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상 27 - 한국 여성 정치의 최전선
강준만 외 지음 / 개마고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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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층 여권 신장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 동안 여자라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억눌려 왔고, 차별 받아온 그 모든 불합리한 현실에 드디어 여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주변에 있는 남자들에게서 - 나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없다. - 이제 이런 볼멘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너무 하는거 아냐?', '너무 여자라는 피해의식에서 저렇게 따지면 어떡하자는 거야?' 피해의식. 그래, 단순히 여자들은 피해의식이라는 논리에 사로 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와 일본을 살펴보면 이 피해의식이라는 단어와 종종 접하곤 한다. 반성없는 일본의 행태와 그저 피해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는 한국민들의 편견적 시선들. 이것들이야말로 사람들을 극도로 단합시키게 하고 나아가 설명되지 않는 논리들도 이 구조 속에서 합리화란 병폐를 지닐 수 있게 된다. 이 반성없음과 피해의식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양쪽에서 한발자국씩 물러나지 않는 한 절대 동거할 수 없는 물과 기름의 사이인 것이다. 그래서 그 싸움의 끝도 쉬이 뵈질 않는다.

정말 우리나라 여성들은 오로지 피해의식이라는 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면 왜, 남성들은 가해의식은 가지고 있질 않은 것일까? 단순히 그 동안 그래 왔기 때문에? 일상적인 예로, 차 심부름을 여자에게만 시키는, 그러는 그 상황에서 단순히, 일말의 미안한 감정이라도 가지는 남성은 10에 몇 명이나 될까? 그래 그게 문제다. 남성들은 그동안 당연히 그래 왔기 때문에 가해의식을 가질 수 없는 것이고 가해의식을 가질 수 없기에 자기 앞의 여성들에게 반성할 수 있는 계제를 가지기 힘든 것이다. 그럴 때 여성들의 목소리 앞에 남성들은 자기 변호 차원에서 이런 말로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 여성들, 지나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라고. 틀렸다.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남자들만의 이기적인 모면법이다.

우리나라는 여성면에서 상당히 보수적이다. 근래에 여성의 사회 참여도가 늘어나고 여성단체들도 생겨 여성권익 신장을 위한 운동도 활발히 벌어지고 있지만 이런 미시적인, 바로 눈앞에 보이는 참여가 아닌 거시적인 정치참여로서의 여성은 그 존재가 아직도 너무나 미미하다. 분명 남녀간의 사고간에는 얼마간의 차이가 있어 서로 보완적으로 정치를 해야 할텐데도 말이다. 그래도 세계적 '꼴찌'는 아니라고 너스레를 떠는 꼴을 보고 있자면, 실상 그것도 중동국가의 여성에 대한 극보수 덕에 세계적 꼴찌를 면하고 있는 것이기에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낙후된 한국의 정치적 여성참여에 일말의 희망이 보이는 듯 하기도 하다. 기존의 정치가들과는 사뭇 다른, 그러면서 자신만의 강력한 색채를 지닌 여성들 - 추미애, 강금실, 고은광순, 박근혜 등. 어떤 선로를 통해서든 한국의 정치에 강한 입김을 내뱉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대단한 여자들이라는 말 밖에 나오질 않는다. 물론, 이들은 '여자'가 대단하다란 말을 듣기 싫어할지 모르지만, 이 남성권위위주의 한국의 정치풍토 속에서 남들의 몇 배의 노력을 한 이들을 보고서 정말 '여자'가 대단하다란 말이 아니 나올 수 없다. 다만, 여기서 여자란 性이 아닌 Gender라는 차원에서.

<인물과 사상 27>에서는 이런 여성 정치인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동안 매스컴을 통해 막연히만 알아 왔고, 막연한 이미지 속에서 그들을 대하고 있던 나는 그들을 조금 더 앎으로써 진심으로 존경심을 내비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의 여성정치인들을 다룬 것 또한, 거의 없었기에 이번의 <인물과 사상 27>이 너무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강금실편 중에서 - 법무부의 공무원들은 이런 전화를 자주 받는다. '저 강금실인데요' 뭔가 다르지 않은가, 나는 이 대목에서 미소가 스르르 번졌다. 뭔가 다른 이들이 여성으로서만이 아닌 모든 사회적 약자들을 두루 살피며 이 한국을 변화시켜 가야 할 것이라 본다. '한국 많이 변했다'가 아니다. 한국은 이제야 말로 제대로 변할 과도기에 도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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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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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살아가며 자신이 열정적이었다고 생각이 든 적이 있는가?

나는 인생이 너무나 반복적이라는 생각에 허무와 염세라는 과속적 감정과 종종 충돌을 일으키곤 했다. 하지만 이 질문은 그 지루하고 적막한 인생의 여로에서 한때나마 인생에 열정의 감정과 함께한 적이 있는지, 비록 그 열정의 끝에는 무엇도 없이, 한 터럭의 지스러기 없이 오히려 그 동안의 삶을 갉아먹었다 하더라도 진동한동 살아가며 정열로써 삶을 불태운적이 있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게한다.

이 때,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며 던지는 산도르 마라이의 질문에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삶의 편린에 미약하나마 정열을 쏟아 부었던 과거를 잠시 되돌아보았다. 하지만 정열을 부었다고 믿는 그 시기의 나는 순간의 정열에는 충실했을지 몰라도 그 삶 자체에 열정적이진 않았던 것 같다. 삶의 한 편린에 자기만의 삶을 쏟아 부을 때 우리는 그 삶을 정열적이라고 하긴 하지만 순간이 아닌 그 끝이 지속적일 때, 그리고 그 정열을 자신이 진심으로 껴안고 있을 때, 그 때만이 삶이 정열을 뛰어넘는 열정이 될 수 있다. 지속적인 정열, 그 끊임없는 염염함이 열정, 바로 그것이다.

그러기에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은 그다지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우리 삶의 뒤편에 있는 아니, 어쩌면 우리 삶의 목적이자, 그 자체일지도 모를 화두, 열정. 그 곳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사건이라는 것은, 모두 열정에 사로잡힌 삶의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사건아닌 그 삶.

그 삶이란, 헨릭과 콘라드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그 사이에서 괴로워했던 크리스티나의, 어찌보면 단조롭기까지 한 삶이 전부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인생의 중요한 질문은 순간이 아닌, 생명의 흔적이, 생명의 핏자국이 묻혀 있는 전 생애로 답한다는 말에 눈길이 가게 한다. 질문을 위한 헨릭의 기다림. 대답은 중요치 않았으며 그저 그 순간만을 기다리며 자신을 불살라 온 그 열정적인 기다림. 그 기다림이 중요했고, 그 열정이 중요했다.

그래서인지 헨릭은 촛불을 떠올리게 한다. 자기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며 어둠을 살라먹는 촛불의 삶. 비록 자기 자신조차 파괴해 버리는 너무나 극단적인 삶이지만, 촛불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후회보다는 뭔가 모를 만족감과 안도감을 느끼지 않을까? 촛불은 꺼지는 순간, 그 마지막에 희미한 불빛을 다시금 밝히며 마감한다. 생의 도착지에 체념이 아닌 마지막 힘을 다해 다시금 한 번 어둠에 흔적을, 우리의 눈에 잔영을 남기고 가는 그 모습. 그것이 촛불의 삶이고, 헨릭의 삶이었고, 바로 열정이 아닐까?

물론, 우리가 접하는 삶의 공간 속에서 겪는 모든 질문에 촛불과 같이, 헨릭과 같이 자신의 전 생애를 걸 필요는 없다. 전 생애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의 일부분을 열정으로 가득 껴안고서 후회없이 내밀 수 있으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족하다. 그런게 진짜 열정이고 그게 바로 사람의 인생이다.

이 기다림이라는 열정을 매개로 <열정>은 삶에 대해 냉혹하고도 직설적인 시선으로,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담담한 어조로, 오히려 삶이란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듯이 너무나 담담한 어조로 읊조린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그의 글들에 귀 기울이게 해 주었고 그 담담함으로 그의 삶에 좀더 여유있고 깊숙한 참여가 가능했다.

헨릭의 40여년의 고독과 그 비등점에서 화하는 열정에 조금씩 공감해 가던 나는 문득, 작가 산도르 마라이의 모습과 겹치게 되었다. 그들, 헨릭과 마라이는 열정적인 삶을 살았고, 무슨일이 일어났던 그것을 체험하는 삶을 살았기에 결코 헛살지 않았다. 헨릭의 인생과 열정, 그리고 결국 전 생애로 세상에 답했던 산도르 마라이를 한데 뭉치며 다시금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 내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지금 후회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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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 그리스에 길을 묻다
이윤기 지음 / 해냄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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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정점으로 그리스, 로마신화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그리스 신화로 유명한 이윤기씨의 가장 근작 <이윤기, 그리스에 길을 묻다>가 눈에 띄었다. 화려한 도판, 현란한 도판. 모두 컬러로 실린 그 도판에 난, 항상 상상만 하거나 그저 그런 해상도 떨어지는 도판만을 보아온 나는 그냥 미혹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 책은 도판을 제한다면 남는게 거의 없다. 1부 신화에 길을 묻다는 확실한 선이 없는 황망한 신화 겉 햝기 였고 나머지 2부, 3부도 별 볼일 없는 거의 겉햝기 수준에 밖에 머무르지 않는다.

특히나 1부에서 했던 말 또하고 반복하고, 돌려말하는 지문에는 짜증이 났고, 일면 쓸데없어 보이는 글조차 대뜸 끼어 들고 유치하기까지 한 지문은 실로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종국에는 화수분이야기가 나오자 그것마저 설명해 주는 저자의 친절함에는 두손 두발 들었다.

화려한 도판이 주목적이었고 그 감상이 목적이었지만 급조된 듯 한 지문과 분량을 늘려보려고 애쓰는 듯한 처량한 모습에서는 너무 아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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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법칙
로저 도슨 지음, 박정숙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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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학 초기. 멋모르고 설문조사 한답시고 끌려간 곳에서 책을 구매하라는 어이없는 광고를 접하게 되었다. 생애의 첫 상경에 이곳저곳도 구분 못해 나의 이성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던 덕택인지 나는 그만 설득 당하고 말았다. 분명 처음은 간단한 인터뷰였는데, 어느새 장면은 그걸 잊고 열심히 광고를 듣고 앉아 있는 나 자신으로 탈바꿈해 있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내가 왜 이랬지? 라는 생각으로 본사에 전화를 걸어 그 사람과 연결해 달랬더니 비밀상 안된단다. 옳거니, 끝이다. 이제 바로 환불 태세로 들어간다. 환불을 안해주려 버티려던 회사원에게 내가 미성년자란거 아느냐? 이러쿵저러쿵, 알지도 못하는 법적 지식을 아는냥 쫑알쫑알 뱉고 있었더니, 보통 부탁을 하는데 몰아세우면 되느냐고 한다. 대체 나의 자세에 무슨 자세를 바라냐고, 그러곤 바로 환불해 버렸고 그 뒤로는 광고를 목적으로 나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지나친 냉대를 면치 못한다.

그 사람들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분명 설득의 기술은 뛰어났다. 금방 갈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나를 순식간에 매료시켜 버렸으니. 로저 도슨의 <설득의 법칙>에 의하면 그 사람은 유머의 기술, 유대감의 법칙. 등등을 정말 절묘히 쓴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설득이 끝난 후의 '산 정상에서 데려오기'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에 그런 비참한(!) 말로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물론, 나를 '산 정상에서 데려내려' 왔었어도 설득이 끝까지 유효했을까하는 의문은 들지만, 한 사례로 본다면 해석에 큰 공감이 간다.

보통 독자들에게 변화를 주고자 하는 계발서들은 읽을 때는 공감하지만 막상 책을 덮고 나면 깨끗이 잊어버리기 일쑤다. 왜 그럴까? 계발서들은 원론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 계발서들은 독자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항시 제시하는데, 우리 대부분은 일상에서 잊어먹고 살기 쉬운 것들을 이런 책들이 다시금 제시해 주기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공감은 할지라도 그 실천과 계발에는 어려움이 따르기에 '원론적'이라는 평이 나오는 것이다. 이 원론적이라는 비난을 면하려면 계발서는 '무엇을'에서 벗어나 반드시 '어떻게'를 제시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저그런 수준으로밖에 머물 수 없다.

로저 도슨의 <설득의 법칙>도 대체로 '무엇을'에 치중을 하는 듯 보였다. 2부까지는 대부분 '무엇을'만을 서술하여 여타의 계발서와 다를 점이 없다는 생각이었는데 3부에서는 그 '무엇을'을 '어떻게'해야 할 것인지를 제시해 놓아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책으로 변모했다. '유머, 카리스마를 가지는 법' 등은 이상적이라 할지라도 독자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서술해 놓았기 때문에 그 빛이 나는 것이다.

다만, 제4부는 차라리 읽지 말고 덮어 버릴 것을 하는 생각이 팽배했다. 예로, 고객이 제품 설명을 듣고 형편없다며 화를 낼 때, 점원은 이렇게 하란다. 절대 비아냥거리지 않게 '그럼 고객께서 더 잘 만드실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럼 '그래요, 사실 난 이 제품을 만들었었어요' 등 고객의 허심탄회한 말을 들을 수 있단다. 여기서, 저자는 아주 순수한 인물이거나 순수한 인물만을 만나 왔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서양과 동양의 정서의 틈은 메울 수 없을 만큼 너무 크다는 결론밖에 내지를 못하겠다.

일반 계발서가 '무엇을'에만 치중하여 읽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는 달리 <설득의 법칙>은 '어떻게'까지 서술을 해주어 어느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다. 다만, 설득하는 주체로 판매사원 등 고객을 상대로 하는 입장에서 서술을 하여 독자들의 일상생활에까지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 같기에 책을 읽고 설득의 실력이 향상돼 변모하는 모습 같은 것은 얻지 못할게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자신이 '이렇게 설득을 당했구나'고 생각을 해 본다면 또 다른 면의 도움이 되리라 생각이 든다. 계발서들을 보고 읽기만 하면 나도 된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조그만 도움 하나라도 건지는 게 올바른 목적이라 보는 나이기에 그 정도의 도움이면 많은 것을 얻어낸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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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환상이다
기시다 슈 지음, 박규태 옮김 / 이학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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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환상이다. 우리는 본능으로 이성(異性)을 찾게 되고 또 그리워하게 된다는 일반의 통념에 과감히 출사표를 던지는 이 한 마디. '성은 환상이다.'과연 환상일까? 아니면 인간 본능으로써의 실재일까?

저자 기시다 슈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에대한 생각은 근대이후의 문화적 산물로 인한 환상이라 주장하고 있다. 근대 이전에는 성이란 아주 개방화되어 있는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성적 터부가 강화되고 그 터부로 인해 강력히 금지된 공간이 생기며 인간들은 그 금지된 공간을 향해 환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 성적 터부란 근대이후 아주 강력해 지긴 했으나, 옛날에도 존재했었고 그 존재의미는 바로 인간의 성에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라 주장하는 점이다. 저자는 인간이란 본시 성에 대한 본능이 망가져 있기 때문에 자연상태 그대로라면 인간은 이성에 대해 끌리지 않는단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인간의 종족 유지가 불가능해 지기에 인간들은 할 수 없이 성적 터부를 만들어 내면서 인간 내면의 죽어버린 성에 대한 욕구를 끌어낸다는 것이다.

해석은 참으로 흥미롭고 재미있다. 하지만 흥미로울지는 몰라도 공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아닐런지. 저자는 책의 도입부에서부터 인간은 본능이 망가져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원숭이 태아적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진화의 중간적 단계로 본능 역시 그로 인해 망가져 버렸다는 주장을 답습하고 있는데, 그 학설이 설혹 가능성이 있고 또한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그 주장의 내용의 신뢰도가 이 책을 읽는 일반인들의 생각에 얼마나 크게 영향을 미칠지에는 다소 회의적이다. 그냥 읽을 때에는 고장났나보다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이 '인간의 본능이 고장났다'가 저자의 가장 큰 무기인데, 모든 명제 진행에 막히는 부분 또는 가정 설정 부분에 항상 인간은 본능이 고장났기에 이것은 사실이다고 맺는다. 그로 인해 저자 주장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저 명제를 신뢰하는 수밖에 없다.

저자의 기본명제 자체는 전혀 공감하는 바가 아니지만, 사랑은 일종의 환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한번쯤 생각해 볼만하다. 보통의 심리학자들은 사랑은 일시적 환상에 불과하다는 표현을 잘 쓰곤 한다. 과연 사랑은 본능에 이끌리는 행동이 아닌, 환상적 기대 속의 휘둘림일까?

흔히들 쓰는 곱상하다는 표현을 빌려보자면, 그 곱상한 사람이 스포츠 머리에 청바지 차림을 하고 있다고 치자. 관찰자가 남자일 경우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관심의 유발 여부를 좌우한다. 그 사람이 남자라면 참 곱상하게 생겼다로 넘겨버릴 일을 여자라고 인식하는 순간에 성적매력을 느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여자라는 인식. 관찰자가 남자라면 우리는 겨우 이런 여자라는 단어 하나에 내포되어 있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진짜 사랑은 느낌이 아닌 인식일까?

과연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고 애틋하게 여기는 사랑이란게 문화적, 인위적 산물이며 우리가 믿는 사랑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사실의 귀추는 어떻게 되었던지 일상생활에, 우리의 관계에 팽배하는 사랑이라는 낭만속에 저런 실존적 의미를 해석하기보다는 차라리 낭만적 사랑은 존재하며 우리는 본능에 이끌려 서로를 찾아 나서고 이성간에 서로를 위로한다고 믿는 편이 훨씬 나을거란 생각이 든다. 지금 사랑을 하고 사랑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사랑이 하나의 낭만으로 존재하는게 더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까? 다만, 이럴수도 있다는 것을 한 번 본 것이다. 나중에 그 낭만이 깨질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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