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줍기 - 젊은 학자가 건네는 다정하고 다감한 한자의 세계
최다정 지음 / 아침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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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수첩 한 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자를 연구하는 젊은 학자인 저자는 평소 여러 개의 수첩을 가지고 다니는데, 그 중 하나를 '한자 줍기 수첩'으로 명명하고 한문 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한자를 발견하거나 특별한 교훈을 지닌 구절을 포착하면 이를 기억하기 위해 옮겨 적어두는 용도로 사용했다. 그러다 점차 좋아하는 한자나 아름다운 의미를 지닌 한자들을 모으는 용도로 확장되었고, 특별히 고른 54개의 한자에 자신의 글을 덧붙여 블로그를 통해 연재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54개의 한자 또는 한자어뿐 아니라, 이것들을 특별히 고른 저자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저자는 불과 몇 년 전까지도 학자의 길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대학 졸업 후 남들처럼 취업해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했다. 그러다 번아웃이 왔고, 퇴사 기념으로 유럽 여행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문득 한자를 공부하는 학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낯선 도시들의 황홀한 풍경이 역으로 익숙하고 오래된 한자의 세계에 대한 열망을 자극한 것일까. 


이 책은 본격적인 한자 학습서와는 거리가 멀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한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저절로 커진다.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지킴'이라는 뜻을 지닌 '병이(秉?)', '공부를 멈추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는 단계'를 일컫는 '욕파불능(欲罷不能)',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옛사람과 벗함'을 뜻하는 '상우(尙友)' 등 그동안 몰랐던 단어를 많이 배웠다. '기쁠 열(悅)'이 혼자서 느끼는 기쁨을 뜻한다면 '즐거울 락(樂)'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즐거움을 뜻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만주문자의 세계도 처음 알았다. 저자는 한문으로 쓰인 고전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주문자의 세계를 만났고 현재는 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중국 한자, 한국 한자, 일본 한자가 다른 것처럼 중국 한자 안에서도 시대별, 지역별, 민족별로 문자 또는 언어의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만주문자 연구를 통해 조선 후기-청나라 시대의 문헌을 더 정확하게 읽고자 한다는데 그 결과물도 언젠가 책으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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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린디합을
손보미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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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 작가가 2013년에 발표한 첫 소설집이다.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단편소설 <담요>를 비롯해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손보미 작가 하면 한국 소설가인데 미국 소설 같은 소설을 쓴다는 인상이 있는데,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들도 그러한 인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미국 소설 같은 소설은 어떤 소설이고 한국 소설 같은 소설은 어떤 소설인지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렵지만.


맨처음에 실린 <담요>와 마지막에 실린 <애드벌룬>은 등장인물이 일치한다. 무명의 소설가인 '나'는 <난 리즈도 떠날 거야>를 출간한 지 얼마 안 되어 '한'과 절교한다. '한'은 자신의 직장 상사인 '장'의 이야기를 '나'가 멋대로 소설에 인용했다며 '나'와의 인연을 끊었다. '장'은 아내를 잃고 혼자서 아들을 키우다 아들과 함께 간 록그룹 공연에서 사고로 아들을 잃었다. <애드벌룬>은 <담요>에 나오는 '장'의 아들의 시점으로 쓴 이야기이다. 연결해서 읽으면 매우 감동적이다. 


<담요>와 <애드벌룬>은 아니지만, 이 소설집에는 부부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 실명한 남편을 위해 강의를 듣다가 강사와 친해지는 아내와 그 강사의 아내의 이야기를 그린 <폭우>가 그렇고,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을 대신해 포르노 번역으로 생계를 잇는 아내의 이야기를 그린 <침묵>도 그렇다. 표제작 <그들에게 린디합을>도 영화감독 남편과 배우인 아내가 중심에 있고, <여자들의 사랑>도 바이올린 연주자인 아내를 둔 남편이 화자이며, <육인용 식탁>에는 무려 세 쌍의 부부가 등장한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과학자의 사랑>에도 전도유망한 과학자 고든 굴드와 그의 아내 비비안이 등장한다. 소설에서 굴드는 중력에 관한 연구를 하는데, 여기서 '중력'은 손보미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개념이다. 인간의 의지에 반하는 중력이라는 개념은 관습이나 질서 같은 사회적 압력으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적 압력이 작용하는 다양한 인간관계 중에 하필 부부 관계에 주목한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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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화질] 약사의 혼잣말 (코믹) 01 약사의 혼잣말 (코믹) 1
네코쿠라게 지음 / 학산문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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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의 혼잣말>은 각종 콘텐츠를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원작은 휴가 나츠의 소설이고 코믹스는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하나는 네코쿠라게 작화이고 다른 하나는 쿠라타 미노지 작화이다. TV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으며, 2023년 4분기와 2024년 1분기 연속 방영 중이다. 넷플릭스로도 볼 수 있는데 원작과는 또 다른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이야기는 유곽의 약사인 마오마오가 인신매매단에 의해 납치되어 후궁에 팔리면서 시작된다. 마오마오는 몸값을 다 갚을 때까지 얌전하게 지내기로 다짐하지만, 황제의 자식들이 연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탐정 노릇을 하게 된다. 결국 마오마오는 사건의 실체를 밝히게 되고, 후궁을 감독하는 환관(?) '진시'가 마오마오를 눈여겨보게 된다. 


진시의 눈에 든 마오마오는 허드렛일을 하는 말단 궁녀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는 교쿠요 비의 독 시식 담당으로 순식간에 승진한다. 이후에도 후궁 안팎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추리로 해결하는데, 이 과정이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마오마오가 독과 약이라면 환장하고 미모를 일부러 감추고 다니는 독특한 캐릭터라는 점도 신선하고, 진시와의 밀당 로맨스도 재미있다.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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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맑건만 소설의 첫 만남 11
현덕 지음, 이지연 그림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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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하늘은 맑건만>의 작가 현덕은 1909년 생이다. 한국 소년소설의 개척자라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라서 이력을 찾아보니 월북 작가다. 이 책에 실린 두 작품은 저자가 동화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1930~40년대가 배경이다. 안반, 빈탕, 도시(도무지), 남저지(나머지) 같은 옛말이 나오는 점이 재미있고, 배경은 옛날이지만 거짓말, 양심, 죄책감, 의심 등 요즘 청소년들도 고민할 만한 문제를 다뤄서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하늘은 맑건만>의 주인공 문기는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작은 아버지 집에 얹혀 살고 있는 소년이다. 어느 날 숙모의 심부름으로 고기를 사러 간 그는 예상보다 많은 거스름돈을 받고 고민에 빠진다. 고기 파는 상인에게 거스름돈을 잘못 줬다고 솔직하게 말할지 아니면 애초에 숙모가 돈을 잘못 줬는지 확인할까 말까 고민하던 중 문기는 친구 수만과 만나고, 수만에게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는 바람에 점점 더 큰 어려움에 빠진다. 


이 책에 실린 또 다른 소설 <고구마>의 주인공 기수는 학교 아이들이 농업 실습용으로 가꾸고 있는 고구마밭이 파헤쳐진 것을 발견한다. 화가 난 아이들은 고구마를 캔 범인으로 가정 형편이 안 좋아서 매일 아침 누구보다 일찍 등교해 교장 선생님 심부름을 하는 수만을 지목한다. 기수는 친구의 의리로 수만이 한 일이 아니라고 감싸주지만 아이들은 점점 더 수만을 몰아붙이고, 기수 또한 점점 수만을 의심하게 된다. 


두 편 모두 길이는 짧지만 중심 사건이 극적이고 강렬하며 몰입감이 대단하다. 특히 <하늘은 맑건만>에서의 문기는 별 생각 없이 한 작은 거짓말 때문에 점점 더 큰 어려움에 빠지는 모습이 무척 안타까웠다. 두 편 모두 주인공은 그나마 양심이 있고 죄책감도 느끼는 아이들인데, 친구를 괴롭히거나 의심하고도 죄책감을 안 느끼는 <하늘은 맑건만>의 수만이나 <고구마>의 인환 같은 아이들은 커서 어떻게 될는지 착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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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 조선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20
정명섭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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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에 때 아닌 폭설이 내린다면 어떨까. 갑자기 시작된 한파가 그칠 기색 없이 계속된다면...? <미스 손탁>, <어린 만세꾼>, <저수지의 아이들> 등 다수의 역사소설을 집필한 정명섭 작가의 신작 <빙하 조선>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파라는 재난을 맞닥뜨린 상황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상상해서 쓴 판타지 소설이다.


이 소설은 판타지 소설이기는 하지만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39년 8월 24일 자에 따르면 "평안도 의주 등지에 우박과 눈이 뒤섞여 내리고, 철산 땅에는 눈이 1자 남짓 쌓여 3일이 되도록 녹지 않았으며, 황해도 곡산 등지에는 산 중턱에 눈이 내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17세기 숙종 대에 소빙하기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사료다. 


소설은 열여섯 살 소년 화길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화길은 한양의 소방관인 멸화군의 일원이다. 멸화군 대장인 아버지와 함께 먹고 자면서 일을 돕는 것이 그의 일과다. 어느 날 밤 면주전에 난 불을 끄고 다른 대원들과 함께 한숨 돌리던 그는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걸 보고 깜짝 놀란다. 때는 6월. 한겨울이 되려면 아직 한참 남은 때였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시작된 눈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그치기는커녕 쌓이고 또 쌓여서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하고 농사를 망쳤다. 재난을 틈타 곳곳에서 범죄가 발생하고, 민심이 악화되면서 왕을 탓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세상이 점점 흉흉해지자 화길의 아버지는 화길에게 한양을 떠나 백두산으로 가라고 지시한다. 그곳에 '따뜻한 땅'이 있다는 아버지의 말은 정말일까.


처음에는 안 그래도 추운데 더 추운 곳으로 가라고 아들에게 지시하는 화길의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대로 백두산에 따뜻한 땅이 정말 있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고, 화길이 따뜻한 땅을 찾는다 한들 아버지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아버지와 함께였다면 화길이 길 위에서 덜 고생하고 덜 고통받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품을 떠나 혼자 길 위에 선 화길이 위기를 극복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한파와 상관 없이 화길이 살면서 한 번은 거쳤어야 할 인생의 관문을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길이 스스로 친구를 찾고 적을 분간하는 기술을 터득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어쩌면 아들을 좀 더 넓은 무대에서 큰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던 아버지의 큰 그림 같다는 생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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