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평전
이광호 지음,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기획 / 사회평론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세돌 개인이 진 것이지 인간이 진 것은 아니다."

알파고와 바둑을 둔 다음 이세돌이 한 말이라고 한다. 


"한 인간의 작은 발걸음에 불과하지만 인류 전체에서는 위대한 도약"

달에 첫걸음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의 말이라고 한다.


노회찬 평전을 읽으면서 이런 구절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를 비롯한 진보정당 사람들이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그들 개인에게도 큰 일이었겠지만 (이는 결코 작은 걸음은 아니다. 다만, 개인보다는 진보주의자들을 대표했다고 할 수 있으니, 이런 말도 통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정치사에도 위대한 도약을 이룬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그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많은 변화도 있었지만, 기대만큼 일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고, 또 진보들이 스스로 고질병이라고 하는 분열로 인해 여러 번 이합집산도 거쳤지만 (오죽하면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을까), 그래도 진보정당이 국회에 입성했기에 이룰 수 있었던 일들이 많았다고 본다.


바로 그 중심에 노회찬이 있었다.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슬프지만 그는 갔으니, 과거형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많은 어록을 남긴 정치인이 있을까 싶기도 한데, 말들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그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정치인이었다.


그런 그가 돌연 세상을 등졌다.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영향을 준 책을 하나 고르라면 '교과서'라고 답을 하겠다던 노회찬.


교과서가 무엇인가? 좋은 말만 적혀 있는 책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교과서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는 차별들을 살펴야 한다. 그래도 대체로 교과서는 옳은 말을 하는 책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미래 세대에게 전수했으면 좋은 것들이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교과서가 지니고 있는 편향성이라든지, 부정적인 면을 언급하지 말고, 그냥 통상 교과서적 인간이라고 할 때 쓰는 그런 비유적 표현으로 쓴다)  


노회찬은 교과서대로 행동하지 않는 정치인을 보고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왜 자신들에게 가르친 대로 그들은 행동하지 않는가? 그는 그렇게 교과서적 인간이 되었다. 앎과 행동을 하나로 한 인간.


자신의 이익보다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고, 당장은 아니더라도 꼭 해야만 할 일을 했던 사람. 스스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 그런 사람들과 어울렸던 사람.


사회에서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사람을 우리 눈 앞에 보여준 사람. 그런 정치인이 노회찬이었다. 그러니 어떤 말로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세상을 등졌으리라. 


하지만 정치인 누구나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온갖 비리를 저질러 놓고도 자기변명으로 일관하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법망을 피해가려고 하는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가. 또 법망을 못 피할 것 같으면 정치 탄압이라고 주장하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이 자신의 잘못을 가리려고 하는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가.


교과서적 인간 노회찬은 그런 정치인이 될 수 없었다. 그는 교과서에 실린 대로 옳다고 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비록 실수라고 해도, 그 실수로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난 노회찬.


요즘 부쩍 그가 생각났다. 정치판이 참... 그러다 노회찬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의 평전을 샀다. 56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600쪽 내외에 담는다는 일이 우습기는 하지만, 이 정도 두께면 노회찬이 한 많은 일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환경. 교과서적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노동운동가로서의 삶. 여기서 그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정당의 필요성을 깨닫고,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일하는 정치가로서의 삶. 진보정당원으로서 국회의원이 되어 한 활동들.


국회의원은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대변하는 자리, 봉사하는 자리임을 너무도 잘 알고 행했던 사람. 정치를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 특히 힘없는 약자들을 위해서 할 줄 알고 또 하려고 했던 사람.


많은 일들을 겪고, 진보정당의 부침도 겪으면서 진보정당이 국민을 위해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실천했던 사람.


그런 그의 삶이 이 책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읽으면서 노회찬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기보다는 우리 곁에 있었던 우리가 필요로 했던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6411번 버스 연설로 알려진 그의 말. 이 책에 그 연설이 실려 있다. 그가 어떤 정치를 하려고 하는지 잘 알 수 있는 연설. 지금 읽어도 감동적이다. 마치 마친 루터 킹 목사가 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나는 꿈이 있습니다 보다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도 기억할 수 있는 연설을 남겨준 노회찬이 고맙기도 하다.

  

우리가 투명인간 취급했던 사람들을 우리 앞으로 불러내었던 정치인. 하지만 이 연설에서 더 큰 감동을 준 것은 바로 '투명정당'이라는 말이다. 숨어 있는 정당. 정작 자신들이 대변하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데, 절대 앞으로 나서지 않는 그런 정당. 그러면서 자신들의 이익은 절대 놓치지 않는 정당. 그런 정당이 투명정당이다. 


투명인간을 생각해 보라. 우리가 투명인간 취급한다고 했을 때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약자를 의미하지만, 투명인간은 본래 보이지 않는 것을 이용해 이익을 취했던 인물 아닌가. 그러니 노회찬이 말한 투명정당은 바로 그런 투명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 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 분들의 손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431-432쪽)


통렬하다. 통쾌하다. 투명정당, 진보정당이 투명정당이었다면, 그간 다른 정당들은 보이지 않는 정당이 아니라 아예 드러내 놓고 빼앗아가는 정당이었을 것이다. 한데 어떤 정당 정치인도 노회찬처럼 이렇게 반성하지 않았다.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노회찬이 비판한 투명정당보다 더한 정당으로 남아 있다. 그런 정당들의 본질을 알게 해주는 말, 투명정당. 그래서 이 연설은 더 소중하다.


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촌철살인. 노회찬의 말하기였다. 적절한 비유. 그렇다. 비유는 길어지면 안 된다. 그러니 이쯤에서 마치자. 다만, 앞의 말들을 좀 바꾸어서 끝내고자 한다.


"노회찬의 국회의원 당선은 한 인간의 작은 발걸음에 불과하지만 진보정당 전체에서는 위대한 도약이었다"


"노회찬 개인은 죽었지만 진보정당이 죽은 것은 아니다."


그의 마지막 말도 이러했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55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꿈꾸는 나라 지혜의 시대
노회찬 지음 / 창비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회찬.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다.


이제 우리나라 정치에서 볼 수 없는 사람.


자기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했던 사람.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자신에게는 큰일이라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 


더 우리 곁에 있어야 했는데, 할 일이 아직도 많았는데, 자신이 지닌 엄격한 잣대를 굽힐 수 없었던 사람.


그 사람이 생전에 한 강연과 류시민, 이정미의 추도사, 그리고 안재성의 노회찬 약전이 묶여서 책으로 나왔다. 오래 전에. 그러고보니 그가 세상을 떠난 해가 2018년이다. 


노회찬이 세상을 뜬 그 해에 책이 나왔는데, 그때는 노회찬을 잃었다는 생각에 책이 나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책을 발견하고, 망설이지 않았다. 집에 노회찬이 한 말을 모아놓은 책이 한 권쯤 있어야 하지 않겠는 생각에.


'촛불 대, 정치는 우리 손으로'라는 주제로(19쪽) 그가 강연한 내용이다. 이 말을 '우리가 꿈꾸는 나라'로 바꿀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꿈을 꾼다. 단지 꿈만 꾸지 않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움직인다.


직접민주주의를 하기 힘들다고 다들 말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 자체가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집단 생활을 하는 사람이 정치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 직접민주주의가 안 된다면  대의민주주의를 통해서라도 꿈을 실현시키려 한다. 대의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대의'에 있다. 내 의사를 대변해줄 사람. 


내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의사를 대변해서 의회에서 주장할 수 있고, 그 주장을 관철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지금 의회에 있는가? 수많은 비리에도 끄떡하지 않는 사람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 눈에 있는 티끌에만 집중하는 사람들.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소리를 듣는 의원들. 그런 의원들이 자꾸 언론에 언급이 되는 이 현실.


그런 의원들을 보면서 과연 이 의회가 우리의 꿈을 대신 실현시켜 주기는 할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의구심을 갖는다. 


국민 숫자에 비해 의원수가 적다고 의원 정수를 늘려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사람들이 왜 의원 숫자를 늘리는데 반대하겠는가? 이들이 지금까지 해온 행태들을 보면 국민들의 의사를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민들의 의사를 '대변'해서 국회에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국회에서 활동을 한다. 그러니 누가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는 안에 대해서 찬성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노회찬을 다시 떠올린다. 그와 같은 국회의원들이 많았다면, 아마도 국민들은 국민 수에 비해 국회의원이 적다고, 숫자를 늘리자고 먼저 나섰을 것이다.


그가 한 말을 몇 가지 인용해 본다. 지금도 유효한, 아직까지도 우리가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과제들이 아닌가 싶다.


'저는 촛불시대의 과제를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바로 불평등을 평등으로, 불공정을 공정으로,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평화의 정착으로. 이 세가지가 우리에게 떨어진 시대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40쪽)


'촛불이 우리에게 부여한 역사적 과제인 불공정의 해소, 그 첫걸음은 법원과 검찰을 개혁하여 권력층에 대한 봐주기 수사와 처벌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55쪽)


'불평등의 해소란 바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는 것, 일자리에서 차별받지 않고 일한 만큼 제대로 받는 것 그래서 모두가 스스로 노동해서 먹고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66쪽)


'전쟁도 불사하자는 주장은 나라를 망가뜨리자는 것일 뿐 보수하는 이름으로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기억했으면 합니다. 평화란 의견이 갈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 (85쪽)


'대통령에 집중된 권한을 국민과 지방에 나눠주는 일, 이것은 정치개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국민의 권한이 커질수록 정치인들도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02-103쪽)


이 말들, 지금도 우리가 곱씹어봐야 할 말들이다. 아직도 진행 중인 일들이니까. 그가 갔지만, 그가 간 이후로 과연 그의 주장을 얼마나 받아들였는지.


아니,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우리가 못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국민의 권한이 커질수록'이라고 했는데, 오히려 '국민의 권한이 쪼그라들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이 인다.


그가 한 강연집, 그리고 그를 추모하는 글들을 읽으니, 우리나라 현실에서 노회찬 같은 정치인이 있어야 함을, 그가 더욱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안재성이 쓴 노회찬의 약전에서 그가 죽음을 선택한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노회찬을 만난 적은 없지만, 그동안 그가 해왔던 활동들을 생각하며 안재성이 한 이 말에 동의한다.


'나는 그를 이중 잣대를 허용하지 않았던 원칙주의자이자 가장 높은 자존심을 가졌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다. ...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일조차도 극도의 수치감을 느끼는, 수치스럽게 사느니 죽음을 택한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말이다.' (166쪽)


덧글


빅이슈 300호를 읽다가, 빅이슈에 실린 글을 보면서 노회찬 그를 만났다.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 을 기념하여 열린 제 1회 프라이드 갈라에서 첫번째 수상자로 그가 선정되었다는 사실. 올해 3회가 열렸다고 하는데, 그가 살아있었다면 그 자리에 그가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 1회 수상자였음에도 그때는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던 그. 그가 남긴 발자취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이번 빅이슈를 통해서 다시 느끼게 되었다.


관련기사를 링크한다.

서로 달라 행복한 세상, 제1회 프라이드 갈라 개최 - 뉴스프리존 (newsfreezone.co.kr)

(빅이슈 300호. 80쪽 사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3-06-14 13: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타까운 죽음이었죠!ㅠㅠ

kinye91 2023-06-14 16:16   좋아요 2 | URL
정말 안타까운 죽음이었습니다. 요즘 정치판을 보니, 그가 더욱 생각나네요.
 
여자의 재능은 왜 죄가 되었나 - 칼로에서 멘디에타까지, 라틴아메리카 여성 예술가 8인
유화열 지음 / 미술문화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두 여덟 명의 여성 미술가를 소개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여성 미술가. 아는 미술가가 몇 명인지 살펴보라.


마리아 이스키에르도, 티나 모도티, 프리다 칼로, 아나 멘디에타, 리지아 클라크, 아멜리아 펠라에스, 아니타 말피티, 타르실라 두 아마랄


라틴아메리카. 멀다. 우리나라에서 물리적으로 가장 먼 거리에 있는 나라들 아닌가. 게다가 라틴아메리카 예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도 하고.


프리다 칼로, 보르헤스, 마르케스 정도를 알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아니다. 네루다도 있고, 세풀베다도 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라틴아메리카는 멀게 느껴진다. 그들의 예술도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이 책은 라틴아메리카 여성 미술가를 소개하고 있는데, 내게는 프리다 칼로를 제외하고는 처음 만나는 예술가들이다. 언젠가 만난 적이 있더라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예술가들이기도 하고. 


음에 나오는 예술가가 한 말. 이 말이 우리나라 나혜석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참, 시대 한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자신의 예술을 지켜나가는 일이 여성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여자로 태어나 재능을 갖는 것은 범죄다.' (35쪽) -마리아 이스키에르도


범죄가 되면 안 된다. 여자로 태어나 재능을 갖는 것도 당연한 일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시대

가 있었으니...


책은 미술가들을 소개하면서 많은 작품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좋다. 읽으면서 이 책에서 이 두 작품을 만났다는 것에서 만족했다.


다른 작품들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들. 한 작가가 그렸다고 하기에는 상당히 다른 경향의 작품들.


그럼에도 두 작품은 마음 속에 다가온다. 강렬하게 다가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타르실라 두 아마랄이 그린 그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림을 보면 된다. 그러면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이들을 기억하면 된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태어난 곳을 작품에서 살려내려 했던 그들의 노력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예 12년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67
솔로몬 노섭 지음, 원은주 옮김 / 더클래식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예 12년]


노예 해방이 된 지 100년이 넘었다. 흑인 대통령이 미국에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런데 거의 노예 해방 선언이 된 지 100년이 지나서야 겨우 버스에서 흑백 차별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과연 지금 미국에서 흑백 차별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할 수 있나?


흑인들이기때문에 느끼는 위협이 아직도 있지 않을까? 미국이 민주주의의 모범인 나라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경제적 불평등은 말하지 않더라도 피부색에 따른 차이, 출신 국가에 따른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은 흑인을 차별하던 시대에서 얼마나 멀리 왔을까? '헬프'나 '히든 피겨스' 또는 '그린북'같은 영화가 여전히 상영되는 이유는, 흑인 차별이 과거의 일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여전히 보이지 않게 흑인을 차별하는 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책이나 영화를 통해서 자신들이 행하는 일을 반성하자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면으르 보면 과연 미국은 흑인을 차별하던 그 부끄러운 과거를 얼마나 극복했을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그들은 그 부끄러운 과거를 잊고, 새로운 미국을 만들었을까? 미국이 강대국이 된 이유는 흑인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과 기여가 있지 않았을까?


보이지 않는 노동, 보이지 않는 역할, 이것으로 인해 미국 사회는 지금 세계 최강국이 되었고, 그들의 희생을 통해서 올라섰음에도 자신들이 민주주의의 화신인양 행동하고 있다.


자신들이 누리는 민주주의에 흑인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잊고서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미국에서 또 전세계에서 계속 읽혀야 한다. 흑인들이 어떤 차별을 받았는지를, 백인들이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를 기억하기 위해서 많은 일들을 한다. 마찬가지로 노예를 착취하던 시대를 기억하기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해야 한다. 홀로코스트가 몇 해동안 일어난 일이라면 흑인을 노예로 부리고 착취한 시기는 100년을 훌쩍 넘어서기 때문이다.


인간을 피부 색깔만으로 인간이 아닌 동물처럼 대한 역사. 자유인임에도 불구하고 납치되어 노예로 12년을 살아야 했던 솔로몬 노섭. 그가 다시 자유인이 되는 데는 백인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딱 거기까지다.


백인들의 도움은. 이 책을 읽어보면 그가 노예상인들을 고소했지만, 법정에서 그는 진술할 권리도 얻지 못한다. 오로지 백인들만이 진술한다. 그리고 노예상인들이 백인이므로 그들의 진술이 신빙성을 얻어 그들은 처벌받지도 않는다.


분명 납치되어 노예 생활을 12년 동안 했음에도 솔로몬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단지 책을 한 권 내고 유명인사가 되었을 뿐이다.


그것도 뒤에 실린 약력을 보면 더 기가 막힌다. 그후 그의 삶은 알려지지 않았다. 실종되었다고 하는데... 자유인으로 태어나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흑인이지만, 그는 언제든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는 모든 백인이 다 악인은 아니라고 한다. 착한 주인도 있었다고 쓰여 있다. 당연하다. 흑인을 차별하는 시대에 자유인에서 노예로, 다시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돌아온 그가 책을 쓸 때 과연 백인이 모두 나쁘다고 쓸 수 있을까?


노예를 인정하지 않는 북부 미국이라고 하지만, 그 곳에서도 흑인은 백인과 같은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책에 모든 백인은 나쁘다라고 쓴다면 과연 그 책이 나올 수 있었을까?


물론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노예제를 인정하고 노예를 부리는 틀 안에서 착하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단지 노예를 인간적으로 대해줘서? 그것이 인간적으로 대해줬다는 것인가?


그들이 노예를 인간으로 생각했다면, 이 책에 나오는 백인 배스처럼 노예제를 반대해야 한다. 노예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대우를 받아야 했던 흑인들. 그들을 거의 100년 넘게 노예로 부렸던 미국인들... 그들은 과거를 반성하고,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하고 있는지, 과연 지금의 미국은 노예제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이렇게 눈에 보이는 노예제도 있지만, 현대 세계는 보이지 않는 무엇으로 사람들을 옭아매지 않나. 옴짝달싹 못하게 사람들을 억압하는 제도. 그런 제도를 인식하고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나.


이 책은 단지 과거 노예제의 문제점만을 말하고 있는 책이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그 시대의 노예제처럼 사람을 힘들게 하고 착취하는 제도가 있다면 그것을 찾아 고치려는 노력을 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그야말로 덧붙이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건 바로잡아야 한다. 20쪽. '쿼드룬'이라는 말에 대해 옮긴이 주가 달려 있는데...

쿼드룬(흑백 혼혈인 물라토와 흑인 사이에서 태어나 흑인의 피가 사분의 일 섞인 인종-옮긴이)라고 되어 있다. 

단순히 생각해 보자. 물라토(흑+백)+흑인(흑+흑)이라면 흑인의 피가 사분의 삼이다. 그래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물라토와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흑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흑인의 피가 사분의 일이 섞였다는 계산이 된다.

내가 읽은 책이 2014년 초판 1쇄 책이니, 아마 그 후 판본에서는 수정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하수 2023-02-02 15: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읽고 있는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도 미국 흑인 노예 스토리네요 그들이 과연 인간이기나 했는지 진정 묻고 싶네요... 보다가 가슴이 답답해져서 진도가 잘 안나가요. 그래도 결국 자유를 찾지 않을까 희망을 품고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kinye91 2023-02-02 17:21   좋아요 1 | URL
과거 노예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사람으로 인정했다면 그렇게 대우할 수가 없었겠죠. 이 책은 노섭이란 사람의 경험담인데, 지금 미국을 보면 그때로부터 흑인들이 얼마나 나아진 생활을 하는지 의구심을 갖게 돼요. 예전 흑인들의 삶을 다룬 책들을 읽으면 가슴이 답답해지죠. 그래도 읽어야 기억하고, 기억해야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오웰의 장미 - 위기의 시대에 기쁨으로 저항하는 법
리베카 솔닛 지음, 최애리 옮김 / 반비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에릭 아서 블레어(39쪽)에서 조지 오웰로


조지 오웰은 잘 알려진 작가다. 두 소설이 특히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하나는 [동물농장] 또다른 하나는 [1984]. 이 소설들 외에도 [카탈로니아 찬가]도 많이 읽혔다. 그리고 [위건 부두로 가는 길], [나는 왜 쓰는가] 등도 제법 읽혔다고 할 수 있고.


전체주의에 반대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글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 작가. 그 정도다. 오웰은.


오웰 본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 역시 알지 못했다. 사실 알 필요도 없다. 나에게는 에릭 아서 블레어란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즉, 작가 조지 오웰은 존재해도, 그가 태어나서 자신의 집안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불리는 에릭 블레어란 이름은 내겐 존재하지 않는다.


한 집안의 작가가 아니라 그는 세계의 작가,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작가로 존재한다. 오웰이라는 이름이 영국에 있는 오웰 강에서 따왔다는 사실도, 또 오웰적인(Orwellian)이라는 말이 있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오웰 작품을 꽤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오웰의 한 면만을 알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 책 끝부분에 실린 옮긴이의 말이 내 감정을 대변한다.


‘이전에 오웰은‘시대의 양심’이요,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위대한 작가라는 데 동의하기는 해도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 작가였다. 그런데 이번 작업을 통해 알게 된 오웰은 감동적이었다.’(377-378쪽)


오웰을 다시 읽어보고 싶게 만든 책이라는 점에 나도 동의한다.


2. 베카 솔닛


한마디로 믿음이 가는 작가다. 오웰의 글쓰기와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글쓰기는 정치적이다. 솔닛 역시 마찬가지다. 솔닛의 글은 정치적이다. 우리 사회와 떨어지지 않는다.


솔닛은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한다. 단순히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를 바꾸고자 한다. 그런 사회 변화를 이루는데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언어를 통해서 거짓과 기만이 자리를 잡기도 하고, 언어를 통해서 거짓과 기만이 밝혀지기도 한다. 그래서 전체주의는 늘 언어를 독점하려고 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는 목적이 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목적. 그 언어 이면에 담겨 있는 목적을 알아채고 그것을 깨뜨리는 글쓰기를 하는 작가가 바로 솔닛이다.


그렇다고 솔닛 글쓰기가 일방적으로 정치적이지는 않다. 단순한 구호로는 화려하게 수식되어 감춰진 허위를 밝혀낼 수 없다. 밝혀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글은 우선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영향을 주기 위해선 읽혀야 한다. 글 자체에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사람들이 읽을 만하다고 여겨야 한다. 그런 글쓰기, 솔닛은 하고 있다.

솔닛은 말한다. 오웰이 그런 작업을 했다고.


3. ‘한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


이 책은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때 한 작가는 조지 오웰이다. 그리고 그가 심은 장미는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우리가 흔히 ‘빵과 장미’라고 할 때 빵이 단순한 빵이 아니고, 장미가 장미를 넘어선다는 점을 알고 있듯이.


물론 오웰이 심은 식물은 장미다. 그리고 그는 그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또 식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글을 쓴다.


세계가 격변에 처해 있을 때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기쁨을 찾아낸다.


이 기쁨,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삶을 지속하게 하는 요소다. 우리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즐긴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듯이, 삶에는 아름다움이 따른다. 이 아름다움이 기쁨을 불러오기도 하고, 삶의 희망을 불러오기도 한다.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인 [1984]를 다시 읽으면서 솔닛은 이 소설에서 오웰이 표현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읽을수록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감탄한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소설이다. 좋은 소설이다. 의미가 하나만 담겨 있지 않은, 수많은 의미로 해석이 되는 소설들. 솔닛은 리좀이라는 말을 빌려온다. 어디로 벋어갈지 알 수 없는 상태. 그러나 많은 곳으로 분기되어 나가지만, 그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게 되는 존재들.


오웰 역시 마찬가지다. 오웰은 전체주의를 비판한 소설가로만 규정될 수 없다. 그는 사람이 기쁨을 얻으면서 살아가는 세상을 원했다. 획일적인 사회,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도 규제하는, 그렇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해야지 하는 규정이 많은 사회는 바라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세상, 정치적인 올바름을 추구하면서도, 개인이 지닌 성향은 인정하는, 그러한 삶이 바로 사람들의 삶이라고 한 사람.


그래서 솔닛은 이 책을 쓰면서 ‘한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로 시작한다. 이미 오웰에게서 우리는 빵을 너무도 많이 얻었으므로. 오웰에게도 장미가 있음을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보여준다.


어느 곳을 펼쳐도 밑줄을 긋고 싶은 구절들이 있다. 가령 이런 구절들.


‘거짓말은 앎과 연결의 능력을 잠식한다. 앎을 차단하거나 왜곡함으로써, 또는 거짓을 유포함으로써, 또는 거짓을 유포함으로써 거짓말쟁이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박탈한다. 정확한 정보는 공적이고 정치적인 삶에 참여하기 위해,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자기 주위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원칙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상황을 알기 위해,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수적인데 말이다. 거짓말쟁이는 자신이 아는 것과 거짓말의 희생자가 아는 것 사이에 쐐기를 박는다.’ (296쪽)


소위 말하는 황색언론이 하는 일. 그리고 그런 황색언론을 부추기고 지원하는 일을 누가 하는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정치인들. 귀는 막고 입만 열고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거짓말쟁이라 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들을 전체주의로 가고 있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행복과 기쁨의 차이는 중요하다. 행복은 마치 끝없는 햇살처럼 지속적인 상태로 상상되는 데 비해, 기쁨은 번개처럼 번득이는 것이다. 행복은 난관이나 불화를 피하는 질서 잡힌 삶을 요구하는 듯한 데 비해, 기쁨은 어디서든 불현듯 나타날 수 있다.(72쪽) ... 행복이 의존을 유도하는 마취제로 사용되는 반면, 기쁨은 사람들이 그 의존성에서 탈피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것을 행하고 느끼는 능력의 성장이다.’(칼라 버그먼과 닉 몽고메리의 글을 인용. 73쪽)


기쁨은 이렇게 어떤 순간에도 느낄 수 있다. 그런 기쁨을 느끼는 삶을 충만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오웰이 추구한 삶도 행복하고 안락하게 오래 사는 삶이 아니라, 삶의 순간 순간 기쁨을 느끼는 충만한 삶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는 힘든 상황에서도 장미를 심는다.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다.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적인 면에서 손을 떼었느냐면 그것은 아니다. 그는 정치와 기쁨(아름다움)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함께 존재했다. 솔닛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면이 바로 그것이다.


‘나무 심기를 대부분의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오래가는 행위로 제안하면서, 그는 미래에 대해, 어떻게 하면 미래에 기여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 장미를 심은 남자는 그것이 또한 미래의 편에서는 일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05쪽)


이런 말을 통해서 솔닛의 오웰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오웰의 주목할 만한 성과는 전체주의가 자유와 인권뿐 아니라 언어와 의식에까지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다른 누구도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적시하고 묘사한 것이다. 그의 작업이 너무나 강한 설득력을 지녔으므로, 그의 마지막 작품은 현재까지도 그림자를, 아니 봉화의 불빛을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그 성과를 더욱 풍부하고 심오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작업에 불을 지핀 연료, 즉 그의 이상주의와 헌신이다. 그가 소중히 여기고 욕망했던 것, 욕망 그 자체와 즐거움과 기쁨에 대한 긍정적 평가, 그리고 그것들이야말로 전체주의 국가와 영혼을 파괴하는 그 침식력에 반대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다.

그가 한 일은 이제 우리 각 사람의 일이다. 그건 항상 그랬다.’(359-360쪽)


이 책의 마지막 문장. 솔닛이 하는 말.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쓸데없는 걱정


설마, 이 책을 읽은 무수한 정치인들이 장미를 심지는 않겠지. 그들은 지금도 무슨 건물 앞에, 공원에 자신의 이름을 단 기념식수를 하고 있지 않은가. 오웰이 행한 방식과는 반대로. 그들은 미래의 편에 서기 위해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권력을 강조하기 위해서 나무를 심는다. 


아니, 미래에도 자신들이 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리기 위해서 심는다고나 할까. 이들의 나무심기는 그래서 오웰의 장미 심기와 다르다. 그걸 같다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나무를 심는 행위는 좋다. 그 나무는 적어도 환경 오염을 시키지는 않을테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3-02-01 11: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나의 힘이 미약하다고 느끼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때 한가지 일을 꾸준히 해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레베카 솔닛의 글 안에서 오웰과 장미 나름 아름다운 조합이란 생각이 드네요^^

kinye91 2023-02-01 12:33   좋아요 3 | URL
앞이 보아지 않는다고 여길 때 오웰이 장미를 심고 돌보았듯이 무언가를 한다면 좋겠단 생각을 했어요. 솔닛의 글이 참 좋은데 이 책도 아주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