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사략 - 하 십팔사략 2
증선지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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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 하》 권은 상권에 이어 수나라와 당나라, 오대십국을 거쳐 송나라와 요나라, 금나라와 원나라의 중원 통일까지 다루고 있다. 《십팔사략》은 흔히 《자치통감》을 참고로 한 축약본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자치통감》이 상고시대부터 오대십국까지 다루고 있다면, 《십팔사략》은 오대십국을 넘어 송나라와 요나라, 금나라와 원나라 통일기까지 다루고 있어서 훨씬 넓은 시대를 다루고 있다. 《십팔사략》은 송말원초의 격동기 시대에 저술된 저작이다. 그렇다 보니 저자인 증선지는 책에서 송나라의 분량을 다른 나라보다 훨씬 많이 할애하여 다루고 있는데, 이는 당시 저자가 활동했던 시기와 가장 가까운 시기가 송나라였기에 그런 것 같다.

 

 

대체로 시대사를 서사적으로 다룬 편년체 역사서는 저자가 살고 있는 시대와 가까워질수록 더 자세하게 기록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전해지는 책도 많을뿐더러 전해지는 기타 자료들도 풍부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예로 들어보자면, 단군 고조선의 기록이나 삼국시대의 기록보다는 조선시대나 근현대 기록이 많이 전해지기에 이 시대를 다룬 TV 방영물이나 저작들이 다른 시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또한 저자인 증선지의 출신은 송나라였다. 조국 송나라가 오랑캐라고 할 수 있는 원나라에 멸망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기록을 더욱 상세하게 기록하려는 목적으로, 분량을 많이 할애했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저자의 노력 덕분에 《십팔사략 하》권을 통해서 혼란한 오대십국의 상황과 송나라와 요나라 금나라의 패권전쟁의 흐름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십팔사략》은 조선시대에 아동용 역사서로 폄하되었지만, 조선 초기에만 해도 국왕의 역사교육 교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십팔사략》을 통독한 인물은 바로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세우고, 행정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태종 이방원이다. 사람들은 흔히 태종 이방원을 무인(武人)적인 기질이 다분한 인물로 착각하는데, 실제 역사서에 나오는 태종은 무인이라기보다 문인(文人)에 가깝다. 태종은 고려 말 과거에 급제했는데, 조선 군왕을 통틀어 지적 능력을 객관적으로 검증받은 인물은 태종 이방원이 유일하다. 똑똑한 태종은 경연(왕이 공부하는 수업)에 나가 신하들이 권하는 책을 보지 않고, 강습 교재를 자기가 선택했던 군왕인데, 오늘날로 말하면 자기주도적인 학습을 했다고 보면 되겠다. 이런 태종이 중국사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십팔사략》을 선택해서 통독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에 전한다. 똑똑한 태종이 숱하게 많은 역사책 중 《십팔사략》을 골라잡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분량이 적으면서 핵심을 담고 있는 점 때문이었다.

 

 

태종은 아들 세종과는 다르게 책을 진득하게 정독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중요한 핵심 위주로 공부에 있어 효율을 중시한 리더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과서를 펼쳐 놓고 단권화 작업을 마친 뒤 핵심 요약집 위주로 공부를 하는 스타일인데, 이런 태종의 성향에 가장 안성맞춤이었던 책이 바로 《십팔사략》이다. (물론 태종도 《대학연의》라는 책을 비롯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책은 반복적으로 정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반면 태종의 아들 세종은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다. 세종은 뚝심 있게 기초부터 탄탄히 깊게 정독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래서 아버지와는 다르게 294권짜리 거작 《자치통감》을 경연에서 완독하여, 중국사에 대한 지식을 공부했다.

 

 

신동준 선생님이 번역한 《십팔사략》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번역도 번역이지만 역자의 '보설(輔說)' 부분이다. 아무래도 《십팔사략》은 각 시대의 대표적인 사건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에 그치고 있어 디테일한 깊이를 기대할 순 없는데, 역자는 그런 단점을 보설을 통해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역자는 친절하고 자세한 해석을 곁들여 《십팔사략》이 놓치거나, 생략하고 있는 부분들을 끄집어내 독자들에게 설명한다. 역자는 보설을 통해 단지 고전을 해석하고 보충 설명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십팔사략》에 나오는 사건들을 오늘날의 현실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설명하고 있다. 역자의 저술을 많이 읽어봐서 개인적으로 신동준 선생님의 사상에 대해서는 대략 알고 있는데, 기존 학계의 관점과는 다르게, 파격적인 가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통속적인 견해를 따르고 되풀이하기보단, 기존의 학계가 주목하지 않았던 문제들을 많이 제시했다. 그렇기에 역자의 보설은 주관이 강하게 개입되어 있어서 개성적인데, 사람에 따라 역자의 해석이 호불호를 불러올 것 같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부고 소식을 접했다. 바로 역자인 신동준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기사였는데,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최근 신동준 선생님은 비영리집단 올재에서 《자치통감》 일부를 펴냈다. 올재에서는 《자치통감》을 신동준 선생님과 함께 완역할 계획이라고 공포했는데 알다시피 《자치통감》 완역은 굉장한 노고가 들어가는 작업이다. 그래서 심적으로 많이 응원을 했는데, 번역 도중 갑작스러운 부고로 인해 완역 작업에 차질이 생겼다고 하니 안타까울 다름이다. 또한 나는 신동준 선생님이 번역한 고전들을 대부분 읽었고 소장하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신동준 선생님의 철학과 내 생각은 상이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동양 고전 보급에 노력하신 분이고, 기존의 학계의 목소리와는 이색적인 주장을 많이 보여서 깊은 인상을 줬었다.

 

 

그래서 나의 호불호를 떠나서 연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력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에 소리 없이 응원했는데, 이런 식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을 접하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울적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토록 열정을 가진 번역자분이 몇이나 있을까. 선생님의 번역을 기다리는 고전들이 아직도 수두룩한데, 이번 《십팔사략》을 끝으로 신선하고 인상적인 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동양 고전 애호가로써 너무나도 안타깝다.

 

 

선생님, 열정적으로 번역 작업을 하신 덕분에, 동양 고전에 더욱 깊이 있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못다 한 작업이 있으셔서 아쉽겠지만, 부디 그곳에서는 다 내려놓으시고, 편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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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 - 상 십팔사략 1
증선지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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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완독을 시작하면서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은 책들을 참고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이 바로 《십팔사략》이다. 《십팔사략》은 말 그대로 '18가지 역사서를 간략하게 정리한 책'이라는 뜻으로, 송말원초 과거를 준비하던 증선지가 저술한 저서라고 한다. 비록 그는 과거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런 회환을 저술을 통해 승화하였으니, 이는 고난을 겪은 사마천과 좌구명이 각각 《사기》와 《춘추좌전》을 지은 것과 유사하다. 《십팔사략》은 다른 중국 고전보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역사만화가로 유명한 고우영 씨가 그린 만화 중에는 《십팔사략》을 주제로 한 작품이 있으며, 그 외에도 《십팔사략》을 간략하게 압축하여 중국사를 정리한 책이 시중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시중에 유통되는 《십팔사략》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왜냐하면 첫 번째로 기존에 유통되는 책들은 모두 원저자가 쓴 내용을 그대로 번역한 책이라기보다, 편저자의 구미에 따라 변형, 축약 등등의 2차 가공을 한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널리 알려진 고전이지만 원전을 올바르게 번역한 책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번에 동양 고전 번역으로 유명한 신동준 선생이 원문을 포함하여 《십팔사략》을 새롭게 번역했다. 마침 《자치통감》도 완독하고 있는 데다 《십팔사략》의 원전과 번역본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렇기에 그런 나에게 이번 번역본은 가뭄에 만난 단비와도 같았다.

 

 

아무리 압축을 했다고 해도 《십팔사략》은 중국의 18개의 왕조들의 역사를 축약한 책이므로, 분량이 있는 편이다. 그래서 번역본은 상권과 하권으로 나눠서 출간했는데, 상권은 중국의 하은주 시대와 진나라, 서한과 동한, 위진남북조까지 다루고 있고 하권은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를 시작으로 오대십국과 송나라와 남송 요나라 금나라 시대를 거쳐 원나라의 통일까지 다루고 있다. 예로부터 《십팔사략》은 어린 아동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역사서로 취급됐다. 지식을 처음 배우는 어린이들이 배우는 교재이기에,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이 책의 수준을 매우 낮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본다면, 어떤 분야의 지식을 가르칠 때에는 그 분야의 지식들 중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쉽게 가르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렇기에 수학을 배울 때에도, 인수분해나 미분과 적분 등을 바로 배우지 않고, 사칙연산 즉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등을 배우며 구구단을 외우게 한다. 영어 역시 마찬가지다. 중학교 시절 우리가 외우던 영단어는 인사말이나 기본적인 표현, 기본적인 생활 단어를 외우고, 학년이 높아질수록 전문적인 단어와 복잡한 구문을 배운다. 그럼 중학교 영어교과 과정과 고등학교 과정 중 어느 과정이 더 중요할까? 나는 중학교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영어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영단어나 구문은 중학교 수준에서 배운 단어와 구문만 잘 알고 있더라도 의사소통을 하는 데에는 크게 무리가 없다. 한국인 역시 일상생활에서 학술지에서 나올 법한 전문용어보단, 평이한 단어를 자주 쓰니까. 이런 사례를 잘 생각해본다면, 한 분야의 지식을 배울 때 처음 배우는 기초적인 내용은 그 분야에 익숙한 한 사람의 눈에는 쉬운 내용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공부를 할 때 기초를 튼튼히 하라는 말을 수없이 듣는데 이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자치통감》과 《십팔사략》을 둘 다 찬찬히 읽어본 바, 비유하자면 《자치통감》이 대학원생들이 보는 전문적인 교재라면 《십팔사략》은 중고등학생이 읽는 교재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우리는 고전하면 어렵고 복잡하고 딱딱한 책으로 생각하는데, 《십팔사략》은 표현이 단순하고, 복잡한 서술이 나와있지 않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독자들이 받아먹기 좋게 잘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다. 물론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자치통감》 에 비해 제한된 종이에 18개 역사서를 압축하여 쓰다 보니 《자치통감》과 《사기》와 같은 깊이는 없지만, 《십팔사략》은 이 두 책보다 훨씬 방대한 역사를 다루고 있으니 말하자면 폭이 넓으면서 시대의 대략적인 사건을 잘 요약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상권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선사시대부터 위진남북조 시대까지다. 특히 내가 주목한 부분은 복잡한 남북조 시대였는데, 이 시기는 5호 16국이라고 표현하듯 난세 중에 난세인데다 많은 나라들이 궐기하여 복잡한 시대다.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 위촉오 시대를 통일한 나라는 위를 바탕으로 하여 건국된 사마염의 진나라다. 그러나 이 진나라가 내부적으로 몰락하면서 중원의 북방에는 이민족이 밀려와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고, 한족들은 남하하여 남쪽에서 왕조를 이어나갔다. 책에서는 한족 출신의 남조 국가들을 정통으로 보고 집중적으로 다루지만, 중간중간 나오는 이민족 북조 국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가 얼마나 혼란한 시대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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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법인 지음 / 불광출판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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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스님께

 

 

스님 안녕하세요. 저는 얼마 전에 스님을 독대한 사람입니다. 이번 템플스테이에서 가장 의미 있는 만남을 꼽으라면 스님과의 차담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템플스테이를 통해 전국의 사찰들을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장기간의 템플스테이 과정에서, 제가 있는 곳으로 때로는 어머니, 아내, 아버지가 찾아와 템플스테이를 함께하기도 했는데, 해남 대흥사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좋은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습니다. 여행의 대부분은 저 혼자서 돌아다녔지만 종종 가족들의 합류로 인해 가족들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길에서 수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그중 스님이 하신 말씀과 송광사 불일암에 덕조 스님의 법문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제 가슴을 뻥 뚫리게 한 스님의 법문은 '공'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 중 가장 높으면서도 핵심이라고 하는 공의 사상을 그토록 쉽게 평이하게 설명하시는 스님의 가르침에 저는 제가 고민하고 있었던 문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공이라는 것은 무조건 비우고 텅 빈 것이 아닌 본래의 것 그 자체만을 남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현대 사회에는 나의 본질을 흐리고 유혹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게 세속에 살다 보니 내 몸에 걸맞지 않은 옷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더군요. 이를 하나둘씩 비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내가 원하는 것, 그리고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었는지, 나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나의 본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제가 그토록 찾고 갈구하던 해답이었습니다. 마음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살아가기보다 내가 기준이 된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남들이 익숙하다고 느꼈던, 그리고 내가 익숙하다고 자위하며 속여왔던 삶을 다시 살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저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쪽으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듯, 모든 일은 마음에 달렸다고 하셨으니, 저 역시 조금의 불편함이 있더라도 이를 넉넉하게 품어안으며, 행복하게 살도록 하겠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듯, 이성과 감성, 이성은 인문학으로 닦으며, 감성을 키우기 위해 악기와 다도 그리고 다양하게 놀 수 있는 것들을 만들며, 최대한 행복하게 살고자 합니다. 세상이 설정해놓은 물질적인 쾌락에 따르기보단 저의 가슴이 소리치는 정서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대흥사를 나오면서 절집 앞에 위치한 서점에서 스님의 책을 단숨에 구매해서 여행 내도록 읽고 또 읽었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장거리 여행이었는데, 버스나 기차를 타서 잠을 청하는 시간과 주변 풍경을 감상하던 시간 외에는 대부분 스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제가 스님께 가장 매력을 느낀 부분은 행동을 강조한 부분이었습니다. 몇몇 사찰의 템플스테이 차담 시간에는 스님들이 직장 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물질적인 삶에 최선을 다해서 행복을 찾으라는 말씀도 하시던데,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물론 그렇게 산다면 자신의 인생은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가능성이 높겠지요. 그러나 설사 그렇게 행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자신만을 위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고, 만약 사회에 그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만큼 더 각박해지고 인정이 메마르지 않겠습니까?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 세대와 우리 밑의 세대의 모습이 이런 대표적인 사례가 아니겠습니까. 스님은 행동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중심에는 타인과 함께하는 연대가 들어 있었지요. 나도 중요하지만 남과 함께 연대하자는 그 말씀! 그 울림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성으로 인문학을 배우지만, 인문학을 넘어 인문행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다고 거창한 무언가를 행하여 대중을 구세할 웅대한 꿈을 품은 것은 아닙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베풀며 사랑하며 함께 손잡고 가는 삶. 남들보다 미련스럽고, 우직하다는 말을 듣더라도 그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스님과 함께 작은 부분이지만,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행동하고 노력하겠습니다.

 

 

글에서 제가 결례나 무례가 있었다면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해남 대흥사는 멀리 떨어져 있고, 그렇기에 쉽게 방문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스님께서도 바쁘시기에 암자에 자주 머무시는 경우도 없겠지요. 그래서 이번 만남이 더욱 뜻깊었습니다. 스님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스님과 다시 조용한 일지암에 앉아 독대하며 같이 차를 마시며 많이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까지 저도 세속에서 마음 수양하고 선행을 닦고 있겠습니다. 그래야 다음에 뵐 때 행복한 미담을 많이 들려드릴 수 있으니까요. 끝으로 인사드립니다. 보통 세속에서는 건강에 대한 덕담을 하는 것을 최고의 인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가에서는 자연스러움을 최고로 여기기에 구태여 건강에 대한 미덕을 드리기보단 다른 인사로 대신할까 합니다.

 

 

스님의 공부에 큰 깨달음이 가득하길, 더불어 행동을 강조하셨던 초심을 잃지 않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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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 (리커버 양장 에디션) - 라틴어 원전 완역판
토마스 아 켐피스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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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고 나니, 기독교 3대 고전으로 꼽힌다는 《천로역정》과 《그리스도를 본받아》도 읽고 싶었다. 《고백록》이 한 인간의 내면을 진솔하게 묘사한 텍스트라면,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기독교에 대한 계율을 논하고 있는 텍스트였다. 그렇기에 두 책의 내용과 분위기는 상이했다. 《고백록》이 감성적이며, 특정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는 텍스트라면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바람직한 종교적 계율을 표준화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보편적 공감을 불러일으킬 의도로 저술됐다.

 

책을 쓴 토마스 아 켐피스는 당시의 수도사들을 교육하기 위해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일반적으로 그의 저서로 분류되지만, 원저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을 불교 템플스테이를 하는 과정에서 읽었다. 빡빡한 템플스테이 일정을 마치고, 고요한 산사 안에서 작은 책상에 이 책을 올려두고 조금씩 읽어나갔는데, 기독교 입장에서는 이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인 사찰에서 기독교 고전을 읽으니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책을 읽으니,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새삼 깨닫기도 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종교인 그리스도교, 그리고 불교와 이슬람교는 각각 상이한 교리와 계율이 있지만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평화, 화합, 단결, 수양, 선(善), 사랑, 수양, 명상, 내면 중심 사상 등등을 꼽을 수 있는데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도 앞의 덕목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책에서는 당대의 젊은 수도사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이런 계율들은 평화와 자비, 사랑과 헌신을 본바탕으로 두고 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저자가 직접적으로 말하는 부분으로, 수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계율에 대해 전반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두 번째는 제자와 그리스도의 문답법으로 구성된 부분으로, 독자와 저자는 제자의 입장을 취하여 절대자에게 물음을 갈구하고 있으며, 이런 제자의 물음에 그리스도가 따뜻하게 대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어릴 때부터 기독교는 나에게 커다란 거부감으로 다가온 종교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하교 시간, 기독교로 추정되는 사람이 포교 활동을 하면서 나에게 안 믿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라는 말을 하며 위협하였다. 그때 나는 지옥이라는 단어가 주는 두려움 때문에 엄청 겁을 먹었다. 그 뒤로 자라면서 나에 머릿속에는 기독교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자리 잡았고, 기독교 특유의 베타적인 성격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 고전을 읽다 보니, 어린 시절 자리 잡았던 편견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으며 만났던 기독교의 가치관은 인류 사회에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따뜻한 덕목들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평안했다. 덕분에 기독교에 대한 거리감도 좁힐 수 있었고, 기독교를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 대한 역사와 고전에도 관심이 생겼다.

 

태초부터 인간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믿으며 사회를 발전시켰다. 인간은 특유의 협동심으로 인해 문명을 일궈내고 지구를 장악했지만, 그런 군집 활동에도 불구하고 원초적인 내면의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고 더더욱 깊어졌다. 그렇기에 고대에서 지금까지 사회가 발전하고 진보하더라도 인간의 외로운 내면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종교'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늘날 종교는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발전된 문명 아래에 '군중 속의 고독'을 겪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따스한 손길과 사랑을 건네서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만들어가는 것. 이러한 일에 종교가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저서는 기독교의 계율을 논한 저서이긴 하지만, 성경 이래로 가장 많이 읽힌 기독교 고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성경 이래로 가장 많이 읽힌 고전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종교 활동에 대한 본보기와 영감을 줬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만든 책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기독교 신자가 아닌 일반인이 읽더라도 편협한 시각보다는 너그럽고 사랑이 충만한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일독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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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록 - 라틴어 원전 완역판 세계기독교고전 8
성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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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디까지 진실할 수 있을까. 나의 삶은 스스로에게 얼마나 솔직하고 떳떳할까. 각박한 현대 사회, 너도 나도 속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에서 이런 물음은 어찌 보면 고리타분하고 현실감각이 없는 생각으로 치부될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머릿속 한구석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초중고 학창 시절에 우리는 학교 교육을 통해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과 사회생활의 규율을 교육받지만, 머리가 커가면 커갈수록 그런 원칙적인 방법보다는 변칙에 능숙하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서슴없이 기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한다. 그런 변칙과 기만을 자행하면서 우리는 '원래 삶이란 그런 것'이라며 자조하고 합리화를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정상적인 심성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내적인 갈등과 스트레스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몇 번 사회물을 먹다가 보면, 마음속에서 울부짖던 양심도 무뎌지기 시작하고, 그렇게 우리는 세월이 흐름과 동시에 풍파에 젖은 스스로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로 볼 때에는 바르게 자라고, 좋은 이미지를 가졌다고 호평하는 분들이 나름 있었지만, 그거야 피상적인 겉모습일 뿐이고, 나 자신이 나를 스스로 들여다봤을 때 나 역시 탐욕과 위선, 그리고 공명심과 허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표리부동한 자신 때문에, 10대와 20대 시절에는 방황을 했다. 마음 수양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세월의 풍파에 젖지 않으려고 그토록 노력했건만, 종국에 가서는 그런 노력을 스스로 배신하는 모습 앞에, 나는 내적으로 스스로를 자학으로 몰아붙였다. 실망, 원망, 비난, 그리고 좌절로 이어지는 내적인 갈등의 연속, 길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계속해서 맴도는 느낌이었다.

 

인간이란 얼마나 숭고한 존재인가. 역사서에 기록된 영웅들의 일대기와 선인들의 삶을 접하면, 같은 인간이지만 위업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수양하며 달궈낸 그들의 강인한 멘탈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한편으로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은 세속적인 가치에 휘둘려 오늘도 우리의 욕망을 스스로 자제하지 못해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으니. 나는 왜 역사 속에 위업을 남긴 인물들과 같이 될 수 없는 것일까. 그들의 멘탈은 태생적으로 강한 것인가? 그들과 나는 아예 다른 인간이란 말인가? 그들은 삶의 풍파 속에서 과연 흔들린 적이 없었을까. 매번 마음 수양에서 패배한 나로서는 위인들과 선현들의 진솔한 고백이, 가식 없는 생생한 고백이 너무나도 듣고 싶었다.

 

그때 《고백록》을 만났다. 어느 날 기독교를 믿는 친구에게 '종교가 과연 인간의 내적인 고민으로부터 구원을 내려줄 수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그는 말없이 《고백록》 책을 주면서 한 번 읽어보라고 하더라. 종교가 없는 내 입장에서는 종교적 색채가 물씬 느껴나는 이 고전을 읽기가 망설여졌지만, 그거야 읽고 나서 판단하면 될 문제고, 일단은 읽어보자고 생각하고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마치 초절정으로 더운 날씨에 시원한 이온음료를 삼키는 쾌감을 느꼈다. 그 정도로 이 책은 방황하던 내게 시원함과 통쾌함을 선사했으며, 책을 접한 이후 마음이 흔들릴 때 남몰래 읽던 고전이었다.

 

기독교의 성자로 추앙받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인생 전반을 《고백록》에 녹아냈다. 성자였던 그가 방황하고, 무절제하고 이단을 배우며, 색욕에 탐하던 어린 시절. 그런 타락의 시절을 진솔하고 호소력 있게 고백하며, 스스로를 통렬하게 반성한다. 그가 자행했던 타락의 기록들을 읽으며, 나는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 '마음을 다잡는 것에 있어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성자나 위인들 역시 나와 똑같은 인간들이구나.' 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반성하던 덕목들 위선, 자만, 오만, 정욕, 욕심, 탐욕... 이런 세속적인 덕목들은 나를 포함한 일반인들뿐만이 아니라, 성자라고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도 찾아볼 수 있다. 하긴 비슷한 예로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도 수행을 하면서 색욕과 탐욕을 시험당했다고 한다. 나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인간이었다.

 

《고백록》의 후반부는 그런 타락스러운 덕목들로 가득 찬 자신을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를 통해 극복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는 과정으로 구성됐다. 사람마다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의 은총에 기대어 열렬한 신앙 활동을 통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했다. 특정 종교를 믿는 입장은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의 방법이 최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해답을 찾아 마음의 평안을 찾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성공한다. 신자가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토록 자신의 내면을 디테일하고 진솔하게 고백할 수 있었다는 점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결점은 가리고,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려고 노력하는 동물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대중 출판을 목적으로 한 저서에서 스스로의 결점을 디테일하게 발가벗기듯 고백하고 있으니 이토록 용기 있고 진솔한 저서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싶다.

 

서두에서 말했듯 요즘 세상은 타인을 넘어 나 자신을 기만하는 시대다. 스스로의 마음을 기만하는 것이 보편화된 시대에서, 이런 내면의 진솔한 고백은 깊은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최근 나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고전들을 접하고 있는데, 그런 일환에서 라틴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번역본 《고백록》을 다시 읽었다. 20대의 정신적인 방황 앞에서 한 줄기 구원의 빛을 내려주던 《고백록》을 이렇게 다시 읽으니, 그때 전율했던 감정이 생생히 떠올랐다. 세월이 지나도 인간의 진솔한 마음은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고백록》은 특정 종교적인 교리를 담은 책이 아닌 보편적 고전의 반열에 올려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내적 갈등을 경험하거나 정신적인 방황을 앓고 있는 지성들에게 이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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