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렘 입숨의 책 - 구병모 미니픽션
구병모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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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구병모 작가의 소설 하면 어렵다는 인상이 있어서 잘 읽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어렵다는 것이 단점이 아니라 장점일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면서 구병모 작가의 소설을 일부러 찾아 읽고 있다. 2023년 안온북스에서 출간된 구병모 작가의 미니픽션집 <로렘 입숨의 책>도 그런 책 중 하나다.


이 책에는 짧은 길이의 단편 소설 열세 편이 실려 있다. 길이는 짧아도 한 편 한 편의 임팩트가 상당하다. 가령 첫 번째 단편 <화장의 도시>는 아기가 태어나면 곧바로 몸에 나노 시드를 심어서 그가 죽으면 꽃으로 피어나 그의 삶을 증명하게 하는 어느 도시의 장례 정책을 그린다. 그가 삶을 잘 살았다면 그의 시체에서 피어난 꽃이 아름답고 풍성할 것이고, 그가 삶을 잘 살지 못했다면 그의 시체에서 피어난 꽃이 볼품없거나 심지어 썩은 냄새가 날 거라는,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원형적인 생각인데 그것을 소설로 묘사하니 환상적이면서도 기괴하다.


이어지는 단편 <신인의 유배>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나스카 지상화에 대한 상상을 담고 있다. <영 원의 꿈>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에게 꿈을 팔아 돈을 버는 일을 하게 된 청년의 이야기인데, 허구인데도 묘하게 현실의 세태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제목 '로렘 입숨의 책'은 네 번째로 실린 단편 <동사를 가질 권리>에서 힌트를 얻은 듯 보인다. '로렘 입숨'은 출판이나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실제로 인쇄될 텍스트를 대신해 자리 채우기 용으로 사용하는 무의미한 단어 조합의 처음 두 단어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생소한 단어 또는 지식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구병모 작가 소설의 특징이다. 


<날아라 오딘>은 전쟁 시 자살 폭탄 운반용으로 쓰일 동물을 훈련시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고, <예술은 닫힌 문>은 탈락하면 문자 그대로 죽는 음악 연주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상황을 그린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단편은 <세상에 태어난 말들>인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신의 사전에서 부정적인 함의를 지닌 단어들을 지워서 인간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 단어나 개념을 없앤다고 해서 실재하는 현상이 사라지겠는가. 환상을 묘사해도 현실이 투영되는 구병모 작가의 작품 세계를 축약한 소설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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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이름들 - 제3회 박상륭상 수상작
안윤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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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절 가깝게 지냈으나 이제는 연락이 끊어져 소재도 알 수 없고 얼굴도 가물가물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존재는 이름으로만 남아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만 보아도 애틋한 감정이 든다. 안윤의 소설 <남겨진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윤'은 2006년 여름부터 2008년 여름까지 2년 간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8년이 지난 현재, 윤에게 그 시절과 관련해서 남은 것이라고는 당시 신세 진 하숙집 주인 라리사의 이름 정도다. 그런 윤에게 어느 날 뜻밖의 연락이 온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라리사가 자신의 수양딸 나지라의 공책을 윤에게 유품으로 남겼다는 것이다. 공책을 전달받은 윤은 번역을 시작한다. 공책에는 아내가 식물인간인 부부의 입주 간병인으로 일한 나지라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라리사는 왜 이 노트를 윤에게 주었을까. 윤은 라리사와 나지라의 마음을 이해하려 애쓰며 계속해서 읽고 쓴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점은 라리사가 윤에게 준 나지라의 공책에 적힌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식물인간인 아내 카탸와 그의 남편 쿠르만, 이들을 돌보는 입주 간병인 나지라의 관계가 실제로 어떠했는지, 쿠르만과 나지라가 서로 좋아했는지 혹은 카탸가 그들을 질투했는지 아니면 격려했는지 등은 오로지 읽는 사람의 관점과 판단에 달려 있다. 윤은 공책에 적힌 내용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면서도 번역을 멈추지 않는다. 진실을 알기 위한 번역 행위는 결국 윤에게 진실과 무관한 '어떤 효과'를 남긴다. 


윤은 라리사가 왜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전하고자 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라리사가 윤이 글을 쓰고 싶다고 했던 것을 잊지 않았고, 라리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윤에게 전하고 싶어 했다는 것만은 가슴 깊이 알게 된다. 라리사에게 윤이 어떤 존재였는지, 수양딸의 유품을 남길 만큼 애틋했는지 아니면 그저 마지막이라서 기억에 더 남은 외국인 하숙생이었는지도 영영 알 길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 이름을 안다는 것, 잊지 않고 기억해 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보통의 인연이 아니다. 결국 이 소설은 인연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소설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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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일본책 - 서울대 박훈 교수의 전환 시대의 일본론
박훈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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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일본에 관한 책을 열심히 찾아 읽었는데 요즘은 잘 읽지 않는다. 일본 외의 나라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탓도 있지만, 일본이 여러 면에서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와 달리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한국보다 앞서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달까(물론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앞서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성소수자, 장애인 문제...).


이 책의 저자인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일본을 경시하는 맨 마지막 나라가 돼야 한다."라고 말한다. 일본에 대한 호오와는 별개로, 일본에 대해서는 아무리 공부해도 지나치지 않다고도 덧붙인다. 한국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일본을 많이 따라잡았거나 어떤 면에서는 넘어섰다고 볼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은 여전히 세계 상위권의 경제 대국이며 한국보다 시장의 규모가 두 배 이상 크다. 정치적으로는 국방과 안보 면에 있어서 서로 협력할지 아니면 경계할지를 두고 항상 저울질을 하는 입장에 놓여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친일 아니면 반일이라는 극단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최대한 객관적, 중립적인 입장에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오래 전부터 일본인들을 '왜인'이라고 불렀고 이어령 선생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만큼, 한국인들 사이에는 일본 하면 '작다'라는 인상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은 인구 면에서나 영토 면에서나 한국의 2배 이상으로 결코 무시할 만한 상대가 아니다. 일본은 섬나라인 만큼 해양 국가라는 인상이 있지만, 오히려 섬나라이기 때문에 타국을 신경 쓰지 않고 자국에 한정한 사고 방식을 오랫동안 견지해 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그래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무신경하게 방류하는 걸까...?). 


일본은 개인주의가 강하고 한국은 공동체주의가 강하다는 고정관념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많은 연구들에 따르면 일본은 공동체의 성격이 강해서 각 개인이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단체에 의존적이다. 이른바 '오타쿠'도 개인주의라기보다는 공동체로부터의 '허용된 고립'으로 보는 것이 맞다. 저자가 보기에는 일본보다 한국이 "개인주의 혹은 개인이 강한 사회이지만 그것이 만든 것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37쪽)


지금 돌아보면 과거에 식민 지배를 당했던 나라 중 한국만큼 '센' 나라는 없다. 강대국들은 전쟁 책임에는 관심이 많아도 식민 지배 책임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도 가해자였으므로. 따라서 식민지 문제는 한국이 앞장서서 그 세계사적 의미와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경험을 냉정하게 객관화할 필요가 있다. (127쪽)


타산지석이라는 말도 있듯이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시 인식할 수도 있다. 저자는 특히 조선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강조한다. 조선의 역사는 너무 대단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비하할 정도로 대단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알다시피 일본은 역사적으로 줄곧 한반도로부터 선진 문물을 전수받았는데, 어떤 지점에서 입장이 뒤바뀌고 국력의 격차가 생겼는지에 대해 반일 감정을 핑계로 공부하지 않으면 한국만 손해이고, 같은 역사를 되풀이할 위험이 있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도 박훈 교수가 소개하는 '위험한 일본' 이야기를 계속 따라 가며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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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신랑 들이기
다와다 요코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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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와다 요코 하면 일본어와 독일어로 글을 쓰는 이중 언어 작가라는 인상이 강해서 다른 이력은 몰랐는데, 이번에 <개 신랑 들

이기>를 읽고 1993년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인 걸 처음 알았다. 민음사에서 2022년에 출간한 소설집 <개 신랑 이야기>에는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개 신랑 이야기>와 <페르소나>라는 단편이 실려 있는데, 두 작품 모두 길이는 길지 않지만 형식과 내용 모두 상당히 충격적이고, 다와다 요코라는 비상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탐험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길잡이 내지는 나침반이 될 만하다.


먼저 실린 <페르소나>는 오랫동안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이 많이 반영된 듯 보인다. 주인공 미치코는 남동생 가즈오와 함께 독일에서 유학 중이다. 어느 날 독일 친구인 카타리나로부터 김성룡이라는 한국인 남성이 레나테라는 독일인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미치코는 김성룡에게 쏟아지는 인종차별적 언사에 분노를 느낀다. 가즈오는 일본인과 한국인은 입장이 다르다며 미치코를 타이르는데, 미치코는 남자라는 이유로 누나인 자신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가즈오에게 화가 난다.


<페르소나>가 1990년대 독일이 배경이라면, 이어지는 <개 신랑 들이기>는 1960년대 일본 도쿄가 배경이다. 전후 부동산 붐이 일어나 신도시 개발이 한창이던 때. 신도시와 떨어진 옛 동네에 사는 기타무라 미쓰코는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학원을 운영한다. 사람들은 나이가 적지 않은데도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없는 미쓰코에 대해 온갖 상상을 하는데, 과연 이 상상들은 진실일까 허구일까. 


다와다 요코는 1960년 생이고 <페르소나>와 <개 신랑 들이기> 모두 1990년대 초반에 발표된 작품인데, 두 작품 모두 요즘 읽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형식과 내용이 참신하고 주제 의식 면에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어서 놀라웠다. 과연 탈냉전 이전에 독일로 이주해 디아스포라 문제를 연구하고, 국경의 제약이 사라지기 이전부터 이중 언어 실험을 해온 선구자답다. 다와다 요코의 최근작들은 다소 어려운 감이 있어서 차라리 초기작부터 읽어볼까 하는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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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걸려온 전화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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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감명 깊게 읽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전쟁을 겪는 두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를 총 3부에 걸쳐 서술한 대작인데,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워낙 강렬한 데다가 진실과 거짓말이 교차하는 서술 방식 때문에 혼란스러운 부분이 많았던 만큼 인상적이기도 했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어떻게 이런 소설을 썼는지 작가의 창작 방식이 궁금했는데,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짧은 소설 25편을 묶은 소설집 <잘못 걸려온 전화>를 읽으며 약간의 힌트를 얻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은 대부분 길이가 매우 짧다. 어떤 소설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산문이나 차라리 시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길이와 상관 없이 찰나의 어떤 장면이나 상황이 무척 강렬하게 서술 또는 묘사되어 있다. 가령 맨 처음에 실린 소설 <도끼>는 숙면을 취하고 아침에 일어난 여자가 밤새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던 남편에게 이상이 생긴 걸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오직 한 인물의 대사로 전개되는 4쪽 짜리 소설이지만 몰입감과 결말의 충격은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방불케 한다.

표제작 <잘못 걸려온 전화>는 실직 이후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주인공이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타인의 과실로 인해 자신의 평온한 일상이 침해된 불쾌하고 불편한 상황이건만,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상황에 맞추어 예상 외의 반응을 보인다.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할 만한 생각을 따르지 않는 전개가 이 소설집에는 여러 번 나온다. 이런 점 때문에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특별하게 느꼈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단편으로 연마된 작가의 특기가 최대한 발휘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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