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521 | 522 | 523 | 524 | 52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길리아드
마릴린 로빈슨 지음, 공경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아버지의 그 사연이란, 언제나 사람을 뭉클하고 숙연하게 만듭니다. 부모님은 나에게 육신과 영혼을 준 분이고, 나의 한계와 나의 장점은 언제나 그들을 돌이켜 보면 분명하게 드러나죠. 한국처럼 짧은 시간에 급격한 사회 변혁, 가치관의 변용을 겪은 곳에서는 세대 간의 단절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성숙기에 접어든 공동체, 분단 없이 가치관과 정신적 미덕을 generation to generation 으로 이어 오는 풍토가 정착되면, 아들은 아버지의 뒷모습에, 아버지는 아들이 주시하는 어딘가의 머나먼 시선 속에 그 살아온 자취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하물며, 3대가 이어 온 전도와 선교, 그리고 고독한 소명의 사업이 그 공통의 지향인 집안이라면 어떨까요?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를 향하고 세상에 발을 디디며 성경의 워딩에 그 실천의 발판을 디디고 살아 오길 힘썼으나, 무서운 죄책감의 시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사역 3대의 사연을, 아버지 목사 잔 에임스를 통해 내러이트되는 형식입니다.


우리도 하근찬의 <수난 이대>같 은 작품에서, 한 개인들의 살의 질곡과 사연 속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한 나라의 역사와 정체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개인은 축소된 국가이고 겨레입니다. 일대에 걸친 삶이 그런 기능을 하기에 좀 짧은 감이 있다면, 서로를 많이도 닮은, 닮아야 할 부자의 대(代)로 내러티브의 외연을 넓히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자신의 아버지, 또 자신의 아들 사이에 놓인 "낀 세대"인 잔 에임스 목사는, 부친의 엄혹한 죄책감과 한 치 양보없는 격식주의의 의무는 고스란히 물려 받고, 아들의 상대적 방황과 확신 없음의 불리한 입지는 그것대로 또 뿌리치지 못하는, 좋은 점이라기보다 불리한 사항만 다 끼고 살게 되었던 아픔의 중간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랬기에, 이 에임스 목사는 삼대 중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꺼려지는 와중에도) 마침내 끌어안고, 자신의 아들이 터벅터벅 걸어가야 할 그 머나먼 지향에 대해 자신 있게 정곡을 찌르는, 유언 같은 조언을 해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였던 것처럼, 너 역시 결국 나일진대, 이 말을 나보다 누가 더 자신 있게 일러 줄 수 있겠니?"


길리아드라는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 분이라면, "길르앗"이라고 바꾸면 그제서야 아, 하실 겁니다. 미국에는 이 "길리어드" 라는 이름을 가진 소도시, 소읍이 많습니다. 우리는 흔히 미국의 정착사를, 인디언들의 가혹한 절멸과 축출의 연대기로만 알고 있지만, 특히 남부의 경우 기존의 거주민 없는 버려진 땅을 혼자 힘으로 일구고 개척하여 농경 주거 형태를 최초로 도입한 지역이 많았죠. 일을 다 이뤄 놓고 보면 쉽고 편해 보이지만, 제아무리 비옥섣과 광활함이 갖춰진 농장이라고 해도 최초의 손길, 길들임이 없는 상태에선 단테의 지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농장은 인간이 그를 농장으로 바꾸기 전에는 그저 아가리에서 용암이 뿜어져 나오는 야수의 대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런 대지를 나의 벗, 동반자로 삼기 위해서는 산 멀고 물 낯선 천만리 타지에서 불굴의 의지와 집요함이 필요했는데, 그래도 거친 자연의 시련을 받아 내기엔 그것만으로 부족했습니다. "신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지금의 시련은 그분의 크신 의지 한 조각의 발현이니, 나의 장래, 혹은 먼 훗날 내 후손의 앞날에 가득한 행복과 보람으로 보상받을 것이다." 이런 종교적 신념의 뒷받침이 없었으면, 그 문명화와 행복 추구(pursuit of happiness)를 위한 장정은 다 무위로 돌아갔을 겁니다. 개인개인이 다 투철한 신앙혼의 담지자 대변자였지만, 그래도 최종의 조율자, 지휘자, 사역자가 필요했고, 그 일을 이 에임스 가문의 남자들 같은 목사가 떠맡았던 거죠. 따라서 목사라면, 누가 어느 상황에서 그 영적인 해갈을 시도해도, 마치 준비라도 해 두었다는 듯 진정성과 유창성을 동시에 갖춘 답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 일상의 삶이 성경 구절 하나하나에 기속되는, 양심에 의해 절제되고 말씀에 의해 연출되다시피한, 비고 가난하고 그러면서도 정의로운 손놀림 눈짓 발걸음 들숨 날숨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에임스 목사의 부친, 우리 독자에게 "할아버지 목사"로 이 소설에서 설정된 그 사역자는, 남북 전쟁 당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남부의 그 캔사스 주에서 활동했습니다. 무 서운 일이 있었고, 그 아들과 며느리는 다만 아득한 암시와 예감으로 진실의 잔영을 더듬을 수 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불길한 유품의 항목을 확인하고, 땅에 묻어 버립니다. 며느리는 그에 그치지 않고, 그 중 셔츠를 다시 집어 들어 세탁하고, 다듬고, 다시 깨끗이 손질합니다. 대리석 조각 같이 반질반질해진 그 빛나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도로 대지의 품으로 이를 돌려 보냅니다. "지금 다시 파 보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마치 우리네 여인들이, 가뜩이나 흰 바탕의 옷가지들을 빨고 다듬이질하고, 또 햇볓에 말리던 그 모습을 연상케 하죠. 한 점의 얼룩과 때도 허용하지 않음이 곧 가사의 주관자인 나의 품위와 자존에 직결된다는 듯 말입니다. 작가 매릴린 로빈슨의 서두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재건과 신앙이라는 두 개의 코드는, 유럽보다는 아마 한국의 독자들이 더 쉽게 공감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같은 "세탁, 정결의 절차"라도, 그 안에는 종교적 죄의식이 들어 있는지 아닌지에서 근원적 차이가 발생합니다. 에임스 목사의 사모님은, 시아버지의 내면과 심기, 그 번뇌와 한계를 철저히 이해했기에, 그 죄책감의 상속이 부정적 인계 절차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 희망적이긴 해도 말입니다.


바산의 황소,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길르앗(그런데 기독교 성경의 길르앗은, 도시나 읍이 아닌 광역 단위였습니다. 라몬 길르앗 할 때, 라몬이 도시이고 길르앗은 그를 포함한 지역명임을 상기하세요)의 향유는 당대 일등의 명산품이었습니다. 우리네 같으면 담양 죽제품, 강화의 화문석이라고 할 때나 마찬가지죠. 향유가 어디에 쓰이는 물건일까요. 예수가 마르타에게 부음 받은 그 화합물도 향유였고, 사울과 다윗 이래 선택받은 이들이 언제나 그 징표처럼 장로에게 수여받고 신체에 "입은" 것이 향유입니다. 향유는 죄사함의 표지요, 은총의 언약표징입니다. 향유를 생산하는 길르앗 땅, 여기에 부인할 수 없는 과거의 사연이 있고, 미래의 화해가 있으며, 끝내 저버리지 못할 절대 구원의 약속이 있습니다. 길르앗은 이제 인류가 그 죄업으로부터의 사면 희망을 놓지 않는 이상, 보편적 구원의 보통명사로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삼대가 지난 후에는 다음의 삼대가 그를 잇게 마련이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C 바르셀로나 - 축구의 신화 프리메라리가 프리메라리가 축구 시리즈
루이스 미겔 페레이라 지음, 윤승진 옮김 / 보누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즘 보누스에서 프로 스포츠 명문 구단의 역사에 얽힌 팩트북을 많이 출간하고 있어요. 지난 번에 제가 읽은 책은, 한국의 뉴욕양키스라고 할 수 있는 "삼성 라이온즈"편이었습니다만(그때도 말씀 드렸지만 저는 삼성구단을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그 탁월한 운영 솜씨와 현재의 빛나는 업적을 보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번에는 종목이 바뀌어서, 보다 전지구적으로 보편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축구입니다. 그 중에서도 세계인의 사랑과 주목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명문구단, 레알 마드리드와 더불어서 프리메라리그의 세력을 양분하는 초특급 전투 단위인 풋볼클럽 바르셀로나를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책의 크기는 이 시리즈가 언제나 그렇듯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간편한 사이즈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팬들에게는 몰랐거나 깜빡 잊었을 법한 사샐로 가득하고, 초심자애게는 "이 정도는 알아야 축구를 소재로 한 어느 대화에도 꿀리는 일 업이 낄 수 있지!"하는 유용한 사실을 가득 알려 주고 있습니다.


제 경우는, 축구를 즐겨 시청하는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동료들과 어울릴 일이 잦고, 또래 남성들 사이에서야 이 축구라는 화제가 대단히 인기 있는 편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사회적, 사교적 의무사항으로 케이블에서 주요 이벤트는 곁눈으로라도 챙겨 둔다고 할 수 있죠. 마니아들 사이에서라면 전술이나 경기의 복기 등이 중요한 관심사겠지만, 진지하지 않은 술자리에서라면 과거사의 회고나 플레이어들의 업적, 비교담 등이 더 친숙한 레퍼토리입니다. 이때 해당 종목이나 구단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다면 자리를 어색하게 만들거나, 최소한 대화에 제대로 끼기가 힘들어지죠. 특히 이 책의 소재처럼 세계적 명문 구단의 지난 발자취를 짚는 식이라면, 이미 어느 모임이나 사교에서건 그 역사가 거의 교양의 종목이 되다시피했습니다(공감이 안 되는 입장도 있긴 하겠습니다만 저는 그렇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재미는 여러 가지가 있었어요 우선, 요한 크루이프가 이 팀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직에 가장 오래 머무른 사람이라는 점을 처음 알았습니다. 요한 크루이프하면, 네덜란드 토털 사커의 그 전설적인 위용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코드로 밀착된 레전드 아니겠습니까. 월드컵 축구 중심으로만 축구사를 정리한 입장은 확실히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는 점 다시 깨달았어요. 또, 전설적인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마라도나가 한때나마 이 팀 소속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 클럽팀에 대해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되었네요. 전술 부분은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별권이 있으니까요, 관심 있는 분들은 따로 챙겨서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조만간 사서 볼 생각이구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카소의 색 - 빛의 파편을 줍다
게리 반 하스 지음, 김유미 옮김 / 시드페이퍼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젊은 날의 피카소, 그 좌절과 모색의 시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그의 유년시절부터,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던 무렵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 려서부터 피카소는 그런 말을 듣고 자랐다고 하네요. "네가 군인이 되길 원한다면 너는 으뜸가는 대장군이 될 것이요, 네가 성직자가 되길 원한다면 너는 교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내내 "파블로"라고만 호칭되는 피카소(기다란 풀 네임도 소설 초반에 제시되어 있어요)는, 그처럼 두뇌의 회전도 빠르고, 체격도 당당한 헌헌장부의 모습으로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또래들로부터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따르는 이들도 많은 편이었고요. 그런 인물이 붓과 물감을 다루는 솜씨까지 뛰어났으니...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순탄한 전진의 항로만을 제공하지는 않았습니다. 재정적 후원의 보장(친지로부터의)까지 있었던 그의 친구(카를로스 카사게마스) 역시 결국에는 순탄한 길을 갈 수가 없었으니, 재능과 열정이라는 신의 축복도 "젊음"이라는 질풍 노도의 시련을 거치며 대부분은 살아남지 못하는 게 필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 이 소설을 읽으면서 들었습니다. 꽃 처럼 피어나는 젊음은, 재능을 보존하고 갈고 닦아야 할 인재들에게는, 차라리 거세되어야 할 유혹에의 페로몬 샘이 아닌가. 비극적인 사고 없이 미술 수업만 제대로 마쳤다면, 친구 피카소에 못지 않은 대화가가 될 수도 있었을 카를로스의 최후를 보며 든 생각입니다. 작가 게리; 반 하스의 표현에 의하면, "신과 인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 한계에 도전한" 파블로 피카소 같은 이들도, 그 젊은 시절 자칫하면 소중한 재능과 천재적인 작품 창출 모두를 무(無)로 화하게 할 위기에 여러 번 처하고,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저지르는 게, 예외가 아닌 보통의 사례라는 인상까지 받았습니다. 

자화상. 왼쪽은 1901년, 오른쪽은 1896년입니다. 이 책에도 나오는 것처럼 1901년이면 빛의 도시 파리에 막 도착했을 무렵이죠.


주 위로부터 언제나 기대를 모았고 활력과 야망에 넘쳤으며, 외모나 기질 어느 면에서도 타인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던 젊은 피카소는, 그러나 안전하고 검증된 길을 걷기보다,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재능을 최대로 발화할 수 있는 시련의 행로를 굳이 택합니다. 그것은 돈 한 푼 없이, 친구 카를로스 카사게마스와 함께 파리로 가서, 세 계 첨단의 조류와 유행을 접하고, 평론가나 미술 애호가의 눈에 들어 큰 성공을 누려보기도 하자는 것이었죠. 그러나 파리에 도착한 그들은, 이 모든 것이 고향 스페인에서 꿈꾸던 바의 이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깨닫게 되며, 특히 자신만의 순수 미학의 세계를 파고드는 길과 시장의 구미를 맞추는 일은 결코 양립하지 않음도 절감하기에 이릅니다.

뻬빠 숙모의 초상. 1901

그의 고국 스페인은 이미 많은 빼어난 화성(畵聖)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머나먼 앞선 시대의 엘 그레코와 프 란시스코 고야가 그들이죠. 아무리 천재인 피카소라고는 하나,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입체파 터치와 관점을 완성한 채 자유로운 일필휘지가 가능하지는 않았겠죠? 이 책에서 배운 바로는, 그 역시 많은 대가로부터 쉼 없이 영향을 받고, 그들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때로는 동시대의 앞선 거장(예컨대 마티스)로부터 심한 경계와 모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소설 후반부에, 앙리 마티스와의 격한 갈등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시기는 아니지만)피카소가 노년에 이르러 확고한 명성을 다진 후에도,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처형>을 두고 노골적인 모방을 한 작품이라 하여 그의 <한국에서의 학살>이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된 일도 있었습니다. 이미 이 시기부터, 고야는 피카소의 어린 영혼을 사로잡고 있었던 듯합니다. 영화감독 피터 잭슨은 <킹콩>을 리메이크하여 적절한 칭찬을 받은 반면, 구스 반 산트는 히치콕의 <사이코>를 어설프게 재현했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일도 생각나더군요.

제임스 사바르테스의 초상. 1901

절친 카를로스 카사게마스를 매개로 해서, 파블로 피카소는 여러 친구를 알게 됩니다. 그 중에는 위 작품의 주인공 작가 제이미 사바르테스도 있고, 이 소설에서 카사게마스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걸로 설정된 안나 포랭도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로는, 카사게마스의 자살에는 다른 여인이 연루되어 있었다고도 합니다.


파블로의 주위에는 여자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심지어, 임차료를 내지 못해 거주지에서 축충당할 위기에 놓이자, 애인이었던 매춘부 페르낭드가 기지를 발휘하여 퇴거의 위기를 모면한 일화도 이 소설에 나오고 있습니다(두번째 연체 때엔 결국 쫓겨나죠). 기욤 아폴리네르의 소개로 여러 명사를 접촉하기도 하지만, 타고난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그는 누구와도 잘 융화하지 못합니다.


파 블로 피카소가 정치에도 상당한 정도로 관여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소설은 갓 명성을 얻기 시작하는 그가, 1차 세계 대전 발발 소식을 접하고 친우들과 혼동스러운 감회에 젖는 걸로 마무리되고 있네요. 청색 시기를 통과하여 페르낭드 올리비에와의 장밋빛 시대로 접어드는 무렵의 그를 만나고 싶다면 이 소설이 좋을 듯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빛나는 실수 - 성공을 위한 숨은 조력자 와튼스쿨 비즈니스 시리즈
폴 J. H. 슈메이커 지음, 김인수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요즘 워튼 스쿨 시리즈가 여러 곳에서 출간되어, 경영과 커머셜 분야의 의문 해소에 목마른 독자들에게 단비 같은 해갈을 해 주고 있습니다. 대가들의 진단과 해법은 언제나, 결국은 같은 결론에 이르더라도 그 논의의 전개 과정에서 근본의 의문까지 다 해결해 준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 이번에도 느끼게 되었어요. 며칠 전 조지 데이 교수의 <아웃사이드-인 전략>을 읽고 리뷰도 남겼는데, 이번에는 같은 와튼 스쿨 소속 슈메이커 교수의, 짧지만 심도 있는 저작을 또 읽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실수로부터 위대한 발견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은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요즘이야 그 남용이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개발 당시 "기적의 약"으로 꼽혔던 페니실린 역시, 뜻하지 않은 실험 과정상의 실수로, 우연의 산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죠. 이처럼, 실수는 비난이나 자책의 대상이라기보다, 성취와 업적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수가 많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아래의 표 하나로, 대체적인 요약이 가능합니다. (매경에서 나온 이 번역서에는 p64에 실려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단 한번의 결정으로 그 성패가 좌우되는 일은 없죠. 상황에 따라 위험하고 안이한 발상일 수 있지만, "다음 번의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실수를 저지르는 건 때에 따라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이 주장하는 바처럼, 실수도 유익할 실수를 "전략적으로" 골라 가면서 저질러야지, 마냥 슬랩스틱을 선뵌다면 그건 아무 의미 없는 바보짓일 뿐입니다. 어른들이 하는 말 중에 "그냥 경험이라 생각하고!"가 다 그런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row)을 보시면 "실수의 비용"이 얼마인가?로 기준을 삼습니다. (이 한국어 번역본에서 "편익 비용"이라고 옮겨 놨는데, 제 생각에는 바로 다음에 언급할 열[column]의 "잡재적 편익"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어서 한눈에 들어올 것 같지가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저 위의 표에도 나와 있듯, 이혼, 벤처 기업 파산 같은 실수는, 한번 저지르는 데에 치러야 할 대가가 엄청 큽니다. 반면, 주차 위반 딱지를 뗀다거나, 탑승해야 할 비행기를 놓치거나 하는 실수는. (안 하는 게 낫기는 하지만) 그런 일 좀 저절렀다고 큰 일이 벌어지거나 하진 않습니다. cost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사용됩니다. (역자 김인수씨는 아마 "기회 비용"과 분명히 구분한다는 의도에서 이런 번역어를 택한 것 같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불필요한 시도로 보입니다)


열(column)을 보시면 "잠재적 편익"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이 "편익"에 대한 비용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에서도, 저 "편익 비용"이라는 번역어는 잘못된 것입니다. 두 용어에 똑같이 "편익"이라는 말을 집어 넣으면, 두 "편익"사이에 모종의 상관관계라도 있는 듯 착각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보다시피 원문에서는 저자가 그런 표현을 안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은 무슨 말인가. 당장 실수를 해서 어떤 편익(혹은,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그렇다면 그건 이미 "실수"가 아니죠), 가장 희망적인 상황에서 기대할 수 있는 좋은 결과를 상정 가능할 때, 그것의 가치를 뜻하는 겁니다. 위에서 비용이 큰 실수의 예를 보면, "마약 중독"의 경우 치러야 할 대가는 커도, 이런 실수를 함으로 해서 어떤 혹시나 하는 뜻밖의 큰 선물을 기대할 수 있는가 하면, 그런 건 당연히 전혀 없습니다. 바로 이런 게, "잠재적 효용"이 낮은 실수라는 거죠. 반면 "실직" 같은 걸 보시면, 일시적으로는 좌절이 올 수 있으나, 만약 당사자가 빼어난 능력의 소유자라면, 더 나은 기회를 얻을 실마리가 된다는 점에서 잠재적 편익이 크다는 게 저자의 설명입니다(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직의 "비용"이 작다고 하는 저자의 입장에도 동의하기 어렵고요. 다른 예를 드는 편이 나았을 건데요).


아무튼 저자의 분류에 의하면, 2×2의 테이블이 결정하는 것처럼, 실수에는 4가지의 유형이 있다는 거에요. 이 네 가지의 유형 중에, 저자가 독자들더러 "한번 저질러 보라고 줄기차게 강조"하는 건, 바로 D. 즉, 잠재적 편익이 크고, 치러야 할 비용은 낮은, "brilliant mistake", 영리한 실수를 의미합니다.


실제 사례가 많이 소개되어 있어서, 읽기에 딱딱하지 않고 재미있습니다. "모든 성공의 99%는 실수다."라는 혼다 창업자의 명언 같은 게 많이 실려 있어서 지식 쌓기에도 유용했구요. 다만, 예컨대 에디슨의 실수 같은 걸 D.로 분류할 수 있을까요? 에디슨의 전구 필라멘트 적합 소재 발견을 위한 노력은, 그 과정도 고통스러웠겠거니와 금전적 비용 지출도 장난 아니었을 것 같다는 점에서 말이죠. 저는 에디슨의 경우 B.에 분류하는 게 더 합당하다고 봅니다. 또한,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것들 중 D.에 속하는 건 그야말로 찾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더 흔한 자원으로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저질러야 할" 부류는 오히려, B."심각한실수" 입니다. (이 번역도 serious를  "심각한"이라고 올기면 오해를 부를 수 있습니다. 오히려 significant처럼, "유의미한" 정도로 옮기는 게 낫다고 봅니다)


이 책의 탁월한 점은 본문도 본문이지만, 책 부록에 나와 있는 p202의 "포트폴리오의 정당화"입니다. 학창 시절에 CAPM을 배운 분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왜 저수익 안전 자산(기대효용이 실질적으로 마이너스인)을 포트폴리오에 집어 넣어야 하는가? 저자는 바로 이 "영리한 실수" 이론을 통해, 일시적으로 나쁜 결과가 발생할 것이 뻔히 보이지만, 잠재적 편익 하나를 바라보고 구성에 편입하는 게 현명하고, "합리적인(요즘 여러 군데에서 도전받는 개념입니다만)" 선택이라는 점 분명히 강조합니다. brilliant mistake가 CAPM하고도 연결이 된다는 게 신기했는데요, 이런 다양한 사례를 제 한 몸에 포섭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 유용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타가 눈에 거슬렸습니다.

p 59: 3
펜닐베니아 →  펜실베니아

p 60: 4
흘러내는 → 흘러내리는

p 80:10
사업 아이디 → 사업 아이디어


첨언하자면, 부록 1에 나오는 아인슈타인의 실수 운운은 저자의 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16번은, 비록 아인슈타인 본인이 그렇게 말했다고는 하지만, 요즘 학자들이 이 우주상수 팩터의 타당성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재발견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잘 모르는 분야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겁니다. 이런 "실수"가 책의 격을 떨어뜨려 보이게 하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을 어루만지다 - 닫힌 마음, 상처난 마음 치유 에세이
정도연 지음 / 홍익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원불교 교무로 재직 중이신 정도연 님이 쓰신 수상록입니다. 원불교는 박중빈 대종사가 창도한 이래, 주로 전북 지방을 중심으로 활발한 포교 활동이 이뤄졌고, 현재는 홍라희 리움 미술관장 등 사회 곳곳에서 저명인사와 시민들이 신봉하는 한국 고유의 종교지요.


원불교의 가르침을 접하는 때가 보통 독자들이나 시민들이 가질 기회가 있을까요? FM 라디오 가청 주파수 중 가장 낮은 대역대를 사용하는 방송 중 WBC가 있습니다(권투 관련 세계 기구는 아닙니다). 이 방송이 원불교 포교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고, 아마 프로야구 중계를 자주 듣는 분들은 이닝 종료마다 나오는 "경전 말씀"에 익숙한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말씀을 듣다 보면, 이규항 캐스터의 구수하고 그윽한 목소리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은근하고 가슴을 울리는 가르침에 대해, 종교를 떠나 공감하곤 하던 경험이 있는 분들이 꽤나 될 것입니다. 토착 종교의 가르침이란 이처럼, 다른 언어의 필터를 거르지 않고 우리의 심성에 바로 어필하는 부분이 있어서인지, 외래 종교보다 더 깊은 깨우침과 영혼의 안식을 주는 일이 왕왕 있습니다.


정도연 님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수상록의 형식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직장인들을 향해, 더 성장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회사에 대해 투정 섞인 불만을 내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불만은, 잘못의 원인을 나 자신에게 찾지 않고, 외부에 돌리는 나쁜 버릇이 몸에 배인 탓이라는 거죠. 정 교무의 처방은 간단합니다. "업무 시간 짬짬이, 나 자신을 돌아 보고, 나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할 기회를 가지라."는 겁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마음으로 원하는 바가 뭔지 알면, 세상과 타인에 대한 불만이 마음에 자리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마음에 불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외외로 많다고 진단합니다. 이 런 "불, 울화"란 보통 남이 나 자신을, 나의 생각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 가슴에 품고 키우는 수가 많다는 건데요. 그런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정해져 있다는 게 정 교무의 말씀이네요. "다른 건 다 참아도, 남이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건 못 참는다."  이에 대해 정 교무는 따끔한 일침을 놓습니다. " 나의 자존심이 왜,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의해 영향을 받아야만 하나? 그런 사람은 자존심이 부족한 사람이다." 옳은 말이죠. 요즘은 이련 경우를 두고 "자존감"이라는 다른 용어를 만들어 쓰기도 합니다만, 결과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자기 확신이 부족한 인간들이, 남의 말에 일일이 신경을 쓰고 반응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어떤 경우는, 올바른 지적을 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발끈 화를 내면서, "이런 말에 감정이 상하고 한때나마 상대에게 굴하는 반응을 보이다니 나는 자존감이 왜 이리 부족한지 모르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봤습니다. "반성할 줄 아는 겸허한 마음"과 "낮은 자존감"을 혼동하는 어리석음의 발로죠. 이런 사람들은 원불교의 온화하고 평온한 가르침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더군요.


정 교무는 주문의 힘도 강조합니다. 예전부터 자기 암시라는 이름으로 많이들 강조되던 것입니다만, 정 교무의 주장은 주로 자기 긍정의 내용을 담은 것입니다. 차분히 입으로 되뇌고, 마음 속에 새기는 주문이란 그 자체로 강력한 원인의 발생이며, 최소한 정신 건강을 바르게 가지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생각을 멈출 것"도 빼놓지 않습니다. 여기서 생각을 멈춘다는 건, 일체의 판단을 중지한다는 뜻입니다. 판단을 중지할 때, 마음 속의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타인을 미워하는 마음이 자취를 감추며, 내 자신을 참되게 존중하는 심성이 싹을 틔우게 되죠.


결국 모든 것은 우리 마음에 달렸습니다.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게 마련입니다. 일체유심조라는 세존의 말씀, 그리고 타인과 세상을 아끼기를 나 자신처럼 하라는 대종사의 가르침을 현대인이 잊지 않는다면, 헬기 참사나 갑을 간의 분쟁은 어느 새 다른 세상의 사정이 되지 않을지, 이 평온한 글과 단아한 책(하드커버입니다)을 보고 깊이 묵상에 잠겨 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521 | 522 | 523 | 524 | 52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