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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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백 살이 된 여자가 있다. 아니, 사실은 백 살이 아닌지도 모른다. 생애 어느 순간부터 여자는 자신의 나이 세는 일을 멈추었거나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은 이렇다. 독일 통일 전 동독에서 여자는 고생물학자로 일했다. 여자에게는 남편도 있고 딸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나타났다. 서독 출신의 개미연구가인 프란츠. 그에게도 아내가 있고 딸이 있었다. 두 사람은 걷잡을 수 없이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여자는 남편과 딸을 버리고 프란츠를 택했다. 하지만 프란츠는 좀처럼 자신의 가족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여자의 실망은 깊어졌다. 그리고...


모니카 마론의 소설 <슬픈 짐승>은 일견 통속적인 불륜 소설처럼 읽힌다. 하지만 작가 모니카 마론의 이력과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이채로운 구절이나 장면들을 단서 삼아 소설을 다시 읽으면 소설이 새롭게 읽힐 것이다. 우선 모니카 마론은 1941년 베를린에서 태어나 독일 분단 이후 서베를린에서 살다가 동독의 내무장관을 역임한 양아버지를 따라 1951년 동베를린으로 이주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동독 체제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동독 정부로부터 탄압받다가 통일(1989년) 직전인 1988년에 서독으로 이주했다. 소설 속 주인공 커플이 각각 동독과 서독 출신이며, 서로 결합(통일)하는 것과 기존의 생활(체제)을 유지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점은 통일 전후의 독일의 상황을 비유한 것 같다.


이 소설에는 국제적 자유운동으로 위장한 갱단이 동유럽을 지배한다든지, 장군인 아버지를 둔 여자의 어릴적 친구 힌리히 슈미트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든지 하는, 소설의 기본 줄거리와 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군데군데 등장한다. 소설을 여러 번 읽어보니 이런 이야기들도 알고 보면 역사적인 맥락과 함의가 있고, 소설의 기본 줄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결말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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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이길보라 저자 / 창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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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거나 비슷한 점 때문에 끌리는 사이도 있지만 다른 점 때문에 끌리는 사이도 있다. 차이를 거부나 단절의 이유로 삼는 대신 만남과 연결의 기회로 삼는다면 우리의 세계는 더욱 폭넓고 다채로워질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이길보라의 책 <고통에 공감하다는 착각>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집필된 산문집이다. 저자는 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 자녀, 즉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이다. 장애인 부모를 둔 저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다른' 존재 취급을 받은 적이 많지만, 저자는 오히려 그 덕분에, 그 '다름' 덕분에 타인과 세상을 납작하게 보지 않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연구에 따르면 산업 혁명 이전에는 장애라는 개념이 없었다. 신체의 일부가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거나 정신 능력이 원활하지 못한 것은 장애가 아니라 그 사람의 특질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산업화가 진행되고 노동에 적합한 표준화된 신체 개념이 생겨나면서 그렇지 못한 몸, 즉 노동할 수 없는 몸, 자본에 기여할 수 없는 몸은 장애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장애=노동 불가'인 것은 아니다. 청각 장애가 있는 저자의 부모만 보아도 스스로 호떡과 와플 장사를 해서 저자 남매를 키워냈다. 힘든 일이 생기면 친척과 이웃들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이는 비장애인들의 삶의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다.


자라면서 저자의 관심은 장애 문제 외의 다른 문제로 옮겨갔다. 저자는 코다인 동시에 청년이고 여성이다. 네덜란드 유학 시절에는 백인 중심 사회에서 소수인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했다. 우울증을 가진 남성과 결혼하면서 우울증 문제와 무관하지 않게 되었고, 그 남성이 일본인이라서 국제 결혼 당사자가 되기도 했다. 출산을 앞두고 있으니 이제 곧 엄마로서의 정체성도 가지게 될 것이다. 장애, 청년, 여성, 유학생, 아시안, 국제 결혼, 기혼 유자녀 맘... 어느 하나 쉽지가 않다. 사회적으로 약자, 소수자로 여겨질 만한 특징을 여러 개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은 약자성, 소수자성이 결코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84년 저작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원시공산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이라는 제도가 생기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일처제가 생겼다고 말한다. 공동체 내에서 규율 없이 결혼하다가 형제자매 간의 성관계가 배제된 가족이 발달했고, 그에 따라 모계제 사회가 정립되고 여성이 경제를 장악했다. 농경과 목축이 분리되며 생산력이 증대되고 그에 따른 잉여물의 교환, 사유재산이 생기며 지금과 같은 가부장제가 출현했다. 남성의 경제적 역할이 커지면서 생산 수단과 가축, 노예가 남성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이 남성에 의해 멸시당하고 남성 욕망의 노예이자 번식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고 할 수 있는 일부일처제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즉 남성이 가족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는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가 당연하지 않다는 거다. 약 5000종의 포유류 중 일부일처제를 채택한 동물은 3~5%에 불과하다. 인류 또한 사유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를 택했을 뿐이다. (143-4쪽)


저자는 자신의 약자성, 소수자성 덕분에 다른 약자, 소수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연대할 수 있었다. 고통은 저자가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혹자는 창작자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선을 견지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저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들은 대부분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내려고 시도하는 것들이었다. "자신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경험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얼마나 큰 진정성을 더하는지, 당사자성에 기반을 둔 정체성과 주체성, 주도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기술과 기교보다 1인칭의 시점으로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더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103쪽)


정치는 정치인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양궁 국가대표 선수 안산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가 맡은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세상을 이롭게 바꾼다는 의미에서) 정치를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이 밖에도 재일조선인을 비롯한 디아스포라, 미등록 이주아동, 탈학교 조선인, 영 케어러, 환경 운동 등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한다는 말을 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진정한 (자신의 그리고 세상의) 변화를 이루어내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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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 조교님 1
지붕 지음 / 유어마나(거북이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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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는 SNS(구체적으로 현 X, 구 트위터) 광고에 하도 많이 떠서 어쩌다 한 번 눌렀는데 읽어보니 취향이라 단행본을 구입하게 되었다. 작화와 내용에 대한 약간의 정보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구입했는데 뒤늦게 알아보니 원작인 BL 웹툰이 상당히 유명한 작품이다. 2024 서울국제도서전 한국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으로 선정되었다는 뉴스를 작가님 SNS(구체적으로 현 X, 구 트위터)에서 봤는데 확실히 재미있다. 어떻게 보면 BL 장면보다 개그 장면이 더 많아서 영상화해도 좋을 것 같다.


이야기는 서울 소재의 모 대학 생명과학과 2학년 학부생으로 복학한 송우윤이 본교 대학원생이자 행정실 조교인 우진형과 같은 원룸에서 동거를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우윤은 진형이 얼음 왕자 같은 외모인 데다가 성격도 안 좋다는 소문이 자자해 동거 제안을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넙죽 받아들여서 깜짝 놀란다. 그런데 며칠 같이 살아 보니 집에서 보는 진형은 학교에서 보던 진형과 전혀 다른 사람인데...!


1권에서는 우윤과 진형이 동거를 시작하는 과정과 우윤의 과거가 주로 그려진다. 우윤은 원래 외모 꾸미기에 관심 없는 평범한 남학생이었는데, 고등학교 시절 우윤의 여동생의 친구가 집에 놀러 와서 우윤을 보고는 잠재력이 있다며 그를 남자 아이돌처럼 꾸며줬다. 그때 '개발된' 미모를 바탕으로 우윤은 대학에서도 '생명과 남돌'로 불리고 있는데, 진형이 이를 놀리면서도 다른 사람이 우윤을 가로챌까 두려워 하는 모습이 귀엽고 재미있다. 2권도 읽어 보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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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열 가지 생각
이해인 지음 / 마음산책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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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닮고 싶은 어른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직접 만날 수 없거나 만나기 힘든 어른들의 귀한 말씀, 좋은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최적의 통로가 책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그런 어른, 그런 작가 중 한 명이 이해인 수녀님이다. 2023년 마음산책에서 출간한 이해인 수녀의 산문집 <인생의 열 가지 생각>은 1945년생인 저자가 팔십 해 가까이 살면서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인생의 열 가지 화두에 대한 글이 담겨 있다. 열 가지 화두란 가난, 공생, 기쁨, 위로, 감사, 사랑, 용서, 희망, 추억, 죽음이다.


저자에 따르면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비범한 희망을 얻는 길"이다. 모두가 풍족하기를 갈망하고 사치가 더 이상 죄가 되지 않는 시대에 가난을 긍정하고 청빈한 삶을 살기를 권하는 것은 이러한 연유다. 저자가 속해 있는 수녀원에서는 내가 아파도 '우리'가 아프다는 말을 쓸 정도로 개인 중심의 사고를 지양하고 공동체 중심의 사고를 장려한다. 내가 많이 가질수록 다른 사람은 덜 가진다는 것을 상기하며, 일부러라도 나는 덜 갖고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이 늘어날 때, 우리 사회가 더 살만한 세상이 될 거라는 저자의 말씀에 공감한다.


공생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선한 사람은 모두가 웃고 있을 때 우는 사람을 바라본다. 나의 슬픔, 나의 외로움만 돌보지 않고 타인의 슬픔, 타인의 외로움을 함께 돌보며 먼저 손을 내밀어 잡아주는 것이 함께 사는 삶이다. 가톨릭에서는 좋은 일이 생겨야 기쁜 것이 아니라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면서 살면 기쁨이 온다고 가르친다. 사랑도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먼저 사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단지, 사랑하려는 노력을 하다가 떠나는 사랑의 순례자입니다."(136쪽)라는 저자의 말을 되새겨 본다.


저자는 암 투병을 겪으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면서 하나의 습관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존심 상하고 화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상상 속의 관'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속상한 일도 죽으면 다 잊힌다. 그러니 그런 일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지금에 집중하자. 저자는 틈나는 대로 부지런히 그동안 받은 사진, 엽서, 편지 등을 정리한다. 정리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 어떤 추억이 떠오르면 바로 연락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무엇이든 은총이며,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사람의 힘만으로는 일어나지 않으니 항상 겸손하라는 당부도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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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못 버린 물건들 - 은희경 산문집
은희경 지음 / 난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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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기간 동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전에는 엄두가 안 나서 하지 못했던 집 청소나 짐 정리를 실천한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소설가 은희경도 그중 한 명이다. 은희경 작가가 2023년에 출간한 산문집 <또 못 버린 물건들>에는 팬데믹 기간 3년 동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큰맘 먹고 짐 정리를 실천한 저자가 당장 쓸모는 없지만 감히 버릴 수 없었던 물건들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유행에 민감한 저자는 미니멀 라이프 열풍에 발맞추어 가볍고 단순한 삶을 살고자 했다. 때마침 이사를 하게 되어 대대적인 짐 정리가 필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쉬운가. 술을 좋아하는 저자가 첫 번째 책의 인세로 구입한 여섯 개들이 맥주잔이라든가, 이따금 외국에 나갈 때마다 고심 끝에 구입한 감자 칼, 구둣주걱 같은 물건들은 그것의 쓸모나 사용 빈도보다 그것에 담긴 추억 때문에 좀처럼 버릴 수가 없었다. 저자는 이러한 사정을 약간은 변명조(!)로 직접 찍은 사진을 곁들인 짧지만 재미난 이야기로 들려주는데,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고 이렇게 되뇌게 되는 것이다. "그런 물건 나도 있지. 절대 못 버리지..."


버리지 못한 물건이 많다는 건 그만큼 소중한 추억이 많다는 뜻도 된다. 추억이 많다는 건 경험이 많다는 뜻도 된다. 집에 마라톤 대회에서 받은 메달과 안 쓰는 토슈즈가 있다는 건 곧 저자가 마라톤을 해봤고 발레를 배워봤다는 것 아닌가.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며 매일 하나씩 버리는 삶을 실천하고 있지만(쉽지 않다), 저자처럼 버리고 싶어도 차마 버릴 수 없는 물건이 많은 삶이 사실은 더 바람직한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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