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만처럼 - 나일론에서 쏘아올린 섬유 강국의 신화 대한민국을 바꾼 경제거인 시리즈 8
박시온 지음, 나공묵 감수 / FKI미디어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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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KI에서 청소년을 위한 기업인 위인전을 계속 발간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번에 한화그룹 창업자 김종희씨를 다룬 전기를 읽었는데요, 이번에는 코오롱그룹 창업자 이원만씨를 주인공으로 한 이 책을 일게 되었습니다.


코오롱그룹이라고 하면 저를 포함해서 요즘 세대들은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기업의 지명도가 상당했고, 이 책에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라이벌 선경그룹이 MBC 장학퀴즈를 후원할 때 이 기업은 KBS의 다른 퀴즈프로그램(성우 배한성씨 진행)을 스폰싱했고, 1990년대초 한국이동통신이 당시 대통령 사돈 가문이었던 모 대기업으로 넘어갈 때, 017을 식별번호로 하는 이동통신 사업자 컨소시엄에 포항제철(현 포스코그룹)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현재는 많이 격차가 벌어진 상태이지만, 재계의 굴지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한, 섬유화학 분야에서 한국인의 기초 생활 품목 보급을 담당한, 국가의 기간 산업을 담당하여 오늘날의 무역대국 코리아를 일궈 내는 데에 한몫한 엄청난 기업이라는 뜻입니다.


현재는 이 코오롱그룹이, 미국 듀퐁사와의 큰 소송에 걸려 있습니다. 최첨단 소재의 특허와 미국 내 판매유통권을 두고, 기업의 생사를 건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다른 기업들이 비업무용 부동산 투기나 손쉬운 사치성, 향락성 소비재 시장의 개척에만 몰 두하여 떳떳지 못한 축재에만 몰두할 때, 코오롱 기업은 국민의 기초 생활 품목과 첨단 벤처 업종에만 역량을 전념하여, 남들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묵묵히 제 길을 걸으며 사업보국의 길을 걸어 온 거죠. 이런 걸 보면 우리 한국인은 참다운 기여와 가치를 인정하는 데에 인색하다는 생각입니다. 금전적 보상이 아니라 해도 무형의 평판이라는 대상(代償)을 고생한 이들에게 부여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러면 음지에서 명분 하나로 고생할 이가 누가 있을까 싶기만 합니다.


이 책은 그 코오롱기업의 창업주 이원만의 일대기를 다룬 내용입니다. 이원만은 1904년생이니, 김일성보다 8년 연상이고, 박정희보다 13살 더 먹은 나이였습니다. 이원만이 태어났을 무렵이면, 성숙기에 막 접어든 일본 제국주의는 10년 전 청 제국의 핵심전력을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궤멸시키면서 동아시아 핵심 지역의 이권을 여럿 확보한 상태였겠죠? 그를 발판으로, 이번에는 전세계를 무대로 하여 영국과 곳곳에서 패권 다툼을 벌이는 초열강 러시아와 한판 싸움을 막 열고 있을 때입니다. 이 전쟁에서, 역시 세계를 충격과 경악에 몰아 넣은, 대한해협에서의 극적인 해전을 계기로, 최강 러시아의 예봉을 무너뜨린 채 동아시아의 절대 강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식민지에서 출생한 이원만은, 이런 시국에서 제아무리 강단있고 의식이 투철했다고는 하나, 그의 비전과 포부를 실현하는 기반을 조선 국내에서 마련할 수는 없었습니다. 욱일승천 기세의 일본으로 건너 가서, 기술도 배우고 사업 밑천도 장만하는 길밖에 없었죠.


식민지 출신은 변변한 셋방 한 칸 얻기 어려운 상황에서, 취업은 고사하고 단단한 일자리 하나 잡기가 쉽지 않은 게 현지의 이원만 청년이 직면한 처지였습니다. 이 젊은이의 가장 빼어난 자질은, 역경에 직면해서도 목표한 바를 포기할 줄 모르는 그 불굴의 의지에 있었습니다. 그는, 받아주지 않으려 하는 일본인들의 텃세와 멸시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원하는 직장의 문을 노크하고 기어이 노른자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포스트를 따 냅니다. 아무래도 청소년전기라는 한계가 있으므로, 다 소의 미화와 비약이 없지는 않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현지의 일인들이 짐짓 취업의 문을 닫는 척 하면서, 요즘말로 3D 포스트에 전략적으로 조선인 출신을 몰아넣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원만은 expendable 신세로 떨어지지 않고, 그 회사에서 용케 핵심 기술을 배우고 또 약게 그 정수를 뽑아내어, 장래의 생존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이 놀라웠던 겁니다. 이원만은 일단 허점이 보인다 싶으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식으로 진입 장벽을 허물었고, 그 안에서 다시 힘의 한계에 부딪혔다 싶으면 살짝 잔꾀(제가 보기에는,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조선에 돌아가 큰 말썽을 만들어 당신을 곤경에 몰아 넣겠다."고 일본인을 몰아 붙인 건, 결국 대구의 지역 유지였던 친척 형 이원기의 뒷배를 의식한 점도 적지 않았다고 봅니다)도 부려 가면서, 결국은 주위 모든 이들을 설복하기에 이르렀던 거죠.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끈적한 생존 근성을 배울 필요가 있는 대목으로 생각합니다.


아무튼 어언 40대에 접어든 이원만은, 일본에서 제법 큰 성공을 거두기에 이르고(이런 경우가 아주 드문 건 아닙니다. 나이로는 이원만의 아들뻘인 롯데 창업주 신격호씨도 이런 케이스죠), 패전 직전 집중 폭격을 받았던 오사카가 폐허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원만의 자산만은 멀쩡하게 보호되는 행운이 생깁니다. 결국 전쟁은 일본의 패망으로 귀결하고, 조선 땅에는 해방이 찾아 오죠. 본디 정치를 했던 가문이기도 해서, 일본 현지에서 큰 재산을 모은 사업가라는 자랑스러운 경력도 생긴 그는 신생 조국에서 유력 정당 한민당(책에는 안 나오지만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 등이 그 설립 주체였습니다)의 공천을 받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의 다소 파격적인 언행은 선거구민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선거라기보다 테러에 가까운 험악한 분위기에 밀려 결국은 석패하기에 이르죠. 낙담한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붉은여왕의 법칙이 이 당시에도 통용되지 않은 게 아니라서, 그저 현재상태에 안주할 수 있었던 이원만이었으나, NYT에서 소개하는 최첨단 신소재에 눈이 번쩍 뜨이게 됩니다. 그게 바로 나일론이었습니다. 이에 주목한 이원만은 대 뜸 이 나일론에 손을 뻗쳐, 이미 단단한 기반의 사업은 더욱 큰 확장을 이루게 되죠. 그런데 이원만은 여기서 남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개인의 장사가 잘되는 건 좋으나, 그 과정에서 외화 유출이 많다는 게 개탄스러웠던 거죠. "저 stretch絲 하나만 우리 기술로 직조 가능해도, 아까운 달러가 출혈하는 일은 없을 것 아닌가?" 이 책에는 안 나와 있습니다만, 지금 코오롱그룹이 겪고 있는 고초도 어찌 보면 창업자의 이 고지식한 경영 이념을 고수한 결과입니다. 좀 국민들이 이런 기업에는 성원을 보내 줘야 합니다. 땅투기나 하고 설탕 밀수나 하던 악덕 사업자는 결국 "개처럼 벌어도 정승처럼 잘 쓰는" 복을 받고, 예전에도 굳이 편한 벌이 다 내팽개치고 험지에서 국가 건설의 일념으로 어렵게 사업하던 역군은 지금도 그 후손들조차 고생길에서 여전히 악전고투하는 중입니다, 이래 가지고 나라에 정의가 선다 할 수 있겠습니까?


1960년대 코오롱그룹이 한국에 나일론을 성공적으로 공급하지 못했으면, 한국인이 언제 의식주 최소의 욕구를 해결하고 빈곤선을 탈피했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도 코오롱은 그저 중소기업 레벨에 머물러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에 속지 말고,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진정한 공로자, 은인이 누구인지 좀 생각도 하면서 사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푼도 안되는 정치선동 프로파간다만 외우고 다닐 게 아니라 말이죠.

 

이 책은 같은 시리즈의 다른 권에 비해 내용이 재미있다는 게 특징이에요. 고 이원만 회장이 참 재미있는 캐릭터여서 일화가 많이 남은 이유도 있겠으나, 집필자가 필력이 빼어나서 같은 이야기라도 재미있게 구성하는 능력이 탁월한 덕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론 앞으로 이 시리즈는 이 박시온씨가 계속 맡앗으면 하는 바람도 있네요.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읽기에 재미있는 책이 대중적 보급도 수월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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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 - 어느 은둔자의 고백
리즈 무어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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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평면 위에 최소한의 숫자만으로, 흔들리지 않는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는 삼발이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삼위일체의 교의를 가르쳐 왔고, 우리의 단군 신화에도 환인, 환웅, 단군의 3대가 등장합니다. 둘만으로도 외롭고, 셋이 있어 줘야 최소의 틀이 생깁니다.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는 요즘이지만, 커플만으로도 왠지 허전하고, 가족이란 모름지기 자식이라는 한 명의 성원이 더 있어 줘야 하죠.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그 원심- 구심의 상호 균형이 깨어져, 각각의 안정된 삶도 자칫 붕괴할 수 있는 위험이 생깁니다.


은둔자의 고백이라는 부제 때문에, 저는 상당히 (본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무거운 내용의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그 은둔자는, 주로 절제 못 하는 식욕 때문에, 거동도 불편하고 수치심으로 밖에도 못 나가는 딱한 처지입니다. 이런 분들은 보통 성격에 문제가 있는 수가 많고, 특히나 그간 많은 소설(특히 스릴러)에서라면, 처참하게 희생당하는 처지나, 아니면 그 반대로 가해자에 놓이는 걸 종종 봤습니다. 아니라고 해도, 결국 자기 혐오와 연민을 이기지 못하고 파멸로 치닫는다든가 하는 설정을요.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게 전개됩니다. 은둔자는 성격 이상자는 아니고, 빼어난 지성을 지니지는 못했으나, 평균을 상회하는 지성과 자기 성찰력, 교직 경력, 그리고 넉넉한 재산을 가진 중년의 캐릭터입니다. 다만 그가 굴하는 건 식욕쪽입니다. 식욕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그의 건전한 판단력과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그는 대인 접촉을 대단히 꺼리는 편이나, 이에는 대체로 자신의 감정에 대한 우려 못지 않게 타인의 감정에 대한 배려가 더 크게 작용합니다. 돈을 지불하고 가사 정리를 맡기는 출장 홈메이드 인력에조차, 그는 별스럽다 싶을 정도의 조심과 유의를 기울입니다.


그는 비대한 체구 때문에 상당한 열등감을 가지는 듯도 보이입니다. 예컨대 켈의 사진을 보고 홈메이드 욜란다가 "누구에요?"라고 묻자, "아들"이라고 대답하려는 걸 억지로 누르고 조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죠(물론 이 장면은 중반 이후로 가면서 대단한 반전의 복선이 됩니다만). "아들"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는 건 본능적 친밀감과 관계 회복에의 욕구, "조카"라고 타협적으로 수위를 낮춰 대답하는 건 상대 욜란다에 대한 배려("네 선입견을 굳이 배반하고 싶지 않아.")의 산물입니다. 욜란다는 켈보다 두 살이 많은,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아마도) 불법 이민자 출신의 혈혈단신 처녀입니다. 청소는 잘할지 모르지만, 그 외의 서비스 매너는 미숙련 인력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 취약 계층입니다. 이런 사람에까지 주인공(아서)이 순진한 애착을 보이는 건, 순전히 관계(relationship)에의 욕구, 가족 회귀 본능에 기인합니다. 그 는 욜란다를 볼 때마다, "저 아이를 입양하면 어떨까?"같은 생각을 끊임 없이 떠올립니다. 관계의 본격적 상실 이전에도 그는 비만의 징후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재앙으로 귀결한 건 사람들과의 유리가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가족, 가족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한편 저 멀리, 아서와 오래 전 잠시의 인연을 맺었으나 타향에서 살고 있는 모자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많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외국은 우리 나라와 달리 이런 예가 드문데도) 하나뿐인 아들의 교육에 강박적으로 집착합니다. 아들은 선천적으로 머리가 둔하다기보다, 이런 어머니에 대한 반작용 때문인지 공부를 싫어합니다. 대신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지역에서 촉망 받는 야구 선수였습니다. 이미 14세부터 로컬지에 이름이 나서, 인터넷에 그를 검색하면 사진이 나올 정도입니다. 결정적 시함에서 트리플 플레이(플라이아웃-3루 주자 태그아웃- 2루 주자 아웃)의 짜릿한 경험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 절대 긍지를 놓지 않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그는 언제나 스타였고, 동급 여학생들의 시선을 한몸에 모으는 주목 받는 인생이었습니다. 엄마는 이런 아들의 진학(엄마의 관심사는, 정확히 말하면 "교육"보다 "진학, 학벌"에 가깝습니다)을 위해 없는 돈을 들여 (우리식으로 말하면) 학군이 나은 동네로 이사 오지만, 그는 순탄히 적응하지 못합니다. 소년 켈(아빠 이름을 땄다는)은 언제나 어머니에 대한 불안과 불만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데, 이는 엄마에 대한 정면의 반감이라기보다,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허기가 더 크게 작용한 듯합니다.


소년의 엄마는, 존재 깊은 곳의 근원적 불안을 떨치지 못합니다. 살아오면서 받은 많은 상처와, 태생적으로 보유한 성격적 결함이, 일종의 네크로필리아로 수렴하는 모습입니다. 엄마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며 아서(은둔자 주인공)에게 오랜 인연을 환기하며 아들의 사교육을 촉탁하고, 그저 가족관계가 그리웠을 뿐이었던 아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락합니다. 사진을 보니 잘생겼고("나 같은 이에게서 이런 아들이 나올 수야 없지!"), 자동응답기에 남겨진 음성을 살짝 들어보니 생각보다 더 앳된 목소리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만나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봉사나 배려를 베풀고 싶습니다.


이 소설은 은둔자의 고백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나, 시점의 전환은 장마다 교차되고, 마지막 장에서 드디어 두 화자가 만나면서 그 통일이 이뤄집니다. 아서의 독백, 그리고 소년 켈의 독백이 번갈아 등장하는 식입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분명히 ㅗ속 집단으로부터 경원될 소지를 안고 있으면서도, 결정적 이유 하나 때문에 이른바 "왕따" 신세로 추락하지는 않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둘은 지향하는 바도 같습니다. 아서는 아들(혹은 자식)을 원하고, 켈은 아버지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소년의 어머니는? 그녀가 원하는 건 무엇이었을까요? 자식의 출세, 학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소설의 주제입니다. 소설은 일종의 비극적 결말을 예비하지만, 남은 인물들은 새로운 출발과 희망의 맹아를 보게 됩니다. 그 과실은 거저 다가오지 않고, 우리에게 나름의 부담, 즉 무게(heft)로 다가옵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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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 야구의 전설 한국시리즈
배정섭 지음 / 보누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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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책을 펼쳤을 때는, 선진적이고 과학적,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빠질 것 없는 구단 운영을 하는 삼성 라이온즈 프런트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아니었고,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부터 한국 야구팬과 영욕, 고락을 함께해 온 삼성 라이온즈 구단에 대한 팩트북이었습니다. 삼성 라이온즈의 팬이 아닌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웠지만, 그런 느낌도 잠시일 뿐, 340여 페이지가 언 제 다 넘어갔는지 모를 만큼, 어언 30여년에 달하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의 가장 중요한 주역 중 하나인 이 구단의 갖가지 사연과 기록이 빼곡이 담겨 있어서, 그 출발이 미미했던(이 책에는 1982년 개막전이, 대통령이 시구를 하는 등 화제의 초점이 되어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 기록 영상이 남아 있는 걸 보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개막전의 극적인 승부를 기점으로,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았지만요) 한국야구가 이만큼이나 풍성하고 알찬 역사를 일궜는지에 대해 감회가 북받쳐 오르는 느낌에도 푹 젖을 만했구요. 일부 비뚤어진 팬들을 제외한다면, 최소한 야구만큼은 모든 팬들이 다 전체 구단의 팬입니다. 어느 팀만 광적으로 좋아하여 타 팀을 증오하는 한심하고 어리석은 행태(이런 자는 야구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제 열등감 좌절감을 해소하려고 야구를 이용하는 거죠)를 보이지 않고, 우선 순위에 따라 고루 애정을 분배하는 게 바로 우리 성숙한 야구팬들의 태도입니다. 그런 까닭에, 삼성 팬이 아닌 저도 이 책을 너무너무 재이있게 읽었습니다. 어떤 대목에서는 "맞아, 그랬었지." 하고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다른 대목에서는 "그런 일도 있었구나."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습니다. 삼성 구간에 그렇게나 레전드가 많았구나, 하는 당연한 깨달음이 들기도 했고, 당시만 해도 우리의 감정을 그렇게나 뜨겁게 달구던 그 숱한 스타들, 알짜배기 조연들이 까맣게 잊혀진 걸 알고는 무상함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특정 구단에 대한 선호를 떠나, 야구팬이라면 페이지페이지마다의 공감을 안 보낼 수 없는, 빼곡한 팩트로 가득합니다. 대신, 시대순으로 정리되어 있다든가, 주제별로 촘촘히 목차가 짜여져있다든가 하는 점에서는, 아쉬운 면이 있습니다. 야구에 대해 웬만큼 아는 입장에서 봐야 책이 눈에 들어올 것이며, 잘 모르는 입장에서는 "이런 책도 있나?"하고 쉽사리 접근이 안 될 것 같다는 게 단점입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 웬만큼 아는 입장이라면 책이 정말 술술 넘어갑니다. 언제 다 읽었는지 모를 만큼요. 되풀이되는 이야기지만, 한국 프로야구의 팬이라면, 그 사람은 곧 9개 구단 모두의 팬입니다. 타팬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팀도 아닌 삼성 이야기가 남 얘기처럼 낯설 수는 없습니다. 그 팀은 "나의 팀"과도 일 년에 17~19 게임을 치르면서, 지긋지긋하게 괴롭히거나 아주 압도를 해 버린 무적의 함대였습니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죠.


이 책은 영욕의 역사를 빠지지 않고 다 담았다는 점에서, 삼성 라이온즈 구단이 펴 내는 공식 홍보 책자와 크게 다릅니다. 우리도 다 알다시피, 삼성은 초창기부터 강자였을 뿐 어느 한 시기도 언더독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무서운 팀이었으나, 야구 출범 20년이 지나도록 한국시리즈 우승을 해 본 적이 없는 아픔을 갖고 있었죠. 이 책은 프로야구 첫 10년기, 20년기에 이 팀이 가졌던 해태 트라우마, 20년기의 말에 겪었던 현대 유니콘즈 징크스에 대해, 제법 긴 분량을 두고 서술해 줍니다. 나이 든 삼팬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 녀석들은 정신상태가 썩어서 안 돼!"하는 (애정어린) 개탄이 여기저기서 나왔다고 합니다. 야구팬들은 이리 신사적이라서 좋습니다. 결코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팀을 질타(말이 그렇다뿐, 거의 자식을 향하다시피한 애정입니다)하는 쪽으로 그 열정을 발산합니다. 팀이 졸전을 펼치다 지면 자기 팀 홈페이지에 몰려가 성토를 하고, 때로는 자기 팀 감독 가는 길 막아서고 청문회를 하자고 덤비는 게 한국 야구팬들입니다. 이 책에도 다분히 반성의 의도에서 실려 있긴 하지만, 해태 구단 버스 방화 사건 같은 것은 그 예전에나 일어났던 사건일 뿐입니다. 되풀이하지만, 일부 몰지각한 자들을 제외한다면, 어느 스포츠보다 신사적이고 이지적이며, 그러면서도 열정적인 태도로 경기를 즐길 줄 아는 분들이 한국야구팬들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응원팀을 떠나 누가 읽어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책입니다.


이 책에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으나, 사실 삼성 라이온즈 구단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1987년(박영길 감독) 최강 전력을 구비하고도(이 책에 나와 있는 바를 인용하자면, 전무후무-지금까지도 없습니다-의 팀타율 3할을 기록한 시즌이었죠), 우승에 실패한 이래, 또 시즌 4위에 그쳤으나 빙그레, 해태를 연파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돌풍(삼성 같은 강팀에 이 단어는 사실 어울리지 않습니다. 돌풍은, 약팀이 예상치 못하게 일으키는 거니까요)을 일으켰던 1990년시즌의 또다른 실패(이건희 당시 구단주는 이 충격으로, 정동진 감독을 바로 해임해 버립니다. 상대가 당시만 해도 재계 라이벌이었던 LG였다는 팩터가 크게 작용했습니다)를 거친, 그 직후였습니다. 1991~92년은, 지금은 야신으로까지 추앙받는 김성근 감독 지휘 하에 팀이 놓였던 시기인데, 이때 삼성은 최악의 시기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책은 이 시기를 자주 다루고 있진 않은데, 다만 재일동포 에이스 김성길(김성근 감독이 영입한 선수입니다)의 활약에서 짧게 언급되곤 있습니다. 1991년 준플레이오프에서 너무 혹사를 당 한 탓에, 이 선수는 다음해부터 재기불능의 부상으로 결국 은퇴하게 되죠. 예의상 언급은 안 하지만, 김성근에게도 이런 흑역사는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 책에도 이후 삼성에서 톡톡히 제 몫을 해 준 김현욱 같은 선수가 잠시 나오는데요, 김성근 감독은 저 김성길 운용의 실패를 거울삼아. 혹사를 시키되 선수에 최소한으로 무리가 가는 방법을 개발하여, 이 김현욱을 탑 레벨의 투수로 키우는 일(1996년 이후 쌍방울 시절)에 성공합니다. 야신도 처음부터 야신이었던 게 아니라, 이런 시련과 시행착오의 시절이 다 있었던 거죠. 이 책은 김성근의 삼성 시절은 그리 길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나이 어린 팬들이라면, 야신과 최고의 팀이 한솥밥을 먹던 시절이 다 있었나 하는 생각에 깜짝 놀랄 만합니다. 그 역사가 그리 자랑스럽지 못한 탓에 쉽게 잊혀졌을 뿐이죠.


이 책은 삼성의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들에 대해, 드라이하면서도 그때의 감동이 잘 살아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삼성 팬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만한, 이승엽의 동점 스리런과 마해영의 끝내기로 삼성이 최초 한국시리즈 패권을 잡았던 그 시즌에 대해, 자세하고 정확한 서술이 실려 있습니다. 또, 비록 기록에 남지는 않았으나 우리 모두가 기억해 줄만한, 배영수 선수의 사실상 퍼펙트 게임, 그리고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 박충식의 15이닝 완투 무승부 같은 큰 이벤트가, 역시 감동적으로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박충식은 광주일고 출신의 고졸 에이스였는데, 고향팀 해태의 그 기라성 같은 에이스(문희수, 선동렬)를 상대로 그만큼 놀라운 투혼을 보인 모습, 아직도 많은 삼팬들께서 기억하실 겁니다. 삼팬들이 또 잊을 수 없는 선수가 강동우입니다. 외야 수비 중 펜스에 부딪혀 이후 몇 년을 뛸 수 없었던 상 에 시달렸으나, 삼성 구단은 그를 냉혹하게 버립니다. 삼성은 이만수, 김시진, 장효조에 대해서도 말년에 후한 대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과거의 일이고, 현재 모든 면에서 최고의 레벨로 자리한 이 구단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책에는, 근세 삼성의 레전드이자 걸출의 슈퍼스타인 양준혁에 대해(그는 진정 천부의 조건을 타고난 "신적인" 선수였습니다) 후한 은퇴식을 베풀어 준 일도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중고신인 이동수의 기억도 많은 분들이 잊었을 수 있는데, 이 책에 다정다감한 서술로 우리에게 환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웃지 못할 해프닝 중에 최초 몰수게임사건, 부정 배트 의혹 사건 둘이 나와 있는데요, 전자는 MBC 청룡, 후자는 LG 트윈스(전자를 승계한)가 상대팀이었습니다. 이 두 팀이 거의 10년을 두고 좀처럼  보기 드문 사건으로 악연을 이어 갔고, 두 사건 모두에 백인천 감독이 그 주역(?)이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책에는 간혹 오류가 있습니다. 배영수 투수는 지역 명문 경북고 출신인데, 서울의 경복고로 잘못 쓰여진 대목이 있고요. p45 중간쯤에 보면 "배영섭는" "배영섭은" 같은 오타가 있습니다. p85에 보면 김용철 감독이라고 나와 있으나 , 당시 김용철씨는 김명성 감독의 급서(急逝)로 감독대행직에 올랐을 뿐, 이후에도 감독직을 맡은 적이 없습니다. 배영수 선수가 빈볼 투척으로 인해 "배열사"라는 별명을 얻은 일은 책 전체에 두 번이나 다뤄지는데, 지면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p58에서, 전기, 후기 리그를 두고 "양대 리그"라는 표현을 쓴 건 어색합니다. 삼성의 원년에 가장 두드러진 유격수(이 때문에 서정환이 트레이드를 요청한 사실은 이 책에 잘 나와 있죠)로 활약한 오대석의, 한국 프로야구 최초 사이클링히트 기록 사실이 이 책에 보이지 않는 것도 좀 의외였습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화제였던 자잘한 에피소드들이 깨알처럼 소개된 건 이 책만의 매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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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카, 럭비처럼! - 절대긍정의 힘
김익철 지음 / 세림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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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이 무슨 뜻인지 고개가 좀 갸웃해졌습니다.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은, 전통 춤 양식으로 "하카"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는데요, 그 원주민을 정복 대상으로 삼았던 뉴질랜드 이주 백인들이, 역설적이게도 이를 배워서 국가 대표팀의 경기 시작 전에 동작을 집단으로 퍼포먼스한다는군요. 특히 이 관행은 럭비 경기(미식 축구와는 세부 룰에서 차이가 나죠)에서 뚜렷한 관행으로 자리했는데, 여기에는 인종과 국가를 떠나서 모든 이들이 공감할 만한 정신이 자리한다는 게 저자의 설명입니다. 그 공감의 정신이란 바로 "절대 긍정"의 네 글자입니다.


저자 김익철은 기아자동차에 평생을 몸담은 분입니다. 요즘의 현기차 개념이 아니라, 과거 김선홍 회장 시절부터 독립 기업 기아자동차(주)에서 잔뼈가 굵은 분이며, 그 중에서도 HRD 파트에서 중임을 맡아 온 경력입니다. 아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기아차 노조라고 하면 얼마나 강성인 분들입니까. 기아에서 HRD을 맡은 분이라면, 인사관리에는 도가 튼 분이라고 해도 무조건 맞죠. 중국에 가 보신 분들은 다들 알고 있는 바이지만, 한국의 인사관리 그 세세한 매뉴얼과 관행의 빼어남은 특히 중국 고위층이 보고 혀를 내두른답니다. 세계에서가장 사람들 사이에 스트레스를 많이 주고 받는 나라가 한국이고, 그 복잡미묘하고 다양한 가지를 친 관계의 특성을 요리하다 보니, 어느덧 한국에서 통하는 건 세계 어디서도 통하게 되었죠, 대체로 룰에 순응하고 튀는 걸 경계하는 일본 따위가 따를 바가 아닌데, 이게 반드시 좋기만 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자 김익철은 우연한 기회에 럭비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과연 실제로 럭비를 해 보기는커녕, TV 등으로 관전이나 제대로 해 본 분이 몇이나 될까요? 저자가 이 스포츠에 끌리게 된 건, 우리가 일상용어로 흔히 말하듯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맛, 그 매력에 빠진 것이 그 계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확실히 온갖 종류의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저자가 개인적으로 럭비에 이끌리게 된 건, 그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난국을 헤쳐 나가며, 하프라인을 넘어 높게 솟은 두 폴대 사이로 공을 던져 넣을 때의 그 쾌감이, 세상의 모진 역경과 돌출 변수를 하나하나 제거하고 마침내 궁극의 짜릿한 성공을 낚아챘을 때의 그 성취감과 맞먹는다는 겁니다.


자, 인생이 럭비와 유사하다는 건 이제 알았습니다. 럭비에서 그러면, 난국 타개, 리스크 미니마이징의 구체적 실천론으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저자가 말하는 건 바로 절대긍정의 정신입니다. 사실 부정적 기운으로 가득한 언사나 불만을 털어 놓는 자를 보면, 대개 불만족스러운 자기 처지를 합리화하거나, 타인에게 그 실패를 전가하기 위한 의도가 크게 작용합니다. 그런데 다들 자기 이익, 자기 만족을 극대화하기 위해 촌음을 아껴 가며 뛰는 세상에, 누가 그런 철없는 푸념을 들어 주려 귀한 시간을 허비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부정적 시선과 왜곡된 투사가, 모든 실패와 어긋남의 근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럭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스피릿은, 첫째도 긍정이고 둘째도 긍정입니다. 


절대 긍정의 정신 자세를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저자가 선택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긍정적인 마인드만 가지라는 추상적 설교가 아니라, 다소 독특한 방법으로 가르침의 각론이 전개됩니다. 김익철 교수 자신을 모델로 한 걸로 짐작되지만, 강태산이라는 기업체 이사와, 장민철이라는 시골 고교 럭비부 감독의 오랜 인연을 모티브로 해서, 일종의 대화체 소설이 책 내내 전개되고 있습니다. 강태산은 청운의 뜻을 품고 고시공부에 여념이 없었으나, 이에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취업 자리를 알아 보려 합니다. 이 때 알게 된 분이, 바로 장민철이라는 초로의 럭비 감독이었습니다. 이 두 명의 주인공이 엮어 가는 사건,주고 받는 대화를 통해 우리는 인생과, 경기 럭비가 얼마나 서로를 닮았으며, 그 과정에서 절대 긍정의 마인드가 수행하는 핵심적 기능의 중요성을 깨닫게도 됩니다. 진솔한 체험을 토대로 한 소설체 자계서이므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4년 전 나왔던 책의 개정확장판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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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심리학 - 알면 인정받고 모르면 헤매는
여인택 지음 / 책이있는풍경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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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책에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만점을 주고 싶습니다.


출판사의 소개나 홍보 문구를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이 책이 "2년 2개월을 무사히, 충실히, 그리고 요령 있게" 보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책인 줄만 알았습니다. 군 복무를 이미 마친 저로서는, 그런 용도에 국한되는 책이라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죠. 하지만 요즘 모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신체 건강한 대한 남아의 절대 다수가 일정 시간을 몸담게 되는 병영의 생활을, 재미와 향수를 적절히 배합하여 많은 분들(이 중에에는 여성도 다수입니다)의 공감을 부르는 시국이기도 해서, 그 시절의 고단함이 떠오를라치면 좀 지긋지긋하기도 하지만, 한번 책을 펼쳐 읽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 책은, 이제 병으로 입대를 앞둔 청년이나, 그 주변의 부모님, 형제, 애인(가장 중요하죠?) 들이 읽어도 좋은 책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페이지를 넘겨 보면 정말 평균을 살짝 상회하는 난이도의, 전방 부대 보병으로 아주 FM 군생활을 한, 단단한 땅게의 포스가 느껴집니다. 빡세기도 했겠고(UDT나 의장대, 기타 힘든 곳과 비길 수는 없지만), 그 내무반 생활을 별 사고 없이, 사단에서 이쁨깨나 받은 병장의 회고담임이 팍팍 느껴지는 기록입니다. 이런 분은 이런 책을 쓸 자격이 있고, 우 리 경험자들은 서브텍스트를 통해, 말 없이도 공감과 지지를 보냅니다. "아, 이 사람 군대 생활 잘 했겠구나." 군생활 잘했다고 전역 후 사회에서 뭔 혜택이 더 붙는 것도 아니지만(훈장, 표창이나 받았으면 모르지만요), 여튼 다같은 예비역 병장으로서 이런 사람 보면 어느 조직 가서도 적응 잘 하겠구나 하며, 마음으로부터 인정을 해 줍니다. 게다가 잘 보시면, 이 저자는 지금 25를 갓 넘긴 나이인데, 저대 후 거의 바로 미국 유학 길을 떠나, 현재 그곳에서도 학생회 리더 역을 맡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유학과 군생활의 함수 관계가 보통은 어떻게 형성되는지, 아는 분들은 다 압니다. 저자는 이처럼, 텍스트 외적인 면에서도 칭찬을 받을 만합니다. 그런 저자의 기록이니만치 하는 말들이 구구절절 장장마다 맞는 이야기만 적어 놓았습니다. 최소한 이 텍스트에 불만 가지는 사람이 전역자도 아니고 입대 전이라면, 그 사람은 아마 입영 후 생활이 편치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부정적 마인드라면 군 생활 절대 잘 못합니다.


그런데, 이미 예비역 병장인 신분에게 어케 하면 군생활 잘하는가, 이런 건 크게 실감이 안 와닿습니다. 다른 내용이 있어야, 시간을 두고 책 읽는 보람이 있죠. 이 책은 진짜 장점은, 군생활 잘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는 데 있는 게 아니네요! 제가 읽기로는, 이 책은 군대생활을 그저 소재로 삼아서, 심리학(학문으로서의)의 기초 개념을 잡아 주고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미국에서 현재 공부도 우등으로 잘하고 있는 저자의 솜씨라서, 내용 소개도 정확하고, 그 핵심 개념을 군생활에서 보편적으로 겪는 바와 희한하리만치 연결시키는 요령이 놀랍습니다. 저는 이 책이, 가벼운 농담거리나 추억을 묶고 짜 내서, 입영 열차 안에서 불안한 마음 츄잉껌 씹어 가며 읽히게 할 의도로 저술된 줄 알았으나, 웬걸 이 책은 군대를 그저 소재로 삼았을 뿐, 쉽게 풀어쓴 심리학 개론서라고 해도 될 정도였어요. 이런 책이, 보통 쉽기는 흔해도 내용의 정확성 요건은 저 멀리 다른 연병장에서 노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그것도 아닙니다. 정확하기도 정확하다는 말입니다.


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심리학 공부도 잘하고 군생활도 모범적으로 마친, 요모조모로 배울 게 많은 저자의 내공이 잘 드러나는 책입니다. 튀지는 않지만 일러스트도 무난하고 좋은 내용이 잘 전달되게 책의 편집도 깔끔합니다. 우리가 리더로 삼고 싶은 사람은 바로 이런 내용을 진정성 있게 책으로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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