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번째 증언 - 2009년 3월 7일, 그 후 10년
윤지오 지음 / 가연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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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구매해놓고 한동안 펼치지 못했다. 저자의 인터뷰들과 관련 뉴스를 따라가기에 바빠서였을까? 뭔가 응원하고 싶은 마음을 짧게라도 밝혀야 할 것 같았는데, 그래도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읽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저자가 맞서 싸워야 했던 전쟁은 ‘오래된’ 것이었고, ‘고독한’ 전쟁이었다. 그런 전쟁의 기록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 장자연 씨의 '동류배우' 윤지오 씨가 펴낸 에세이집 『13번째 증언-2009년 3월 7일, 그 후 10년』 얘기다. 실명과 얼굴을 드러낸 첫 인터뷰도 놀라웠지만, 한 유명배우와 민형사상의 손해배상소송을 겪으면서도 이 사건을 놓지 않았던 이상호 기자와 저자의 만남은 한마디로 감동이었다. 이상호 기자와의 인터뷰가 거듭 진행될수록 많이 밝아진 저자의 표정을 살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다룬 독자 리뷰를 찾아보았는데,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짧게 쓴 응원메시지는 많다. 이 사건이 가진 복잡성과 뭐라고 표현하기 쉽지 않은 미묘한 감정 때문이리라.

 

=『13번째 증언』의 저자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미안함이고 자책감이고 회한이라고, 그렇지만 그 감정을 정확히 뭐라고 끄집어낼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감정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수사학』을 읽으면서 '연민'일까, '분개'일까, '두려움'일까, '분노'일까? 살펴보았지만 딱 떨어지는 한마디는 찾을 수 없었다. 어쨌든  이 책의 출간으로 상기하게 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에는 '분노'가 따르고 있는 듯하다.

미란 기자가 고발뉴스(홈페이지)에 올린 이 책에 대한 글이 눈에 띈다. 어렵게 찾은 리뷰다.  

"그러나 여전히 장자연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윤지오 씨는 또 다른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 가해자들은 여전히 처벌받지 않은 채 잘 살아가고 있다." -<장자연 사건의 ‘유일한 증언자’ 윤지오 ‘13번째 증언’>
[출처:]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217

 

=서양 고전을 주로 읽는 사람으로서, 그렇고 그런 비유를 함으로써 글을 맺어야 할 것 같다. 희랍어 아레테(arete)은 '미덕'으로, 번역가에 따라서는 '탁월함'이나 '훌륭함'으로 옮기기도 한다. 최근 발행된 플라톤 대화편 주석서 『고르기아스/메넥세노스/이온』(서광사, 2018.12.30.)에서 박종현 교수는, 「메넥세노스」편에서 아레테(arete)를 '용기'로 옮긴 까닭을 언급한다. 『펠로폰테소스 전쟁사』 Ⅱ권에 수록된 유명한 연설, '전몰자들을 위한 페리클레스의 추도연설’과 대비되는 소크라테스의 추도연설이 담긴 대화편이 「메넥세노스」다. 그런데 박종현은 전몰자들을 찬양하면서 언급되는 아레테(arete)를 '용기'로 옮기고 있는 것, 전쟁과 관련된 일반적인 언급이기에 'agathos'도 덩달아 '용감한' 또는 '용기 있는'으로 옮기게 된다는 주석도 있다.(「메넥세노스」 239d의 주24.) 이처럼『13번째 증언』의 저자가 책의 출간과 인터뷰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아레테(arete)를 굳이 번역해야 한다면, '용기'가 아닐는지. 그가 10년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그리고 편안하게 동료배우를 배웅할 수 있기를! 『13번째 증언』은 저자가 치르고 있는 10년 전쟁의 기록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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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푸른시원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양운덕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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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중인 연극 <오이디푸스>의 대본 일부와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해당 텍스트 비교를 포함하고 있는 글입니다.

변이나 해수욕장, 혹은 유치원 야외 놀이터 등 모래가 있는 곳이면 할 수 있는 놀이가 있다. 그러나 ‘모래성 쌓기’와 같이 이 놀이에 알맞은 이름을 간명하게 붙일 수가 없다. 해서 ‘거 있잖아’라는 말로 시작하거나 ‘말하자면 일종의 보드게임인데’로 설명하는 놀이.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은 작은 모래성 한가운데에 막대기를 꽂고 참가자들이 모래를 한 움큼씩 원하는 만큼 덜어내다가, 막대를 쓰러뜨리는 이가 꼴찌를 하는 놀이 말이다. 물가에서 하는 놀이라는 교육 관련 게시물에 이 놀이를 ‘막대 쓰러뜨리기’라고 이름을 붙여 놓았는데, 적절하다고 하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있다.

일단 이 놀이 설명은 다음과 같다. ‘여러 명이 모래밭에 앉아 젓가락 길이의 막대기를 세우고 번갈아 가며 모래를 자기편으로 모은다. 막대를 쓰러뜨리면 탈락한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규칙은 여기까지였다. 지는 사람은 한 사람이고, 나머지는 어쨌든 이긴 자들이 된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 가운데 모래를 더 많이 모은 사람이 이긴다.’가 더 있다. 이 한 문장을 적용하면 이 놀이에서 꼴찌만이 아니라 1등에서 꼴찌까지 서열화가 가능한 것이다. 딱히 참가자 중 누구 한 사람의 전적인 책임이 아닌데, 그러한 과실의 책임을 서열화할 수 있다는 것이 좀 씁쓸하다.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원인은 개인에게도 있고, 그것을 도운 사람에게도 있고, 알면서도 모른 체 방관한 사람, 사회가 나아가 나라가 제 때에 조치하지 못한 기관의 책임까지 따지고 보면 가해의 주체는 복합적이기 마련이다. 저마다가 “나 때문이야”라고 과실을 인정하면서 발생한 문제에 접근한다면 그 해결은 원만하고 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너 때문이야’로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쪽으로 흐르고, 그러다가 유사한 사건일 재발되는 것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대부분의 이솝우화(전체 258편)마다 따라 붙는 ‘교훈’처럼 한마디 하자묜, 이 놀이 이름을 ‘내 탓이야 놀이’쯤으로 붙렀으면 한다.

얼마 전에 연극 <오이디푸스>를 보았다. 관람 전 예습으로 번역가 천병희의 최근 번역 <오이디푸스 왕>을 읽었다. 2500년 전 비극경연에서 상연될 때도 이 작품은 작품이 다루는 사건들(스토리)과 관련된 배경을 시시콜콜히 설명하지 않았다. 가령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가 낸 어떤 수수께끼를 풀어 테바이(카드모스 성)를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구했는지를 작품은 얘기해주지 않는다. 특히, 그 수수께끼가 무엇이었는지를. 그 괴물이 스핑크스였다는 것도 오이디푸스의 처남 크레온의 대사에서 딱 한 번 언급될 뿐이다('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가'[129행]). 대신 스핑크스는 '가혹한 여가수'(35-36행), '저 날개 달린 소녀'(508행)와 같이 암시될 뿐이다.

이 비극의 원전번역(‘텍스트’라 하자)을 기억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연극의 실제 대본(희곡보다는 ‘대본’이라고 하자)과 많이 다름을 곧바로 느겼다. 출판 과정의 중 교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교정(校訂)과 교정(校正)이다. 전자는 오탈자를 바로잡는 과정이고, 후자는 그 과정을 거친 1차 교정지와 교정을 반영한 2차 교정지를 비교(比較)하면서 지적한 내용이 제대로 반영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처럼 교정(校正)하듯 ‘텍스트’와 ‘대본’의 해당 부분을 비교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둘은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각색 정도에 따라 그 차이는 비례할 것이지만. 비극의 최초공연과 지금의 연극 상연까지 2500년가량의 시간차가 있을뿐더러, 번역을 통해 원작을 재현한다는 점에서(누가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발생하는 차이도 크기 때문에) 이중삼중의 굴절과정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개봉영화로 치면 기자 시사회에 해당하는 '연극 <오이디푸스>의 연습실 공개' 영상(3~6장)이 유투브에 올라 있었다. 한 부분을 골라 공연 대사를 입력한 것(대본)과 옮긴이가 최근에 '언어란 끊임없이 바뀌기도 하거니와 예전 작업의 오류를 바로잡을 때가 되어 새롭게 번역을 손을 본"(옮긴이 서문) 원전번역 텍스트(『<오이디푸스 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일대일 비교를 해보았다. (이러한 비교에 따른 고려사항 등을 실제 사례에 맞게 정리했지만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상식 차원에서 짐작하는 선에 맡기고 실제 사례를 소개하는 데 집중하기로 하자) 다만 한 가지, 그리스 비극은 비극경연에서 공연된 상태라야 비로소 ‘썼다’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공연용 대본이었고, 지금 공연 중인 연극의 대본도 마찬가지이다. 연극뿐만 아니라 드라마의 기원이 바로 그리스 비극이라는 점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또한 그리스 비극도 상연을 전제로 한 것으로서 알맞은 ‘길이’(특히 공연시간)라는 제한을 받았다는 사실도 덧붙여야겠다.

연극 <오이디푸스> 대본(대사 중심으로 그대로 타이핑한 것으로, 비극 <오이디푸스 왕> 텍스트를 기준으로 707-734행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오카스테-IO/ 오이디푸스-OI/ 코러스장-CO)

 

IO(배해선 분): 그런 일이라면 마음 상하지 마세요. 지금부터 제 말을 들어주세요. 테이레시아스가 언젠가 라이오스 왕과 제게 신탁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OE(황정민 분): 신탁.
IO: 신탁으로 포장한 저주였어요. 끔찍한 저주, 그 저주는 라이오스 왕이 자신의 아들 손에 살해당할 운명이라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라이오스 왕께서는 엉뚱한 곳에서 도둑들에게 목숨을 잃으셨어요. 스핑크스한테 당했을 수도 있지요.
OI: 또 스핑크스.
IO: 스핑크스가 자주 노리던 곳은 라이오스 왕이 죽은 삼거리였으니까요.
OI: 삼거리.
CO: 삼거리, 세 갈래 길이 하나로 만나는 곳, 하나의 길이 세 개로 나뉘는 곳, 삼거리.
IO: 왜 그러시죠?
OI: 나는 마차가 다닐 수 있는 삼거리에서 라이오스 왕이 살해되었다는 말을 지금 당신에게 들은 것 같소. 대체 어디였소. 왕이 죽은 그곳은.
IO: 델포이와 포키스와 다울리아로 나뉘는 삼거리.(까악~)
CO: 세 갈래 길이 하나로 만나는 곳.
IO: 나뭇잎 줄기처럼,
CO: 하나의 길이 세 개로 나뉘는 곳.

 

다음은 원작, 비극 <오이디푸스 왕>(천병희 옮김)의 원전번역(해당 부분)이다. 파란색으로 지정한 부분은 대강 위 대본과 텍스트가 일치하는(음절 단위) 부분이다. 

 

(이오카스테-IO/ 오이디푸스-OI

IO: 그런 일이라면 조금도 염려 마세요. 그대는               [707]
말을 듣고 명심해두세요.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미래사를 예언할 수 없어요.
이에 대해 내가 간단한 증거를 보여드리지요.                  [710]
전에 라이오스에게 신탁이 내린 적이 있었어요.
아폴론 자신이 아니라 그분의 사제로부터 말예요.
신탁이란 운명이 그를 따라잡아 그이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손에 그이가 죽게 되리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소문대로라면 라이오스는 마차가 다닐 수 있는      [715]
세 길이 만나는 곳에서 어느 날 다른 나라 도적 손에
살해당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아들은 태어난 지
사흘도 안 돼 라이오스가 두 발을 함께 묶은 뒤
하인을 시켜 인적 없는 산에다 내다 버렸어요.
그리하여 아폴론께서는 아이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720]
라이오스는 아들의 손에 죽는다는, 그이가 두려워한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셨답니다. 
그렇게 되도록 신탁이 미리 정해놓았던 거예요.
그러니 신탁이라면 염려하지 마세요. 신께서 필요해서
구하시는 것이라면 몸소 쉬이 밝히실 거예요.                    [725]
OI: 여보, 이제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고 나니,
내 마음 갈피를 잡지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리는구려.
IO: 무엇이 그리 불안하고 두렵단 말예요?
OI: 나는 마차가 다니는 세 길이 만나는 곳에서
라이오스살해되었다는 말을 당신에게 들은 것구려.   [730]
IO: 그런 말이 떠돌았고, 지금도 떠돌고 있어요.
OI: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이 대체 어디요?
IO: 그 나라는 포키스라고 불리며, 델포이에서 오는 길과
다울리아에서 오는 길이 서로 만나는 곳이지요.                 [734]

 

대본(연극이 원전을 많이 벗어났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쓰는 글은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이오카스테의 대사를 주고받는(대화) 효과를 내기 위해 잘라내고, 코러스까지 개입해서 구두점을 찍듯이 그러해야 하는 부분을 강조하기도 한다. 삼거리가 '나뭇잎 줄기처럼' 세 갈래로 나뉜다는 비유까지 덧붙였다. 삼거리는 스핑크스가 출몰하는 우범지대였다는 설명도 새로운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공연 시간은 100분이다. 2500년 전 비극경연에서 <오이디푸스 왕>의 상연시간은 이보다 길었을까, 짧았을까? 천병희의 번역기준으로 비극 텍스트는 1530행으로 연극보다는 길었을 것(코러스는 합창 곧 노래로 가사를 전달하니까)이다. 현대의 대본은 제한시간에 맞춰 특히 원작의 앞뒤를 가리지 않고 어떤 대사는 배제(선택)하고, 위치를 옮기고,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 설명용 대사를 추가할 수밖에 없다. 선택과 집중이다.
이번 연극(대본)에서 두드러지는 ‘집중’은 오이디푸스의 ‘트라우마’를 작동하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대사를 재구성하고 배사의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관객들을 (오이디푸스의 트라우마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시간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사건 현장인 ‘삼거리’(2),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범죄(근친상간)으로 자신을 초대한 수수께끼를 낸 ‘스핑크스’(3), 그리고 ‘부은 발의 오이디푸스’(0)라는 그의 이름 자체에 깃든 비극의 시작이 그것이다. 연극에서 오이디푸스는 누군가 이 말들을 문득 언급해도 움찔하고 무너진다.

 

결론은 대본은 대본이고 비극은 비극이라는 것이다. 연극 또한 그리스 비극이 그러하듯 행동의 모방이고, 대사는 행동의 모방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주재료이다. 어쨌든 대사 위주로 비교한 것이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앞서 글머리에서 ‘막대 쓰러뜨리기’ 놀이를 언급했다. “네 탓이야!”라는 말을 듣는 게임에서 꼴찌를 면하려면 아무리 원전 비극을 재구성하더라고 건드리면 안 되는 ‘핵심 포인트’가 있기 마련이다. 인용한 부분에서는, 라이오스 왕 일행을 살해한 살인범이 ‘한 사람’인가 ‘여럿’인가 하는 점이다. 두 번째 이오카스테의 대사에서 "도둑들에게"는 반드시 '도둑에게'로 대체될 수 없다. 그 살인자가 '혼자'이냐 '여럿'이냐는 오이디푸스가 범인이 될 수도 있고('도둑'이라면), 혐의를 벗어날 수도 있는('도둑들'이라면) 이 비극의 ‘발견’(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오이디푸스 자신이 그 범인임을) 과정에서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연극(대본)이 무너뜨릴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그러나 ‘선택과 집중’에 따라 대본은 삼거리 를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도그 위치에 대해서는 대강 언급하는데, 텍스트에 집중하면 상황은 다르다. 텍스트에서 오이디푸스는 "마차가 다니는 세 길이 만나는 곳"이 어디냐 묻고, 이오카스테는 (삼거리가 있는 곳은) "그 나라는 포키스라고 불리며, 델포이에서 오는 길과 다울리아에서 오는 길이 서로 만나는 곳"이라고 한다. 물론 전해들은 이야기므로 그 지점을 특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연극) 대본에서 이오카스테는 "델포이와 포키스와 다울리아로 나뉘는 삼거리."라고 한다.
이제, 그 지점이 어디이며, 어떤 의미인지 문학기행을 떠나보자. 구글지도를 따라 가는 인터넷 기행이다.(사진은 펠포폰네소스전생사 부록, 일대의 고지도> 그런데 해당 삼거리를 끝내 특정할 수 없었다. 델포이(델피) 다울리아(=다우리스?), 포키스(현대 그리스어로 Foks), 등 지명들이 혼재되어 장소 검색이 힘든 경우가 있다. 왜 이런 ‘답사’를 하나, 그만하자 하면서도 끝까지 가보았다. 결국 그 시대를 전후하여 저술된 그리스 저작들과 위키백과(다음)의 도움을 받았다.

델포이는 그리스의 포키스(Phocis) 협곡에 있는 파르나소스 산(해발 2457m)의 남서쪽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만약 델포이를 등지고 정남향으로 걷는다면 코린토스만 바다와 만난다. 건너편이 코린토스이기는 하나 코린토스 지협에서부터 코린토스는 시작된다. 오이디푸스가 양부 슬하에서 자란 나라다. 델포이에서 코린토스만을 끼고 동쪽 아테니아 방면으로 가면 오른편이 코린토스지협이다. 배로 아테나이와 살라미스 섬이 있는 만(灣)에서 코린토스만으로 가려면 펠로폰노소스반도를 돌아가야 했는데, 당시에는 배를 지상으로 올려 육상에서 코린토스 지협을 통과하기도 했다.) 델포이는 포키스(나라)에 속하는 곳이다. 그 '삼거리'도 포키스라는 나라의 어느 지점으로 델포이에서 멀지 않다. 그런데 (텍스트와 대본에서) 포키스라고 할 때는 ‘포키스라는 도시’를 지칭하는 것이 되는데 델포이를 기준으로 할 때 포키스(수도/시)는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파르낫소스 산기슭에 위치한 델포이에서 해변(코린토스만, 남쪽으로)으로 내려와 우측으로 난 길로 접어들어야 포키스(시)로 갈 수 있다.

문제는 다울리아의 위치다. 다울리아는 아테나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정도로 위치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 델포이에서 해안(코린토스만)으로 내려오다 좌측 길(동쪽)로 접어들어야 갈 수 있는 어디쯤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다울리아 쯤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테바이(카드모스 성이 있는)고, 직진하면 아테나이이며, 아테나이 방면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코린토스지협에 이르면 코린토스다. 다시 정리하면 그 ‘삼거리’는 파르낫소스 산의 남서쪽 산자락에 위치한 델포이보다는  낮은 곳이며, 해안으로(코린토스만의) 가다가 세 갈래로 나뉘는 길인데, 우회전하면 포키스(시)이고 좌회전하면 다울리아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신탁을 들은 이후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로는 가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다. 코린토스의 왕(폴뤼보스) 곧 아버지(실제는 양부)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거리'에서 라이오스 왕(사실은 친부)을 죽이고 그가 도착한 곳이 테바이(카드모스 성)다. 그러므로, 그 삼거리에서 오이디푸스는 델포이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남은 길은 포키스시 쪽이 아니면 다울리아 방면이다. 그런데, 그 삼거리도 다울리아도 포기스(나라)에 속한다. 라이오스 왕은 테바이를 떠나 델포이(신탁)를 찾아가던 길에서 죽음을 당한다. 사건 현장은 '삼거리'이지만 마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길은 두 대의 마차가 교행(交行)할 수 없는, 마차의 폭 정도의 길이다. 때문에 시비가 붙었고 살인까지 저지른 것, 라이오스 왕은 그 '삼거리'에 진입하기 직전이고,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던 오이디푸는 그 '삼거리'를 막 벗어나 다울리아 방면으로 진입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지점은 이 삼거리 부근만이 아니다. 살해를 하고 다울리아 방면으로 가다가(혹은 지나서) 코린토스(시)로 가지 않기 위해 택한 좌측 방면에 테바이(카드모스)가 있었던 것. 두려운 신탁을 피하기 위해 코린토스만 아니면 어디든 찾은 곳이 테바이(사실은 자신의 진짜 고향)였다.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는 제2의 가해와 그녀와 낳은 그 자식들(2남2녀)의 아버지가 되는 제3의 가해가 이어지는 곳이니까. 오이디푸스가 친부를 살해한 그 삼거리는 비극의 시작일 뿐이었으며, 그러므로 또 다른 '운명의 삼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울리아'가 정확히 어디쯤일까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2권 29장 참조)를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인문지리’를 따르는 기행이다. 전설적인 아테나이 왕 판디온의 딸 프로크네가 테레우스와 결혼하는데, 테레우스는 '지금은 포키스라고 하지만 그때는 트라케인들이 살곤 하던 다울리아'의 왕이었다. 결혼한 테레우스는 처제인 필로멜레가 탐나 범하게 되고 그 범행이 탄로날까봐 그녀의 혀를 잘라버린다. 프로크네는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이튀스를 죽여 그 고기(요리)를 테레우스에게 먹인다. 이 사실을 안 테레우스가 두 자매를 쫓아가 죽이려 하자 제우스가 그는 '후투티'로, 프로크네는 '밤꾀꼬리'로, 필로멜레는 '제비'로 변신시켰다고 한다(아폴로도로스의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신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도 나온다). 여인들이 이튀스에게 범행을 저지른 곳이 이곳 다울리아이고, 그래서 많은 시인들이 밤꾀꼬리를 언급할 때 '다울리아의 새'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판디온 왕이 딸을 테레우스에게 시집을 보낸 것은 다울리이가 아테나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사시 상호원조를 고려한 전략적인 선택인 것. '역사' 등 관련 저작에 따르면 '삼거리'는 포키스 영역 안에 있으면서, 동쪽으로 가급적 아테나이에 가까운 곳에 있다.

 

사는 동안 선택은 불가피하고, 세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듯이 그렇게 살아간다. 어쨌든 연극에서처럼 그런 인생의 ‘삼거리’만을 강조하는 데서 비극(텍스트) 읽기는 멈출 수가 없다. 삼거리의 세 길 중 하나를 선택하여 끝까지 가면 만나는 지명(나라)이 어느 곳인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이 테바이라거나 코린토스라면 사정은 다르다. "세 길이 만나는 곳"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그 선택지 가운데 하나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사건 발생 시점(삼거리 부근)과 오이디푸스가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고 산자락을 내려왔을 때와는 시간차가 있다.

 

"오이디푸스: (신탁을 듣고) 난 뒤 나는 코린토스로 돌아가지 않고
별들을 보고 멀리서 그곳의 위치를 재면서
내 사악한 신탁이 정해준 치욕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않게 될 곳으로 줄곧 떠돌아다녔다오.
그렇게 방황하던 차에 나는 왕이 살해당했다고
당신이 말하는 그곳에 이르렀소." (<오이디푸스 왕> 794-799행)

 

‘부은 발의 오이디푸스’가 델포이(신탁)에서 내려와 향한 곳은 서북쪽 포키스(시) 방면일 수 있다. 그러다가 문득 델포이 부근을 다시 지나게 되었고, 문제의 그 삼거리(사건 현장)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거기서 그는 다울리아로 가는 길을 선택했고, 곧이어 친부를 살해했으며 그 길을 곧장 가다가 또 하나의 삼거리를 만난 것. 그리고 그가 선택한 '(돌아)가지 않은 길'(코린토스 행)은 신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선택한 길이 '신탁을 따르는 길'(테바이행)이 돠었는데,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스 비극을 원전으로 하되 연극은 연극일 뿐이다. 그러나 비극(텍스트)은 비극대로의 고유한 독서의 대상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이 책에서 만나는 천병희의 「오이디푸스 왕」은 최소한 네 번째 오류를 바로잡고 현재의 어감(말 느낌)에 맞게 다듬은 번역이다(개정판이거나 새로운 책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창작자가 아닌 번역가가 져야 할 고역이다. 우리말로 오롯이 그 시대에 맞게 텍스트를 옮기는 것이 이러하거늘 연극 대본과 원전 텍스트를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연극을 잘 이해하기 위해 원전 번역을 읽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텍스트는 텍스트대로 고유한 영역에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세 갈래 길이 하나로 만나는 곳. 하나의 길이 세 개로 나뉘는 곳, 삼거리"란 연극의 대사가 맴돈다. 사는 동안 끊임 없이 선택하는 인생을 길(road/way)로 시사점이 있다. 그러나 텍스트로 만나는 삼거리에는

도 다른 본래의 길(road/way)의 의미가 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서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하지만 때론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도 또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연극 <오이디푸스>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비교하면 발견한다.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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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푸른시원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양운덕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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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이 연극 무대에 오른 모양이다. 반갑다. 두근거린다. 공연이름은 <오이디푸스>다. 서울공연(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2019.01.29~02.24)은 시작되었고, 3월에는 지방공연[전북(8~9일), 광주(15~17), 경기(22~23), 전남(29~31)]이 이어진다. 연예계 소식을 다루는 한 TV 프로그램은 이번 <오이디푸스> 공연에 출연하는 세 배우(황정민: 오이디푸스 역/ 배해선: 이오카스테 역/ 남명렬: 코린토스 사자역)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 연극의 원작인 <오이디푸스 왕>이 수록된 책을 한 권 구입해서 읽었다. 천병희의 <오이디푸스 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반양장)다. 원전 번역인 점도 있지만, 가장 최근의 책에는 기존의 번역을 끊임없이 다듬은 노고가 담겨 있으리라는 점도 감안했다.

 

 왜 이 인터뷰에 이 세 사람이 등장했을까? 이들이 맡은 배역의 중요도에 따른 것일까? 어떤 다른 이유(흥행) 때문에 이 세 사람이 그 배역을 맡은 것은 아닐까? 사소한 질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그 배우가 누구냐가 아니라 <오이디푸스 왕>에서 중요도에 따라 세 배역을 고르라고 한다면, 세 사람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런 이야기다.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얼마나 힘들었을까) 연기파 배우들이 천만 영화의 주역으로 드라마, 케이팝과 더불어 한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나름대로' 상당수 조연급 주연들은 그런 영화들에 다수 출연하여 어지간한 주연급 배우 부럽지 않은 조연으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잔뼈가 굵은' 세월은 배고픔도 견뎌야 하는 그런 시간이다. 모든 순수예술이 그러하듯 그가 금수저든 흙수저든 경제적인 뒷받침이 없이는 활동을 지속하기란 쉽지 않다. 해서 연극판의 수준급 연기자들은 스크린이나 드라마 등에서 '새롭게' 발견되었고, 그들이 맡은 역할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아도 소비자들은 열광하고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연극판을 떠나 (시장의 언어로) '출세한' 연기자들은 행복할까? 대체로 (각종 인터뷰들을 살피면) 연극무대가 본인의 본 무대이고 스크린과 TV는 연극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기는 듯하다. 물론 스크린에서 성공하기 위해 연극 마당에서 고생하면서 기예(機藝)를 갈고 다듬을 수 있다. 어쨌든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과 생계를 위한 노동이 일치하지 않은 삶이 거의 대부분인 때에 새삼 배우들만의 문제인 양 강조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연극은 시간예술(공연예술)이면서(리플레이는 없다) 일정한 공간(무대와 객석)을 필요로 한다.  연극에서의 시간은 불가역적不可逆的이라 NG도 재촬영도 편집도 허용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PLAY만이 있을 뿐이다. 배우들로서는 같은 내용을 연기할 때마다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공연 회차가 늘어날수록 연기는 완숙해질 것이나 그렇다고 자만은 금물이다. 무대라는 공간에서 진행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배우는 관객들과 직접 대면해야 한다. 때문에 부담스럽지만 덕분에 현장 반응을 직접 그리고 즉시 확인할 수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대면하는 직거래이기에 가능한 일이며, 이것은 일종의 대화다.
연극 무대야말로 연기자들에게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훌륭한 연기학교이고 그 참여 자체가 예술행위이며 작품의 일부다. 그렇기에 배우라면 연극 무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시간에 행하는 예술이기에 참여하는 관객들의 입장료 부담은 불가피한 것이다. 또한 같은 이유로 생산한 작품이 보다 많은 소비자들을 만나는 점접 형성에서 연극은 스크린(TV)을 따라잡을 수 없으며, 비효율적이다.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연기자들에게 연극 무대는 떠나 있을 때도 늘 향수의 대상이고, 귀향을 다룬 소설(대체로 성장소설)이나 영화처럼 가끔씩 찾는(무대 위든 객석이든) 연극 마당에서는 회한이 가득하지 않겠는가? 

 

이번 <오이디푸스> 공연에서 황정민은 오이디푸스 역을 맡았다. 배해선(이오카스테 역)과 남명렬(코린토스 사자역)도 출연한다.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익숙한 배우들만 거론하면 세 사람이다. 그런데 이 연극의 원작자인 그리스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가 최초로 비극의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를 두 사람에서 세 사람으로 늘린 개혁을 한 사람이다. 그리스 비극을 얘기할 때 3대 비극 시인(아이스퀼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들의 작품과 그들의 역할을 이야기 하는데, 아이스퀼로스는 제2배우를 추가함으로써(이전에는 한 사람이란 얘기다) 음악(노래)를 담당하는 코러스(장) 없이도 배우들만으로 '대화'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아이스퀼로스에게 작시법을 배운 소포클레스가 제3배우를 추가한다. 오늘날의 연극 무대를 생각하면(물론 모노드라마도 있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드라마의 출발은 이러했다. 아이스퀼로스를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 소포클레스를 비극의 완성자로 부른다. 또한 소포클레스는 연극 무대의 배경을 도입했고, 비극 3부작(축제 중 진행된 비극경연에는 세 시인이 출전하였는데, 저마다 세 편의 비극과 한 편의 사튀로스극을 세트로 무대에 올렸다)에서 3부작 모두가 하나의 주제를 연속해서 다루는 연속 3부작(아이스퀼로스의)의 기법을 버리고 개개의 비극이 그 자체로 완결되도록 했다. 이것은 인간 운명의 주역을 신이(아이스퀼로스처럼) 아닌 인간으로 보는 그의 인생관과 무관하지 않다.

 

어쨌든 이러한 비극 개혁에 기여한 점만으로도 소포클레스를 비극의 완성자라고 보는  데에 지장은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위대한 창조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반성적인 문헌학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그들은 비로소 비극의 기원에 대한 물음을 묻기 시작하였지만-김상봉: <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 322면)는 <시학>에서 비극 위주로(서사시에 대한 언급이 일부 있다), 예술론을 전개하는데, <오이디푸스 왕>을 최고의 작품, 가장 비극다운 비극작품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제3배우의 등장은 <시학>에서 제시하는 비극의 6대 구성요소(플롯, 성격, 조사措辭, 사상, 볼거리, 노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플롯(사건의 짜임새) 그리고 성격(인간의 성질은 성격에 의해 결정되지만, 행복과 불행은 행동에 의해서 결정된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새로운 '내용'을 담기에 기존 '형식'(2명의 배우라는)은 한계로 작용했고, 보다 비극다운 비극을 위해 그 형식을 파괴한 것, 그것이 제3배우의 등장이다. 무대배경(미술) 도입도 기존 무대를 일종의 '마당극'에서 '무대'를 독립시킨 것이다(대상화 함). '연속 3부작'의 틀을 깬 것도 혁명이다. 그 해 축제의 비극 경연에 출전한 세 명의 시인이 비극 세 편씩, 9편의 비극을 무대에 올렸는데, 이전에 비해 그 주제가 얼마나 다채로웠을까,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순위 top10 다음에도, 인간 세상을 읽는 키워드는 숱하게 널려 있다. 

 

'제3배우의 등장'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잠시 살펴보자. <오이디푸스 왕>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코린토스에서 온 사자가 등장한 이후(924행~)부터다. 이 사자는 실제로는 양부이지만 (오이디푸스가) 친부로 알고 있는 코린토스 왕의 사망 소식을 가져온다. 이제 코린토스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오이디푸스라는 희소식을 가져온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친부를 살해하고 근친상간(어머니)을 하게 된다는 신탁 때문에 코린토스를 떠나 방랑하다가 위기에 처한 테바이를 구하고(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그 상으로 공석인 왕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전왕(라이오스)의 왕비(이오카스테)를 아내로 맞이했다.] "사자는 오이디푸스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 그를 모친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오지만, 그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정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한다."(<시학> 11장)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와 사자(가끔 코러스장이 끼어들지만 그는 배우가 아니다), 세 배우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한 사람을 빼는 것이 가능할까? <시학>은 이 대목을 '급반전'(사태가 반대 방향으로 바뀌는 것)의 대표적인 예로 제시한다. 또한 '발견'(무지의 상태에서 앎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은 <오이디푸스 왕>에서처럼 급반전을 수반할 때 가장 훌륭하다고 한다. "발견은 급반전과 결합될 때 연민이나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비극이 그런 행동의 모방이라는 것은 이미 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불행해지느냐 행복해지느냐 하는 것도 발견과 급반전으로 야기된 사태 변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시학> 11장)

 

재판은 판사와 변호사(원고)와 검사(때론 피고측 변호사)라는 세 그룹의 활동으로 진행된다. 최소의 조건이면서 더 이상은 군더더기다. 증거가 우선이다.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경우는 심판이 있고, 관계자 둘을 직접 만나게 하는 삼자대면을 해야 그 증언은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런 절차를 제대로 밟아야 최종적인 판사의 판결은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다'라는 결론은 못 내리고 '그렇게 보인다'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국회는 말할 것도 없고 국정농단(행정부)에 이어 사법농단까지 민주공화국의 근간인 삼권분립은 회복불가할 정도로 오염된 상태로 정화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얘기다.  소포클레스는 자신의 비극 무대에 제3의 배우를 등장시킴으로써 그리스 비극이라는 장르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는 정점을 찍었다. 플라톤의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론>도 소크라테스의 발언 위주로 구성되어 있지만, 가끔씩 인용되는 고발자(원고)의 발언이나 술렁이는 객석(배심원들)을 진정시키는 소크라테스의 당부 등을 감안하면 세 그룹이 등장하는 비극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지방공연이라도 가까이서 상연될 이번 <오이디푸스 왕>을 꼭 보고 싶다. 해서 <오이디푸스 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읽었다. 아마도 천병희의 '오이디푸스 왕'만을 기준으로 할 때 그의 원전번역은 이번이 최소한 네 번째가 아닐까. 단국대 출판부(5편 수록)에서, '소포클레스비극전집'(숲, 현존7편 수록)으로, 다시 '그리스비극걸작선'(여기에는 <안티고네>도 실림> 그리고 이번까지 개정판을 배제하고 최소한 네 번째다. 천병희는 오래 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원전번역한 번역가다. <시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비극의 모범답안으로 삼는 그리스 비극의 정점이다. 책을 새롭게 펴낼 때마다 번역가 천병희는 끊임없이 기존 번역을 다듬고 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그런 흔적들을 발견하였지만 이는 [가능하다면] 다른 글에서 다루기로 하자. 이번 연극 <오이디푸스>의 대본도 궁금하다(가능하다면 이것도 또 하나의 글감이..).

<오이디푸스 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크게 세 부분 구성인데, 두 편의 비극과 비슷한 분량의 해설(『오이디푸스 왕』을 읽는 몇 가지 방식)이 있다. 1)고전학자 베르낭과 2)역사학자 르네 지라르 그리고 3)장-조셉 구스(Goux)을 따라가며 '오이디푸스 문제'를 개관한다. 그리스 비극을 좀 읽었다는 독자들에게도 새롭게 오이디푸스를 만나게 하지 않을까? 특히, 구스(Goux)의 견해는 흥미롭고 진행형이다. 플라톤이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를 통해 철학(자)의 탄생을 알렸다면, 앞서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을 통해 인간의 탄생을 선언했음을 가늠하게 한다. 플라톤은 오이디푸스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자연인 소크라테스의 초상화에 드리워진 오이디푸스의 그림자를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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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9-02-14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천병희 선생님이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라는 책에서 다시 한번 번역을 가다듬은 모양이군요. 이번에 무대에 올릴 연극도, 새로 나온 번역본도 모두 궁금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이디푸스 왕』을 생각할 때마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에서 밝힌 이야기가 늘 마음에 걸리더군요. 오이디푸스는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이었다는 주장 말입니다. 그걸 믿어야 옳을지 지어낸 얘기로 흘려야 옳을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되더군요.(☞ http://blog.aladin.co.kr/oren/6827813)

timeroad 2019-02-15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지방공연이라도 꼭 챙겨 볼려고요, 대본을 구할 수 있으면 좋은데.. <역사>를 한 번 찾아봐야겠어요. 워낙 설화가 많을 뿐더러, 그것이 또 읽는 재미이기도 하니, 그러려니 하지만.. 투퀴디데스의 <역사>와 바교대상이 되나 보니, 신빙성에 대한 논의가 되는 듯합니다.
 

구스타프 도이치 감독의 오스트리아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을 봤습니다. 며칠 전 jtbc뉴스룸에서 최근 개봉영화 (<좋아해줘>) 홍보차 출연한 배우 이미연에게 손석희 앵커는. "칸막이가 있는 옴니버스 영화가 흥행한 사례가 거의 없죠,"라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이 영화야말로 그러한 옴니버스 영화의 전형입니다. 2년 전에 국내에 소개되는데, 예술영화로 분류되어 개봉관 상연은 못하고 예술영화관으로 직행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영화 <셜리>는 여느 옴니버스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칸막이가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미국의 대표적 화가인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13편을 가지고,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미국의 30년대, 40년대, 50년대, 60년대 초반까지를 시대상을 스케치합니다. 

 

또한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으로 분류되는데, 13점의 호퍼의 그림을 재현한 세트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사람이 연기하는 것이지요. 막이 있는 연극을 영상으로 옮긴 느낌이랄까, 옴니버스라는 형식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ABBA의 히트곡으로 뮤지컬 <맘마미아>가 만든 것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장면이 시작될 때마다 세 가지씩 세계 곳곳의 라디오 뉴스가 제기되는 등 딱 그 정도로 시대상을 얘기합니다. 일종의 사진의 캡션(사진설명)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지요. 호퍼의 그림을 소품 하나하나까지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어, 호퍼의 그림세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영화를 제대로 음미하기가 어려운, 불친절한 영화인 셈인데, 그래도 이러한 실험 자체로 의미 있는 시도가 아니었나 그리 생각합니다.

<Hotel Room>(1931), <New York-Movie>(1939),

<Room in New York>(1940), <Office at Night>(1940),

<Hotel Lobby>(1943) <Morning Sun>(1952),

<Sunlight on Brownstones>(1956),<Western Motel>(1957),

<Excursion into Philosophy>(1959), <Woman in the Sun>(1961),

<Intermission>(1963), <Sun in an Empty Room>(1963), <Chair Car>(1965).

이상 13점이 영화에 사용된 작품인데요, 호퍼의 그림은 (국내 독자들에게는) 한 출판사의 피츠 제럴드의 소설 표지로 사용되어, 익숙한 그림들입니다.

 

 

 

 

 

 

 

 

 

 

 

 

 

 

=맨 왼쪽부터 표지의 삽화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간이식당>(1927), <293호 열차의 객실>(1938), <뉴욕의 방>(1932)임.

특히, '단편선2'에 사용된 그림, <Room in New York>(1940)을 배경으로 사용한 이 영화는 비록 내레이션뿐이지만 미국의 경제대공황을 얘기합니다. 현직 기자인 남편은 실직 상태인데, 이 사실을 숨기고 날마다 출근합니다. 사실은 식량배급을 받으러 가는 것이라고, 이 장면의 스틸 컷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딘지 익숙한 풍경이죠?

그림에는 문외한이지만 소감을 말하자면, 호퍼의 그림에는 햇살이 살아 있습니다. 그림 자체로 영화의 세트를 만들었는데, 영화의 곳곳에서도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이 빛과 그림자의 처리입니다. 왜 그러한가, 1959년을 다룬 <Excursion into Philosophy>이란 작품이 배경이 된 부분에서 알 수 있는데,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플라톤의 <국가> 중 동굴의 비유(7권 앞부분)을 직접 읽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래 위는 그림 아래는 스틸 컷.

 

케이프 코드 오전 11시.(여자 주인공이 <국가>를 읽는다)

어릴 때부터 동굴에 갇혀 살아온 죄수들이 있다. 팔다리가 묶여 움직이지 못했고 머리도 고정돼 벽만 봐야 했다.

(어릴 때부터 동굴에 갇혔다니)
그들 뒤로는 거대한 횃불이 있다. 그들과 불길 사이로 통로가 있어서 사람들은 그 길로 각종 동물과 식물의 모형을 들고 나타난다. 동굴 벽에 그 그림자가 비치면 죄수들이 놀라 바라본다.

(여자 읽기 멈춤, 갈매기 울음소리, 그림자)

뿐만 아니라 모형을 든 사람이 말을 하면 소리가 울려 마치 그림자가 말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죄수들은 게임에 빠져들게 된다

(게임, 그림자의 형상을 맞추는 게임?)

비록 이미지의 그림자만 보고 있지만 그것이 그들이 아는 유일한 현실이다. (책을 가슴에 얹은 채 눈을 감고 생각. 현관 문소리, 남편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알지만, 자는 척 한다. 이제 남편이 이어 읽는다.)

 

만약 사슬에서 풀려나 벽에서 돌아선다면 횃불에 눈이 멀 것이다. 실물은 그림자보다 리얼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굴 밖으로 나와 태양 앞에 서면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처음에 보이는 것은 그림자 같은 어두운 형상뿐 조금씩 밝은 것을 보기 시작한다. (생각, 창밖을 잠시) 마지막으로 태양을 보게 된다. 결국 그들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계절과 해가 바뀌는 원인이 되고 보이는 만물을 주관하는 힘. 그간 동굴에서 봐 왔던 모든 것의 근원이 태양이라는 것을.

(책을 놓고 아내를 한 차례 보다가 밖으로 나간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부분이 '동굴의 비유'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본성이 교육을 받았을 때와 교육받지 않았을 때의 차이를 비교해보기 위해 동굴 비유를 든다. 위는 영화의 대사를 그대로 옮긴 것이고, 가령, 천병희의 번역을 따르면

 

"여기 지하 동굴이 하나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보게. 동굴의 입구는 길고 동굴 자체만큼 넓으며 빛을 향해 열려 있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다리와 목이 쇠사슬에 묶여 있었기에 언제나 같은 곳에 머물러 있으며, 쇠사슬 때문에 고개를 돌릴 수 없어 앞쪽밖에 볼 수 없네."(국가 514a)

"그들의 뒤편 저 멀리 위쪽으로부터는 불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으며, 불과 수감자들 사이에는 위쪽으로 길이 나 있고, 그 길을 따라서는 나지막한 담이 쌓여 있네. 그 담은 인형극 연출자들이 인형극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들 앞에다 세우는 무대와도 비슷하네."(국가 514b)

영화 <셜리에 대한 모든 것> 한 장면,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읽는 대목인데, 실제 책의 표지인지는 알 수 없다.

 

특정 상품을 영화 및 방송의 소도구로 이용하는 일을 PPL(피피엘) 광고라고 하는데, 이 영화 셜리에서는 플라톤의 <국가>와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의 시집이 소품 이상으로 사용되고 있다. 에밀리 디킨슨은 55년 5개월 5일을 살면서 2000여 편에 달하는 시를 썼으나 생전에는 겨우 일곱 편만, 그것도 익명으로 발표한 시인이다. 은둔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방 안에만 틀어박혀 사람을 피했으나 영혼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웠던 여인. 에밀리 디킨슨은 새로운 사상, 시형을 만들어 낸 선구적 여성 시인이다. 끝으로,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최근 공유와 공효진이 등장하는 광고에도 사용되었다. (아래, 그림은 호퍼의 <Sunlight on Brownstones>(1956)이고, 그 아래는, 공유, 공효진이 등장하는 CF의 한 장면, 호퍼의 그림이 영화 '셜리'의 배경이 되고, 영화 셜리의 한 장면이 광고로 등장하는 물고 물리는 영화 관계가 흥미롭다. 호퍼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피츠제럴드의 책들의 표지로 그림이 사용된 것은 그냥 우연이 아닌 것이다. 보통은 책(소설)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데, 그림과 그림 속 배경과 그 주인공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걸어나오는 점, 거기에 녹록지 않은 철학서와 시의 세계가 녹아드는, 암튼 영화 <셜리>는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시사점이 많은 독특한 그리고 기념비적인 영화다.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시는 분은 꼭 한번 찾아서 보시기를.

왼쪽은 호퍼의 <Sunlight on Brownstones>(1956)이고, 오른쪽은 공유,공효진이 등장하는 최근 CF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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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22. 오늘은 정월 대보름이다. 음력으로 15일. 굳이 오늘이 정월대보름임을 언급하는 이유는, 음력 1월 1일 설날부터 겨우 보름이 지났을 뿐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스스로) 수소폭탄(이라는) 실험에 이은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위성발사, 남측에서는 개성공단(사업) 중단으로 대응하여 나라 안팎이 혼란스럽다. 가장 우려스러운 점 가운데 하나는 이런 정국이 코앞으로 다가온 4.13총선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를 둘러싼 것들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노태우 정부부터 시작되고, DJ 정부에서 본격화된 '햇볕정책'으로 상징되는 대북한 정책의 기반이 흔들린 상태이고, 현 정권은 이러한 흐름을 집권기 내내 유지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잖아도 분열한 야권의 입장에서는 다가오는 선거에서 선전하기가 버거운 상태인데,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악재로 작용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래서, 햇볕정책이란 말의 출처가 된 원전 이솝우화를 찾아보았다. 교과서에도 실려 널리 알고 있는 이야기다. 희랍어 원전번역으로 358개의 우화를 우리말로 옮긴, 천병희의 정본 이솝우화가 그것이다. 73번째 이야기 <북풍과 해>는 다음과 같다.  

 

 

073 북풍과 해

 

 

북풍과 해가 서로 제가 더 힘이 세다고 다투었다.

그들은 둘 중에서 누구든지 길 가는 사람의 옷을

벗기는 쪽이 이긴 것으로 하기로 정했다.
먼저 북풍이 세차게 입김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사람이 옷을 졸라매자 북풍은 더 세차게 공격했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자 사람은 옷을 껴입었다.

그러자 북풍이 지쳐서 사람을 해에게 맡겼다.

해는 먼저 알맞게 비추었다. 사람은 껴입은 옷을 벗었다.

해가 더 따가운 햇살을 쏘자 사람은 더위를 견디다 못해

드디어 옷을 벗고 근처 강에 멱 감으러 갔다.

 

 

그리스 신화에서 북풍은 Boreas이고 해는 Helios다. 이 이야기의 공식 교훈은 "때로는 설득이 강요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때로는'이라는 말을 갈무리한다. 북풍이 필요할 때도 있고, 햇볕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얘기다.

이 글에서 "해는 먼저 알맞게 비추었다."라는 대목이 와 닿는다. '알맞게'다. 그리고 이어 "해가 더 따가운 햇살을 쏘자" 사람들은 드디어 옷을 벗고 멱을 감으러 강에 뛰어들었다. 이처럼 처음에는 '알맞게' 그 다음에는 '더 따가운 햇살을' 쏘았다고 한다. 한 나라 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나라간 공조하여 펼치는 정책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안보에는 보수도 진보도 없다는 말이 맞다면, 한번 시행한 정책은 그 효과를 내오기까지 진득하니 추진해야 한다.

개성공단사업에 참여한 이들의 이야기에 따르거나, 현지에서 사업을 담당했던 학자에 따르면, 지난 8년 동안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난 이후, 개성공단사업에 두 정부는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개성공단 사업은 민주정부 10년 안에 성과를 낼 수 있는 그런 단기적인 사업이 아니었다. 민주 정부 10년이 '알맞게'에 해당한다면, 이후 정부는 '더 따가운 햇살'을 쏘지는 못할망정 일정한 기조는 유지했어야 하지 않았나. (그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얘기하는 이전 정부의 치적이라고 여겼다는 데서 비극은 시작된다. 5년단임제 대통령제에서 말이다.)

뿐만 아니라, 개성공단 사업은 당근과 채찍 두 트랙으로 대북한 정책을 펼치는데 있어 대표적인 유화책이었다. 관계에서는 강요도 필요하고 설득도 필요하다. 이 두 가지는 대화와 소통의 방법이다. 투 트랙 중 하나를 놓아버린 일은 두고두고 뼈아픈 후회할 일로 남을 것이다.

북풍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다. 우화 속에서는 그저 '찬바람'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북한과의 연관 관계에서 남한의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바람으로서의 북풍(北風)과는 좀 다르다. 햇볕정책 폐기선언이라고 할 개성공단 중단이라는, 북풍을 선택한 것은 우리 정부다. 북한에만 북풍이 분 것이 아니라, 공단의 사업자와 그 가족들, 협력업체들 그리고 우리 경제의 주가 등에 영향을 미치는 불안 요소, 대중 무역에서 예견되는 데미지를 고려하면 북풍이 불고 있는 것은 맞다. 그것이 선거에 어떤 영향을 어느 쪽에 유리하게 작용할지는 그 다음 문제다. 남반구에서의 남풍은 북반구에서의 북풍에 해당한다. 그냥 속이 상해서 해당 우화를 한 차례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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