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 차가운 오늘의 젊은 작가 2
오현종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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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일 바닥을 밟는 소리가 아작, 하고 단호하게 들리는 순간에야 비로소 들어온 구멍으로 다시 나갈 수 없음을, 모든 일은 돌이킬 수 없음을 확연하게 깨달았다.


어쩔 수 없지, 악을 없앨 방법은 악밖에 없는걸. 죽느냐 죽이느냐, 둘 중 하나라고.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영화 <짚의 방패>에도 이와 유사한 윤리적 질문이 등장한다. 사랑하는 손녀딸을 살인자에게 빼앗긴 재계의 거물이 그를 죽이면 100억 원을 주겠다고 현상금을 내건다. 엄청난 현상금 덕분에 범인은 전 국민의 타겟이 되어 버리고, 목숨의 위협을 느낀 범인은 경찰서에 자수를 한다. 문제는 그를 검찰에 송치하기 위해서 경시청으로 이동을 시켜야 하는데, 과연 그들은 무사히 범인을 호송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법적인 교육을 받은 경찰관부터 간호사, 정비사 등.. 그러니까 범인에게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100억이라는 돈 때문에 그를 죽이려고 달려든다. 경찰에서는 범인이 법의 심판을 받게 하기 위해서, 범인을 안전하게 지키며 호송을 해야 한다. 그를 경호하는 과정에서 경찰, 일반일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는다.

 

"악을 없앨 방법은 악밖에 없을까?"

 

여기서 우리는 딜레마에 빠진다. 과연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경호를 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인가? 대상이 누구든 경호 대상을 지키면 된다는 직업적인 소명감이 이런 경우에도 과연 옳은 일인가? 살인교사는 분명히 나쁜 죄이지만, 아무 죄 없는 어린 여자 아이를 학대하고 죽인 죄에 비할까? 이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다면, 누구라도 범인을 죽이고 싶은 분노가 생기지 않을까? 게다가 범인은 동종의 범죄로 복역하다 가석방 중이었다. 법적인 처벌을 받았지만, 결국 또 사회에 나와서 같은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결국 법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 아닐까? 끔찍한 악이 팽배한 부조리한 세상에서, 법이 피해자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면 직접적인 응징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물론 무분별한 개인적 복수로 사회가 무법천지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란 무엇인지,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다들 지옥에 있다고 하지. 모두 너 때문에 내가 지옥에 있다고 욕하는데, 너 역시 지옥에 있다고 아우성을 쳐. 그러면 이게 다 누구 책임일까."

 

오현종 작가의 <달고 차가운>이라는 작품에서는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 것으로 도덕적 가치에 대해 질문한다. 어린 딸에게 성 매매를 강요하고 가족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악마 같은 사람이라면, 죽어도 상관없다라는 것이다. 그대로 두면 더 나쁜 짓을 저지를 것이고, 또 다시 어린 소녀를 지옥 같은 풍경 속으로 밀어 넣을 테니까, 그런 나쁜 짓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벌어진 살인이니 정당하지 않는가.라고. 악을 없애기 위해서, 또 다른 악으로 대항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니체의 그 유명한 경구를 떠올려보자.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한다고 했다.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그를 들여다보게 되니까 말이다. 따라서 피해자의 절망감과 분노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더라도, 복수를 위한 악마적인 행동에는 보편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악이라는 것은 한번 빠지면 좀처럼 쉽게 빠져 나오기 힘든 구렁 같은 것이니까. 이 작품이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악을 없애기 위해서 악으로 대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악이 아니었다면??

 

대학 입시에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재수 학원에 다니는 강지용은 학원에서 민신혜를 만난다. 그녀와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면서 그들은 서로에게 공통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지용은 유치원 원장인 어머니와 고시 출신 공무원인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평범한 자신이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특별한 아들이 되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어머니의 구속과 기대가 부담스럽고 속물같고 싫다. 그래서 차라리 부모가 없었다면, 고아였다면 좋겠다고 상상했던 적이 있다. 신혜는 술집을 운영하는 어머니가 어릴 적부터 성 매매를 강요했다고 한다. 마녀가 사는 집에서 달아나고 싶지만, 지금은 배다른 어린 여동생에게 그녀가 무슨 해를 끼칠지 몰라 달아날 수도 없다고. 진짜 지옥이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난 항상 지옥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야 했다고 말한다.

 

지용은 그녀를 울게 만드는, 그 괴로움으로부터 그녀를 구출하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생각했던 자신의 부모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만, 대신 다른 사람의 부모를 사라지게 할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차피 나에겐 타인이고, 어차피 그녀는 죽어 마땅한 짓을 저지른 악마 같은 여자이니까. 라고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그러니까 넌 아무것도 하지마. 내가 널 지옥에서 구해줄게. 내가 네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줄게. 악을 없애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어. 죽느냐. 죽이느냐. 내가 그녀를 죽이지 않으면, 사랑하는 신혜가 죽을 것처럼 괴로우니까. 그래서 그는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나기 전에, 신혜의 엄마인 호프집 여사장을 살해하고 강도의 소행으로 위장하는데 성공한다. , 여기까지의 스토리는 평범하다. 그러나 오현종 작가는 전제를 뒤집어버리는 선택을 한다.

 

"내가 아니어도 그랬을 거잖아. 넌 누구라도 죽이고 싶었잖아. 그랬잖아."

 

그는 완전 범죄를 저질렀고, 무사히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누나와 함께 지내면서 그는 악몽에 시달리고, 결국 중간에 신혜가 보고 싶다고 부모님 몰래 한국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신헤의 핸드폰 번호는 없는 번호라고 확인되고, 그녀가 다닌다던 학교에는 아예 다닌 적도 없고, 그녀의 여동생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고, 교통사고로 죽었다던 새 아버지는 멀쩡히 살아있으며.. 설상가상으로 그 새 아버지라는 사람이 신혜의 애인이었다. 신혜는 그 남자와 살고 싶었고, 그걸 가로막는 존재를 없애고 싶었던 차에 지용이 대신 살인을 저질러 준 것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지용이 저지른 살인에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존재했던 토대 자체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간단하게 이것은 덧셈과 뺄셈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원인이 없어졌는데, 결과만 남았다. 그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그가 지어야 하는 것이다. 신혜를 위한 일이었다는 '선의'가 사라지자, 그가 여자를 살해했다는 '악행'만 남아버린다. 지용은 결국 신혜를 찾아서 진실과 직면하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용이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고 싶어했던 그 은밀한 욕망을 대리 충족시키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남들에게 일어나지 않는 기적이 자신에게는 일어날 거라고 믿는 어머니를 혐오하던 지용은, 그러나 만약 자신에게 기적이 온다면 거절하고 싶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똑같은 실패를 반복해서 겪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모두가 기적을 기도한다면 불운은 누구의 몫일까.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시작될 때, 우리는 흔히들 이런 인사를 한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는 바라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 끔찍하게도 무서운 이야기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일과 살인범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바라는 일, 이윤을 얻기 위해 기업 총수가 바라는 일과 힘없는 샐러리맨들이 바라는 일들이 과연 '함께'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현실을 견딜 수가 없어 미쳐버릴 것만 같던 신혜가 부러워했던 지용의 일상이, 사실은 부모의 기대와 압박에 질식해버릴 지경이었던 불행한 하루였던 것처럼. 누구나 자기 기준에서의 지옥에 있으며, 내가 이렇게 불행한 이유는 타인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타인조차 스스로 지옥에 있다고 아우성을 친다면, 그렇다면 결국 이 모든 일은 누구의 책임이란 말일까.

 

강지용에게 달콤하고, 차가운 것과 부드러운 것은 모두 같은 의미이다.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도 기적처럼 얻을 수 있는 그런 요행 같은 것만 꿈꾸는 것이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불안했지만 그는 낳아 달라고 애원한 기억이 없으므로 미안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사는 속물 같은 인물에겐, 살아가는 일에는 달콤한 초콜릿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 공평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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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심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13
미하일 불가꼬프 지음, 정연호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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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불가코프의 <개의 심장>이 열린 책들과 창비에서 각각 다른 번역자로 비슷한 시기에 출간이 되었다. 지난 번에는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눈먼 올빼미>가 다른 출판사, 다른 번역으로 나란히 출간된 적이 있었는데, 독자 입장에서는 선택과 비교의 폭이 넓어지니 재미있는 현상인 것 같다. 이 작품은 1920년대 혁명과 내전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의사였던 작가 불가꼬프가 과학이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써낸 기발한 작품이다. 인간의 놔하수체와 생식기를 개에게 이식을 한다니, 어쩜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는지 작품의 시작부터 너무도 독특하고 기발해서 흥미를 유발시키는 작품이라 하겠다.

 

극중 쁘레오브라젠스끼 교수는 뇌하수체의 적응성에 대한 문제를 연구 중이다. 그래서 그것이 사람의 유기체를 젊어지게 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분명히 밝히기 위하여 뇌하수체과 고환을 연결해 이식하는 실험을 하게 된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주인 없는 개를 데려다, 부랑자의 시신에서 남성의 생식기를 이식하고, 인간의 뇌하수체로 교체를 하는 엄청난 수술을 한다. 그리고 경과를 지켜보는데,  갑자기 이마와 몸통 옆구리에서 털이 현저하게 빠지고, 개 짓는 소리가 멍멍 소리 대신에 아-오 음절로 바뀌고, 대단한 식욕을 보이더니 몸무게가 늘어나고, 웃고, 단어를 짖어 대는 지경에 이른다. 개가 점점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개 샤리크가 아닌 인간 샤리꼬프가 된 것이다. 뇌하수체의 이식이 개를 젊어지게 한 게 아니라, 아예 개를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 놀라운 대발견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회자되는 커다란 사건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샤리꼬프가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은 하지만, 인간답지는 않다는 것이다. 욕을 하고, 흡연을 하고, 술을 마시고, 인간처럼 먹고, 옷을 입고, 말을 하지만 그것이 '인간' 처럼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행동을 그저 따라 할 수는 있겠지만, 윤리적인 판단을 하고,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 '인간답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한테 나를 수술해 달라고 청한 적이 있나?

 

그는 흥분하여 지껄이기 시작했다

 

좋은 일 하셨구먼! 동물을 잡아다가 칼로 머리를 길게 썰어 줄무늬를 만들어 놓고서, 이제 와서는 싫어하고 경멸하신다 이거지. 나는 나를 수술하라고 허락하지도 않았어. 그리고 또 마찬가지로... (그는 천장을 향해 두 눈을 위로 치켜 뜨고, 마치 모종의 법률적 문구라도 회상해 내려는 듯했다) 마찬가지로, 내 친족들의 동의도 없었다고. 나는 민사상의 손해 배상을 청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어.

 

 

불가꼬프는 당시 러시아 혁명으로 만들어진 소비에트 인간형을 풍자하고 사회주의의 허상을 이렇게 비판한다. 물론 우리는 러시아 혁명을 배경으로 한 혹은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배경으로 한 숱한 작품들을 이미 본 적이 있다. 루타 서페티스의 <회색세상에서>, 톰 롭 스미스의 <차일드 44> 그리고 영화 <웨이백>, 조금 멀리 영화 <타인의 삶>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회주의란 국가가 인간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이다. 당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러시아는 완벽한 공동체를 향한 최초의 인간 실험장이었다는 말조차 있을 정도니 어느 정도인지 알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공동 아파트에 거주하며 개인적인 생활은 국가에 의해 철저히 감시를 당하고, 불순분자로 찍히면 바로 노동수용소행이다. 따라서 집단적 인간은 자신의 사생활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사생활을 감시해야 했고, 자연스레 자기중심주의가 자라나는 온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체포되지 않기 위해 남을 고발해야 했던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느 한 순간도 마음 놓고 대화하지 못하고속삭이며살아야 했으니, 과연 사회주의 유토피아라는 게 말이 되는 얘기일까?

 

불가꼬프는 개를 인간으로 변형시키는 비자연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수술을 볼셰비끼의 파괴적인 혁명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 수술이 잘못되었음을 마치 혁명의 부당함을 알리듯이 주인공 쁘레오브라젠스끼를 통해 전한다. 1925년에 쓰인 이 작품은 1988년에 블라디미르 보르트코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대체 인간처럼 변한 개는 어떤 모습일까?>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에 영화도 찾아서 보았다.

 

영화 속의 '개 샤리크' 와 인간 '샤리꼬프'는 바로 이런 모습이다.

 

 

소설에선 쁘레오브라젠스끼 교수를 중심으로 수술을 하고, 관찰을 하면서 그의 심경 변화가 중점적으로 서술되었다면, 영화에서는 그런 변화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인 부분에 조금 더 시선을 두고 만들어진 느낌이다. 무산계급의 혁명대원들에게서 울려 퍼지는 혁명의 목소리, 모두 방을 나눠가져야 하는데 박사 혼자 너무 넓은 공간을 차지한다며 쳐들어온 이웃들, 그리고 사람의 형상을 하고는 있지만 기존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샤리꼬프. 게다가 그는 이제 자신이 사람의 형상이니 다른 사람들처럼 서류에 이름도 올리고 싶고 어쩌고 하면서 슬슬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다. 결국 교수는 창조가 아닌 또 다른 변형물인 개인간을 만들어 낸 것이 중대한 실수였음을 직시하고..샤리꼬프(개인간)을 다시 샤릭()로 환원시키는 수술을 단행한다. 마치 작가 자신이 당시에 저질러지고 있던 혁명의 소용돌이를 다시 그 이전으로 환원시키고 싶었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은 사람 다울 때, 개는 개 다울 때가 가장 자신다울 수 있다. 각자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제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리를 거역했을 때 엄청난 재앙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 사회에도 자연스러운 법칙과 순리가 있거늘, 국가에서 강제로 통제하여 억지로 만들어내는 평등은 부자연스럽고,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어찌 보면 기발한 발상으로 풀어가는 한 편의 소동 극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짐작해보면 슬프고 무서운 작품이다.

 

소설을 읽고 내용 파악이 잘 안되거나, 이미지가 와 닿지 않다거나 하는 경우에는 영화로도 만나보기를 권한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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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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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의 주인공은 65세 할머니 킬러이다. 손톱이라는 의미의 '조각'이라는 가명으로 45년간 킬러로 살았고,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현직킬러이다. 그녀는 청탁 받은 존재들을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제거하는 청부살인업자이다.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나 친척 집에서 눈치 밥을 먹으면서 자랐고, 집을 나와 주방 일을 하던 시기에 자신에게 달려드는 미군을 방어하다 죽인 것이 그녀의 첫 살인이었다. 살인의 시작에 매우 분명하고, 명확한 이유가 있는 정당방위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녀는 사랑했던 남자 ''에 의해서 전문 청부살인을 시작하게 되고, 결국 그것이 그녀 삶의 전부가 된다. 자신의 의지로 시작한 살인은 아니었지만, 평생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살인을 했고, 무려 60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현역 활동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존심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조각이 어떤 캐릭터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을 보자.

 

그녀가 심란한 이유는 팔이 붙잡힌 순간 곧바로 소매를 뿌리치려고 했으나 투우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없어서인데, 자신의 신체적 노화가 일상의 노력을 추월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초조함이다. 베일 철을 지난 이삭은 고스러지게 마련이고 젊은 남자와 나이 든 여자의 당연한 힘 차이라는 건 이 상황에 고려 대상이 아니며 지금은 업자 대 업자일 따름인데 조각으로선 사소하고 순간적인 장면이라 한들 이 코흘리개한테 졌다는 게 핵심이다. 상대방에 대한 감정적 반응보다 부실한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한 실망 때문에 그녀는 투우가 천천히 힘을 풀고 소매를 놓았음에도 그 자리를 떠날 생각을 미처 못 하고 다시금 소파에 주저 앉는다.

 

물론 육 십대의 그녀가 삼 십대의 투우와 힘 싸움으로 이길 수 있을리는 만무하다. 그녀가 아무리 노련한 킬러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투우는 조각을 만날 때마다 시비를 걸고, 그들은 그렇게 늘 부딪힌다. 그래서 이런 순간에도 <부실한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한 실망>을 느끼는 그녀의 마인드야 말로 그녀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여태껏 그 누구한테도 기대거나, 혹은 기대어보려고 마음을 먹거나 한 적 없이 자립적으로,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온 강단 있는 여성 캐릭터라는 느낌이다. 물론 작가는 외부에서 노인들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선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의 처음 지하철 내의 풍경을 묘사한 장면은, 우리가 매일같이 실제 보는 그 풍경이다. 노인에 대한 젊은이들의 시선과 생각, 그리고 '나이 듦'을 권력으로 이용하려는 횡포와 실제 그들의 쇠락한 육체가 비춰지는 모습까지 말이다. 하지만 '조각'이 여느 노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온 건 분명하다. 그리고 그녀의 킬러로서의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여전히 의뢰를 받아서 방역 업무를 하고 있으며, 젊은 그 누구에게도 실력으로 밀리지 않는다.

 

조각은 길 잃은 개 무용과 함께 지내는데, 무용을 집에 데려온 뒤로는 항상 창문을 열어둔다. 그리고 창문을 밀어젖히는 모습을 몇 번이고 무용에게 보여주며 확인시킨다. 언젠가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혹은 어느 날 아침 네가 눈을 떴을 때 내가 누워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면.. 그때 너는 저리로 나가야 해.라고 가르쳐주기 위해서. 너는 나가서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개 장수들한테 잡히지 말고. 사람들이 너를 안락사 시키지 않도록. 늙은 개는 누구도 맡으려고 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 이런 순간에야 조각이 평범한 65세 할머니처럼 느껴진다. 혼자 남겨질 누군가를 걱정해야 할 만큼, 이제는 어느 날 갑자기 어떻게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나이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평소와 달리 방역 작업 준비 중에 만난 폐지 수거 노인을 도와주다, 작업을 망쳐버리고 만다. 그리고 다친 자신을 몰래 치료해준 강박사의 가족에게 연민을 가지고, 그의 딸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면서, 처음으로 '연민'을 가지게 된다. 물론 그것이 노화의 증거라고 스스로 느끼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복숭아, 그 뒤로 복숭아를 어떻게 했더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조각은 냉장고를 연다. 혼자 살면서 식료를 쟁여둘 일이 없으니 냉장고는 300리터다.

이 참에 한꺼번에 청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하단 채소 칸을 연다.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이 세 덩어리 보인다. 집에 와서 그녀는 꼭 한 개를 먹었을 뿐이고, 그 뒤로 잊어버린 모양이다.

 

냉장고에 넣어둔 과일이나 채소가 색이 변질되고 형태가 망가지는 걸 누구나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난 여름에 남자친구가 복숭아를 한 박스 집으로 보내준 적이 있다. 주문하면서 모양 예쁜 걸로 잘 골라서 담아달라고 했다고 하면서. 그래서인지 도착한 복숭아 한 상자엔 멍들지 않고, 탐스러운 복숭아들이 가득했다. 색깔이 변하지 않게, 물러지지 않게 빨리 먹어야지. 마음 먹었었는데, 워낙 집에서 뭘 잘 안 먹는 성격이라 그런지 이 주쯤 지난 뒤에 어김없이 모양이 망가진 '파과'들을 냉장고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음 써준 남자친구에게 미안해서 그것들을 골라 잘라서 조각을 내고, 성한 부분만 모아서 복숭아 잼을 만들었다. 잼을 만드는 것이 결과적으로 복숭아의 유통기한을 늘려주는 것이 되었지만, 그래도 싱싱한 과육 상태일 때 그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미안함 마음이 남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달콤하고 상쾌하던 것이 갈색 덩어리로 변해서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무엇으로 변해버리는 것이, 어쩌면 우리네 인간이 자연히 나이를 먹어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원한 젊음이란 없으니까. 과일이 만들어질 때부터 방부제로 보존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조각은 투우와의 마지막 결전의 날을 앞두고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콜트 45구경을 꺼낸다. 오래되었다고 해도 구한 지 15년은 넘지 않았고, 밀봉상태였으니 불발탄이 나올 가능성이 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하루가 달라지는 자신의 몸만큼이나 그것의 기능이 불안해 점검을 받으러 나선다. 사람의 영혼을 포함해서 자연히 삭아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물건은 노후 된 육체와 마찬가지로 영원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파과'라는 제목만큼이나 작품을 읽는 내내 어디선가 복숭아의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아마도 사라져 버린 것들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느낌에 내가 지난 여름의 그 과육에 대한 미련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리고 같은 시기에 출간된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과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미 많은 이들이 리뷰에서 이 두 작품에 대한 감상문을 올렸지만, 같은 소재로 이렇게나 다른 색깔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흥미로움이 나도 몇 자 끄적이게 만든다.

 

구병모의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이고, 김영하의 이야기는 다소 '후일담'같은 느낌이다. <파과>의 문장은 호흡이 매우 길어 대충 흘려 읽으면 의미가 분명하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어, 천천히 꼭꼭 씹어가며 읽어야 한다. 대신 주인공이 왜 킬러 일을 하게 되었는 지와 그녀가 '방역'을 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묘사가 되어 있어 스토리 자체는 구체적이고 분명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문장은 단문이라 속도감 있게 페이지가 넘어간다. 그러나 치매에 걸린 늙은 살인범이 기억과의 사투를 벌이는 스토리는 서사가 툭툭 끊어지며 전개되어 불친절하다. 그가 왜 살해를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동기와 살해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없기에 모호하다. 누군가는 구병모의 긴 문장이 술술 읽히지 않고 자꾸만 걸린다고 불편해하고, 누군가는 김영하의 이야기에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아쉬워한다. 그러나 두 명의 완전히 다른 색깔을 가진 작가가, 정확히 같은 시기에 유사한 소재로 다른 이야기를 풀어내었다는 것 자체가 독자 입장에서는 꽤나 행복한 일이 아닌가 싶다. 간결하고 압축되어 짧은 남성적인 문체의 너무나 잘 읽히는 작품과 호흡이 길고 수식이 많아 긴 여성적인 문체의 너무나 어렵게 읽히는 작품. 그러나 전자는 스토리가 모호하고, 반면에 후자는 스토리가 명확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주인공 70세 김병수는 은퇴한 연쇄 살인범이다. 30년 동안 사람을 죽였지만, 마지막 살인으로부터 25년이나 흘렀다. 그리고 그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자신의 사라져 가는 기억과 사투 중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서 마지막 살인을 계획하려고 한다. 이제 그에게 마지막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내 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기 전에 박주태를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이 적어둔 기록도 다음날이면 까맣게 잊어버리는데. 김병수의 첫 살인은 자신의 아버지였다. 술만 마시면 어머니와 여동생을 두들겨 팼던 아버지에 대한 살인은 그 이후에 30여 년 동안 행했던 살인과 인과관계로 이어지진 않는다. 그가 왜 아버지 이후에, 다른 사람들을 계속 죽여야 했는지에 대해서 작품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후반부로 갈수록 스토리 자체가 모호해진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이니 독자가 혼란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말이다. <파과>는 반대로 주인공 65세 조각이 왜 킬러가 되었고, 현역으로 활동하면서 실제 그녀가 사람을 죽이는 방식까지 구체적으로 묘사가 되어 스토리가 매우 명확하다. 3인칭으로 쓰여진 시점이라 각 캐릭터 별로 사연과 감정선이 분명하게 보여진다. 김영하의 작품이 150페이지 정도의 아주 가볍고 짧은 책으로, 수식 없이 단문으로 이루어진 문장이 스륵스륵 책장이 넘어가는 것에 비해 내용을 모호하게 만들었다면, 구병모의 작품은 스토리가 명확한데 비해 호흡이 긴 문장들로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더디게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렇게나 다른 두 작품이지만, 사실 두 작품 모두 매우 흥미롭고 매력적인 부분들이 많다. 으깨진 과일.에서 소멸하는 육체에의 비유를 발견하고 이팔청춘이 지나가버린 늙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만든 구병모 작가도 멋지고,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범이 마지막 살인을 준비하고, 살인일지를 쓰는데 문장력이 부족해 시 강좌를 듣는다는 설정을 한 김영하 작가도 멋지다. 구병모 작가는 독자들이 페이지를 빨리 넘기는 것이 싫어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좀 들여서 읽으라는 뜻으로 긴 문장을 썼다고 하는데, 그에 따라 누군 가에게는 그 긴 호흡들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김영하 작가는 이번 작품이 하루에 한두 문장, 한 단락 정도만 쓰는 날이 많았을 정도로 천천히 쓰였다고 하는데, 그와 반대로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너무' 잘 읽혀서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구병모 작가의 결말은 어딘지 쓸쓸하기 보다는 따뜻하고, 김영하 작가의 결말은 서늘하고 섬뜩하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부서지고 소멸에 가는 것들에 대한 시선이 아닐까 싶다.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궂은 농담이다' 라는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어쩐지 그의 짧은 소설은 농담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피식 웃게 만드는 이야기 속에 남아 있는 건 찝찔한 슬픔의 맛이 남아 있다. '육체적인 소멸과 더불어 사회적인 시선에 저항하는 방식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킬러라는 소재를 사용했다'고 하는 구병모 작가의 말처럼, 그녀의 소설은 늙어서 약해져 가는 인간에 대한 애틋하고도 달콤한 맛이 나는 우화처럼 느껴진다.

 

이런 두 작가의 '다른' 작품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건, 같은 시대를 사는 독자로서의 즐거움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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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출간작 중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윌리엄 랜데이의 <제이컵을 위하여>였다. 이 작품은 출간하자마자 이미 본 터라, 이 작품을 제외하고 나니.. 8월은 지난달 에 비해 기대작들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 

 

 

<자비를 구하지 않는 여자>를 잇는 미결 사건 전담 ‘특별 수사반 Q’ 두 번째 시리즈이다. 미모의 여성 정치인 메레테 륑고르의 실종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하여 일약 스타로 떠오른 코펜하겐 경찰서의 미결 사건 전담 '특별 수사반 Q'의 명콤비 칼 뫼르크와 아사드가 맡은 두 번째 사건은 '종결 사건'이라고 한다. 범인이 재판을 받고 복역하여 곧 출소를 앞두고 있는 종결된 사건이 왜 그들에게 주어졌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스토리가 진행될 것 같다. '특별 수사반 Q’ 시리즈는 국내에 출시된 두 편외에도 『도살자들』『병 속에 담긴 메시지』『저널 64』등 시리즈가 많은 걸로 알고 있다. 유시 아들레르 올센은 영미권에서 북유럽 작가 중 "요 네스뵈" 다음으로 판매부수를 포함해서 가장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작가인데, 국내에서도 요 네스뵈, 넬레 노이하우스, 스티그 라르손처럼 많은 시리즈로 앞으로 출간이 될지 기대해보아야겠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옷수선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라고 한다. 진정한 사랑과 결혼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단순한 설정에 비해 이 작품이 궁금한 이유는 수많은 상징과 일러스트, 사진, 그림 등을 텍스트 곳곳에 배치했다고 하는 부분 때문이다. 웬지 아주 예쁜 소설일 것 같은 기대감이 든다. 게다가 작품 곳곳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하니, 더욱 내 스타일 일 것 같은 기분이 무럭무럭.. ㅎㅎ 아 대체 세상에는 데뷔작을 이렇게 잘쓰는 작가들이 많은 걸까나..ㅋㅋ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은 국내에서 꽤나 꾸준히 출간이 되고 있다. 이번 작품은 <점과 선>  2탄이긴 하나, 후일담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한다. <점과 선> 의 주인공 도리카이 주타로와 미하라 기이치 콤비가 다시 등장한다는 얘기인데, 마쓰모토 세이초의 전 작품 중에 동일 인물이 연이어 등장한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라고 한다. 뭐 그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말일 것이다. 아직 <점과 선>은 10년 점쯤에 동서문화사에서 출간되었던 다소 촌스러운 표지의 작품으로 읽었기에, 사실 이들이 어떤 캐릭터였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범임의 알리바이를 깨트려가는 세이초만의 추리 기법도 궁금한 작품이다.

 

 

 

 

곧 영화화 될 예정인 《허삼관 매혈기》의 작가 위화의 새로운 작품이 출간되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 아웅다웅 살아가는 가족들의 이야기와 위화 특유의 휴머니티가 돋보이는 작품일 것 같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유사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과 서로를 증오하는 혈연 가족의 모습은 현실적이면서도 우리에게 무언가 메세지를 던져줄 것 같다. 무엇보다 스토리가 주인공이 죽고 7일 동안 연옥에서 이승의 인연을 만나는 과정에서의 이야기라 더욱 궁금하다.

 

 

 

 

 

프랑스 스릴러 장르의 대표주자인 다비드 카라의 작품으로 국내에 첫 선을 보이는 작가이다. 이미 영화화가 결정되었고, 유머와 서스펜스가 공존하는 스릴러라고 하니 기대가 된다.  국내에서도 정유정 작가의 <28>과 영화 <감기>를 통해 바이러스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금 부각되고 있는데, 이 작품은 바이러스의 공포를 나치 생체실험과 잘 버무렸다고 하니, 어떤 색깔일지 궁금하다. 일명 '프로젝트 3부작'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니, 첫 테이프를 잘 끊는 작품이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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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키호테, 부딪혔다, 날았다 - 라만차 돈 키호테의 길
서영은 지음 / 비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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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는 기사인 척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밑바닥까지 이미 기사인 사람이에요. 그는 자기 자신을 의의 병기로 바치겠다는 각오였지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연극'과 돈키호테이 연극 성이 전혀 다른 이유는, 연극은 배우가 자기 아닌 어떤 캐릭터를 그럴 듯하게 연기하는 것이고, 돈키호테는 그럴 듯하게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속속들이 기사인 자기 자신을 그대로 나타내 보여주는데 있지요. 그의 자기 확신이 너무 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를 대할 대 오히려 연극을 해야 되는 거지요. 타인으로 하여금 연극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돈키호테의 연극 성이라고 할까요?

 

 

충직한 하인 산초를 데리고 다니면서, 풍차를 적군으로, 이발사의 대야를 맘부리노 투구로 여기고 공격하는 돈키호테의 허무한 싸움은, 그가 가진 꿈이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매혹적이다. 누가 보아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건 허황된 꿈이나 이상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기사가 사라진 시대에 웬 노인이 자신을 방랑기사 돈키호테라 칭하고 여관을 성으로 여기고, 허드렛일을 하며 가끔은 몸을 파는 천한 알돈자를 고귀한 레이디 둘시네아라고 부르며 그녀에게 사랑을 맹세한다. 여기서 방점은 그가 기사인 척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밑바닥까지 이미 기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돈키호테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라는 작품을 발표한지 무려 400년이 넘었다. 서영은 작가는 이번에 마음껏 부딪히고, 두려움 없이 날아올라라!는 뜻의 멋진 제목으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라는 작품을 새롭게 읽어낸다. 바로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그 길에서, 스페인 마드리드 지역에 있는 세르반테스의 묘부터 둘시네아의 집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돈키호테와 산초, 둘시네아가 살아있는 듯한 자취를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스페인을 찾는 여행객들은 곳곳에서 그림이나 조각, 조형물 등으로 돈키호테와 산초를 만날 수 있다. 두 인물이 작품 속의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마치 실제 현존했던 사람들처럼 느껴질 정도로 거리 곳곳, 상점 곳곳에서 그들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다. 스페인 광장에 가면 세르반테스의 조각상과 돈키호테와 산초의 동상이 함께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가에겐 관심이 없고 돈키호테와 산초 앞에서 주로 사진을 찍는다. 이렇게 작품 자체의 불멸성은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는 인물들을 현실 속에서 구체화시킨다. 이런 것이 바로 글의 힘으로 현실이 달라지는 그런 순간이다. 작품 속의 인물들이 책 속에 있는지, 실제로 살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그런 지점 말이다. 극중 인물이 책 바깥으로 뛰쳐나오는 것이야말로 아마도 모든 작가들이 꿈꾸는 일일 것이다.

 

 

돈키호테의 역설은 철저하게 의미의 세계에 대한 것이에요. 풍차를 악의 상징, 양떼를 군대로, 이발사의 머리에 얹어진 번쩍거리는 대야를 맘부리노 투구로 여기고 공격하는 돈키호테의 모든 싸움의 진실은 사실의 세계를 뒤엎고, 사랑과 순종이 본질인 의미의 세계를 확장해가는 침노적 전투예요. 이 침노는 사실의 세계, 물질의 세계로만 보았을 때 생기는 우리 삶의 왜소함, 덧없음, 속절없음, 비루함을 갈아엎고 위대함, 거룩함, 성스러움에 접목시키려는 존재적 반란인 거지요. 그러기 때문에 이 인물이 소설 속 주인공이어서 우리하고 상관없는 허구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해 깨닫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광야의 소리 같은 거라고 생각돼요.

 

 

현실에서 돈키호테란, 꿈과 이상을 향해 두려움 없이, 다소 무모하게 직진하는 캐릭터에 자주 비유되곤 한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그 유명한 넘버 "The Impossible Dream"의 가사처럼, 그 꿈, 그 싸움 모두 이길 수 없고, 길이 아무리 험해도 나는 정의와 사랑을 위해 싸우겠다. 잡을 수 없는 별처럼 먼 희망이라도, 나는 멈추거나 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가겠다는 것이 바로 돈키호테의 정신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이야기. <사실은 이렇지만> 의 현실을 배제한. 왜냐하면 이상 가득한 우리의 기사 돈키호테와 험난한 모험을 떠나더라도 산초는 여전히 아내에게 구박을 받고, 돈키호테의 충고에 따라 주변 남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어보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당하고 마는 알돈자는, 여전히 천한 여종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니 말이다.

 

 

꿈도 열정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현실을 무시하고 공상에 빠진 사람들이나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서영은 작가의 말처럼 어느 시대이든지 투혼은 인간에게 자기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힘이 되어준다. 돈키호테가 정의감에 사로잡혀 분별없이 행동하는 무모한 캐릭터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는 최소한 자기 자신을 속이지는 않았다. 기사인 척 연기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이 기사라고 믿고 그에 맞게 행동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럴 듯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삶을 살아내는 것 말이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태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거리낌이 없다는 그 순수한 마음가짐. 나는 그것에 가치를 두고 싶다. 바로 소설 속 주인공이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실체로 거듭하는 그런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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