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 세트 - 전32권 (2023년 최신쇄)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이길진 옮김 / 솔출판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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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세대 때 남자들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소설로 꼽힌 작품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삼국지》고 또 하나는 바로 《대망》 즉 정식 이름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작품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분량이 많다는 점과, 엄청난 인물이 나온다는 점, 그리고 전형적인 남성 중심의 사고 관념에 입각하여 쓰인 작품이라는 점이다. 특히 지금 리뷰하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동양의 전통적인 남성 판타지물인 《삼국지》보다 훨씬 분량이 많으며, 훨씬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시판되는 단행본 기준 《삼국지》는 10권 이내로 끝나는데 반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려 32권으로 구성됐으니, 어마어마한 장편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노골적으로 말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삼국지》의 일본 버전이다. 남성들의 대의와 야망, 대망 등등을 웅장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 다루고 있는 시대는 전쟁이 일상화된 난세라는 점, 여성의 역할은 그저 남성의 야망에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념 등등... 두 소설은 일란성 쌍둥이와 같이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인물에 큰 관심이 있으면서도, 이 소설을 통해 도쿠가와를 만나고 싶진 않았다. 《삼국지》에서 중화적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기 위해 유비를 미화했듯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소설은 역사적인 이에야스의 모습을 분명 미화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가 이 책을 권하며, '남자라면 꼭 읽어야 할 소설, 무릇 대망을 가진 남자라면 필독서로 읽어야 하는 소설.'이라고 강조할 때마다 부모의 청을 모른 척 외면했다.

  나는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나는 허구가 곁들여진 소설보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비문학이나 생각을 담은 칼럼 등등을 주력하여 읽었고, 그랬기에 유명한 소설들은 대부분 축약본을 통해 스토리만 아는 정도였다. 그런 내게 32권이나 되는 장편 소설이라니 부담이 될 수밖에. 그러다 어느 날 잡지에서 서평을 읽은 적이 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 소설에 대한 내용이었다. 지금은 정확하게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연세가 있던 분이 쓴 글이어서 그런지 호평 가득한 내용이었다. 글을 읽으며 하나의 장편소설이 어떤 힘이 있기에 한 시대의 저명한 인물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장편 소설을 중고 서점에서 조금씩 조금씩 구매하였고, 틈틈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책은 내가 생각하던 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절대적인 선(善)의 가치를 불어넣어 미화하여 그려내고 있었다. 만약 일본 전국 시대에 역사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야마호카 소하치라는 인물이 가공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실제 역사 인물의 모습으로 착각하여 인식할 듯싶다. 중국 역사에서의 유비의 모습과 《삼국지연의》에서 그리는 유비의 모습이 전혀 다르듯,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나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실제 역사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다른 인물이다.

  책은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듯, 어마어마한 등장인물이 나온다. 또한 책에는 많은 여자들이 나오는데, 저자인 야마호카 소이치는 그녀들을 대체적으로 남성에 종속된 수동적인 존재로만 그려내고 있었다. 여자는 그저 어머니가 되어야만 비로소 여성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남자의 대의를 위해서라면 여자의 희생은 당연히 필요하다. 여성에게 있어 혼인은 남성을 중심으로 한 당주의 가문의 영속을 위한 정치적 결합에 불과하다는 생각 등등... 오늘날 남녀평등의 시각으로 이 소설을 바라보면, 굉장히 불편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근대 이전 일본은 남존여비가 다른 사회보다도 더 엄격하게 발달했던 지역이 아닌가.

  나는 중근세 시대에 일본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저자와는 다르다. 물론 그 당시에는 가문과 가문 그리고 영주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들이 혼례를 이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여성들의 역할이 그저 남편에게 수동적으로 복종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시집 간 여성들은 물론 시댁에 충실하지만 그것을 넘어 그녀들은 자신의 친정에 시댁의 상황과 동태, 그리고 영주들의 세력 판도 등등을 남몰래 알려주곤 했었다. 즉 오늘날 기준으로 보자면, 정략적으로 시집을 간 여성들은 시댁에 충실한 그저 수동적인 며느리의 역할만을 한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친정 세력에서 파견된 공식적인 외교관의 역할, 세작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여성의 역할은 일본의 시대상, 즉 난세라는 상황 때문에 빚어진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일본 전국시대의 여성들을 그저 남성의 야망의 종속품으로 그려낸 소설은 자국 역사를 깊이 있게 인식하지 않은 저자의 편견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래서 한국과 중국의 여성들보다 일본의 여성들이 훨씬 정치적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본다.

  또한 일본 전국시대를 두고, 여성들만 정략적으로 혼인을 올렸던 시대라고 생각하는데, 실을 남자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힘이 없는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해야 했으며, 힘의 논리에 의한 결혼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보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마음 가는 여자를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권한은 힘이 있는 영주에 국한됐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남자들 역시도 힘이 없으면 수동적인 인질 생활을 체험하기도 하며, 그렇게 힘 있는 자들에 이용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야스의 경우도 유년 시절을 인질 생활을 하였고, 첫 번째 부인도 원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을 했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전국시대는 남성 중심의 사회가 맞지만, 모든 남성이 대우받는 시대는 아니었다. 결국 힘이 없는 남성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수동적인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다.

  책에서는 도쿠가와가 천하를 가지기 위해, 쟁취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고 끝내 수많은 어려움 끝에 천하를 쟁취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동양 전통 소설의 전형적인 주인공의 모습이다. 고난과 시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인내와 불굴의 의지, 야망을 잃지 않으며 끝끝내는 대업을 이룬다는 스토리. 너무나도 뻔하고 식상한 주인공의 모습이다. 실제 도쿠가와는 이런 성격이었을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도쿠가와는 생각보다 매우 단순하다. 도쿠가와는 철저하게 실력을 중시하며, 실용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와는 다르게 잡기와 고급문화 따위에 심취하지 않고 실용적인 부분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의 인생 초반부는 매우 수동적이었다. 그런 성장환경 때문인지 이에야스는 철저하게 힘의 논리를 따른 영주였다. 만약 자신보다 힘에 우위가 있는 인물이라면 그는 고집을 버리고 상대의 힘을 존중하며 이인자로 만족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어 자신이 상대보다 힘의 우위가 앞서다고 판단했으면, 상대가 그런 자신의 힘을 인정해주길 은근히 바랐다.

  그래서 도쿠가와는 히데요시 집권기에는 히데요시의 힘을 인정하며 철저하게 이인자의 역할에 만족했지만, 히데요시의 급사 이후 풋내기 히데요리가 집권하자, 커지는 자신의 힘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길 권유했다. 그러나 히데요리는 자신의 지위를 앞세워 도쿠가와를 굴복하려 했고, 이에 도쿠가와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히데요리에게 자신의 무력을 과시했다. 이쯤 했으면 히데요리가 자신에게 굴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도쿠가와지만 예상외로 히데요리는 도쿠가와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는 인내심을 가지고 히데요리의 투항을 기다렸지만 결국 히데요리는 전투를 선택했고, 일본 열도의 패권을 두고 히데요리와 도쿠가와는 오사카의 진 전투에서 격돌하게 된다. 이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이긴 도쿠가와는 일본의 패자가 되고 에도막부를 열게 된다. 이런 도쿠가와가 과연 어린 시절부터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웅장한 대망을 품었을까? 아마 오다 노부나가,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장기 집권에 성공했다면 이에야스는 그들과 맞서기보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충실한 이인자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앞서 이야기했듯 도쿠가와는 철저하게 힘에 논리를 중시한 실용적인 성격의 영주였으니까 말이다.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가지게 된 이유는 일차적으로 도쿠가와의 야망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주변 상황의 시세와 판도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저자의 소설을 읽으면 어린 시절부터 도쿠가와는 천하 통일을 꿈꾸고, 소망하는 인물로 그려내고 있는데, 이는 실제 도쿠가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책에서 도쿠가와는 '전쟁을 통해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다짐한다. 이런 도쿠가와의 묘사를 통해 저자의 생각을 볼 수 있는데, 즉 저자는 도쿠가와라는 인물을 통해 당시 일본이 자행했던 태평양 전쟁과 타민족 침략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결국 일본이 자행했던 전쟁은 도쿠가와의 천하통일 전쟁과 같이, 최종적으로는 세계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뉘앙스가 서려 있는 셈이다. (참고로 저자는 일본 지식인 중 전형적인 극우주의자다.) 과연 도쿠가와가 평화를 상징하는 인물인가? 나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도쿠가와의 평화를 지향하는 야망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결국 일본이 자행했던 침략전쟁의 당위를 미화한 것이었다. 일본의 식민지를 경험했던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의 전쟁이 평화를 의미한 전쟁이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참 불편했다. 첫 번째 도쿠가와라는 인물을 왜곡하여 평화의 상징으로 내세운 소설이기에. 두 번째 그런 도쿠가와가 품은 야망은 천하 평화를 지향하고 있었고, 그것은 결국 일본 전쟁에 대한 미화로 이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런 관념으로 쓰인 책이 우리나라에서 남자들의 필독서로, 야심이 있는 남자들의 필독서로 여겨졌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런 불편한 점을 떠나서, 책을 통해 중근세 일본의 관념, 생활 풍습 등등을 알 수 있었던 점은 유용했다. 특히 일본 전국시대에는 오늘의 적이 내일의 아군이 될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배신이 보편적인 시대였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신하는 무조건 주인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일본에서는 자신의 부하에게 합당한 보수와 영지를 내려주지 않으면, 주인을 배반하는 경우도 흔하게 발생했다. 그래서 부하는 충성하는 대가로 영지나 녹봉 등등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는 점도 굉장히 신선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연봉제를 협상하고 스카우트가 보편화된 오늘날의 인재 정책과도 비슷하다. 이렇게 개방되고, 실력이 전부였던 시대를 겪었던 칼잡이들이 한가하고 태평성대였던 조선을 침략했으니, 임진전쟁 때 우리나라가 초반에 밀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는 생각도 든다.

어린 시절에는 《삼국지》가 만들어놓은 남성 중심의 '대의' 판타지에 젖어서, 무슨 일을 할 때에는 '도원결의식의 이벤트'를 하며 서로의 대망을 이야기하는 것을 낭만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은 돌이켜보면 다소 허망한 생각도 든다. 대의와 대망을 이루는 데 있어 굳이 '도원결의식 거창한 이벤트'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와 허심탄회하게 야망을 공유하며, '너 잘났니, 나 잘났니' 기싸움을 펼칠 필요도 없다. 그런 것들이 없더라도, 현실에 충실하고, 뜻을 꺾지 않는다면 대의와 대망을 이루는 것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무서운 사람들은 자신을 잘났다고 떠벌리며 도원결의를 지껄이는 인간들보다, 조용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역할을 하나씩 이행하는 사람들이다. 거창한 대의와 대망이 없더라도 오늘을 충실히 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런 소확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삼국지》와 같은 부류의 소설을 필독서로 꼽기엔 시대착오적이지 않나 싶다. 실제 역사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지금은 절판된 책이지만 《기다림의 칼》 21세기 북스,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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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 순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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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질적이고 상이한 것들을 경험해야 한다. 그런 이질적인 경험이 있어야만 나를 둘러싼 익숙한 것들을 비로소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여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 문구는 여러 자기 계발서, 그리고 지성인들이 강조하던 단골 멘트였지만, 이를 피부로 체감한 계기는 바로 교토의 여행 덕분이었다.

교토 여행에서 나는 많은 사찰들을 둘러볼 수 있었다. 불교라고 하면 흔히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 유행한 종교라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각국의 사찰 문화 역시 어느 정도 공통적인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아버지가 불교 신자였기에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한국의 유명한 사찰들을 많이 방문했었다. 그래서 한국의 사찰 문화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본 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나는 일본 교토에서 유명한 사찰들을 둘러보며, 한국과 일본의 사찰문화가 다르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교토에 있는 사찰들의 인위적인 정원과 가지런하게 다듬어놓은 인공미를 관조하며, 한편으로는 경외감을,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질감을 느꼈었다.

경외감이야 흔히 외국의 아름다운 문화를 볼 때마다 드는 보편적인 감정인데 반해, 나는 왜 그토록 이질감을 심하게 느꼈을까. 돌이켜보면 내가 지금까지 다녔던 한국의 사찰 문화와 교토의 사찰 문화는 매우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아버지를 따라 주로 다녔던 사찰 명승지는 산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토의 사찰들은 대부분 도심 시가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런 위치적인 차이 때문에, 교토의 사찰들은 자신들만의 수양을 상징하여 조성한 것이 바로 '인위적인 정원'이었다. 물을 사용하지 않은 가레산스이, 그리고 물을 이용한 지천회유식 정원, 돌과 모래를 이용하여 조성한 석정 등등... 이런 인위적인 정원은 한국의 산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였다.

반면 한국의 사찰은 대체적으로 산을 걸치고 있었다. 위치적으로 세속과 고립된 지역에 있었기에, 인위적 가공 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수양을 상징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산사는 교토의 사찰과는 다르게 정원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인공적인 부분을 내세우기보다,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고 있었다. 이런 고유성을 인정받아서 2018년 6월 7곳의 산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그래서일까, 나는 교토에서의 사찰들을 차분히 관조하면서, 우리나라의 산사 이미지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조만간 교토 쪽으로 다시 여행을 갈 예정인데, 아마 그때에도 일본의 사찰들을 보며, 우리의 절간이 계속 생각날 것만 같다.

사실 책의 내용은 다 읽었던 내용이다. 기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시리즈에 있던 사찰 관련 내용들을 축약하여서 모아놓아 편집한 것인데, 그래서 살까 말까 고민을 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전권을 소장하고 있기에, 굳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산사순례》 편을 살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민을 하던 찰나, 모 서점 사이트에서 사은품으로 '유홍준 친필 부채'를 준다고 하기에, 혹해서 그만 구매를 해버렸다. 사용하고 있던 부채도 닳아졌기에,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좋아하는 저자의 필체가 담긴 부채라고 하니, 그만 덥석 물어버린 것이다.

 

책을 받고 좀 실망했던 게, 기존 단행본 시리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와 크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책의 겉표지도 양장본과 같은 재질인데, 기존의 책과는 너무 이질적인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책 시리즈에 있어 통일성과 체계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책이 참 아쉽게 편집된 것 같다. 그냥 기존의 단행본과 같은 판형으로 출시했으면, 시리즈별로 꽃아 놨을 때 이질감이 없고, 통일성도 있었을 텐데, 크기도 그리고 책의 겉의 질감도 다르니, 이 부분이 아쉽다. 책의 표지는 정말 예쁘게 잘 뽑혔고, 그랬기에 전집 시리즈와 함께 꽂혔으면 더더욱 괜찮았을 텐데 참 아쉽다. 책이 발간된 주요한 목적은 바로 '산사의 유네스코 등재' 때문인지라, 급조하여 만든 티도 역력했다. 내가 유홍준 교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작가들보다 영리적인 느낌이 덜 들었기 때문인데, 급조된 듯한 이번 책을 보면서, 그런 내 생각을 다시 재고하게 됐다.

어쨌든 책 내용은 좋다. 과거의 산사 내용을 모아놓은 글이긴 하지만, 저자의 글은 맛깔진 문화유산 설명으로 정평났기에 내용은 언제 쓰여졌냐를 제외한다면 충실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전권을 소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산사 가이드가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산사 여행을 떠나시는 분들께도 유용할 것이다. 다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전권을 소장하고 있는 마니아라면 굳이 구매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나는 부채 떡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매하긴 했다만, 사은품에 크게 매력을 못 느끼는  마니아라면 이 책을 구매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압축된 산사 글을 다시 읽으니 예전에 다녀왔던 부석사와 봉정사를 다시 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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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열전 - 담백하고 시원한 한국인의 소울 푸드
백헌석.최혜림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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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돌아오는 길에, 당신과 함께 강남 중고서점에서 구매했던 냉면 관련 책을 읽었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정길에, '나를 매료시킨 평양냉면에 대한 썰'을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책은 평양냉면의 역사와 형태, 장르, 그리고 갈래 등등 여러 가지를 심도 있게 논하고 있었는데, 평양냉면의 가장 핵심은 슴슴한 맛입니다. 이것을 빼고는 평양냉면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어떤 재료의 육수, 어떤 스타일의 고명을 올리더라도 평양냉면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그 특유의 슴슴한 맛이 있어야 합니다.

잠시 책을 덮고 슴슴한 맛을 떠올려봤습니다. 진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특유의 육향이 풍미 짙게 드리워진 육수. 그 육수에 혀가 닿으면 육향의 풍미와는 다르게 심심한 맛이 느껴집니다. 그 특유의 심심함을 음미하며, 목구멍에 담백한 육수를 넘기고 나면, 슴슴한 맛의 뒤끝에 있는 특유의 감칠맛이 입안을 간지럽게 자극합니다. 이 맛. 이 느낌. 어디서 많이 느꼈던 것 같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런 슴슴한 매력의 평양냉면은 당신과 무척 닮았습니다.

세상에는 배워야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음식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평양냉면과 홍어가 있지요. 이 둘 모두 초짜 입장에서는 온전한 맛을 느끼기 힘듭니다. 평양냉면은 우리가 지금까지 먹었던 자극적인 음식과는 전혀 다른 맛을 보여줍니다. 몇 번 먹어봐야지, 그 특유의 슴슴한 맛을 느낄 수 있고 음미할 수 있습니다. 평양냉면이 특유의 슴슴한 맛을 내세운다면 홍어는 강렬함의 정점입니다. 삭힌 특유의 향은 초심자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둘 다 조금씩 먹으며 배워야지만 온전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도 만나면 만날수록 당신만의 매력이 드러났으니까요.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의 매력을 온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만나다 보니, 고요함 속에 숨겨진 당신의 매력을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굳이 구분해보자면 당신은 강렬한 홍어보다 슴슴한 평양냉면과 닮았습니다. 당신의 정적인 고요함은 강렬한 홍어보단 슴슴한 평양냉면과 비슷하니까요. 평양냉면은 무서운 음식입니다. 첫인상은 무심하지만, 중독된 순간 시크하게 사로잡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첫인상은 무심한 듯 조용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내 모든 부분을 압도적으로 점령했습니다.

평양냉면은 다양합니다. 슴슴하다는 공통적인 맛과, 메밀면을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육수의 재료나 고명의 형태, 지역색 때문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식탁에 오릅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요하고 조용하지만, 시기와 때에 따라서 다양한 매력으로 나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다양한 모습을 가진 평양냉면을 사랑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다양한 매력이 있는 당신을 애정합니다. 당신과 닮은 평양냉면을, 남은 인생 동안 함께 쭉 먹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그래왔듯 평양냉면을 사랑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쭉 당신을 애정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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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연의 : 리더십을 말하다 - 하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리더십연구센터 국가리더십연구총서 3
진덕수 지음, 정재훈 외 옮김, 김병섭 편집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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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사회에서 권력자들의 주변 인물이 공적인 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하는 사례는 흔하게 찾을 수 있다. 권력자의 친인척, 그리고 직계 가족들의 비리로부터 자유로웠던 정부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최순실과 박근혜 대통령의 사례뿐만 아니라, 보수와 진보 어떤 정권에서도 이런 문제는 늘 제기됐었다. 전근대에 비해 권력이 분산된 현대에서도 이렇게 권력의 핵심부는 사적 남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데, 막강한 권력이 집중된 전근대 왕조 국가에서는 권력의 사적 남용이 엄청난 문제로 인식됐을 것이다. 제가의 요체는 이러한 특권 세력의 국정 농단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하고 있다.

제왕에게 있어 가족의 존재는 매우 모순적이다. 전근대에서 왕의 힘은 국가의 공적인 힘과 일치했다. 그러나 이런 제왕도 가족을 이루며 자식을 가지게 되면, 편애하는 마음으로 가족과 자식을 챙길 수밖에 없다. 즉 제왕에게 있어서 가족과 외척은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충돌하는 전쟁터였다. 외척이 쉽게 권세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제왕과 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이다. 만약 군주가 가족에 대한 애정에 과도하게 도취되어 중심을 못 잡고 인척을 편애한다면, 권력의 축이 외척에게 이전된다. 외척은 이런 총애를 바탕으로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고 파당을 이루며 자신의 가족들을 권력의 핵심에 올린다. 이렇게 세도 가문이 탄생하고, 제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한다.

사실 《대학연의》 하권의 내용인 '제가의 요체'는 《대학연의》 중권에 '격물치지의 요체' 챕터 안에 '인재를 분별함'과 거의 흡사하다. 차이점이라면 '제가의 요체'에서 나오는 국정 농단의 주체는 제왕의 가족이나 외척, 환관(內臣) 들인데 반해 '인재를 분별함'에서 나오는 국정 농단의 주체는 일반적인 신하(外臣) 들이다. 책을 읽으며 비슷한 내용을 이렇게 구분하고 굳이 중복해서 서술할 필요가 있었을까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분량 면에서 '제가의 요체'가 '인재를 분별함'보다 훨씬 많고,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당시 빈번하게 이뤄졌던 국정 농단은 외신들보단 내신들과 제왕의 인척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일어났음을 유추할 수 있다. 아마 저자인 진덕수는 권력의 타락은 권력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이뤄진다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국정 농단에 관련한 내용을 앞서 서술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의 요체에서 다시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영국의 역사철학자 액튼경은 절대권력에 대해 이런 명언을 남겼다. '모든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대학연의》 역시 이러한 관점을 깊이 있게 숙고하고 있고, 이런 막강한 절대권력의 부패를 막기 위하여 지도자의 수신을 그토록 강조하였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성공적으로 절대권력을 휘두른 제왕보다, 권력에 굴복하여 타락한 제왕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만큼 힘이 집중된 절대 권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부패의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이런 권력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군주의 가족들과 군주를 최측근에서 모시는 내신들이다. 그들은 유혹적인 권력의 향기에 쉽게 노출됐고, 쉽게 타락했다. 그 결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저자 진덕수는 《대학연의》의 '제가의 요체'에서 제왕의 가족들과 내신들의 단속을 엄격하게 강조했던 것이다.

지도자의 외척이나 인척이 중심이 된 권력의 사유화는 과거에도 우리 시대에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조선 말기에는 외척들이 왕의 권력을 능가하며, 국정을 사유화했으며, 2016년에는 최순실이라는 가정주부가 박근혜 대통령의 묵인 아래 대한민국의 모든 국정을 사유화하여 좌지우지하였다. 물론 이런 비정상적인 경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개국 초, 태종 이방원은 외척 세력들의 비리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권력 앞에서 절제하지 못했던 그의 처남들은 태종의 칼날에 모두 숙청됐으며, 외척뿐만이 아니라 미래를 이을 세자를 위협할 수 있는 권신들을 모두 제거했다. 냉혈한이라 불리는 이방원이지만, 왜 인간적인 갈등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공적인 책임과 사적인 감정을 혼동하지 않았다. 힘들게 건국한 신생국 조선의 탄탄한 아침을 위해, 그는 사적인 감정을 억제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후대에 처가를 몰살했다는 잔인하다는 혹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안정된 왕권과 탄탄한 나라 기반을 세종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대학연의》는 그런 태종의 애독서였다. 태종은 《대학연의》를 논하며 '외척에 대한 역사적인 교훈'을 얻었다고 이야기하는데, 분명 '제가의 요체' 챕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가족이나 친지를 챙기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지만,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라면, 그런 사적인 감정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대학연의》 하권을 읽으며 우리나라의 지도층도 공사를 구분할 수 있는 태종 이방원과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길 희망했다.

 

 

 

- 책을 완독하며

 

《대학연의》를 처음 만난 것은 4년 전 여름이었다. 무척 더웠던 계절, 네가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대학연의》가 번역본이 나왔다며, 가장 친한 형이 선물을 해 줬는데, 그때의 벅찬 기쁨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생하다. 그 시기의 가장 큰 행복은 일과를 마치고 찬물로 샤워를 한 뒤 스탠드에 불을 켜고 《대학연의》를 읽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책은 쉽게 읽어지지 않았다. 철학과 역사의 만남. 유학의 형이상학적인 이론 철학과, 중국의 시대를 종횡으로 넘나들며 전개하는 역사적 식견은 각각 감당하기에도 벅찬 수준이었는데, 이 둘이 혼합되어서 전개되고 있었기에 손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린아이가 인수분해 문제를 들고 하루 종일 고민하는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꾸역꾸역 읽어나갔다. 처음 완독했을 때에는 전체적인 윤곽만 파악했고, 세세한 부분까지는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첫 완독 직후에는 스스로 뿌듯한 감정에 흠뻑 도취됐었다.

여러 번의 완독을 거치면서, 텍스트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해되지 않던 문장들은 반복을 거듭하자, 조금씩 문이 열리는 듯하였고, 생소하던 역사적 사건들도, 중국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나니, 친숙하게 다가왔었다. 그렇게 책이 익숙하게 읽힐 무렵, 나 스스로가 절제가 되지 않거나, 분노의 감정에 휩싸였을 때에는 습관적으로 《대학연의》의 구절을 찾아서 마음을 다스렸다. 국정이 농단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대학연의》에 일부 권신, 외척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농단하던 사례를 찾아 읽었다. 분명 1000년 전에 쓰인 책인데도 불구하고, 그때의 정치적 모순이나 오늘날 정치적 모순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흡사했다.

그렇게 내 곁에는 항상 《대학연의》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새로운 《대학연의》 번역본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새롭게 나온 《대학연의》는 기존의 《대학연의》 번역이 가지고 있었던 아쉬운 부분들을 모두 수정하여 나왔다. 명확한 번역, 전문성, 쉽게 읽히는 문장, 꼼꼼한 편집, 주제별로 잘 나눈 분권, 예쁜 표지까지... 확실히 서울대에서 출판한 책이라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흠잡을 곳이 없었다. 물론 지금 이렇게 만족하는 번역본일지라도, 훗날 이보다 더 나은 《대학연의》 번역본을 만나고 싶긴 하다.

두꺼운 책을 끼고 다니며 읽으니 사람들은 말한다. 뭐 하러 그런 고리타분한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냐고. 현실에 뒤떨어진 곰팡내 나는 벽돌을 굳이 저렇게 애정 하며 읽을 필요가 있냐고도 하더라. 그런 사람들에게 굳이 내 입장을 번거롭게 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냥 좋아서요.라고 일갈하듯 끊어버렸다. 실제로 《대학연의》는 지금 읽어봤을 때 현실감이 떨어지는 내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대학연의》 뿐만이 아니라 모든 고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결점이다. 고전은 그 시대의 산물이기에, 태어난 시대의 모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대학연의》가 품고 있는 가장 큰 결점은 바로 인간에 대한 시각이다. 《대학연의》는 주장한다. 인간은 선하고, 그렇기에 그런 선한 마음을 바탕으로 인의의 정치를 해야 한다고, 선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반성을 끝없이 해야 하며, 지도자는 이에 더욱 앞장서야 한다고. 여기서 가장 핵심은 인간이 선하다는 것에서 논지가 시작한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은 선한 것일까? 만약 선하지 않다면, 《대학연의》가 주장하는 정치와 치국론은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가 없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는 인간의 마음을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게 됐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인류가 선하고 착하다면, 종족의 번식을 위해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간은 자신의 생존, 그리고 자신의 집단의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생태계뿐만이 아니라 동족인 같은 인간도 죽였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 무한 경쟁 사회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과연 성선설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인 생각이다. 그럼 인간은 법가가 주장하듯, 악하고 이기적이며 욕망으로만 가득 차기에 힘으로 굴복시켜야만 하는 존재인가. 그렇지도 않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공감력에 있다. 인간은 유대감과 공감력이 매우 뛰어난 편인데, 이런 유대감과 공감력의 배경에는 선한 마음이 있다.

생물학적 이기와 인간만의 이타가 공존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 과학이 밝힌 인간의 본성이다. 오늘날 사회는 겉으로는 이타를 권장하지만, 속으로는 이기를 추구한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연일 뉴스에서는 인간의  뒤틀린 이기가 극도로 발현된 사건들을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정치에도 사회에서도 이타적인 모습보다는 이기적인 모습이 주로 보인다. 인간적인 휴머니즘을 갈구할 때 나는 습관적으로 《대학연의》를 읽었다. 책을 읽으며 무한 이기주의에 익숙한 우리가 잊어버렸던 이타의 가치는 무엇인지 되돌아보려고 노력했다. 《대학연의》의 성선설이 시대적인 오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더라도, 철학적으로 고찰한 인간의 이타주의는 오늘날 사회를 돌아보기에 충분한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임어당이 극찬한 수필집인 《유몽영》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경서(철학서)를 읽기에는 겨울이 좋다. 정신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서(역사서)를 읽기에는 여름이 좋다. 날이 길기 때문이다.'  《대학연의》는 철학과 역사가 고루 섞인 책이고, 분량도 많은 편이기에 날이 긴 여름에 읽기에 적합한 도서라고 생각한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무척 더웠지만, 그래도 완성도가 높은 《대학연의》 번역본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렇게 유난히 더운 2018년 여름에 나는 행복을 부르짖으며 《대학연의》를 다시 완독했다. 완독을 하는 동안, 지독히도 추웠던 2016년의 겨울의 순간이 자꾸 떠올렸다. 육체는 푹푹 찌는 여름에 있었지만, 의식은 싸늘하게 추웠던 과거에 머물러 있었던 셈이다.

'지금 우리가 이룩한 국가는 어떤 국가인지', 책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우리의 지도층은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지', 책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의 마음은 세속의 타락과 유혹으로부터 굳건하게 저항할 수 있는지', 책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치유해야 할 모순이 많고, 지도층의 리더십도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나 스스로도 자기 수양에 있어 부끄러운 부분이 많았다. 그렇기에 다음 《대학연의》를 읽을 때에는 책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했던 물음들에 확실하게 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하더라도, 지금보다는 좀 더 나아졌기를 희망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그저 바라고 소망하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성취로 이뤄진다. 그래서 나는 다음에 《대학연의》를 다시 마주할 때까지,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스스로의 내면 수양을 꾸준하게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더 나은 사회, 그리고 더 나은 자신을 스스로에게 약속하며 두툼한 양장본을 서재에 꽂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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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연의 : 리더십을 말하다 - 중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리더십연구센터 국가리더십연구총서 3
진덕수 지음, 정재훈 외 옮김, 김병섭 편집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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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연의》 중권은 우리 실생활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내용들로 구성됐다. 중권의 핵심은 바로 리더십인데, 리더십의 핵심은 두 가지로 첫 번째는 지도자의 치인이고, 두 번째는 지도자의 수양이다. 《대학연의》는 이상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가장 노력해야 할 사람이 바로 지도자라고 강조한다. 사실 나는 국가 운영을 한 사람의 책임으로 규정하는 전통적인 시각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왜냐면 오늘날 민주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국정 운영을 독점하는 모습보다, 분산된 권력의 모습이 더 친숙하고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근대 왕조 국가에서 나온 숱한 제왕학 책을 읽을 때마다 국가경영에 있어 한 개인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대학연의》 독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현대인이 전근대 왕조국가의 시대적인 사회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비롯한 것이다. 책이 나온 시기, 그리고 책이 다루고 있는 배경은 한 명의 절대권력자가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이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런 불편한 마음과는 다르게, 《대학연의》에서 고찰하고 있는 인간 중심의 리더십은 오늘날 현대에서도 매우 유용한 덕목들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회생활이나 학교생활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학교나 직장 생활에 있어 교우관계, 인간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사회에서 개인이 겪는 문제의 대부분은 인간관계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시대가 바뀌어도 유효하다. 개인의 일상생활에서도 인간관계가 중요한 요소로 꼽히는데, 국가의 운영이나 조직의 운영에 있어 인간관계의 중요성은 두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다. 어떤 사람을 임용해야 하고, 어떤 사람을 내쳐야 하며,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을 맡겨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국가와 조직운영의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직과 국가의 경영에 있어 인간관계는 사적인 영역의 인간관계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사적인 영역에서 인간관계가 틀어졌을 시 개인이 피해를 받는 선에서 그치지만, 공적인 영역에서의 잘못된 인간관계는 공동체 전체에게 막심한 피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근본은 인사에 있다고 강조한다. 《대학연의》에서는 좋은 사람을 고찰하는 것 이상으로 악한 간신들을 구별하는 방법에 집중한다. 그들은 지도자에게 달콤하게 접근하며, 지도자의 눈과 귀를 닫아버리고, 권력을 사유화한다. 왕조국가에서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사권과 군권을 소리 없이 장악하며, 자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소인배들을 정치판에 끌어들여 당파를 결성한다. 그렇게 권력을 손아귀에 틀어잡은 뒤, 가면을 벗고 가렴주구에 열중하며 허수아비 같은 지도자를 압박하고 겁박한다. 지도자는 권력을 빼앗기고 나서야 간신들의 정체를 깨달으며, 후회한다. 

 우리는 이런 비슷한 사례를 최근 겪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그리고 문고리 3인방이 그 주인공이다. 《대학연의》에서 고찰한 간신의 유형과 21세기 최순실이 행했던 모습은 토시 하나 바뀌지 않고 똑같이 재현됐다. 다른 점이 있다면, 《대학연의》에 권력을 빼앗긴 군주들은 빼앗긴 권력을 두고 후회하거나 되찾으려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했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아예 그런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또 하나는 전근대에는 권력의 핵심이 군대였지만, 오늘날은 권력이 핵심이 돈으로 대체됐다는 차이. 이 두 가지가 다를 뿐 나머지 국정농단의 흐름은 완전히 똑같았다. 현재는 과거를 그저 재현할 뿐이고, 인류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은 늘 반복된다는 문구 역시 이러한 사례를 꼬집은 것이리라. 《대학연의》는 앞선 국정 농단 사례와 같이 인간사에 있어 시대를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반복적으로 일어나던 인간 관계 문제를 심도있게 분석하고 있다. 반복되는 사건과 국정 농단을 세심하게 분석하여 지도자의 통치에 있어 거울로 삼기를 강조하고 있다. 그럼 과연 박근혜 대통령이 간신의 행적을 자세하게 논한 《대학연의》를 읽었다면, 스스로의 모습을 자각할 수 있었을까. 회의적이다. 과거 그녀는 치국의 도를 얻기 위해 《정관정요》를 탐독하고 읽었다는데 고전을 읽고도 실천을 하지 않았으니, 아마 《대학연의》를 읽는다 해도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인사와 더불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지도자의 자기 수양이다. 인간은 완벽한 동물이 아니기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결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인간의 내면적 결점을 깊이 인식한 《대학연의》는 모든 지도자의 리더십은 지도자의 수양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마음 수양에 매진할 것을 강요하는데, 빈틈없이 부단히 노력하라는 유학의 자기 수양론은 너무 빡빡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처럼, 너무 도덕에 집착하고 도덕을 강조하는 것도 좋게 보이진 않는다. 억지로 강요된 도덕은 결국 타율적 성격을 가지는데, 이런 취지로 퍼진 도덕은 자율성을 내포한 도덕의 본뜻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또한 냉정하게 따져본다면 자기 수양이 일의 성사와 직결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인품이 뛰어난 사람은 전반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 좋은 결과를 맞이할 가능성이 높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오늘날에 커다란 공을 이룬 지도자라도 도덕적, 인성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럼 자기 수양은 리더십과 관계가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그렇지도 않다. 우리는 우리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능력이 바로 도덕성이다. 동서고금, 그리고 시대를 막론하고, 하층민은 상층에 있는 사람에게 도덕적인 모습을 기대했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특히 예법과 도덕을 강조한 유교적 전통이 있는 지역에서 더욱 강했다. 지도자는 슈퍼맨이 아니다. 그렇기에 현실적이지 않은 도덕성의 잣대를 들고 엄격하게 해부하듯 평가하는 것은 지양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도덕성이 결여된 인간을 정치에 들여서도 안된다. 너무 엄격한 잣대로 도덕을 재단하는 것도 문제지만, 도덕성이 아예 없는, 자기 수양과는 거리가 먼 인간을 중요 요직에 올리는 것도 경계해야만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적어도 자기 스스로를 수양하는 것이라도 열중했다면 이렇게까지 욕을 먹진 않을 것이다. 수양을 통해 마음을 정갈하게 하였다면, 측근을 이용하여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유혹을 극복했을 지도 모르고, 최순실의 국정 농단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남을 지도하는 위치에 서려는 사람들은 적어도 남보다는 더 나은 도덕성을 보여줘야만 한다. 그래야 남들로부터 신망을 잃지 않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권력에서 나오는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 수양이 덜 된 지도자는 권력에서 뿜어나는 유혹을 거부하지 못하고 권력의 달콤함에 굴복해 타락하고 만다. 이런 지도자를 우리는 역사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으며, 굳이 복잡하게 역사책을 뒤지지 않더라도 오늘날 현실 정치판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결국 지도자가 자기 수양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남에게 도덕적으로 잘 보이기 위해서라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핵심은 바로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극단적으로 과도한 자기 수양은 지양해야 하겠지만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자기 수양은 오히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서 《대학연의》가 추구하는 리더십은 어떤 의의를 가질까? 얼핏 보면 큰 의의가 없어 보이기도 하다. 좋은 내용의 글이고 현실성이 있다지만, 대부분의 일반 시민들은 권력자가 아니고 권력과는 거리가 멀기에, 최고 권력자의 리더십을 논한 《대학연의》는 크게 와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과거에는 리더십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오늘날 현대 시민은 권력과 권한이 과거보다 분배된 사회에서 살고, 민권이 성장한 시대에 살기 때문에, 이런 현대 시민에게 있어 리더십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필수적인 덕목이다. 가정을 이끌어가는 부분에서, 자식을 교육하는 부분에서, 친구들 간의 모임을 주선하는 부분에서, 직장 생활에서 짬밥이 붙어 부하들을 인솔하는 과정에서, 일상 모든 부분에서 리더십은 필요하다. 이런 일상의 리더십이 보편화된 시대에서, 《대학연의》가 추구하는 리더십은 인간의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두고 있기에 교우의 구분, 직장의 관계, 일상의 인간관계에 크게 도움이 된다. 또한 상류층의 도덕적 해이가 일상화된 오늘날 사회에서 지도자의 자기 수양을 강조한 《대학연의》의 리더십은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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