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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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은 한 편의 단편 영화 같은 소설이다. 우리네 일상을 다룬 평범한 이야기인데,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생각하게 해주고 여운은 오래간다. 


홀트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칠십 대 노인 루이스 워터스의 집에 이웃에 사는 칠십 대 노인 애디 무어가 찾아와서는 대뜸 말한다. "가끔 나하고 자러 우리 집에 올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요." 루이스와 애디는 둘 다 배우자와 사별한 지 오래고 혼자 사는 처지다. 그러니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제안이지만, 사십 년 넘게 이웃으로 지낸 두 사람을 그들의 자식들과 다른 이웃들이 어떻게 볼지 불확실하다. 걱정하는 루이스에게 애디가 말한다. 남은 시간이 없다고. 하고 싶은 걸 하자고. 


그날 이후로 루이스는 매일 밤 애디의 집으로 간다. 두 사람은 섹스 없이 그저 곁에 누워서 잠을 잔다. 이보다 더 순수할 수 없는 관계인데, 사람들은 이들을 불순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오랫동안 배우자도 연인도 없이 혼자 살다가 마침내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용기를 내었느냐며 축복하기는커녕, 나이 들어서 뭐 하는 짓이냐며 비난하고 조롱한다(주변 사람들이 너무 전근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옛날 소설인가 했는데 2015년 작이라고 해서 놀랐다). 


루이스의 딸 홀리도 아버지의 새로운 관계에 호의적인 입장은 아니지만, 애디의 아들 진은 거의 빌런급으로 애디와 루이스의 관계를 반대하고 루이스에게 적대적인 자세를 취한다. 애디와 루이스의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없는 상황인데, 애디와 루이스의 과거를 알고 나면 이들의 자식으로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홀리가 루이스를 원망하는 건 이해해도 진이 애디를 원망하는 건 이해가 안 된다. 나쁜 건 아버지 아닌가. 


노년의 삶과 사랑을 그렸다는 점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 <다시, 올리브>가 떠오르기도 했다. <올리브 키터리지>에는 엄마인 올리브에 대한 아들의 입장을 서술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 소설에도 루이스의 딸과 애디의 아들의 입장을 서술한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인물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제이미의 미래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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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믿어주는 일
미야모토 테루 지음, 이지수 옮김 / 프시케의숲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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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테루의 산문집 정말 좋다. <생의 실루엣>도 좋아서 한숨을 푹푹 쉬면서 읽었는데, <그냥 믿어주는 일> 역시 좋은 문장에 밑줄을 계속 긋다가 포기했다(가끔 밑줄을 그어야 의미가 있지, 전부 밑줄을 긋는 건 의미가 없다). 1947년 일본 고베 출신인 미야모토 테루는 1949년 일본 교토 출신인 무라카미 하루키와 출생연도와 고향이 비슷한데, 가정 환경과 성장 과정이 달라서 그런지 에세이의 내용이나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나는 미야모토 테루 쪽이 더 좋다. 


<그냥 믿어주는 일>은 미야모토 테루가 30대 후반이었던 1983년에 발표한 산문집이다. 1977년 <반딧불 강>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고 <환상의 빛>, <금수> 등의 초기작들을 발표하며 문단의 기대주로 주목받던 시절에 낸 책이다. <생의 실루엣>보다 훨씬 전에 쓴 책이지만, 두 책 모두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쓴 책이라서 내용은 비슷하다. 야반도주를 할 정도로 가난했던 집안 사정과 부모의 불화, 장래에 대한 불안,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과 자기 의심의 반복 등. 


물론 새롭게 알게 된 내용도 있다. 저자는 어릴 때 가난해서 책을 읽고 싶어도 실컷 읽을 수 없었다. 딱 한 번 어머니가 길거리에서 파는 중고책을 여러 권 사준 적이 있는데, 그때 산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글쓰기 훈련을 했다. 열여덟 살 때는 수험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도서관에 드나들며 러시아와 프랑스 소설을 160여 편 넘게 읽었다. 덕분에 입시 준비를 할 때 애를 먹었지만, 훗날 작가가 되는 데 있어 그때 읽은 책들이 자양분이 된 것은 분명하다. 


저자는 이십 대 시절에 지독한 신경 불안 증세를 겪었다. 사람 많은 전철을 타면 증세가 심해져서 출퇴근을 못할 정도였다. 이러다 죽을 것 같아서, 그때 이미 두 아이를 둔 한 집안의 가장이었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글쓰기에 매진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글쓰기만 했더니 거짓말처럼 신경 불안 증세가 사라졌다. 그렇게 완성한 소설로 다자이 오사무 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이듬해 발표한 소설로는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다. 병이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린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지금보다 훨씬 젊을 때 쓴 책이라서 그런지, <생의 실루엣>과 달리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드러나는 대목이 적지 않다. "많은 젊은이들은 그때 즐거우면 되는 것, 순간적으로 폭소가 터져 나오는 것밖에 추구하지 않게 되어 인간의 영혼과 인생의 거대함을 전하는 소설을 읽지 않게 되었다."(53쪽)라고 한탄하는 문장을 읽으며 80년대의 젊은이들도 지금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도파민 중독이었나 생각했다. 


'인간 줏대 제거 계획'이라는 글도 재미있다. "(어른들의) 목적은 하나. 다음 세대를 담당할 아이들을 결코 지적 수준이 높은 어른으로 성장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똑똑해지면 곤란하다. 자기네 뜻대로 움직일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먼저 사치와 쾌락을 부여한다. 실로 저급하기 짝이 없는 문화를 만들어내고 온갖 매체를 이용해 그 안에 푹 잠겨 있게 한다. 학력 편중 사회를 만들고 어릴 때부터 가혹한 수험 공부로 내모는 등등."(101쪽) 상상이라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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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그릇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8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병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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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의 거장 마츠모토 세이초의 대표작 <모래그릇>은 1961년 출간된 이후 영화, 드라마로 여러 번 리메이크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내가 좋아하는 일본 아이돌 그룹 멤버의 주연작이라서 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어디서 어떻게 볼 수 있는지 몰라서 못 봤다. 그러다 최근 들어 예전에 읽은 마츠모토 세이초의 다른 작품들을 들춰보다가 <모래그릇>을 아직 안 읽은 게 퍼뜩 떠올라 바로 구입했다. 


읽어보니 와... 너무 재밌다. 60년도 전에 출간된 소설인데 이렇게 재밌다니. 심지어 범인을 아는데도 재밌다니...! 거의 마지막까지 범인으로 의심되는 인물이 내가 아는 범인보다 더 범인 같아서, 나는 내가 20년 가까이 범인을 잘못 알고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범인을 알아맞히기가 쉽지 않고, 범인을 알아내기까지의 과정이 엄청나게 스릴 넘치는데, 이렇게 잘 쓴 추리 '소설'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면 어떠려나. 범인이 누구인지 바로 보이는데(대체로 개런티가 제일 높은 사람이 범인이다) 괜찮나? 


소설의 시작은 이렇다. 1950년대 말 도쿄. 이른 새벽 운행을 앞둔 전차 밑에서 피투성이 시체 한 구가 발견된다. 경찰은 시체로 발견된 남자가 전날 밤 근처 싸구려 술집에서 젊은 남자와 술을 마셨다는 것, 일본 동북부 지방 사투리를 썼다는 것, 대화 중에 '가메다'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것을 알아내지만, 이를 끝으로 수사는 오리무중에 빠진다. 결국 경찰은 수사를 접지만, 베테랑 형사 이마니시는 자신의 사비를 써가며 후배 형사 요시무라와 함께 수사에 매달린다. 


일단 소설의 주인공인 이마니시 형사의 캐릭터가 너무 좋다. 최근에 아르망 가마슈 시리즈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느꼈지만, 나는 (해리 홀레처럼) 음울하고 자기 관리 못 하는 형사보다 아르망 가마슈처럼 성실하고 일 중독적인 형사가 좋다. 이마니시는 전적으로 후자다. 그는 사건이 임의 수사로 바뀌었는데도 스스로 사비를 써가면서 사건에 매달리고, 집에서 아내와 대화할 때, 아들과 목욕탕에 갈 때에도 사건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는다. 혹시라도 수사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신문이나 잡지 기사도 열심히 읽고, 실제로 그러한 노력들이 수사로 이어지는 점이 재밌었다. 


60년도 전에 출간된 소설인 만큼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부분이 많은데, 그 점이 오히려 좋았다. 지금이라면 휴대폰 몇 번 만지면 해결될 일인데 이때는 휴대폰은커녕 전화가 없는 집도 많아서 형사가 직접 일본 동쪽 끝부터 서쪽 끝까지 다니는 모습이 신선했다. 신칸센이 생기기 전이라서 당일치기로 오갈 수 있는 거리를 야간열차 타고 힘들게 다니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수사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고,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답신과 함께 선물을 보내는 모습도 정겨웠다.


언론을 장식하는 유명 인사들의 부유하고 화려한 삶의 이면에는 부정과 타락이 있고, 그들의 삶을 뒷받침하는 가난한 노동자들이나 빈민들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사라지고 죽어가는 모순을 묘사한 점도 의미심장하다. 사건이 도쿄에 있는 전차 역에서 발생한 점, 전차 노선도와 시간표가 주요 단서로 쓰이는 점을 비롯해 이후 전개 과정 면면이 2023년에 출간된 다카노 가즈아키 소설 <건널목의 유령>과 상당히 닮았다고 느꼈다(오마주일까). 같이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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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2 - 다양성 너머 심오한 세계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2
브래디 미카코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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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틀 동안 브래디 미카코의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1,2권을 재밌게 읽었다. 왜 이렇게 재밌을까 생각하다가 1권을 다시 읽었는데 이런 문장이 눈에 띄었다. "아들이 입학한 '구 밑바닥 중학교'는 다른 의미지만 초장부터 극적이랄까. 드라마 <글리(glee)> 같았다." 


맞다. 이 책은 드라마 <글리>같다.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총 6시즌에 걸쳐 방영된 드라마 <글리>는 고등학교 합창부를 무대로 학생들이 겪는 인종 차별, 계급 차별, 성소수자 차별, 장애인 차별 등의 문제를 폭넓게 다룬 작품이다. 이 책도 그렇다. 이 책은 영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둔 저자의 아들이 명문 가톨릭계 초등학교 졸업 후 분위기가 전혀 다른 '구 밑바닥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당연히 인종 차별 문제도 나오고, 빈부 격차, 이민자 혐오, 성소수자 혐오 등의 문제도 나오지만, 읽는 내내 분노나 우울감보다는 감동과 희망을 더 많이 느꼈다. 


그렇게 느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혐오와 차별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루마니아 출신 이주민 가족을 돕는 저자의 남편, 저소득층 학생들을 위한 교복 재활용 자원봉사에 이어 생리용품 나눔 운동을 하는 교사, 따돌림당하는 아이를 걱정하고 보살피는 저자의 아들, 이 밖에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에게 선의를 베푸는 사람, 사람들. 


1권에 이어 2권에도 아들의 명대사(?)가 많이 나오는데,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은 "사회를 믿는다"이다. 어떤 사람이 선하고 정의로운 행동을 하려고 해도 사회가 자신의 행동을 지지할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면 그 행동을 할 수 없다. 그런 사회에선 선하고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그 사회는 각박해지고 몰인정해질 것이다. 사회 전체가 자신의 행동을 지지하지 않아도 관철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누군가가 주변에 있는 것이다. 그 누군가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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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 차별과 다양성 사이의 아이들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1
브래디 미카코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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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 캘리(신연선) 작가님이 추천해 주셔서 읽게 된 책이다. 저자 브래디 미카코는 1965년 일본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난 일본인 여성으로, 펑크 음악에 빠져 영국을 오가다 아예 영국에 정착했다. 런던의 일본계 기업에서 일하다 프리랜서로 번역 및 저술 활동을 했고, 영국의 탁아소와 어린이집에서 보육교사로 일한 경험을 쓴 책 <아이들의 계급투쟁>이 일본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면서 작가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이 책은 아일랜드계 아버지와 일본계 어머니를 둔 저자의 아들이 백인 저소득층 청소년들이 주로 다니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겪은 1,2년 동안의 일을 담고 있다. 저자의 아들은 명문 가톨릭계 초등학교를 나왔다. 그 학교는 한국의 사립 초등학교처럼 잘 사는 집 아이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라서, 학교 분위기도 좋고 부모들의 교육열도 높고 학생들도 대체로 모범생이었다. 저자의 아들은 그런 학교에서 학생회장으로 뽑힐 만큼 범생이 중의 범생이였다. 


그러나 졸업 후 학풍이 비슷한 명문 가톨릭계 중학교가 아닌, 집에서 가까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아들의 상황이 급변했다. 백인이 대다수인 학교에서 아시아계 혼혈인 아들은 존재 자체로 튀었다. 백인 학생들은 인종 차별, 이민자 혐오를 일삼았고, 소수인 유색인종 아이들 사이에도 온갖 차별과 혐오가 난무했다. 여기까지 읽으면 아시아계 혼혈인 남자 중학생이 자신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센 백인 학생들 사이에서 분투하는 서사를 상상할지 모르겠는데, 전혀 아니다. 


저자의 아들이 다니는 중학교는 비록 성적으로만 따지면 공립학교 랭킹 최하위, 밑바닥 중의 밑바닥 학교일지 몰라도, 교장과 교사들의 열의가 엄청나다. 급식비를 못 내는 학생을 위해 대신 돈을 내주고, 교복 살 돈이 없는 학생들을 위해 버려진 교복을 수선해 헐값에 판매하고, 학생들의 정서를 발달시키기 위해 음악, 뮤지컬을 비롯한 다양한 클럽 활동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는 점이 그렇다. (폭력과 중독 문제가 있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감정 표현이 단조롭고 타인의 표정을 읽지 못해서 정부 차원에서 연기 수업을 많이 시킨다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에 묘사된 저자의 아들이 너무나 착하고 사랑스럽다. 인종차별 발언을 일삼는 친구에게는 단호히 일침을 놓는가 하면, 가난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는 또 다른 친구에게는 어떻게 하면 상처 주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모습이 어쩜 그리 예쁘던지. 책의 제목인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역시 저자의 아들이 쓴 문장인데, 이 문장이 탄생한 에피소드도 매우 아름답고 짠하다. 공감(empathy)이란 '스스로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이라는 대답도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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