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시 태어난다면 

사랑을 담아내는 편지처럼 살리라 

 

폭포수 같은 서린 그리움에 

쉬이 얼룩져 버리는 백색의 편지지가 아니라 

오염될수록 싱그런 연두빛이었으면 좋겠다 

 

나 다시 태어난다면 

사랑을 담아내는 편지처럼 살리라 

 

가슴에 커져버린 암울한 상처에 

마침표를 찍어버리는 이별의 편지가 아니라 

상흔속에서도 뿜어내는 

시작의 편지였으면 좋겠다 

 

미움은 온유함으로 지워버리고 

집착은 넉넉함으로 포용하면서, 

한장에는 사랑이란  순결한 이름을 새기고 

 

또 한장에는 

삶이란 소중한 이름을 써 넣으면서 

풀향보다 은은한 내음으로 

내 삶을 채웠으면 좋겠다. 

 

-----좋은생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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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마주이 수녀, 엠마뉘엘
엠마뉘엘 수녀 지음, 이정순 옮김 / 두레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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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생은 어떤 기준으로 평해야 할까?

이 책을 읽은 지 만 하루가 지나도록 리뷰를 쓰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꿈꾸던 삶과 비교할 때, 수녀님의 인생은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자글자글 주름잡힌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고있는 수녀님의 사진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수녀님은 1971년 예순두 살의 나이로 교사직을 그만두고, 이듬해에 이집트 카이로의 빈민가에 들어가 넝마주이들과 함께 23년간을 살았다.

넝마주이들이 모여사는 극빈촌. 여성에 대한 차별과 범죄가 들끓는 그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차라리 '모험'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가난은 그녀를 바닷물의 소용돌이처럼 빨아들였다.

염소 우리도 마다 않고, 장날이면 시장에 가기 위해 수레 한 차에 무려 30여명이 빽빽하게 실려가는 것도 기쁨으로 여겼다.  벼룩이나 구더기도 친구로 맞이했고,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유치원과 교육시설을 짓기 위해 전세계를 돌며 기부금을 호소했다.

수녀님이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이들의 교육이었다.  아이들은 글자를 배울 수도, 자연을 접할 수도, 자신들의 충동을 억제하여 자살을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이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동물원과 나일강에 데리고 가고, 자연에 나가 그때까지 '꽃 한 송이 꺾어 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꽃을 구경시켜 주었다.  캠프를 열어 아이들에게 깨끗하게 바뀐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기회였고,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자극제였다.  수녀님은 그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비록 가난하고 헐벗었지만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나눔을 베풀 줄 알고, 가족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수녀님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마음은 수수께끼다.  풍족한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갖고자 잠을 잊을 지경이지만, 반면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 즉 구두수선공들과 넝마주이들은 자기 사는 곳에 만족해 하고 노래까지 부른다."

성별과, 나이와, 학력과, 심지어 종교에 있어서도 차별을 두지 않았던 수녀님은 황폐한 빈민촌에 함께 살면서 학교를 세우고,협동조합과 무료진료소를 만들어 그곳의 삶을 바꿔 놓았다.

그녀는 '왜 카이로의 넝마주이가 부유한 자보다 만족도가 높은지'를 되묻는다.

행복은 가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정신'에서 오는 것이라는 수녀님의 말씀은 23년간의 그녀의 삶을 담담히 기록한 이 책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한 사람의 삶은 그의 전 인생에 있어 1/3만 남을 위해 살아도 그는 행복한 삶을 산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적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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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나의 이야기일 수도, 또는 글을 읽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의 탓으로, 또는 남의 탓으로, 또는 원인을 찾기 어려운 불가항력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곤 한다.  그 어려움이 경중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려움을 겪는 당사자에게는 하나의 어려움일 뿐이지 그 무게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일단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 반응하는 행동양상도 변한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과 비슷할지 모르겠다.

퀴블러 로스가 말한 죽음의 5단계에 의하면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mce)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어려움에 직면하였을 때, 나의 경험으로는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느끼곤 한다.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럴 리가 없어!'라고 부정하며, 조금 지나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생각으로 분노하게 되고, 이 상황에서 주변 환경과 타협함으로써 다른 돌파구가 있을 것이라는 미련을 두기도 한다.  결국 이도 저도 가능성이 없으면 극심한 슬픔에 빠지게 되고,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종국에는 현실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물론 순서가 뒤바뀌거나, 단계를 뛰어 넘을 수도 있겠고, 미처 수용 단계에 이르기도 전에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끝까지 영위하려는 사람에게 있어 이러한 과정이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어려움을 빨리 극복하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아니겠는가.

나의 경험을 되짚어 보면, 극도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감정에는 오직 자만심(또는 허세)과 오기만 남는다는 것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 허세를 부리고, 다른 사람의 충고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오기로 똘똘 뭉쳐져 있는 그 사람을 주변의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비난과 멸시로 그 사람을 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상황을 역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부풀리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약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오기를 부릴 수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만심이나 오기는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에게도 마음의 상처만 줄뿐, 어려움에 처한 당사자에게 정말 필요한 위로와 협조를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자만심과 오기만 남았으니 그에게는 위로와 기도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성인군자는 주변에 존재하지 않는다.  비난과 멸시가 심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은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이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려움에 대처하는 본인과 주변 사람들의 인식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본인은 힘들더라도 빨리 수용하고 자신을 최대한 낮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주변 사람들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일관하더라도 그를 가여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조건을 갖추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주변의 협조에 의지하는 것보다 본인의 마음을 통제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내가 마음을 돌려 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더라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 태도가 절실하다.  왜냐하면 나를 도와줄 의무가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마음이 변하는 순간 새로운 희망이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피어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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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의 일이다.

결혼 10년 만에 첫 아이를 얻고 그 아이를 위해 100일 기도를 온 어떤 부부가 있었다.

그때 스님이 하신 말씀은 이랬다.

  "자기 자식이라고 어떻게 저리 편애할 수 있을까?"

나는 순간 당황했다.

당시 나는 결혼도 하지 않은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오히려 스님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당연한 거 아냐? 스님도 참 웃기는 사람이네'하고 생각했었다.

 

곧 있으면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중 하나인 설이 다가온다.

즐겁고 행복해야 할 명절 모임에서 싸움과 분란이 일어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대부분은 자주 만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이해의 부족이 원인이지만 가깝다고 느껴서 무심코 내뱉은 말이 빌미가 되는 경우도 있다. 부부간에도 사소한 말다툼이 심각한 불화로 진행되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들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개인의 영역을 보장해 주지 않는 우리의 문화에도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가 유지하는 모든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되기를 바란다면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각각의 개인에게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는 불가침의 영역을 존중하고 부당하게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 문화에서 성장한 우리가 개인의 사적 영역을 인정하고 보장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단순히 가깝다는 이유로, 연장자라는 이유로, 또는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개인을 옭죄는 일은 삼가야 한다.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일.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데면데면한 관계가 되어서도 곤란하지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 상대방에게 간섭이나 모욕으로 비춰진다면 그 또한 곤란하지 않을까?

부모와 자녀, 아내와 남편, 가까운 친지 간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행위가 바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고 진정한 '사랑'이다.

 

스님의 말씀은 '편애'가 집착이나 간섭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어슴푸레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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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버린 사람들
나렌드라 자다브 지음, 강수정 옮김 / 김영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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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00년경에 만들어진 힌두경전 <리그베다>는 인간의 계급이 어떻게 탄생되는지 언급하였다.  그에 따르면, 태초에 우주의 본질을 상징하는 거대한 신 푸루샤가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창조했는데, 푸루샤의 입은 사제인 브라만이 되었고 팔은 군인계층 크샤트리아가 되었다. 허벅지에서는 상인계급 바이샤가, 두 발에서는 노예인 수드라 계층이 탄생하였다.  이 네 계급은 색깔이라는 의미를 가진 바르나 제도, 곧 사성제라고 불린다. 그리고 사성제에 들지 못하여 '아웃 카스트'라고 불리는 불가촉천민이 있었다.  그들은 수드라보다 더 낮은 최하층민이었다.(P.9 -P.10)

 

이 책은 '인도의 살아있는 영웅' 나렌드라 자다브의 자전적 소설이다.

불가촉천민(달리트)으로 태어난 그의 아버지 다무와 어머니 소누는 뭄바이에서 일이 없어 예스카르 의무(마하르들에게 부과된 마을의 의무)를 하기 위해 고향 오자르로 떠난다.  마하르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석 달씩 이 의무를 맡는데, 마을의 하인이 되어 마을 소식을 알리고, 부고를 전하고, 가축의 시체도 치운다.  이런 일들을 하는 대가로 약간의 곡물을 받고, 집집마다 다니며 남은 음식을 구걸할 수 있다.  어느 날 다무는 마을의 샘에 빠진 시체를 지키라는 순경의 지시를 받고, 밤새 허기를 참으며 지시를 따른다.  다음 날 서장의 부당한 지시에 항거하다 물매를 맞는다.  다무는 예스카르 의무를 뒤로 하고 소누와 함께 다시 뭄바이로 향한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인간답게 살기를 원했던 다무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긍심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달리트의 해방과 자유를 주장했던 암베드카르 박사의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부모는 자녀들을 교육함으로써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 달리트 출신 암베드카르 박사는 다무와 소누의 의식을 일깨웠고, 그들의 자식들을 최선을 다해 가르친다.  작가 나렌드라 자다브는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인도로 돌아와 국제통화기금의 관리가 된다.

더러운 발자국을 지우기 위해 허리춤에 빗자루를 매달고 다녀야 했던, 상층 카스트의 사람들과 우연한 접촉을 방지하기 위해 몸에는 종을 달아야 했던, 달리트 출신의 나렌드라 자다브는 상층 카스트의 여인과 결혼하고, 신성한 곳이 더럽혀진다는 이유로 그들의 그림자도 드리울 수 없었던 사원에서 제를 올린다.

그가 학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 다무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연구를 많이 해도 길거리의 사람들을 돕지 못한다면 전부 낭비일 뿐이다."(P.342)

 

얼마 전 우리 나라에서 가장 고가의 아파트라는 T. 팰리스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몇 개의 계층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학벌은 보잘 것 없지만  많은 재력을 보유한 부류와 학벌과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갖춘 전문가 집단과 재력과 권력을 소유한 소수의 정치인 집단 등으로 나뉘어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것이다.

과연 계급이 없는 사회가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 나라는 헌법 전문에 밝히고 있듯이 게급과 차별을 부정하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급은 존재한다.

오히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보다 더 확고하게 굳어가고 있다.

우리가 타파해야 할 대상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시간이 걸릴지라도 언젠가 그것은 서서히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우리 나라의 신분제도가 그랬고,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그랬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과녁에 화살을 맞히기는 어려운 법이다.  나의 생명을 후손에게 대물림하듯 계급도 이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  물체에 운동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듯, 생명과 계급에도 관성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보이지 않는 대상과 보이는 대상, 어느 것이 더 깨트리기 쉬운가?



이 책은 작가 자신의 부모 다무와 소누의 인생을 중심으로 하고, 자신과 자신의 딸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소설로서의 감칠맛은 없지만, 삶의 자세와 의미를 생각하는 기회는 충분히 제공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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