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
사마광 지음, 푸챵 엮음, 나진희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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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은 중국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서로, 전국시대에서 당나라 멸망 이후 오대 십국까지 1362년의 역사를 기록한 대작이다. 다루는 연도가 방대한 만큼 책의 분량도 엄청난 편인데 무려 294권으로 구성됐다. 그래서 바쁜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이를 완독하기가 쉽지 않고, 그렇기에 《자치통감》을 다룬 축약본이나 요약본 도서들이 최근 많이 발간되고 있다. 최근 나는 《자치통감》을 완독하는데 집중하고 있으며, 방대한 거작인 《자치통감》을 완독하기 위해 국내에 나온 《자치통감》 관련 개론서와 요약서들은 대부분 구해서 읽어봤다.

 

원전 완역본을 제외하고, 요약서와 개론서를 추려내보면 크게 네 가지 도서가 눈에 들어오는데 첫 번째는 원전 완역본을 펴낸 권중달 교수가 쓴 《자치통감 사론 강의》이다. 이 책은 《자치통감》에 쓰인 사학자들의 사평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데 중점을 둔 도서로, 사평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학에 치우친 도서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번째 도서는 장펑 교수의 《자치통감을 읽다》라는 도서인데, 이 책은 《자치통감》을 재구성하여 자기 계발서와 수양서처럼 편제하여 단권화한 책으로 굳이 분류하자면 자기 계발서에 가까운 책이다.

 

세 번째로 거론할 도서는 장궈강 교수의 《천년의 이치를 담아낸 제왕의 책 - 자치통감》인데, 이 책은 《자치통감》에 나오는 시대적 흐름을 일목요연하고 현대적으로 정리한 도서다. 마지막으로 거론할 책은 오늘 리뷰의 주인공인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인데, 이 책은 방대한 《자치통감》의 분량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건 58편을 뽑아내 이를 바탕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이렇듯 《자치통감》은 워낙 방대한 저작이라서, 이를 요약하고 축약하는 과정에서 편저자의 의도에 따라 요약본의 성격도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의 특징을 분석하려면 앞서 나온 요약본들과 비교 분석을 할 수밖에 없다.

 

먼저 첫 번째 도서인 권중달 교수의 《자치통감 사론 강의》의 장점은 역대 뛰어난 사학자들의 사평을 중심으로 책이 전개되기에, 중국 역사의 흐름과 함께 순수한 역사학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개인적으로 역사서라기보다 역사 철학서라고 생각한다. 순수 사학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자치통감》이라는 명저를 탄생한 뛰어난 사관들의 생각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싶을 때에는 이 책이 굉장히 유용하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사평에 대해 관심이 없고 중국 역사의 흐름을 잡고자 하는 일반인들이나 초심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 도서인 《자치통감을 읽다》는 《자치통감》이란 책이 현대적으로 어떤 교훈을 남겼는지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최적의 책이다. 그렇기에 바쁜 와중에도 인문학적 자기 계발서를 원하는 분들, 혹은 조직이나 기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자치통감》을 통해 도덕성에 대한 교훈을 얻고자 하는 일반인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다만 이 책은 성격이 자기 계발서라서, 《자치통감》을 통해 중국 역사의 흐름을 잡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비추하고 싶은 책이다. 책에서 나오는 에피소드는 시간의 흐름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교훈과 관련이 있는 특정 사건들을 중심으로 기록됐고, 그렇게 기록된 사건들은 시대적 구분 없이 뒤죽박죽으로 거론되기에(예로 우리나라 역사서로 치자면 조선과 고려 삼국시대의 사례가 뒤죽박죽으로 나오는 것을 연상하면 되겠다.), 중국사에 대한 예비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읽는데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세 번째 도서인 《천년의 이치를 담아낸 제왕의 책 - 자치통감》의 장점은 책을 통해 중국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의 두 책으로는 《자치통감》이 다루고 있는 방대한 역사 흐름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데 반해, 이 책은 저자가 역사의 흐름을 적절하게 편제하여 독자가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기 쉽도록 편안한 서술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앞의 두 책보다는 훨씬 대중적이다. 그러나 이 책의 치명적인 단점은 편파적인 편제에 있다. 원래 《자치통감》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시대는 당나라 시대고, 그다음이 한나라 시대다. 책에서는 한나라 시대와 유비, 조조, 손권이 군웅할거하던 삼국시대를 집중적으로 조망했지만, 그 이후 시대인 5호 16국, 그리고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 그리고 5대 10국 시대는 굉장히 간략하게 서술했다.

 

네 번째 도서인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은 지금까지 나온 《자치통감》 관련 개론서 중 가장 평이하고, 접근하기가 쉬운 도서다. 책은 《자치통감》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 58개를 뽑아서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렇기에 이 책의 부제를 붙인다면 '58편의 이야기로 읽는 자치통감'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를 중심으로 방대한 중국사를 풀어냈으니 접근성은 좋은 편이라, 《자치통감》에 관심을 가지는 초심자들이나, 동양 고전에 대해 익숙하지 않는 분들은 이 책으로 가볍게 《자치통감》을 접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반면 책의 단점을 꼽아보자면 방대한 통감을 58개의 사건으로 축약하다 보니, 중간중간 빠진 내용도 있으며, 무엇보다 이 책에는 《자치통감》을 쓴 저자들의 사평을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리뷰를 쓰면서, 최근에 《자치통감》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과거에는 완역은커녕 축약본도 전무했고 《자치통감》이라는 책 자체가 매우 생소했는데, 최근에는 완역본도 접할 수 있으며, 이렇게 다양한 개론서를 입맛에 맞게 선택할 수 있으니, 이 모든 것이 《자치통감》에 대한 대중의 관심 때문이 아니겠는가. 가장 최근에 나온 《한 권으로 나온 자치통감》은 기존에 출시한 개론서와 축약서에 비해 훨씬 대중적인 성격이 강한데, 이 책의 출간 배경 역시 중국 역사에 관심이 많은 대중들의 기호의 영향 덕이 아닌가 싶다. 어찌 됐건 이런 출간은 매우 환영이다. 이 책 덕분에 대중들이 더욱 쉽게 《자치통감》을 접할 수 있으니, 고전의 대중화라는 입장에서 볼 때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자치통감》을 두고, 시대착오적이고 고리타분한 책이라고 폄하한다. 물론 오늘날에 기준으로 바라볼 때, 구시대의 흔적을 기록한 책이므로, 시대착오적인 사상이 없을 순 없다. 그러나 이런 냉소론에 입각하여 고전을 바라본다면 세상에 전해 내려오는 모든 고전은 무가치한 것이 된다. 고전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대착오적인 관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통용될 수 있는 교훈을 담은 불굴의 역작에게만 붙여지는 칭호가 '고전'이다. 《자치통감》은 동양의 최고지도자들이 세대를 거듭하며 읽어왔던 명저 중에 명저다. 이 책에는 동양 통치학의 정수가 녹아 있으며, 그렇기에 세종대왕과 마오쩌둥 등의 위인들은 항상 이 책을 탐독했고, 역대의 명 제상들과 정치가들도 이 책을 거울삼아 정치에 임했다. 그러니 사소한 결점을 트집 잡아,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굉장히 극단적이고 편협한 사고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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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의 남회근 저작선 1
남회근 지음, 신원봉 옮김 / 부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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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는 유명한 고찰과 명찰들을 탐방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8대 적멸보궁 성지를 순례하고 있다. 그렇게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일전에 읽었던 《금강경》을 다시 펼쳤다. 사람마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에는 각기 방법이 있는데, 나는 관련된 텍스트를 모조리 읽는 것으로 배움을 시작한다. 어떻게 보자면 먹물 근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짧은 인생이지만 평생 들여놓은 습관이 이 모양이니 바뀔 턱이 없다. 그래서인지 20대에는 나름의 커리큘럼을 짜서 독서하는데 몰두했고, 30대가 시작되자 손에서 책을 놓고 책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하나둘씩 경험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최근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불교 공부도 마찬가지다. 한편으로는 사찰을 답사하며 실천적인 배움을 이어가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집에서 불교와 관련된, 불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경전을 탐독하고 있다.

 

불교는 나와 깊은 인연을 가진 종교다. 비록 나는 종교가 없지만(!!), 내 아내와 장모님은 불심이 깊고, 나의 외할머니와 아버지 역시 불교에 심취하신 적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성장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본격적으로 불교를 탐구하게 된 것은 20대다. 지적인 욕망에 허덕이던 이때에 나는 불교에서 유명하다는 경전들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대충 읽어넘겼다. 귀중한 경전을 그저 정복하고자 하는 마음에 앞서 허겁지겁 읽어댔으니, 경전의 참뜻을 깨닫지 못했음은 당연하다. 《금강경》도 그 시기에 처음 접했다. 우리나라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경전, 그리고 대승 불교가 가장 중요시하는 경전 중에 하나인 《금강경》을 나는 너무나도 얕잡아봤고,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을 단숨에 읽어나갔다. 아무튼 수박 겉핥기 식으로 불교에 관련된 서적을 읽어서 속 뜻은 자세히 몰랐지만, 그래도 안 읽은 것보다는 나았다. 덕분에 나는 불교에 기본적인 사상과 철학을 대충이나마 알게 됐다.

 

내가 불교를 다시 접하게 된 계기는 장모님 때문이다. 장모님의 지병이 깊어지면서, 근심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나 역시 괴로웠다. 그러나 어찌하랴. 병을 대신 앓아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장모님 문병을 매일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러나저러나 답답한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그러던 때 장모님이 불심이 깊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장모님의 쾌원을 위해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을 순례하며 각각 108배를 올리자고 결심했다. 내가 종교를 가지지 않은 이유는 종교의 교리 안에는 답답하고 비이성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내 생각이자 오만일뿐이고, 종교에 귀의한 타인의 입장이나, 종교의 교리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랬기에 성당에 가서도, 교회에 가서도, 절에 가서도 각각의 예절에 따라 예배를 올리곤 하였다. 아무튼 그런 비종교인인 내가 불교 성지를 순례하며, 108배를 올리고자 했으니 스스로 돌아보건대 매우 비이성적인 행위라고 생각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물불을 가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불교 명승지를 순례하는 과정에서, 맹목적인 순례를 하기보다는, 순례를 통해 불교 철학을 단단히 배우는 기회로 삼고자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경전인 《금강경》을 다시 잡았다. 시중에 《금강경》을 번역한 책은 숱하게 많다. 유명한 스님이 번역한 책, 그리고 학자들이 번역한 책, 《금강경》을 대상으로 한 에세이 등등... 워낙 중요한 경전이다 보니 해석한 책도 무더기로 많았다. 그중 나는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 사상에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남회근의 《금강경 강의》를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개인적으로 남회근의 고전 해석본을 애호한다. 남회근의 글은 다소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에 입각하여 설명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의 서술은 깊이가 있었고, 해석에 있어서도 신선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논어》를 읽을 때에도, 《노자》를 읽을 때에도 남회근의 책을 곁에 두고 참고했다. 《금강경》 역시 마찬가지다. 《논어》와 《노자》에서 느꼈던 기대감을 그의 《금강경 강의》에서도 기대하며 책을 펼쳤다.

 

《금강경》은 대승 불교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경전이다. 유교에 《논어》가 있고, 도교에 《노자》가 있고, 기독교와 가톨릭에 《성경》이 있고, 이슬람에 《코란》이 있다면, 불교에는 《금강경》이 있다. 그 정도로 《금강경》은 부처의 사상이 응축된 경전이다. 《금강경》의 에피소드는 매우 간단하다. 석가모니가 소탈하게 공양을 마치고 발을 씻고 휴식을 취하려고 하는데, 제자인 수보리가 석가에게 묻는다. '수양에 관한 최고의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이에 석가는 수보리의 질문을 매우 높게 평가했고, 수보리에게 답을 자세하게 알려준다. 《금강경》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이게 전부다. 얼핏 보면 매우 간단해 보이는 에피소드지만, 《금강경》의 내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석가는 수보리에게 말한다. 모든 것은 마음을 다잡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런 마음을 다잡는 방법을 타인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말이다. 수보리의 질문은 이어진다. 어떻게 말입니까? 석가는 말한다. 현상을 초월해야 한다고, 희로애락 그리고 보이는 현상계로부터 초월하여,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마음 수양이 이런 단계까지 오르면, 그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인간을 괴롭히는 수많은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이런 상태에 마음이 다다른다면, 마침내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굉장히 선문답 같은 해답이지만, 부처의 말은 결국 모든 것은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수양하는 것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부처의 마음공부법은 유교에서 군자가 되기 위해 마음공부를 하는 수양과 비슷하며, 도교에서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무위자연으로 귀의하는 것과 흡사하다. 과거의 학문과 종교의 공통점은 바로 인간의 마음을 다룬다는 점이다. 그럼 점에서 《금강경》은 종교적인 색채가 짙게 느껴지기보다, 마음공부의 방법론을 역설하는 보편적인 수양서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생각할 때 석가는 부처의 단계에 오른 인물이기에 뒤에서는 빛이 나며, 번쩍번쩍이는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금강경》에 나오는 석가는 그 당시 보편적인 사람들과 비슷하다. 소탈하게 공양하고 발을 닦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 이런 묘사는 권위 있는 종교의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라, 소탈한 동네 아저씨의 이미지다. 그렇기에 《금강경》은 부처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 경전이며, 그런 인간적인 부처가 수보리에게 마음공부법을 제시한 경전이다. 석가는 《금강경》에서 수보리에게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다. 수보리가 원하는 해답을 직설적으로 돌직구를 던지듯 강타한다. 형이상학적으로 응축된 석가의 해답을 수보리는 잘게 씹기 위해 풀어서 다시금 질문한다. 그래서 이 경전은 불교의 다른 경전보다 짧지만, 내용은 굉장히 어렵고 깊다.

 

인간적인 모습의 부처가 제시한 마음공부법은 사실 쉬운 방법은 아니다. 현상계를 초월하는 마음의 경지. 누구나 다 그런 마음가짐을 꿈꾸지만, 우리는 늘 세속에 굴복한다. 먹고사니즘의 압박으로 돈을 탐욕하고, 매력적인 이성 앞에서 색을 밝히며, 다이어트를 부르짖으며 한편으로는 탐식을 자행하는 게 대부분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런 내가 과연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책을 읽으면서, 최소한의 마음 수양을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반성했다.

 

책을 읽으며 다시금 느꼈다. 불교는 유신론이 아니라 무신론의 종교라고, 물론 불교 세계관에서도 신이 존재하긴 하지만, 기독교나 이슬람교와 같이 유일신을 경배하고 받아들이는 개념은 아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예배를 드려도 나 자신이 예수가 되거나 알라가 될 순 없다. 그러나 불교는 다르다. 석가가 《금강경》에서 제시한 대로 마음공부를 열렬하게 하여 해탈에 경지에 오르면,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부처'의 탄생이다. 고로 불심을 발휘하니 내 마음을 다잡는데 성공한다면,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또 하나를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장모의 건강을 위해 108배를 한다 하더라도, 석가는 나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는 나의 기도에 반응할지 몰라도, 석가는 나의 108배에 관심이 없다. 석가는 《금강경》을 통해 말했다. 너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라. 모든 것의 시작은 나의 마음에서 시작한다.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다잡는 방법을 퍼트려라. 그럼 세상은 구원될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지금까지 내가 순례하며 예배를 드린 것이 헛된 일이었나 싶었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을 바꿨다. 이전까지 108배는 장모의 쾌유를 위해 빈 것이라면, 앞으로의 108배는 나 자신의 마음 수양을 위해 하겠노라고. 그렇게 수양을 해서, 불심이 깊은 장모에게도 좋은 기운을 나눠드려야겠다고.

 

《금강경》에서 석가는 말한다. 그 어떤 보시, 수억 만금의 보시보다도 더 값진 것은 《금강경》의 이치를 세상에 퍼트리는 것이라고, 이 경전의 핵심인 마음을 다잡는 법을 세상 만방에 퍼트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공덕을 쌓는 것이라고.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나는 불교에 경전에 대해 깊이 있게 논할 지식을 가지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금강경》에 대한 나만의 서평을 꼭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 서평을 보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내 마음을 어떻게 다잡아야 할지 모를 때, 《금강경》을 읽어보라고. 이 책에서 석가가 이야기하는 마음을 다잡는 방법론은 특정 종교적인 교리를 초월한 보편적인 관점의 마음공부법이므로 다른 종교를 가진 분들이나 종교가 없는 분들에게도 마음 수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금강경》은 어려운 경전이지만, 서점에는 《금강경》을 쉽게 해설한 책이 많으니 살펴보고 알맞은 책을 선택하면 되겠다. 내가 리뷰하고 있는 《금강경 강의》도 훌륭한 책이지만, 이 책은 기본적으로 동양 고전에 대한 지식이 쌓인 분들께 권하고 싶은 도서다.

 

 

책을 덮으며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장모님 불교 믿는다는데 《금강경》은 읽어 보셨어?",

"잘 모르겠는데?"

"그럼 당신은 읽어봤어?"

"나도 경전은 안 읽었지."

"이 사람아, 이 책부터 읽어봐. 참 좋은 내용이니까. 그리고 장모님한테도 문병 갈 때 읽어드려. 그럼 부처님이 분명 좋아하실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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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의 영문법 - 영어의 격格을 한 단계 높이는 책!
신동준 지음 / 미다스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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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영어의 중요성은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세계화 시대, 정보화시대에서 영어는 범국제적 공용어의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다면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불편함 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 그렇기에 영어에 대한 교육법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다른 나라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에서 영어는 초등학교 때부터 정규교육으로 배우기 시작하여, 대학교 진학 전까지 필수과목으로 배운다. 대학을 결정하는 수능시험에서도 영어는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초등 6년, 중고등 6년 동안 중요 과목으로 영어를 배운다면 외국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능숙하게 다뤄야 하는 게 당연한데, 실제로 정규 교과 과정만으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왜 이런 터무니없는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어학의 습득은 실상의 활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학교교육에서 강조하는 영어는 철저하게 시험용 독해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대한민국 학생들은 단어를 많이 알고, 지엽적인 문법 지식을 빠삭하게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지식을 말로 표현하는 것에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요즘 일각에서는 이런 시험용 영어의 원인을 '문법' 교육에서 찾고 문법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생각해봐라, 우리가 언어를 배울 때 복잡한 문법을 알고 배웠나? 아니지 않냐? 언어는 소통이 중요한데, 그렇기에 너무나도 디테일한 문법 공부는 지양해야 바람직하다." 일리는 있는 말이다. 실제로 어린아이가 모국어를 배울 때에는, 모국어의 복잡한 문법 규칙을 배우면서 언어를 깨우치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엄마와 아빠와의 소통을 통하여 모국어를 '본능적'으로 배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요즘 해외여행은 굉장히 보편화됐는데, 과거와는 다르게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더라도, 웬만해서는 외국인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정확하지 않더라도 중요한 명사나 동사를 이야기하며 손짓 발짓을 섞는 소위 서바이벌 잉글리시를 구사하더라도, 혹은 문법과 상이한 문장을 이야기하더라도 상대방은 얼추 알아듣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문법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조금 오버한 것 같다. 물론 언어는 소통과 활용을 통해 습득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영어를 실생활에서 꾸준하게 활용한단 말인가? 한국어가 통용되는 한국에서 영어를 모국어처럼 활용하려면, 적어도 영어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과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자주 주기적으로 소통해야 하는데, 과연 이런 환경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물론 펜팔이나 채팅 등을 활용하면 된다고 하지만, 펜팔 역시 주고받는 데에 시간이 걸리며, 결정적으로 펜팔이나 채팅 등도 말이 아닌 문자 중심의 소통이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렇다 보니 상류층 자제들은 영어를 많이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영어를 활용하며 습득하는 반면, 그런 환경을 조성할 수 없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시험용 언어를 공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실적인 부분을 떠나 다른 이유를 거론해보자면 언어를 습득하는 데 있어 문법이 필요 없다 할지라도, 정확한 언어 구사를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문법 지식을 배울 필요가 있다. 물론 과거 우리나라 시험에서 보여줬던 '문법을 위한 문법 지식을 묻는 지엽적인 문제'들 때문에 공부해야 할 문법의 범위가 쓸데없이 많아지는 것은 지양해야겠지만, 최소한의 문법 지식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야 정확한 소통을 나눌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문법 지식은 단어와 마찬가지로 그 범위가 매우 좁은 편이다. 고등학교 때 우리는 영단어를 미치도록 공부하는데, 사실 영미 문화권에서 일상생활에 쓰는 영단어는 최대 맥시멈으로 잡아 봐야 1000개 이하다. 즉 중학교 수준의 영단어만 알더라도, 영어 문화권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다. 마찬가지로 문법 역시 '진짜 소통을 위해 필요한 문법'은 범위가 매우 좁은 편이다. 외국인인 한국인의 입장에서, 과연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문법 지식 없이 생으로 영어를 정복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시험용 영문법 책이 아닌,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영문법의 범주를 충족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내용이 조금 어렵다고 이야기하는데, 실제 이 책에서 다뤄지는 영문법 수준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저학년 수준이라 보는데 무리가 없다. 영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에서 나오는 문법 지식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영어를 어느 정도 공부했고, 취업을 위해 토익이나 토플, 시험용 영어를 공부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어려운 수준은 아니다. 예문도 평이하고 예문에 나오는 단어도 쉬운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책에서는 영문법에 배경을 설명하기 위하여 거론되는 수많은 언어들, 예를 들어보자면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등의 다양한 언어 지식들을 동원하여 설명하는데, 이런 다양한 언어에 대한 지식이 없기에 본문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저자의 해박한 언어 설명을 읽으면서, 과연 이런 설명이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번역한 중국 고전들을 애독해왔는데, 얼마 전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이탈리아 저본을 바탕으로 번역했다 하여 의외의 눈으로 저자를 바라봤다. 중국 고전을 주로 번역하는 사람이 이탈리어 원어의 《군주론》이라니!! 합리적으로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나아가 최근에 다양한 언어학적 지식이 담긴 본서를 펴냈는데, 과연 저자가 《군주론》 원전을 번역할 만한 실력이 있는가를 의심하며 이 책을 읽었다.

 

확실히 책에서 저자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언어 문법을 영문법과 비교하여, 영문법만의 특징을 고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언어에 대한 지식은 해박한 것 같지만, 과연 저자의 분석이 타당한 것인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영어를 제외하고 이 책에 언급된 수많은 언어들에 대한 지식이 나에겐 없기에, 솔직히 저자의 분석이 맞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언어 덕후들이라면 흥미를 가지고 저자의 논의를 분석하겠지만, 비전공자인데다 언어학적 지식에 대한 열의가 짧은 나에게는 간단한 문법 규칙을 설명하는데 너무 범위를 넓혀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끝으로 책 말미에는 저자의 기상천외한 논리가 나온다. 바로 '콩글리시'를 국제적으로 널리 퍼트려서 미국 뉘앙스 중심의 '아멩글리시'를 몰아내자는 대목이 나오는데, 모두가 콩글리시를 부정하고 아멩글리시 위주의 발음을 흉내 낼 때, 저자는 역으로 콩글리시를 적극 활용하여, 한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자고 주장한다. 하긴 생각해보면 영어의 본고장인 영국인 입장에서 미국 중심의 아멩글리시는 방언처럼 느낄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방언과도 같은 미국식 영어가 본토의 영어를 몰아내고 국제어로 자리 잡은 이유는 바로 '국력의 차이' 때문이다.

 

그렇기에 콩글리시가 아멩글리시를 몰아내려면 '적어도' 한국이 지금보다는 훨씬 강대국이 되고 국제적인 영향력을 가져야 하며, 무엇보다도 미국에 대한 의존을 끊어내야 하는데,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일까. 저자의 취지는 알겠지만, 다소 앞서간 생각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 덕분에 상상해봤다. 만약 콩글리시가 발전하고 이를 토대로 진화하여, 영어의 어순이 한국어와 같이 주어 - 목적어 - 동사의 구조가 된다면 훨씬 매력적인 언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라틴어 계열 언어 중에서 영어가 숱한 사촌 언어들을 제치고 국제어로 발돋음할 수 있었던 원인에는 영국과 미국의 강성함이 주요한 원인이지만, 영어라는 언어 자체의 탄력성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영어는 다른 라틴어 계열에서 나온 언어들에 비해 훨씬 간략하고, 문법 규칙도 간소화됐다. 그런 영어니 만약 훗날 한국어의 장점을 흡수하여 진화한다면... 상상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다. 아 물론 영어가 한국어의 문법을 대폭 수용하여 진화한 콩글리시가 탄생한다 하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고 할 수 있는 '한글'을 따라오진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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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 - 신권과 붕당이 요동치던 조선의 쇠퇴기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
신동준 지음 / 미다스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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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이 왕권이 강했던 조선 전반부를 조망했다면 이번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는 사림의 당파 정치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조선 중후반부를 다룬다.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에서 다루는 지도자는 '임진전쟁'으로 유명한 선조부터 순종까지인데, 이 시기는 대체적으로 조선 전반부에 비해 왕권이 약했다. 왕권이 약해지게 된 원인은 사림의 진출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본격적으로 사림이 정계에 등장하게 된 시기는 조선 전기 성종 대에서 시작됐다. 당시 성종은 훈구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사림을 적극 고용하여 세력 균형을 도모하였는데, 성종 대에는 두 세력 간의 균형이 유지됐지만, 연산군의 무리한 왕권 강화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조선 조정에서 신권 세력은 왕권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 뒤 사화가 있음에도 사림은 굴하지 않고 훈구 세력을 공격하여, 결국 선조 시기에는 집권 여당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때부터 신권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선조는 조선 시대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군왕인데, 그의 시기에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고 당파 정치가 본격적으로 이뤄졌으며, 이런 신권의 우위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왕권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남는다. 왜 선조 시기에 왕권은 크게 무너진 것일까. 첫 번째로 선조의 출신이다. 선조는 알다시피 방계 혈통으로 왕위를 이은 첫 번째 군주였다. 전근대 특히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강한 조선에서 특히나 사회의 최고 지도층인 왕실에서는 혈통을 굉장히 중시할 수밖에 없는데, 적통이 아닌 방계로 왕위를 이었으니 이는 신료들의 입장에서는 신권을 강화할 수 있는 최적의 빌미였다. 두 번째로 대외적인 국난을 들 수 있다. 일본과 싸운 임진전쟁과 정유전쟁에서 선조가 보여줬던 무능한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왕권을 실추하기에 충분했다.

 

선조 이후로도 조선 왕실은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무너지는 명나라와 흥하는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자처하며 실리적인 행보를 보였지만, 내부적으로 코드인사를 감행했던 점,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두고,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였던 점, 무리한 왕권 강화를 가시화하기 위해 궁궐 사업에 열중한 점 등등의 아쉬운 행보를 보여 결국 인조와 서인에 의해 왕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대중들에게 있어 연산군과 다르게 광해군은 명군으로 인식하는 시각이 많은데, 이런 재평가의 계기는 영화 '광해'에서 비롯한 것이다. 또한 광해군을 새롭게 해석한 저서들도 종종 나오기 시작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저서는 한명기의 《광해군》이다.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에서도 광해군을 대체적으로 현명한 군주로 평가하는데, 개인적으로 광해군은 외치에 있어서는 현실적이고 탁월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하지만, 내부 정치에 있어서는 미숙한 모습을 많이 보여준 지도자인 것 같다.

 

인조는 만년 야당인 서인들과 함께 광해를 타도하며 일어섰지만, 그의 정부는 신정부가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아마추어적인 행정력, 오락가락하는 정책, 현실에 맞지 않는 사안들, 거기에 자신의 권력욕을 지키기 위한 치졸한 모습, 병자전쟁과 정묘전쟁에서 보여준 대책 없는 모습 등등... 이런 사건들은 하나둘씩 왕권을 약화시키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인조 사후 효종과 현종은 송시열을 필두로 한 거대 서인 세력과 타협하며 정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이렇게 신권이 우위에 있는 조선 조정의 흐름을 끊은 지도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장희빈으로 유명한 숙종이다.

 

숙종은 여당 서인과 야당 남인을 사이에 두고 극단적인 환국을 도모하여 실추된 왕권을 세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강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여러 치적을 남겼다. 그러나 숙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감행한 환국은 여당과 야당을 더욱 감정적으로 갈라놓았는데, 그렇기에 그의 후대인 영조와 정조는 극단적으로 갈러진 신권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탕평을 강조하였다. 숙종 사후 영조와 정조의 시기는 조선 중흥의 시기로 손꼽는다. 그러나 이 시기도 근본적으로 성리학 사상 내에서 국가 발전을 도모하다 보니, 근대로 격변하는 시대적 흐름을 쫓아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영조와 정조는 죽음이 다가오자 후계자에 대한 지나친 걱정 때문에 노론 중에서도 외척 세력을 지나치게 의존했다. 이런 결과 정조 이후의 군주들은 외척이 중심이 된 세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순조 이후 주목할 만한 왕은 고종인데,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에서는 현재 학계에서 고종에 대한 해석이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고종은 시기적으로 조선이 망하기 직전의 지도자라 망국의 이미지 때문에 비난하는 시선이 대부분이지만 사학자들 가운데에서는 고종의 정치력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에서는 비난과 호평을 절충하여,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고종이 세간으로부터 욕을 먹는 이유는 고종 특유의 우유부단함도 있긴 하지만, 개인적인 능력을 떠나 민주화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당시의 시대적 흐름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쫓아가지 못한 부분이 가장 크지 않나 생각한다.

 

아무쪼록 선조 대에 시작해서 고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을 지배한 세력은 사대부로 대표할 수 있는 신권 세력과 특정 세도 가문이다. 이들은 시대에 따라 사림, 동인, 서인, 북인, 남인, 노론, 소론, 시파, 벽파 등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며 당파의 이익을 위해 다른 당과 싸우기도 하였고, 때로는 왕권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책에서 나온 신권정치를 개인적으로 크게 두 부류로 나눠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집권 여당에 대해서인데, 여기에는 조선 초기 여당이라 할 수 있는 훈구, 숙종 시대까지 여당을 유지한 서인 집단, 영정조 시기에 우위를 점한 노론이 대표적이다. 이들 집권 여당의 장점은 야당에 비해 현실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랬기에 권력 유지에 있어서는 탁월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이들의 단점은 부정부패인데, 이는 고인 물이 썩는다는 속담이 있듯 만년 집권의 대표적인 폐해였다. 이런 부정부패에는 인사권을 동원하여 자기세력 사람들을 대거 등용하는 모습, 뇌물, 청탁 등등이 있다.

 

반면 야당 측을 살펴보자면, 야당을 대표할 수 있는 세력은 조선 초기 성종 대에서 명종에 이르기까지 활동한 사림세력(넓게 포함하자면 선조 시기의 사림 세력도 포함된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비주류 서인 세력, 숙종 시기까지 만년 야당을 담당한 남인 세력, 영정조 시기에 활동한 남인과 소론이 대표적이다. 이들 야당 정권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집권 여당의 부정부패를 감지하고 이로 인해 거대한 집권 여당을 공격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점이다. 군주들은 이런 야당을 통해 여당의 독점을 견제하고자 적극 노력했으며, 때로는 야당과 여당을 모두 품으며 탕평을 외치기도 하였다. 그럼 이런 야당의 가장 큰 단점은 무엇일까? 대체적으로 말만 앞서고 행동에 있어서는 무능한 모습을 보여준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를 꼽아보자면 조선 초기 훈구 대신들의 비리를 공격한 사림들인데, 사림 세력은 훈구 세력보다 정치를 잘 할 수 있다고 외쳤지만 정작 그들이 여당이 되었을 때에는 당파 싸움으로 분열되어 조정이 사분오열로 찢어졌다. 인조반정을 이룬 서인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때까지만 해도 서인들은 광해군의 북인 코드인사 때문에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그로 인해 인조와 함께 반정을 일으켜 여당이 되었지만, 정작 그들이 권세를 잡고 보여준 행정력은 그들이 비판한 광해군 때보다 훨씬 뒤떨어졌다. 마찬가지로 숙종 시기에도 만년 야당의 무능함을 확인할 수 있는데, 숙종은 기사환국을 통해 만년 야당이었던 남인을 여당으로 세웠다. 그러나 집권 여당이 되어 보여준 남인들의 모습은 서인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이에 실망한 숙종은 갑술환국을 감행하여 실각한 여당인 서인을 다시 중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신권의 여당과 야당의 모습은 사실 오늘날 정치에 있어서 여당과 야당의 모습과 비슷하다. 대체로 여당은 현실감각이 있으나, 현실 안주와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하여 문제고, 야당은 의지는 있으나 그 의지를 실행하는 방법이 너무 이상적이고 현실성이 결여됐으며, 결과적으로 행정에 있어서 서투른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그렇기에 왕조 국가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신권에 양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는데, 저자인 신동준 역시 기본적으로 왕조 국가에서는 왕의 권력이 강해야 한다는 입장을 주장한다.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지도자 개인의 지도력을 극도로 강조하는 사상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왜 그럴까? 일제 치하 이후 우리는 군부독재 시절을 겪었다. 이 시기는 국가적으로 볼 때에 외형적인 발전은 분명 있었지만, 시민들의 자유는 굉장히 제약적이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기에 시민들은 오늘날 독재를 연상하는 사상 등에 있어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다.

 

권력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시스템은 사실 위험한 제도다. 인간은 부정부패와 타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데, 막대한 권력을 가지게 됐을 때 그 권력을 사유화하여 사용한 지도자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수두룩했다. 우리가 독재를 생각하면 독재자가 자기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연상하는데 이 역시 독재 시스템의 대표적인 부작용이다. 그러나 이런 독재 시스템도 장점은 분명 있다. 독재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명령 체계가 일원화되어 있기에 비상시나 난세에서는 빛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공화정이 발달한 고대 로마에서도, 전쟁 등의 국난이 다가오면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명령 체계를 일원화하기 위해, '독재관'을 임명하는 제도가 있는데, 독재관은 동양의 왕과 대등할 정도의 권력을 가졌다. 물론 로마의 독재관은 자신의 임무가 끝나면 바로 사임을 하였기에, 특정 개인이 지속적으로 권력을 누리고 이를 바탕으로 사유화할 가능성은 없었다.

 

조선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왕에게 권력을 몰아준 독재 왕조 체제였다. 그럼 단지 왕이 뛰어난 정치력을 통해 막강한 권력을 가지기만 한다면 성군이 되는 것일까? 아니다. 바람직한 독재자는 막대한 권력을 획득한 뒤, 그 권력을 사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공적으로 사용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조선 왕조의 군왕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교육받는 '제왕학' 역시 바꿔 표현해보자면 '바람직한 독재 권력'에 대한 공부였다. 조선왕조에서 독재를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인물을 대표적으로 꼽아보자면 세종이다. 세종은 태종이 강화한 막강한 왕권을 이어받아, 권력을 백성들을 위해 최대한 사용했다. 이런 세종과 같은 독재자는 전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케이스며, 그렇기에 우리는 조선하면 세종을 떠올리고, 여전히 세종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결국 바람직한 독재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에 있어 권력의 주도권을 가져야 하며, 그렇게 획득한 권력을 사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공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다만 앞서 언급하였듯, 인간이란 존재는 막대한 힘과 이익 앞에서 탐욕을 이겨내기 힘든 존재이기에 독재 시스템은 일말의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유화할 수 있다는 위험성 때문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시민들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아무튼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의 성격을 정리해보자면, 첫 번째로 권력구도를 통한 해석, 두 번째로 현실주의적인 시각, 세 번째로 최고지도자 중심의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저자의 해석은 사람에 따라 호불호를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지만, 방대한 실록을 압축하여 적절하게 단권화한 부분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조선 지도자들의 업적을 살펴보며 오늘날 우리의 사회 지도층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굉장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시중에 실록과 조선사에 대한 얄팍한 저서들이 판을 치고 있는데, 이 시리즈는 나름 내용에도 충실하고 깊이가 있으며, 역사학계의 최신 동향과 논의 등등을 빠짐없이 언급하고 있기에 역사에 대해 초보자를 비롯하여, 지식이 있는 사람들도 생각을 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오래간만에 묵직한 책을 통하여 조선사의 흥망을 깊이 있게 조망하니 한편으로는 후련하고, 한편으로는 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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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 평전 - 문무겸전의 전략가
백상태.장석규 지음 / 주류성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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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 생소한 이름이다. 학창 시절에 조선사를 공부할 때에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조선의 두 전란과 깊은 관계가 있고, 무너진 조선을 세우려고 하는데 최선을 다한 인물이란다. 광해군의 실리적인 외교 정책도 그의 영향이었다고 하며,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도 그가 주축이 되어 제압했다고 한다. 공로만 봐서는 굉장히 뛰어나고 중요한 인물인 것 같은데 정작 한국사에서 그의 존재는 개미만큼 미약하다. 그의 이름은 '장만'이라고 한다.

 

장만은 조선 중기, 선조, 광해군, 인조 대에 활약한 재상이며 장군이다. 이 시기는 일본과의 전쟁, 그리고 여진과의 전쟁이 있었으며, 내부적으로도 쿠데타에 의한 정권 교체가 있던 혼란한 시기였다. 나는 일 년에 한 번씩 남한산성에 가서 성곽을 종주하는 습관이 있는데, 성곽을 돌 때마다 명분론에 젖었던 조선 중기 후기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남한산성은 명분에 휩쌓인 조선에게 국제적으로 치욕을 안겨준 상징적인 장소였다. 조선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사대부들의 나라, 선비의 나라, 문치가 중심이 된 나라 등등이 일반적으로 떠오른다. 옆에 나라인 일본은 칼의 나라라면 조선은 붓의 나라였다. 그러나 본디 국가는 문무 어느 한쪽에 치우칠 경우 폐단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일본의 막부정권은 극도로 무를 숭상한 결과 무모한 침략전쟁을 일으켜, 자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전체에 막심한 피해를 가져왔다. 조선의 경우 문치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태평성대에 젖어 국방을 소홀히 하고, 명분에 휩쌓인 성리학적 관념만을 종교적으로 추종하는 사태에 이르러, 화를 자초했다. 일본과 7년 동안 싸운 전쟁, 그리고 정묘년과 병자년에 청나라와 싸운 전쟁은 이웃 나라의 야욕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자국 안보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조선에게서 일차적으로 원인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더 큰 문제는 두 번의 전란을 거치면서도 조선 지식인층의 인식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조 정권 이후 송시열을 비롯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며, 명분에 젖은 성리학을 파고드는데 더욱 열중한다. 이런 답답한 흐름을 바라보며, 과연 조선에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 철학자들이 없는 것일까, 조선의 실리주의자는 없었던 것일까. 붓으로 필화를 자랑하는 선비들이 아닌, 현실에 문제점을 적극 개선하고자 노력한 실천 중심의 인물은 없었던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조선의 현실주의자를 찾는 과정에서 나는 청나라와의 전쟁을 굴욕적인 화평으로 해결하고자 주장했던 주화파의 우두머리이자 현실주의자인 최명길에 주목했다. 그리고 최명길을 파면서 만나게 된 인물이 바로 최명길의 장인인 '장만'이었다.

 

체 게바라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마음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키우자.'라고, 장만은 체 게바라의 명언과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조선의 리얼리스트였으며, 불가능한 꿈인 조선의 부강을 꿈꾸며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조정에 남아있던 성리학에 경도되어 말과 붓으로 정치를 한 사대부들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장만은 동아시아 나라들이 세력 교체로 불안한 시기, 조선의 국방을 책임졌다. 선조 정권 대에는 중앙에서 문관직을 역임했고, 나아가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 행정 관련 업무를 관장했다. 전란이 종결된 후 장만은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여진과의 충돌을 막는데 최선을 다했고, 발흥하는 여진의 세력을 보고 위기의식을 느끼며, 만주 일대의 지도를 만드는 등, 방비에 최선을 다했다.

 

광해군이 집권을 시작하자 장만은 광해군에게 여진의 강성함을 경고하며, 전란이 일어날 시, 명과 여진의 상황을 보며 중립외교를 펼쳐야 할 것을 주장했다. 외교적으로 실리적인 입장을 보여줬던 광해군은 아마 장만의 주장을 직간접적으로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장만은 조총부대를 훈련시키고, 북방 방어 전선을 구축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광해군의 내부적인 폭정이 높아지고, 서인들을 주축으로 한 인조반정의 싹이 트기 시작할 때 군권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었던 장만은 사위인 최명길에게 '예전의 군주에 대한 은혜 때문에 전면에 나서진 못하겠지만, 너희가 백성을 구하고자 한다면 정변을 묵과하겠다.'라고 말하며 실질적으로 반정을 묵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려 '나라가 흩어지고 나면 누구와 정치를 논하겠냐.'라고 외치며 광해군이 정신을 차리고 내치에 더욱 힘쓸 것을 강조했다.

 

인조반정 이후, 인조와 서인 정권은 광해군 정권 때 활약하던 인물들을 대거 숙청했지만, 당시 조선의 국방을 논할 때 장만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여전히 장만을 중용했다. 장만은 신정부를 위해 현실적인 성격의 상소를 올렸지만, 인조와 서인정권은 여전히 명분론에 젖어 있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인조는 도망가고 장만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안산에서 이괄의 군대를 격파한다. 그는 이 싸움 도중 한쪽 눈이 실명했는데, 이는 오랜 야전 생활 때문이었다. 그 뒤 장만은 북방 경계를 위하 안주에 방어진을 세우자고 주장했지만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이귀는 의주를 고집했다. 결국 인조는 안주와 의주 사이에 있는 구성에 주둔지를 세운다. 인조와 이귀는 군대와 백성에게 명망이 높은 장만을 경계하고 시기하였는데, 이괄의 난과 같은 무신 반란이 언제 또다시 일어날지 몰라서, 군벌 세력들의 군사 훈련을 일부로 저지한 것이다.

 

그 결과 조선의 국방력은 크게 약화되는데, 이는 결국 정묘년과 병자년에 청의 군대 앞에 무기력하게 당한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 정치에 현실성 없는 판단에 실망한 장만은 사직서를 무려 7번이나 올렸는데 매번 거절당했다. 정묘전쟁이 터지고, 인조 조정은 또다시 장만에 기대를 거는데, 장만은 약화된 조선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화친론이 대두되고 결국 청나라와 형과 아우의 맹약을 맺은 조건으로 조선은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대신들은 장만을 두고 탄핵해야 한다고 말했고, 그렇게 벼슬에서 물러나 살다가, 조정에 복귀한 뒤, 노쇠함 때문에 다시 벼슬을 물렸다. 이후 장만은 자택에서 죽었는데, 그의 실리주의적인 사상은 사위 최명길과 부하 장군 정충신 등이 이어나갔다.

 

이렇듯 장만은 당시 명분론에 휩쌓인 성리학자들이 탁상공론을 하던 조정에서 문관직과 무관직, 그리고 지방직과, 중앙직을 두루 경험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국방에서 두각을 드러냈는데, 세종대왕 때 개척한 4군을 점령한 여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국토를 회복했으며, 이괄의 난을 제압하여 무너지는 조정을 다시금 바로 세웠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정세를 바라봤고, 이런 그의 사상은 당대 주류의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성리학적 마인드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장만은 조선의 리얼리스트라고 할 수 있겠고, 명분론에 휩쌓인 나라에서, 현실주의적인 대안을 실천하고자 노력했으니, 그의 이런 노력은 가히 불가능한 꿈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현실주의자 장만 장군이 왜 후대에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조선 사상사의 흐름 때문이다. 알다시피 조선은 망국에 이르기까지 성리학적 사고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흐름이 이어졌으니, 조선 시대의 위인 자리는 성리학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긴 위인들의 차지였고 현실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장만이나 최명길 등등은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만 갔다. 그래서 나 역시 장만의 삶을 읽으면서 부끄러웠다. 이런 인물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고, 이를 통해 조선 중기와 후기에는 명분론에 휩쌓인 인물들이 가득했다는 나의 편견을 돌아볼 수 있었다.

 

장만의 삶을 읽으면서 느낀 사실은 능력이 뛰어나고 탁월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환경을 만난다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자고로 영웅은 능력도 능력이지만, 시기를 잘 타고나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장만의 삶 역시 그렇다. 만약 장만이 명분론을 강조하는 환경이 아닌 실용을 추구하는 환경에서 활약하였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적어도 장만의 실용주의 정책을 지지할 수 있는 지도자를 만났더라면, 어쩌면 정묘전쟁에서 조선군이 그토록 무력하게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조선의 운명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인조 정권은 북방 정책에 있어서 잔뼈가 굵은 데다 현장에서 활동한 장만의 의견과, 글만 읽고 군사일에 관해서는 전혀 경험이 없는 백면서생 이귀의 의견을 두고 고민하다 결국 절충하는 방안을 채택했는데, 이는 정말 어리석은 선택이다.

 

국방과 전쟁은 백성의 안위가 걸린 중차대한 사안이다. 왕조 국가는 자국의 신민들에게 일반적으로 무거운 세금을 거둔다. 그럼 백성의 피땀을 거둬들이면서 국가는 백성들에게 무엇을 해줘야 할까? 무엇보다도 신민들에게 최소한의 안정된 생활권을 보장해야만 했다. 이런 최소한의 생활권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엇일까? 바로 '안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세금을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이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내는 것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나의 삶을 국가가 지켜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민주 사회이든 왕조 사회이든 근본적으로 피지배층이 세금을 내는 원인은 '삶의 안정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렇듯 전쟁은 이토록 중요한 백성의 안위를 두고 싸우는 것이기에, 무엇보다도 현실 경험과 감각에 뛰어난 전문가의 의견을 주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다. 그러나 조선은 반대로 성리학적 이념에 젖은 그리고 당대의 권세가였던 문인의 의견과 전쟁에 있어 잔뼈가 굵은 장군의 의견을 절충하는 센스를 보여준다. 이런 상황을 보며 사람이 능력을 펼치고 뜻을 이루는 데에는 환경적인 조건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다.

 

국내 평전을 읽을 때 주의하는 점이 있다. 우리나라 역사 인물의 평전 중 일부는 문중의 위인을 의도적으로 드높이고자, 편찬한 평전이 있는데, 이런 책을 읽을 때에는 최대한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며 책을 읽어야 한다. 이런 부류의 평전들은 대체적으로 다루는 인물이 자신의 선대의 어른이다 보니, 공을 너무 부풀리고 나쁜 점은 언급하지 않는 편파적인 기록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도 이런 부분에서 엄밀하게 살펴보자면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이 책은 장만의 직계 후손은 아니지만 장만의 먼 후손이 주축이 되어 저술된 평전이다. 그래서 장만에 대한 호평이 가득한데, 책에 나온 대로만 평가하자면, 장면은 문무를 겸비하고, 신분제가 엄격한 조선 사회에서 차별 없이 사람을 대했다고 하니 인품도 매우 뛰어난 사람으로 보인다. 물론 장만이란 인물이 뛰어난 인물이지만 잊힌 영웅이이게 이를 대중들에게 크게 조망하고자 장점을 강조한 점은 백번 이해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더라도 단점은 있기 마련인데, 책에서는 장만의 아쉬운 부분, 그리고 단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웠다. 장점과 더불어 단점을 객관화하여 언급했더라면, 장만 장군이 오히려 더 인간적인 인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책을 통하여 장만이라는 거대한 인물을 자세히 알게 된 점은 고마웠지만, 책에서 묘사하는 장만의 모습은 입체적이고 인간적이기보다 위인전에 나오는 전형적인 인물처럼 다가와서 이 부분이 조금 아쉬웠다. 아무튼 사소한 아쉬움이 있는 책이지만, 조선의 리얼리스트를 알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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