의 소요유와 경계를 같이한다.

 

朝聞道 夕死可矣

 

한 시대를 학문으로 배움으로 풍미하면서도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가 없음을 안타까워했지만 그것으로 자신이 상하지 아니하고 배움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갔던 공자의 길, 조선 시대 수많은 유학자들이 수기하는 학문으로 삼아 따라갔던 그 길에는 이미 많은 발자국들이 나 있지만, 공자의 마음을 따라 바른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은 얼마였을 것인가? 외부의 흔적을 찾으면 많은 사람들이 걸어갔던 패인 길이지만 마음으로 들어가면 혼자만이 묵묵하게 걸어가야 하는 외로운 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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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1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6-02-11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왜 바뀌었는지...모르겠군요...
호학은 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므로..
님과도 상관없는 말은 아닐터..
이현주님의 시집으로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호학은..ㅎㅎㅎ

이누아 2006-02-11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어를 읽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두 구절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종심소욕불유구"고, 나머지 하나가 "불천노불이과"(不遷怒不二過)입니다. 누가 와서 묻지요. "선생 제자 중에 호학하는 자가 있습니까"하고. 공자께서 "안회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같은 잘못을 두 번 하지 않는다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단명하였다네. 해서 지금은 내 제자 중에 호학하는 사람이 없네"라고 하시지요. 책을 안 보고 기억으로 적은 것이라 오류가 있나 모르겠습니다만 3천 명 제자 중에 호학하는 제자가 단 한 명이었다고 하는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불천노, 불이과...

달팽이 2006-02-1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노를 옮기지 않고 잘못은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선 노여움을 마음으로 녹여내는 인격과 품성이 필요하겠고,
잘못을 두 번 범하지 않기 위해선
한 번의 잘못에서 칼끝을 대하듯 내면으로 성찰하는 마음이 필요하겠지요..
님 덕분에 빠뜨릴 뻔 했던 좋은 말을 다시 떠올리는군요..
연암 선생님도...
뜻을 얻은 곳에는 두 번 가지 않으며, 만족한 줄 안다면 위태롭지 않다고 해서 불이과에 대한 교훈의 말의 남겼지요..

어둔이 2006-02-13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자불기...'모름지기 삶의 주인된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진리에 뜻을 두지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을 따지지는 않는다.'라고 어둔이가 이 즈음 깨달은 의미입니다.

달팽이 2006-02-13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릴 것이 하나도 없군요...ㅎㅎ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 우리 문화 바로 찾기 1
조용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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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제 둘째 아이의 출산일이 가까워온다. 천천히 아이의 작명을 준비해야 한다. 이번에는 좀 더 성명학에 대한 기술뿐만 아니라 사주명리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입문서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지난번 서점에서 '조용헌의 사찰이야기'란 책을 보다가 이 사람이 동양학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눈여겨보았고 인터넷 검색 중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주명리학 하면 의례히 길거리에서 점보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당사주 네가지에서 오행을 추출하여 거기에 맞춰서 이름을 짓고 운명도 가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그렇게 작명하고 점보는 사람들도 불과 몇 달 공부해서 막 점보거나 이름짓는 사람부터 일생을 주역과 사주명리에 걸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나아가서 자신의 영달을 위한 사주풀이나 예언보다는 타인을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면서 자신을 비워낼 때 비로소 참된 역학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흔히 잡스러운 학문이며 일반인이 좀 꺼려하는 부분이기도 한 동양학은 경희대와 원광대에서 한의대가 생김으로써 제도권으로 편입된 부분과 최창조 교수의 풍수지리로 인정을 받은 분야와 아직은 미신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사주명리, 굿, 점 등의 많은 영역이 남아있다. 그동안의 급격한 산업화와 서구화의 물결로 이젠 그 전통의 맥마저도 끊어지고 있는 실정에서 우리 문화의 하나로서 사주명리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벗어버리고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으로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5000년이 넘게 이어온 인류의 지혜와 예지가 담겨 있는 동양학의 하나로서 우리들에게 새로운 수용과 창조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사실 작명서도 그러했지만 음양오행이나 주역책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번에 시윤이 이름을 지을 때에도 천체에 대한 난해한 그림에서부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으며 서너번 반복해서 읽어내려갔지만 내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전체속에 부분이 있고 부분 속에 전체가 있다는 격언처럼 천, 지, 인이 모두 어떤 인연의 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주명리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역과 음양오행, 사주명리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 이해 속에서 보다 거시적인 시각과 미시적인 시각을 골고루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일반인이 알기 쉽게 쓰여져있으면서도 강호동양학의 역사와 중요한 인물들에 대해 틈틈이 설명하고 있고 우리 나라의 근대사에서 한국적인 동양학의 체계를 수립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나같이 관심은 좀 있으나 어떤 방법으로 공부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고전에 해당하는 책들과 그 책의 의미에 대해서도 잘 설명해준다. 인터넷 검색으로 몇몇 책들을 찾았으나 절판된 것이 많았고 하지만 구할 수 있는 책도 없지는 않았다.

  둘째 아이의 작명을 계기로 다시 들게 된 역학에 대한 공부가 조금은 더 깊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저자를 만나게 되어서 예전에는 몰라서 이책 저책 그냥 손에 잡히는대로 구입했던 것이 이젠 공부할 방향이 좀 잡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어떤 분야에서든 대가들끼리는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역학의 대가들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그 마음을 비워서 진리가 자신을 통해 드러나게 했다는 점에서 구도자와 같은 길을 걸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속인인 나는 이 분야의 책을 읽어나가면서 기술을 익힌다는 생각보다 구도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것이 또한 보잘것없는 재주로 남들을 현혹하지 않는 길임을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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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1-25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윤이라는 첫째아이 이름도 참 좋네요.
건강한 출산과 함께 멋진 이름 짓는 것도 성공하시길!^^
(이 책 저도 사놓고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답니다.)

달팽이 2006-01-25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방학때 집에서 간간히 볼 수 있는 영화추천도 감사하구요..

비로그인 2006-01-29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작년 겨울에 읽었던 책이었는데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직접 이름을 작명하신다니 대단하시네요.막상 직접 이름을 짓는 것이 생각보다 참 어려운 일일 것 같네요. 새로 태어나는 아이의 사주와 미래와도 조화를 이루어야 하니..성공하시길 바랄게요^^

달팽이 2006-01-30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것 없는 저로서는 잘짓는다는 마음없이 그저 좋은 마음써서 짓는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자식의 이름을 좋게 지어 자식이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거든요...
아뭏튼 감사합니다.
 
논어의 논리 - 철학적 재구성
박이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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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가 가진 아시아사회에서의 정신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어를 제대로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일반인으로서 논어가 가진 유교적인 영향을 국가와 사회, 문화와 관습을 통해 느끼고 영향받으면서도 그 논어에 내재한 혁명적이고 개혁적인 논리는 대체로 왜곡되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논리를 대변해주는 것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지금껏 쏟아지고 있는 많은 논어에 관한 책이 주로 논어의 내용에 대한 주석서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박이문 교수는 논어를 새롭게 읽는 방법의 한 가지를 제시해준다. 논어에 내재한 논리를 중심으로 논어의 내용을 다시 이합집산시킨다. 논어가 가진 중요성을 우리 사회가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논어의 정작 중요한 텍스트가 가진 논리의 이면을 읽어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온 것이 사실이다. 우선 나부터도 도덕경에 먼저 마음이 끌렸으며, 도덕경이 청명한 하늘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논어는 진흙투성이의 땅위로 내려온 이야기에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어를 현실사회를 해석하고 변화와 개혁을 위한 의미로서 새롭게 읽어내려는 노력들이 최근 들어 이루어지고 있고 이 책 또한 그러한 일련의 노력들 가운데 하나로써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서양적 가치와 대비되는 동양적 가치의 정신적 문화유산의 한가운데 오랫동안 서 있었던 논어는 삶의 진리가 우리가 감각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만 파악될 수 있다고 하는 서양의 경험주의와도 다르고 합리적 추론을 통하여 이성으로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합리주의와도 다르다. 서양적 가치가 합리적 이성과 과학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면 동양적 가치는 인간의 육체적 감각으로 느끼는 것의 부정확함과 현실파악의 결여성에 주목한다. 나아가 참된 진리는 격물하는데서부터 시작되어 자신의 내면의 수양을 통한 치지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동양적 견해는 인간과 사회역시 자연의 산물로 자연의 일부이므로 무위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하여 일체의 사회와 속세로부터 벗어나 도와 덕으로 귀의해야 한다고 생각한 노장사상과 하늘의 본성으로부터 나온 인과 예를 중심으로 사회에 나아가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삶속에서 진리를 찾아야 하며 그 진리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맹사상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물론 그 외에도 묵가와 법가 그리고 불교사상이 있었지만 말이다.

  논어는 그 중에서도 탈현실주의적이고 탈사회주의적인 노장사상에 대비되어 참된 진리를 향한 배움의 길을 현실에서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나아가 배움의 추구를 통한 현실개혁에 그 완성이 있다는 점에서 관념적인 것에 치우쳤다고 비판받는 노장사상을 보다 현실로 끌어들여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이 삶속에 진리가 있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인간 사회가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그 의식의 산물인 문화가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갖고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도를 찾기 위해 머리를 깍고 산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현실적인 삶에서 우리는 보다 논어에 친근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게 된다. 하지만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 마음을 항상 도와 하늘의 본성과 그에 따른 인에 두고 그 인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인 예로서 수신했던 논어가 나의 삶에 주는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공자에게 있어 군자불기였지만 또한 기이기도 했던 것은 인을 근본마음으로 지녀야했지만 예로써 실현해야 했던 문제와 다를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몸과 마음이 하나의 일체화된 삶으로서의 논어를 써내려갔던 것이다. 그것이 그의 삶이 추구하던 바였으며, 종심소욕불유구라고 했던 그의 말에서도 찾을 수 있듯이 끊임없이 자신의 정치사상을 펴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려했고, 자꾸만 좌절했던 그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도에 삿됨과 고집이 없이 인과 예에 닿으려했던 공자의 마음은 "조문도 석사가의"에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한다.

  참된 삶의 진리를 위해 내 현실적인 삶을 던져버리지 못한 나의 경우처럼, 공자의 사상은 주어진 삶의 현실 속에서 수신하고 배우고 나아가 삶의 본성에 닿고 깨닫는 길을 가는 하나의 방법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다. 우리 조선시대 선비들이 이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수양을 해나갔던 이가 얼마나 무수했을 것이며 또 고달픈 현실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마음의 바탕을 찾았던 이는 또 얼마나 무수했을 것인가?

  노장사상의 깊이로 단순히 논어를 비판하기보다 그 사상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현실적인 영향력을 가지고서 참된 삶을 찾고자하는 이의 오랜 교과서적인 역할을 해왔던가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우리는 논어의 첫페이지를 들추어야 할 것이다. 그 마음 속에는 노장이니 공맹이니 법가니 묵가니 하는 구별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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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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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지금 열하일기인가?

열하라는 공간은 18세기 후반 몽고와 티벳, 아라비아 등의 다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여기서는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어느 한 가치에 머무르지 않는 유목적인 삶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현재 우리 세상은 중심과 주변이라는 '근대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포스트모던한 사회로의 이행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의식은 아직 근대나 전근대에 머물러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들은 세상의 흐름과 의식의 불일치 속에서 더욱 많은 마찰음을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하일기는 바로 200여년 전의 연암 선생의 열하기행문을 통해서 열하라는 공간이 주는 다문화적이고 다양한 가치의 공존이라는 측면과 그런 열하일기를 쓴 연암선생의 삶과 사상을 통해서 우리시대의 현실과 의식의 불일치를 극복해보려고 하는 시대적 코드로써 읽히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

  우선 연암의 문체가 정조때의 '문체반정'이라고 하는 사건을 일으키는 원조가 된다. 그의 문체는 시대의 무거움을 벗어난 역설과 재치, 해학과 웃음의 생생한 필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문체 형식만 보아서는 그의 정신을 얻을 수 없다. 그의 문체 이면에는 그의 문장에 대한 생각을 또한 읽어내어야 한다.

  "진실로 능히 옛것을 본받으면서 변화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면서도 법도에 맞을 수만 있다면 지금의 글이 옛글과 같게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이 비록 오래되었지만 끊임없이 생명을 내고, 해와 달이 비록 오래되었어도 그 광휘는 날마다 새롭다. 책에 실려 있는 것이 비록 방대하지만 가리키는 뜻은 제가끔 다르다. 때문에 날고 잠기고 달리고 뛰는 온갖 생물 가운데에는 간혹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고, 산천초목에는 반드시 비밀스런 영이 있게 마련이다. 썩은 흙에서 지초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딧불로 화한다."   [초정집서]

  따라서 옛글과 오늘의 글을 같게하는 것은 형식에 또는 문체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법도에 맞아야 하며 이는 옛 글쓴이의 마음과 정신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옛 사람의 마음을 잃은 채 문장의 형식만 흉내낸다면 그것은 이미 법도를 잃은 것이 될 것이요. 옛 사람의 마음을 잃지 못하고 행동거지만 따라한다면 그것은 앵무새의 흉내에 다름아닌 것이다.

  열하일기는 text의 미완성이란 점에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결여로써가 아니라 완결된 체계를 넘어 무한히 뻗어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의 작품이 위대한 것은 완결된 멜로디를 구사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다."는 것은 열하일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완결된 구조로서 우리들에게 강요되는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의식의 창조과정을 따라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해가는 과정을 중요시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부러운 점이 있었다. 연암과 그의 친구들이 나누었던 우정이다. 벗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벗은 나를 알아주는 지기요 또한 인생이라는 배움의 장을 함께하며 질책해주고 위로해주고 때로는 경쟁자로서 때로는 스승으로서 때로는 삶의 동반자로서 우리들의 배움을 완성해가는데 필요불가결한 존재이다. 그러한 벗에 대한 인류사의 명문장으로 나는 이덕무의 글을 빼놓을 수 없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빛깔씩 물들인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 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간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 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선귤당농소]

  아, 이덕무의 이 글을 읽고도 마음으로 애타게 그리는 지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정말 아직 친구를 잘못 사귄 것이 아닐까?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고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말없는 말을 교환하며 배움의 길에 있어 서로에게 회초리가 되기도 하고 붓이 되기도 하고 종이가 되기도 하는 그런 친구가 있다면 인생길은 그리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연암선생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박제가가 연암선생과의 첫만남의 인연을 쓴 [백탑청연집서]를 보면 나이를 넘어서도 벗이 될 수 있는 만남에 대해 청연과도 같은 인연임을 말한다.

  "지난 무자, 기축년 어름 내 나이 18,9세 나던 때 미중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뛰어나 당세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 나섰다. 내가 찾아왔다는 전갈을 들은 선생은 옷을 차려 입고 나와 맞으며 마치 오랜 친구라도 본 듯이 손을 맞잡으셨다. 드디어 지은 글을 전부 꺼내어 읽어보게 하셨다. 이윽고 몸소 쌀을 씻어 다관에다 밥을 안치시더니 흰 주발에 퍼서 옥소반에 바쳐 내오고 술잔을 들어 나를 위해 축수하셨다. 뜻밖의 환대인지라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나는, 이는 천고에나 있을 법한 멋진 일이라 생각하고 글을 지어 환대에 응답하였다."

  나이를 넘어서 벗을 만나고 그 귀한 벗을 대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가? 나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일이 있다. 그의 집을 찾아간 날에 몸소 밥을 차려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나에게 밥상을 정성스레  차려 준 밥을 가슴찡하게 먹은 기억이 있다. 그날 나는 밥을 먹은 것이 아니라 벗의 우정을 먹은 것이다. 연암 선생의 벗을 대하는 마음에는 나이의 많고적음을 떠나 벗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또 그 대접을 받고 그 사람됨을 알아보는 박제가 선생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논객들의 만남다웠구나.

  열하일기에서 문장의 빼어남으로 야출고북구기도 있지만 나의 마음을 흠뻑 앗아버린 문장은 바로 [일야구도하기]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 문장은 빼놓을 수가 없다.

  "내가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이 텅 비어 고요한 사람은 귀와 눈이 탈이 되지 않고, 눈과 귀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더더욱 병통이 되는 것임을. 이제 내 마부가 말에게 발을 밟혀 뒷수레에 실리고 보니, 마침내 고삐를 놓고 강물 위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올려 발을 모두자, 한번 떨어지면 그대로 강물이었다. 강물로 땅을 삼고 강물로 옷을 삼고 강물로 몸을 삼고 강물로 성정을 삼아 마음에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고 나자, 내 귓속에 마침내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을 건넜으되 아무 걱정 없는 것이, 마치 앉은 자리 위에서 앉고 눕고 기거하는 것만 같았다. "

  대학의 '격물치지'를 떠올리게 한다. 외부의 현상들이 감각으로 인식되는 생각들을 물리친 다음에야 비로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각에 마음을 빼앗길수록 더더욱 두려움과 공포에 휘둘리어 공연히 제걸음에 발을 헛디디어 물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온갖 감각과 생각을 차단한 자리, 바로 그 자리가 진리의 자리가 아닌가? 그 자리엔 강물소리가 들릴리가 없다. 마치 있는 그 자리에서 아무런 생각이 없으니 자유자재한 자리가 될 것이다.

  연암 선생의 매력은 단지 문장력에 있지를 않다. 혼란하고 무거웠던 시대를 해학과 웃음으로 가볍게 뛰어넘은 그의 삶 속에는 이렇듯 삶을 바라보는 깊은 지혜가 있었다. 오늘날의 시대, 감각과 온갖 사상과 생각의 난무로 너무나도 복잡해져 삶의 정체성을 찾기 힘든 시대에 열하일기는 단지 그런 삶의 회피로서의 웃음과 역설이 아니라 삶의 깊은 관조와 진리를 향한 구도자로서의 방향제시로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나는 이렇게 열하일기를 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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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미숙, 몸과 우주의 유쾌한 시공간 '동의보감'을 만나다
    from 그린비출판사 2011-10-20 16:58 
    리라이팅 클래식 15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출간!!! 병처럼 낯설고 병처럼 친숙한 존재가 있을까. 병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 역시 살아오면서 수많은 병들을 앓았다. 봄가을로 찾아오는 심한 몸살, 알레르기 비염, 복숭아 알러지로 인한 토사곽란, 임파선 결핵 등등. 하지만 한번도 병에 대해 궁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얼른 떠나보내기에만 급급해했을 뿐. 마치 어느 먼 곳에서 실수로 들이닥친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