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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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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의 인간들에게 죽음은 운명에 따르는 순명,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게 목숨을 잃는 것이 다른 어떤 이에게는 복수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생물학적인 죽음은 정말 잔인한 복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다. 바로 시신을 훼손하고 장례절차를 밟을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 해서 헥토르는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간청한다.


"내 그대의 목숨과 무릎과 어버이의 이름으로 애원하건대,/ 나를 아카이오이족의 함선들 옆에서 개들이 뜯어먹게/내버려주지 말고"

화장하게 하는 등 장례 절차를 밟게 해달라고..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청을 받아주지 않는다. 애초에 받아줄 마음이 없었다. 아니 헥토르가 그렇게 간청했으므로 그것을 받아주지 않는 것이 처절한 복수가 된다. "함선들 옆에는 파트로클로스가 아직 문상도 받지 못하고/ 묻히지도 못한 채 누워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고귀한 헥토르에게 치욕적인 일을 생각해냈다.(395행)"

그는 두 발의 뒤쪽 힘줄을 뒤꿈치에서 복사뼈까지 뚫고
그 사이로 소가죽 끈을 꿰어서 헥토르를 전차에 매달아
머리가 뒤에서 끌려오도록 해놓았다. 그런 다음 그는
이름난 무구들을 전차 위에 올려놓고 자신도 올라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보니 말들도 마다않고 나는 듯이 달렸다.
헥토르가 끌려가자 그 주위에서는 먼지가 일고, 그의 검푸른
머리털은 양쪽으로 흘러내려 전에는 그토롭 곱던 그의 머리가
온통 먼지투성이가 되었으니, 제우스가 이제 그를 적군에게
내주어 그 자신의 고향 땅에서 그를 모욕하게 했기 때문이다."(22권, 396~404행)


그리고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죽이고 모욕한 헥토르의 시신을 방치해둔 채 전우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른다. 심지어 전차에 헥토르를 매단 채 축성한 친구의 무덤 주변을 몇 바퀴를 도는 퍼포먼스까지,, 분풀이를 한다. 그리고 이 광경을 헥토르의 가족들은 지켜보고 있다. 좀 심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지만.. 불사의 신인 어머니(테티스)야 그럴 일이 없겠지만 친아비와 친아들의 죽음보다도 더 안타깝게 생각하는 친구의 죽음을!! 장례경기까지 치르게 하면서 성대하게 치르면서 애도한다.


2012년.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는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도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그런 훌륭한 상을 받았을까, 궁금해서 너무 늦지 않게 극장을 찾았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트럭에 남자 주인공 이강도가 끌려가면서 자살을 하는 장면, 엔딩장면을 보면서 <일리아스>의 중요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었다. <피에타>를 보았느냐? 아직 보지 못했다는 사람에게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강한 스포일러일 것이고 마지막 장면이 지닌 의미가 아주 크기에 한 차례 보시라고.. 그리고 보았다는 사람에게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가 있나 묻지만 정말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공감하는 얘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일리아스>를 며칠에 걸쳐 다시 읽었보았다. 부분부분 전투신들이 지리하게 느껴져서 띄어넘었던 부분들까지 해서 거의 새롭게 읽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제대로 몰입하지 않으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그 싸움이 그 싸움 같기 때문이다. 또한 늘 그렇듯이 숱한 영웅들의 이름이며 행적들까지, 속도가 나지 않지만 그래도 촘촘하게 읽어나갔다.

피에타! 역시 베니스, 이탈리아의 도시 이름을 단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것이 결론이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빈 자리'라는 틈새를 집요하게 뚫고 들어와 결국은 자기 아들을 죽인 상대에게 복수하는 엄마 미선(조민수)에게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아킬레우스를 만난다. 그녀도 일리아스에서처럼 죽은 아들의 장례마저 미루고 복수를 준비하고 서서히 그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아킬레우스가 아테네의 도움으로 아폴론에게 버림받은 헥토르를 죽이고 있다. 기원전 5세기, 포도주 희석용 동이 세부(위).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고 끌고 가고 있다. 기원전 500년경, 물항아리 세부(아래). <일리아스>(천병희 역, 숲 펴냄) 앞 화보 촬영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이라는 말을 하는데, 강도(이정진)를 응징하고자 하는 미선에게는 이중적으로 적용된다. 자식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네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리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자식의 원한을 풀고야 말기에 하는 소리다. 그동안 아들의 시신은 자살을 했던 작업장의 대형냉장고에 보관된 상태이다. 오랜 휴식을 끝내고, 자신의 절친의 죽인 헥토르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전열을 다듬는 아킬레우스에게는 아침 한 끼를 먹는 시간도 아깝다. 그러나 미선은 주도면밀하고 냉정하게 복수극을 이끌어간다. 그녀라고 해서 아들을 죽인 원수 앞에서 넘기는 밥이 잘 넘어갔을리 없다. 그러나 그 침착함이 더 소름이 끼친다.


<일리아스>는 영화로 치면 스펙타클한 전쟁영화이다. 이를 소재로한 <트로이>도 있지만.. 그리고 토로이 전쟁은 그야말로 복수극이다. 헬레네를 납치하다시피 끌고간 파리스를 응징하고자 하는 헬레네의 본 남편 메넬라오스의 대척점에서부터..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갈등도 그리고 그로인한 숱한 영웅들과 전사들의 희생이라는 것도.. 더구나 호메로스의 다른 대서사시 <오뒷세우스> 모험과 여행을 바탕에 깐 로드무비의 원형이라면 <일리아스>는 스펙타클한 전쟁영화의 원형일 것이다. 특히 살육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묘사되는데, <피에타>에서도 기존의 김기덕영화처럼 직접적인 장면들은 많이 가렸으나 여러 종류의 죽음과 상채기가 도처에 깔려 있으며 상해의 장면들이 참 다채롭고 백화점 수준이다. 그러나 무슨 까닭이 있겠으나 희생자들이 왜 그런 지경에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다만 사채를 썼고 제 때에 갚지 못해서만 있을 뿐 그 내력은 중요하지 않다. <피에타> 영화소개를 보니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영화의 제목이자 주제를 관통하는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비탄에 잠겨 있는 모습을 묘사한 미술 양식을 통칭한다. 미켈란젤로, 들라크루아, 고흐 등 세기의 예술 작품에 이어, 새로운 <피에타>를 탄생시킨 김기덕 감독은 ‘피에타’가 지닌 고유의 통렬한 슬픔을 극적인 영상으로 재해석해냈다."
그러나 나는 르네상스라는 용어에 이미 그 답이 내포되어 있지만, 어쩌면 제목 때문에 혼선이 좀 있기는 하나 피에타는 '일리아스'를 소스를 얻었다고 할 만큼 닮은 부분이 적지 않다. 그리스 옆동네 베시스에서 상을 받을 만하지 않은가! 어디서 본듯한 고전(교양)의 세계와 맥락이 닿아 있으니 말이다.


"<피에타>는 강도와 엄마라는 여자 사이의 묘연한 관계를 통해 ‘피에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심장을 파고드는 강렬한 슬픔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겨낸 영화 <피에타>는 21세기 형 ‘피에타’ 신드롬 열풍의 시작을 알릴 것이다. 한편, 김기덕 감독은 “현대의 모든 큰 전쟁부터 작은 일상의 범죄까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공범이며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그 누구도 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므로 신에게 자비를 바라는 뜻에서 <피에타>라고 제목을 정했다.”

감독은 제목이 담긴 의미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용서는 없다. 그리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일이아스>나 <피에타>나 결국 무자비에 대한 응징이 물고 물리는 이야기다. 복수를 위해 무자비로 끝까지 밀어부칠 때 양날의 검은 결국 본인도 결국 무자비의 희생양이 되게 한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알고 있다.


"죽어라! 내 죽음의 운명은 제우스와 다른 불사신들께서/ 이루시기를 원하는 때에 언제든 받아들이겠다."(22권, 365~366행)
헥토르를 죽이고 나서 아킬레우스가 하는 말이다. 영화 <피에타>는 고전 <일리아스>와 많음 점에서 닮아 있다.  서양의 고전이면서 인류문명의 고전이기도 한 호메로스의 작품들을 제대로 읽으면 보이는 것이 있다. 어쩌면 서양인들의 양식의 바탕에 그러한 고전이 있기에, <피에타>라는 영화는 작품 이전의 원전 덕분에 쉽게 '울림'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겠는가! 모범답안처럼 수상작으로 결정하게 되기까지. 아마도 나와 비슷한 내용의 글을 쓴 기자들이나 논객들이 없지 않으리라. 다만 웹상에서 '피에타' + '일리아스'로 검색했을 때 검색된 글이 없었음을 밝혀둔다.

 

영화 <피에타>의 스틸 컷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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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 2012-11-13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랬군요. 사실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이야말로 가장 센 스포일러죠. 알았건 몰랐건 설득력 만빵인 글입니다.

timeroad 2012-12-09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히 영화만드는 감독이 일리아스를 안 읽었을리 없지만, 인터뷰를 함 해보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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