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여름을 좋아했다. 더워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언젠가 여름에는 아주 더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때부터 여름을 싫어하게 되었다. 지금은 싫어하는 것과 조금 다르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린 여름을 겪어서 무서운 것 같기도. 이젠 소나기도 없어졌다. 여름이면 갑자기 비가 내렸다 얼마 뒤 그치고는 했는데, 몇 해 동안 그런 여름을 지낸 적이 없다. 조금씩 바뀌어서 그렇게 됐을 텐데. 지금은 딱히 좋아하는 철은 없다. 싫어하는 철도 없다. 이건 철만 그런 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마음은 애매해지는 건지. 무엇인가 좋아하는 마음이 줄어드는 듯하다. 그것보다 많이 좋아하지 않으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직 살아있는데.

 

여름에 만나면 더 좋을 것 같은 나츠메 우인장을 오랜만에 보았다.

 

 

 

 

 

예전보다 친구와 잘 지내는 나츠메

 

  나츠메 우인장 19

  미도리카와 유키

  白泉社  2015년 05월 01일

 

 

 

 

 

 

 

 

 

 

 

 

 

지난해 구월에 18권 나왔는데, 19권은 이제야 나왔다. 올해는 이것만 나오고 다음 권은 2016년 봄에 나온다고 한다.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19권이기는 한데 나온 시간은 길다. 십년이 넘었으니 말이다. 지난해가 연재하고 십년째라고 했던가. 책이 나온 것도 십년이 다 된 듯하다. 1권 나온 건 2005년이고 내가 그것을 본 건 2012년이다(이 말 처음 하는 게 아닐지도). 이것도 쓸데없는 말이구나. ‘나츠메 우인장’ 오랜만에 보았다. 처음 봤을 때는 재미있었는데, 지금도 재미있다. 한권을 보면 다음 권이 보고 싶어져서. 이건 밀리지 않아서 이렇게 됐지만. 나올 때 바로 봐서 좋으면서도 조금 아쉽기도 하다. 사람 마음은 참 이상하다. 하기 전에 그것을 하면 기쁠 텐데 하다가도 막상 그것을 하고 나면 아쉬워한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고. 어딘가에서는 하고 싶지만 안 하는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어디고 무슨 일이었을까. 알면 안 되는 일을 덮어두고 사는 거였을지도. 이것은 좀 다른 이야긴가. 어떤 일이냐에 따라 밝히기도 하고 덮어두기도 한다. 어떻게 하느냐에 정답은 없는 건지도. 이런 게 나오는 것도 아닌데 이런 말을. 나츠메가 알고 싶어하는 일이 있기는 하다. 다시 생각하니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앞에 책을 보고 시간이 흘러서 어떤 이야기가 있었더라 하고, 마지막에 나오는 하코자키 이름 들어봤는데 했다. 지난번에 나츠메는 나토리와 요괴연구를 하다 죽은 하코자키가 숨겨둔 서재를 찾았다. 거기에 있던 서류는 다 타버렸지만. 하코자키를 따르던 요괴가 나츠메를 닮은 남자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가 나오는가 했는데 이번에 나오지 않았다. 나츠메는 하코자키 손녀한테 하코자키 집을 찾아온 사람 가운데 나츠메와 닮은 사람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그런 게 있으면 연락해달라고 했다. 나츠메가 그 집에 왜 갔느냐 하면, 그 집 둘레에 이상한 기척이 있어서였다. 그 집 둘레를 돌아다니는 건 마토바 집안 사람이 만든 요괴였다. 마토바 집안은 요괴 쫓는(없애는 일에 가까운) 일을 하는데, 힘센 식을 만들려고 약한 요괴를 많이 모아서 인형에 가두었는데 그게 달아났다. 나츠메는 하코자키 집에서 마토바를 만났다. 마토바는 요괴를 없애기 위해서 자신을 쫓아다니는 요괴를 이용하기도 했다. 마토바는 요괴는 다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괴 쫓는 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다 그럴지도. 나토리는 나츠메를 만나고 조금 달라졌다. 나츠메는 아직 우인장 이야기를 나토리한테 자세히 하지 않았다. 아니 그 모습이 나오지 않은 거고 이야기했을지도. 다음에 나오면 어쩌지.

 

오랜만에 시바타가 나츠메한테 전화해서 자신을 만나러 오라고 했다. 시바타는 초등학생 땐가 나츠메와 같은 반이었던 아이로 전에 한번 나왔다. 등나무 요괴를 사람으로 알고 만나다 나츠메를 찾아왔다. 이번에도 요괴와 관계있는 이야기를 했다. 나츠메는 타누마와 같이 시바타를 만났다. 시바타가 공원에서 만난 여자아이한테 들은 이야기로 얼마전에 여자아이 옆집에 벼락이 떨어졌는데, 그날 뒤로 밤마다 옆집에서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나츠메는 그 집 창문에서 인형 둘을 보았다. 그 집에 인형을 모으는 사람이 살았는데 인형은 저주하는 데 쓸 거였다. 많은 인형을 방에 두고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 인형마다 흠집이 나고 두 개만 멀쩡하면 성공한 거였다. 이것은 요괴 만드는 것과 비슷할까. 인형 안에 요괴가 들어갔다고 해야겠다. 그 요괴는 어렵지 않게 쫓아냈다. 타누마네 집인 절에서. 타누마와 시바타도 도왔다. 나츠메는 남과 다르게 요괴를 볼 수 있어서 친구를 잘 사귀지 못했다. 이제는 나츠메가 요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친구가 몇 생겼다. 시바타도 그 안에 들어간 건가. 시바타는 야옹 선생이 말을 한다는 걸 모른다. 알면 참 좋아할 것 같은데.

 

가끔 나츠메한테 도움을 바라고 찾아오는 요괴도 있고, 우연히 나츠메를 보고 도와달라고 하는 요괴도 있다. 이시아라이 나나마키는 나츠메를 보고 여섯달 전에 연락이 끊긴 제자 찾는 걸 도와달라고 한다. 스승의 날이 얼마전이었는데 이런 이야기가 나오다니. 이시아라이는 돌, 바위, 산의 부정을 깨뜻하게 씻는 요괴다. 꽃 그림을 그리면 부정이 씻긴다. 나츠메는 다른 사람은 그것을 못 봐서 아쉽게 여겼다. 나나마키는 고향에서 갈 곳 없는 요괴를 자기 집에 두게 하고 이시아라이 일을 가르쳤다. 제자는 실력이 좋았다. 훌륭한 이시아라이가 되어서 돌아오겠다고 하고 떠났는데 연락이 끊겼다. 이시아라이가 되려면 부정을 씻는 일을 어느 정도 해야 했다. 제자는 요괴 쫓는 사람한테 봉인당해서 더는 이시아라이가 될 수 없었다. 봉인당하는 것은 더려움을 타는 거여서. 제자가 연락을 끊은 건 다시 돌아갈 수 없어서였다. 나나마키는 제자한테 자신과 다니면서 돌아갈 곳을 찾자고 한다. 나는 제자가 사람을 원망하다 나쁜 요괴가 되었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런 일은 없어서 다행이다. 요괴도 사람도 혼자보다 둘이면 더 낫겠지.

 

 

    

 

 

 

레이코(나츠메 할머니)는 언제나 요괴와 싸워서 나츠메를 찾아오는 요괴는 나츠메한테 이름을 돌려달라거나 나츠메를 레이코로 알고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레이코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찾아왔다. 지금 생각하니 레이코가 히노에도 도와준 거였다. 레이코는 요괴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한 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많았을 것 같다. 오래전에 레이코가 간 산에서 힘 센 요괴 둘이 싸워서 힘들던 요괴들은 레이코한테 싸움을 말려달라고 부탁했다. 레이코는 자신이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했는데, 그 둘이 싸우는 까닭을 알고 레이코도 그 둘과 싸우기로 했다. 둘이 싸운 건 예쁜 요괴와 결혼할 사람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예쁜 요괴는 그 둘이 잡은 거였다. 예쁜 요괴는 그 둘 가운데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레이코는 다른 요괴보다 잡힌 요괴를 도와주고 싶었던가보다. 힘 센 요괴라 해도 레이코가 이겼다. 두번째는 좀 어려웠지만 다른 요괴와 힘을 합쳐서 이겼다. 그 산에 사는 요괴는 레이코가 다시 그곳에 찾아오지 않을까 기다렸다고 한다. 나츠메를 찾아온 요괴는 그때 레이코가 구해준 요괴와 결혼한다고 했다. 요괴도 결혼하다니(이건 앞에서 말해야 하는 거였다). 레이코 대신 나츠메와 야옹 선생이 찾아가서 축하했다.

 

사람은 친구를 사귀고 사는데 레이코는 그런 관계를 만들지 않았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레이코를 만난 요괴는 거의 레이코를 잊지 않았다. 레이코는 어땠을까. 사람이든 요괴든 친구가 되는 거 괜찮을 것 같은데.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츠메는 그렇게 산다. 그것은 다행한 일이다. 레이코는 쓸쓸하게 살았는데 늘 쓸쓸한 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요괴가 레이코를 좋아하고 기억하니까. 자신이 그것을 모르면 별 도움 안 될까. 레이코가 즐겁게 지내는 모습 언젠가 나오면 좋겠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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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하는  노랫말처럼 나도 자라도록 해야겠다. 오월에는 바람도 푸르다. 푸른 바람을 만나는 일은 기분 좋다. 바람이 부는 날보다 불지 않는 날이 더 많은 것 같기도. 이건 틀린 말이다. 바람은 언제나 불지만 내가 그것을 느끼지 못했겠지. 아니 아니 이것도 아니다. 햇빛이 뜨거울 때는 바람도 뜨겁다. 오월인데 이런 말을. 지금 오월은 예전과 다르다. 예전에 어땠는데, 하고 묻는다면 말하기 어렵다. 예전과 달라도 오월은 푸르다고 하는 게 가장 어울린다.

 

 

 

 

무서운 이야기는 무서운 것을 부를까

 

  노조키메   のぞきめ (2012)

  미쓰다 신조   현정수 옮김

  북로드  2014년 10월 20일

 

 

 

 

 

 

 

 

 

 

 

 

내가 무서운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 사람은 무섭다면서도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 보기도 한다. 그건 왜일까. 어렸을 때 내가 무섭게 본 것은 침대 밑에서 괴물이 나온 것과 전설의 고향에서 귀신이 ‘내 다리 내놔’ 하던 거다. 침대 밑에서 괴물이 나온 건지 그 안으로 사람이 끌려들어간 건지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른다. 어렸을 때 여러가지 보았을 텐데 생각나는 게 별로 없다니 아쉽다. 그런 것을 오래 기억해서 무서워하는 건 안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잊어버렸나보다. 책도 무서운 이야기는 별로 안 보았다. 아주 좋아하지 않아서일까. 조금 알고 싶은 마음은 있는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얼마나 무서울까 같은. 책을 봤을 때 무서운 적은 별로 없었다. 내가 아직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만나지 못해서 그런가보다. 아니면 나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 생각해서일지도. 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거기에는 놀라운 일도 있고 무서운 일도 있다.

 

백가지 이야기를 할 때는 초 백자루를 켜두고, 이야기 하나가 끝날 때마다 초를 하나씩 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초도 다 꺼서 방안이 캄캄해지면 그곳에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것도 무서운 이야기다. 그런데 백가지 이야기를 하룻밤에 다 끝낼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나라 이야기가 아니고 일본에 있는 이야기다. 책은 많이 안 봐서 모르겠고(영화 원작이 책일 때가 많겠다), 만화나 영화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하면 그 일이 실제 일어난다. 이것은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걸까. 그런 건 끝까지 보면 무서운 일이 왜 일어났는지 나온다. 아니 모두 밝혀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건 사람이 아닌 다른 게 나타나서 사람을 죽일 때다. 차라리 사람이 원한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고 하면 마음이 더 편할 거다. 그렇다고 원한으로 사람을 죽이는 게 옳은 건 아니다. 나는 그런 일을 겪지 않아서 이렇게 말하는 거겠지. 귀신, 곧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건 어떻게 가라앚혀야 할까. 자신을 죽인 사람한테만 되갚는 귀신도 있지만,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죽게 하는 귀신도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 귀신이 나온다는 곳에 안 가는 수밖에 없다.

 

귀신은 아니고 어떤 요괴는 사람이 자신을 봤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했다. 정말 이런 일도 있을지도. 나쁜 것을 일삼는 사람이 아니어도 그저 봤다는 것만으로 죄가 되는 때도(이건 사람보다 귀신 기준이다). 이것도 억울한 일이구나. 구미호도 그랬다. 구미호는 자신을 만났다는 말을 아무한테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람을 살려주었다. 이것은 왜일까. 구미호가 나온다는 소문이 나면 그곳에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어지럽혀서, 혹은 사람이 몰려와서 그곳에서 쫓아낼까봐. 그러고 보니 그런 것을 본 것 같기도 하다. 어떤 것을 멋대로 신으로 모시고, 안 좋은 일이 자꾸 일어나자 사람들은 그것을 원망했다. 개인이 그러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한 마을 사람이 그러면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면 다행인데, 사람이면……. 여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마을, 마을에서 따돌림 당하는 집안이 나오지만. 일본에는 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아니, 일본에만 있는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는 것을 무서워하는 일은 일본에 많을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꺼리는 일은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앞 이야기 <엿보는 저택의 괴이>에서 일어난 알 수 없는 일은 뒤에 나온 이야기 <종말 저택의 흉사>로 조금 설명이 되지만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귀신은 있을지도. 두번째에서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아이를 그곳에 간 사람은 봐서, 그 아이가 진짜 다른 건가 했다. 이런 모습은 아야츠지 유키토 소설 《어나더》에서도 볼 수 있다. 이것도 본 지 오래돼서 잊어버리고, 어떤 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 책 제목 노조키메는 ‘엿보는 눈(覗き目)’, ‘엿보는 여자(覗き女)’ 두 가지를 말한다. 자기 혼자 있는 곳에서 누군가 자신을 보는 것 같으면 무척 무섭겠다. ‘서장’에서는 경고한다. 책을 볼 때 누군가 엿보는 것 같으면 책을 그만 보라고. 겁을 주다니. 지금은 괜찮아도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틈에서 뭔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을 느낄지도(아직까지 그런 일 없음, 이건 책 속에서 있는 일인 듯하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무섭구나. 이런 생각도 든다. 누군가한테 원한 살 일을 하지 않으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조상이 안 좋은 일을 했으면 어쩌나 싶지만. 사람은 자신만 생각하지 않고 다음 세대도 생각하고 살아야겠구나.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노조키메는 억울하게 죽은 여자아이여서다.

 

여기에서 모두 논리있게 말해주는 건 아니다. 무서운 이야기는 그것 자체로 남겨둔다고 하지 않는가. 맨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상에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나는 이상한 일을 겪은 적이 있을까. 오래전에 이상한 걸 본 적 있는데 그건 별거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내 눈이 잠시 이상했던 건지도.

 

 

 

 

☆―

 

“어째서죠? 왜 이 공책을 읽으면 안 된다는 겁니까?”

 

“…… 오니까.”

 

“네?”

 

“그것이 엿보러 오니까…….”  (44쪽)

 

 

 

 

 

한밤에 일어난 일

 

 

 

이사하고 며칠이 지난 밤부터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하루가 바뀌는 영시였다. 처음에는 다른 집에 가는 사람인가 보다 했다. 하지만 발자국 소리는 우리 집 앞에서 멈추었다. 첫날은 잠결에 들어서 별로 마음 쓰지 않았다. 둘째날도 셋째날도 어김없이 발자국 소리가 우리 집 앞에서 멈추었다. 넷째날은 영시가 되기를 기다리다 문에 달린 렌즈로 바깥을 보았다. 밑에서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우리 집 앞에서 멈추었는데,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움직일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다시 시간이 흐르는 걸 느낀 건 이삼 분이 지난 뒤다. 아니 어쩌면 채 일분도 지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렌즈에 눈을 갖다댔다. 곧 렌즈 너머는 빨갛게 물들었다.

 

내가 정신을 잃었던 걸까. 멀리서 자명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곳이 사라져도 기억으로 남는다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윤대녕

  현대문학  2014년 06월 12일

 

 

 

 

 

 

 

 

 

 

 

 

산문은 소설과 다르게 작가 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소설도 비슷할까. 소설에서는 작가를 찾아보기 어렵다. 나만 잘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가끔 작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고 느낄 뿐이다. 소설을 보면서는 거기 나오는 사람과 자신을 겹쳐서 볼 때도 있는데, 나는 이것도 자주 하지 않는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못 봐서(비슷한 건 아주 조금일 때가 많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내 삶은 소설 재료로도 쓰지 못하겠구나 하는. 어쩐지 조금 슬프기도 하다. 예전에 어릴 때를 생각하고 뭔가 써 본 적 있는데 그저 그랬다. 그것을 좀더 재미있게 쓰면 좋을 텐데, 어려운 일이다. 제대로 해 보지도 않고 어렵다고 말하는 것일지도. 산문에서 작가가 하는 이야기를 보면 자신은 어땠는지 생각하기도 한다. 소설 볼 때도 그러는 듯하다. 소설에 나오는 사람과 나를 겹쳐보는 것은 하기 어려워도 나는 어떤지 생각하는구나. 책을 읽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따라 책을 보는 게 다를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처음에는 모두 읽는 사람일 뿐일지도. 비평하는 사람은 다르게 읽을 것 같다는 거다.

 

이 책을 읽다보니 예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곳들이 떠올랐다. 나는 어디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마음에 드는 공간도 없다. 공간은 사람이 있을 때 그곳에 있지, 사람이 없으면 그곳도 사라진다고 한다. 사람은 바로 자신과 누군가겠지. 내가 사는 곳에서 다른 곳(위쪽)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타려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다. 지난날 이야기다. 지금은 배 타고 역에 가지 않아도 된다. 내가 사는 곳에도 역이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멀리까지 가지 않았다. 지금은 가는가보다. 옮긴 역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아직 한번도 안 가봤다. 배가 아닌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러 가도 되었다. 예전에는 그 배를 타는 사람이 아주 많았는데, 지금은 배가 아예 없어졌을까. 몇해 전(이것도 시간이 많이 흘렀다)에 배를 탔을 때는 사람이 아주 적었다. 공간도 공간이지만 배를 타고 내리는 풍경 자체가 사라져버린 듯하다. 어디에 자주 다니지도 않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사는 곳이 섬이어서 배를 타야 했던 건 아니다. 그때는 배를 타고 다른 지방 역에 가는 게 나았다. 밑으로 가려면 다른 방법으로 가야 했다.

 

 

           
           

                   역이 있던 곳 빈 터다, 아니 오래전에 가 봐서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비밀이랄 것은 없지만 사진을 보면 내가 어디에 사는지 알겠다

                           나무는 역에서 왼쪽이고 더 왼쪽으로 들어가면 시장이다

 

 

 

내가 사는 곳에 있던 역은 다른 곳으로 옮겨서 예전에 있던 역은 없어졌다. 예전에 나는 역은 그대로고 철길을 놓는 건지 알았다. 철길은 다른 곳에서 이곳과 이어졌겠지. 예전 역은 작아서 비둘기호가 다니고 이게 사라지고 무궁화호가 되기도 했다(가끔 화물차도 다녔다). 이름만 바뀌었지 가는 곳은 같았다. 어떻게 이것을 아느냐 하면, 그 기차를 타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역 바로 옆은 재래시장이다. 어렸을 때는 엄마와 함께 시장에 다니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 시장에 안 가게 되었다. 이제는 시장까지 가지 않아도 물건을 살 수 있다. 이것은 어디나 비슷하겠지. 예전에는 시장이 있는 곳이 내가 사는 곳 중심이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곳이 딱히 없는 듯하다. 이게 좋은 건지 아쉬운 건지. 그래도 아직 그곳에는 사람이 산다. 많은 사람이 가지 않아도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은 시장에 가겠지. 아침에 기차를 타면 장사하는 사람이 많았던 듯하다. 시장에서 물건을 떼어가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시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극장 두 곳이 가까이에 있었다. 내가 영화를 보러 극장에 자주 간 건 아니다. 학교에서 단체로 볼 때 갔다. 나 혼자 극장에 간 적 있다. 그때 왜 혼자 갔을까. 나는 혼자 가는 것을 싫어해서 극장에 다니지 못한 것 같다. 그런 곳에는 누군가와 같이 가야 할 것 같아서. 그것도 있겠지만 혼자서라도 영화를 보아야겠다는 마음이 없었던 거겠지. 친구와 같이 간 적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영화를 봤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접속>만 생각난다. 요즘은 도서관에서 영화를 보여주는 날도 있는데 한번도 못 가 봤다. 거의 어린이와 엄마가 올 것 같아서. 아이와 엄마가 보기에 좋은 것만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거기에 못 가서 아쉬운 건 아니다. 예전에는 텔레비전 방송으로 영화를 해주었지만 지금은 그게 없어졌다. 그게 없어지기 한두해 전에 안 보게 되었지만 아쉬운 점이다.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면 인터넷으로라도 봤겠지. 그러지도 않으면서 아쉬워하다니. 나는 영화를 찾아서 보기보다 기회가 되면 보는 것으로 생각하는가보다. 극장이 있던 곳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그곳까지 안 가 봐서.

 

시내에는 책방도 있었다. 예전에는 여러 곳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줄었다. 책방은 집에서 멀어서 가끔 갔는데, 그곳에서 친구와 만나기도 했다. 도서관은 예전에 집에서 먼 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그 도서관 건물은 무엇으로 쓸까. 예전 도서관 뒷쪽 은행나무밑에 햄스터를 묻었는데. 볼 일이 없으면 가지 않는 곳이 많구나. 중학생 때는 자주 못 샀지만, 고등학생 때는 테이프를 좀 샀다. 레코드 가게에 몇번 갔더니 그곳에서 일하는 언니가 나를 알아보기도 했다. 나중에는 테이프 값을 깎아주었다. 그곳도 시간이 흘러서 사라졌다. 일하는 언니와 이야기를 별로 나누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쉽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한 기억은 거의 없구나. 친구와 함께 간 바다가 있기는 한데. 나한테도 그런 일이 있었다니 좀 신기하다. 윤대녕은 글을 쓰려고 떠난다고 한다. 나하고는 반대다. 나는 다른 곳에서는 책도 못 읽고 글도 잘 못 쓴다. 집에서 잘 쓰는 것도 아니지만. 이것은 사람마다 다른 거겠지. 마지막에 글쓰는 이야기가 되다니. 나는 작가보다 짧은 동안 지난날을 생각했다. 이런 시간 괜찮은 듯하다. 떠올릴 기억이 얼마 없어서 조금 아쉽다. 이것은 앞으로도 비슷할 것 같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생각하는 것도 괜찮을까.

 

 

 

희선

 

 

 

 

☆―

 

“가장 인상에 남은 장면은 아빠가 혼자 빗속에서 낚시를 하는 모습이었어요. 근데 그 모습이 저는 왠지 쓸쓸해 보이던데, 이상하죠?”

 

이상할 건 없다. 그것은 우리가 서 있던 공간이, 우리가 그 자리를 떠남과 동시에 흔적 없이 사라질 거라는 어쩔 수 없는 예감 때문이란다, 얘야.  (74~75쪽)

 

 

“네, 우체부 같은 작가가 되어 돌아가고 싶습니다. 사람들한테 온갖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의 비의를 전달해주는 게 되어서 말이죠. 그동안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것뿐입니다.”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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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도 길고양이가 되려고 하지만

 

  치즈 스위트 홈 9

  코나미 카나타

 

 

 

 

 

 

 

 

 

 

 

 

 

어렸을 때는 만화책을 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집에서는 그런 말 듣지 않았는데, 학교에서 만화는 보면 안 된다고 했던가. 정말 그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학교 선생님이 만화는 안 좋다고 했을 거다. 지금 생각하니 만화책은 쉽게 보기 어려워서 안 봤던 것 같다(만화책뿐 아니라 다른 책도 안 봤구나). 고등학생 때 아주 가끔 책방에 갔는데 거기에는 만화책이 없었다(만화책이 있는 책방을 보고 책방에서도 만화책을 파는구나 한 적도 있다). 지금도 만화책 빌려주는 곳 있겠지만, 예전에는 만화책을 거의 빌려서 봤을 거다. 어쩌면 만화책을 보는 것보다 만화방에 가는 것을 안 좋게 여겼던 건지도. 나는 한번도 안 가 봤다. 책 빌려주는 곳에서 한두 번 빌려다 본 적은 있다. 그때 언제까지 봐야 하는지도 못 물어봤다. 그게 뭐 어렵다고 물어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루만에 다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주 조금만 빌려다 보았다. 그것도 몇번뿐이다. 누군가 만화책 빌려보기보다 사서 봐야 한다고 말한 것을 듣기도 했다. 그것은 우리나라 만화가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만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든 만화가 다 좋은 건 아니지만, 만화로 배울 수 있는 건 많다. 거기에서 가장 큰 건 상상력이다. 만화를 봤다고 상상력이 는 건 아니지만. 나는 띄엄띄엄 보고 얼마 안 봐서 그런 거겠지. 진짜 많이 보는 사람은 또 다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만화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만화를 본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움직이지 않는 그림을 보는 게 조금 어려웠다(내용을 더 보기는 했다). 내가 더 좋아하는 건 움직이고 말도 하는 만화영화다. 만화책도 자꾸 보다보니, 실제는 멈추어 있지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게 되었다. 이것도 자주 봐야 그것을 느끼는데 가끔 봐서, 감이 떨어지기도 한다. 밀려있는 책 봐야 할 텐데. 책 읽을 때는 잠깐 다른 생각도 하지만, 만화는 여기에 빠져들게 한다. 글자뿐 아니라 그림이 있기 때문이겠지. 글을 보고 상상하는 게 더 나은 걸까. 그건 그것대로 좋은 거고, 만화는 만화만이 가진 좋은 점이 있는 거다. 세상에는 볼 책이 많기도 하구나. 거기에서 볼 수 있는 게 얼마 안 된다는 게 조금 아쉽다.

 

새끼고양이는 몇달만 지나면 엄청 클지도 모르는데 치는 아직도 새끼고양이다. 예전에도 한 말이다. 눈병이 나서 엘리자베스 칼라를 한 치는 그것을 아주 귀찮아했다. 그래도 위를 보고 계단을 오르거나 밥그릇을 엘리자베스 칼라로 다 덮어서 밥을 먹기도 했다. 딱 하나만은 할 수 없었다. 조금 열린 문을 지나 밖으로 나가는 일이다. 다음날 엘리자베스 칼라를 뺐다. 아빠는 치가 밖에 나가는 것을 걱정해서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닫았다. 이것은 바깥이 위험해서 아이를 밖에 내보내지 않는 것과 같구나. 치는 코치가 공원에서 기다린다고 생각하고, 코치는 공원에서 치를 기다렸다. 아빠는 옆집 사람이 개 산책시키는 것을 보고, 치한테도 목걸이와 줄을 달았다. 아빠는 치와 산책할 수 있다고 기뻐했는데, 치는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해서 짜증냈다. 치가 이리저리 움직이니 목걸이가 빠졌다. 치는 곧장 공원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코치가 없었다.

 

한편 코치는 공원 분수에 있다가 더는 못 기다려 하고 다른 곳으로 가다 치를 보았다. 치인지 알고 따라가서 반갑게 알은체했는데 치와 닮은 고양이였다. 어미와 새끼 한마리가 더 있었다. 그것은 치 엄마다.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니. 코치를 기다리던 치는 그만 집에 가야 하나 했다. 거기에 삼색털고양이가 와서 치한테 그만 집에 가라고 했다. 치는 코치가 집에서 나오지 않은 건가 했는데, 삼색털고양이가 코치한테는 집이 없다고 말했다. 전날 코치가 늦게까지 분수에 있었다는 말도 했다. 해가 지고 어두워졌을 때에야 치와 코치는 만났다. 고양이가 다른 고양이 친구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찾아다닐까. 집에 돌아가겠다고 말한 치한테, 코치는 집은 귀찮은 거다 하고 자신은 자유롭다고 했다. 이 말에 치도 자유로워지겠다고 한다. 치는 바깥에서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른다. 먹이를 먹으러 가서 다른 큰 고양이 때문에 얼마 먹지 못하고 다른 집에 가서 밥달라고 울었다(사람이 보면 우는 거지만 치는 말한 거다). 그나마 거기에는 코치와 둘만 있어서 배불리 먹었다. 치는 밥을 먹고 배가 부르면 누워버린다. 치가 길에서 눕고 자려고 하니, 코치가 자면 안 돼 하고 깨웠다. 얼마 뒤 코치까지 잠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치를 찾으러 엄마 아빠 요헤이가 밖에 나와서 치와 코치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전에 아빠도 치와 닮은 고양이를 보았다.

 

잠에서 깬 치와 코치는 거기가 어딘가 하고 깜짝 놀랐다. 치는 집이란 걸 알고 어떻게 자신이 집에 있는지 신기하게 생각했다. 코치는 집이란 게 어떤 건지 잘 몰랐다. 먹이를 먹고 편하게 눕고 요헤이와 놀고 누워서 집이란 거 괜찮네 했다. 새끼고양이가 바깥에서 사는 건 쉽지 않을 거다. 사람뿐 아니라 같은 고양이도 조심해야 하니까. 치는 집에서 살아서 밥을 먹고 배가 부르면 바로 눕는다. 그런 치를 보고 놀라는 코치 모습이 조금 웃겼다. 다음권에서는 아빠가 치를 찾는다는 전단지를 본다. 치는 어떻게 될지. 앞으로도 요헤이네 집에서 살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책을 읽고 나서 쓸 때는 어찌어찌 쓰는데 시간이 지나서 내가 쓴 것을 보면, 대체 왜 이렇게 쓴 거지 한다. 이것도 그렇다. 한권이 아니고 여러권인 만화를 보다보니 그렇기도 한데, 뭔가 다른 생각도 나면 좋겠다. 쓸 때는 왜 그런 생각을 못하는 건지. 책을 보고 어떻게든 쓰면 좋다. 기분 좋은 건 그때뿐이라는 거다. 나중에 봐도 좋게 써야 할 텐데. 나는 책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는지 말하기보다 이 책이 어떤지 말하고 싶은가보다(늘 그런 건 아닌데 그럴 때가 더 많다). 이 책 다음권을 조금 봤는데 치를 찾는다는 전단지 보는 건 거의 끝에 나온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덧붙일 수 있다

 

  추억의 시간을 고칩니다

  다니 미즈에   김해용 옮김

  예담  2014년 10월 06일

 

 

 

 

 

 

 

 

 

 

 

 

지금은 세상이 빨리 가는 것처럼 시간도 빨리 가는 것 같다. 시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시간이 있는 사람 얼마나 될까. 조용한 방에서 시계 초침만이 움직이는 상상을 하면 좀 무서울까. 그런 일 한번이라도 겪었던가. 지금 생각하니 한번도 없었다. 아니 새벽에 어두운 방에서 잘 때쯤 들어본 것 같기도 하다. 태엽을 돌려주면 돌아가는 시계도 없고 그런 걸 본 적도 없다. 태엽을 돌리는 시계가 벽시계만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손목시계도 있다. 사람은 참 편한 것을 좋아한다. 태엽감는 게 귀찮아서 건전지만 갈아끼우면 되는 것을 만들었으니 말이다(이것은 시계만 그런 건 아니구나). 시계 잘 모르면서 이런 말을 했다. 어디선가 보니 시계는 여름과 겨울에 한번 손봐야 한다고 했다. 철길도 여름에는 늘어나서 빈틈이 있다던가. 나는 여름과 겨울에 손봐줄 섬세한 시계는 없다. 내 시계는 산 것도 아니고 길에서 주웠다. 멀쩡해서 약(건전지)만 넣어서 쓴다. 시계줄은 오래돼서 갈아야 하는데 귀찮아서 그냥 두었다. 밖에 나갈 때 시계 안 갖고 간다. 시간을 몰라도 큰 문제는 없기 때문이구나.

 

커다란 시계는 사람이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손목시계도 만들 수 있는가보다. 하긴 오래전에는 다 사람이 부품 하나하나를 만들어서 시계를 만들었겠지. 지금은 그런 시계 비쌀 거다. 옛날에도 비쌌겠다. 사람 품이 많이 드는 건 거의 비싸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같은 물건을 많이 빨리 만들게 되고는 가격이 내렸다. 이것은 서민한테는 좋은 일이기는 하다. 그런데도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왤까. 시계도 그렇지만 요즘은 물건을 쉽게 바꾼다. 조금 고치면 쓸 수 있는 것도 새 것으로 바꾼다(이건 물건 파는 사람이 그렇게 하게 만들기도 한다). 시계가 고장났다고 고치는 사람 별로 없겠지. 고치는 것이나 새로 사는 것이나 값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추억이 없는 것인가. 아니 이건 아니다. 물건은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추억을 쌓아간다. 나한테는 그런 물건이 없는 것뿐이구나. 그래도 뭔가 한번 사면 오래 쓴다. 새로 사는 걸 귀찮아하는 것이기는 하다. 나는 한번 사면 오래 쓸 수 있는 게 좋다. 시계 이야기하다가 이런 말을 하다니. 여기에 시계사가 나와서 그렇다. 젊은 나이에 시계를 고치는 일을 하는 거구나. 이 일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도 아주 없는 건 아닐 거다. 이다 슈지는 시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본래 꿈은 그거였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도 가게가 많이 모인 곳이 줄어들었다. 그 가게를 잇는 사람이 없어서 거의 문을 닫는다. 사람들이 이제는 그런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기 때문이겠지. 우리나라로 치면 시장일까. 그래도 모든 가게가 문을 닫은 건 아니어서 그곳에서 사는 사람도 있다. 시계방(시계를 고치는)이 있고 다음은……, 모르겠다. 가끔 문을 여는 곳도 있는 듯하다. 이야기는 다섯편이다. 다섯편 다 괜찮기는 한데 첫번째는 좀. 좋게 보이게 하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슈지가 오르골을 고쳐서 또 다른 추억이 늘었지만. 다른 책에서는 아버지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려고 식구들과 함께 살지 않았지만,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돌아왔다. 첫번째 이야기에 나온 아버지는 위험한 일(사진 찍기)을 해서 자신이 딸한테 아버지 노릇을 못한다면서 아예 죽은 걸로 했다. 아버지는 딸이 그리워서 몰래 보러왔는데 그때마다 거기에 고양이가 있었다. 딸은 고양이와 아버지가 이어져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걸 딸이 모르는 게 나을까. 살아있는데 죽었다고 한 게 좀 마음에 안 들었다. 내가 이상한가. 딸이 제대로 커서 다행이다. 이제는 아버지가 없어도 살아갈 나이가 되었다.

 

나이가 어려서 자기 마음을 잘 몰랐던 사람은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 일을 슈지와 아카리가 했다. 그렇게 해서 반지를 찾았다. 그 반지는 오랫동안 그 옷속에 있었던 걸까. 신기한 일이 일어난 걸까. 딸을 잃은 엄마와 엄마를 잃은 딸은 같은 인형을 찾았다. 어쩐지 이 두 사람 관계있는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그런 일이 있었나보다. 그래도 딸은 엄마를 생각하고 엄마는 딸을 생각했다. 그걸로 오래전 상처가 좀 나았겠지. 슈지 이야기도 나왔다. 슈지는 형이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했는데, 형이 그런 마음을 가진 적이 한번도 없는 건 아닐거다. 자신은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못하는데 슈지는 시계사가 되려고 공부했으니까. 하지만 형도 알았다. 자신보다 슈지한테 시계사가 될 재능이 있다는 걸.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게 맞으면 좋겠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다. 그런데 잘 못해도 하면 안 될까. 슈지는 형이 마지막으로 한 말을 잘 듣지 못했는데 여섯해가 지나서 확인했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구나. 슈지는 마음 편하게 앞으로 나아가겠지. 지금까지 그러지 않은 것 같다. 겉으로는 밝아보였지만 지난날에 매여 있었다. 이제는 그것을 떨쳐냈다.

 

어릴 적 기억이 다 옳은 건 아닐 거다. 어떤 때는 자기 스스로 기억에 뚜껑을 닫아버리고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것은 안 좋은 일일 때 그러는데, 좋았던 것도 그러는가보다. 아니 그때는 좋았지만 나중에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해야 했구나. 아카리는 어느 한때 기억을 잊어버렸는데, 그것을 기억해냈다. 벌써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다. 그때는 아프고 슬퍼서 잊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제대로 몰랐던 게 아닐까.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잘 모를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떤 일과 제대로 마주하는 시간은 필요하다.

 

 

 

 

 

편지야 잘 가

 

 

 

우체국 앞을 지나는데 누가 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둘레를 둘러보니 우체국으로 들어가는 계단 옆 우체통에서 나는 거였어요. 처음에는 우체통이 우는 건가 했습니다. 잘 들어보니 우체통은 아니고 우체통 속에 들어가지 못한 편지였어요. 우체통이 우는 소리를 들어도 놀랐을 테지만, 편지가 우는 소리를 듣다니 제 귀가 이상해졌는지 알았습니다. 혹시나 하고 우는 편지한테 말을 걸어봤어요. 그랬더니 편지는 자신이 우체통 속에 들어가지 못해서 운다고 했습니다. 우체통에서 편지 넣는 곳을 보면 미는 뚜껑 같은 게 있잖아요. 편지는 거기에 걸려있었어요. 편지 보내는 사람이 제대로 넣지 않은 거였어요. 집배원이 편지를 거두러 와도 그 편지를 알아차릴 테지만, 우는 편지를 그냥 둘 수 없어서 제가 우체통 속으로 넣었어요.

 

편지는 가야 할 곳에 잘 갔을까요.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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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나눠서 읽고 잘 못 썼지만, 여기에 잘못 쓰인 게 있어서. 이 말은 예전에도 했던 거다. 그때는 다른 책이었는데, 여기에 또 나올지 몰랐다.

 

 

 

 

거미줄로 들어가다

 

  무당거미의 이치 상   絡新婦の理 (1996)

  교고쿠 나쓰히코   김소연 옮김

  손안의책  2014년 08월 25일

 

 

 

 

 

 

 

 

 

 

 

교고쿠 나쓰히코 책 본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는데 또 보게 되었다. 이것보다 앞에 것 《철서의 우리》도 세권이었는데, 이 《무당거미의 이치》도 세권이다. 얼마전에 ‘백귀야행’ 두권을 다 보았는데, 거기에서 본 사람이 여기에도 나와서 그렇구나 했다. 거기에서 제대로 끝나지 않은 이야기 뒤가 이것인가 싶기도 하다. 병풍 위에서 사람을 엿보는 요괴를 본 다다 마키, 결혼을 앞두고 웃는 연습을 하다 누군가한테 죽임 당한 여자는 여기에서 피해자로 나온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 남자는 가까이에 사는 열아홉살 처녀를 죽이고 말았다. 그 사람이 여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범인이라는 말이 나온다.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일을 하는 여자를 싫어하는 형사도 나온다. 아내 기모노에서 손이 나와서 집을 뛰쳐나간 스기우라 다카오 아내 스기우라 미에는 남편을 찾았다. ‘백귀야행’이 생각나서 이 책을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그것은 그거고 이것은 이것이다 해야 하는데, 아주 상관없지 않기도 하다. 다다 마키는 여기에서는 아주 짧게 나와서 별로 안 좋게 보일지 모르겠지만(허가 받지 않고 사람한테 방을 빌려주었다. 몸을 파는 사람한테), ‘백귀야행’을 봤다면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이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구나. 그것을 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백귀야행’은 교고쿠도 시리즈에서 크게 다루지 않은 사람 이야기다.

 

처음 시작은 여자가 누군가한테 죽임 당한 일이다(그전에 다른 이야기가 잠깐 나왔다). 이게 네번째였다. 무엇보다 죽은 여자 모습이 비슷했다. 두 눈이 뽑힌 거다. 그래서 경찰은 한 사람이 네 여자를 죽였다고 여겼다. 앞에 죽임 당한 세 여자는 품행방정(이 말을 그대로 쓰다니)한 열아홉살 처녀, 물장사하는 서른다섯살 여자, 근엄하고 성실한 서른살 여교사다. 네번째는 정통있는 포목점 안주인이다. 네 사람한테 공통점은 없다. 이것은 정말 연쇄살인일까. 처음 범인으로 보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았다는 말을 형사 기바 슈타로가 듣는다. 기바 슈타로는 가와시마 신조를 알아서 검은 안경을 주웠는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때를 놓쳤다. 마음속으로는 그 사람이 여자를 죽이지 않았을 거다 생각한 건지도. 아직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다. 네 사람을 같은 사람이 죽인 건지, 다른 사건인지. 처음에 죽은 여자는 다를지도 모르겠다. 세 여자는 연관 있을지도. 기바가 가와시마 사무실에 갔을 때 그곳에서 달아나는 가와시마를 만났다. 가와시마는 기바한테 아직 붙잡힐 수 없다 하고, ‘여자한테, 거미한테 물어봐’ 하는 말을 남겼다.

 

첫째 권에서는 세가지 이야기가 얽혀간다. 첫번째밖에 말하지 않았는데, 두번째는 성 베르나르 여학교에서 저주를 걸어서 사람이 죽은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 학교 선생이 목이 졸려 죽임 당한다. 그 선생은 학생한테 나쁜 짓을 했다. 그 학생은 저주해서라도 선생을 죽이고 싶어했다. 이 학교 선생이었던 여자도 학생이 저주해서 죽었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세번째 여자다. 세번째는 이 학교를 지은 오리사쿠 집안 이야기다. 당주라고 할 수 있는 오리사쿠 유노스케가 죽었다. 이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선녀와 나무꾼이다. 뒤는 조금 다르지만 이 이야기는 그저 비슷한 것일 뿐일까. 은혜 갚은 학은. 부잣집은 언제나 재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난다. 이 집에서는 재산보다 누가 오리사쿠 가문을 이을까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이것도 다르지 않은 건가). 오리사쿠 집안에는 딸만 태어나서 데릴사위를 얻었다. 죽은 유노스케한테도 딸이 넷이었다. 첫째는 죽고, 둘째는 결혼했는데 남편이 별로였다. 셋째는 결혼하지 않겠다 하고, 넷째는 아직 중학생이다. 괜찮지 않다 해도 집안을 이을 사람은 둘째딸 남편밖에 없다. 그런데 오리사쿠 유노스케 장례식 다음날 그 사람도 죽임 당한다. 어쩐지 죽는 사람이 많다. 여자만 죽는 게 아니고 남자도 죽는다. 여자와 남자를 죽이는 것은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맨 앞에서 스기우라 미에가 사라진 남편 스기우라 다카오를 찾는다고 했는데, 미에는 탐정 에노키즈 레이지로한테 남편을 찾아달라고 한다. 남편과 헤어지기 위해서다. 미에는 여성 운동을 하는 듯하다. 사람들과 모여서 공부하는데 그곳에서 오리사쿠 집안 셋째딸 오리사쿠 아오이를 만났다. 남편 스기우라 다카오는 죽임 당한 술집 여자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성 베르나르 여학교 이사장은 그곳에 퍼져 있는 이상한 일을 거두어 달라는 일을 에노키즈 레이지로한테 부탁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교고쿠도 추젠지 아키히코다. 정리하는 것도 복잡하구나. 추젠지 아키히코는 우연히 일어난 일처럼 보이는 일을 누군가 일이 그렇게 일어나게 이끌었다고 한다. 지금 관심을 갖게 한 사람은 스기우라 다카오다. 스기우라 다카오는 죽임 당한 여자와 있었고, 선생이 죽임 당한 학교에 있었다. 이 사람이 지금까지 일어난 일에 관계있을까. 그것보다 이용당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죽일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사람은 겉보기와 다를지도 모르겠다.

 

이 책 한권을 보고 알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제목에 무당거미가 들어가서 누군가 거미줄을 쳤다고 말한 건지도. 오리사쿠 집도 거미집처럼 말하기도 했다. 베를 짜는 기계 역직기를 만들어서 부자가 되었다고. 이름에도 짠다는 말이 들어간다. 일본말로 직녀를 오리히메라고 한다. 견우와 직녀도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긴데. 저주로 사람을 죽인다는 일을 푸는 게 먼저구나. ‘검은 성모’ ‘거미의 종(거미를 따르는 하인일까)’ 사람은 저주로 죽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 걸 거다. 남은 두권을 보면 왜 그랬는지 알 수 있겠지. 여성 운동도 관계있을까.

 

 

 

 

☆―

 

마스다가 생각하기에 추젠지는 수수께끼를 해명하지 않는다. 추젠지는 수수께끼에 해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수수께끼 쪽을 일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까지 해체하는 것이다. 수수께끼가 수수께끼가 된 배경을 흔들어, 수수께끼 자체가 효과 없는 모습을 비슷하게 만들어 낼 뿐이다. 다시 말해서 현실을 일단 못 쓰게 만들어 버리고 속임수든 궤변이든, 수수께끼가 수수께끼가 될 수 없는 또 하나의 현실을 겉으로 드러내는 게 추젠지 방식이다.  (358쪽)

 

 

 

 

 

 

 

책을 다 읽었지만

 

  무당거미의 이치 중 · 하  

  絡新婦の理 (1996)

  교고쿠 나쓰히코   김소연 옮김

  손안의책  2014년 08월 25일

 

 

 

 

 

 

 

 

 

 

“당신은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인자들에 일부러 자극을 주어서 사건을 산출하는 네트워크, 그 망상조직을 재생산하여 사건이 이뤄지게 하는 환경을 만들어냈어요. 개개의 인자나 그 행동은 계획 자체에는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계획의 움직임──사건은 인과 작용에는 반응하지 않고, 그저 사건 자체를 되풀이해서 산출해 나갔지요. 당신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움직이는 것 자체가 시스템, 곧 체계를 규정하는 계획을 생각, 발동시키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저는.”

 

“──이 경우 주체와 객체, 능동과 수동이라는 이원으로 쌍을 이루는 인식론 도식은 효과가 없어지지요. 그렇게 되면 깨달음 없는 관찰자는 일을 잘못 볼 뿐입니다. 관찰자는 당사자가 파악한 현실을 객관성을 갖고 궤도를 고칠 수 있는 처지에는 더 이상 있지 않게 되고, 알 수 없는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관찰은 그저 현실을 숨길 뿐인 행위가 되지요. 움직여버린 계획은 그저 끊임없이 사건의 되풀이, 재생산을 되풀이합니다. 그래서──그리고 당신 바람은 이루어졌어요. 하지만 당신은 반면, 많은 것을 잃었지요.”  (상권, 21쪽)

 

 

마지막까지 읽었는데 제대로 안 건 반쯤 될까.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정리해서 말하기 어렵다. 교고쿠 나쓰히코 책은 거의 그런 식으로 본 듯하다. 예전에는 추리소설을 본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말을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알쏭달쏭한 느낌은 비슷하다. 무엇인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잘 몰라도 그런 것을 재미있게 느끼는 것인지. 두번보다 세번쯤 보면 반 이상 알 수 있을까. 게으른 나는 그렇게까지 읽지 못한다. 이번에는 예전 이야기가 나오기도 해서 더 복잡하다(다른 데도 앞에 이야기가 조금씩 나온다). 사람 관계가 복잡하다. 여기에서 떠오르는 말은 ‘세상은 넓은 듯하지만 좁기도 하다’다.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 《광골의 꿈》 《철서의 우리》에서 세 가지는 어렴풋이 생각나는데 ‘광골의 꿈’은……, 그때 나온 사람이 여기에 나온 것인가. 《백귀야행》에 나온 것도 조금 이해했다. 다는 아니고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여긴 사람(히라노 유키치)만 알았다. 아내 기모노에서 손이 나왔다고 여긴 사람(스기우라 다카오)도. 그리고 계획은 벌써 그때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무섭다. 작가가 처음부터 생각하고 쓴 것인지, 쓰면서 그렇게 엮은 것인지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시대 때문에 일어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는 일본에서 내려오는 문화가 있고, 서구문화가 들어왔다. 가부장제가 서구문화라고만 할 수 없겠지만. 이것은 우리나라도 비슷했을 것 같지만, 아니 우리나라 조선은 유교 사회였기 때문에 일본보다 더 오랫동안 가부장 사회였다. 불교도 비슷했을까. 우리의 가부장 사회는 더 오래됐을 거다. 조선 초기에는 조금 달랐다고 하지만. 일본에는 모계 사회였던 때가 있고, 무사시대가 되면서 가부장 사회가 되었다고 한다. 서양문화 또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에 모계 사회 풍습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뒤 남성은 그것을 다르게 바꾸어버렸다. 여자 쪽에서 보면 보통인 게 남자 쪽에서 보면 그것은 매춘이었다. 여기 나온 이야기는 모계 사회와 가부장 사회가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싸움에 여러 사람이 휘말리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그 일을 꾸민 사람도 거기에 걸려든 건지도 모르겠다. 한 집안에서 일어난 핏줄 싸움이 있었고, 나중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한 싸움이 더해졌다고 해야겠다.

 

오리사쿠 집안은 모계 집안이다. 대대로 데릴사위를 들이고 첫째딸이 집안을 이었다. 딸이 낳은 아이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한사람이 바깥에서 딸을 낳아와서 집을 잇게 했다. 아내가 가만히 있었을까. 자신의 핏줄(오리사쿠)을 끊기게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것은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희생당한 것은 여성이다. 딸이라고 해야겠다. 시대는 창부, 곧 몸 파는 여자를 차별하고 여성도 차별했다. 모계 사회 풍습은 아이 아버지가 누구든 상관없다. 어머니가 낳은 아이면 되었다. 마치 이것은 창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조금 다르다. 돈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전쟁이 끝난 뒤 그런 것을 끌어내린 게 바로 남성이다. 남성은 자기 핏줄을 남기고 싶어하지 않는가(다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모계 집안에 반발한 사람이 나올 법도 하다. 사람들이 죽은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얽혀서 죽었다. 누군가는 저주했고, 다른 한쪽은 자기 어머니를 죽게 했다고 여겼다. 두쪽 다 진짜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눈알 살인마를 조종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주 아닌 건 아닌가.

 

여러 사람이 죽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일을 숨기고 자신이 있을 곳이 생기는 건가. 어떤 일은 바라지 않았을 텐데,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일은 멈추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죽고서야 멈추었다. 자신도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자기 손은 더럽히지 않고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는 사람은 정말 싫다.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여성 차별이 심한 때여서일까. 그 사람 마음은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도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남자가 전쟁에 나가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단다. 듣고 보니 맞는 듯했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말이 맞을까. 사람에 따라 여성스러운 남자도 있고, 남성스러운 여자도 있다. 자신이 가진 성향을 죽이고 사회에서 말하는 것에 따라야 할까. 지금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그것 때문에 괴로운 사람 많았을 거다. 여성이 여성 인권을 위해 운동한다고 해도 가부장제에서 자유로울까. 아쉽게도 그렇지 않은 듯하다. 어딘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건 쉽지 않다. 자신한테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 없는지 늘 확인해보아야 한다. ‘백귀야행’을 보고 스기우라 다카오가 자기 아내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아내 또한 스기우라를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종교 이야기도 꽤 나온다. 일본 민간 신앙도. 그런 것은 그런가보다 하면서 보았다. 사람이 책을 보고 안 것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의 차이도 알아야 하는구나. 성 베르나르 여학교는 기독교와는 관계없었다. 그렇게 보였는데 아무 상관이 없었다니. 그것 때문에 해를 입은 아이도 있다. 오리사쿠 집안 딸은 다 안됐다. 하나 아쉬운 것은 신라에서 왜로 건너간 하타씨가 중국 진시황 후손이라 한 거다(여기에는 하타씨를 쓸 수밖에 없었다). 《항설백물어》에도 그런 식으로 나왔는데. 그때는 작가도 그렇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보니 그렇게 알고 있었던가 보다. 이 책이 나온 1996년에는 일본 역사책에 그런 말이 더 많았을지도(지금은 제대로 됐을까. 절에 있는 비석 글씨는 고쳤다고 한 것 같은데). 내가 이런 변명을 하다니. 나는 작가가 일부러 그렇게 쓴 건 아니다 생각한다. 잘못 쓰인 역사책을 봤기 때문일 거다. 나도 역사 잘 모르는데 이런 말을 했다. 쇼토쿠 태자의 총애를 받은 하타노 가와카쓰(진하승)는 신라에서 왜로 간 사람이다. 전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에서 본 말이 나오기도 한다. 누에 신사, 오사케 신사, 샘 그리고 우즈마사 광륭사에 있는 미륵반가사유상.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이 일본에도 나온다니, 이 부분을 일본 사람이 잘 봤으면 좋겠다.

 

 

 

희선

 

 

 

 

☆―

 

“넌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 놈이야. 세상은 변태라고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워할 것 없어!”  (하권, 104쪽)

 

 

“인간은 누구나 남성성과 여성성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래요. 이건 균형 문제고, 그 가운데 어느 쪽 비율이 높은지, 어느 쪽이 겉으로 드러나는지, 거기에서 개인차가 생기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여성성이 큰 남성이 열등한 것도 아니고, 남자니까 남자다워야 한다는 것도 어리석은 차별이고 근거 없는 편견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어느 특정한 곳과 시간 문화속에서만 뜻을 가질 뿐이에요.”  (하권,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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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16: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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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2 00: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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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즈 스위트 홈 8

  코나미 카나타

  講談社  2011년 04월 22일

 

 

 

 

 

 

 

 

 

 

 

 

사람이 고양이와 함께 살아도 고양이 생활을 다 알 수 있을까. 고양이는 집안에서만 지내지 않을 거다. 아니 요즘은 집에서만 지내는 고양이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비싼 것도 많으니까. 그래도 집에서 밖으로 자유롭게 나다니는 고양이도 있겠지. 치도 처음에는 집 밖에 나오지 못했다. 요헤이네가 전에 살던 집에서는 동물을 키울 수 없었다. 치는 길에서 주웠지만(그렇다고 길고양이는 아니다, 어미와 떨어진 것뿐이다), 요헤이와 엄마 아빠는 치를 함께 사는 식구로 여기게 되었다. 요헤이네는 치를 키우기 위해, 아니 치와 함께 살기 위해 동물을 기를 수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시간은 얼마나 흐른 걸까. 새 집으로 옮기고 치가 돌아다니는 곳은 조금 넓어졌다. 검정 고양이를 다시 만나고, 새 친구 코치를 만났다. 코치는 밖에서 사는 얼룩 고양이다. 치와 크기는 비슷하지만 길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어느 정도 아는 듯하다. 만화 속 시간은 정말 천천히 흘러가는구나. 현실에서 고양이는 몇달만 지나면 꽤 클 텐데, 치는 여전히 귀여운 새끼 고양이다. 사람인 요헤이도 여전히 어리다. 치는 언제까지나 새끼 고양이일지도 모르겠다.

 

고양이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땅에 내려온다. 몸이 가벼운 것도 있고 땅에 내려올 때 몸에 충격을 덜 받게 하는 방법이 있는 건지도. 치는 먼지떨이로 청소하는 엄마를 따라다니면서 놀자고 한다. 먼지떨이가 강아지풀처럼 생겨서 치는 엄마가 놀자고 하는 걸로 생각한 거다. 엄마가 높은 곳 먼지를 털어서 치 발이 닿지 않았다. 치는 이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올라가서 먼지떨이로 발을 내밀었다. 그러자 치는 계단에서 밑으로 떨어졌다. 고양이든 물건이든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시간은 아주 짧다. 만화에서는 어떻게 나타냈을까. 공중으로 뜬 치는 뭐지 하는 모습이었는데, 조금씩 몸을 돌려서 바닥에 사뿐히 네 발을 디딘다. 그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다니. 높은 곳에서 내려온 건 이때만은 아니다. 요헤이, 엄마, 아빠가 치와 놀아주지 않자 치는 공원에서 만난 코치를 생각하고 그곳에 간다. 코치는 공원에 있었다. 치가 같이 놀자고 하니 ‘나는 바빠’ 하고 다른 곳에 가려고 했다. 그런 코치을 멈추게 한 것은 빈 상자였다. 치가 먼저 안에 뭐가 들었나 발로 눌러보니 코치도 똑같이 했다. 둘이 앞발을 집어 넣고 뭔가 있다고 하는데 서로의 앞발이라는 것을 곧 알았다. 둘은 조금 아쉬워했다.

 

공원에서 나온 치와 코치는 어느 집을 지나다 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틈(문양)을 보고 둘이 한번에 들어가려고 했다. 두 마리가 한번에 빠져나갈 만큼 크지 않아서 차례차례 들어갔다. 그전에 코치가 뭔가 무서운 게 나올지도 모른다고 해서 치는 조금 겁을 먹었다. 치는 자기 발로 밟은 나뭇가지가 부러진 소리에 놀라고 얼굴에 닿은 풀잎에 놀랐다. 둘은 빈 플라스틱 통을 굴려보고, 나뭇잎과 벽 사이로 좁은 하늘을 보고 놀라워했다. 별일 없이 그 집에서 나왔다. 얼마 뒤 개가 나타났다. 치는 겁을 냈는데 코치는 줄에 묶여있으니 괜찮다고 했다. 사람이 개줄을 놓쳐서 치와 코치한테 달려왔다. 치와 코치는 개한테 쫓겨서 나무로 뛰었는데 치는 조금밖에 못 뛰었다. 코치가 치한테 위로 올라가자고 했지만 치는 잘 올라가지 못했다. 개가 치를 핥자 깜짝 놀라서 빨리 위로 올라갔다. 조금 뒤 주인이 나타나서 개를 데려갔다. 드디어 치가 높은 곳에 올라갔구나. 고양이는 높은 곳에 올라가지만 내려오는 건 어렵다고 한다. 치와 코치도 나뭇가지에서 밑을 보고 어떻게 내려가지 했다. 코치가 먼저 내려오고 치도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짧게 말하다니. 사람과 사는 고양이는 자기도 사람으로 생각한다는데 치도 그랬다. 그러면서 코치와 놀다니. 코치는 대체 뭐냐고 치한테 물어보고 싶다.

 

한번은 코치가 치를 바깥으로 불렀다. 우유를 먹다가 치는 바깥으로 나갔다. 코치가 좋은 곳을 찾았다면서 치한테 따라오라고 했다. 그곳은 창고였다. 코치와 치가 그 안에서 놀면서 거기 쌓인 물건을 건드려서 큰 소리가 났다. 그 집 사람이 나와서 코치와 치를 내쫓았다. 치는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고 거기 숨어있었다. 사람이 물건 정리를 하고 문을 닫아서 치는 그곳에 갇혔다. 오랫동안 그 안에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치가 나갈 곳을 찾으려고 물건을 건드려서 또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나타나서 문을 열었다. 사람이 치를 잡으려고 했을 때 치는 요헤이와 엄마 아빠를 생각하고 사람을 잘 피했다. 한편 코치는 치가 어디로 갔는지 찾아다니고, 집에서도 요헤이와 엄마 아빠가 치가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알고 이런저런 걱정을 했다. 그러다 밖으로 나와서 찾아다녔다. 코치와 치가 함께 오는 모습을 요헤이가 보았다. 배가 고픈 치는 집에 가서 우유를 먹어야지 했는데, 엄마 아빠는 치를 씻겼다. 치가 창고 안에서 돌아다녀서 먼지가 묻어서 지저분했다. 먼지 때문에 치는 눈이 안 좋아졌다. 결막염이었다. 동물이 발로 눈을 건드리지 못하게 할 때 고깔 모양을 씌우지 않는가. 치도 그것을 목에 둘렀다. 그거 이름이 엘리자베스 칼라인가보다. 처음 알았다.

 

요즘은 고양이와 살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만화와 책이 많이 나온다. 이것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치는 새끼 고양이로 요헤이네 식구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와 다른 고양이와 노는 이야기도 나온다. 지난번에도 코치와 놀았구나. 앞으로도 코치와 노는 일이 많이 나올까. 사람이 모르는 일을 볼 수 있어서 재미있는데 고양이가 정말 이럴까 싶기도 하다. 실제보다 더 귀여우니까. 아니 진짜 새끼 고양이는 귀여울거다. 그 시간이 짧을 뿐이구나. 큰 고양이는 그것대로 사람 마음을 따듯하게 해줄지도.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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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4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05 0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