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된 죽음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8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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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계속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마치 감전당한 사람처럼 몸을 떨면서 두 시간 동안 내 영혼을 불태우는 그 원고를 손에 들고 있었다...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동안 곰팡내 나는 내 오랜 숙원인 복수의 욕망은 깊이를 더해갔고 그것은 점차 독기를 띠어갔다...이 소설의 성공을 내 복수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섬광처럼 내 뇌를 스쳤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오로지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최면에 빠진 사람처럼 몇 달 동안 두 개의 삶을 살았다. 겉으로 보이는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했지만 또 하나의 나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 마치 몽유병 환자 같은 상태로 몇 달을 보냈다.


일상에서의 복수란 생각보다 흔하지 않지만, 영화나 책에서는 참 쉽게도 등장하는 것이 복수이다. 그래서 참 수많은 복수의 방법, 과정들을 보아 왔지만, 이렇게나 치밀하고, 차가운 복수가 있었나 싶을 만큼 이 작품의 복수는 독특하다.

 

 

이 작품은 완전히 다른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출판업자로 일하는 한 남자와 그의 친구인 프랑스 최고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수상하게 된 인기 소설가. 이들의 관계를 살펴보자면 무려 30년 전으로 돌아가보아야 한다. 문학을 사랑하는 존재감 없는 소년 에드워드는 잘생기고 매혹적인 소년 니콜라를 만난다. 당시 에드워드는 친한 친구들과 문예지를 만들고 있었고, 오로지 니콜라와 친해지고 싶었던 에드워드는 문예지에 니콜라의 작품을 실어주면서 친분을 쌓아간다.

 

이들의 만남은 애초에 잘못 시작이 된 것이다. 에드워드는 니콜라가 말을 걸었을때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아름다운 소년이 나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어'라고. 그렇게 에드워드는 니콜라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결국 유일한 그의 친구들과 이별을 하고, 오로지 그의 작품을 출판하기 위해, 교정, 손질해서 문예지를 발간하지만, 그것도 니콜라가 곧 흥미를 잃자 발행이 중단되고 만다.

 

무릇 친구관계란 동등한 입장에서 시작이 되고, 유지가 되어야 한다. 한 쪽이 지나치게 상대에게 빠져들어 헌신을 다 하면, 상대방은 점차 그의 위에 군림하기 시작하고, 결국 친구가 아니라 마치 주인과 노예처럼 관계는 변질되어 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매력을 앞세워 대중적인 인기까지 얻는 소설가. 모든 면에서 정 반대인 두 사람. 친구의 그림자 뒤에 숨어 지내야만 했던 열등의식 가득한 남자. 자신의 장점을 잘 알고 이용할 줄 아는 오만방자한 남자. 그렇게 그의 곁에서 그늘처럼 그를 바라보는 한 남자. 이 모든 것이 질투와 애증에서 비롯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결국 잘 나가는 친구에게 복수하겠다고 하는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에드워드가 니콜라의 신작 소설을 읽고 나서, 수십년동안 쌓이고 쌓인 모욕이 끔찍스러운 악몽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 작품을 읽다보면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치밀하고, 무섭게 복수를 준비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차분하고 꼼꼼하게 진행이 되는지.. 나는 이렇게 엄청난 복수극을 본 적이 없다. 아무런 조건없이 대상에게 매혹되었던 것처럼, 그를 증오하고, 복수하게 되는 과정은 그동안 숱하게 봐왔던 복수와는 조금은 차원이 다르다. 복수를 시행하기 까지, 계획하고, 사건이 벌어진 후에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에드워드의 심리 묘사는 굉장하다. 어쩌면 이 책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완전무결한 범죄를 그린 작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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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의 쐐기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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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다름없는 10월 초의 평범한 오후, 87분서 수사반에 한 여자가 들어온다. 검은 머리칼을 뒤로 묶어 올리고, 화장기 없는 하얀 얼굴은 창백한, 검은 외투에, 검은 구두를 신고, 검은 가방을 들고 있는, 마치 죽음의 화신처럼 보이는 여자, 버지니아 도지이다. 그녀는 38구경 권총과 니트로글리세린이 담긴 병으로 형사들을 간단히 제압한다. 자신의 남편이 감옥에서 죽게 만든 스티브 카렐라를 죽이겠다고. 복수심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여자란 굉장히 위험하다. 아무 것도 잃을 게 없으므로,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수사를 위해 외근 중인 카렐라 형사를 기다리며, 그렇게 87분서 수사반의 모든 형사가 그녀의 인질이 된다. 건장한 남자들이 고작 여자 한 명 당해내지 못할까. 싶기도 하지만 문제는 니트로글리세린이다. 폭발하면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릴 수도 있기 때문에 아무도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카렐라를 기다리며 형사들은 인질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각자의 성격대로, 캐릭터에 맞게 머리를 굴려 티나지 않은 묘안을 짜내려고 한다.

 

    

 

 

같은 시간,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인 카렐라 형사는 아내의 임신 소식을 축하하고 그녀와 수사반에서 저녁때 만나기로 약속을 한 뒤, 자살로 위장된 밀실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중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형사의 아내는 시간에 맞추어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는 수사반으로 향하고, 카렐라는 아내와 축하 파티를 할 생각에 들떠 빨리 사건을 해결하고 수사반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이렇게 인질극과 밀실 살인 사건 수사가 두 개의 이야기로 따로 진행이 되는데, 에드 맥베인은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며 스토리를 끌고 간다. 밀실극의 대부분이 항상 알고 보면 단순한 트릭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인데, 이렇게 인질극과 병행 구도로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니 오히려 밀실극 자체에 재미를 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하루 동안 벌어지는 256페이지짜리 짧은 분량이지만, 이야기는 밀도있게 진행되고, 다음 장에서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긴장감이 집중력을 높여준다. 제목의 어감이 좀 어려운 편인데, '쐐기'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의미를 각각 인질극과 밀실트릭에서 이용하는 것도 재미있고, '살의'라는 것이 다른 상황에서 다르게 표출내는 방식도 매우 흥미롭다.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는 경찰 소설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데, 『경관혐오』가 나온 1956년부터 시작되어 2005년의 『Fiddlers』까지 무려 50년간 이어진 시리즈라고 한다. 이번에 출시된 『살의의 쐐기』는 1959년에 나온 작품이라고 하는데, 만약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었던 시대라면 또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었겠지만, 현재 상태로도 매우 매력적인 작품 임에는 틀림없다. 추리 소설이 복잡한 트릭과 엄청난 반전이 있어야만 훌륭한 작품인 건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진리를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인물 관계도 복잡하고, 다중 플롯으로 어렵게 꼬아놓은 작품 들의 홍수 속에,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지만 매우 밀도깊은 긴장감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실력이야말로 진정한 고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에드 백베인의 '87분서’ 시리즈를 이번에 처음 접하게 됐지만, '경관혐오'부터 최근에 출시된 '아이스'까지 차례대로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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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의 영화관 - 그들은 어떻게 영화에서 경제를 읽어내는가
박병률 지음 / 한빛비즈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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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관객 영화가 늘어나고, 영화 시장이 커지면 커질수록, 영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읽어내려는 시도는 여러번 있어왔다. 영화에 관련된 책만 해도 매달 몇편씩 쏟아져 나오니, 심리학, 광고, 과학, 법학의 관점에서 영화를 읽어내는 책들만도 꽤 있었으니 말이다. 이번에는 경제학의 관점에서 읽어내려는 시도이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수학, 경제학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도 꽤 되겠지만, 사실 경제학 용어들은 뉴스에서 매일같이 접하는 분야이다. 우리가 관심이 없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것뿐이다.

 

영화랑 경제학이라, 언뜻 생각했을때 전혀 안어울려보이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생각보다 매우 잘 잘 들어맞는 구석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영화 <이프온리>에 대해서 경제지표를 읽어내는 식이다.

 

오래된 연인과는 경제학적으로 헤어지기 힘들다. 오래 사귄 연인과 헤어지기가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학에서는 '손실회피성향'으로 설명한다. 손실회피성향이란 사람들이 새로 얻는 이익보다 갖고 있던 것을 잃는 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향을 말한다. 대니어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는 '전망이론'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얻는 것보다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2.5배가량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재미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모두 손해보는 것에 대해 민감하다. 고객센터에서 클레임 회원 대다수는 자신이 무언가 손해를 본다고 느끼는 순간 억지를 쓰는 경우가 많다. 왜 나만 이런 불편을 감수해야지? 왜 내가 손해를 봐야 하는 거야? 이런 심리상태가 비논리적인 의견을 피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경제학적 공식이 연인간의 관계에서도 적용이 된다니 흥미롭다. 남자친구가 내 생일에 10만원짜리 선물을 해주었다면, 나도 그 정도 비용의 선물을 구입해야지 공평한거 같은 기분. 내가 더 비싼 선물을 사려고 하니 어딘지 아까운 기분같은 것 말이다. 물론 서로의 관계에 있어서 계산을 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관계는 이미 끝난것이나 다름없다. 사랑은 계산없이 해야하는 거니까.

 

이안은 사만다가 죽을 거라는 걸 안다. 어떻게든 그녀의 운명을 바꾸고 싶어하는 그에게, 택시기사가 말한다. "그녀를 가진 걸 감사하며 사세요. 계산 없이 사랑하고. 서두르세요. 시간이 별로 없어."라고. 이것이 바로 정답이다. 아무리 미치도록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란 백년이 채 안되지 않은가. 그러니 하루하루를 오늘처럼 사랑해야한다. 지금 이 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자, 얘기가 옆길로 빠졌는데, 다시 책으로 돌아가보면 이렇다.


앞서 손실회피성향은 잃는 것이 얻는 것보다 2.5배 정도 더 크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 가정하에서라면 이안이 사만다와 헤어지겠다고 마음의 결정을 내리려면 이별이 감소시킨 효용(만족감)보다 새로운 효용(만족감)이 2.5배 이상 많아야 한다. 새롭게 얻는 효용은 구속받지 않는 자유일수도 있고 새 연인을 사귀는 설렘일 수도 있다. 어쨌든 새롭게 얻는 효용은 2배 이상 '현저히' 커야 한다.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내가 먹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깝다"다. 이것보다 더 적확하게 손실회피성향을 표현한 문구가 있을까 싶다.


이제는 이 책이 대충 어떻게 진행되는지 감이 올 것이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경제학 용어들을, 우리가 보았던 익숙한 영화를 통해서 너무도 공감이 되도록 비유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꼭 경제학 용어들에 대한 공부(?)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영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만으로도 이 책은 매우 재미있다. 아, 이런 현상, 이런 장면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이렇게도 읽어낼 수 있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 무릎을 탁 치게 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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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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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에 숨어둔 도둑 세 명이 있다. 쇼타는 인원감축으로 인해 회사에서 해고되어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근근히 살고 있다. 고헤이는 돌연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실업자 신세이다. 아쓰야 역시 백수로, 두달 전까지는 부품 공장에서 일했으나, 사고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고 그만둬버렸다. 이들 세명은 저금해둔 돈도 없고, 통장도 바닥나고, 집세도 두달이나 내지 못했다. 한마디로 막다른 길에 다다른 시점에서, 도둑질을 하기로 한 것이다.

 

갑자기 차 배터리가 나가버리는 바람에 하룻밤 머물 공간이 필요한 그들이 숨어든 곳은 바로 먼지가 뽀얗게 쌓인, 수십년전에 운영되던 잡화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적과도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편함에 고민을 상담하는 편지가 오고, 그들이 장난삼아 보낸 답장에, 다시 사연의 주인공이 편지를 보낸다. 빈 집에 편지를 보내는 이는 누구이며, 인적하나 드문 곳인데 답장을 넣어두면 바로 사라지는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바로 가게 앞 셔터의 우편함과 가게 뒷문의 우유 상자는 과거와 이어져있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과거의 누군가가 그 시대의 나미야 잡화점에 편지를 넣으면, 현재의 지금 이곳으로 편지가 들어온다는 것.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싶은 의문 조차 들지 않도록, 인물들의 삶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이 신비로운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준다.

 

  

 

수십년전, 실제 나미야 잡화점이 운영될 당시에서는 아이들의 장난 가득한, 엉터리 편지들로 시작이 됐었다. 일종의 놀이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미야 할아버지는 장난편지에도, 엉터리로 지어낸게 뻔한 얘기에도 성의있게 답장을 해주었다. 하다못해 백지로 보낸 편지에도 말이다. 어느 날은 서른 통이나 되는 편지를 장난처럼 보낸 이에게, 일일히 답장을 하려고 하자 참다 못한 아들이 한 마디 한다.

 

"이건 어떻게 보건 못된 장난질이에요. 진지하게 대해주는 게 바보짓이죠."

하지만 늙은 아버지는 전혀 짜증스러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는 커녕 딱하다는 듯이 다카유키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너는 아직도 뭘 몰라."

내가 뭘 모르느냐고 짐짓 불끈해서 따지고 들자 아버지는 서늘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해코지가 됐든 못된 장난질이 됐든 나미야 잡화점에 이런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다른 상담자들과 근본적으로는 똑같아.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휑하니 뚫렸고 거기서 중요한 뭔가가 쏟아져 나온 거야. 증거를 대볼까? 그런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반드시 답장을 받으러 찾아와. 우유 상자 안을 들여다보러 온단 말이야. 자신이 보낸 편지에 나미야 영감이 어떤 답장을 해줄지 너무 궁금한 거야. 생각 좀 해봐라. 설령 엉터리 같은 내용이라도 서른 통이나 이 궁리 저 궁리 해가며 편지를 써 보낼 때는 얼마나 힘이 들었겠냐. 그런 수고를 하고서도 답장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없어. 그래서 내가 답장을 써주려는 거야. 물론 착실히 답을 내려줘야지. 인간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어떤 것이든 절대로 무리해서는 안 돼."

 

왜 사람들이 나미야 잡화점에 자신의 고민을 적어서 보내는지 알 것만 같았다. 마음 한 구석의 구멍을 메워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 아무런 대가없이, 정성스레 대꾸해주는 나미야 할아버지였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해서 끙끙대던 고민을 꺼내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들을 워낙 좋아해서,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을 모두 보았고, 또 많이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웬지 선뜻 내키지가 않았던 것이 편지를 주고 받는 다는 설정때문이었는데, 에피소드 나열식의 이야기에 별로 흥미가 없었던 탓이다. 단편집 혹은 에피소드 나열식의 이야기는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지만 그만큼 깊이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뭐랄까. 이번 작품은 그런 나의 우려를 괜한 걱정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할까. 다양한 사연들이 전개되고, 실제 편지 원문과 답장 원문이 게재되어있음에도 전혀 지루하거나, 진부하지 않다.

 

달토끼, 생선가게 예술가, 길 잃은 강아지 등등의 필명으로 이어지는 고민 상담과 그들의 이야기는 각각 별개의 삶인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 각각의 인물들이 사연에도 충분히 공감이 되고, 그들의 관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묘한 운명에 감탄하게 된다고 할까. 게다가 단순히 과거에 운영되었던 고민상담의 사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도둑 삼 인방이 우연찮게 개입되어 과거의 그들과 편지를 주고 받고,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삶이 달라지고, 또 그 결과가 현재의 도둑 삼 인방에게 영향을 준다.


별 생각없이, 장난처럼 아무 뜻 없이 보낸 자신들의 답장때문에, 과거의 한 인물이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 결국 그들도 변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우리 같은 놈들한테, 쭉정이 백수인 우리한테..고맙다고 편지를 보내준 이의 진심을 느낀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불그레한 눈에 눈물이 글썽이던 그 때에, 마지막 답장이 도착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이런 기적을 믿지 못해서 테스트하려고 넣어둔 백지 편지에 대한, 나미야 할아버지의 진심어린 답장이었다.

 

"나에게 상담을 하시는 분들은 길 잃은 아이로 비유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지도를 갖고 있는데 그걸 보려고 하지 않거나 혹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마 당신은 그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것 같군요. 당신의 지도는 아직 백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정하려고 해도 길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일 것입니다. 지도가 백지라면 난감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라도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겠지요.
하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해봅시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아, 이건 뭐.. 나는 그냥 이 작품에 바로 항복하고 말았다. 감동이란 이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울컥하게 되는 감정이니 말이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 라고 또 감탄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어떤 공간에서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서 과거의 편지가 현재의 누군가한테 오고 거꾸로 현재의 누군가가 우유 상자에 넣은 편지는 과거의 누군가에게 배달되는, 그런 기적 같은 일이 바로 지금도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든다. 그렇다면 나의 가슴 속 구멍에도, 나미야 할아버지가 따뜻한 조언을 해주실 것만 같다. 말도 안되는 환상이란 걸 알지만서도, 그것이 진짜라고 믿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 진짜 기적은 바로 이런게 아닐까 싶다. 나미야 잡화점에 들러서 나도 행복을 사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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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수인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주원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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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릴적 꿈은 책방 주인이었다. 책들로 잔뜩 둘러쌓인 공간에서, 읽고 싶은 만큼의 책들을 실컷 보는 게 어린 나의 로망이었으니까. 그렇게 상상 속의 서점이 완전한 실체의 모습을 가지고 나타난 것이 바로 '바람의 그림자'였다. 그래서 나는 그 책을 닳도록 읽고, 또 읽었었다. '잊힌 책들의 묘지'는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진짜로 존재하는 장소였다.

 

내 개인적 경험에 비춰보자면, 그곳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매혹되어 경탄을 금치 못한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경내가 말을 멈추고 사색과 몽상에 잠기게 하는 것이다. 물론 페르민은 남달랐다. 처음 삼십 분 동안은 최면에 걸린 듯 있더니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미로 같은 그 거대한 퍼즐의 구석구석을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때론 멈춰 서서 마치 그 견고함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손가락 관절로 부벽과 기둥들을 톡톡 두르렸다. 그리고 모퉁이마다 멈춰 서서 손차양으로 먼 곳까지 바라보면서 규모를 가늠해보려고 했다. 책들이 나선형으로 자리잡고 있는 도서관을 거닐면서 끝없이 늘어선 무수한 책들의 등에 코를 바싹 들이댄 채 제목을 살폈고 도중에 발견하는 모든 것을 조목조목 구분 지었다.

 

 
'바람의 그림자'로 부터 무려 11년만이다. 당시에 내가 이 책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지금도 어제처럼 생생한데 말이다. 도서관과 책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잊힌 책들의 묘지'는 정말로 실제한다면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꿈의 장소였다. 작가의 생생한 묘사가 얼마나 섬세하던지..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이 장소가 정말 실제하는 것만같은 착각에 빠졌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천사의 게임에 이어서 굉장히 오랜만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신작이다. '바람의 그림자', 그리고 '천사의 게임'이 너무나 오래전부터 내 기억속에 있는 작품이라.... 어쩌면 잊고 있었던 시리즈인셈이다. 처음 신작 소식을 듣고는, 내가 잘못 봤나 싶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간의 두 작품에서 훌리안 카락스와 다비드 마르틴... 그리고 다니엘 샘페레의 이야기에 비해서 사실 페르민은 주변 인물에 불과했었다. 이번 '천국의 수인'은 바로 페르민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와 동시에 전작이었던 두 작품과 이번 작품을 하나의 연결고리로 묶어버리는 작품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작품만으로는 어딘가 조금 아쉽긴 하다. 전작들에 비해 분량이 짧아서 일수도 있겠지만, 전작을 읽어보지 않았던 사람이 사폰의 작품을 처음 만나게 되는 거라면, 별로 권유하고 싶지 않을 만큼.

 

하지만... 반드시 '바람의 그림자'와 '천사의 게임'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꼭 봐야한다고 추천하고 싶은 책이며, 그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운 선물이 될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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