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기는 사마의 더봄 평전 시리즈 1
친타오 지음, 박소정 옮김 / 더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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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나에게 큰 임팩트를 줬던 사극은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으뜸을 꼽으라면 '사마의 - 최후의 승자'다. 이 드라마는 전작인 '사마의 - 미완의 책사'의 후속작으로, 나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한 수 아래로 취급하던 중국 사극을 새롭게 돌아보게 만들었다. 물론 중국 사극 역시도 명작이 많지만, 고질적인 단점으로 국내와 일본 사극보다 허구와 과장이 심하며, 무협지를 연상하는 분위기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세트장의 부실함 등등을 꼽을 수 있다. 드라마 사마의 역시 허구와 과장이 들어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극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을 내릴만한 작품이다. 이 드라마는 종래의 전쟁 위주의 삼국지 드라마들과는 달리, 정치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흔히 정치 사극이라고 하면 따분하고 어렵다는 생각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데, 이 드라마는 그런 어려운 정치 사극을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그리고 깊이를 더하여 제작하였는데,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도 작품의 질을 높이는데 크게 작용했다. 만약 이 드라마를 아직 보시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드라마를 정주행으로 달릴 것을 살짝 추천해본다.

리뷰하려는 책 《결국 이기는 사마의》는 어찌 보면 드라마 '사마의'의 열풍 덕분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를 다룬 저서 중, 가장 인기가 있는 인물은 단연 제갈량이다. 제갈량의 저서, 제갈량의 평전, 제갈량을 모티브로 삼은 자기 계발서 등등 삼국지 도서 시장에서 제갈량을 다룬 책은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하다. 그런 제갈량을 최근 들어서 바짝 뒤쫓고 있는 인물이 조조다. 제갈량이 전통적으로 인기를 끌어모았다면, 오늘날 현대인의 관점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인물은 조조라고 할 수 있다. 조조의 실리주의적 정책과 과단성 등등은 오늘날 현대인의 처세에도 많은 귀감을 주고 있으며,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현대인과 비슷한 사고를 지닌 인물을 한 사람만 꼽으라면 단연 조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조조 역시 오늘날 삼국지 도서 시장에서 소위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리해보자면 삼국지를 주제로 한 도서 시장은 그렇게 전통적인 제갈량, 그리고 현대의 조조가 주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보면 뜬금포 없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마의의 정통 평전이 나왔다. 사실 사마의라는 인물은 삼국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크게 중요하게 인식되는 인물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사마의는 제갈량을 돋보이게 만드는 조연에 가까웠다. 만고불변의 충신으로 추앙받던 제갈량의 라이벌이었기에, 그는 역사적으로 엄한 모함을 받았다. 사마의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이미지는 간신, 왕위를 찬탈한 모반자 등등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데, 그의 라이벌인 제갈량과 매우 대조적인 이미지다. 이런 전통적인 시각은 오늘날 삼국지 도서 시장에도 은연중에 만연하고 있는데, 실리주의자인 조조를 새롭게 조망하는 움직임이 있다 하더라도, 사마의를 조망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후한 말, 그리고 삼국시대라는 난세를 실질적으로 종결지었던 사마의가 과연 제갈량보다 능력이 떨어진 것일까? 조조보다도 실리적인 측면이 떨어지는 인물인가?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책 외에도 도서 시장에는 사마의를 조망한 책이 여럿 있었다. 그럼 여타의 다른 책보다 이 책이 가지는 장점은 무엇일까. 이 책은 온전히 사마의의 삶에만 집중하고 있는 '정통' 평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존에 있던 사마의를 다룬 책들은 자기 계발서 스타일의 책이 많았다. 이를 대표할 수 있는 책은 위즈덤하우스에서 나온 《자기 통제의 승부사 사마의》라는 책을 꼽을 수 있다. 이 책의 장점은 알기 쉽고, 교훈적인 내용이 가득하다. 그러나 단점을 꼽아보자면, 교훈을 이끌어내기 위해 억지스러운 해석도 많은데, 처음에는 저자가 이끌어내는 교훈이 신선하게 다가오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뻔하고 지루한 패턴이 반복이라 다소 지루하게 읽힌다. 그러나 《결국 이기는 사마의》의 경우, 그런 억지스러운 해석이 없었다. 이 책의 저자는 뻔한 결론과 통속적인 결론을 무리하게 이끌어내지 않는다. 사료에 나온 문헌들을 최대한 꼼꼼하게 해석하여 설명해준 뒤, 자신만의 생각을 간결하게 군데 군데에서 선보이고 있었다. 정통 평전과 자기 계발서 스타일의 책은 애초부터 비교 대상이 아니지만, 만약 사마의의 역사적인 행적을 고찰한다면, 평전 쪽이 훨씬 메리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 외에도 평전 스타일로 사마의를 다룬 책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책들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깊이다. 조금만 검색하거나 관심을 가져도 나올 법한 스토리를 엮어서 시중에 내놓은 사마의 평전이 수두룩하다. 그렇기에 삼국지에 대해서 빠삭하게 아는 마니아의 입장에서는 종래의 사마의 평전에서 깊이 있는 시각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 책은 종래의 다른 사마의 평전들과는 다르게 사마의의 일생을 '깊이 있게' 조망하고 있다. 저자의 필법은 조곤조곤하며 차분함을 더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 저자의 설명은 삼국지에서 가장 정치적인 인생을 살았다는 사마의를 깊이 있게 조망하고 있으며, 저가가 분석하는 해설 역시도 대체적으로 공감을 샀다.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이지만, 능력만 있다고 해서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하는 사람이나 역사적 위인을 살펴보면 능력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처세가 뛰어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적으로 사마의는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 중 처세력으로 봤을 때 단연 탑 급이다. 사마의가 싸워온 상대들은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다. 조조, 제갈량, 손권 등등 내외부를 가리지 않고, 굵직한 인물들이 사마의와 대립했다. 그러나 그런 영웅들과의 싸움에서 사마의는 결국 이기고 최종 승리를 차지한다. 그렇기에 그의 일대기를 읽다 보면 정치적 처세와 식견 등등에서 귀감으로 삼을 만한 부분이 많았다. 인간은 좋던 싫던 무리를 짓고 살아야 한다. 무리가 이뤄지면 필연적으로 권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이런 권력에 어떻게 적응하는가에 대한 부분은 삶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두툼한 사마의의 인생을 읽으며 나는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염두에 두고 읽었고, 이 부분에서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끝으로 이 책의 저자는 무조건적으로 사마의를 옹호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책 말미에서 사마의는 개인적인 처세가 매우 뛰어났지만 권력을 얻은 뒤 그 권력을 시대 흐름에 맞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단점으로 꼽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마의는 경쟁자인 제갈량과 조조에 비해 한수 아래라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은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있겠지만 한실 부흥이라는 철학이 있었다. 사마의의 통치에는 그런 철학이 결여됐다. 각 시대에는 그 시대에 걸맞은 사명이 있기 마련인데, 유능한 지도자는 획득한 권력을 그러한 시대정신에 부합하여 시대를 개선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마의는 권력을 획득하는 방법은 알았지만, 그 권력을 '바람직하게 사용'하는 방법까지는 몰랐던 것이다.

마치 이는 일본 전국시대의 노부나가,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차이점과도 흡사한데,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는 자신이 통치하는 국가 철학이 뚜렷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통치를 살펴보면 그런 통치 철학이 두 영걸에 비해 뚜렷하지 않다. 이에야스가 내세운 구호는 그저 '도쿠가와 가문의 통치 체체'였고, 어쩌면 그런 단순함 덕분에 현실에서 최종 승리를 가져왔을지도 모르겠다. 정리해보면 역사의 최종 승리자라 할 수 있는 사마의와 이에야스의 승리 배경은 어쩌면 '단순함'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이상이 있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문제는 특정한 사상이나 생각은 필연적으로 호불호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랬기에 노부나가는 부하에게 살해당했고, 히데요시 역시 과도한 이상에 사로잡혀 조선을 정벌하여 패망을 자초했다. 제갈량은 한족 부흥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촉한을 이끌었고, 그것에 매달려 자신을 희생했다. 그러나 사마의나 이에야스의 정치는 이런 라이벌들의 모습과는 다르다.

이상이 있어도 그 이상이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망상에 가깝다.(히데요시의 조선정벌이 대표적인 예) 사마의나 도쿠가와에 통치에서 보듯, 이상이 결여된 점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니 바람직한 지도자는 시대정신에 부합한 이상을 가지고 현실을 개선해나가는 인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이런 인물은 역사적으로 흔하지 않다. 바른 지도자, 명군이 드문 이유는 어쩌면 이런 복잡한 조건을 두루 갖춘 인물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쪼록 두툼한 평전을 통해 얻은 것들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올해 읽었던 역사 평전 중에 가장 뛰어난 책이 아닐까 싶다. 2018년 드라마도,  역사 도서도, 나에게 있어 가장 최고는 '사마의'니, 올 한 해는 나에게 있어 '사마의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삼국지를 좋아하거나 사마의를 깊이 있게 조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조건 일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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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한우 지음 / 해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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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 아니 대한민국의 역대 지도자 중 가장 질책을 받는 인물을 꼽으라면 선조와 인조가 단골로 거론된다. 두 임금이 욕을 먹는 공통점은 치세 기간 중 일어난 외침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선조는 임진왜란(필자는 임진왜란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하 임진왜란은 임진전쟁으로 표기한다.), 인조는 병자호란(마찬가지로 병자전쟁이라고 생각한다.)을 겪을 때 무능한 지도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선조의 경우, 역사적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과의 비교 때문에 비난의 강도는 더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책은 그런 선조를 집중적으로 조망하고 있는데, 선조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을 자제하고, 선조의 공과 사를 냉정하게 구분하여 분석하고 있었다. 비난 일색의 선조에 공과 사를 구분하여 밝힌다고 했는데, 일반적인 국민 정서와 견해와는 대치되는 부분이 있기에, 책의 평가 역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것으로 추측됐다. 아니나 다를까 네이버를 비롯하여 여러 도서사이트에 이 책의 서평을 읽어봤는데, 좋다는 평도 있었고, 나쁘다는 평도 있었다. 대체적으로 책의 평가는 낮은 편이었는데, 내용은 이성이 아닌 감정적인 공분을 앞세운 글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선조는 좋게 평가할 수 없는 군왕이지만, 너무 여론몰이식으로 매도하여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사람에게는 장점과 단점이 고루 존재한다. 위대한 인물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이며, 역사적으로 악독한 악인들에게도 손톱만큼이나 장점은 있기 마련이다. 선조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임진전쟁 때의 선조의 처세를 생각하여 무지막지하게 비난하지만, 그런 선조도 장점은 있기 마련이다. 책은 그런 선조의 장점을 최대한 고찰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과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을 참고 자료로 읽었다. 이 글에서 주장하는 선조의 장점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나 스스로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을 읽은 결과, 의외로 무능하다고 생각했던 선조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을 읽고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하여 생각한 바, 내가 생각한 선조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치세의 시기에는 정치력이 상당히 괜찮았던 지도자였다. 우리는 흔히 선조를 생각할 때 리더십이 없고 줏대 없이 무능한 모습만 보인 군왕으로 생각하는데, 실제 선조는 그렇지 않았다. 선조는 정치적인 식견과 권력에 대한 시각이 굉장히 발달한 군주다. 선조는 알다시피 방계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국왕이다. 그렇기에 역대 다른 국왕들에 비해 정치적으로 미숙하며 소극적으로 활동할 여지가 다분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노회한 신하들을 적절하게 컨트롤하며, 자신의 권력 즉 군주의 권한을 차츰차츰 강화했다. 실제로 임진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선조의 정권은 매우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임진전쟁이 끝난 뒤에도, 선조는 현실 권력을 잃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권력의 핵심을 잘 간파하고 있었으며, 권력의 역학관계를 깊이 있게 이해한 군주였다.

두 번째로는 인재를 보는 눈이다. 선조가 인재를 잘 본다니 그럼 이순신과 같은 명장은 왜 못 알아봤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선조는 이순신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고, 그랬기에 400년이 흐른 지금까지 욕을 먹고 있는 지도자다. 다만 선조가 이순신에 관한 인사를 판단했던 때는 바로 '난세'였다. 앞에서 고찰했고, 뒤에서 밝히겠지만 선조의 리더십에서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바로 난세에 보여줬던 아쉬운 리더십이다. 반대로 선조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앞에서 고찰했듯 치세의 시기에 보여줬던 리더십이다. 이런 치세의 리더십에서 가장 빛을 발휘한 부분이 바로 인사권이다. 선조는 사람을 잘 간파하고 잘 읽어냈다. 특히 문관들의 인사에 있어서는 굉장히 탁월한 안목을 보여줬던 군주다. 치세의 시기에 권력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바로 사람을 잘 읽어내는 인사권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번째로 중화사상 즉, 조화를 중시하는 태도다. 선조의 인사 정책, 그리고 선조의 성향을 잘 고찰해보면 두드러진 특징이 보이는데 바로 편파적인 사람이나, 과격하고 극단적인 사람을 싫어하고 온화하고 온건하며, 치우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한다. 물론 신권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정철과 같은 극단적인 서인을 기용한 적이 있지만, 그들이 선을 넘을 때에는 가차 없이 내쳐버렸다. 유성룡, 이원익, 이항복 등등 선조가 주로 중용했던 인사들은 당파색이 있는 인물이지만 대체로 온건하고 과격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선조가 이순신을 신뢰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순신의 극단적인 단호함에 거부감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네 번째로 선조는 실증적이고 자연과학적인 탐구정신이 많았던 지도자다. 선조가 집권할 당시에는 학문적 흐름이 성리학을 중심으로 흘러갔고, 선조 역시도 그러한 영향을 받아서 성리학을 주로 공부했다. 하지만 경연을 하거나 신료들과의 문답을 하는 과정에서 '얼음'에 대한 질문, 그리고 '땅과 우주'에 대한 실증적인 질문을 하는데, 이런 부분은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성리학자들이 대답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질문이었다. 또한 임진전쟁 때부터 애독했던 《주역》은, 일반적으로 점을 치는 책으로만 생각하는데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주역》은 자연현상을 인문적, 철학적으로 풀이한 책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항간에서는 《주역》을 동양 최초의 인문 과학서로 칭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만약 선조가 21세기에 환생한다면, 실증을 바탕으로 한 과학 과목에 굉장히 흥미를 느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학구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으니 아마 오늘날에 환생한다면 자연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선조는 치세의 시대에서는 세종과 같은 먼치킨 능력을 가진 군왕까지는 아니더라도, 평균 이상의 정치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실제로 당시 집권세력인 사림도,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군왕으로 선조에 대한 기대가 많았고, 선조의 지적 능력 역시 그런 신하들의 기대를 충족하기에 충분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시대에 만약 임진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혹평을 받는 군주로 역사에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난세의 시기 선조의 무능한 리더십이 문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 행정의 체제적 문제, 그리고 신하들의 탁상공론으로 인한 문제 등등을 간과하고 임진전쟁의 결과적 책임을 선조에게만 돌리는 것 역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장점을 가진 선조였지만, 냉정히 평가하자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은 지도자였다. 어쨌든 임진전쟁은 그의 집권기에서 터졌고 그랬기에 선조의 문제점은 그런 난세의 시기에 집중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조의 단점을 열거해보자면 첫 번째로는 여색에 대한 집착이다. 선조는 유독 여색에 집착했다. 집권 초에는 군왕 수업을 받고 가르치려고 드는 대신들로 인해 마음이 외로웠고, 그런 외로움을 후궁들에게서 해소했다. 이런 호색은 임진전쟁 때에도 이어졌으며 집권 말기에는 왕후를 새롭게 들여서 훗날 왕실의 분란을 예고하게 된다. 두 번째로는 줏대 없는 행동이다. 임진전쟁 때에 선조는 유독 줏대 없는 행동을 많이 보였다. 치세의 시기에는 나름 단호하고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지만, 전쟁이 터지자 서생 특유의 문약한 모습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결정을 번복하고, 백성들에게 성을 사수한다 약속한다며 자신은 도망가는 모습을 보였으며, 여색과 줏대 없는 행동이 결합된 결과, 훗날 대권 구도에 커다란 정치적 파장을 불렀다.

세 번째로 자신감이다. 선조는 늘 방계 혈통이라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정치에 있어서는 늘 한발 물러나고 온건한 방향만을 고집했다. 물론 온건한 방향이 사회통합적인 면에 있어서는 장점으로 적용하지만, 때론 지도자가 자신 있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때도 있다. 특히 난세의 경우는 더더욱 지도자의 강단을 요구하는 때가 많다. 그럴 때에 선조는 늘 자신감이 결여된 모습을 보여줬다. 정치에 있어 자신감이 부족한 선조의 심리에는 분명 방계 혈통이라는 콤플렉스가 있었고, 임진전쟁 직후에는 전쟁에 대한 속죄 의식까지 더해졌을 것이다. 이런 자신감 결여는 결국 책임 의식 결여, 현실 기피로 이어졌고, 그랬기에 선조는 말로만 전쟁의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의 결과를 책임지는 모습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네 번째로 그릇의 크기다. 선조의 집권기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바로 속 좁은 도량이다. 사실 군왕들은 자신의 명성을 넘어서는 신하를 경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선조는 유독 그런 부분에 있어서 질투심이 심했다. 그래서 자신과는 대조적인 이순신을 경계했고, 의병들의 활동을 소극적으로 인정했다. 물론 치세의 시기에 군주의 명성을 넘어서는 세력이 생긴다면 경계의 필요성이 있겠지만, 때는 난세였다. 이런 난세의 상황이라면 허심탄회하게 백성들에게 칭송받는 영웅들을 인정하며 그들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또한 지도자의 바람직한 도량인데, 선조는 그런 그릇을 지니지 못했다. 그런 좁은 도량을 가졌기에 40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온 국민들은 그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집권 말기의 모습이다. 선조의 정권은 전형적인 용두사미 정권이다. 정권 출범 당시에는 굉장히 안정적이고 선조의 정치력 역시 점차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전쟁을 기점으로 그 후의 모습은 초심을 잃은 실망스러운 모습이 많았다. 정권 초기에는 영민했기에 공부를 하며, 정치력을 키워나갔고, 현실 정치도 치우침 없이 배우던 군주였지만, 정권 말기에는 국난에서 보여줬던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바탕으로 한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그 결과 영민한 모습은 영악한 모습으로, 뛰어난 자질을 기대했던 정치력은 음험한 모략가의 기질로 바뀌었다.

사실 선조의 자취를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인간적인 연민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군왕이 된 것이 아니다. 윗선과 신료들의 의논으로 인해 왕위가 결정 났고, 그런 상황을 그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시대는 수구적인 훈구 세력이 몰락하고 사림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사림은 그런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선조를 성리학적 이념에 걸맞은 군주로 길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선조 역시 이러한 흐름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이황과 이이, 기대승 등등의 최고의 성리학자들의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나름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사림이 요구하는 지도자의 윤리와 도덕관은 자신이 실천하기에 너무나도 높은 이상이었다. 조선왕조 최초로 방계 출신인 그였기에, 최대한 신료들이 원하는 모습을 갖추려고 노력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회의감이 들었을 것이다. 도달할 수 없는 목표 앞에서 선조는 한없이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신료들 사이에서 선조는 고독감을 느꼈다. 그랬기에 여색을 통해 그런 고독과 열등감을 해소했다.

누구나 노력한다고 서울대를 갈 수는 없다. 똑똑하고 영민하다 하더라도 공부 스타일이나 방법론에 따라 서울대를 갈 수도 있고 못 갈 수도 있다. 선조도 그랬다. 그는 나름 똑똑하고 영민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황과 이이로 대표되는 사림은 그런 영민한 선조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기대했다. 어느 순간 선조는 그런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고, 그런 후로는 신료들의 강압적인 가르침을 건성으로 들으며, 자신이 행할 수 있는 한도를 설정하고 그 한도 내에서만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나름의 노력도 임진전쟁을 겪은 뒤로는 뒤틀려버렸다. 그렇기에 그는 당시 인간이라면 가장 높은 위치라 할 수 있는 왕이라는 지위에 올랐지만 결코 행복한 인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의 모습에 인간적인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민은 감정적인 부분이고, 냉철한 이성으로 선조를 생각해보면 역시 비판을 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의 위치는 연민만으로는 변명할 수 없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는 왕이고 조선을 책임지는 위치였다. 그랬기에 임진전쟁이 터졌을 때, 좀 더 의연하고 냉정하게 대처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난세의 시기 너무나도 문약했고 비겁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약한 그의 내면에 연민할 수밖에 없었지만, 왕이라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결국 비판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다. 지도자란 책임을 지는 자리이고, 당시 그는 조선을 책임지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런 책임감으로부터 선조는 도망쳤기에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지도자는 태종 이방원이다. 조선 역사, 그리고 한국 역사를 통틀어 난세에 있어 가장 적합한 리더십을 보여준 군주는 태종 이방원이 대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선조가 태종처럼 흔들리지 않고 조금 더 자신감을 발휘하여 정치에 임했으면 아마 임진전쟁이라는 난세에서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항간에서는 아들인 광해군과 선조를 비교하며 광해군을 칭송하고 선조를 내려깎기도 하는데, 내 생각은 그렇다. 외교에 대한 부분은 확실히 광해군이 선조보다 나은 실리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그러나 내치와 조정 신료들을 다루는 부분으로 생각해보자면 광해군은 선조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광해군이 몰락한 대표적인 이유는 바로 측근 정치 때문이다. 자신을 따르는 당파만을 믿고 편협하게 사람을 임용하였으며, 반대파를 모두 숙청한 결과, 몰락했으니 말이다. 반면 선조는 어린 나이에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당파의 신료들을 적절하게 컨트롤했다. 광해군이 만약 선조의 스타일대로 온건하고 치우치지 않은 인사정책을 따랐더라면 어쩌면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책을 통해 선조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점이 많았다. 물론 책 부분 부분에는 나의 해석과는 다른 부분이 있었던 점도 있다. 변명하는 선조의 모습을 진심 어린 모습으로 해석하는 부분 등등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지적하는 선조의 장단점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부분이다. 사람들은 선조를 이야기할 때 여론과 일반적인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무조건 비난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도 사실 그랬는데, 이 책과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며 선조라는 인물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많았다. 책의 장점을 하나 더 꼽아보자면 당시 정계의 판세와 흐름을 명료하게 정리하여서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런 분석을 통하여 당시의 당파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대립했는지, 선조의 정치적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책을 덮으며, 지도자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자리고, 엄청나게 피곤한 자리이며, 엄청난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자리라는 교훈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오히려 선조가 군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훨씬 행복하고 멋지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조는 학구적이며 탐구력이 뛰어난 사람이며, 시와 서예를 잘 쓰는 풍류가적 기질이 다분했다. 그런 인물이 강압에 의해 억지로 왕이라는 옷을 입고 행동했으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겠는가? 또한 그렇게 노력하며 집권하는 당시, 임진전쟁이라는 큰 핵폭탄이 터졌으니 서생 기질이 다분한 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을까. 그래서 나는 선조의 인생에서 1차 비극이 왕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2차 비극이 그의 집권기에 임진전쟁이 터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그의 인생을 과연 행복한 인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저 왕이라는 지위에 올랐다고 해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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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 집념과 포용의 정치로 실현한 애민과 훈민, 세종을 찾아서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한우 지음 / 해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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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성군을 꼽으라면 많고 많은 지도자 중 단연 으뜸은 바로 세종이다. 아마 이런 주장에 태클을 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며, 일반적인 여론, 전문가, 학계에서도 세종은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지도자로 입을 모은다. 세종의 업적은 굳이 일일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대부분 다 알고 있다. 집현전을 설립하여 문풍을 드높인 점, 훈민정음을 만들어 문자를 통하게 한 점, 《고려사》 정리를 통해 지난 역사를 정리한 점, 법제와 음악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점, 실용 과학에 있어서도 두각을 드러낸 점, 문치뿐만이 아니라 국경에 있어서도 4군 6진을 개척하여 지금의 국경선을 확보한 점 등등... 국가의 전반적인 부분에 있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줬다. 그래서 우리는 세종을 가장 이상적인 수성형 군주로 꼽으며 치세의 시대에 가장 모범적인 지도자로 꼽았다.

세종의 업적을 살펴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세종은 일을 추진하기에 앞서 그 일과 관련된 원론적이며, 표준적인 지식을 스스로 최대한 습득하려고 노력한다. 그 뒤 습득한 표준을 바탕으로 목표를 설정한 후 적절한 인사에게 일에 관한 프로젝트를 일임하고 자신은 진행되는 일을 관찰하며 지켜본다. 재미있는 점은 이 시대에 원론적이며 표준적인 지식은 성리학적 사고와 밀접하게 관련됐다. 그렇기에 신하들은 그런 중국중심적 성리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일을 추진하였는데, 세종은 그런 신하들에게 '조선적인' 색깔을 요구했다. 역사에 있어서도, 음악에 있어서도, 법제에 있어서도 그랬으며, 이 책에는 거론되지 않았지만 과학 기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중국의 표준적인 지식과 기준들을 절대 등외시 하지 않았지만, 중국의 지식과 기준을 참고하여 '조선만의 표준'을 설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이 정점에 달해 표출된 것이 바로 '훈민정음' 창제였다. 세종의 시기는 이렇듯 정치, 행정적인 부분과 문화적인 부분에서 자주성이 강하게 나타났던 시기다. 또한 세종이 성과를 냈던 업적들은 인내심이 없다면 절대 당대에 꽃을 피울 수 없는 '장기간 프로젝트'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세종은 특유의 뚝심을 발휘하여, 인내하며 우직하게 황소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나라의 전반에 걸쳐 묵묵하게 발전을 도모했다. 시도만으로도 의미 있는 프로젝트들이 성과 역시 좋으니, 당대의 사람들과 후대의 사람들이 세종을 으뜸으로 꼽은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물론 세종의 업적은 세종 자신의 탁월함에서 기인한 것이겠지만, 이 모든 업적을 그가 혼자서 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지도자가 능력이 탁월하다 하더라도, 지도자 혼자서 조선 전반의 행정을 손수 도맡아 처리할 순 없다. 세종 시대가 빛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세종의 뛰어난 인사 정책 때문이었다. 세종은 자신이 추진하려는 프로젝트의 적임자를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문신이었던 김종서를 6진을 개척하는 무신으로 임명했으며, 음악에 뛰어난 감각을 지닌 박연을 발탁하고, 역시 음감이 뛰어난 맹사성을 기용했다. 전체적인 행정 컨트롤 타워는 황희에게 일임했으며, 깐깐한 보주수의자 허조를 예조에서 활동하게 하였고, 노비 출신인 장영실을 과학 분야에서 활동하게 배려했다. 세종의 인사정책은 태종의 인사정책과 비슷했는데 과가 있더라도 공이 높은 사람이라면 그대로 임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사람들을 부리는 스타일은 태종과는 달랐는데, 태종은 자신의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고, 신하들과의 정쟁을 통하여 왕권을 세웠다면, 세종은 정치 보복이나 정쟁보다는 사람들을 포용하는 리더십을 보여줬다.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며 완벽주의적인 성격으로 일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지도자와, 적재적소에서 최선을 다하는 신료들의 컬래버레이션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가져왔다. 그래서 세종 시대는 대표적인 태평성대의 시기로 인식됐으며, 세종은 조선의 화신으로 추앙받았다.

사람들은 세종 하면 안정적인 기반을 물려받아서 그저 발전만 시킨 지도자라고 생각하는데, 실제 역사는 다르다. 힘의 역학관계가 가장 정점으로 표출되는 정치판에서, 그저 태평하게 권력을 받아 다툼 없이 평화롭게 나라를 발전시켰다는 관념은 동화책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지 현실적으로 들리진 않는다. 세종 역시 자신의 정치권력을 다지기 위해 파워 게임에 몰두한 적도 있었다. 충녕대군 시절에는 일탈하는 세자 양녕을 견제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이를 통해 아버지 태종과 신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은연중에 과시하였다. 세자가 되어서도 실권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죽이고 살았으며, 태종 사후에는 강력한 왕권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신하들을 상대로 힘겨운 홀로서기를 해야만 했다. 그래도 세종 시기는 태종 시대와는 다르게 군신 간의 정쟁이 없는 편이었지만, 양녕 대군 문제와 세종의 불교 편애 때문에 격하게 대립하기도 했다. 즉 세종도 태종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파워게임에 신경을 썼던 지도자였다. 만약 세종이 정쟁에 있어 압도할 수 없는 힘을 가졌더라면, 그토록 공력이 들어가는 세종 시대의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완수할 수 있었을까.

세종이 받았던 태종의 유산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막강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신권을 제압한 태종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정점의 위치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물론 이는 형식상의 은퇴였고, 실상은 정치 경험이 없는 세종을 정치적으로 길들이기 위해서였다. 이런 세종의 국왕 견습생 시절에 태종이 아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세종의 싱크탱크로 불리는 집현전이다. 집현전은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기관이라 세종이 양성한 기관으로 대부분 알고 있는데, 실상은 상왕 태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기관이었다. 아마 태종은 왕이지만 정치 견습생에 불과한 세종의 친위세력을 양성하기 위해 집현전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태종은 세종에게 자신의 시대의 인사를 쓰지 말고 새 시대에는 새 인재를 등용하라고 조언하는데, 아마 그런 아들의 시대를 위해 배려한 것이 집현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세종은 태종 사후 태종의 인사들을 최대한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태종 시대의 중신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중에는 세종의 장인 심온을 죽이는데 앞장선 유정현과 같은 인물도 있었지만, 세종은 정치보복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화합의 길로 나아갔다. 결과적으로 아버지는 아들을 배려한 것이고, 아들 역시 아버지의 사람들을 품어안으며,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던 셈이다.

성공한 시대로 평가받는 세종의 치세를 보며, 바람직한 지도자의 역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내가 생각했을 때 바람직한 지도자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리더인 자신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인식해야만 한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맞는 인사정책을 단행하여 일을 뚝심있게 진행해야만 한다. 세종은 이에 아주 모범적인 군주다. 세종의 시대에 바람직한 지도자 상은 내치를 정비하고 문물을 발전시키는 지도자였다. 아버지 태종은 세종에게 '모든 악역은 자신이 감당하고 주상은 성군의 길만을 걸으라.'라고 강조했다. 세종은 그런 아버지의 바람, 그리고 시대가 원하는 흐름과 바람을 외면하지 않았다. 시대는 난세에서 치세로 흘러가고 있었고, 그러한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는 수성의 리더십이었다. 세종은 이에 충실한 지도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각각의 프로젝트에 걸맞은 인사를 배치하고 진행한 결과 조선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사실 세종의 시대는 다른 시대와는 다르게 신료들과의 정쟁이나 파워게임도 드물어서 다른 왕들의 시대보다 밋밋하게 읽혔다. 책의 구성은 서사적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것이 아닌 각각의 업적들이 어떻게 진행됐고 어떻게 결실이 맺었는지 챕터별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에 책을 보며 일을 최우선적으로 중시하는 신료들의 태도와 완벽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깐깐하게 일을 점검하는 세종의 성격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세종의 시대는 태종의 시대처럼 정치 정쟁 등등이 없어서 표면적으로는 무미건조하게 읽힐 수 있겠지만, 다방면적인 일을 추진하고 열정 있게 이끌어간 세종의 내면은 저자의 말대로 엄청 뜨거웠을 것이다. 자신의 건강마저 챙기지 않고 일에 몰두하는 세종의 집념은 경외 그 자체였다.

그런 세종에게 아쉬운 부분은 역시 말년 후계구도에 대한 처우다. 나는 세종이 왜 세자가 아닌 대군들에게 정치를 맡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치세의 시기에 태어난 세종이라서 자식들의 우애를 믿은 것일까. 그런 안일한 생각 때문에 자신이 키웠던 싱크탱크들은 둘로 나눠 서로를 죽였고, 아들들도 옥좌를 두고 싸웠으니.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을 따져본다면 세종의 과오가 가장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나에게 세종과 같은 인물이 되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일까 공교롭게도 책을 통해 바라본 세종에게서 내 성격이 보이기도 했다. 독서를 함에 있어 다독보다는 정독, 한 가지 일을 추진할 때에는 집요하게 집중하는 점, 일을 할 때 근본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적용하는 정석주의적인 태도, 잡기를 멀리하는 성격, 호학을 선호하지만 학문을 위한 학문보다는 실용에 바탕을 둔 학문을 선호하는 성향, 거기다 고기를 좋아하는 식성까지 등등... 알게 모르게 나에게 스며들었던 성격의 바탕은 세종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책은 전체적으로 세종의 업적을 잘 고찰하고 있다. 그렇기에 한 권으로 충분히 세종이라는 인물과 시대상을 읽어내기에 충분했다.


(참고)

책에 있어서 한 가지를 지적해보자면 454쪽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문종)의 효성은 지극했다. 직접 복어를 요리해 병중에 있던 아버지 세종에게 올리는가 하면 후원에 손수 앵두를 심어 세종이 맛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저자는 여기서 복어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복어로 쓰고 있는데, 여기서 쓴 복어(鰒魚)는 전복을 의미한다고 한다. 실록에 기록된 복이라는 한자도 전복 복(鰒)을 쓰고 있으며,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복어는 실록에 하돈(河豚)이라고 쓰고 있다. 생각해보면 당시 복어는 쉽게 식용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세종, 문종 시대보다 훨씬 후대에 저술된 허균의 《도문대작》이라는 음식서에서 '복어는 한강에서 나는 것이 맛이 좋은데 독이 많아서 많이 죽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당시 독을 지닌 복어는 잘 못 조리할 시 목숨에 치명적인 음식이다. 따라서 문종이 위험한 복어를 손수 요리하여 진상했다기보다, 전복을 요리하여 바쳤지 않을까 생각한다.



1. 원전 실록에서 한자를 보고 의문이 생겨 더 찾아본 결과 '《왕의 한의학》 이상곤 - 사이언스 북스'라는 책에서 이에 대한 명쾌한 해설이 나와 있었기에 언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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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조선의 태평을 누리다 - 성군(聖君), 성종의 리더십에 대한 최초의 재평가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한우 지음 / 해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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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역사를 배울 때 성종하면 문물 정비와 《경국대전》을 강조하여 가르친다. 이 시기 조선에는 커다란 우환이 없었고, 그랬기에 성종은 평화 속에서 내치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성종을 생각하면 태평성대가 떠오르고, 세종대왕만큼은 아닐지라도 그에 견줄 수 있는 성군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의 집권기는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시기지만, 그것은 외부에서 단편적으로 바라본 시각이고, 실제 성종의 집권기는 권력을 둘러싼 훈구와 성종, 그리고 신진세력 사림의 다툼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봤을 때 성종이 물려받은 정치적 유산은 굉장히 탄탄했다. 태종과 세종이 다져놓은 외적인 국가역량과 기반은 매우 탄탄했지만, 문제는 계유정난 이후, 세조가 강화한 훈구 공신들이다. 그런 훈구 대신들이 택군한 왕이었기에, 성종은 스스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권력의 핵심은 훈구파가 고스란히 쥐고 있었으며,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던 국왕 성종은 그저 대비와 훈구의 눈치를 보며 '국왕 수업'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이런 악순환은 세조의 죽음에서 비롯한 셈인데, 신권을 강력하게 제압한 세조였지만 죽음에 이르러서 공신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원상제 제도'를 도입하여, 세조 이후 후대의 왕인 예종과 성종의 집권기에 커다란 부담을 남겼다.

책을 읽으며 내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다른 성종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종하면 세종대왕과 더불어 조선의 문치를 상징하는 국왕이고, 그렇기에 세종의 마이너 버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 실록에 기록된 성종의 모습은 세종과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마마보이 기질이 다분한 성격, 종친들을 극도로 편애하는 모습, 사치에 물든 모습, 인내심이 뛰어나지만 직설적이고 다혈질에 가까운 성격, 학문을 대하는 태도까지... 세종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새삼 놀라웠다. 물론 성종은 세종을 롤모델로 삼아서 통치를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록을 통해 비교해보건대, 성종의 업적은 여러모로 다소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그런 성종을 우리는 왜 세종과 견줄 수 있는, 혹은 세종과 버금가는 성군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인식은 훈구에 이어 집권하게 될 사림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물려받은 결과가 아닐까 한다. 성종은 막대한 훈구 대신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기용했던 군주다. 사림의 입장에서는 비주류로 있던 자신들을 정치무대에 나올 수 있게 만들어준 성종에 매우 감사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율곡 이이와 같은 현인도 자신의 저서 《동호문답》에서 성종을 세종과 버금가는 인물로 칭송했고, 이런 관념이 알게 모르게 지금까지 내려와서 우리에게 무비판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실제 사서에 기록된 모습을 두고 냉정하게 평가하면 성종은 세종에 비하면 모자란 부분이 많은 지도자였다.

성종 시대를 읽으며 가장 아쉬운 부분은 바로 '가부장적 제도'의 강화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조선의 가부장적인 모습은 성종 시대에서부터 시작됐다. 여자의 재가를 부정적으로 보는 모습, 재가한 자식은 관직에 임용하지 않는 모습 등등의 법안이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재미있는 점은 당대의 신하들은 이런 법안을 만들 때 대체로 반대했다는 부분이다. 역사에 어느 정도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고려시대가 조선시대에 비해 훨씬 개방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선 초반만 하더라도 이런 고려의 풍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어서, 여성들의 인권도 조선 중기에 비해 훨씬 자유로웠다. 그러나 성리학적 사고 관념에 함몰된 성종은 교조적이고 배타적인 성리학의 이념을 사회 전반으로 더욱 강하게 강조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조선은 한층 폐쇄적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바라보면 숭명주의와 극단적인 명분론을 강조하던 조선 중기의 모습은, 성종 시대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그는 조선을 한층 더 배타적으로 만든 지도자였다.   

사실 성종은 신하들에 의해 택군되었을 때, 거의 백지상태나 다름없었다. 왕위 서열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기에 탄탄한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백지의 10대 소년이 하루아침에 왕이 되어 국왕 교육을 받았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러나 성종은 공부를 싫어하는 체질이 아니라, 종국에 가서는 신하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에 지식을 갖추게 된다. 다만 이렇게 교육받는 과정에서 성리학에 너무 몰두하였고, 그런 성종의 관념은 조선을 한층 폐쇄적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책에서는 지적 욕구가 왕성한 성종이 경연에서 《노자》, 《장자》, 《열자》 등의 도가삼서를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성리학에 함몰된 신하들은 이단의 책은 가까이해서는 안된다고 한 칼에 거절한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실록》에 의하면 성종은 경연에서 《전국책》과 같은 종횡가 서적을 배우겠다고 하지만, 역시 신하들의 저지로 읽지 못했다. 도가 사상이야 그렇다 쳐도 현실론적인 치국과 밀접하게 관련된 《전국책》과 같은 역사책을 멀리하는 것은 굉장히 지나친 처사다. 세종은 성리학 중심의 유학도 좋아했지만, 불교, 풍수, 지리, 병법, 역사, 과학, 농업 등등의 잡학 지식도 섭렵하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경연에서 세종은 《무원록》이라는 법전(법의학서)을 신료들과 읽었다. 그런 세종 시대와 비교해볼 때 성종시대의 모습은 아쉬운 부분이 많다. 만약 신료들이 융통성을 발휘하여 지적 호기심이 충만한 성종에게 다양한 학문을 권장했더라면, 그토록 폐쇄적인 조선이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비판적인 논조로 써 내려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성종이 무능한 국왕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왕좌에 올랐지만, 힘든 학습 커리큘럼을 모두 소화해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문제였던 거대 훈구 세력에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하였고, 그들에 맞서 사림을 이용하여 세력 간의 균형을 도모한 점 등을 살펴볼 때, 정치에 있어서도 감각이 있는 지도자였다. 그렇기에 집권 시절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와 비례하여 성종의 권력은 강화됐고, 그에 반해 훈구 세력에 대한 권력은 점차 시들어졌다. 국가 경영적인 측면에서도 성종은 뛰어나다고 하긴 뭣하지만 그렇다고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좋게 말하자면, 중간 이상인 지도자였고, 나쁘게 말하자면 이도 저도 아닌 지도자였다.

성종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바로 '양면성'이다. 성종은 정말 야누스적인 인물이다. 신료들의 강도 높은 직간을 인내하고 들어주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한편으로는 강압적으로 논쟁을 결말짓고, 일탈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림의 의견대로 성종은 나라의 문풍을 드높이고 성리학을 한층 더 발전시킨 공로가 있지만 밤에는 여색을 가까이하며 술을 좋아하고, 유람을 좋아했다. 내 생각에 성종은 매우 감정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런 성종이지만, 정통성 없이 즉위했고 그렇기에 국왕 수업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본성과는 다른 '국왕으로써의 인격'이 만들어진 것 같다. 그렇기에 그의 집권기를 잘 살펴보면 '인간 성종'과 '국왕 성종'의 충돌이 수시로 나타난다. 아마 왕이 되지 않았다면, 특유의 감성 어린 성격을 바탕으로 장안을 울리는 풍류가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흥미롭게도 이런 성종의 양면성은 아들 중종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맞이인 연산군은 자신의 본성을 억제하지 않고 폭주시킨 결과 몰락했지만, 중종은 그런 형과는 다르게 최대한 인내하는 모습을 집권 내내 보여줬다. 그런 중종도 조광조에 대한 신임을 바탕으로 사림을 밀어줬다가 금방 애정을 거둔 모습도 보여줬으며, 측근 정치를 경계해야 한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은 몇몇 측근에게 의존하여 정치를 행했다. 이런 중종의 양면성은 아버지 성종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

책을 통해 성종뿐만이 아니라 성종의 주변 인물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정희왕후 윤 씨. 세조의 처이며 손자 성종 집권기에 조선왕조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은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책을 통해 문제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들을 꼽아보자면 사치하는 풍습과 더불어 인척 정치다. 정희왕후는 무능력한 사람이라면 정치에 자신의 인척을 쓰지 말 것을 당부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척이라서 등용에 차별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이 말인즉슨, 자신과 관련된 종친이더라도 능력이 된다면 기용하라는 말인데, 그래서 그런지 성종 집권기에 문제를 일으켰던 인사들 중에는 정희왕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대간들의 탄핵이 있었지만 성종은 문제의 인사를 최대한 감싸주려고 노력했는데, 아마 대비였던 정희왕후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한명회다. 우리는 흔히 한명회를 매우 부정적으로만 인식하고 간신의 표본으로 생각하는데, 물론 《실록》에서도 한명회는 비판적인 논조가 강하지만, 그의 졸기는 생각보다 굉장히 후하게 기록됐다. 한명회는 공과가 분명한 사람인데, 과는 사람들이 대체로 알고 있듯 권세에 심취하여 안하무인한 점을 꼽을 수 있으며, 공으로는 그래도 나라의 안정을 가져왔으며 제도와 법도 정비에 공을 들였다는 부분이다. 실제로 한명회는 성종의 견제를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권세를 누리다가 죽었으니, 처세와 권력 유지에 있어서는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다.

성종을 한 단어로 정리해보자면 '애매모호함'이다. 분명 조선을 위해 노력은 한 것 같은데, 그 노력의 결실은 다소 애매모호하고, 성군을 표방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주색에 열중했으니 행실 또한 애매모호하다. 그뿐만 아니라 세종과 마찬가지로 내정을 정비했고, 2차례에 걸쳐 북방 군사활동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참 애매하다. 신료들과의 관계도 그렇다. 성종은 친정 이후 훈구 세력과 대왕대비로 대표되는 왕실 웃어른들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막상 살펴보면 그러한 권력적 자립을 이뤘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새로운 인재 양성도 홍문관을 통하여 양성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막상 성종이 고용했던 신진세력 사림들은 중하위 말단직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성종의 집권기는 크게 보자면 세조 정권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데, 세조의 정권이 창업에 가깝다면 성종의 정권은 수성에 가깝다. 세조 - 성종의 콤비는 냉정하게 비교해서 태종 - 세종의 콤비보다 훨씬 퇴보했다. 세조 역시도 태종의 정치력에 한참 못 미쳤고, 성종 역시 세종과 비교해보면 굉장히 애매한 구석이 많다. 물론 중간 이상만 하더라도 좋은 지도자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성종이 누군가? 세종과 비견되는 인물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세종을 기준으로 판단하다 보니 성종의 애매모호함이 더욱 부각됐을 다름이다. (하긴 세종을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어느 지도자인들 과가 없겠냐만...)

아무튼 그런 애매모호한 야누스적 성군인 성종이 묻힌 곳은 공교롭게도 강남 한복판이다. 과거 나는 아내와 연애시절 선정릉 데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선릉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 무덤의 주인은 조선조 성종이라는 왕인데, 낮에는 공부를 열심히 했고 정사를 돌보는데 노력했지만, 밤에 주색 잡는 일에도 일등을 달렸던 왕이야. 그런 왕이 강남에 묻힌 것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몰라. 강남이 어떤 곳이니? 낮에는 비즈니스의 노른자이지만, 밤이 되면 환락의 거리로 바뀌잖아. 낮과 밤이 다른 강남에 그런 성종이 묻혔으니 참 재미있는 것 같아.'

책을 덮는 순간에도 그랬고,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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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김범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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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시각, 평가로 볼 때 연산군과 광해군은 문제가 있는 지도자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광해군을 재조명한 시각의 대중 역사서라던가, 드라마, 영화 등등이 나왔고 이런 영향으로 인해 대중들에게 있어 광해군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광해군과는 대조적으로 연산군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물론 연산군을 새롭게 조명한 책들도 있지만, 두루 읽어본 결과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 대부분이었다. 이 책은 그런 연산군을 최대한 실증적으로, 객관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조선의 문치를 완성함과 동시에, 언관들의 힘을 강화한 지도자였다. 기존의 언론을 담당하던 사간원과 사헌부, 그리고 성종의 친위세력을 담당했던 홍문관도 언관 활동에 깊이 개입하였기에, 이 세 기관을 우리는 삼사라고 일컫는다. 조선 개국 이후 여러 시행착오 끝에 귀결된 통치체제는 국왕과 대신, 그리고 삼사가 균형을 이루는 구조였고, 이를 완수한 인물이 바로 성종이었다. 성종 사후 연산군이 집권할 당시, 삼사는 그 권력이 아주 막강한 상태였다. 연산군은 국왕과 대신 그리고 삼사가 균형을 이루고 운영하는 정치체제를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극단적으로 왕권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집권 초반에는 집정 대신들도 막강한 삼사의 권력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에 이런 연산군의 의견에 대체적으로 동조했다.

  그런 연산군과 대신들의 협력이 만들어낸 작품이 바로 '무오사화'다. 흔히 무오사화를 언급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훈구와 사림의 구도로 단순 도식화하여 해석한다. 대신들은 훈구, 그리고 삼사 쪽은 사림이라고 판단하여 이야기하는데, 저자는 이런 전통적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가 주장한 바로는 이 당시 조선의 행정 중 삼사는 담당 인물들의 성향에 의해 조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삼사라는 자리가 관원들의 관념을 통제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자기에게 태클을 거는 삼사를 견제할 목적으로 연산의 라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삼사의 수장으로 임명한다고 가장해보자. 이렇게 할 시 삼사가 왕권에 협조적인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연산군은 가질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자신의 라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조차 삼사의 수장이 되면 자신을 비판하고 나섰으니, 연산 입장에서는 삼사라는 기관 자체가 매우 성가시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렇듯 훈구 쪽 인물이더라도 사헌부나 사간원의 수장을 맡게 될 시에는 국왕을 압박하는 입장으로 자연스럽게 바뀌게 된다. 그러니 전통적으로 우리가 알았던 훈구 - 대신, 사림 - 삼사라는 공식은 면밀하게 검토하여서 해석할 필요성이 있는 셈이다.

  물론 무오사화를 통해 김종직을 필두로 한 사림 세력들을 제압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종직 일파의 처결은 명분에 해당되고, 실제 연산군과 대신들이 겨눈 것은 최종적으로 '삼사'였다. 저자는 이런 무오사화를 뒤이어 벌어지게 될 갑자사화와 비교하여 비교적 절제된 처벌이었으며, 이는 연산군이 삼사에게 내리는 경고성 이벤트였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뒤이어 벌어질 갑자사화의 엽기적인 처벌에 비하면 무오사화는 '사화'라는 이름이 붙어있긴 하지만, 연산의 입장과 대신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정치의 균형을 맞추는 정당한 행위라고 볼 수 있었으며, 피해도 생각보다 크진 않았다. 당시 삼사의 권한은 엄청 막강하여서 대신들을 수시로 탄핵하고, 탄핵만을 위한 탄핵을 일삼으며, 권세를 높여가고 있었는데, 연산과 대신 입장에서는 정치의 균형이 깨지는 것으로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통하여 삼사를 제압한 뒤, 절대왕권을 위해 한 걸음씩 더 나아간다. 문제는 연산이 꿈꾸던 절대왕권 속에는 치국과 민생에 대한 실체적인 부분이 결여됐다는 점이다. 물론 말로는 민생을 위하는 군주라고는 했지만, 무오사화 이후 연산이 보여줬던 행동은 개인적 일탈의 모습뿐이었다. 견제가 힘든 전제왕권을 필두로 한 일탈은 그 자체만으로 왕조를 위협하는 칼날이었으며, 이런 연산군의 일탈을 묵묵히 지켜보던 대신들은 오히려 삼사와 의견을 함께하여 폭주하는 연산을 말리기 시작한다. 이런 범 신권 연합은 연산군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고, 이런 신하들의 움직임은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빌미로 작용하게 된다.

  성종의 정치는 대체적으로 평균 이상이었지만, 가장 큰 결점을 이야기하자면 아내였던 윤 씨를 죽인 사건이다. 당시 신료들은 세자(연산군)을 봐서라도 극단적인 처사를 취하할 것을 주장했지만 화난 성종은 결국 윤 씨를 죽여버렸다. 훗날의 폭풍을 우려하는 신하들에게 성종은 굉장히 무책임한 태도로 일갈하는데 '그때 가면 그 상황에 맞게 처신할 것이고 세자가 효자면 내 뜻을 이해할 것이다.'라는 발언으로 신하들을 억누른다. 결국 연산군의 폭주는 따지고 보면 성종의 정치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데, 첫 번째가 바로 삼사의 강화고, 두 번째가 바로 윤 씨의 사사였다. 섬세한 감정을 가진 연산군은 이 두 가지 사안을 빌미로 하여, 역대 이래로 시도하지 않은 전제적인 왕권 강화에 나섰던 것이다.

무오사화가 경고성 이벤트였다면, 갑자사화는 연산의 폭주를 대표하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신권은 엄청난 탄압을 받았으며,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본 중앙 관료들 역시 굉장히 많았다. 잔인한 피의 숙청을 이룬 뒤, 연산은 위태하게 구축한 절대 왕권을 바탕으로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자신의 사치하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게 하기 위해 담장을 높이고 궁궐 수리를 넓혔으며, 궁 주변의 민가를 헐어버리고 경기 일대의 절반을 사냥터로 만들었다. 국왕을 말릴 수 있는 신하는 조정에 남아있지 않았으며, 민심은 연산군을 떠나고 있었다.

연산군을 변명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연산군일기》는 반정을 이룬 중종 세력이 집필한 것이라서 의도적으로 왜곡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하는데, 저자는 이런 말에 역대 실록의 분량과 《연산군일기》의 분량을 비교하며 큰 차이가 없으므로, 의도적인 왜곡이 없다고 할 순 없겠지만, 없는 사실을 가지고 지은 것은 아니라는 쪽으로 주장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연산군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오사화까지는 그래도 포용하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건이라고 본다. 연산 집권 당시 삼사의 권력은 굉장히 강했으니까. 다만 문제는 무오사화 이후의 모습이다. 연산군이 만약 민생안정에 뜻이 있고 정치에 뜻이 있다면, 강화한 권력을 바탕으로 정사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그러나 연산은 그렇지 않고 강화한 권력을 보란 듯이 누리는데 사용했다. 그렇게 신료들을 향해 권력을 과시하며 복종만을 요구하는 군주에게 어느 누가 충성을 다하겠는가.  

특히 갑자사화는 전제왕권의 부패가 만든 비극적인 사건이다. 물론 어머니를 향한 복수심에 불타는 연산군에게 동정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개인적인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신권을 탄압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지도자의 과오일 뿐이다. 이때 연산이 신권을 탄압한 것은 조선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모습이었다. 왕권 강화에 힘을 들이던 태종과 세조조차도 신권 세력을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탄압하진 않았다. 조선은 애초부터 건국 이념이 군신 공치를 지향하던 나라다. 이런 연산의 극단적인 왕권 강화는 조선의 건국이념을 무시한 것이며, 어떻게 해석해보면 국정운영의 공동 파트너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자》에 이르길 아무리 궁지에 몰린 군대라도 도망칠 곳은 열어주라고 했다. 이런 극단적인 탄압은 결국 신하들의 반발로 이어졌고, 그랬기에 연산군은 폐위될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으며 재미있는 점은, 연산군이 아버지 성종과 기질이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성종 역시 다혈질에 직선적인 성격을 가졌는데, 연산군 역시 마찬가지다. 성종은 시를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는 풍류가적 성격을 가졌는데 이는 연산군도 마찬가지다. 또한 사치를 부렸던 점이며, 여자들을 가까이한 점에서도, 성종의 모습이 떠올랐다. 성종 역시 호색했고 술을 좋아했으며, 사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다만 연산군과 성종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자제력이다. 성종은 그래도 일탈을 즐기고, 신하들과 싸우다가도, 종국에 가서는 자제력을 발휘하였다면, 연산군에겐 그런 브레이크가 없었다. 
 
  만약 연산군이 무오사화 이후, 삼사와 대신들을 너무 억압하지 않으며, 국정 운영에 최선을 다했다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성군이 탄생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무오사화 정도의 사건은 다른 치세에도 비교적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수준의 정치적 사건이니, 이때에 강화한 왕권으로 좀 더 정치에 매진하였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만약 연산군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삼사와 대신의 손을 잡고 국정을 잘 운영했더라면, 아마 조선의 정치구조는 왕권을 우위로 한 체제로 지속되지 않았을까. 어쨌든 연산군의 극단적인 왕권 강화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로 인해 연산군 이후의 왕들은 강력해질 대로 강력해진 대신과 삼사 때문에 제약적인 왕권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연산군의 극단적인 왕권 강화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왕권 약화를 초래하게 된 셈이고, 이런 체제를 후대의 왕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으며 또 눈에 들어온 점은 바로 무리한 공납(특산물 세금)이다. 연산군은 팔도에서 진귀한 특산물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됐던 지도자였다. 이런 요구를 만족하기 위해 각도에서는 공물(특산물)을 마련했는데 이를 위해 백성들의 노고가 엄청났을 것이며, 그렇기에 생겨난 방납의 폐단도 말도 못 했을 것이리라. 이런 방납의 폐단은 조선 중후반기 대동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백성들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물론 방납을 전적으로 연산군의 탓으로 돌릴 순 없겠지만, 연산군의 사치로 인해 공납이 많아졌고, 연산군 이후의 왕들도 연산군이 받았던 양만큼 공물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두고두고 백성들을 괴롭혔으니, 방납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따져보자면 연산군의 책임도 없다곤 할 수 없을 것이다. 정리해보자면 연산은 후세에 방납의 빌미를 제공했으며, 더욱 약해진 왕권을 물려준 꼴이 된다. 

우리는 역사를 배울 때 되도록이면 좋은 시대, 좋은 인물만을 보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읽히고, 역사 교육에서도 찬란한 시대를 강조하여 가르친다. 그러나 나는 문제가 있고 나쁜 평가를 받는 인물이나 시대도 마찬가지로 조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연산군은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는 권력을 강화해야겠다는 목적이 분명했던 인물이다. 물론 그런 연산군의 생각이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강화한 권력을 정치나 경제 민생 개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 스스로 향유하려고 했던 것이 문제였다. 사실 이런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유형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오늘날 사회에서 세종대왕과 같은 사람보단 연산군과 같이, 권력을 앞세워 자신의 사욕에 충실하려는 인물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쩌면 세종과 같은 이상적인 인물보다 연산군과 같이 비교적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인물에게서 배울 점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학술적인 책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다. 저자는 사학계에 만연한 훈구, 사림이라는 단순화된 도식 구도를 걷어내고 (우리는 흔히 훈구는 악, 사림은 선이며, 사화를 훈구와 사림의 대립으로만 간단하게 도식화하여 해석하는데, 실제 한 시대의 역사는 이렇게 단순화하여 설명할 순 없다.), 최대한 실증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연산군과 그 시대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분석하여 해석하고 있다. 실증적인 데이터, 그리고 명료하게 정리된 필력이 인상적이다. 책의 바탕은 논문이고, 저자 역시 사학 분야에서 정통한 전문가여서 그런지 부분적인 단어 수준은 다소 높은 편이고, 현학적인 문장이 더러 있으며, 글의 성격도 학술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비전공자가 못 읽을만한 수준은 아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전문성과 대중 역사서의 장점을 두루 갖춘 양서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개인적으로 참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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