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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논어 - 시대를 초월한 삶의 교과서를 한글로 만나다 ㅣ 한글 사서 시리즈
신창호 지음 / 판미동 / 2014년 6월
평점 :
오랜만에 읽는 중국 고전이다. 그냥 편하게 읽은 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지만, 서평을 쓰기 위해 읽는 건 햇수로 따져서 8년 만이다. 그러니까 2012년 이후로 처음이다. 이처럼 정확한 연도를 기억하는 까닭은 대학 때 학교 도서관에서 중국 고전을 주제로 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서이다. 그 수업에서는 조별로 (동일한) 중국 고전 한 권씩을 읽고 서평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읽은 중국 고전은 노자의 『도덕경』 (오강남 역, 현암사, 1995), 『장자 교양 강의』 (심의용 역, 푸페이룽 저, 돌베개, 2011), 『다산의 마음』 (박혜숙 역, 돌베개, 2008), 『맹자 교양 강의』 (정광훈 역, 푸페이룽, 저, 돌베개, 2010) 이렇게 총 네 권이었다.
그 후로 내 마음의 한구석에는 늘 아쉬움이 있었다. 학부와 동대학원 석사과정에서 모두 역사를 전공했음에도 인문학 소양, 그중에서도 특히 동양고전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역사’가 동양고전을 주로 연구하는 학문은 아니지만, 文(문), 史(사), 哲(철) 가운데 하나로 분류되는 인문학의 한 분야 아닌가.
인문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보다는 조금은 더 알고 있겠으나, 인문학도 출신이라기엔 뭔가 부끄럽단 생각을 많이 했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한 후에는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하며 살았다.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인문학보다는 가벼운 에세이 위주의 독서를 해왔던 것 같다. 비록 내 뜻은 아니었으나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이 생겨서, 앞으로는 본격적으로 고전을 열심히 읽고 리뷰도 성실히 써보고자 한다.
공자의 《논어》는 그 첫 책이다. 아직 논어를 직접 상대할 자신이 없어서 도와줄 책으로 신창호 교수(이하 신창호)의 『한글 논어』(신창호, 판미동, 2014)를 골랐다. 내가 느끼기에 『한글 논어』는 독특했다. 책 제목 그대로 한글로만 되어있다. 보통은 (적어도 내가 읽은 중국 고전들은) 한문 원문을 먼저 싣고 그다음에 우리말로 해설을 달기 마련인데, 이 책에서는 한문 원문을 조금도 인용하지 않는다. 책 목차의 마지막인 부록에 원문을 모아서 실었을 따름이다. 어쩐지 고리타분하고 어렵게만 느껴질 수 있는 고전에 편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편역자 신창호 선생의 배려가 돋보인다.
『한글 논어』는 크게 1, 2부와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인 공자, 그 삶의 희로애락’에서는 공자의 삶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공자의 일대기를 소개한다. ‘2부 『논어』 한글 독해’에서는 이 책의 본편으로 1편 학이, 2편 위정, 3편 팔일, 4편 리인, 5편 공야장… 등 《논어》의 내용을 소개한다. 한글 번역본에 친절한 저자의 해설을 함께 싣는 방식이다. 마지막인 부록에는 서 언급했던 것처럼 한문으로 된 《논어》 원문이 실려있다.
"공자의 제자인 자하는 '배운 사람'의 의미를 정돈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하였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마음으로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을 대우하고 존경하며, 온몸으로 부모를 모시며, 자신이 속한 조직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벗과 사귈 때 빈말을 하지 않는 사람! 그가 글을 배우지 못했을지라도 나는 이런 사람을 배운 데가 있다고 말하리라!""
『한글 논어』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논어》의 한 대목이다. 맥락은 조금 다른듯하지만, 나는 여기서 문득 김규항이 쓴 책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에서 ‘교양’에 관해 언급한 글귀가 떠오른다.
"교양이 문화적인 지식이나 감정표현의 절제, 우아한 말과 행동 따위라는 생각은 봉건적이다. 교양이란 ‘사회적인 분별력’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을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 그게 교양이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교양 있는 사람’이다."
배운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가 ‘교양 있는 사람’과 비슷하다면, ‘자하’와 ‘김규항’의 말에서 뜻하는 바는 큰 틀에서 서로 통하지 않을까. 그들의 말대로라면 학벌이 좋다거나, 남들보다 지식이 풍부하다고 하여 ‘배운 사람’ 혹은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보자면 ‘교양’에 대한 김규항의 풀이는 ‘재해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복고적’이다. 우리가 그동안 배움의 의미를 왜곡해서 사용해왔을 따름이다.
한편, 공자는 배움의 목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사람의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데 뜻을 두고 그것을 터득하여 바른생활을 하는 굳은 마음을 간직하여, 열린 마음으로 사람답도록 애쓰며 삶의 멋을 즐겨야 한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공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었고, 또한 책으로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비단 옛날의 중국만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 또한 스승의 말과 행동은 물론이고, 동·식물이나 자연현상을 관찰하고도 그로부터 배우려 애썼다. 그런 시각으로 봤을 때, 공부를 분명 잘했다고 하는데 실은 헛공부를 한 사람들이 많다. 어려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높은 지위에 올랐는데도 행동거지가 사람답지 못하다면, 어찌 공부를 잘했다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는 행동을 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좋은 대학을 나왔고 시험 성적도 좋았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어려운 공부를 뭐하러 했을까. 한낱 헛공부에 불과하다. 반면,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배려하는 마음씨를 지닌 사람이라면, 그는 설령 학교를 제대로 못 다녔다고 하더라도 실은 공부를 잘한 사람이다. 자하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배우지 못했으나 배운 사람이다.
이쯤에서 현시대 한국의 교육 현실을 들여다보자. 2018년 기준으로 한국은 읽기, 수학, 과학 영역을 측정하는 OECD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에서 전 세계 79개국 중 전 과목이 10위권 안에 드는 위엄을 과시했다. 하지만 그런 빛나는 성과 뒤편에는 OECD 기준 대한민국 자살률 세계 1위, 국내 청소년 사망원인 (2019년 기준) 1위가 ‘자살’이라는 씁쓸한 현실이 보인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의 통계에 따르면, 2019년 중·고교생 10명 중 4명(39.9%)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느끼며, 중·고교생 28.2%는 최근 1년 내 우울감도 경험했다고 한다. 물론 그 모든 원인이 학업에 있지는 않을 테지만, 한국이 수십 년째 ‘입시 공화국’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점과 무관하지는 않을듯하다. 즉 공부 때문에 우울하고 심지어는 죽고 싶어 하며 실제로 죽는 청소년들이 많다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공부의 목적을 상기해보자. 이것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하는 공부인가 그 반대인가. 아니 그것을 떠나 이것은 공부인가 아닌가. 공부에 대해 장정일은 자신의 책 『장정일의 공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부 가운데 최상의 공부는 무지를 참을 수 없는 자발적인 욕구와 앎의 필요를 느껴서 하는 공부다."
장정일의 말은 공자의 교육관과도 연결된다. 공자는 질문하지 않거나 스스로 고민하며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깨우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수십 년 간 공고화된 교육제도를 바꾼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며, 또한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평생 학습의 시대다. 초·중·고라는 제도권 교육 울타리를 벗어난 후에는 우리 뜻대로 공부할 수 있다. 시험만을 위한 공부가 아닌 진짜 공부를 하고 싶어 졌다면, 《논어》를 쉽게 해설한 『한글 논어』를 읽어보는 건 어떨까.
※ 이 글은 브런치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나중에 순서가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선은 브런치에 먼저 올리고 알라딘 서재에 올립니다. 브런치와 알라딘 서재에 올리는 글은 내용이 완전히 같으나 약간의 날짜 차이가 있습니다.
https://brunch.co.kr/@lifeinreading/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