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신서 114
와다 하루끼 / 창비 / 1992년 8월
평점 :
절판


 

김일성! 우리에게 있어서 이 이름을 공개적으로 꺼내는 건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북한 괴뢰 도당은 나쁜 놈”이라는 식으로 북조선과 김일성에 대해 가르쳐 왔던 우리 사회는 오랜 기간 동안 북조선과 김일성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았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시절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라는 인물에 관해 그저 악마화된 이미지만 부각했던 우리 사회는 일제시기 그가 만주에서 전개했던 항일무장투쟁을 인정하지 않았었고, 군사정권 시기 어용학자들은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북한 괴뢰 정권의 수괴 김일성이 아니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김일성 가짜설은 대중들에게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졌고, 이런 궤변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탄생한 수구 세력인 뉴라이트가 이어받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뉴라이트와 수구 세력들의 주장과는 달리 북조선의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그 김일성이 맞다. 김일성 가짜설은 1945년 10월 그가 평양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대회에서 모습을 비추면서 떠돌게 된 얘기였다. 당시 민중들은 1937년 보천보 전투를 전개했던 김일성의 얼굴을 알지 못했었기 때문에 생겼던 해프닝이었다. 그 과정에서 해방 후 우익들이 이를 이용 또는 악용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 부장을 지냈던 김형욱이 자신의 저서에서 밝혔듯이,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김일성은 북조선의 김일성이 맞았다. 1980년대부터 남한으로 탈북한 북측의 고위급 인사들도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북조선의 지도자 김일성은 일제시기 무장투쟁을 했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렇다면 왜 뉴라이트와 수구세력들은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부인하거나 축소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는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다. 1912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김일성은 1920년대 중후반부터 반일 활동을 했었다.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의 저서 제국주의론을 읽었던 그는 만주로 갔고,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 일본군대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1932년에는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었다. 김동한을 비롯한 친일변절자들이 설립한 민생단 공작으로 인하여, 숙청의 피바람이 불 때 살아남은 김일성은 1933년 둥닌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인 스중헝을 구하기도 했었다.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일성은 무송현성 전투와 대덕수 전투, 소덕수 전투 그리고 이도강 전투 등을 치르는 등 전투를 계속하면서 장백산지구에 근거지를 형성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기 1달 전인 1937년 6월 김일성은 만주 국경지대에 있는 식민지 조선의 보천보에 잠입하여 진공작전을 개시했었다. 그 과정에서 최소 14명 이상의 일본군 순사와 군인이 죽고 부상당했다. 보천보 전투 이후 김일성 휘하의 부대는 간삼봉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중일전쟁이 격해지면서 일제는 1938년부터 매우 조직적으로 만주에 있는 유격대를 진압하기 시작했고, 김일성 휘하의 부대들은 이른바 100일에 걸친 ‘고난의 행군’을 해야했다. 1939년 10월 일본의 관동군은 또 다른 토벌작전을 개시했는데, 1940년 3월 김일성 휘하의 부대는 홍기하에서 추격해오던 마에다 부대 120명을 매복공격하여 섬멸했다. 이후 김일성과 그의 부대는 만주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넘어갔고, 1942년 8월에는 소련의 붉은 군대 휘하의 제88특별여단에 배속되게 된다. 1940년 10월 소련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김일성이 속해있던 만주의 독립군들은 1942년까지 일제에 맞서 무장투쟁을 했었다. 비록 1945년 8월 소련군이 개시한 만주 진공 작전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김일성을 포함한 북조선의 만주 빨치산파 지도부들은 193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었고, 소련에서 대일전을 준비했었다.

 

이렇듯 김일성은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립운동을 해왔다. 따라서 반공주의에 심취한 수구 세력들에게는 이러한 김일성의 항일 경력이 당연히 부담스러울 테고, 국민들에게 숨기고 싶었을 테며, 이를 왜곡하거나 축소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의 양심적인 역사학자 와다 하루끼는 이 책을 통해서 수구세력들이 왜곡해오거나, 숨기고 싶어했던 김일성 항일투쟁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부분이야말로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을 읽다보면, 항일무장투쟁 당시 군사 지도자 김일성의 지도력이 잘 발휘되는 모습들이 무장투쟁에 같이 참여했던 후세대들의 증언을 통해서 드러난다. 북조선의 지도자 김일성 또한 자신이 지휘하던 병력을 잘 통솔했다. 그랬기에 보천보 전투를 통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질 수 있었고, 일본군의 끊임없는 추격을 피해 ‘고난의 행군’을 이겨낼 수 있었으며, 추격해오던 관동군 측 마에다 부대를 홍기하에서 전멸시킬 수 있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1930년대 중반 김일성은 장백산에 근거지를 형성했었다. 여기서 말한 장백산은 우리가 아는 백두산이다. 즉 김일성은 1930년대 중반에 백두산을 근거지로 항일투쟁을 했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봣을 때, 현재 북측에서 백두산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선 김일성과 만주 빨치산파들이 1948년 북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뒤, 이후 북조선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나온다. 만주 빨치산파 대다수는 북조선에서 주요요직을 차지했고, 북조선 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북조선에서 주요 요직을 차지하게 된 인사들의 인적구성을 보면 대다수가 항일운동을 했다. 1949년 조선 인민군 창설 1주년에 수여된 48명의 군 간부 서훈을 보면 일본사관학교를 나온 자가 한 명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조선 인민군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은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난 지 1년 뒤인 1992년에 출간되었다. 김일성이 사망하기 2년 전에 출판한 이 책을 읽으며 필자는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을 다시 한번 공부할 수 있었고, 그 또한 항일 투사로서의 경력을 당연히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산 김원봉 선생마저 빨갱이로 모는 우리 사회에서 지금 당장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인정하는 것은 절차 및 조건이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작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와다 하루끼나 브루스 커밍스 같은 양심적인 역사학자들이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튼 정말 좋은 책을 읽었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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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이 집권한지 1년 6개월이 넘어가던 2013년 8월 29일 대한민국 언론 조선일보에선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옛 애인으로 알려진 가수 현송월이 음란물을 찍다 처형되었다.”라고 보도했었다. 당시 이를 보도했던 조선일보는 현송월이 찍은 음란물이 중국을 통해 유통됐고, 예술인 일부는 북한에서 금지된 성경책을 소지했다고 알려졌으며, 그들에 대한 공개 처형은 은하수, 왕재산, 모란봉악단 등 주요 예술단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고, 사형수 가족들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는 오보였다. 2014년 5월에 평양에서 열린 제9차 전국예술인대회에 모란봉악단 단장 직함으로 대좌 군복을 입고 나와 연설을 하면서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렸고, 2015년 12월에는 모란봉악단을 이끌고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도착하여 공연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3년 뒤인 2018년 1월 15일 판문점 통일각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예술단 파견을 위한 남북실무접촉에서 북측 대표로 참석하였다. 한 달 뒤인 2018년 2월 6일 현송월은 본인이 이끄는 삼지연관현악단과 만경봉 92호로 다시 남한을 방문하게 되었고, 한국을 방문한 김정남과 김정은 동생 김여정,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 그리고 관람객들 앞에서 직접 올라 ‘백두와 한라는 내 조국’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따라서 2013년 8월 최악의 쓰레기 언론인 조선일보가 보도한 현송월 포르노 유출 총살설은 명백한 오보였다. 이런 류의 북에 대한 오보는 그저 반공밖에 모르는 조선일보와 족벌언론 그리고 수구세력들이 북조선을 악마화하는 데 이용해왔다. 이는 미제와 서방 놈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현송월 오보 사건이 증명하듯이 그들이 보도하는 대부분의 북에 대한 악의적 보도는 대부분 사실이 아니었다. 비단 현송월 총살설 뿐만 아니라, ‘김경의 독살설’,‘리영길 총살설’,‘북 주민 30%가 마약 중독자’,‘기쁨조 속옷 수입설’,‘탈북자 처형설’,‘장성택 벌칸포 처형’ 등 무궁무진하게 많다. 앞으로 우리는 이런 허위 사실을 믿어서도 신뢰해서도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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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김일성을 맹목적으로 찬양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닙니다. 그저 그의 항일운동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한다는 차원에서 집필했습니다.)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양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김성주였고, 아버지와 어머니 둘다 기독교 신자였다. 김성주는 3.1운동 이후 출옥한 그의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1923년부터 1925년 까지 외조부의 교회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1926년 6월 그의 아버지 김형직이 사망했는데, 아버지의 사망을 전후로 해서 학업을 중단하고, ‘타도 제국주의 동맹’을 결성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27년 김성주는 동만주의 대도시 지린에 있는 유원중학에 입학했고, 그 시기 블라디미르 레닌이 집필한 ‘제국주의론’을 읽었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조선공산청년회’에서 활동했는데, 이때 일본 측으로부터 체포당해 투옥되었다. 출옥 후에는 이퉁이나 화이떠 현 등의 농촌지역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청년들과 교제했다. 당시 김일성은 리종락이라는 사람이 결성한 조선혁명군에 참가했는데, 1931년 리종락이 체포되면서 그의 부대가 궤멸되어 버렸고, 체포를 면한 김일성은 그 시기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931년 9월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했다. 중국과 일본간의 전투가 격해지던 1932년 봄 김일성은 안투에서 구국군 유사령부대에 속하는 별동대로서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다. 김일성은 자신이 창설한 부대를 이끌고 통화의 조선혁명군 사령 양세봉을 방문하여 민족주의자의 군대와 연합을 시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김일성은 1933년 2월 왕칭현의 유격근거지 마춘으로 나아가 부대와 함께 왕칭유격대에 합류했고, 왕칭유격대대의 정치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1933년 5월 반민생단 사건이 투쟁이 전개되면서, 많은 조선인 당간부들이 일제가 만든 민생단 단원으로 몰려 체포, 구속 처형당했고, 이후 김일성도 왕칭유격대대에서 해임되었다. 그래도 김일성은 1933년 9월 동닝 전투에서 조선인 유격대 2개 중대를 동원하여 이 도시에 대규모의 공세를 퍼부어, 이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인 스중헝을 구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반민생단 사건 당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35년 김일성이 왕칭으로 다시 돌아온 뒤, 부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 제3단으로 편성되었고, 김일성은 정치위원으로 부활했다. 1936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이 결성되었고, 김일성은 신설된 제3사의 사장에 임명되었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부대는 국내에 침투하여 어느 지역에 대한 습격에 나서는 데 그게 바로 신화화 혹은 전설이 된 보천보 전투다.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부대는 먼저 전화선을 절단한 후 주재소를 공격했다. 그들은 주재소를 습격하여 무기고에서 각종 총기와 탄약 수백 발을 탈취했으며, 동시에 면사무소와 우편소, 농사시험장등 주요 관공서도 공격했다. 보천보가 습격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제 당국은 혜산진 경찰서 경찰대 31명과 국경수비대 60명 그리고 헌병대 8명으로 토벌대를 꾸려 게릴라 부대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로 인한 김일성 부대의 피해도 적잖았다. 사실 보천보 전투에서 주재소를 습격했을 당시 일본 측 전사자는 2명이었는데, 한명은 요리사였고, 다른 한명은 오발로 죽은 두 살짜리 아이였다. 이것과는 별개로 김일성의 부대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면서 전투를 치렀는데, 그 과정에서 일본군 7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렸다. 보천보 전투 이후 동아일보는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김일성은 조선의 영웅으로 등극하였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일제 측의 탄압도 심해졌다. 1938년부터 일본은 매우 조직적으로 만주에 있는 유격대를 진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 김일성의 제2방면군은 흩어져서 이른바 ‘고난의 행군’에 나서야 했고, 1938년 11월부터 1939년 3월 까지 100일 간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리며 행군했다.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을 하고난 지 1달이 지난 시점인 1939년 10월 일본의 관동군은 또 다른 토벌작전을 개시했고, 이번에는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유격대를 막다른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김일성 부대는 1940년 3월 가장 혁혁한 성과를 올리는데 그게 바로 훙치허 전투다. 당시 김일성의 부대를 토벌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의 대장 마에다는 “김일성의 목은 내가 벤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다녔다. 그는 “김일성 부대가 허룽현 훙치허의 일본인 목재소를 습격하여 쌀을 탈취해갔다.”는 신고를 받은 뒤 경찰 및 군부대를 출동시켰는데, 매복해있던 김일성 부대에게 공격당하여 부대가 전멸당한 것이다. 김일성 부대는 훙치허 전투에서 대략 100~120명이나 되는 일본군을 섬멸했고, 김일성의 유격대는 일본군 토벌대 측의 경기관총 5정, 소총 100여 정, 탄알 1만여 발, 무전기 1대를 노획했다.

 

1940년 7월 김일성 부대는 340명 규모의 부대로 확대되었지만, 계속되는 일본군의 토벌 때문에 1940년 10월에는 소부대로 나누어 만주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넘어갔다. 1940년 말에는 사령부를 선두로 부대 전체가 소련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주둔했다. 하지만 소련은 1941년 4월 추측국 일본과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했고, 따라서 소련은 만주에서 일본과 충돌할 가능성을 줄여야 했고, 이 때문에 김일성 측의 유격대는 소련 영내의 야영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42년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에게 패하자 소련은 항일유격대원들을 훈련시킬 계획을 세웠고, 그해 8월 소련은 제88특별여단을 만들었다. 김일성의 부대는 제88특별여단에 편성되었고, 항일전을 치를 날을 소련에서 준비했다. 이때 같이 활동했던 인물로는 최용건, 김책등이 있다.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무조건 항복하자 소련은 그해 7월 대일전쟁에 대비해 정보요원을 차출했고, 김일성과 최용건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들은 만주와 조선에 투입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이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게 선전포고 했고, 만주의 관동군을 공격했다. 소련군은 여러지역들을 해방시켰지만, 정작 김일성 측 부대는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렇게 하여 김일성은 대일전에 제대로 참전해 보지도 못했고, 1945년 9월 19일 김일성은 제88국제여단 조선공작단의 일원으로 원산을 통해 귀국하게 된다.

 

참고문헌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하루끼, 창비, 2014
한국의 레지스탕스 조한성, 생각정원, 2013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현실문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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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정부가 수립된 지 70주년이 넘었다. 현재 한반도는 평화를 향해 가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북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 특히 역사의 경우 그러하다. 가까운 곳에 있지만,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북한의 역사에 대해 필자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다. 최근 북한을 공부하기 위해 김성보 교수가 쓴 북한의 역사를 읽었다.

 

1. 과연 북한은 적화통일론을 포기하지 않았는가?

 

북한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들은 네이버 뉴스 기사에 북한에 대한 기사가 나올 때 마다 북한은 한국을 적화통일 하고 싶어 한다.”라고 주장하며, 반북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북한이라는 나라는 믿을 만한 세력이 아니고, 적화야욕이 가득 찼기에, 현재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남북평화 노선은 적국 북한에게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행위”(그러나 트럼프가 남북 평화를 얘기하면 입을 다문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북한의 역사를 모르고서 하는 일종의 반공주의적인 프로파간다다. 물론 1960년대나 1970년대 까지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잘살았던 것은 맞는 말이다. 따라서 북한은 1968년 김신조를 비롯한 31명을 남한에 침투시켜 박정희를 사살하려 했던 것과, 울진 삼척 지역에 120명을 침투시켰던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미국의 함선을 북한이 나포했던 푸에블루호 사건도 그때 일어났다. 물론 이 이면에는 6.25 전쟁 당시 빨치산 투쟁과 베트남 전쟁에서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투쟁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실패였고, 오히려 역으로 대한민국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게 피해망상적인 반공주의를 강화시키는 역효과를 만들었다. 그 전략에 실패를 맞본 북한은 이 전략을 버리고, 1970년대 들어서 7.4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노선을 수정했다. 소위 대한민국의 극우세력들이 말하는 적화통일노선은 1960년대 북한이 스스로 폐기했다는 얘기다. 거기다 남북한의 경제력과 군사력의 차이는 1980년대 남한이 앞섰다. 즉 현재 대한민국의 반북주의자들이 얘기하는 적화통일론은 1950,60년대 북한을 바라보던 관점에서 바라본 시대역행적인 관점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말했듯이 한국도 변하듯이 북한도 변한다. 따라서 우리는 극우세력들이 주장하는 적화통일론에 1도 공감할 필요가 없다.

 

2. 북한의 경제

 

위에서 상술했듯이 한국전쟁과 1960년대 시점에서 남북한을 놓고 보자면 북한은 분명히 남한보다 잘살았었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폭격을 전쟁 끝날 때 까지 받았던 북한은 전쟁이 끝난 뒤, 경제재건에 앞장섰다. 1950년대 후반에는 천리마 운동이라 하여 경제를 발전시켰고, 그 덕분에 당시 남한의 이승만 박정희 정권 시기의 한국보다 잘살았다.

 

그 뿐만 아니라 1960년대 북한은 군대를 현대화시키는데, 많이 투자했고, 군사적인 면에 있어서 남한을 압도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북한의 경제력이 그리 낙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북한의 경제가 위태로워 진 것은 1980년대부터다. 1980년대의 북한은 경공업과 식량 생산에 있어서, 국가가 제시한 할당량에 못 미치는 생산력을 보여줬다. 그리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을 시작으로 동구권의 몰락으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이 끊겼고, 소련 해체 이후 탄생한 러시아연방의 옐친정권은 북한을 독재정권으로 보며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홍수를 비롯한 자연재해가 덮쳤고, 이로 인한 경제적인 피해는 극심했으며, 국가에서 실시하던 배급제가 끊겨 인민들이 아사하는 일이 일어났다.

 

동유럽 해체 이후 북한이 동유럽이나 소련처럼 붕괴될 거라 믿었던 미국은 북한이 망하도록 고립시켰다. 그 결과 1990년대 북한이 겪어야 했던, 경제난은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김일성 사후 김정일 집권 기간인 1990년대 중후반 북한에서 발생한 대규모 기근 사태로 인하여 200만 명의 북한 인민들이 아사했다.

 

3. 북한의 체제는 사회주의를 따랐는가?

 

북한에 대해 얘기하다보면 항상 나오는 말이 있다. 북한은 과연 사회주의 국가가 맞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일제 패망 이후 소련 군정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북한은 분명 소련식 사회주의 노선을 따랐었다.

 

그러나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을 기점으로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고, 그해 8월에는 몇몇 파벌세력들이 김일성을 축출하려는 시도가 일어나면서부터 북한의 체제는 점차 인민민주주의에서 스탈린주의로 바뀌었고, 더 나아가 김일성은 1960년대 중소분쟁시기 마오이즘의 영향을 받은 주체사상을 만들어 자신의 통치에 이를 적용했다.

 

그 주체사상의 폐해가 극에 달한 것이 1972년 사회주의 헌법을 개정하면서 부터다. 이때부터 북한 체제는 일당권력에서 더 나아가 일인권력을 구축했고, 1980년에는 그의 아들 김정일 까지 가세하여, 권력 세습의 틀을 마련했다. 마오쩌둥과 스탈린 그리고 차우셰스쿠도 해내지 못한 권력 세습을 북한이 해냈다.

 

따라서 북한은 1972년 주체사상이라는 것을 완벽히 적용하면서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버린 거라 볼 수 있으나, 그 이전의 북한사회는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담긴 체제였던 것은 맞는 말이다.

 

4.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최초로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초래한 전쟁이다. 3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3백만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100만 이상의 양측 군인들이 사망했다. 세계최강대국인 미국도 이 전쟁에서 3만 명 이상의 병사가 전사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극우적인 시각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이라는 전쟁을 대한민국을 지킨 전쟁 혹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봄으로써, 전쟁 시기 있었던 많은 것들을 외면하고, 북한에 대한 적대적인 의식을 갖는다.

 

물론 한국전쟁은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고, 전쟁시기 인민군에 의한 학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전쟁을 자유민주수호로 미화하는 세력들은, 북한에 대한 적대의 식을 부추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반북주의로 인하여 감춰진 한국전쟁의 진실은 인민군이 했던 양민학살 보다 대한민국 국군과 극우청년단체에 의하여 벌어진 양민학살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인민군 학살이 1이면 국군의 학살은 6,7이다. 이는 진실화해조사위원회에서 조사한 거라 빼도 박도 못하는 팩트다.),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의 야만적인 폭격으로 100만 이상의 북한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한국전쟁을 대한민국의 관점 즉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관점에서 보다보면, 이러한 것들은 외면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한국전쟁은 분명 북한이 일으킨 것이 명백한 사실이기는 하나, 잔인성이나 비인간성에 있어서 우리 측이 더 했고, 이를 토대로 하여 한국전쟁을 단순히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안된다.

 

5. 미국이냐 소련이냐 분단의 책임에 대하여

 

극우주의자들은 해방 이후 분단의 책임은 미국보다 소련에게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해방 이후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된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를 탄압한 쪽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당시 해방군으로 들어온 소련군은 조만식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자치활동을 인정했고, 자신들이 지원하던 김일성과 협력하도록 했다. 즉 들어오자마자 남에서 활동하던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죄다 해산시켜 버리고, 총독부 행정기관을 그대로 유지하여 친일세력들을 앞세웠던 미국의 처사하고는 달랐다.

 

굳이 소련의 한계를 뽑자면 신의주 학생 사건과 신탁통치 논쟁으로 인하여, 반탁을 주장하던 조만식을 구금해버린 사건일 것이다. 이를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건 소련은 초기에 인민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조만식을 중심으로 모인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하고 협력하고자 했었다.

 

거기다 소련은 한반도를 집어 삼키겠다는 욕심에 차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소련은 동유럽에서의 세력확장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즉 소련의 한반도 적화의 야욕에 차있었다느니 혹은 분단 최대의 원흉이 소련이니 하는 주장은 역사를 왜곡한 주장이다.

 

6. 현재의 북한을 바라보며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은 그의 아들 김정일이 통치했고, 김정일 사망 이후 그의 아들 김정은이 통치하게 되며, 현재까지 북한을 통치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극복하고, 경제를 조금씩 회복해 나갔고, 김정은 정권 들어서면서, 경제성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시골 가면 많이 낙후된 도시들이 있긴 하지만, 최소한의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됐다.

 

발전하고 있는 북한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앞으로의 북한이 얼마나 발전하고, 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는, 북한을 얼 만큼 더 잘 아느냐 에서 시작할 것이다. 따라서 북한을 알아 가는데 있어서 북한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북한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던 필자로선 이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의 몇몇 부분은 필자의 견해하고는 안 맞는 부분도 있긴 했지만, 대체로 저자의 글에 공감하며 읽었다. 이 책을 통해서 북한에 대한 공부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다음에는 작년에 출판된 김정은이라는 책을 읽어보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북한의 역사를 좀 알았으면 한다.

 

북한을 바르게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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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코드
브루스 커밍스 지음, 남성욱 옮김 / 따뜻한손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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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이라크, 북한은 악의 축이다.” 이 말은 미국의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이란, 이라크, 북한을 가리키며 했던 말이다. 북한에게 있어 9.11 테러가 일어나던 2001년과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던 2003년은 큰 위기였다. 비록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과 같은 대규모 아사사태는 끝났지만, 이번엔 국제정세적인 측면에서 미국으로부터 위협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1991년 걸프 전쟁에서의 미군은 막강한 공군력으로 세계에서 손꼽던 이라크 군대를 궤멸시켰고, 2003년 또한 마찬가지로 이라크 정규군은 개전초반에 궤멸 당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 네오콘을 비롯한 극우주의자들은 이라크 전쟁을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라 주장했고, 그들 중 대다수는 북한정권 또한 이라크처럼 없애버리기를 바랬다.

 

미국의 지베계급은 이라크를 침공하고 북한에게 제국주의적인 압박을 가하면서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 위원장을 폭군 혹은 핵폭탄 제조에 미쳐있는 미치광이로 묘사하며,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국가인 냥 언론매체를 통해 묘사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김정일은 스탈린주의자고 독재자이며, 인민들은 생각지도 않은 채 핵폭탄 개발에만 정신이 팔린 미치광이다. 따라서 미국의 지배계급은 북한이라는 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저지르는 제국주의적 대북 고립 정책을 필연적으로 합리화 시켰고, 대한민국의 수구세력들 또한 미제국주의 논리에 편입하여 이를 당연시 여기며 북에 대한 악마화를 진행했다.

 

그렇다면 미국 네오콘과 제국주의자들이 주장과 대한민국 수구세력들이 주장이 과연 북한에 대해 올바르게 본 것일까? 필자의 답변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주장은 단순히 미국 지배계급의 제국주의적인 논리에 편입하여, 지극히 미국 팽창주의 혹은 반공주의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게 바로 브루스 커밍스와 같은 지식인들이 지적하는 포인트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미국과 한국의 극우세력들은 북한에 대한 노골적인 악마화를 해왔고, 북한을 악의 축이라 규정했다. 브루스 커밍스가 쓴 김정일 코드는 그들의 주장이 과연 옳은 지 혹은 북한이라는 나라가 과연 상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비정상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쓴 책이다.

 

커밍스가 내린 결론은 미국 네오콘과 지배계급들이 내세운 논리는 지국중심적인 논리이며, 사실 관계까지 왜곡한 다는 것이다. 즉 미국이 그리도 지적했던 북한의 핵개발과 한반도 관계가 긴장될 시기 북이 외치는 노골적인 선전구호는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전략 전술인 것이다. 이를 깊이 들여다보면 북한의 핵개발에는 그들 입장에서 상식적으로 이해 가능한 이유가 있다. 1991년 소련의 해체와 동유럽 공산권의 해체는 북한에게 있어서 크나큰 경제적인 타격을 입혔다. 당시 사회주의와의 대결에서 승리할 거라 믿었던 미국은 북한 또한 동유럽처럼 망할 거라 예상했었고, 1994년에는 실제로 미국의 클린턴 정부가 북한을 침공할 계획까지 준비했었다. 1991년 걸프전쟁에서 미군에게 궤멸당하는 이라크군의 모습을 보며 북한의 김정일로서는 핵무기 개발의 필요성을 인식했을 것이고, 2000년대 초반 부시가 북한,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이라 주장하면서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을 본 북한으로서는 핵무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즉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북한의 핵개발은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다.

 

이와 동시에 책 김정일 코드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북한의 대공방어체계 및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언급한 것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1950년 한국전쟁 시기 북한은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 까지 미공군의 폭격을 경험했다. 당시 북한이 겪은 트라우마는 대공미사일 방어 시스템의 강화로 표출됐고, 북이 대공시스템과 미사일 개발에 몰두했던 것에서 드러났다. 커밍스의 주장은 김정일의 북한은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군사력 강화를 해왔다는 것이지만, 미국은 경험론에 입각하여 행동한 북한을 전략 전술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부분은 한국전쟁을 단순히 잊혀진 전쟁으로만 치부하는 미국과 미국인들이 시각도 상당히 기여한다.

 

이처럼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방어 체제 강화 및 매체에서 보여주는 김정일 북한의 노골적인 구호는 충분히 전략 전술적으로 이해가능하다. 즉 미국의 네오콘들이 이를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충분히 이성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전략전술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전략전술과 이성의 눈으로만 바라본 저자 커밍스는 북한을 이해만 하는 것일까? 그것 또한 절대 아니다. 브루스 커밍스의 경우 북한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것이지 북에 대한 비판을 삼가지는 않았다. 저자 브루스 커밍스의 말에 따르면 북한이라는 사회가 자국 지도자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 하고, 북한에 놀러오는 관광객들이 보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며, 강제수용소와 같은 곳도 분명 있을 것이라고 한다.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으로 탈출한 일부 탈북자들이 하는 증언들이 신빙성과 사실관계에 있어서 매우 떨어진다고도 주장하지만, 보편적인 기준으로 봐도 북한에는 분명 비민주적인 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브루스 커밍스는 인정한다.

 

이렇듯 브루스 커밍스는 김정일 코드에서 이와 같이 우리가 북한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것들과 적대심으로만 봐서 보지 못했던 것들 혹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바로 잡아준다. 동시에 북한의 문제점에 대해서 균형 있게 지적하는 저자의 시각은 그저 읽는 이를 감탄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책은 2004년에 미국에서 처음 출판 된 책이기에 그어 걸맞은 오판도 있다. 브루스 커밍스는 유교적 전통주의라는 시각에 입각하여 김정일의 후계자는 그의 첫째아들 김정남이 될거라 주장했지만, 알다시피 김정일의 권력을 계승한 자는 그의 막내아들 김정은이다. 물론 그 당시는 김정은이라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고, 설사 커밍스가 김정은의 존재를 어느정도 알았다 하더라도, 동양의 전통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 당시로서는 김정남이라 예상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브루스 커밍스가 책에서 과거 김일성의 항일 경력과 1990년대 이전 북조선의 경제력과 일반 인민들의 생활사를 언급한 것도 굉장히 인상적이다. 당시 북한과 미국간의 갈등을 다루면서, 북한의 역사 문화 군사 정치 경제등을 빠지지 않고 다루는 커밍스의 시각에 감탄할 따름이다.

 

남북관계에 대해 필요이상으로 의심하거나 이를 폄하하는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심을 드러내고 이를 부추긴다. 분명한 것은 이는 그저 반공주의와 반북주의에서 나타나는 막연한 의심인 경우가 많다. 브루스 커밍스의 김정일 코드는 당시 많은 미국인들과 한국의 수구주의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많은 해답을 줄 것 이다. 2018년 남북고위급회담 이후 점차 좋아지고 있는 이 시기 이 책을 읽은 것은 시기적절했던 것 같다. 앞으로 더 나은 남북관계가 만들어지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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