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도 예쁘고, 제목도 센스 있고, 물론 내용도 알차다. 알라딘 이웃 로쟈님, 대박나시길. 대박나셔서 계속해서 좋은 책 내시길. (ㅋㅋ 나만 아는 이웃, 나 혼자, 나홀로, 나 스스로 로쟈님을 이웃삼다.)

이탈로 칼비노의 말대로 고전이란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유명하기에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 고전이다. 창피하니까. (78쪽)

맞다, 정말 창피하다. 그래서 이 표현은 정말 유용하다.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

나는 ‘죄와 벌’을, ‘안나 카레니나’를, ‘폭풍의 언덕’을, ‘하얀 성’을, 다시 읽고 있어.

             

 고마워요, 칼비노. 고마워요, 로쟈님.

<모든 것이 끝났다> (푸슈킨, 1824)

모든 것이 끝났다;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너의 무릎을 껴안고,

나는 애처롭게 호소했었지.

모든 것이 끝났어요 - 너의 대답을 듣는다.

다시는 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을 것이다,

너를 우수로 괴롭히지도 않을 것이다,

지난 일들은 아마도 다 잊게 되겠지 -

사랑이 날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넌 젊고, 너의 영혼은 아름다우니,

또 많은 사람들이 널 사랑하게 되리.

넌 젊고, 너의 영혼은 아름다우니,

또 많은 사람들이 널 사랑하게 되리.

아...... 아, 푸슈킨을 깜빡했네.

난 ‘푸슈킨 선집’을, ‘대위의 딸’을 다시 읽고 있어.

   

<미운 오리 새끼>는 마치 안데르센의 인생역전을 보여주는 듯한 동화지만, 현실에서 안데르센의 운명은 ‘미운 오리 새끼’의 운명보다 덜 행복한 편이었다. ... 그의 ‘고향’은 콜린 집안이었지만 그 고향은 그가 끝내 도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더불어 안데르센은 자신이 선택받은 부류에 속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검증 필요성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가 평생 동안 신경질환과 정신장애에 시달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90-91쪽)

안데르센은 1805년 덴마크 오덴세의 가장 궁벽한 마을에서, 구두수선공인 스물 두 살의 한스 안데르센과 서른 살의 세탁부 안네 마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하층계급 출신이라는 점을 부끄럽게 생각한 안데르센은 작가로 성공한 뒤에는 하층계급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자신을 후원해주는 ‘콜린’ 집안 사람들과도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도는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으니, 그가 바로 <미운 오리 새끼>의 ‘오리 새끼’이고, <인어공주>의 ‘인어공주’다.

제일 재미있게 읽은 꼭지는 “세계문학 전쟁이 시작됐다!”였다.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시리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숨겨진 명작 발굴의 대산세계문학총서, 다양성이 장점인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작품 해설이 최고인 펭귄클래식, 거장들의 초역작품을 소개하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9쪽).

열린책들이 빠졌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출간한 열린책들.

어느 책에선가, 진중권씨가 자신의 독서내력을 이야기하다가 어렸을 때 <강소천 어린이 문학전집>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했더니 신랑이 말했다.

“어, 나도 그거 집에 있었는데......”

“세상에..... <강소천 어린이 문학전집>이? 그게 집에 있었단 말이야? 그 시절에? 어? 야~~~ 자기는, 자기는 진짜 진중권씨처럼 훌륭한 사람 되야 돼. 그 때, 그 정도의 문화 혜택을 받았으면, 어? 어쩌구, 저쩌구....”

나는 아니었다. 나도 어린이였는데, 진중권씨가 어린이였을 때, 신랑이 어린이였을 때, 나도 어린이였는데, 우리집엔 <강소천 어린이 문학전집>이 없었다. 중 2 겨울, 우리집에도 세계 문학 전집이 등장하기는 했는데, 그건 책을 엄청 사랑하는 청소년 혹은 역시 책을 엄청 사랑하는 성인용 문학전집이었다. 우리교회 전도사님 사모님이 처녀 시절에 읽으셨던 소중한 책을 내게 물려주셨다. 아주, 아주 두꺼운 책들이었고, 세로쓰기였다.

나는 매일 제목들을 읽고 또 읽었다. 전쟁과 평화, 죄와 벌, 모비딕, 대지, 부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더는 기억이 안 나네. 책 속지는 눈처럼 새하앴지만, 아무래도 세로쓰기는 읽기 힘들었다. 난 그 책들을 다 읽지 못 했다. 그 때, 그 책들을 다 읽었더라면, 읽고 또 읽었더라면, 난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난 정여울이 되었을까. 신랑은 진중권이 되고, 나는 정여울이 되었을까.

그 때, 이 책을 만났더라면, <로쟈의 세계 문학 다시 읽기>를 만났더라면, 난 ‘데미안’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페스트’를, ‘노인과 바다’를 열 여섯에, 열 일곱에 만났을텐데. 그러면 진심으로, 사실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텐데.

“난 ~를 다시 읽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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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7-17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저 로쟈님 책 읽어봐야겠네요. 살까말까 망설이다가 말았는데 말이죠. 저도 로쟈님은 '나만 아는 이웃' 입니다. 으하하하.

단발머리 2012-07-17 06:45   좋아요 0 | URL
우아아, 다락방님도요? 다락방님은 유명하시니, 유명이웃 로쟈님이랑 서로 잘 아시는 줄 알았지요~~ 저, 위로 받은 거 맞겠지요?? ㅋㅎㅎ
 

여성 작가 열전이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시작으로 해서, ‘엠마’를 살짝 지나,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거쳐,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다. 지독한 사랑의 대명사, 죽음까지도 넘어서는 자기파괴적 사랑의 대표작, 바로 그 ‘폭풍의 언덕’이다.

어째서, 현재까지, 지금까지, 오늘까지 이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을 읽지 않았느냐 물으신다면,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초라하게 대답하련다. 사람들이 그러잖는가. ‘고전이란 모든 사람들이 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 읽지는 않는 책’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폭풍의 언덕’이야말로 고전 중의 고전이다. 나는 문학동네 판을 선택했다. 최근에 나왔고, 책도 이쁘고.

 

 

 

 

 

“가지 마!” 캐서린이 힘주어 소리쳤습니다.

“가야 해. 갈 거야! 에드거가 나직하게 대꾸했습니다.

“못 가.” 캐서린은 문고리를 잡고 막아섰습니다. “지금 가면 안 돼, 에드거 린턴. 앉아. 그렇게 화내며 가버리면 안 돼. 그럼 나는 밤새 괴로워해야 해. 너 때문에 괴로워하기 싫어!” (115쪽)

린턴에 대한, 정확히는 타인에 대한 캐서린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캐서린은 누구를 위해서든 괴로워지기 싫은 거다. 누구를 위해서든 힘들고 싶지 않은 거다. 누구를 위해서든 아파하고 싶지 않은 거다. 누구를 위해서든 고통 받기 싫은 거다. 캐서린은 자기를,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다른 사람의 자리가 없다. 캐서린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뿐이다.

지금 같아서는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나도 천해지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히스클리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애가 알아서는 안 돼. 넬리, 내가 그 애를 사랑하는 건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야. 그 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그 애의 영혼과 내 영혼이 뭘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같은 걸로 만들어져 있어. 린턴의 영혼이 우리의 영혼과 다른 것은 달빛이 번개와 다르고, 서리가 불꽃과 다른 것과 마찬가지인걸. (130쪽)

넬리, 나도 알아, 너는 지금 나를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아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너 이런 생각 안 해봤어? 나랑 히스클리프랑 결혼하면 둘 다 거지꼴이 되겠지만, 내가 린턴이랑 결혼하면 히스클리프가 잘되도록 도와줄 수 있고, 오빠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살게 해줄 수도 있어. (132쪽)

오빠의 학대 속에 고통 받는 히스클리프를 구원하기 위해 캐서린은 린턴과의 결혼을 결심한다. ‘내가 린턴이랑 결혼하면 히스클리프가 잘되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정말로 도와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캐서린, 캐서린... 너는 모르는구나.

함께하는 것이 사랑이란다.

같이 있는 것이 사랑이란다.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생수 한 병을 나눠 먹어도, 늦은 밤 라면 한 개를 보글보글 맛있게 끓여 한 젓가락 두 젓가락 나눠 먹어도, 우산 한 개를 나눠쓰고 가다가 쏟아지는 폭우에 한 쪽 어깨가 다 젖더라도.

함께하는 것이 사랑이란다.

같이 있는 것이 사랑이란다.

린턴에 내 사랑은 숲 속의 잎사귀들 같아. 겨울이 나무의 모습을 바꾸듯 시간이 내 사랑을 변하게 하리라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 하지만 히스클리프에 대한 내 사랑은 땅속에 파묻힌 변치 않는 바윗돌 같아. 눈에 뵈는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거니까. 넬리, 내가 곧 히스클리프인 거야. 그 애는 내 마음속에 항상, 항상 있는 거야. 기쁨을 주려고 있는 게 아니야. 내가 나 자신에게 항상 기쁨을 주지는 않잖아. 그 애는 기쁨을 주려고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으로 있는 거야. (133쪽)

내가 곧 히스클리프인 거야.

내가 곧 히스클리프인 거야.

계속 잊혀지지 않는 구절이다.

내가 곧 그이다.

내가 곧 그 사람이다.

내가 곧 히스클리프인 거야.

아, 개봉한 영화 보고 싶다. 캐서린은 내가 생각한 캐서린 그대로의 모습이다. 히스클리프는 잘 모르겠다. 일단은 영화를 보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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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7-15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영화에서도 결혼을 앞두고 고민하며 캐서린이 그래요.
"히스클리프는 미치도록 나와 닮았어."
그리고 나중엔 "네가 날 떠났을 때 내 영혼은 이미 죽었어."라고도요.
님의 페이퍼 제목 "내가 히스클리프인거야"랑 맞아떨어지는 대사에요.^^
히스클리프는 검은 피부의 배우를 기용해 이들 사랑의 장벽을 더 확고히 보이게 했고요.
저는 섬세한 소리로 표현해낸 이번 '폭풍의 언덕'이 좋았답니다.
문학동네 책은 담아두고 있어요.^^

단발머리 2012-07-16 02:20   좋아요 0 | URL
아하, 안녕하세요, 프레이야님. 어설픈 서재 방문해 주셔서 감사해요. 검은 피부의 히스클리프 보고 싶네요. 찾아봐야겠어요. 나랑 같이 '폭풍의 언덕' 볼 사람, 여기 여기 붙어라~~~~`

비로그인 2012-07-15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폭풍의 언덕. 폭풍의 언덕! 저도 어여 읽어야겠어요.

그러고 보니 단발머리님 서재에 흔적 남기는 건 처음인 듯~ ^^;
제인 오스틴과 <제인 에어> 그리고 <폭풍의 언덕>으로 이어지는 독서를 저도 비슷하게 따라갈 것 같네요 ㅎㅎ

단발머리 2012-07-16 02:21   좋아요 0 | URL
말없는 수다쟁이님, 안녕하세요. 제인에어 좋아하신다 하셨잖아요. 제 방에 처음 오시는 거 아닌뎅. 제 <오만과 편견> 페이퍼 보시고 댓글 달아주셨잖아요. 엉엉 T.T.

비로그인 2012-07-16 12:55   좋아요 0 | URL
ㅋㅋ 아맞다, 깜빡했어요! 아, 왠지 친숙하다 했더니!
점심 시간에 새로운 글을 읽고 가려고 했는데 남은 시간이 6분 ㅠㅠ

단발머리 2012-07-17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완전 괜찮습니다용. 저는 단발머리예요. 철없고 수줍은 열 일곱, 강풀과 나이가 같네요. ㅋㅎㅎ
계속 친숙해주세여~~~~~
 

 

 

 

 

학력이 부진한 댈러스 소재 학교에 다니는 2학년 학생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책을 읽어라, 1권당 2달러.

삶 속에 나타나는 좋은 것에 가격을 매기는 행위는 그것을 오염시킬 수 있다. 시장이 단순히 재화를 분배하는 역할에만 머물지 않고, 교환되는 재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드러내면서 부추기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돈을 주어 책을 읽게 하는 행위는, 아이들을 독서에 힘쓰게 만들지는 모르나 독서를 내재적 만족의 원천이 아니라 일종의 노동으로 여기도록 한다. (26-7쪽)

시장 매커니즘으로서 시작한 방법이 시장 규범이 되고 있다. 분명히 우려되는 점은, 독서를 장려하기 위해 돈을 주면 아이들이 독서를 돈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지며, 결국 독서의 내재적 장점을 퇴색시키고 밀어내거나 서서히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다. (94쪽)

우선 탑승권, 렉서스 차로, 대리 줄서기 사업, 불임시술을 장려하기 위한 현금보상, 핵 폐기장 건설, 청소부 보험, 돈으로 살 수 없었으나, 이젠 돈으로 살 수 있는 여러 사례들이 흥미로웠다.

그 중에서 제일 관심을 끈 건, 독서 장려를 위한 현금 지급이었다. 누구나 그 중요성을 인정하는 독서, 독서를 장려하기 위해 돈을 지급한다. 이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독서를 하는 도중, 격려금의 도움을 받던 도중, 독서의 매력에 빠져 나중에는 격려금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독서하게 되는 일”이 일어날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격려금의 액수는 계속 올라가고, 아이들은 건성으로 책을 읽고, 대충 읽은 책에서 간단한 내용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독서가 주는 즐거움은 완전히 물 건너 가는 일 아닐까.

독서, 독서 지도에 대한 여러 책들 중 내가 최고로 꼽는 책이다. 첫 아이를 낳은 지인들에게 많이 권하기도 했다. 간만에 찾아보니, 표지가 바꿨다.

 

 

 

 

 

 

 

그 책의 자매편 비슷한 책이다. 이 책도 좋아한다. 뒷표지에 독서 지도에 대한 지침이 있다.

1. 아이에게 직접 책을 골라주지 않는다.

2. 아이의 독서 여정을 방해하지 않고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3. 독서에 상을 내리지 않는다.

4. 불필요한 읽기 훈련으로 독서의 아름다움을 왜곡하거나 어지럽히지 않는다.

5. 아이에게 잘못된 정보나 공공연한 비판의 말을 하지 않는다.

이 책과 관련해 3번이 기억났다. 독서에 상을 내리지 않는다. 독서 뿐 아니라, “삶 속에 나타나는 좋은 것에 가격을 매기는 행위는 그것을 오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 행위에 상을 내릴 수 없는, 보상할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독서 행위 그 자체를 통해 책을 읽은 당사자는 이미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독서를 한다는 것,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짧지 않은 우리네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 중 하나이다. 독서할 수 있다는 것,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최고의 보상이다.

그 좋은 일을 경험한 사람에게 2달러는 필요하지 않다. 돈을 주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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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정하는 “올해의 책 Best 5”에 넣고 싶은 책이다. 다시 읽고 싶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 animal laborans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강조적 의미의 자아 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 Schaffens- und Kőnnensmődigkeit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28쪽)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스스로 착취당한다.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우울한 인간.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 “난 못 하겠어요.”라고 말할 때, 그는, 우울한 인간, 우울한 개인이 되고 만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이러한 강제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그리고 그 노동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에 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43쪽)

하지만, 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와 같은 오늘날의 정신 질환은 심적 억압이나 부인의 과정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 즉 부인이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 해서는 안 됨이 아니라 전부 할 수 있음에서 비롯된다. (92쪽)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며,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Burnout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103쪽)

성과주체는 가해자이자 희생자이며 주인이자 노예가 된다. 자유와 폭력이 하나가 된다. 자기 자신의 주권자, 호모 리베르를 자처하는 성과주체는 호모 사케르임이 밝혀진다. 성과사회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의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110쪽)

옮긴이도 지적했듯이, 긍정성의 과잉이 결국은 자아를 새로운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한 사회가 피로사회이다. 피로사회에 살고 있는 우울한 인간들.

아...........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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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옥같이 아름다운 문장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굳이, 과감히, 후회 없이 이 문장을 대표문장으로 꼽는다. 나는 이 문장이 그렇게도 좋다. 주옥같이 아름다운 문장이라면 다음과 같다.

* 남의 숨겨진 야심을 잘 찾아내는 사람은 대개 그 자신이 동일한 야심을 지닌 경우가 많습니다. 유난히 남의 욕망이 눈에 잘 들어올 때는 먼저 자기 내면을 조용히 돌아볼 필요가 있지요.

* 혼자 있을 때 행복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인생의 슬픔과 묘미가 있습니다.

*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꼼짝 못하셨듯이 저도 아내에게는 꼼짝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세 번째가 제일 마음에 든다. 어떻게 하면, 이들 부자는 ‘아내에게 꼼짝 못’ 하는가. 어떻게 그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남편을 꼼짝 못 하게’ 하는가. 그 비결은 무엇일까.

원래는 에너지를 충분히 사용하고 누린 다음에야 어른이 되는 것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만이 ‘훌륭한 어른’이 됩니다. 그저 ‘어른 행세’하는 법만 배운 소년들이 ‘훌륭한 어른’ 타이틀을 거머쥐는 셈이죠. 인간이 평생 써야 할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볼 때, 지랄이라는 실탄을 거의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90쪽)

지당한 말씀이다. 지랄을 사용하지 않고, 차분히 도서관과 학교, 학원을 오간 사람들만이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학에 입학할 수 있고,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한 사람만이 ‘사회의 지도층’이 될 수 있다. 범생으로 살아온 3, 40년, 이젠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인정받는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가슴 속에는 사용해보지 않은 ‘지랄 실탄’이 살아서 꿈틀꿈틀 요동치고 있으니.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에너지가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내면의 힘 같은 거죠. ... ‘헤어질 수 있는 용기’를 갖는다는 것은 상대방과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기 위치를 확보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 용기 또는 에너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전달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관계를 유연하게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관계를 끝장낼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원칙은 거의 모든 관계에 적용됩니다. (120쪽)

관계를 끝장낼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관계를 유연하게 지속시킬 수 있다. 이 명제가 모든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사실일까? 관계를 끝장낼 용기라. 관계를 끝장낼 용기, 관계를 끝장낼 용기라. 모범생 김교수님의 말씀이 과격하다 못해 가히 혁명적이다.

본인의 트위터에서 밝히셨듯이, 이 책에 대한 고신 신원하 교수님의 서평은 참 적절하다.

“김교수의 <욕망해도 괜찮아>는 신학생들과 의식있는 교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지만, 등급을 매기자면 PG다. Under Pastor's Guidance, 목사 신학자의 안내 때론 필요.”

왼편 뺨을 돌려대는 것은 나약하게 “나를 한 대 더 때려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왼편 뺨을 때리려면 주인은 오른편 손바닥을 이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른편 손바닥으로 상대방을 때리는 것은 대등한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의미합니다. 즉 노예가 주인에게 왼편 뺨을 돌려대는 것은 때릴 때 때리더라도 나를 더 이상 노예로 보지 말고 평등한 인간으로 인정해달라는 반항입니다. 이 순간에 필요한 것은 역시 목숨을 건 결기입니다. (123-4쪽)

그렇다면 이 구절은 너무나 많이, 너무나 오랫동안 잘못 해석되어 왔다. “왼쪽 뺨을 때리거든, 오른쪽 뺨도 돌려내라.” 누가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나의 왼쪽 뺨을 때렸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오른쪽 뺨을 돌려대십시오.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십시오. 아, 이게 아니었단 말이지.

그럼 이렇게.

왼쪽 뺨을 때린다.

왜요? 왜 때려요? 어디 한 번 맞짱 떠 볼까요? 에?

아.....

써놓고 보니, 은근 시원하네.

결국 그날 밤 책상에 앉아 제 책을 주문하고 있는 것은 바로 저입니다. ...“네 책을 왜 또 사니? 베스트셀러 순위 조작하니? 밀어내기하니?” (144쪽)

이 구절은 너무 웃겨서, 너무 웃겨서, 올려본다. 저자 → 어머니 → 아내 → 저자. 공포의 먹이사슬? ㅋㅎㅎ

계층이 고착화되는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 한 두가지 특이한 성공 사례를 들어 "더 큰 꿈과 비전을 가져라" "열심히 하면 누구나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메시지는 자칫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주머니만 살찌우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195쪽)

절대 찬성이다. 현 상황에서 계층 고착화는 출신 대학을 통해 공고해진다. 하지만, ‘좋은’ 대학은 모두가 가고 싶어하니 무엇을 근거로 대학 입학을 결정해야 하나. 그게 수능이다. 비행기도 안 띠우고, 출근 시간도 늦춰서, 듣기 평가에 방해 안 되도록 전 국가가 지원하는 시험, 수능.

그런데, 어찌 보면 학원금지, 과외금지되었던 이전의 학력고사 시대가 오히려 ‘학습 능력’, 정확히는 ‘암기능력’을 평가하는 측면에서는 더 공평했던 것 같다는 저자의 의견에 대해서도 공감한다. 입학사정관제, 반대한다. 부모의 도움으로, 때마다 세계여행 다녀오고, 여기저기 기관에서 인증받고, 그 스펙으로 유수한 대학에 들어가는 것,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 반대한다. 차라리, 그냥 점수로, 점수로 승부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농촌지역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아이들은 EBS 동영상 강의를 통해 수준 높은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하고, 무료에 가까운 가격으로 교재를 공급하고, 다양한 난이도의 문제를 개발해서, 실제 수능에 출제하고. 그리고, 나머지 변별력은 논술을 통해 해결하도록 한다. 쓸데없이 어려운 문제들, 교수들도 풀기 어려운 문제, 문제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어려운 문제 말고, 각 개인의 특성과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문제들을 출제하고, 학원에서 외운 ‘모범 답안’ 말고, 독창적인 답안에 좋은 점수를 준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만약 제가 교육부 장관이 된다면~~~”

삼남매 모두 대학교수가 되어, 한국사회에서 나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경받는’ 위치에 올랐지만, 결국 자신들은 진정한 ‘사자’가 아니라,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당나귀’일 뿐이라는, 저자 형님의 통찰은 정확하다.

특별한 당나귀를 추종하면서 서로 패싸움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게 사자가 만든 규범인 것도 모른 채, 그 규범을 손에 들고 끊임없이 다른 당나귀를 사냥합니다. (164쪽)

그들 가족도 어디까지나 성공한 ‘중산층’일 뿐이다. 진짜 부자동네 아이들은 동네 싸움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중산층동네 아이들과 산동네 아이들만 서로를 미워하며, 싸울 뿐이다. 그렇다면, 그 싸움, 중산층 아이들과 산동네 아이들의 싸움, 이제는 끝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싸움의 가장 큰 조종자이자 수혜자인 진짜 부자동네 아이들은 저 쪽에서 에어컨 나오는 실내에서, 시원한 얼음동동 레몬에이드 마시며, 그 싸움 보고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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