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간의 냉전시기 대규모의 열전이었던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북한과 베트남이 미국에 맞서 전쟁을 치른 사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를 단순히 ‘자유민주주의’라는 국한된 개념으로만 접근하는 한국사회에서 당시 북한과 베트남의 국제연대는 객관적인 평가를 하기 쉽지 않은 구조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관계를 따지고 보면 이는 상당히 일리가 있으며, 반식민지투쟁이라는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전략은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막고 친미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 베트남에서 식민지 전쟁을 치르고 있던 프랑스를 지원하여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것이었다.
(호치민과 김일성, 1950년대 호치민과 김일성은 직접만나 반제국주의 투쟁의 기치를 다졌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이 개입한 이 전쟁(한국전쟁, 중국-대만 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들은 엄밀히 따지자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주의적 모순에서 비롯된 전쟁이었으며, 미국의 적대세력들은 엄밀히 따지자면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이라는 이름으로 남한의 이승만 정부를 지원했던 미국과 프랑스가 베트남에서는 호치민의 독립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하기 위한 식민지 전쟁을 치렀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1년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은 국제여성동맹 조직을 통해 북에 조사단을 파견했었다. 또한 북한은 프랑스 식민주의에 맞선 호치민의 투쟁에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연대를 표명했으며, 베트남의 방북조사단 활동에 감사를 보냈었다. 1952년에는 베트남은 조선전쟁(한국전쟁) 기념대회를 열어 북의 입장을 지지했으며, 한반도에서의 미제국주의 군대 철수를 주장했었다. 또한 호치민은 1950년대 당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한국전쟁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었다.
“조선반도에서의 경험이 이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지요. 미국과 미국을 추종하는 40개국이 모두 힘을 합쳤지만, 정작 그들이 침략한 국가에 눌려 패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중략) 한마디로 반동 제국주의 진영이 패배하고 평화와 민주주의 진영이 기필코 승리할 것입니다. 베트남은 민주 진영에 속해 있으며, 현재 미국이 이끄는 반민주진영에 대항하는 반제국주의의 요새입니다.”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평전에서도 이러한 맥락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쇼트에 따르면 “중국의 마오쩌둥은 동료들에게 만약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승리하면 침략 욕구가 더 커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으며, 어쩌면 미 공군이 만주와 중국의 동부 해안 도시를 폭격할 수도 있고, 타이완의 국민당 군대가 중국 본토로 상륙작전을 시행할 가능성도 있으며, 심지어 호찌민과 싸우고 있는 프랑스군이 미군과 합동으로 중국 남부와 베트남 국경 지역에서 침공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라고 책에서 언급했다. 마오쩌둥의 이러한 우려는 당시 국제적 정세에서 중국이 만주 국경일대에서는 북한을 돕고 운남성이 있는 남부에서는 베트민을 도왔다는 사실에서 전혀 틀리지 않은 우려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에 파병됐던 북한의 공군 조종사들)
1954년 호치민의 혁명군대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 최정예 부대 11,000명을 포로로 붙잡으면서 100년간의 식민통치를 종결시키는 위대한 혁명사적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 위대한 승리 이후 제국주의적 패권과 망상에 휩싸여 있던 미국이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단시키며, 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이라는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세웠다. 이것을 결국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우리가 흔히 아는 베트남 전쟁으로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은 북베트남의 호치민 정부 편에 섰으며, 1957년 7월에는 호치민 주석이 북한의 수도 평양을 방문했고, 1958년 11월에는 김일성 주석이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방문하며 양국의 회담을 가졌었다. 그리고 이런 친선관계를 통해 두 국가는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과제를 통해 인민의 단결과 우애를 강조했다고 할 수 있었다.
1964년 미국의 통킹만 사건 공작으로 베트남을 침략하자 북한은 반미 반제국주의 투쟁에 지지와 연대를 보냈으며, 소수의 공군병력과 군수물자를 보냈다. 북한은 베트남에 무기 10만 정과 군복 100만 벌 등의 군수물자를 호치민 정부에게 제공했고, 1973년까지 대략 4,180만 루블의 경제원조까지 했다. 그리고 대략 200명 정도의 병력을 보냈는데, 이 중 87명은 공군 조종사였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북한 조종사들 중 14명이 전사했고, 26대의 미군 전투기를 격추시켰다. 당시 전사한 북한 공군 조종사의 묘지는 현재 삼성과 같은 한국 대기업공장들이 들어가 있는 박장성에 있다.
(베트남 박장성에 있는 북한 공군 조종사 묘비, 이는 현재도 베트남에 있으며 2019년 북미 정상회담때 국내에서도 여러 채널이나 뉴스를 통해 보도된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전쟁에서의 북한과 베트남의 국제연대에 대해 이야기 했다. 냉전이라는 흐름에서 반식민지 투쟁과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양국이 연대와 지지를 표명했다는 사실에서, 이들의 투쟁은 식민지 해방 투쟁사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북한의 북베트남 지원은 미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맞선 국제연대의 일환이었으며, 역사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 분명히 부정할 수 없는 일련의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호치민 평전』, 윌리엄J.듀이커, 정영목(역), 푸른숲, 2003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호치민, 윌든벨로(옮김), 배기현(서문), 프레시안북, 2009
『마오쩌둥 2』, 필립 쇼트, 양현수(역), 교양인, 2019
『냉전의 마녀들』, 김태우, 창비, 202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김동원 안광획 이정훈(공저), 4.27시대, 2021